- 일본의 음식문화 -* 목 차Ⅰ. 서론··························································· 11. 주제 선택의 이유················································ 1Ⅱ. 본론··························································· 11. 일본 음식의 특징················································ 11) 전반적 특징·································································· 12) 지리적 특징·································································· 3(1) 관동음식(2) 관서음식2. 일본 음식의 역사················································ 41) 전반적 역사·································································· 42) 시대별 역사·································································· 63) 숟가락과 젓가락······························································ 73. 일본의 식사예절················································· 71) 젓가락 사용방법······························································ 92) 술을 먹을 때································································· 103) 음식을 덜어먹을 때······································신분에 따라서 그릇이 달라지는 도구의 계급제도가 생겨나 귀족은 청동기, 은기, 옻기 등을 사용하였다. 이 무렵은 헤이안지다이(平安時代)라고 불리는 귀족 지배의 시기였다. 당시의 고고덴노우가 요리를 좋아하여 요리 연구를 후세에 전해 주었는데, 이것이 <시죠쥬우나곤후지와라죠우신산이교우>이다. 고고덴노우는 현대에 전해져 오는 요리도의 四條類의 開祖로서 요리의 신으로 일컬어지고 있다.이와 같이 요리의 연구는 비약적인 발전을 보여 왔지만, 귀족사외의 식사가 아침, 저녁 두끼로 형식화됐고, 이와 함께 살생금지령 등 포유동물의 식육금지로 인하여 영양의 균형이 맞지 않아 영양실조와 같은 상태가 생겨나게 되었다.이때에 지금까지의 공가(公家) 귀족의 사치로 여겨져 왔던 형식적인 식사 풍습 등을 혁파하는 질실강건(質實剛健)을 첫째로 하는 무가정신(武家精神)의 경향이 다시 대두되었다. 즉, 무사는 항상 심신을 단련하여 전시에 대비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에 사냥 등이 부활되었고, 부식으로 고기도 먹을 수 있도록 식사 관습이 바뀌었다. 또한 삼식주의(三食主義)의 관습도 정착되어 무가사회의 시대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또, 대륙문화, 즉 중국과 조선과의 교류도 활발해짐에 따라 스님들에 의하여 국내에 선종이 확산된 것을 계기로 사찰에서는 정진요리와 보차요리가 생기게 되었다.두부등이 처음 만들어진 것이 이때쯤이며, 또한 차, 점심, 짜노고 등도 볼 수 있게 되었다. 한편 이러한 사화 상황 속에서도 귀족과 공가의 향응에 있는 선(膳)에는 변화가 보이지 않고 계속 지속되었다. 1338년, 바투후가 가마쿠라에서 교토 무로마치로 옮겨 무가와 공가의 교류가 성행하고 동산문화의 꽃을 피우게 되었다.이 시대는 우아한 생활을 과시하는 사회가 되어 요리의 세계에서도 사조류, 대초류, 진사유, 그리고 생간류 등의 다양한 세력들이 형성됐다. 각파는 요리 만드는 법을 포함하여 조리 기술, 자르는 방법에 기료를 집중시킨 고도의 기술을 개발하는 등 경쟁이 심화됨으로썬 일본의 요리기술과 조리법이 두드러지게 진보하는 요 멀리 잇는 그릇을 가까이 당긴다.★와타바시 : 젓가락을 쉬게 할 때 밥공기 등의 위에 건네 둔다.★타타카바시 : 그릇을 두드려 사람을 부르거나 재촉한다.★마요이바시 : 요리를 잡는데 금방 다른 요일로 바꾼다。★사구리바시:국물 등을 섞어 알맹이를 탐색한다.★우쯔리바시:하나의 요리를 먹은 후 즉시 다른 요리를 먹는다。★오쿄바시:두개 합쳐서 숟가락과 같이 음식을 퍼낸다。.4. 일본음식의 종류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일상적인 식사는 밥과 반찬으로 구성된다고 한다. 전통적으로 가정에서 먹는 아침 밥상에는 흰밥에 미소시루 그리고 반찬으로는 구운 생선이 있는데 이처럼 일본식 아침식사를 하는데 있어서는 된장국과 생선은 빼놓지 않는다고 한다. 이 밖에도 츠케모노, 맛 김(한 장을 여덟 조각 내어 봉지에 들어 있음)등 일본의 반찬은 아주 간단하며 날달걀이나 달걀말이 또는 낫토우 등을 먹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인터넷에서 어떤 분이 일본에서 아침식사를 하고 난 후 글을 참고 하자면 약간 진 쌀밥에 생계란, 미소시루, 생선 한 점, 매실 말린 조각 등이 언뜻 보면 볼품없는 식사이지만 진밥에 계란을 풀어 미소시루와 오븐에 안성맞춤으로 구어 진 생선을 먹고 난 후 마지막으로 매실을 저린 우메보시를 한 조각으로 마무리하고 나니 입안과 속이 말끔할 수 없었다고 한다.1) 형식적 분류(1)본선요리 : 혼센요리. 관혼상제의 경우에 정식으로 차리는 의식요리. 식단의 기본은 일즙삼채, 이즙오채, 삼즙칠채 등일본 옛날 일본 전통 요리의 기본을 이루는 본선요리는 가마쿠라시대의 무사계층에서 행하던 식사예절이 정착된 것으로 1즙3채(一汁三彩),2즙5채(二汁五彩),3즙7채(三汁七菜)등의 메뉴를 기본으로 하는데, 오늘날에는 주로 명절의 특별음식이나 혼례 등의 행사에서 볼 수 있다. 먼저 차려야 할 상은 검은색이나 밤색으로서 보통 상의 숫자가 다섯상(五膳)이 정식의 숫자이며, 제1의 상을 본선(本膳)이라고 하고, 제2의 상이 (二의 膳),(三의 膳),(?의 膳),(五의 膳)의 이름이 붙어 있다. 또한 한 종류 돌아보고, 생활을 지탱해 준 모든 것에 감사의 기분을 담아, 카가미모치를 장식한다. 부엌이나, 현관, 자신의 방이나 차, 사업자는 사무실 등, 생각하면 카가미모치를 장식하는 곳은 많다.(2)소바 (메밀국수)(그림 1-5) 소바새해 전날 밤, 일본 사람들은 밤참으로 '소바' 라고 하는 메밀국수를 먹는다. 가족들이 '고다스'라는 덮개를 씌운 테이블 모양의 전기난로 주위에 둘러앉아 제야의 종소리를 들으며 먹는 메밀국수는 별미중의 별미로 아주 인기 있는 음식이다. 섣달 그믐날 밤에 먹는 도시코시소바는 가늘고 긴 소바처럼 자신과 가족이 편안하게 장수하기를 빌려는 것이라든가, 비교적 쉽게 끊을 수 있다는 점에서 지난 한해를 잊고 새출발을 다짐하기 위한 것이라는 등의 해석이 분분하다. 그러나 이는 나중에 덧붙여진 의미일 뿐 원래는 에도시대 귀금속 세공업자들이 메밀가루를 이용해 금가루를 회수했던 데서 메밀이 금, 즉 재물을 묻혀들인다는 연상에 따른 풍습이었다.(3)오세치요리 "お節料理"(그림 1-6) 오세치 요리오세치요리를 한자로 쓰면『御節』이라는 글자가 된다.쇼가칸(小學館)발행의 大辭泉이라고 하는 사전으로 『御節』을 조사해보면 이러한 설명이 써있다. "설날에 특별히 만드는 요리나 공양의 떡, 정월이나 1년 중의 다섯 명절 등의 명절의 일" 이것으로부터 알 수 있듯이 『오세치』=『정월요리(正月料理)』의 의미는 아닌 것 같다. '오세치요리'라고 하는 말이 일본 내에서 특히 설날에 먹는 요리를 가리키는 표준어가 된 것은 「食の文化史(著:大塚滋/中公新書)」에 의하면 제2차 세계대전 후부터라고 쓰여져 있다. 백화점에서 설날요리의 상자포장을 팔기 시작했을 때 '오세치요리'라는 말을 사용했기 때문에 전 일본에『오세치』=『정월요리』라는 이미지가 퍼졌던 것이라고 한다.① 오세치의 어원"오세치"란 고대 조정에서 사용되었던 '오세치쿠(御節供)'의 약어이다. 오세치쿠라고 하는 것은 조정의 명절에 행해지는 연회, 세치에(節會)자리에서 행해지는 진수성찬이다. 이 명절에 신에게 올리거나 손님에게 나했으며, 스시의 크기는 먹기에 알맞은 크기로 발전했다고 한다. 동경은 해안에 위치해 있어서 풍부한 생선과 어패류를 공급받을 수 있었는데, 니기리즈시로 불리는 지금의 스시 형태(한입에 먹기 알맞은 사이즈의 밥 위에 생선을 올려놓는 방법)를 만들어 내었다.최초의 스시는 요즘 우리가 먹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고 한다. 어패류를 쌀이나 조 속에 담가 땅속에 묻는 방법 등으로 자연 발효시켜 부패를 멈추게 하는 저장법의 하나였으며, 가자미에 쌀밥을 섞어 만드는 함경도지방의 향토 음식인 가자미 식혜와 비슷한 술안주나 반찬이었다고 한다. 스시가 오늘날의 모습을 갖춘 것은 15, 16세기경이며, 볶음밥 형태에서 밥을 짓는 형태로 바뀐 것은 식초가 널리 쓰이면서부터이다. 스시만 전문적으로 파는 식당이 생긴 것은 1810년경이고, 스시가 한국에 건너온 것은 약 100여년 전 이라고 한다. 일본에서는 스시만 전문적으로 파는 식당이 많지만 한국에서는 보통 일식집에 가야 맛볼 수 있다. 스시의 형태는 경제가 발전하면서 전체적으로 점점 작아졌지만 생선 크기는 상대적으로 커졌다. 경제적 수준이 높아지면서 생선의 길이는 스시 보다 약간 더 길어졌는데, 이는 손님이 생선을 터 크게 해달라고 요구했기 때문이다. 현대식 스시는 밥은 적게 하고, 생선은 크게 해서 생선과 밥의 길이가 6대 4로 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형태라고 한다. 밥의 모양새는 역 마름모꼴에서 유선형 마름모꼴로 바뀌었는데, 밥알이 300알 이하면 역마름모 꼴을 만들기 힘들기 때문이라고 한다.② 스시의 종류스시는 종류도 가지각색인 만큼, 색, 맛, 향기도 가지각색이고, 그 수가 무려 약 50여종을 넘는다고 한다. 스시의 종류를 보면, 참치, 조개, 오징어, 연어알, 성게알, 생새우, 양념장어, 계란말이 등등 그 맛과 색이 전부 다르다.★ 니기리스시스시에도 여러가지가 있으나, 대표적인 것은 우리가 보통 알고 있는 스시, 즉 동경 지방의 스시로 니기리즈시라고 한다. 니기리는 손으로 쥔다는 뜻으로 빠른 손놀림으로 밥알을 쥐고 와사비를는다.
Jsp 특징 및 작동방식목차기존 기술들의 단점 Jsp(java server page)란? JSP와 ASP,PHP,CGI의 비교 Jsp 스크립트 예제1.기존 기술들의 단점Html의 한계 -사용자의 요청에 의해 이미 작성되어진 페이지만을 일방적으로 전송 -데이터 베이스와의 연동 불가 -지속적인 연결이 이루어지지 않음1.기존 기술들의 단점(계속)CGI의 활용과 한계 -데이터베이스와 연동가능 -사용자입력 정보에 따른 동적 결과 생성 -사용자의 요청에 대해 각각의 프로세스 생성. -접속자가 많을수록 서버에 부담이 늘어남.1.기존 기술들의 단점(계속)서블릿의 활용과 한계 -자바기반의 풍부한 API사용 가능 객체지향적으로 작성 -멀티스레드 방식의 사용 -표현부와 구현부가 분리되지 않음2.Jsp(java server page)란?자바를 기반으로 한 웹 사이트 개발 기술 -자바 가상머신이 설치된 어떤 운영체제에서도 실행가능 -자바기반의 API사용, 객체지향 프로그래밍, 멀티스레드 -표현부와 구현부의 분리 -재사용 가능3.JSP와 ASP,PHP,CGI의 비교ASP : IIS, NT/Windows 환경에서만 작동하며 웹서버는 IIS, 데이터베이스는 Ms-SQL을 사용할 경우가 최적화된 환경이다. PHP : 어떤 환경에서나 동작하지만, Apache웹서버와 MySQL을 사용할 경우가 가장 최적화된 환경이다. CGI : 모든 서버에서 기본적으로 지원하므로, 모든 환경 에서 동작이 가능하다. Jsp : 모든 환경에서 동작하고, 특별히 최적화되는 환경이 없다.3.JSP와 ASP,PHP,CGI의 비교(계속)플랫폼 독립성 Java(Jsp) = CGI = PHP ASP 프로세서의 처리 속도 PHP Java(Jsp) CGI ASP 시스템 자원에 관한 효율성 Java(Jsp) PHP ASP CGI4.Jsp 스크립트선언부 - 형식 %! //변수 또는 메소드를 선언하는 문장들 % %! private int num = 0: double getDistance() { return distance: } %4.Jsp 스크립트표현식 -형식 %= //변수, 메소드, 특정객체, 수식등 % %! string s = “This is a test”: int I = 1000: Point2D.Double myPoint = new Point2D.Double(5.0, 10.0): % %= s % %= I % %= myPoint %4.Jsp 스크립트스크립트릿 -형식 % //선언부와 표현식을 제외한 모든 자바코드 % % int I = 0: for ( I =0 : i 5 : i++) { % // 반복되는 문장이 들어감. % } %5.예제5.예제If(조건문) Switch…case For(반복문) While, do while5.예제5.예제(계속)주석처리 - !- - 내용주석- - - %- - jsp 주석- - - % // 스크립트 언어 주석(한줄짜리) /* 스크립트 언어 주석 */ %{nameOfApplication=Show}
Ⅰ. 교재 및 단원명1.교재? 교과서 : 고등학교 화학 Ⅰ? 저자 및 출판사 : 김희준 외 천재교육(주)2. 단원명대단원 : 1.주변의 물질중단원 : (3). 금속과 그 이용소단원 : ⑤. 금속의 반응성은 서로 어떻게 다를까?Ⅱ. 단원의 개관금속은 인류 문명의 역사와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어떤 금속을 누가 먼저 사용했는지에 따라 국력이 결정되기도 하였다. 어떤 금속은 아주 오래 전부터 사용되었고, 어떤 금속은 최근에 들어서야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금속은 다른 물질에 비해 강하고 단단하며 가공하기 쉬워 석기 시대 이후로 인간의 문명을 좌우하는 중요한 물질로 사용되어 왔다. 그러나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금속 자원의 양은 한정되어 있다. 따라서 금속 광산이 모두 고갈되기 전에 재활용 방법과 대체 자원 활용 방법을 찾아야 할 것이다.이 장에서는, 인류의 현대화에 큰 역학을 했던 여러 가지 금속들에 대하여 알아보고, 금속의 특성과 활용 사례 및 중금속 오염에 대해서 알아보자.Ⅲ. 단원목표1) 금속의 일반적 성질을 알고, 실생활의 이용 사례를 금속의 특성과 관련지어 이해한다.2) 금속 원소의 발견을 알고, 알칼리 금속의 공통성과 차이점을 주기율과 관련을 지으며, 할로겐의 주기성을 설명한다.3) 금속의 반응성 차이를 통해 앙금 생성 반응을 설명하고, 산화?환원의 개념을 이해한다.4) 금속의 부식 방지의 원리를 산화?환원의 개념으로 이해하고, 합금의 유용성을 안다.5) 중금속이 들어 있는 생활용품이 실생활과 인체에 미치는 영향을 알고, 그 대처 방안에 대하여 조사한다.Ⅳ. 단원 지도 계획(중단원)중단원소단원학 습 내 용차시비고(3). 금속과 그 이용①우리주변에는어떤 금속이 있는가?- 지각을 구성하는 금속들- 금, 구리, 철, 알루미늄의 이용- 그 밖에 중요한 금속들1/7②알칼리 금속이란 무엇일까?- 알칼리 금속의 특징- 알칼리 금속의 이용2/7③주기율이란 무엇일까?- 원소를 분류하고 규칙성을 찾아보자.- 할로겐 원소의 반응성비교3/7④금속은 어떤 성질을 가지고 있을까?- 금속 결합- 자유 전자4/7⑤금속의 반응성은 서로 어떻게 다를까?- 금속의 반응성 비교- 금속끼리의 경쟁- 산화, 환원반응5/7본시⑥금속이 녹스는 이유는 무엇일까?- 금속의 부식- 철의 부식 방지법6/7⑦무서운 금속들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중금속의 이용과 오염- 납, 수은, 비소, 카드뮴의 이용과 오염7/7Ⅴ. 본시학습지도안단원금속과 그 이용본시제제금속의 반응성은 서로 어떻게 다를까?차시5/7학습목표1. 금속의 반응성 차이를 통해 앙금 생성 반응을 설명할 수 있다.2. 산화, 환원의 개념을 이해한다.단계학습내용교사 - 학습활동시간비고교 사학생도입전시간학습요약학습목표제시학습동기유발★. 전 시간에 배운 금속의 특징과 성질에 대해서 말하고, 내용을 상기시킨다.★. 학습 목표를 제시한다.★. 전 시간 요약을 통한 학습을 상기하며, 오늘 실험할 금속의 반응성을 제시한다.금속의 특징에 대해서 생각해본다.칠판을 보면서 학습목표를 숙지한다.5분전개실험내용제시★. 금속이 반응성을 갖는 다는 것과, 금속 에서의 반응성의 의미를 알려준다.★. 금속의 반응성은 서로 경쟁한다는 것을 알리고, 그림 자료를 통해 금속이 용액 내 에서 경쟁하는 모습을 그릴 수 있도록 한 다.★. 오늘 배울 실험에 대한 전반적인 내용을 제시하고 앞서 배운 금속의 반응성을 토 대로 결과가 어떻게 될 것인지 어떻게 예 측되는 지 질문한다.★. 본격적인 실험에 앞서 실험방법과 실험 기구 사용 시 유의점을 제시한다.금속의 반응성을 이해한다.그림을 보며 이해한다.질문에 답한다.실험 전에 앞서 실험방법을 숙지한다.10분ppt자료실험시작 및 유 의점 제시★. 실험기구를 나눠준다. 실험시작.★. 순서에 맞추어 학생들이 실험할 수 있도 록 지도한다.★. 조를 돌아다니며, 실험이 잘 이루어지고 있는 지 확인하고, 주의사항에 대해서 다 시 언급한다.★. 실험이 끝나고, 실험에서 본 결과가 실 험 전 예상한 것과 같은 지 물어본다.★. 지금까지 실험에 결과를 통해 산화, 환 원반응을 정의한다.실험을 시작한다.실험방법과 유의점을 생각하며, 실험에 임한다.실험을 마무리하고, 실험결과에 대해서 대답한다.25분실험기구 및 print정리및평가실험정리형성평가차시예고★. 실험을 정리하며 오늘 배운 내용을 질문 을 통해 학생들에게 상기시킨다.
1.동학농민운동녹두장군 전봉준 과 함께 한 동학농민운동은 이 땅에 인내천 사상이라는 평등사상을 처음으로 제창한 운동이라고 볼 수 있다.동학 농민운동은 惑世誣民이라는 미명아래 제 1대 교주가 처형당하지만, 당시 혼탁한 세상을 바로잡고 농민에게 새 희망과 길을 제시해 주었던 종교사상이자 농민운동이라 볼 수 있고, 동학농민운동과 그 이전의 농민운동과 근본 차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은 동학농민운동은 그 이전의 운동과는 차별되는 종교적 사상과 내부적 개혁을 요구하는 단계에서 차이점을 둘 수 있고, 인내천 사상이라는 평등사상 또한 과도기적 성격을 띄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즉 당시의 시대에서 평등사상을 내부적으로 인지하고 유포하려는 시도는 엄청난 사건이라고 볼 수 있고, 이러한 내부적 움직임은 조선이라는 나라가 근대화를 혼자의 힘으로 단행할 수 있었다는 것을 단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증거로도 볼 수 있다.그렇다면 동학농민운동의 시발점은 어디이고, 어떻게 시작했으며, 또 어떻게 끝을 내렸는가 하는, 이러한 문제를 살펴봄으로써 우리는 그 당시의 사회를 알 수 있고, 일본이 주장하는 문명 개화론 이라는 식민사관 또한 우리가 당당하게 부정할 수 있는 증거로 입증시킬 수 있을 것이다.19세기 말의 조선왕조는 그 출발부터 안고 있는 구조적 모순과 함께 안팎으로 직면한 심각한 위기 때문에 말기적 중세에 허덕이고 있었다. 즉, 매관매직, 탐관오리의 횡행을 초래한 관료기강의 문란, 그리고 봉건적 신분체제의 파탄은 잔반계층·서얼·상민·공사노비 등 사회불만계층을 형성하여 이들이 동학농민군세력에 결집되는 원인을 만들었다. 이와같이,정치기강의 문란과 사회적 불안은 한편 민중의 동요를 가져와, 그것은 결과적으로 화적의 횡행과 민란의 재연으로 나타났는데, 삼남일대에서 가장 심하였고 나아가 동학농민군의 봉기와 연결되었다.또한, 19세기 후반 조선봉건사회는 농업생산력 및 상품화폐경제의 발달에 따라 지주제가 확대되고, 농촌사회는 지주·부농·소농·빈농·임노동자라는 다양한 계층으로 분화되고 있었다. 특히 지주제의 모순과 봉건적 수취체제의 제반 모순에 따라 직접생산자인 농민에게 부담이 가중되고 있었다. 이에 따라 1860년대부터 군현을 단위로 한 농민항쟁이 광범위하게 일어났다. 이러한 농민항쟁에 대해 정부는 봉건지배체제의 두 축인 지주제와 신분제의 모순을 개혁하지 않고 단지 현상적인 부세제도의 부분적인 수정을 통하여 이를 무마하려 했다.1894년 1월 고부(古阜)농민봉기로부터 시작된 "동학농민혁명" 은 한국의 근?현대사를 결정지은 역사의 일대 사건이자 봉건적 사회질서를 타파하고 외세의 침략을 물리치기 위해 반 봉건?반제의 기치를 높이 세운 우리 역사상 가장 최대이자 최초의 민중 항쟁이었다.또한 동학농민혁명은 현대에 전개된 여러 민주화 운동, 즉 4.19 의거?5.18 광주민주화항쟁 등의 정신적 본령을 이룬다. 그런 점에서 농민혁명은 끝내 실패로 마무리된 사건으로만 평가할 수 없다. 이 사건은 사회의 변화와 발전에 대한 대중적 요구가 제대로 수용되지 못할 때, 부패한 지배세력이나 노골적인 외세침략에 대한 대중적 비판과 저항이 미약할 때, 그 공동체가 어떤 처지로 전락하는지를 현재의 우리에게 생생하게 보여 주는 경험이자 역사로 남아 있다.2.독립협회한국인들은 아관파천 후에 일본의 침략을 견제하는 데는 일단 성공했으나, 이제는 새로이 강화된 제정 러시아의 침략시도를 다시 방어해야 하는 새로운 과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 머무는 동안에 제정 러시아, 미국, 일본, 독일, 프랑스, 영국 등 열강들이 광산, 철도, 전선, 삼림, 어장 등 각종 귀중한 이권을 빼앗아 갔다. 또 고종의 전제권에 의하여 다수의 이권이 양여되었으므로, 한국인들은 열강의 고삐 풀린 이권침탈은 긴급히 저지하고 자주독립을 강화해야 할 절실하고 긴급한 필요에 직면하게 되었다. 한국인들은 우선 국왕이 하루속히 러시아 공사관으로부터 환궁하여 나라의 자위력을 갖추고 자주독립을 확고히 세우며, 당면한 여러 과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개혁정책을 단행할 것을 요청하였다.이에 조선 말기 개혁파들은 아관파천 직후 이 과제에 대응하기 위하여 1896년 4월 7일 독립신문을 창간하고, 뒤이어 1896년 7월 2일에는 독립협회를 창립하였다. 서재필 등 독립협회의 창립을 주도한 세력은, 갑오개혁의 타율성과 아관파천 후의 러시아 등 열강의 침략정책에 대항하여 외세에 편승한 집권층에 대해서 비판적이었던 재야 개화파들이었다.당시 한국민족의 개혁파들은 사대 굴욕외교의 상징물인 영은문을 철거한 자리에 자주독립의 상징물로서 독립문을 건립하여 당시뿐만 아니라 자손만대에 ‘독립’을 다짐하려고 하였다. 이를 위해서 독립문은 국가예산이나 부호의 거액 기부가 아니라 백성들의 자발적 성금을 모아 건립해야 한다고 그들은 생각하였다.그리하여 독립협회가 중심이 되어 수 많은 국민들이 성금을 모아서 1896년 11월 21일 독립문 기공식을 거행한 다음, 만 1년 후인 1897년 11월 20일 독립문 건립을 완공하게 되었다.또한, 독립협회는 국민 주권을 주장하고, 종래 피지배자로만 간주되어 오던 국민이 도리어 나라의 주인이고 종래 주인의 행세를 해온 라고 하여 종래 국민을 지배하던 관인을 국민의 공의(公儀)으로서의 의 위치로 역전시켜 설정하였다. 독립협회는 나라의 주인인 국민을 , 인 관인이 지배하는 당시의 조선의 현실은 거꾸로 된 잘못된 것이라고 신랄히 비판하였다. 그들은 군사 문제를 다룰 때에도 군대는 백성을 위하고자 하니까 임금께 충성하는 것이라고 간접적 표현으로 과 을 언제나 와 보다 상위에 설정하였다. 독립협회가 이고 고 설명하면서 관인과 순검들은 모두 백성의 종과 사환이오, 군주도 백성의 하위에서 존재하는 것이라고 주장한 것은 당시의 국민과 관인들에게는 실로 충격적인 사상이었다.이에따라 독립협회는 당시 큰 문제의 하나이었던 지방 정치 체제도 주인인 농민에게 삼정권(參政權)을 주어 일반 선거제도에 의해서 관찰사, 수령등 지방관을 그 지방 인민의 투표에 의하여 선출케 하자고 제의하였다. 독립협회가 지방 정치에도 민주적 선거 제도를 도입하며 인민의 투표에 의해서 지방관을 선출케 하자고 제안한 것은 비록 실현되지는 않았지만 제안 그 자체만으로서도 한국 역사상 최초의 획기적 제안이었다.아울러 독립협회는 1898년 4월 30일자 『독립신문』에 반드시 을 실현해야 하는 이유와 이 국민뿐만 아니라 정부와 황제와 대한제국 전체에 큰 이익과 나라의 자주 부강을 가져오게 하는 핵심적 개혁임을 설명하는 다음과 같은 요지의 장문의 논설을 게재하고 독립협회의 목표의 하나가 의회 설립을 통한 완전한 대의 정부의 수립임을 명백히 천명하였다. 독립협회가 이상과 같이 의회 설립을 강력히 주창한 것은 국민의 자유 민권을 실현하여 국가를 국민의 국가로 만들려는 목적과 함께 의회의 설립을 통하여 국가의 자주 독립을 수호하는 국민의 제도로 동시에 만들려고 한 원대한 구상이 동시에 뒷받침되어 있었다.3. 3.1운동1910년대는 일제가 조선을 철저하게 식민지로서 수탈하기 위해 행정·경제·사회·문화적 기반을 마련해가던 시기였다. 특히 1910년부터 18년까지 진행된 토지조사사업은 근대적 토지소유권을 확립한다는 명목하에 광대한 구왕실 토지와 공유지를 총독부의 수중에 집중시켰을 뿐만 아니라,한편으로는 지주의 소유권을 승인하고 다수 소작인의 경작권을 전면 부정함으로써 수많은 농민의 몰락을 초래하였다. 이는 총독부 자신이 거대한 지주로서 조선 지주들의 이익을 일정 정도 보장하여 지주세력을 친일화하고, 일본인의 자유로운 토지침탈을 마련해주며, 궁극적으로는 조선을 일본의 값싼 식량공급지로 만들기 위한 정지작업이었다. 일체의 정치·문화·군사적 활동을 금하고 공포분위기 속에서 조선 민중들을 노예화시키기 위해 그들이 사용했던 것은 무자비한 폭력, 즉 무단통치였다.3.1운동은 이러한 지배와 수탈에 항거해 일어난 전민족적인 식민지 해방 운동이었다. 뿐만 아니라 새로운 독립국가의 형태로서 공화정을 제시하여 근대적 국가상을 제시한 것은 과거 민족운동보다 한 걸음 더 전진한 것이었다. 초기에 종교인·지식인·학생들이 주도하던 비폭력적 운동이 점차 노동자·농민에게 주도권이 넘어가면서 폭력적 저항으로 발전해간 것은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1910년 이래 일제수탈의 최대의 피해자인 농민과 노동자들의 진출은 다가올 20년대 이후의 민족해방운동의 가장 강력한 투쟁주체의 등장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이들의 폭력투쟁은 식민지독립을 획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오직 비타협적이고 조직화된 무력에 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이미 실천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민족주의 이념이 독자적 사상체계를 갖추고 인간집단에 절대적 영향력을 행사하며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것은 근대 자본주의적 생산구조의 발달과정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자본주의는 이전의 생산양식과는 달리 자본의 자기운동법칙에 따라 자기 지역에 한정되지 않고 타 민족과의 접촉을 가지며 여기에서 민족간의 모순이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것이다.하지만 한국의 경우 민족의 형성자체가 자본주의 체제 성장에만 국한시킬 수 없는 역사적 등장배경을 가지고 있다.우리나라의 경우 천오백년 이상을 단일 민족으로서 같은 언어와 문화생활을 함께 영위해 온 역사적?운명적 공동체로서 근대 말기에 등장한 동학사상은 이 점에 주목해 당시의 대내외적 위기상황에서 민족보존과 안녕을 위한 보국안민을 주장하며, 민족에 강력한 정치적 당위성을 심어 줌으로써 민족을 역사와 정치의 주역으로 부각시켰다.동학혁명(동학농민운동)1860년 4월 경주의 몰락양반 최제우가 창시한 동학은 근대적 민족종교로 유·불·선은 물론 민간신앙과 천주교를 포용한 당시 사회사상의 합성체였다. 동학의 교리에는 개벽과 평등의 반봉건사상과 서학에 반대하고 척왜, 양을 주장하는 반외세사상이 내포되어 있었다. 때문에 동학은 위정자들로부터 사교로 금압되었고 교조 최제우는 흑세무민과 좌도난정의 죄로 처형되었다. 이에 교도들은 교조의 죽음이 억울하다 하여 그 죄명을 벗겨 줄 것을 요구하는 ‘교조 신원 운동’을 펴게 되었다. 여러 고장에서 큰 모임을 열어 교조 신원과 내정개혁을 요구하였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럴 무렵 전라도 고부 군수 조병갑이 부정과 나쁜 짓을 일삼자, 농민들이 그 시정을 요구하고 나섰다(1894년). 이에 조정에서는 관리의 잘못을 다스리지 않고, 오히려 동학 교도와 농민들을 탄압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전라도 전 지역의 농민들이 들고 일어나 정부에 맞서게 된 것이다. 농민들과 합세한 동학군은 관군을 무찌르고 전주를 점령하였다. 그러자 청?일 양국의 군대까지 출병하게 되고, 동학군은 그들을 물러가게 하기 위하여 동학군 쪽의 요구를울님과 인간은 동체라는 것이다. 따라서 물(物)즉 심(心), 심(心)즉 물(物)의 지기일원으로 사람뿐만 아니라 천지만유가 사상적으로 동귀일체(同歸一體)하는 덕치의 세상이 된다는 것이다. 동학의 2세 교조 해월은 이를 ‘인시천(人是天)’이라 했으며, 3세 교조 의암은 이것을 ‘인내천(人乃天 )’이라고 했다. 이 같은 시천주, 인내천, 인시천 사상은 한민족이 아득한 옛날부터 생각하여 온 천신숭배의 신앙이 동학사상에서 창조적인 모습으로 승화된 것이다. 즉 인간의 존엄성을 하늘과 관련시켜 생각해 오던 우리민족의 전통사상이 마침내 동학에 이르러 ‘사람이 곧 한울’이라고 대담하게 주장되기에 이른 것이다. 시천주 사상이 윤리사상에 적용되어 나온 것이 사인여천의 개념이다. 이것은 사람을 하늘님처럼 대우하고 섬기라는 뜻이다. 결국 시천주사상은 신과 인간은 동일한 존재임을 밝힌 것이라고 볼 수 있다.이와같이 동학은 인내천사상에서 볼 수 있듯이 인간의 존엄성을 중시한다. 이것은 곧 민본주의와 이어지며, 결국 이것은 계급주의 타파로 오늘날의 민주주의적 요소인 자유와 평등의 특징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이러한 동학이 근데 봉건주의에 반한 민족시민운동으로 발전하게 된 역사적 배경을 살펴 보자.통치질서가 파탄에 처하고 일본 등 열강의 침탈이 자행되던 19세기말, 조선은 크게 두 가지 과제를 안고 있었다. 안으로는 낡은 신분질서를 뜯어고치고 모든 민족 구성원이 평등의 원칙 아래 자유를 누리며 역사에 참여할 수 있는 사회를 건설해 가는 개혁, 즉 근대화(近代化)가 필요했다. 밖으로는 이런 내적인 역사발전을 해치는 외부로부터의 힘에 대응하는 것, 즉 자주화(自主化)가 필요했다. 말하자면 당시 조선은 침략을 배격하는 자주적 입장에서 사회적 개혁을 이룩해야 했다. 이 시대적 과제를 실현하지 못하는 한, 조선은 어떤 형태로든 몰락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이런 과제에 부응하기 위한 위정자들의 고민과 노력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양반지배층의 위정척사(爲政斥邪:조선 말기에 정학인 주자최대 피해자인 농민들이 이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스스로 나선 것이 바로 동학농민혁명이다. 그런 점에서 동학농민혁명은 실로 시대적 요구에 부응한, 시의 적절한 대응이었다고 할 수 있다.농민혁명 과정에서 농민군은 전근대적 모순과 부패의 척결 즉 근대적 사회개혁을 요구하고 실행해 갔다. 농민군은 사회적으로는 신분타파운동을 벌여 양반질서를 혁파하고 평등사회를 실현하고자 했다. 경제적으로는 조세 수취제도의 개선 등을 통해 영세한 농민과 상인, 수공업자 등 직접생산자들의 자립과 발전을 꿈꾸었다. 정치적으로는 왕정(王政)체제의 개선을 희망했다. 나아가 농민군은 일제의 침략이라는 민족적 위기에 정면으로 맞서 싸우며 항일민족운동을 전개했다. 한마디로 동학농민혁명은 당시 조선이 안고 있던 절체절명의 과제, '사회개혁과 외세침탈 배격=자주 근대화(반봉건 반외세)'를 이루려 한 농민들의 일대 항쟁이었으며, 우리 근대사의 성패를 가르는 사건이었다.국가와 민족의 뿌리인 농민들의 대항쟁은 불행하게도 일제의 무력에 의해 좌절되고 말았다. 그래서 이 사건을 흔히 실패한 혁명이라 말한다. 그러나 우리 근대사의 큰 맥락에서 보았을 때, 이 사건은 갑오개혁으로 정치, 경제, 사회 여러 분야에 걸쳐 일대 혁신을 가져왔으며, 광무년간의 사회개혁 및 항일운동·의병전쟁·3.1만세운동·상해임시정부·광복군 활동 등 농민혁명 이후에 전개되는 숱한 민족운동의 조직적·이념적 수원지였다.1894년 농민전쟁에서 농민군은 주객관적인 요인들로 인하여 패배하고 말았으나 역사속에서도 패배한 것은 아니었으며 한국근대사에서 대단히 중요한 발자취를 남겼다.1894년의 농민전쟁은 봉건적인 중세사회를 마무리 짓기 위한 총결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새로운 사회를 모색하고 준비하는 과정이었다.하지만 아쉽게도 동학 농민 군의 지도부 인물들중 신 지식인이 없었다. 또한, 동학 농민군의 거의 모두가 농민들의 권익 신장을 위해, 나라를 지키기 위해 농민 봉기에 가담한 평범한 농민들이기에 근대사회의 건설을 위한 구체적인 개혁방안을 제시하지 정부의 무능을 비판하고 민족의 독립을 위한 운동이 전개되기 시작하였는데, 이 운동의 중심조직이 독립협회(獨立協會)였다.독립협회는 갑신정변이 실패한 뒤 미국에 망명하였던 서재필이 귀국하여 1896년 서구의 근대사상과 개혁사상을 가진 인사들과 함께 조직한 단체로 그 중심인물은 서재필? 윤치호? 이상재? 남궁억 등이었다.독립협회에 참여한 인사들의 성분은 각계각층이 망라하였다. 서구의 근대사상을 받아들인 신지식인과 개혁적인 사상을 가진 유학자층이 주도적 활동을 하였고, 여기에 도시의 상인과 농민, 광산이나 부두의 노동자, 그리고 백정 출신들도 참여하였다. 이를 보면 갑신정변이 일부 양반관료 출신의 젊은 청년층이 기도한 위로부터의 개혁운동이었고, 동학혁명이 농촌의 몰락양반과 농민이 중심이 된 밑으로부터의 개혁운동이었던 것에 비하여, 독립협회는 참여한 계층의 폭이 넓어지고 특히 도시의 신지식인인 시민계층이 중심이 된 정치?사회의 개혁운동이라는 점에 그 특징이 있다.독립협회의 활동은 자주독립?자강혁신?자유민권의 세 가지 방향으로 전개 되었는데, 이것은 외세로부터 완전한 독립을 부르짖고 스스로의 개혁을 지향하며 개화된 자유민주주의를 주장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서재필이 귀국해서 창간한 독립신문을 독립협회가 설립된 뒤에도 계속 간행하여 이러한 독립협회의 활동을 홍보하고 국민을 계몽하였다.독립협회의 세 가지 주장 가운데 첫째는 자주독립운동은 외세의 간섭으로부터 벗어나 국가의 자주권을 확립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 구체적인 활동으로 과거 영은문이 있던 자리에 국민의 성금을 모아 독립문을 세웠으며, 독립신문에 관한 각종 논설을 자주 실어 국민의 자주독립의식을 높이고, 모화관을 독립관으로 개칭하여 이곳에서 토론회를 열기도 하였다. 그리고 아관파천으로 러시아 공사관에 가 있던 고종의 환궁을 요구하고, 외국에 대한 각종 이권의 할양을 반대하는 동시에 이미 침탈된 이권을 되찾을 것을 주장하였다.둘째 자강혁신운동은 자주독립을 이룩하기 위해 부국강병을 위한 여러 가지 내정을 개혁하자는 것이었다권리신장에 있다고 하면서 서양의 천부인권사상을 근거로 인간의 기본권인 생존권과 재산권 등을 보호하려는 운동이었다. 또한 국민의 참정권 운동을 전개하여 언론과 집회의 자유권, 국민 평등권, 국민주권론 등을 내세웠다. 특히 의회 설립을 주장하여 갑오개혁 때 내각의 자문기관으로 만들어진 뒤 유명무실한 채로 있던 중추원을 개편하여 관선의원과 민선의원을 구성하되 독립협회 회원을 민선의원에 선출하고자 하였다. 이 중추원을 개편한 의회설립의 제안은 고종의 승낙을 받아 실현 단계에 까지 갔었다.독립협회의 활동이 가장 절정에 달한 것이 광무 2년(1898) 종로에서 열린 만민공동회의 개최였다. 만민공동회는 국정의 개혁을 실현시키기 위한 민중의 정치 운동이었는데, 이 때 정부의 고관들까지도 참석한 가운데 여섯 항목의 헌의6조를 채택하고 고종에게 건의하여 그 실시를 약속받기까지 하였다.또한, 독립협회는 독립신문이라고 하는 유력한 언론의 무기로 한국의 개화운동에 커다란 공적을 남겼다. 그 성과를 요약하자면, 첫째, 한국민중의 민족적 자주의식을 앙양시킨 것이다. 둘째, 한국민중에게 자유민권사상을 보급시켜 권리의식을 높였고 이로 인하여 봉건적 신분제도를 지탱해 온 명분관념을 급격히 붕괴시켰다.그러나 한편으로는 독립협회의 급진적인 개혁요구와 그 세력에 당황한 보수적인 집권층이 오히려 독립협회 간부 10여명을 체포하고 협회의 해산을 명하였다. 이에 독립협회 측에서는 연일 만민공동회를 열어 투옥인사의 석방과 독립협회의 부활, 그리고 헌의 6조의 시행을 요구하는 등 그 기세가 꺾이지 않았다. 그러나 정부는 보부상을 중심으로 어용단체인 황국협회를 조직하고, 이로 하여금 독립협회와 충돌하게 한 뒤 사회혼란을 이유로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를 강제롤 해산시키고 말았다.이러한 독립협회의 정치, 사회 개혁운동은 근대적이고 자주적인 국민의식을 형성하는데 크게 이바지 하였다. 그리고 일제 침략에 대항하여 민족운동을 펼쳐나갈 수 있는 사상적 기반과 함께 민주주의가 성장할 수 있는 기틀을 형성시켰다는 점에서 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