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Report >-제갈공명(諸葛孔明)과 사마중달(司馬仲達)과목명:담당 교수님:학과:학번:이름:1. 서론중국 역사에서 제갈공명과 사마중달은 위(魏), 촉한(蜀漢), 오(吳)로 삼국이 정립되던 시기에 등장한 인물들이다. 제갈량(諸葛亮:181~234)의 자는 공명(孔明)으로 촉한 유비의 수하가 되었고, 사마의(司馬懿:170~251)는 자가 중달(仲達)로 위나라 조조의 수하가 되었다. 두 인물은 지략가로서 당대 최고의 라이벌로 여겨지고 있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두 인물의 능력우열을 두고 의견이 분분하다. 나도 또한 삼국지를 읽으며, 두 인물을 비교하게 되었다. 은연중에 왕위를 찬탈한 사마의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갖고 있었던 나는 제갈량을 재능이 있지만 천운이 따라주지 않았던 이로 동정이 갔다. 그래서 두 인물에 대해 알아보고자 비교조사하게 되었다. 두 인물을 크게 개인적인 측면과 사회적인 측면으로 나누어 각각의 측면이 이들의 행보에 끼친 영향과 그들의 성격을 비교해 보았다.2. 본론(1) 개인적 측면① 성장배경제갈공명과 사마중달은 성장배경에서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제갈량이 곤궁한 어린시절을 보냈던 것에 비해 사마의는 높은 벼슬에 있는 아버지를 두어 어린나이에 일찍 중앙에 진출 할 수 있었다.제갈량은 전한 원제 때 부폐한 황실과 대비되게 강직하기로 이름을 떨친 한사예교위 제갈풍의 10대 후손이다. 서기 181년에 아버지 제갈규와 어머니 장씨 사이에서 3남1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제갈량은 아홉 살 때 어머니를 여의었고, 아버지 제갈규는 벼슬을 살다가 당시 황실이 썩은걸 알고 낙향해서 자식들의 교육에 전념했다. 그런 아버지 밑에서 제갈량은 어려서부터 사서오경을 비롯한 손자나 오자 같은 병법서를 배웠다. 당시의 학자들이 글자 하나하나에 신경 쓰며 정독을 했던 반면, 제갈량은 그 책의 전체적인 내용을 파악하는 통독을 했다 한다. 즉, 제갈량은 유교사상이 뿌리박힌 당시 학풍과는 달리 실학을 위주로 학문을 다루었다. 그는 12살에 아버지마저 여의게 되고, 4남매는 뿔뿔이 흩어지게 된다. 제갈량은 숙부 밑에서 자라고 시골에서 직접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사마의 아버지 사마방은 후한 말에 수도 낙양의 지사를 지낸 인물이고, 젊은 시절의 조조를 낙양 북부의 경찰서장인 북부위(北部尉)로 추천한 적도 있다고 한다. 사마방에게는 ‘팔달(八達)’이라고 불리는 여덟 명의 우수한 아들이 있었는데, 사마의는 둘째아들이었다. 그는 20대 초반의 젊은 나이에 관직에 진출했다. 제갈량에 비해 사마의는 일찍부터 자신의 능력을 펼칠 기회를 얻었다.② 가정에서의 모습제갈공명과 사마중달의 가정에서의 모습은 자료가 별로 나와 있지 않았다.제갈량은 21살의 나이로 천하박색으로 유명하던 면남의 명사인 황승언의 딸 황아추(黃阿醜)와 결혼한다. 제갈량이 왜 처를 추녀로 삼았는지에 대해서는 견해가 분분하다. 공명이 살던 융중이 형주에 있어 공명은 자신의 인맥을 넓히기 위해 황아추를 이용했을 수도 있다. 그가 관중, 악의를 자처하였다는 설도 있다. 실제로 제갈량이 황승언의 사위가 되자 명사로부터 명성이 높아졌다. 때문에 유비가 나중에 형주에 와서 인재를 모았을 때 그 지방의 명사가 즉석에서 제갈량을 추천했다. 한편 황아추는 재능이 비범하였다. ‘연의 제 117회’에서 그녀는 위로는 천문에 능통하고 아래로는 지리에 밝아 육도, 삼략, 둔갑의 병서류는 하나도 꿰어 능통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고 나온다. 제갈량은 그녀의 내조에 의해 학업을 달성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일생의 사업에도 상당한 도움을 받았다. 공명이 남만 정벌 때 사용했던 목우나 유마를 그의 부인이 고안했다는 설도 있다. 제갈량과 황아추의 부부생활은 다정했지만 오랫동안 자녀가 없었다. 제갈량이 황씨를 부인으로 맞이한 것이 27세 이며 아이가 생긴 것이 46세 때이다. 제갈량의 아들에는 제갈첨이 있었는데, 제갈량이 46세가 될 때 까지 자식을 얻지 못해 형 제갈근의 둘째 아들 제갈교를 양자로 삼았다. 어떤 이는 제갈량이 오랫동안 자식을 못 낳은 것에 대해 그의 건강상태를 원인의 하나로 본다. 『성원운보(性源韻譜)』에서 제갈량에 대해 ‘신장이 8척에 몸은 말랐으며 얼굴은 거칠고 마치 송백 같았다. 피부는 바싹 말라 있었지만 혈색과 경맥은 윤택했다.’고 말한다. 실제로 제갈량은 생계 곤란으로 17세 이전부터 생활의 중압감을 안고 유랑 생활을 하여 이것이 건강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사마중달의 부인에 대해서는 자료가 나와 있지 않았다. 그에게는 여덟 아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사마의의 주도면밀함을 물려받았고 마침내 사마의의 손자인 사마염은 위 왕조를 멸하고 사마씨의 서진 왕조를 성립시켰다.(2) 사회적 측면① 등용과정제갈공명과 사마중달의 등장은 닮으면서도 다른 면을 볼 수 있다. 둘은 모두 세번의 출사 권유를 받지만 그 양상이 달라 둘의 입장에서는 차이점이 나타나게 된다.서기 207년 공명이 27세 되는 해에 유비의 삼고의 예에 탄복한 공명은 중앙에 진출하게 된다. 어떤 이는 공명이 조조나 손권 수하에 들어가게 되면 자신의 능력을 모두 못 펴게 될 상황을 고려해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유비를 택해 자신의 능력을 한껏 발휘하려 한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사마의가 23세의 나이로 허난성의 지방관리가 되고 얼마 후 순욱의 천거를 받은 조조는 사마의를 중앙관리로 임용하려고 하지만 사마의는 권모술수가 풍부한 조조의 정치술에 위화감을 느끼고 풍비(관절마비)를 구실로 조조의 부름에 응하지 않았다. 그러나 조조는 포기하지 않고 자신이 승상이 된 후 다시 사마의를 불러 문학연에 임하려고 했다. 응하지 않으면 구금도 불사할 태세였다. 이리하여 사마의는 어쩔 수 없이 중앙으로 진출하게 되었다. 사마의는 마지못해 출사한 것 치고는 그 후 관리로서 순조롭게 승진을 거듭했다. 이렇듯 비슷한 재주를 가진 공명과 중달의 양상은 전혀 다르게 발현되어진다.② 대립과 입장당시 촉한에 비해 위나라는 땅도 넓고 인구도 많으며 군사력도 강했다. 전토의 치안이 안정되어 있었고 내부 결속은 두터웠으며 우수한 인재들은 적재적소에 배치되어 있었다. 반면 제갈량은 전쟁 이외에도 도맡아야 할 일들이 너무 많았다. 전쟁이 오래 갈수록 촉한이 불리해 지기 때문에 공명은 빨리 승패를 결정지으려 하지만 사마의는 그렇지 않았다. 두 인물 모두 전략을 짜는 데 있어 매우 신중하였다. 공명으로서는 나라의 상황이 약했던 만큼 전투 하나하나가 중요했고, 중달에게는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고려해야만 했다. 234년 제갈량은 오장원을 거점으로 둔전을 두고 사마의와 대치하였는데 마침내 병이 들어 그해 가을 5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천문을 살피던 사마의는 제갈량의 죽음과 촉군이 성도로 퇴각하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그는 혹시 이것도 제갈량의 계책이 아닌가 의심하여 감히 추격하지 못했다. 후세 사람들은 이를 두고 그의 소심함을 비웃었다. 그러나 이것은 사마의의 매우 세심하며 신중한 성격에 따른 행동이었을 것이다. 사마의는 신중하면서도 심지가 깊어 자기의 속을 쉽게 노출 시키는 사람이 아니었다. 이로 인해 조조는 그의 능력을 인정해 휘하에 두면서도 늘 경계심을 품고 있었다. 제갈량이 오장원에서 죽은 후 사마의는 공손연을 토벌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것은 위나라가 그를 최전선으로 보냄으로써 정사에 관여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 이었다. 결국 공명은 국가의 운명이 걸린 전쟁이라 신중할 수밖에 없고 중달은 크게 이겨도 견제세력이 늘고, 져도 능력에 대한 의심이 생겨 한직으로 쫓겨날 위험 때문에 신중할 수밖에 없었다.③ 인재관리인재관리에 있어서 제갈공명과 사마중달은 다른 면을 보이고 있다. 공명은 비록 장수가 배반의 여지가 있을지라도 그 능력이 아까워 자기 관리 하에 두는데 반해 사마의는 능력을 떠나 자신의 편이 아닌 자를 제거해 버리는 것이다. 공명의 이러한 모습은 장수 위연에 관한 공명의 태도에서 알 수 있다. 공명은 위연이 반골의 상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의 용맹이 아까워 자신의 수하에 두어 항상 직접 관리하였다. 이것은 공명의 자신감의 표현이자 인재가 부족하였던 촉한의 사정이 반영된 결과이다. 반면 사마의는 자신의 편이 아닌 자는 우선 제거해버리는 편이었다. 위나라는 촉한의 사정과는 달리 말 그대로 인재가 넘쳐나는 나라였으므로 마음에 안 드는 인물을 굳이 자신의 수하에 둘 필요 없이 다른 인물로 대체해 버리면 그만이었던 것이었다.
Ⅰ. 서론그 동안 일본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을 갖고 있던 나는 일본 역사에 대해 관심이 별로 없었다. 하지만 그러던 내가 일본 문화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작년부터였다. 일본 친구들이 생기며, 그 친구들의 특징이 고향에 따라 다르다는 것이 흥미로웠고, 그들이 성장한 나라에 대해 관심이 가게 되었다. 그러면서 일본에 대해 폐쇄적이었던 내가 점차 일본의 독특한 문화를 흥미롭게 바라보게 되었다. 그래서 이번에 일본의 역사에 대해 배워보고자 하였는데, 사전지식이 많이 부족했던 나에겐 일본 역사책을 읽는 과정에서 생소한 용어와 인물 이름 등으로 이해하기에 힘들었다.여기에서는 일본의 근세를 막번체제의 성립과정과 그 체제의 신분구조 및 대외정책, 그 시대의 문화와 전개과정으로 구분하여 정리해 보았다.Ⅱ. 본론1. 막번체제의 성립과정1)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의 전국통일당시 통일을 하는 과정에서는 명분을 위해 천황의 존재가 필요하였다. 천황이나 장군의 권위를 가장 잘 이용한 사람이 센꼬꾸다이묘(戰國大名)세력의 한 사람인 오다 노부나가였다. 그는 1568년 교토로 입성하여 요시아끼(義昭)를 장군으로 삼으므로써 막부의 실권을 장악했다. 그러나 요시아끼가 자기를 제거하려고 함을 알고를 교토에서 내쫑아 아시카가막부(足利幕府)는 멸망했다. 막부를 없앤 노부나가는 천황 영지의 조세를 징수해 주고 천황의 거소(居所)를 수리해 줌으로써 천황은 그에게 우대신(右大臣)이라는 문관위(文官位)를 주었다. 1575년에는 도꾸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과 연합하여 武田氏의 군대를 나가시노에서 대파하였다. 1576년에 교통의 요지인 오미지역에 거대한 아즈치성을 건설하여 그곳을 통일사업의 거점으로 삼으려고 하였다. 1582년에 다키다시를 멸망시켜 천하통일을 눈앞에 두었지만 소수의 병력만을 이끌고 교토의 본능사에서 숙박하던 중에 가신인 아께찌 미쓰히데의 기습을 받고 피습되어 자살한다.2)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전국통일노부나가의 통일 사업을 계승한 사람은 도요토미 히데요시다. 그는 센쇼코시대사람이 실력으로 웃사람을 타도하는 풍조인 下剋上이 만연하였다. 이러한 하극상의 풍조를 타서 각지의 領主로 올라선 세력이 센꼬꾸다이묘이다. 센꼬꾸다이묘는 領內의 군사, 사법, 행정, 정제면의 전반에 걸쳐 독재적으로 일을 처리할 수 있었다. 영내의 國人, 土豪 등은 다이묘의 가신이 되어 주종관계를 밀접히 해나갔다. 가신의 생면, 재산은 다이묘의 수중에 있었고 토지는 일단 다이묘의 지배하에 들어간 뒤 가신에게 부여되었으며 종래의 전통적 관계는 인정되지 않았다. 이것이 슈고다이묘와 센쇼꾸다이묘의 가장 중요한 차이점이다. 가신들은 전쟁의 규모가 커짐에 따라 대병력이 필요하여 조세납입의 증가를 위한 농업을 진흥하였다. 이것은 무사와 농민의 분리를 촉진시켰다. 이러한 兵 · 農 분리책은 도요토미 히데요시 때에 더욱 강화되어서 근세 봉건사회의 신분제도의 기초가 되었다. 그리고 농업생산의 강화는 檢地라는 경작지 조사사업을 통해 활발히 추진되었다. 이외에 황폐한 농촌을 복구하고 농민인구를 조사하는 한편, 관개시설을 개량하였다. 이것들은 조세수입을 증가시키기 위한 방책들이었다.4)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등장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한 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1600년의 세끼가하라전투에서 반대파들을 물리치고 실권을 장악하였다. 그는 1603년 천황으로부터 정이대장군의 위를 얻어냄으로써 겸창막부(鎌倉幕府) 계승의 뜻을 명백해 하였다. 그는 1614년에 시작하여 다음해에 오사카성을 공격하여 도요토미씨를 멸망시켰다.5) 막번체제의 성립(에도 시대)도쿠가와 시대의 정치조직을 막번체제라 하는데 지배자인 장군 아래에 여러 대명(大名)이 자치권을 행사하였다. 그러나 그 자치권에는 많은 제약이 있었다. 막번체제를 봉건제의 바탕위에 선 중앙집권 정치체제라고도 하는 것은 이 같은 대명들에 대한 막부의 강한 통제력 때문이다. 1635년에 쇼군을 정점으로 하여 평상시의 행정부 최고의 직제인 로주와 행정의 실무를 관장하는 3부교라고 하는 직제가 정비되었다. 감찰기관으로서는 다이묘의 동태를 감시하는 오메쓰케가은 기독교의 포교가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침략을 초래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신도가 신앙을 위해 단결하는 것을 꺼려했기 때문이다. 한편, 무역정책은 초기에는 그다지 적대적이지 않았다. 그러나 막번체제가 안정되면서 일본인의 해외도항과 무역에 제한이 가해지기 시작했다. 이것은 막부체제가 경제적 효과보다는 정치적·사상적 통일에 주안점을 두었기 때문이다.3. 막번체제의 전개와 문화1) 도시의 성장막번시대에는 농업을 장려하여 농업발전이 이루어지고 인구가 증가하면서 도시가 성장하게 되었다. 각지에서 관개시설이 정비되고 새로운 경작지가 개간되었다. 농기구도 발전하여 농업생산량이 증가하였다. 또한 화폐경제가 발달하면서 도시 근교에서는 상품작물이 재배되었고 면화, 생사, 마, 차, 담배 등의 특산물은 각지에서 재배되었다. 수공업도 발달하여 처음에는 주로 농업과 연계된 농촌 가내공업이 주류를 이루었는데 기술도 진보하여 각지에서 특산물이 생산되게 되었다. 다이묘들이 재원을 확보하기 위하여 특산품을 보호화고 전매정책을 취하게 되자 생산이 더욱 증가하였다.상업의 발달은 화폐수요의 증가를 초래하여 이러한 수요에 발맞추어 막부는 화폐제도를 정비하고 화폐의 주조권을 독점하였다. 막부가 발행한 화폐는 금화, 은화, 철화가 있었다. 도시와 상업이 발달하면서 에도를 중심으로 하는 교통망과 통신망이 정비되어 수륙의 교통망은 에도와 오사카를 중심으로 발달하게 되었다.2) 근세시대의 학문문화17세기 말에서 18세기 초의 겐로쿠시대에는 막정의 안정과 경제의 발전으로 서민문화가 탄생하게 된다. 이 시기의 문화를 겐로쿠 문화라 부른다. 겐로쿠 문화의 특색은 인간과 사회를 중심에 둔 현실주의와 실증주의의 경향이 강하다는 것이다.이 시대에는 무사의 생활도 크게 변화하여 무사의 대부분은 봉급생활자와 다름이 없었다. 상품경제가 발전하고 물가가 상승하면서 무사의 생활은 점점 궁핍하여져 무사는 신분적으로는 조닌의 상위에 위치하였으나 경제적으로는 조닌이 우위를 점하게 되었다.17세기 후기가 되면서 조닌은 사치스러운 리잡았다. 교토의 기온마쓰리는 오사카의 덴만마쓰리, 에도의 산노마쓰리와 함께 일본 3대 마쓰리로 일컬어지게 되었다.3) 근세시대의 예술문화건축물과 정원을 잘 조화시켰으며 건축물 또한 비대칭적인 구성미를 보이고 있다. 에도 시대 미술의 주류를 이룬 것은 회화라고 할 수 있다. 에도 초기에는 모모야마 시대의 잔영을 그대로 이어받아 가노파 화가들에 의해 큰 규모의 장벽화가 만들어졌으나 가노 단유[狩野探幽]가 새로운 시대 분위기에 맞추어 변화를 시도했다. 서민들의 생활상을 가미한다든지 화초들을 담채로 스케치한 것 등은 시대상이 반영된 것이다. 시민계급의 성장으로 경제적 여유가 생기자 민간화가들이 많이 등장했는데 이에 따라 개성적이고 다양한 화풍이 나타나게 되었다. 우선 시민들의 사랑을 많이 받았던 고린파[光琳派]의 경우 소다쓰[宗達]·고린[光琳]·겐잔[乾山]·호이쓰[抱一] 등 우수한 화가들이 계속 배출되어 중요한 화파로 성장했다. 이들은 야마토에[大和繪]와 같은 전통에 기반을 두고 그것을 보다 아름답게 디자인함으로써 일본인의 미감을 촉발시키고 있다. 부채·마키에[蒔繪]·병풍·도자기 등 여러 부문에 적용된 이들의 작품은 역시 일본미의 한 전형이 되고 있다. 에도 시대에는 막번체제 확립에 의한 봉건 사회가 완성되고 사농공상의 신분제와 쇄국 등의 정책으로 국내 평화가 유지된 시기였다. 상공업의 발달과 민중 계급이 형성되고 봉건제와의 갈등이 표출된 갖가지 문화가 이루어졌다. 건축은 무가의 서원건축과 사원건축이 발달하였고, 특히 조원술(造園術)의 발달이 주목된다. 회화는 가노 탄유[狩野探幽]를 중심으로 하는 가노파와 도사파[土佐派] 등 어용화파에 대하여 서민층에서 육성된 풍속화 등이 있다.4) 막부정부의 궁핍9代 장군 이에미쓰(家光) 무렵에 막부의 제도는 점차 안정되어갔다. 이에 따라 정책의 방침고 강경책에서 온건책으로 옮겨져 갔고, 유교를 중시하는 문치주의적 기풍이 나타났다. 그러나 문치주의는 의식(儀式)·전례(典禮)의 증가를 불러왔고 그에 따라 지출이 상승하여 막부재정을 협하여 해결하도록 하여 판결업무의 효용성을 높였다.교호개혁은 미곡가를 안정시키고, 막부의 재정을 튼튼히 하여 교호개혁은 성공하였다고 할 것이나 막부재정이 충실해 진 것은 결국 농민의 희생을 전제로 한 것이다. 요시무네에 대한 사가들의 평가는 매우 호의적이다. 그러나 일반 민중에게는 그렇지 못했던 것 같다. 어느 낙서에서는 요시무네에 대한 개인적인 불만이 표출되어 있기도 하다. 이것은자그마한 정치 비판조차 처벌되었던 막번체제 하에서의 민중의 유일한 불만 표출의 방법이었을 것이다.6) 다누마시대의 정치와 사회9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시게(家重)는 본래 병약한 사람으로 은퇴하고 도쿠가와 이에하루(家治)가 10대 쇼군으로 취임하였다. 그러나 이에하루도 무기력해 실제 정치는 권신인 다누마 오키쓰구가 행하여 그가 정치를 담당하였던 시대를 다누마(田沼)시대라고 한다.다누마 오키쓰구는 현실적인 정치가로 연공징수에 한계가 있음을 알고 막부의 재정을 충실히 하기 위한 방법을 상품경제의 유통과정에서 찾으려고 하였다. 그는 새로운 정책을 적극 추진하여 막부가 직접 경영하는 기관을 설립하여 동, 철, 조선인삼을 전매하였다. 일반상공업자의 동업조합을 공인하여 각종 명목으로 헌납금을 징수하였다. 하지만 그는 정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공공연하게 뇌물을 받았기 때문에 정치는 부패하였고, 막부의 통제력은 약화되었다.1760년대 이래 흉작이 이어졌고 1783년에 아사마산이 대폭발을 일으켜 분출된 화산재가 햇빛을 차단하여 농작물에 피해주면서 수년간 흉작이 계속되어 수십만 명이 굶어죽었다. 이것을 덴메이 기근이라고 한다. 천재지변이 계속되자 전국 각지에서는 농민봉기가 빈발하였다. 다누마는 이미 1786년에 재직 중의 실정의 책임을 지고 정치에서 물러났으며 영지가 몰수되었다. 이 때 다누마 오키쓰구의 배척에 앞장섰던 인물은 요시무네의 손자이며 시라카와번의 번주였던 마쓰다이라 사다노부(松平定信)였다.7) 마쓰다이라 사다노부와 간세이 개혁1787년 6월 마쓰다이라 사다노부가 난국 수습을 임무를 띠고 로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