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론이기주의적 윤리학자에 의하면 인간은 하나의 행위가 자기 이익에 좋은 결과를 산출할 때 그 행위를 옳다고 생각한다고 한다. 즉 인간은 타인이 아닌 자기 이익, 자기의 행복만이 인간이 하는 행위의 전제 조건이 된다는 말이다. 따라서 이들은 모든 인간이 자기의 이익 즉 자신의 행복을 위하여 항상 고민하고, 이를 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본다. 이기주의적 윤리학자의 말을 빗대지 않아도 인간이 행복을 찾아 헤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일 것이다. 즉 사람이 행복해 지길 원한다는 것과 행복을 위해서 노력한다는 점은 누구에게나 공통된 것이다. 그렇다면 행복에 대해서 이 책의 주인공인 라셀라스와 나는 어떤 차이점을 가질 것인가? 혹은 어떤 유사점을 가질 것인가? 나는 이 부분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내가 어떤 행복을 찾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냐에 대해 고민해보게 되었다.2. 본론라셀라스는 모든 것이 완벽히 갖춰진 ‘행복의 골짜기’에 살지만 행복함을 느끼지 못했다. 그래서 완벽한 행복을 찾아 ‘행복의 골짜기’를 탈출하게 되고 어떠한 ‘삶의 선택’이 인간에게 행복을 안겨줄 수 있는지에 대해 탐색해 나간다. 그러면서 ‘골짜기 너머의 삶’ 속에 벌어지는 인간들의 일반적인 운명을 탐색해 나간다. 그리고 이 여정에 온갖 학문을 섭렵하고 은둔하며 사는 학자 이믈락과 그의 여동생 네카야 공주가 함께하게 되고, 권력의 다툼이 벌어지는 공적 삶과 가정의 소소한 불행이 끊임없이 벌어지는 사적 생활을 체험하면서 인간 본성과 삶의 본질에 대해 탐구한다. 나 또한 라셀라스와 마찬가지로 내 삶에 있어 어떠한 것이 나에게 행복을 줄 수 있는지에 대해 많은 생각과 시행착오를 겪고 있다. 오늘 무엇을 먹어야 좋을까? 어떤 옷을 입어야 좋을까? 등의 단순한 고민이 아니라고 해도 장차 내가 어떠한 일을 하고 살아야 내가 그 일에 만족하고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있을까? 또는 어떠한 삶의 태도가 나의 삶에 행복을 가져다줄까에 대한 심도 있는 고민을 하는 과정에 있다. 그리고 그 고민의 끝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지만 어떤 식으로든 행복으로 귀결될 수 있도록 안간힘을 쓰고 있다.나는 고등학교 입시지옥에서 탈출하여 대학이란 곳에 입학을 하였다. 그리고 나는 대학 입학 후에도 내 적성과 자아실현의 여부, 사회적 명예, 경제적 부 등을 따져가며 내 진로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다. 과연 내가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내가 어떤 일을 하면 평생을 행복하다고 생각하며 살아갈 수 있을까? 난 이 세상의 다른 사람들, 라셀라스와 마찬가지로 ‘진정으로 행복한 인생이란 어떤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고 탐구하는 과정에 있는 것이다. 하지만 아직까지 내가 어떤 일을 해야 행복해 질 것인지에 대해서 확실한 결론을 내지 못했다. 이 고민은 내가 죽을 때 까지 해야 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왜냐하면 나의 행복에 대한 추구, 더 나은 삶에 대한 욕구가 있어야 더욱 노력하는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이다.라셀라스는 ‘행복의 골짜기’에서 물질적 풍요를 얻으며 어느 것 하나 부족한 것 없이 살아가지만 ‘행복의 골짜기’ 저편의 세상에 대한 궁금증을 버리지 못한다. 이는 인간의 마음이 지닌 욕망은 무한하여 인간은 물질적 욕구가 모두 만족이 되어도 정신적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노력하기 때문이다. 즉 현재 주어진 것 이상의 새로움과 변화를 무한히 추구하여 희망을 갖고 삶을 정체되지 않고, 보다 나은 쪽으로 발전하게끔 한다. 나 또한 현재 주어진 나의 삶을 100% 만족하고 살지는 않는다. 라셀라스는 물질적 풍요를 모두 충족시키고 정신적 풍요를 위해 탐구했다면, 나는 물질적 풍요, 정신적 풍요 어느 것 하나 완벽하게 갖춰지지 않은 상황이기 때문에 물질적인 면, 정신적인 면을 모두 충족시켜서 궁극적으로 나의 삶에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있도록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라셀라스 왕자 일행은 지적 순례를 위해 이집트 변방과 카이로를 유랑하며 많은 군중들을 만나게 된다. 이러한 과정에서 과학 기술에 수반되는 윤리적 문제에 대한 이성적 사유에서부터, 과대망상증에 빠진 천문학자의 이야기), 인간관계의 사회적 가치 등에 대해 탐구한다. 즉 라셀라스는 우리의 삶 속에서 부딪히기 쉬운 여러 경험의 양상과 제반 문제에 대해 말하고 있는 데, 나는 이것을 읽으며 어떠한 삶이 나에게 행복을 가져다 줄 것인가에 대해 생각해보는 기회가 되었다. 라셀라스가 ‘행복의 골짜기’를 넘어 일반 사람들의 삶을 직접 체험하면서 진정한 행복에 대한 탐구를 해가듯 (라셀라스와 같이 많은 것을 체험하고 느끼고 있지는 않지만) 나 또한 지식의 습득과 세상에 대한 경험을 통해서 나의 행복을 찾아가고 있다고 생각했다.그러나 라셀라스는 인간의 초월적 지향이 매번 좌절되는 경험을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는데 세상에 대한 관찰, 경험, 토론, 지도를 통해 결국 현세의 삶에서는 절대적 행복을 성취할 수 없음을 깨닫는다. 다시 말해서 삶은 인생무상이며 허무하다는 궁극적인 한계에 봉착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지금껏 추구하고 있는 행복이 쓸데없는 환상에 불과한 것인가? 행복을 좇지 않는 삶은 나에게 어떠한 의미가 있을까? 한마디로 나를 회의론에 몰아넣고 있었다. 만약 행복은 절대로 성취될 수 없다면 사람들이 이토록 열심히 살아가지는 않을 것이다. 사람들은 어떤 식으로든 행복감을 느낄 수 있고, 설사 행복을 찾지 못한다고 해도 절대적 행복을 누릴 수 없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사람들은 꿈을 향해 하루하루 나아가고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이 책은 역사적 인물에 대해 평가를 하고 있으며 인물에 따라 여러 장으로 구분하는 병렬식 구성을 따르고 있다. 그리고 각 장마다 역사적 인물에 대한 저자의 객관적인 평가를 볼 수 있으며 독립운동사에 대한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있는 점이 특징이다. 한국독립운동은 다양한 운동이념과 방략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독립운동사에 나타나는 인물들의 운동노선과 이념도 다채롭다. 이 책은 이러한 점에 착안해서 책을 구성하고, 서술해나가고 있다.우선 1장에서는 ‘도산 안창호와 임시정부 국내 특파원’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도산은 통합임정이 성립되어 이동녕 내무총장이 취임하기 전까지 특별한 사명을 주도했다. 여기서 특별한 사명이란 선전과 시위운동, 연통제 실시, 비밀결사 조직과 연계활동, 독립운동자금 모집을 뜻한다. 도산 주도기 에는 이런 특파원 파견이 매우 왕성하였고, 파견 대상지역 또한 전국적이었다. 그러나 이동녕 총장 취임 이후 특파원 파견은 급격히 감소했고, 파견 대상지역 또한 국내보다는 만주. 노령에 집중됐다. 이는 도산은 국내에서 자신과 임정의 영향력을 제고하려 한 데 비하여 이동휘와 이동녕은 자신들의 활동지역에서 임정의 영향력을 유지하고 확보하려 했기 때문이라고 이해된다. 특히 특파원들의 노력 덕분에 일왕의 생일인 천장절을 전후해서 국외 상해에서 선언서가 발표되고 국내에서도 대대적인 시위운동이 전개되었다. 이러한 임정 파견과 활동은 국내외 동포에 대한 통치의지를 실질적으로 구현한 것이다. 그러나 임정 지도부 내부의 세력 유지. 확장 등 역학관계, 그리고 영향력 확대수단으로 이용된 면도 없지 않다. 도산 안창호에 대한 전기문은 어릴 때 읽어 보았다. 중. 고등학교 다니면서도 국사 교과서에서 도산 안창호의 업적에 대해서 배운 기억이 있다. 하지만 그가 임시정부 국내 특파원 일을 했다는 점 조국의 독립을 위해 이처럼 많은 활동을 했다는 내용은 알지 못했다. 1장을 읽으면서 그의 업적에 대해 자세히 알 수 있었고 많은 조상들이 이처럼 주도면밀하게 독립을 위해 싸웠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2장에서는 ‘백암 박은식과 도산 안창호의 민족운동론’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이 두 사람은 출신성분과 수학과정이 모두 달랐다. 하지만 둘 다 조국 근대화와 독립이라는 역사적 과제를 해결하려는 의지가 있었기 때문에 신민회 이후 서로가 서로를 의식하며 이해하고 의지해 나갔다. 또한 이 두 사람은 민족운동 세력의 통일과 통합을 중시했고 교육과 언론을 통한 계몽운동, 민족운동 주체로 청년학생을 중요하게 인식한 공통점이 있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민족운동론에서는 차이가 있었다. 도산은 실제적이고 미래지향적이었다면 백암은 정신적이고 과거 지향적이었다. 이는 서구적 합리주의와 실질주의로 교육된 도산의 경험과 사상이, 전통적 한학을 수학하고 역사를 중시한 백암과 달랐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백암과 도산은 상호 대립적이 아닌 보완적, 동반자적 관계를 유지했다. 2장에서는 백암과 도산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비교하는 방식을 사용했다. 보통 한사람의 내용만을 설명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이런 다른 설명 방법을 통해 백암과 도산에 대해 잘 이해할 수 있었고, 서로의 장단점도 비교할 수 있었다.3장에서는 ‘해공 신익희의 생애와 민족운동’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특히 해공의 생애와 활동, 민족교육운동에 대해 잘 알 수 있다. 해공의 생애에 큰 영향을 준 것은 가학인 양명학이었다. 이는 해공이 시종일관 독립운동, 민족교육운동을 전개할 수 있었던 기반이 됐다. 또한 실력 양성을 위해 한성외국어학교에서 신학문을 수학하고, 독립운동의 역량을 쌓기 위해 일본유학을 단행한 것에서 알 수 있듯 일본 식민지 상황에서 현실을 타파, 극복하기위해 노력한다. 1918년 11월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밀의한 뒤 만주. 노령. 상해 등지의 독립운동계를 순방하며 공동투쟁 방안을 모색하였다. 그리고 3.1운동 중에는 서울에서 학생 중심의 제2차 대규모 시위운동인 3월 5일 남대문역 앞 만세시위운동을 배후 주동한 뒤 중국 상해로 망명했다. 중국 망명 후에도 민족교육운동을 실시하였는데 주로 군사교육에 치중했다. 섬서성 독군 호경익의 후원으로 분용대를 조직하여 군사교육을 하였고, 민족혁명당 군사부 교관으로 낙양군관학교 졸업생, 조선청년전위동맹원, 나아가 조선의용대 병사들에게도 민족교육을 실시했다. 이는 해공이 무장투쟁 중심의 독립운동 방략을 견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해공은 독립운동과 지속적인 민족교육운동을 전개했기 때문에 환국 직후 ‘국민의 대학’, ‘민족의 대학’ 설립운동에 앞장섰다. 결국 국민대학의 설립에는 임시정부의 국민교육과 민족교육 이념, 해공의 구국독립운동 이념과 민족교육 이념, 양명학적 실천정신이 투영되어 있는 것이다. 3장에서는 해공 신익희의 생애에 대해서 차례로 설명하고 있는데, 이 부분은 전기문을 읽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즉, 쉽게 설명되어 있어서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해공 신익희 선생은 나의 모교 ‘국민대학교’를 설립하신 분이다. 그분의 이름만 귀에 익었지 그 분이 어떤 분인지 일제 때 어떠한 일을 하셨는지는 잘 알지 못했다. 이 글을 읽으면서 그 분에 대한 지식뿐만 아니라 국민대는 ‘민족의 대학’이며 ‘국민의 대학’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모교에 대한 자부심을 갖게 되었다.4장에서는 ‘하산 양기하의 생애와 무장투쟁’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는 하산의 생애와 활동을 설명하고 있는데, 그의 생애와 활동에서 두드러진 특징은 첫째, 그가 민족독립의 길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는 자신의 역량을 최대한 발휘해 민족해방과 조국광복을 위해 노력하다 독립운동 전선에서 산화했다. 둘째, 그는 독립운동 방략을 항일 무장투쟁에 두고 있었다. 셋째, 항일 무장투쟁단체에서 교육, 자치행정 분야를 담당했다. 넷째, 그는 지역적 한계를 뛰어넘어 평안도 출신 독립 운동가들과 주로 같이 활동했다. 이는 그가 이념적 공감대로 지방색을 극복했던 때문으로 생각된다. 다섯째, 그는 근왕주의자에서 민주공화주의자로, 나아가 사회주의를 일정 부분 수용한 진보적 민족주의자로 변신하며 독립운동을 전개해나갔다. 4장은 다른 장에 비해 딱딱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이는 전체적으로 딱딱한 구성 때문이기도 하지만 내가 다른 인물들에 비해 양기하라는 인물에 대해 잘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보통 자기가 어느 정도 아는 사실에 대해서 책을 읽거나 설명을 들으면 이해도 빠르고 잘 기억할 수 있다. 하지만 잘 알지 못하는 내용일 경우 책을 읽거나 설명을 들어도 잘 이해할 수 없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4장은 나에게는 재미없고 딱딱한 게 당연할지도 모른다. 이처럼 저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예시나 일화를 들어 독자가 잘 이해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5장에서는 ‘추강 김지섭의 생애와 이중교 투탄 의거’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는 추강의 생애와 독립운동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추강은 김응섭과 홍범식의 영향으로 근대의식에 눈뜨고 민족의식을 각성했으며 독립정신을 고양했다. 또한 의열단에 가입해서 실천적 독립운동을 하기 시작했고, 결국 ‘이중교 투탄 의거’를 통해 민족사에 우뚝 선 존재가 되었다. ‘이중교 투탄 의거’에서 비록 폭탄은 터지지 않았지만, 조선인의 민족적 복수와 민족해방운동의 결의를 표현하는 데는 충분했다. 추강은 법정에서 “일본에게 모욕을 당한 때에 분개하여 한 것이요. 처음은 그렇게 깊이 생각하지 않았으나 모욕을 당하고 생각함에 생명을 희생하여도 아깝지 않았소.”라고 말했다. 이처럼 일본 법정에서 강인한 민족의식과 조국독립에 대한 신념을 유감없이 표출했다. 추강의 태도는 안일한 생각을 하며 살아가는 우리에게 좋은 교훈이 된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의지를 굽히지 않고 민족의 해방과 조국의 평화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쳤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이중교 투탄 의거’는 나석주 의사의 동척 투탄의거에 영향을 주었고, 이봉창 의사의 일왕 저격 의거의 단초가 되었다. 5장에서는 특히 김지섭의 일화를 통해 그의 생각과 그 당시 상황에 대해 잘 알 수 있게 해준다. 법정에서의 일화와 옥중 투쟁 상황을 서술한 것이 그 예이다. 또한 그 당시 신문 기사와 책, 통해서 추강을 잘 표현하고 있어서 독자가 잘 이해할 수 있도록 했다.6장에서는 ‘이봉창의 일왕 저격 의거와 반향’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특히 이봉창 의거에 대한 한. 중. 일의 반향을 살펴보았다. 한국독립당은 의거 직후인 1932년 1월 10일 선언문을 발표하였다. 이를 통해 의거에 대한 공개적 지지와 민족적 정당성을 밝혔다. 그리고 ‘동아일보’에서 이봉창 의거와 관련한 보도를 냈다. 하지만 총독부의 보도통제로 인해 직접 관련 기사가 보도되진 않았다. 그 이후로도 이봉창 의거와 관련해서 구체적인 보도를 할 수 없었다. 중국은 의거에 대한 반향이 매우 광범위하고 우호적이었다. 이는 일제 만주침략 이후 고조된 중국 민중의 항일의식을 반영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봉창 의거는 일본인들에게 자기반성의 계기를 준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극우적 분위기와 그 경향성을 고조시켰다. 결국 대외적으로는 침략전쟁의 확대, 대내적으로는 군국주의 체제의 심화를 가져온 계기가 되었다. 이는 또한 소련과 인도. 미얀마 등지에서도 많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이봉창 의거는 이후 국내의 독립운동에 분명히 영향을 주었을 것이고 역사적으로도 큰 의미를 지닌다. 목적한 대로 일왕을 처단하지는 못했지만 경시청 정문 앞에서 일본인이 신성시하는 일왕을 향해 폭탄을 던졌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쾌거가 아닐 수 없었다.
1.들어가며한국 현대사에서 한국전쟁은 오늘의 우리들의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끼진 사건 중에 하나다. 이 전쟁의 결정적 요인은 남북의 분단이라고 생각된다. 제2차 세계대전의 종결과 함께 1945년 8월 15일 한반도는 일본의 식민통치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곧이어 대외적으로는 외세에 의해 한반도의 분할이 결정 된데 더하여 대내적으로는 한국 독립운동 세력의 합작이 성공하지 못했고, 이로 인해 한반도의 분단의 원형이 이 시기에 거의 결정되었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지난 2000년에 있었던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과 그 이전의 일련의 남?북간 평화를 위한 이루어지고 있지만, 우리의 염원이라 할 수 있는 한반도의 통일은 아직 소원한 것처럼 보인다. 결과 국부의 다량을 소모적인 군비로 지출할 뿐만 아니라, 보다 더 심한 문제는 반세기 동안의 분단은 같은 민족임에도 불구하고 민족성의 이질화를 가속시키고 있다. 어쩌면 이러한 문제들은 우리세대가 풀어야할 가장 큰 과제일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문제의 출발점이라 할 수 있는 한국 분단에 대한 인식은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즉 위에서 잠시 언급한 것과 같이 분단을 단지 지나간 역사의 한 장면으로 치부해 버리기에는 분단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미친 영향은 너무나 크기 때문이다. ‘조순승’의 「한국분단사」를 서평과제로 제출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먼저 이 글에서는 이책에서 강조하는 분단의 원인에 대한 대외적(수정주의적 입장)요인의 고찰, 즉 미국의 정책이 한반도 분단에 큰 역할을 하였다는 점과 더불어 대내적(재수정주의적 입장) 고찰)과 함께 한국 분단의 원인을 찾아보고자 한다.2.분단의 원인에 대한 대외적 고찰(미국의 대한반도 정책을 중심으로)우리 민족은 1945년 8월 15일 일제의 압제에서 벗어났지만 통일국가를 수립하는데 실패하고 이어 1948년 남북한에 각각 정권이 들어서면서 분단을 맞게 되었다.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더욱 굳게 뿌리내린 분단 구조는 이를 유지하려던 세력들의 영향을 받으면서 변화해 왔다. 따라서 통 싹이 돋기 시작하였다. 그 원인은 먼저 해방이 우리 민족의 손으로 쟁취되지 못하고 연합국의 승리에서 '주어진' 해방이라는 데서 비롯되었다. 즉, 해방과 더불어 미국과 소련이 38선을 경계로 한 남북한의 분할점령은, 곧 미국과 소련으로 대표되는 자본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의 대립을 우리 민족에게 강제하였다. 또 미, 소의 분할점령 속에서 통일된 민중권력의 수립문제를 놓고 민족 내부에 치열한 계급대립이 벌어졌다. 이러한 세계체제의 대립과 민족 내부의 대립을 함께 포괄하는 분단의 원인은, 그 뒤 남북한의 이질적 발전과 민족 안의 적대관계를 규정하는 분단의 성격으로 이어졌다.그리고 이어진 한국전쟁은 분단을 더욱 뿌리내리게 하고 분단의 성격을 새로운 형태로 강화시키는 중요한 역사의 계기가 되었다. 전쟁 뒤 남북한은 각각 서로 다른 사회발전의 길을 추구했다. 이 과정에서 남북한은 안으로 자신의 체제를 위협하는 요소를 없애고 체제이데올로기를 강화하면서 자신의 체제에 걸맞은 정치, 경제의 틀을 완성해 나갔다. 남한은 반공을 앞세운 자본주의의 길로, 북한은 김일성 유일 지도체제를 중심으로 하는 사회주의 길로 발전해 갔다. 한국전쟁 뒤 38선을 사이에 두고 미, 소를 중심으로 한 자본주의 사회주의 두 진영의 대립이 이제는 휴전선을 사이에 둔 남북한의 체제 대립으로 강화되면서, 분단은 더욱 뿌리를 내리며 고착되었다.위와 같은 인식의 틀 위에서 먼저 한국 분단의 대외적 원인을 살펴보기로 하겠다. 대외적 원인의 분석에 있어서 가장 큰 틀은 제2차 세계대전이후 고착화되기 시작한 미국과 소련양국의 이해관계 대립에서 비롯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대외적 원인에서 가장 중요한 사항은 냉전의 시작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즉 제2차 세계대전이후 세계체제의 변화에 먼저 주목해야 할 것이다. 전후 미국은 자본주의 권에서 자국의 입지강화와 그리고 상대적으로 영국, 프랑스의 영향력 감소 등으로 기인한 범미주의의 확산을 그 국제 정치적 특징으로 하고 있었다. 반면 소련의 경우 이전의 일국사회주의에서 분할점령과 미국이 남한에 구축한 행정기구를 북쪽까지 확대시키는 지배전략으로 바뀌었다. 이러한 정책의 일련의 과정으로 1945년 12월 모스크바 3상 회의에서 조선임시정부수립에 대한 합의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이 원칙에 대해 곧 미국이 주도하여 구성한 친미우익의 남한 민간행정기구를 소련이 점령한 북한지역까지 확대시켜 조선임시정부의 모체가 되도록 하고 궁극적으로는 독립된 조선에 친미우익정권을 구축한다는 원칙을 철저히 관철시키는데 주력하였기 때문에 소련과의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은 채 조선의 분단은 고착화로 치닫게 되었다.이 안은 동아시아 식민지국에 적용될 보편적 전후처리 방안으로 미국주도의 새로운 세계질서구도와 결합된 정책이었다. 조선 등은 자치능력의 배양이라는 과도기가 필요하다)는 허구적 구실 하에 이 지역에 기존의 중국이나 구 식민모국인 유럽이나 일본의 영향력을 약화시키고, 아시아에서 격렬해지는 민족주의 욕구를 제한적으로 수용하고, 미국의 막강한 정치력과 경제력을 바탕으로 영국과 중국을 끌어들여 소련을 견제하고 미국의 장기적 이해를 관철시킨다는 정책으로 이해할 수 있다.) 동시에 사회주의혁명세력이 비교적 강한 이 지역에 5년이나 10년간의 미국주도 신탁통치를 실시함으로서 신속한 사회주의혁명을 저지시켜 미국중심의 세계체제에 편입시킨다는 구상이었다. 그러나 이 안은 소련이나 영국의 협조와 이해를 전제하여야만 제대로 실행이 가능하였다. 그러나 이는 당시 영국과 중국이 한반도에 대한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없었다는 점, 그리고 실제적 이해관계 당사국이라고 할 수 있는 소련의 비협조로 이루어지기 힘들었다.그러나 이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위와 같은 미국의 기본적인 정책들은 실제적인 측면에서 상이하게 나타나고 있다. 즉 미국이 의도하던 구상과 부합되지 못하였다. 이점에 대해서는 전후 미국의 한반도에 대한 초기 정책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다. 이는 미국이 관동군을 비롯한 일본군의 전력을 과대 평가한 나머지 소련군의 극동참전을 적극 권장하였고, 이를 유도하기 위해 전후 처리한 한국독립의 약속은 점점 멀어져만 가게되었다. 이 기간에 소련은 북한에서 사회주의국가의 건설을 당면 목표로 삼고 북한 단독 정권의 태아를 만들에 내는 데 성공함에 반해, 미국은 처음에 일본의 구 지배 구조마저도 존속시키려 했을 정도로 미온 정책을 취하여 한민족 내부에서 하나의 권력중심(Power Center)을 만들어 내지 못했다. 미국은 이점에 대해서 미?소 공동위원회를 통해 한반도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을 보였다. 결론적으로 미?소 공동위원회의 실패하였다.) 그러니 이는 처음부터 불가능한 것을 달성하려고 시도했다는 점에서 놀라운 일이 못되었다. 양측의 목적은 정반대 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즉 미국은 한반도에서 친미 우익정권의 수립을 추진하였지만, 소련의 경우 자신의 우호세력 즉 공산정권이 한반도내에서 형성되길 희망하였던 것이다.한국 분단에 대한 대외적 요인을 요약하자면 한반도에 대한 미국의 정책적 실수와 미국과 소련의 한반도에 대한 정책들이 타협점을 찾지 못하고, 해방직후의 분할점령이 그대로 고착화되어 한반도에서 분단체제가 형성된 것이다.3.분단의 원인에 대한 대내적 고찰(한국 내 정치단체의 움직임을 중심으로)여기서는 한반도 분단의 내적 요인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한다. “조승준”의 「한국분단사」에서 강조하는 대외적 요인(미국중심) 이외에도 대내적 요인이 한반도의 분단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한반도 분단의 대내적 요인은,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당시 국내에 산재하고 있던 여러 정치 단체들의 협력결여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미군 점령초기 한반도 내에는 ‘조선건국준비위원회(건준)’)에 의해 설립된 ‘인민공화국’이 존재하였다. 이는 정부와 같은 모양을 갖춘 단체로서 전국에 대한 지배권을 주장하였다. 이는 실제적인 정부의 기능을 발휘할 수 있는 잠재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실효를 거둘 수 없었다. 이는 ‘인민공화국’의 좌익적 성향이 미국의 지지를 이끌어내지 못하였던 것이다. 이후 좌?우익간의 분열)은 심화되고 협력의 길을 찾기가 힘들었다.그러운동은 비교적 광범위하게 형성되었던 중도적 정치세력의 지지를 받고, 또한 한반도가 공산화되지 않을 것이라는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정)에 따라 한반도 문제를 해결하려는 정책을 버리지 않고 있던 미국의 지원 하에 추진되었다. 그러나 좌익의 극좌화와 우익의 극우화가 급격히 이루어지고, 미?소 공동위원회가 결렬되는 한편 단독정부의 수립의 구상이 강화되고 미국의 한반도 정책이 단독정부 수립방안으로 전환됨에 따라 이 운동은 실패로 끝나게 된다.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한국분단에 있어서의 내재적 요인은 국내 정치세력들간에 한반도에서 통일국가 수립을 위한 협력이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이 큰 원인으로 작용하였던 것이다.4. 결론앞서 언급한 과정을 거치면서 남북한에 사실상 두 개의 실질적 정부가 수립됨으로서 한국분단은 고정되고 말았다. 그렇다면 누구에게 그 분단의 책임이 있는가? 우선 대외적 요인으로 연합국의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다. 이들은 카이로 선언이후 적절한 시기에 한국을 독립시켜주기로 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군사적 독립과, 그들이 원칙적으로 합의했던 신탁통치에 대해서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았다. 여기에서 특히 미국의 책임이 크게 부각된다. 미국은 한국의 신탁통치의 제안국 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련의 전시 연합국회의에서 이 문제에 대해서 구체적 합의를 이룩하지 못하고 있다가 스스로가 불러들인 소련군의 한반도 진입을 보고서야 38도 선에서의 분할을 결정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소련 역시 분단이 고착화에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다. 소련은 한국의 통일된 민주주의적 정부를 수립하는 것에 대해 협력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이를 방해했다. 따라서 한국의 통일 여부 관건은 주로 소련정부가 쥐고 있었다. 아시아에서 또 하나의 위성국을 수립하여 한국을 지배하려고 하는 소련의 대한반도 정책이 한반도 분단의 고정화에 결정적인 요인이었다.그러나 대외적 요인 못지 않게 한국내부에서의 단일 국가 수립에 대한 역량부족 역시 분단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1. 서론흔히 ‘집터가 안좋다 혹은 묘자리가 안좋다’,‘조상의 묘를 잘못써서 집안이 망했다’라는 말을 들어봤을 것이다. 이처럼 현대의 일반화된 관점에서 볼 때 풍수란 묘지의 길흉을 점치는 법술로 인식되었다. 하지만 예전 고대에는 묘지 뿐만 아니라 집터를 보거나 나라의 복을 빌고, 수호하고 적을 진압하고자 할때 탑을 세우는 등 많은 곳에 활용했다. 다시 말해서 풍수지리설은 우리 역사의 흐름 속에 큰 역할을 담당했다.풍수지리설은 땅과 인간과의 관계 즉 땅과 그곳에 거주하여 살고 있는 사람들과의 길흉화복 관계를 설명하는 이론이다. 이는 우리 민중의 정신 및 역사에서 적지 않은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풍수지리설의 철학적 근거는 역과 음향오행사상인데 풍수지리에서는 땅의 모양새가 그 곳에 사는 사람들의 운명을 결정한다고 보고 있기 때문에 지세가 바뀌지 않는 한 인간의 운명을 바뀌지 않는다고 본다.풍수지리설은 신라 말기 신라의 국력이 급격히 쇠퇴할 때 중국에서 전래되었다고 보는 도참사상과 결부되어 지방호족과 민중에 널리 보급되면서부터 유행했다. 이처럼 풍수지리설이 민중의 마음속에 깊이 파고 들 수 있었던 것은 사회 정치적 혼란으로 인한 민중들의 삶이 불안했기 때문이다. 인도에서 전래된 불교는 중국의 전통문화와 충돌하면서 결국 중국 전통의 문화를 포용하게 된다. 그러한 과정에서 중국 전통의 도참설도 불교와 자연히 융합되었을 것으로 본다.우리 나라에서도 고려 이후 도참설은 풍수지리설과 결합하여 폭넓게 민심을 지배하고 유행하게 되어 오늘날까지도 민중정신사, 혹은 민간신앙의 한 주류를 형성하고 있다. 도참원리에 의한 비보사탑설은 호국사상의 기반이 된다. 원래 호국신앙은 ‘인왕경’을 강설하는 백고자회 개최, 황룡사구층탑 등 호구사탑 건립등 신라불교의 하나의 특징을 이루고 있었지만, 고려시대에 있어서는 불교의 국가적 전개과정에서 도참적 원리 즉 비보사탑설이 제기되었다.나는 여기서 자생 풍수, 즉 한국 풍수지리의 기본적 의미와 역사에 대해서 알아보고, 도선의 출생과 그 시대적 배경을 라의 풍수에 관해 한반도 자체 발생설과 고대 중국에서의 유입 설이 있다.첫째로 한반도 자체 발생설은 단군신화에서 나타난 풍수적 사상과 내용, 백제의 시조인 온조왕과 고구려의 유리왕이 도읍지를 정할 때 산세를 살피고 난 후에 그 위치를 선정했다는 과정을 근거로 들고 있다. 삼국유사에서는 신라 4대 왕인 탈해왕이 집터를 잘 잡아 왕이 되었다는 기록이 있고, 고분 벽화에는 청룡(동), 백호(서), 주작(남), 현무(북)의 사신도가 그려져 있다. 또한 당시 건설된 고찰의 지형지세 등으로 미루어 보아 삼국 초기부터 국가 경영과 국민의 생활 편리에 풍수가 실용화 된 것으로 추정된다.둘째로 중국으로부터의 유입설인데 여기에서도 순수 중국 유입설과 혼합설의 두가지 기원설이 있다. 먼저 순수한 중국 유입설의 경우, 고대 중국에서 발달된 풍수지리 이론을 통일신라 말엽의 도선국사가 당나라의 일행선사에게 배워 옴으로써 유입되었다는 설이다. 그의 도선비기는 그 후 고려때의 정치, 사회적인 면 뿐만 아니라 조선시대에까지 많은 영향을 끼쳤다. 다른 하나인 혼합설은 자체 발생된 풍수지리 사상이 우리나라에 이미 있어 전해져 오다가 백제와 고구려 시대에 이론이 확립된 중국의 풍수지리 사상이 도입됨으로써 풍수지리론은 서서이 알려지게 되었다는 설이다. 결국 통일신라말기 한국의 자생 풍수가 중국 풍수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짐작되는데 당시 선종 계통의 승려가 당나라에 유학을 하고 돌아오면서 풍수설을 배워와 일반 대중을 포교하는 방법을 활용했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 도선은 이를 우리의 자생 풍수와 접목하여 풍수지리를 집대성 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그러나 우리나라는 원래 산악국으로 도처 유명당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풍수조건이 적합한 곳이 많다. 결국 이러한 자연적 환경이 후대 풍수사상의 성행과 폐해를 유치한 중요한 이유가 되었다. 물론 음양오행사상이라든지 여러 민속신앙 같은 것은 삼국시대에 유행하였지만 삼국시대에는 아직 그러한 술법과 사상을 받아들인 형이 없었다. 따라서 풍수사상의 전래는 신라 통일파들은 풍수지리설을 크게 비난하였으며, 일제 점령기에는 미신으로까지 규정했다. 일제는 풍수지리가 미신이라고 언급하면서도 그들의 식민지 통치를 위해 철저하게 풍수를 이용하였다. 총독부가 중심이 되어 전국의 풍수 자료를 수집하여 명혈의 지맥을 자르고 정기 맺힌 명산에 쇠말뚝을 박는 등 조선 민중들로 하여금 패배의식에 젖도록 하였다. 현대에 와서는 환경 문제가 대두되면서 다시 풍수지리가 활발하게 연구되고 도시 계획 등에 이용되고 있다.(2) 도선의 풍수지리사상1) 도선의 출생과 시대적 배경도선은 신라 흥덕왕 2년(827)에 태어났다. 도선이 태어난 당시는 신라 말기로 불교의 교종에 반발하는 선종이 이 땅에 움트는 시기였다. 교종이 특정 지식이 없이는 접근할 수 없는 데 비해서 선종은 그 건설자인 달마에 의하면 문자 언어를 숭상하지 않고 바로 사람의 마음을 가리켜서 성품을 보아 부처를 이루자는 것이므로 글을 배우지 못한 일반인들이 접근하기 용이한 측면이 있었다. 이러한 경향은 풍수 지리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는 내용으로, 중국으로부터 수입된 이론 풍수가 교종에 비유된다면 도선의 자생 풍수는 선종에 비추어 얘기할 수 있는 부분이 확실히 있다.그의 출생지는 오늘날의 전남 영암군 군서면 동구림리 성짓골로 알려져있다. 이곳은 장흥 사자산에서 광주 무등산, 그리고 정읍 내장산으로 이어지는 호남정맥에 의하여 차단된 서쪽의 광활한 평야지대이면서도 유독 도선의 출생지만은 훗날 ‘정감록’에 나타나는 승지들이 지니고 있는 지세적 특징을 갖추고있다. 즉 나주평야에 속해 있기는 하지만 구림리와 도갑리 일대는 동쪽과 남쪽은 월출산 및 그 줄기에 의하여 잘 가려져 있고 북쪽과 서쪽은 바다에 의하여 다른 지방과 격절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는 훗날 도선을 시발로 하는 자생 풍수의 터잡기 특성에 큰 의미를 부여하게 된다.앞서 말했듯이 중국 풍수는 이론에 충실하여 그의 현장 적용은 쉬울 수 있으나 각 장소에서의 적응성이 떨어진다. 그러나 도선의 자생 풍수는 풍토 그 자체에 순응코자 하는 것이 주목다‘에 의한 것이다. 최유청의 ’도선비문‘에서는 풍수지리 대가로서의 도선을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이인을 통해서 전수받은 풍수지리설은 보살이 중생을 구제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세상을 구제하는 가르침이라 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풍수지리설은 혼란스러웠던 신라 말기에 불안한 세상을 구원할 수 있는 비법이라는 것이다. 특히 산천 순역형세의 집대성을 의미한다.도선에게 풍수지리의 비법을 전해준 이인은 누구인가? 박전지의 ‘용암사중창기’에서는 이인을 지리산 산신이라 하고, 최병헌은 도선이 스승 혜철로부터 풍수지리설을 전수받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최병헌의 이러한 주장은 선종 성립 당시부터 사원택지법을 중심으로 풍수도참을 받아들이고 있다는 사실에 근거한다. 특히 당나라 말기에 이른바 강사지법이라는 양기를 중시하는 새로운 풍수참법이 강서지방에 유행하고 있었는데, 신라 유학승 대부분이 그곳에서 공부를 하였고, 혜철이 법을 받은 서당지장도 그곳에 있었다.또 다른 설로 도선이 일행에게 풍수지리를 배웠다는 설이 있지만 그것은 근거가 매우 빈약하다. 왜냐하면 도선과 일행은 연대적으로 거의 일세기의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도선과 일행과의 관계는 당대 명승이자 풍수지리사상가인 일행선사에 도선을 연관 지으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다.서윤길은 도선의 풍수지리설이나 비보사탑설은 밀교적 법용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혜철이 서당지장에게 밀인을 전해 받았고, 도선도 혜철에게 그 밀인을 전해받아 활용한 것이 비보사탑설이라는 것이다. 그 근거로 도선이 백운산 등에 비보사원을 세우고 약사여래삼존상을 조성하고 있는데, 약사신앙은 중국에서는 기복소재의 법으로 그것이 밀교적 신앙의식의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고 보았다. 다시 말하면 도선의 비보사탑사상은 풍수지리나 도참학에 의한 것이 아니라 밀교사상의 법용에 따라 우리나라 전체를 하나의 만다라로 보고 위치, 방위 등에 따라 사탑과 불상을 세웠다는 내용이다. 이러한 주장은 분명 새로운 것이기는 하지만, 이 주장을 수용한다면 풍수지리 전통이 전혀 인정되지 않는다는 문제가 한 시기였다. 836년 흥덕왕이 죽자 균정과 제융이 왕위를 다투면서 김명이 균정을 살해하고 제융을 왕으로 세웠으나 김명 등이 다시 모반하여 화강암을 자진시키고 김명 자신이 왕위에 올라 민애왕이 되었다. 그러나 청해진의 김양과 김우징은 경주를 침략하고 839년 4월 김우징 자신이 신문왕으로 등극하였다. 진성여왕 시절에는 과도한 세금으로 농민들의 불만이 폭발하여 각처에서 농민 봉기가 잇달았다. 이러한 시기에 도참설은 불안한 민중들의 마음을 사로잡게 되었다.도참설에 의하면 나라에 재난과 변고가 일어나는 것은 천지 혈맥의 부조화에 의해서 생기는 것이라 한다. 그래서 이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산수를 조화롭게 해야만 한다. 이렇게 해서 나온 이론이 비보사탑설이다.비보사탑설은 산천 지리에는 생기가 있어서 순역, 길흉이나 성처, 쇠처가 생기고 그것이 음양상생, 상극 등의 원리에 의해 변화한다는 사상이다. 그 지상이 왕조의 흥망성쇠나 인간 장래의 길흉화복의 근원이 되는 지리쇠왕설로 확장되기도 한다. 왕업과 관계되는 지덕은 쇠처나 역처에 사원을 건립함으로써 생기를 보하지만 맞지 않으면 지덕이 오히려 훼손된다. 따라서 도선은 쇠처, 역처 등을 보아 사원 건립지를 점정하고 그 이외에는 일체의 창건을 막았다. 우리는 여기서도 도선 풍수가 발복의 명당을 찾아 다닌 것이 아니라 병든 땅을 고치려 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재난과 변고를 방지하기 위해 흉처에 사탑을 세워서 지덕을 조화롭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그런데 도선은 풍수지리설을 바탕으로 하여 우리나라의 지세가 아름답기는 하나 계곡이 많아 도적이 일어나기 좋고, 수한이 순조롭지 못하므로 이를 바로잡기 위해서는 사탑으로 쑥을 삼아 뜸질을 해야 한다고 했다. 우리나라의 최초 비보사탑은 황룡사 구층탑이다. 황룡사 구층탑을 세우면 부처님의 위신력에 의해서 국가가 보전된다는 것이다. 도선의 비보사탑설은 ‘훈요십조’ 제 2조에서 역처에 사탑을 창건하여 지덕을 돋우어 산수의 힘을 조화롭게 하면, 왕업의 번창을 기약할 수 잇다고 했한다.
‘나무와 숲이 있었네’를 읽고서나는 ‘나무와 숲이 있었네’라는 책을 읽었다. 처음에 교수님께서 여러 책을 추천해 주셔서 어떤 책을 읽어야 할지 고민이 되었다. 하지만 도서관에서 책을 뒤지던 중 마치 내가 진짜 숲에 온듯한 착각을 느낄만한 책의 표지에 반해서 이 책을 선택하게 되었다. 이 책은 책 표지가 참 매력적인데, 표지를 보면 아침의 이슬이 촉촉이 맺힌 나무와 풀들을 상상하게 했다. 이 숲에 들어가면 시원하고 습한 느낌, 나무와 흙냄새 풀냄새가 날것 같았다. 표지 하나만으로도 나를 감성적으로 만드는 그런 책이어서 한눈에 반했다고 생각한다. 이 책은 숲의 아름다움과 소중함에 대해서 다루고 있는데, 교수님께서 수업시간에 슬라이드 자료로 보여주신 ‘숲’이라는 주제와 맞물려 나의 호기심을 자극했다.이 책은 1~4부로 나뉘어 있으며 저자가 직접 숲을 방문하고 그 숲 혹은 나무에 대한 구전, 역사적 사실 등을 나열함으로써 독자들의 관심을 이끌고 있다. 또한 책의 중간 중간에 컬러플한 사진을 첨부해서 다소 딱딱한 책의 이미지를 탈피했다. 그래서인지 책의 사진들을 보는 것 만으로도 마음이 시원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이 중 1부의 내용이 제일 감명깊었는데, 우리가 익히들은 이야기의 내용을 알기쉽게 풀어서 서술하고 있다. 1부는 점차 퇴색하고 있는 현대인들의 자연에 대한 인식에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 내용이라 생각한다. ‘용계 할배 은행나무’에서 재목으로 팔면 천만원도 채 되지 않는 나무를 보존하기 위해 3년이라는 세월과 20억이라는 거금을 들인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자연을 보존하려는 사람들의 노력에 감명받았다. 자연을 우리가 이용해야 할 대상이 아닌 같이 공존하고 살아간다는 것을 느끼게 한 부분이었다. 또한 우리가 잘 알고있는 ‘정 2품 소나무’의 예에서 단순한 구전이 아닌 우리 조상들이 소나무를 보존하기 위한 노력과 선조의 지혜와 슬기를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솔개마을의 당산 소나무’에서 당산 소나무가 그 마을 주민들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한다는 것과 당산나무를 통해서 자연과 인간을 맺어주는 매개물이 되었다고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숲은 항상 존재하던 것이지만 숲에대한 사람들의 인식이 계속 변화해서 자연을 착취와 지배의 대상으로 보는 현대인의 관점을 비난하는 것도 이 부분에 드러나 있다. 이러한 점에서 1부는 우리가 자연에 대한 어떤 인식을 해야 할지, 자연에 대한 태도는 어떠해야 할 지에 대해서 모범적 사례로 나타내고 있다.2부는 우리 나라의 수도인 서울의 숲이 소개되었다. 맨 처음 조선 숲의 전형인 ‘창덕궁 후원’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는데,후원을 열린 마음으로 느끼고 감성이 가득찬 마음으로 음미해야만 그 진가를 알 수 있다고 역설하였다. 후원은 일제시대 ‘비원’이라고 불리던 곳이다. 그래서 부정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보았으나 얼마전 기회가 닿아서 방문하였는데 그 부정적 인식이 무색하게 도시속의 자연을 느낄 수 있는 곳이였다. 나는 후원에서는 자연과 조화로움을 이루던 조상들의 자연친화사상을 엿볼 수 있었다. 주변의 숲과 건축물이 조화를 이루어 장관을 이루었다. 또한 ‘종묘의 참나무 숲’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며칠 전 다른 교양수업의 답사를 위해 ‘종묘’를 방문하였다. 종묘를 들어가는 입구부터 시작하여 숲이 울창하게 우거져 있어서 마음이 편안해짐을 느꼈다. 그런데 종묘를 둘러싸고 있는 것이 참나무 숲인지는 잘 알지 못했다. 종묘의 정전과 영녕전을 둘러싸고 있는 것이 갈참나무라는 것을 이 책을 통해 알게되었고 참나무 숲이 주는 엄숙하고 경건한 이미지를 이제야 알 것 같다. 다시금 종묘를 방문해서 조상들의 옛 건축물과 자연과의 조화를 느껴보고 싶다. 또한 ‘인왕산’에 대한 내용도 있다. 4월 말에 사제동행 세미나 때문에 인왕산에 올라간 적이 있다. 4월날씨 답지않은 너무 뜨거운 뙤악볕 때문에 곤혹을 겪었다. 인왕산은 아까시나무들이 많았고 웅장한 숲은 아니지만 풀과 나무들이 꽤 많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책에는 인왕산에 대해서 여름 즉 윤오월의 장관에 대해서 높이 평가하고 있었고, 인왕산 바위에 뿌리깊이 박혀있는 토종 소나무에 대해 굽고 못생겼지만 강인한 생명력을 느낄 수 있다고 표현했다. 2부에서는 또한 남산과 아차산, 우면산, 대모산 등 서울 주변의 산들에 대해서 작가의 감상과 객관적 내용에 대해서 서술하고 있다. 여기서 작가는 숲에대한 남다른 관심이 있고, 많은 지식을 독자에게 전달하기 보다는 독자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흥미있는 것, 여러 지식들을 나누어 설명하고 있었다. 나는 이 책이 어렵고 딱딱한 주제가 아닌 쉽고 편하게 숲에 대해 느끼고 이해할 수 있는 책이라고 생각했다.제3부는 한국의 숲에 대해서 다루고 있는데 우리 숲의 여러 모습들을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었다. 나는 여기서 우리나라 구석구석의 숲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었다. 내가 가보지 않았지만 마치 내가 지금 그 숲을 거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작가의 애정어린 서술, 실감나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해 주었다고 생각한다. 제 3부에서는 안면도 소나무 숲이 가장 인상깊었다. 일단 내가 갔던 곳, 숲의 아름다움에 흠뻑 빠졌던 곳이라 더욱 그랬다. 여기의 소나무는 기존의 구불구불한 소나무와 달리 꽂꽂하고 길쭉한 것이 특징이었다. 이는 책에서 이 숲이 다양한 유전변이를 가지고 있어서라고 풀이했다. 또한 해인사를 둘러싸고 있는 크고 울창한 해인총림도 인상깊었다.제4부에서는 세계의 숲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숲이라고 하면 보통 우리나라의 숲을 떠올리곤 한다. 하지만 제4부의 내용과 교수님이 보여주셨던 슬라이드를 통해서 외국과 우리의 숲의 차이점을 느낄 수 있었다. 일단 우리의 숲에 비해 외국의 잘 가꾸어진 숲은 더욱 웅장하고 장엄한 느낌이 든다. 그 이유는 아기자기하고 소박한 아름다움을 지닌 우리나라의 숲에 비해 외국의 숲은 일단 그 크기가 크고 여러 수종의 나무들이 많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규모에 있어서 외국의 숲에 비해 우리의 숲이 왜소하고 나약하다고 볼 수도 있지만, 우리 숲도 제 나름대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숲은 그 크기가 아니라 숲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에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외국의 숲을 부러워 하기 보다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숲을 더욱 발전시키고 가꾸어 나가는 그런 자긍심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마지막으로 열대림의 파괴로 인한 환경문제에 대하여 소개하며 열대림의 가치와 보호의 필요성을 독자 스스로 느낄 수 있도록 서술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