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판적 사고의 올바른 이해와 그 실천[개요]제목 : 비판적 사고의 올바른 이해와 그 실천주제문 : 비판적 사고의 올바른 개념이해와 바른 훈련을 통해 활용가치를 높이자.Ⅰ. 서론 : 현대 사회에서 무비판적 사고의 수용현상과 비판적 사고의 필요성 제기Ⅱ. 본론1. 비판적 사고의 개념 이해2. 비판적 사고의 심도 있는 고찰가. 결론 파악의 중요성나. 결론에 따른 전제의 중요성다. 오류 파악의 의미와 그 과정3. 비판적 사고의 예를 통한 활용가치와 연습의 중요성Ⅲ. 결론 : 도구로서 비판적 사고의 효율적인 활용가치[본문]Ⅰ. 서론20세기 후반, 컴퓨터로 발달로 인한 이른바 정보화 혁명을 겪은 이래로 세상은 하루가 다르게 변화해 왔다. 가히 홍수라 불러도 좋을 만큼 방대한 정보의 양은 하루에도 수백, 수천 번씩 우리의 눈과 귀를 통해 받아들여진다. 이러한 정보의 가속화에 따른 사람들의 태도가 아쉬운 것은 법률가, 정치가, 언론인 및 TV해설자 등의 전문가에 의존하는 경향이 커지는 것이다. 물론 그들의 비판이나 조언이 무조건 나쁘다는 건 아니다. 허나, 어느 지식의 영역에서건 간에 거기에는 그 분야의 전문가들이 의견을 달리하고 있는 주제가 있고, 개중에는 보기 좋게 포장된 미사여구로 인해 사람들의 올바른 판단의 기준은 배제된 채 있는 대로 흡수하고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수용자세가 우려된다. 인터넷 포털사이트에만 들어가도 이러한 현상을 쉽게 목격한다. 인터넷 기사에 달린 댓글만 보아도 일부 사람들의 이러한 태도는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때문인지 댓글 상에서의 사람들과의 합리적인 대화 또한 잘 이루어지지 않는 모습이다. 여기서 합리적인 대화란, 맹목적인 자기 의견의 표현이 아닌 의견에 따른 전제나 이유가 합당한 논리적인 구조에 밑바탕을 두었다고 보는 것이다. 이러기에 우리는 바로 비판적 사고라는 ‘체’로 걸러낸 수용을 통해 올바른 정보의 획득과 한 사회의 시민으로서 다른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과의 입장 차이에 대한 적절한 합의를 이루며 살아가야 한다.Ⅱ. 본론우리는 비판적 사고의 개념을 알고 있다. 중, 고등학교 시절부터 그것을 언급하는 국어나 사회과목에서 배워왔으며, 특히 대학교에서는 전공이 아니더라도 교양 과목으로나마 분명히 그 개념을 공부했을 것이다. 날로 방대해지는 정보의 적절한 취사선택과 사람들과의 합리적인 대화가 이루어지려면 비판적으로 사고하는 능력 배양이 절실하며, 나아가 올바른 개념의 정립과 함께 사회에서 적극적인 활용을 통한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사고를 배양하는 것이 최고의 이상(理想)이겠다. 저자는 이 글에서 현대에 갖추어야 할 올바른 비판적 사고의 개념과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노력에 따른 활용적인 측면에 대해서 고찰한다.우리는 살면서 합리적으로 생각하자, 무비판적으로 듣지 말라, 논리적으로 따져보자 등 ‘합리, 비판, 논리’의 어휘로 이루어진 문장을 수없이 접해보았다. 합리적 사고, 비판적 사고, 논리적 사고의 맥락은 어느 면에서 같이 한다. 어떤 주장을 담은 논증에 대해 이성을 바탕으로 새로운 눈을 통해 적극적, 분석적으로 논증을 이해하는 ‘비판적 사고’ 는, 그에 대한 합리적인 이유, 근거를 찾고자 하는 다각적인 노력으로 ‘합리적 사고’ 가 될 수 있겠으며, 주어진 전제로부터 흐름에 맞게 결과를 도출하는 총체적인 관점인 ‘논리적 사고’ 로 통하는 것이다. 결국 비판적 사고를 통해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사고 배양을 한다는 얘기와 다르지 않으며 오히려 그 핵심기술이 된다. 비판적 사고라 하면 혹 누군가는 기존의 제도나 타인의 잘못을 지적하고 꾸짖는 개념으로 알고 있을 런지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매우 편협한 시각이 아닐 수 없으며, 진정한 비판적 사고는 어떤 주제나 주장에 대해 일련의 자문 등을 통한 더욱 더 깊이 있고 폭 넓게 이해하려는 사유 활동 그 자체이다. 감정과 정서의 개입도 중요하다. 그것들을 배재한 냉철한 비판적 사고를 통한다는 말은 보기에 굉장히 객관적인 입장을 확보한 듯하나, 감정과 정서의 개입은 동기부여 및 심화되는 계기를 마련한다. 만약에 곧 아기를 출산을 앞둔 주부에게 출산 휴가의 제한이라는 주제에 대해서 감정과 정서의 역할은 곧 비판적 사고의 동기부여로 이어지고 많은 생각과 의견을 창출해 낼 수 있다. 하지만 너무 많은 개입은 독단의 자세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으므로 적절한 조절이 필요할 것이다.앞에서 말했듯, 사람들은 깊게는 아니더라도 비판적 사고의 개념은 알고 있다. 허나 문제는 역시나 평소에 비판적 사고를 의식하는 습관을 가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비판적으로 사고 한다는 것은 어떤 원리에 따라 일률적으로 결과를 도출해내는 기계적인 사고가 아니라 일련의 비판적 자문에 따라 올바른 판단을 통해 자답을 내리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인가?’, ‘그 결론에 따른 이유는 무엇인가?’, ‘추론에 오류가 있는가?’, 등 다각적인 질문을 통해 바른 해답에 가깝게 다가가야 한다. 사회적인 논쟁 가운데서 “이것이 그 주제에 대한 분명하게 바른 입장이다.” 라고 말할 수 있는 입장은 거의 없기 때문에 바른 해답이라 하면 도달하기 매우 힘든 위치에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바른 해답은 비판적 사고를 통해 다른 입장들을 과감하게 포기한, 가장 그럴듯해 보이는 입장이라고 달리 말할 수가 있으며, 그 과정은 위에서 제시한 끊임없는 질문들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 사실 어떤 논의에 대하여 백지와 같은 마음을 가지고 받아들여 결론을 내리기에는 힘이 들며, 어떤 의견에 대하여 상당시간 가지고 있던 자신의 의견을 포기하고 다른 의견에 귀 기울이는 건 많은 용기를 필요로 한다. 때문에 비판적 사고의 효용이 더욱 강조되는 것이고 우리가 새로운 해답 도출을 시험, 노력하고 가능하게 구현했을 때 사고는 성장한다.누군가의 생각에서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인가?’ 를 아는 것은 화자가 독자에게 믿어주기를 바라는 어떤 하나의 진술이나 한 집합의 진술을 찾아내는 것이다. 화자가 독자를 설득시키려고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면, 우리는 그 글을 평가할 수 있는 근거가 현저하게 미약해진다. 이 과정은 우리가 그 진술을 수용할 것인지, 또는 기각할 것인지를 결정하기 위한 가장 기본이 되는 단계이다. 우리는 어떤 글을 접할 때 하나의 결론이 있다면 그 결론을 충분히 뒷받침하는 이유, 근거들을 찾아 볼 수 있다. 논증이란, 이러한 이유가 되는 ‘전제’ 와 주장을 함축하는 ‘결론’이 결합된 하나의 글을 말하며 그 결론은 추리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결론이란, 뒷받침하는 전제들로부터 추리하는 과정을 통해 타당하게 도출해낸 명제이며, 그렇기 때문에 결론은 전제를 포괄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중요한건 올바른 결론의 도출이다. 논증에는 전제와 결론 뿐 아니라 문장의 유려한 흐름을 위해 삽입된 문장들도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궁극적인 화자의 말하고자 하는 바, 즉 결론을 파악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전제와 결론을 구별하는 것은 결론을 파악하기 위해서 선행되어야할 필수적인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결론이 독자들에게 수용될 수 있을 만큼 설득력 있게 들리려면 그에 대한 충분한 지지를 하는 전제가 풍부해야 할 것이다. 사실, 전제를 찾기 전에는 결론을 파악했다하더라도 그 가치를 결정할 수 없다. 만약 우리가 전제를 바탕으로 결론을 도출하는 추론보다 명시된 결론에 대하여 반응한다면 우리는 논의나 글을 대할 때 시초에 가졌던 결론에 집착할 것이며 이는 자신이 미리 생각한 바와 일치하는 결론에 쉽게 동의해버리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자신의 의견을 재음미해 보고자 한다면, 우리가 공감하지 않고 있는 의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제시하는 이유에 대해서도 열려있어야 한다. 그렇기에 항상 ‘왜?’ 라는 의문을 가지는 태도를 견지해야 함이 바람직하다.타당한 전제를 찾아내고 나면 결과를 도출 하는 추론에서 어떤 ‘오류’가 있는지 확인하는 과정이 꼭 필요하다. 오류란 어떤 주장을 지지하기 위해 제시된 근거들이 그 주장을 받아들인 충분한 이유가 되지 못하는 논증을 가리킨다. 형식에 따른 오류와 잘못된 내용에 따른, 즉 비형식적인 오류로 구분이 가능하다. 간단히 말해 형식적 오류란 거짓 근거를 제시한 틀린 논증이며 비형식적인 오류는 군중심리에 호소하는 등의 심리적인 요인이나 잘못된 언어선택에서 나타는 등, 경우에 따라 그 이름도 따로 달려서 항목이 매우 많다. 물론 그걸 다 공부하고 오류를 찾는 노력이 일반적인 정도(正道)이지만, 이들의 이름을 모두 암기한다고 해서 적절하게 다 찾아 낼 수 있는 능력을 갖추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아래의 질문에 따른 적절한 자답을 내릴 수 있다면, 비록 이름은 모른다 해도 추론 오류들을 찾아 낼 수가 있을 것이다. 먼저 어떤 입장을 대할 때 항시 결론을 염두에 두고, 이 주장을 뒷받침하는 적절한 이유는 어떤 것일까 하는 자문을 해본다. 제시된 근거와 자신이 적절한 이유라고 믿는 것 사이에 큰 차이가 있다면, 추론에 오류가 있을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또 다른 방법으로 어떤 개인이 어떤 행위가 다른 것 보다 더 바람직하다고 주장할 때, 그 때 제시해야 하는 적절한 이유는 그러한 입장을 취했을 때의 구체적인 이점이나 단점을 언급하는 것이 일반적이므로, 바로 이 부분에서 추론상의 오류가 있는지 주의 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1. 전개분단이 된지 무려 반세기 이상이 지났고, 그동안 우리 민족은 많은 통일의 노력을 기울였다. 특히 남한은 현재 경제력의 우위를 바탕으로 적극적이면서도 북한을 존중하는 통일정책을 이루어 나가고 있으며, 그러한 성과로서 얼마 전 2007 남북정상선언을 이루어 냈다.하지만 미래의 통일정책의 방향을 결정하기 위해서는 현재의 상황과 정책만을 주시하기 보다는 과거의 통일정책을 살펴보고 그에 대한 고찰을 통해 올바른 미래의 통일정책의 방향을 설정하는 것도 필요할 것이며, 따라서 이 글에서 과거의 통일정책을 시대별로 개괄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또한 과거에서부터 현재까지 통일정책은 남한뿐만 아니라 북한도 많은 변화가 있었는데, 물론 시대적 상황이라던지 많은 이유가 존재를 할 것이나, 보다 일관된 통일정책 변화의 원인을 살펴봄에 있어서 학계의 권위적인 의견 중 하나가 남북한의 상대적 경제력의 변화에 따라 통일 정책이 변화하였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이를 부수적으로 살펴보고자 하며, 이를 바탕으로 한 미래의 통일정책의 방향에 대하여 사견을 논하고자 한다.2. 남한의 통일정책(1) 1950년대의 통일정책1948년 남한 정부 단독 수립 후 남한 정부는 남한이 유엔이 인정한 한반도 유일한 합법적인 정부라는 의식 아래서 북한 정부를 대화의 상대나 실체적 상대로 인정하지 않는 배타적인 통일정책을 유지하였다. 1948년 남한 정부 수립 이후 50년대 남한 정부의 공식적인 통일 정책은 ‘북한지역 총선거’ 이다. 당시 북한 지역을 위해 국회의원 3분 1을 공석으로 비워두고, 이 부분만을 채우기 위한 북한지역의 총선거를 주장했던 것이다.6.25 전쟁 이후 휴전협정에 의해 열린 제네바 정치회의에서 잠시 ‘남북한 총선거론’) 으로 변경하기도 했지만 이는 남한의 우방조차 받아들여지지 않아 잠시 선회를 한 것에 불과하다고 하며, 제네바 회담 결렬 후 다시 ‘북한만의 유엔감시하의 총선거’로 후퇴하였다.그러나 이는 국외적 입장일 뿐 사실상 국내적으로 일반적인 입장은 ‘북진통일론’ 즉 전쟁통일론이었결-을 합의하였으며, 그 정신과 취지는 이후 남한의 통일 정책에서 중요한 밑거름이 되고 있다.그로부터 약 1년 뒤인 1973년 6월 23일 정부는 평화통일외교정책선언 - 조국평화노력, 한반도 평화와 남북 내정불간섭 및 불침략, 성실과 인내로 남북대화 지속, 북한의 국제기구 가입 불 반대,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 불 반대, 모든 국가에의 문호개방, 평화선린에 기초한 대외정책의 추진 - 을 발표하면서 1970년 ‘평화통일 구상선언’에서 시작되었던 이른바 ‘2개의 한국론’, 즉 북한을 대화의 상대로서 나아가 한 국가로서 인정하겠다는 입장을 확고히 하기에 이르렀다.이러한 통일정책의 외면만을 검토해 보면, 그 이전보다 획기적인 통일정책의 변화가 있었다고 볼 수 있겠다. 그러나 단지 추상적으로 북한을 대화상대로 인정하고 추상적인 원칙만을 합의했을 뿐 구체적인 방안이 거의 전무한 점, 7.4 남북공동성명 직후 약속이라도 한 듯이 남한의 유신헌법(1972.11)을 통한 독재체제 강화와 북한의 사회주의 헌법을 통한 국가주석체제(1972.12)을 통한 김일성 독재의 완성을 꾀한 점, 추상적인 원칙의 합의인 7.4 남북공동성명의 구체적 방안의 합의 기구인 남북조절위원회가 남한의 유신체제 선언과(1972.11.21), 김대중납치사건(1973.8.8)등을 핑계로 북한이 일방적으로 중단하였고, 1973년 6월 23일 같은 날 ‘남북한유엔동시가입’ - 남한의 평화통일외교정책선언(1973.6.23) - , ‘남북 연방제와 고려연방공화국 국호에 의한 유엔 단일국호 가입’ - 북한의 ‘조국통일 5대강령’(1973.6.23) - 을 통해 남북정부가 서로 상반된 입장만을 내세운 것을 검토해 볼 때, 이는 남북한 모두 통일에 대한 의지가 없었다고 평가받고 있다.즉 6.25 전쟁 이후 더욱 강화된 미소 냉전체제 아래서 그들의 비호 아래 각각 분단권력의 안정성을 확보하고 있던 남북 두 정권이 1970년대 초 냉전체제의 완화현상에 자극을 받아 서로 적대적 분위기를 형성하여 힘을 소모할 것이 아니라 일단 평화, 민주’를 제시하고 통일 국가의 비래상으로는 ’자유,인권,행복이 보장되는 민주국가를 제시하였다. 즉 남북간 신뢰회복을 기해 나가면서 남북연합을 통해 일정기간 2국가 2정부 2체제라는 과도적 체제를 유지하고, 최고결정기구인 ‘남북정상회의’, 쌍방 정부대표로 구성되는 ‘남북각료회의’, 남북 국회의원으로 구성되는 ‘남북평의회’를 설치하여 각종 입장조절과 업무를 수행하되, 일정한 합의에 이르면 통일헌법안을 마련하여 민주적 방법과 절차를 거쳐 확정, 공포하고, 이 헌법이 정하는 바에 따라 총선거를 실시하여 통일국회와 통일정부를 구성함으로서 완전한 통일국가인 통일 민주공화국 수립을 목표로 하고 있다.이러한 7.7선언과 한민족공동체통일방안은 제 6공화국의 노태우 정부 대외정책인 북방정책의 일부로서 제시된 것으로서, 노태우 정부는 미국 등 선진자본주의 국가들의 보호무역과 이 지역으로의 시장확대의 한계로 인한 경제적 위기상황에 돌파구를 마련하고 통일논의를 주도하기 위하여, 먼저 공산권 국가들과의 화해를 통해 교역확대를 꾀하는 한 편, 이들의 압박으로 북한의 개방을 꾀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북한에 대해서는 북한 체제에 대한 광범위한 인정과 북한의 1국가 2정부 2체제 통일안인 ‘고려민주연방공화국안’)에 근접하는 ‘남북연합제안’을 제시하여 서로의 입장일치의 가능성을 엿볼 수 있는 정도에 이르렀으며, 또한 북한에게 ‘미일관계개선’을 제시하고, 이를 통해 남한은 ‘중소관계개선’을 꾀함으로서 1969년 일본의 게이오대 국제정치학자 가미야 후지(神谷不二)가 처음 제창한 ‘남북한교차승인론’)을 실현하고자 하였다.이러한 노태우 정부의 정책은 상당한 성공을 거두어서 중국과 소련, 기타 동구권 국가들과의 관계의 개선 및 경제적인 교류가 확대되었고, 또한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을 할 수 있었으며, 이러한 분위기에 편승하여 1991년 남북한간의 화해 및 교류확대를 명시한 남북기본합의서가 작성되었다. 북한도 이와 같은 기회를 통해 ‘미일관계개선’을 꾀하였고, 일본과의 관계는 상당한 진전을 이룰일 김대중 대통령의 런던대학교 연설에서 처음 사용되었으며 공식적인 명칭은 대북화해협력원칙이다.햇볕정책은 다음 세 가지 원칙을 바탕으로 한다.? 첫째, 북측의 무력 도발을 허용하지 않는다.? 둘째, 남측은 흡수 통일을 시도하지 않는다.? 셋째, 남측은 화해와 협력을 추진한다.여기에서 주목할 만한 점은 남측의 ‘흡수통일 포기의 명시이다. 기존의 평화통일 정책, 특히 80년대 말과 90년대 초의 남한의 통일정책의 경우 문언적, 대외적으로는 평화통일정책을 표방하고 있지만 그 이면에는 남북한의 합의와 협의보다는 ‘남북한교류’를 더욱 강조하고, 그 교류에서 경제력의 우위를 내세워 통일논의에서 우위를 점하여 기회가 되면 흡수통일을 하겠다는 의도가 깔린 것으로 보인다. 80년대에서 90년대 초 동구권의 붕괴와 독일의 통일, 그리고 남한의 공산권 국가와의 수교와 반대로 북한의 고립된 상황속에서 남한은 알게 모르게 흡수통일론을 지향해 왔고, 당시 국민 정서도 독일의 예를 통해 조만간 흡수통일이 가능할 것이라는 방향으로 흘러왔다.그러나 그로부터 많은 세월이 지나면서 북한은 국제사회에서 고립된 가운데 교류를 확대하면 남한이 흡수통일을 시도할 것이라는 불안감에서 문을 닫아걸고,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면서 정권을 유지시켰고, 이와 같은 태도에 남한은 분개하여 남북관계는 점차 악화만 되어갔다.이러한 고리를 끊고자 나온 것이 강력한 포용정책인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이며, 그 전제가 북한이 교류 확대를 할 경우 가장 걱정할 수 있는 것이 남한의 흡수통일 시도일 수 있음을 고려하여 이를 포기한다고 천명함으로서 남북관계에 상당한 진전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 흡수통일을 포기한다는 것은 남한이 남북교류에 있어서 정치적,경제적 우위를 내세우지 않겠다는 의미로서 다른 말로 표현하면, 남북이 똑같이 주고받는 대칭적 상호주의가 아니라 조건 없이 북한이 덜 주고 남한이 더 줄 수 있는 비대칭적 상호주의를 표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정책의 성과로서 2000년 첫 번째 남북정상회담 개최와 6.15 것이고, 남북 평화협정이 체결돠고 평화체제가 구축이 되면서 한반도의 평화정착이 이루어 질 것이라는 것이며, 세 번째는 한반도 평화체제가 구축 노력과 더불어 한반도 경제공동체 형성을 추진하고, 나아가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를 대상으로 한 동북아 평화협력체를 추진할 뿐만 아니라 동북아 경제협력체 구성을 추진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함으로서 동북아 중심 국가를 건설하겠다는 내용이다.이러한 평화번영정책의 성과로서 남북 핵문제 해결을 명시한 9.19 공동성명)과 그 구체적인 시행 방법을 합의한 9.19 공동성명 이행을 위한 초기조치(2007.02.13), 북핵불능화합의(2007.10.4)을 들 수 있으며 또한 2007년 10월 2일 남북정상회담이 개최되고, 2007년 10월 4일 ‘남북관계발전과 평화번영을 위한 선언(2007남북정상선언)’을 발표함으로서, 평화번영정책이 명시한 북핵문제 해결과 한반도 평화체제 정착에 많이 근접하고 있음을 알 수 있겠다.특히 주목할 만한 성과인 ‘남북관계발전과 평화번영을 위한 선언’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을 살펴보면, 첫 번째로 6.15 공동선언의 적극적 구현을 명시하고 있고, 두 번째로 남북관계 존중과 신뢰관계로 전환을 명시하면서 통일을 지향하는 법률과 제도를 지향하고 각 분야의 대화와 접촉을 추진하며, 세 번째로 군사적 적대관계를 종식하고 공동어로수역, 평화수역 지정 추진과 남북국방장관회담 11월 중으로 개최하며, 네 번째로 평화체제 위한 3자 혹은 4자 정상회담 추진, 다섯 번째로 경제협력의 적극적인 활성화를 명시하면서 서해평화특별협력지대 설치, 개성공단 2단계 건설 착수, 조선협력단지 건설을 제시하고 있고, 여섯 번째로 사회문화적 교류협력을 발전시켜 서울-백두산 직항로 개설등을 명시하고 있고, 일곱 번째로 이산가족등의 인도주의적 문제의 해결을 명시하고 있으며, 여덟 번째는 협력강화 측면에서 수시로 대화하겠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이는 대권을 의식한 정상회담이라는 비판과 더불어 서해의 평화수역 지정 추진에 대해 NLL을 포기한 것이 있다.
작품의 간략한 소개셰익스피어는 옛적부터 전해져오는 우화에서 소재를 따와 결말을 바꾸는 등 자신만의 작품으로 재창조시킨 작가로 유명한데요. 이 리어왕도 그 작품들 중의 하나로 특히 4대 비극의 하나로 손꼽힙니다. 작품에 등장하는 악인은 결국에 가서 그 행동이 들통이 나 파멸하고 선한 주인공마저 그 악인으로 인해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기에 비극이라 부르게 되는데요. 이 4대 비극의 유래를 잠시만 말씀드리자면, 후대인들이 셰익스피어의 뛰어난 작품들 가운데서도 비극의 원천이 뚜렷한 완성도가 높은 작품 4개를 선정하게 된 것입니다. 비극의 원천이라 함은 바로 각 작품에 등장하는 주인공의 인간적인 결함으로서, 신과 비교하여 인간이기 때문에 겪게 되는 비극입니다. 리어왕에서는 주인공 리어왕이 감언이설에 속아 진실을 알아보지 못해 모두가 비참한 죽음을 겪게 되는 비극적 결말로 끝나는 구성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시대적 배경리어왕(king Lear)에 나타난 가치관의 갈등을 알아보기 위해서는 1550년대에서 1600년대 초까지의 영국의 상황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하리라고 봅니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아직 후계자를 두지 못한 상황에서 그 동안 균형을 유지해 왔던 전통귀족과 신흥귀족, 그리고 중산계급은 1610년대 들어와 상호간의 대립을 드러냈는데요. 특히 1588년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격퇴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담당한 중산계급은 그 세력을 급속도로 확대시켜 나갔습니다. 의회에서는 중산계급의 역할이 강화되면서 사회적 타협과 균형이 깨지게 되었고 이는 엘리자베스의 사후, 제임스 1세가 왕위에 오르면서 보다 가속화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제임스 1세는 왕권신수설을 굳게 믿고 있었기 때문에, 중산계급이 대부분 합세한 청교도 세력과의 대립은 불가피하게 되었던 겁니다, ‘리어 왕’이 창작된 시기로 추정되는 1604-5년경은 이런 정치적 갈등이 이미 엘리자베스시대에 심화된 가치관의 분열과 결부됨으로써 나라가 대 혼란을 겪을 것이라는 비관적 견해가 팽배했던 시기였습니다. 따라서 작품 속에는 어서 본 줄거리를 보완하고 부각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셰익스피어 작품이 모두 그렇듯이 이 작품에서도 그는 리어 왕과 그의 딸들, 그리고 글로스터와 그의 아들들이라는 특정한 개인들의 비극뿐만 아니라, 보편적인 인간의 운명에까지 확대하여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등장인물리어 왕 - 노여움, 배신감, 복수심 등을 자제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아 성미가 급하며, 세 딸과 신하 백성들부터 사랑을 열망합니다.코네릴 - 리어왕의 첫째 딸이고 올버니 공작의 아내로서 아버지에게 거짓을 고하여 권력을 얻어내며, 에드먼드와의 불륜적인 사랑을 꿈꾸는 악인의 전형적인 모습을 띄고 있습니다.리건 - 리어왕의 둘째딸로 콘윌 공작의 아내이며 첫째 딸 코네릴과 비슷한 성격의 인물입니다.코딜리아 - 리어왕의 막내딸로 진실하고 솔직하며, 자신을 추방한 아버지를 미워하지 않고 아버지로서 사랑한 착한 딸입니다. 자기나라의 포로가 되어 죽게 되는 가장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하게 됩니다.켄트 백작 - 리어 왕의 충직한 신하로 끝까지 리어 왕을 따르고 돕습니다.글로스터 백작 - 곁 줄거리의 주인공으로서 서자인 에드먼드의 계략에 속아 진실을 보지 못하고 적자인 에드거에게 저주를 퍼붓는 모습에서 리어 왕과 흡사한 모습을 띄고 있습니다.에드거 - 글로스터의 적자로서 아버지 글로스터 백작에게 생명의 위협을 당하지만 고통을 당하면서도 순수하고 고귀한 성품을 잃지 않는 인물입니다.에드먼드 - 글로스터의 서자로서 코네릴과 리건의 삼각관계의 주인공입니다. 형인 에드거를 물리치고 모든 재산을 가로채며, 왕권까지 넘보다가 몰락하게 됩니다.어릿광대(fool) - 작품에서 리어 왕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리어 왕이 하지 못하는 말들을 모두 대신하고, 리어 왕은 자신을 진실로서 대하는 광대에게 위안을 받기도 합니다. 또한 광대는 리어왕의 처지를 지적하고 리어왕이 저지른 과오의 뜻을 깨우쳐 주려고도 하는 모습에서 리어 왕에게 결여된 성품을 찾아주려는 역할로, 작품에서 중요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줄거리 - 영국의이 프랑스 왕에게 줘버립니다. 그때 리어왕의 충신인 켄트가 그것을 보고 말리려고 하자 리어왕은 켄트까지 추방시켜 버립니다. 그러나 추방당한 켄트는 원망하지 않고 변장을 하고 다시 리어왕에게 접근을 해서 몰래 리어왕과 같이 다니면서 리어왕을 도와줍니다.모든 재산과 권력을 물려받은 코네릴과 리건은 늙은 아버지 리어 왕을 구박하고 자신의 집에는 오지 못하게 하며 리어 왕을 보호하는 부하의 수를 줄이려 합니다. 이에 분노한 리어왕은 두 딸을 설득하기도 하고 비난하기도 하여 그들의 마음을 돌리려 해보지만 그들은 아버지의 분노에 상관없이 그를 폭풍우 속에 쫓아내 버립니다. 폭풍우로 쫓겨난 리어왕은 코딜리아를 쫓아버린 자신을 원망하면서 나쁜 두 딸에게 복수를 다짐하게 됩니다.한편, 리어왕의 신하 글로스터는 적자인 에드거와 서자인 에드먼드, 두 아들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서자인 에드먼드는 서자가 당하는 불평등한 처우에 불만을 품고, 적자인 형 에드거의 권리를 빼앗을 속셈으로 아버지 글로스터에게 형을 모함합니다. 글로스터는 에드먼드의 계략에 속아 에드거를 죽이려 하고, 에드거는 성에서 도망쳐 살아남기 위해서 미치광이 행세를 하게 됩니다. 글로스터는 불쌍한 리어왕을 동정하여 도와주려 하지만, 둘째 딸 리건과 그의 남편 콘월은 에드먼드의 밀고로 글로스터를 붙잡아 리어왕이 피할 수 있게 도와준다고 누명을 씌어 두 눈을 뽑게 됩니다. 이것을 본 첫째 딸 코네릴의 남편인 올버니 공작이 이를 말리려다가 오히려 위협을 당하게 되고, 눈이 뽑힌 글로스터는 성에서 도망가 리어왕과 같이 가게 됩니다. 하지만 코네릴의 하인인 오스월드가 글로스터를 찾게 되고, 그를 죽이려고 할 때 미치광이행세를 하던 에드거가 나타다 오스월드를 쓰러뜨립니다.한편 서자 에드먼드는 코네릴과 리건의 삼각관계 안에서 야심을 더욱 키워나가며, 결국 막내 딸 코딜리아가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이끌고 온 프랑스군을 맞아 전쟁을 치르게 됩니다. 그리고 폭풍우 속에 내몰렸던 리어 왕은 반미치광이 상태가 되어 딸들을 저주하며 헤매리어왕과 코딜리아를 죽이도록 명령한 사실을 밝히고, 빨리 그들을 구하라고 하지만, 이미 코딜리아는 감옥에서 에드먼드가 보낸 자객의 손에 목 졸려 죽은 후가 됩니다. 리어 왕은 넋을 놓고 딸의 죽음을 슬퍼하다가, 결국 자신도 딸을 따라 숨을 거두고 맙니다.명대사 - 등장인물들의 명대사를 나름 찾아보았는데요. 다 읽는 것은 시간상 힘들고 이런 대사가 있다는 정도만 보시는 것도 좋을 것 같아서 기재하였습니다. 보시면 어디서 본 듯한 대사도 보이실 겁니다. 특히 두 번째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이 대사가 이 작품의 가장 유명한 대사로서 소설가 이인화씨가 이 구절을 제목으로 하여 자신의 첫 소설을 썼다고 합니다.보시면 이 작품이 비극작품이라 대사들이 다 죽음과 어울리는 다소 격정적인 어투가 많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Nothing will come of nothing.무에서 생기는 건 무 뿐이다.(리어 왕의 대사) - 1막 1장 89행 -* Who is it that can tell me who I am?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리어 왕) - 1막 4장 227행 -* How sharper than a serpent's tooth it is to have a thankless child!(부모의) 은혜를 모르는 자식을 두는 것은 독사의 이빨에 물리는 것보다 더 아프다.(리어 왕) - 1막 4장 286-87행 -* The worst is not so long as we can say, "This is the worst.""이게 밑바닥[최악]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동안은 결코 밑바닥[최악]이 아닌 것이다.(에드거) - 4막 1장 27-28행 -* As flies to wanton boys, are we to th' gods, They kill us for their sport.신들이 우리 인간을 대하는 것은 장난꾸러기 아이들이 파리를 대하는 것과 같다. 신들은 우리 인간을 반 장난 기분으로 죽여버린다.(글로스터 백작) - 4 꿰뚫을 수 있다.(리어 왕) - 4막 6장 163-65행-출처리어 왕에 대한 첫 기록은 Geoffey of Monmouth 1135년경에 라틴어로 집필한 『영국통사』(History of the Kings of Britain) 라는 작품으로 대략의 줄거리는 리어 왕이 다시 왕위에 오르고 비극으로 끝나지 않는 다는 것 이외에는 셰익스피어의 작품과 큰 차이는 없습니다. 딸들의 이름도 Gonorilla, Regau, Cordeilla 등의 이름도 유사하구요. 그 후 리어 왕에 대한 이야기는 셰익스피어의 시대에 이르기 까지 거듭 기록되어 왔습니다. 그 중에서 셰익스피어에게 영향을 준 작품들을 살펴보겠습니다. 여기에 열거된 작품 말고도 많은 작품들이 셰익스피어에게 영감을 주었는데요. 대표적으로 몇 개만 뽑아봤습니다. 이 작품들은 결말이나 등장인물의 이름과 관계가 셰익스피어의 작품과 조금씩 다릅니다. 간단히 소개드리자면 Holished의 Chronicles는 코딜리어가 리어 왕의 뒤를 이었으나 두 언니들의 조카들이 반란을 일으켜 코딜리어는 자살한다는 줄거리이고요. 두 번째로 The mirror for magistrates는 20명의 왕들의 비극적인 이야기를 모아놓은 시문인데 여기서 리어 왕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Faerie Queen의 작품은 spenser가 집필한 것으로서 셰익스피어의 작품에서 나오는 막내딸 cordelia의 이름과 상통하는 점, 그리고 리어왕이 그의 왕국을 각기 세 딸에게 나누어 주기 위해 셋으로 미리 나누어 놓는다는 점도 셰익스피어의 것과 일치합니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에 나오는 곁 줄거리인 글로스터의 이야기는 Sidney의 Arcadia에서 온 것으로, Arcadia는 리어 왕의 곁 줄거리 뿐만 아니라 본 줄거리에도 영향을 끼쳤는데요. 글로스터와 리어 왕이 죽을 때 둘이 다 기쁨으로 죽는 장면과, 은혜를 베푼 자식에게 학대받고 학대한 자식의 도움을 받는 점 등은 Arcadia에서 온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제목이 조금 긴데요. 이건 우습니다.
Ⅰ. 김정일의 정권계승1. 정권계승의 과정김일성이 사망한지 4년 2개월 만인 1998년 9월에 건국 50주년을 맞이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제 10기 최고인민회의를 개최하고 새로운 지도자 김정일을 수반으로 하는 정부를 출범시켰다. 이것은 북한 정치사에 중요하고도 커다란 변화라고 할 수 있다. 우리로선 다행인지 불행인지, 김일성은 북한의 승계 문제를 오래 전부터 준비해 왔고 자기가 쌓아 올린 업적, 정치 관습, 문화 등을 후세들이 복잡한 권력 다툼 없이 이어나갈 수 있도록 준비해 놓았다. 여러 분야에서 나름대로 김정일은 아버지 김일성과 똑같은 사회주의로의 연장선상에서 조금씩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는데, 예로써 선군정치라는 김정일 식의 통치이념의 도입과 1998년에는 개헌을 통해 국방위원회의 격상과 같은 권력체제의 변화를 가져오기도 하였다.2. 정치이념 ‘선군정치’김정일은 집권하면서 서서히 김일성의 사상을 계승, 발전시켜 자신만의 이데올로기를 정립하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선군정치’다. 선군정치는 대남정책, 경제정책, 사회정책 등 김정일 정권의 모든 지도 정책과 연관되는 매우 중요한 이념이 아닐 수 없다. 말 그대로 풀이하자면 모든 것은 강력한 군사력이 뒷받침되고, 그 아래 모든 정책이나 정치들이 이루어 질 수 있다는 논리다.1997년 10월 7일 김정일은 중앙방송 정론을 통해 “경제사정이 아무리 부담이 크더라도 선군후로(先軍後勞) 하라.” 고 한 발언에서 선군정치를 공식화 하였으며, 1998년 개헌을 통해 국방위원회의 격상과 같은 제도나 인사의 변화를 통해 현재까지 군부 중심의 사회를 다지는데 기틀을 잡아 오고 있는 실정이다. 김정일은 집권을 통해 자신만의 통치이념이 필요했고, 김일성이 정립해온 주체사상의 계승을 이어간다는 의미에서 선군정치를 확립하였다. 또한 북한군의 위상강화를 강조하여 북핵과 같은 군사적 위협을 통한 대외적 성격을 강하게 어필하기 위함이라는 분석도 제기되고 있다.Ⅱ. 김정일의 대남정책의 목표1. ‘북한식 사회주의’ 확산북한이 추구개헌된 헌법 제11조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조선로동당의 령도 밑에 모든 활동을 진행한다.” 라고 규정하고 있어서, 결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노동당의 통일전략인 ‘전한반도의 공산화’를 최종목적으로 삼고 있음이 명확하다. 김정일은 자신의 저서에서도 “사회주의 사상은 계급해방의 무기인 동시에 민족해방의 무기이며 참다운 애국주의사상이다.” 라고 하여, 사회주의식 통일을 분명히 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렇듯 북한의 정치이념은 아직도 사적소유의 금지와 계급타파를 통한 사회주의를 강력히 고수하고 있기 때문에 계급론적 입장에서 전한반도를 사회주의화 하려는 것이다.2. 남한 고립화와 통미봉남정책김정일 정권의 두드러진 대남정책의 목표로서, 남한을 북한의 외교대상에서 고립화시키는 것이다. 그 정책으로 통미봉남청책이 있는데, ‘통미봉남’을 풀이하자면, 미국과 교류하고 남한과의 접촉이나 언급을 회피함으로써 남한을 북한과의 관계 면에서 고립화를 시킨다는 것이다.북한은 지금 남한의 ‘한, 미, 일 공조’를 굉장히 못마땅한 시각으로 보고 있다. 한국만 해도 이길 수 있다는 장담이 없는 북한의 군사력은 미국과 일본의 공조를 업고 있는 남한을 당해내지 못한다는 생각에 한미동맹을 매일같이 비난하고, 그 상징인 주한미군의 철수를 강력히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더불어 반일감정을 앞세워 그 분위기를 몰고 가려는 바, 미사일이나 핵협상과 같은 주요 회담을 남한과 통하는 것이 아닌, 다른 나라와 통함으로써 남한을 고립화하는 것이 통미봉남정책의 궁극적 목표라 할 수 있겠다.3. ‘민족공조’ 확대통미봉남과 더불어 ‘민족공조’ 론의 확대 또한 미국과 한국정부간의 이간과 갈등을 부추기는 논리로 사용되고 있다. 민족공조란 2000년 6월 남북 정상회담의 ‘6? 15 공동선언’에서 ‘우리민족끼리’ 라는 표현을 계기로 정치담론화하기 시작하였다. “나라의 통일 문제를 그 주인인 우리 민족끼리 서로 힘을 합쳐 자주적으로 해결해 나갈 것” 이라 명시하여 ‘우리 민족끼리’ 라는 표현을 ‘민족공조’ 로 개념화 을 가져올 수 있다” 고 주장하여 민족공조를 본격화 하였고, 2003년 신년 공동사설에서 한반도 정세를 ‘조선민족 대 미국 간의 대결’ 이라고 규정하면서 “민족공조를 통해 미국의 대북압살책동을 분쇄해 나갈 것”이라고 하였다. 이런 식으로 북한은 간헐적으로 반미운동의 확산과 민족공조를 통한 한반도의 단합을 강조해왔는데, 2003년 6월 13일자 노동신문에서는 단적으로 표현을 이렇게 하였다. ‘우리 민족끼리 힘을 합쳐 조국통일의 문을 열어 나가자’ 는 제하의 글을 통해, “우리 민족끼리는 조국통일의 생명선이다. 민족공조로 북남관계 문제, 나라의 통일문제를 슬기롭게 풀어나가야 한다” 라고 주장한 바 있다.북한이 이토록 민족공조론을 내세워 남한과 북한을 하나로 엮으려는 것은, 한미동맹 이전에 북한과 남한은 한 핏줄이기에 우리끼리 잘해보자는 식으로 미국과의 동맹관계를 어떻게든 멀리해보려는 속셈이 다분히 보이고 있다. 또한 핵문제로 인해 미국의 대북압박정책에 맞서 남북이 공동으로 대처해 나갈 명분을 확보함과 더불어 교류협력을 더욱 활성화하여 남북간 화해협력관계를 지속적으로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의 방침이라는 해석들이 제기되고 있다.Ⅲ. 김정일의 대남정책의 전개1. 통미봉남 전술기 (1993년 ~ 1998년)북한은 소련과 동 유럽국가들의 멸망, 그리고 김일성의 사망으로 체제의 존속이라는 중대한 과제에 부딪치게 되는데, 이때의 대남정책은 바로 통미봉남정책으로서 미국과의 교류를 통해 적절히 남한을 배제하려고 하였다.연도별 날짜주 요 사 건1994.7.8김일성 주석 사망.1994.10.21「제네바 합의문」을 채택함에 따라 경수로 지원 및 중유공급, 무역 및 투자제한 완화의 경제적 실리, 연락사무소 개설합의 등 외교적 성과를 거둠.1998.8~11미국과의 4차례의 협상 끝에 평안북도 금창리의 지하 핵 의혹시설에 대한 국제적 현장 조사를 허용(99.7 미 시찰단 금창리 방문).11월 미국은 북한이 핵 및 미사일 등 대량살상무기 생산을 포기할 경우 외교적, 경제적 이익을 제공할까지의 북한과 미국의 주 협상 내용을 기술한 표이다. 보다시피 남한 정부는 북한과 미국 간의 협상에서 아무런 위치를 확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은 우리 정부가 가만히 있었다는 게 아니라, 북한이 의도적으로 미국과의 대화를 지속적으로 시도한 결과이다. 당시에 북한이 통미봉남정책을 추진한 이유는, 미국이 핵문제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취했을 뿐만 아니라, 남한정부가 한미공조체제를 철저히 유지했기 때문이다. 핵문제의 주 당사자가 미국인만큼, 미국과 공조를 취하고 있는 남한과 대화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것이다.2. 새로운 모색기-실리확보기 (1999년 ~ 2002년)북한은 1998년부터 새로운 대남정책의 전환기를 맞이한다. 남한으로부터 경제지원을 얻기 위해 한국의 대표기업인 현대를 통해서 금강산 관광과 대북경제협력의 물꼬를 트게 된다. 더 나아가 현대를 매개로 하여 남북정상회담을 모색하게 되고, 정상회담을 준비하면서 김대중 정부로부터 대대적인 경제지원을 약속받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햇볕정책이다. 사실 정부차원의 대북지원은 이미 1995년 6월 쌀 15만 톤 지원을 계기로 북한주민을 돕기 위한 인도적 대북 지원 사업이 시작되었다. 이듬해인 1996년에는 처음으로 유니세프와 같은 국제기구를 통해 혼합곡물, 분유 등 24억원 상당을 지원하였다. 이렇게 시작된 정부차원의 북한 돕기 운동은 2002년까지 식량과 비료품목에 있어서 총 5,539억원(5억 3,380만 달러)을 지원해주었다고 한다.이 시기가 북한에게 있어서는 경제의 지원과 한미동맹관계 균열을 불러일으킨 실로 일거양득의 시기였다. 2001년 한미 정상회담에서 김대중 정부는 미국 부시정부로부터 햇볕정책을 지지받기를 원했으나 되려 강경책의 부시행정부에서는 이를 강하게 제동을 걸었고, 계속적으로 부시정부는 북한을 악의 축으로 몰아가는 정세로 인해, 한미관계는 예전과 같은 관계를 지속하기는 어려운 상태가 되었다. 결국 북한은 시대에 맞게 실리를 추구하는 외교 전략을 써서 통미봉남정책에서 통남봉미정책으로 .2002년 10월, 미국 측의 일방적인 “북한 핵개발 계획 시인” 발표에 따른 ‘선 핵개발 계획포기’ 의 요구에 대해 “민족최대의 위엄인 조국통일도 가로막고 좋게 발전하는 북남관계도 뒤집어 엎으려는 간악한 흉계로부터 나온 것” 이라며 민족공조론을 강조하였다.정부, 정당, 단체 연석회의에서(2004.1.19) “올해 민족제일주의 기치 밑에 조선민족 대 미국의 대결구도를 실천으로 해결하고 자주통일의 활로를 열어나가기” 위해 우리민족제일주의 고취, 미국의 민족 이간 책동에 맞서 민족공조 실현, 민족의 안녕과 평화를 지키기 위한 반미성전, 6? 15 공동선언의 철저 구현, 선군정치 지지 등 5개 항목을 제시하면서 민족공조를 강조하였다. 선군정치와 우리민족제일주의가 북한뿐만 아니라 남한까지도 대상이 확대된 것이다.4. 핵카드를 통한 정면 돌파 추구 (2006년 7월 ~ 현재)북한은 외교적 고립에 따른 전면 돌파 수단으로 김일성이 집권하던 1980년대부터 핵개발에 박차를 가하게 된다. 그 목적으로 김일성 역량의 대내외적 과시와 주민들의 내부동요 방지를 위한 활용으로 평가 되고 있다. 앞에서 잠깐 언급했던 표를 보면서 연도별로 핵협상을 다룬 주요사건을 되짚어 보도록 하겠다.연도별 날짜주 요 사 건1993.3IAEA가 북한 핵시설에 대한 특별사찰을 요구하자 내정간섭이라는 명목으로 NPT 탈퇴 선언.1993.6NPT 탈퇴 유보조건으로 미국으로부터 핵무기를 포함한 무력의 불사용, 불위협 보장, 상호존중, 내정 불간섭의 외교적 수확.1994.7.8김일성 주석 사망.1994.10.21「제네바 합의문」을 채택함에 따라 경수로 지원 및 중유공급, 무역 및 투자제한 완화의 경제적 실리, 연락사무소 개설합의 등 외교적 성과를 거둠.1998.8~11미국과의 4차례의 협상 끝에 평안북도 금창리의 지하 핵 의혹시설에 대한 국제적 현장 조사를 허용(99.7 미 시찰단 금창리 방문). 11월 미국은 북한이 핵 및 미사일 등 대량살상무기 생산을 포기할 경우 외교적, 경제적 이익을 제공할 수 있는 취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