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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현대사] 중국 현대사
    ***** 참고문헌 : 최석로, 『다큐멘터리 중국현대사』, 서문당, 1986, p.241~p.341.제 8장 원세개의 야망1. 당소의 내각의 퇴진(1) 원세개 : 그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취한 최초의 모략 - 내각의 경질?임시약법(임시헌법) : 대총통의 독재를 막기 위해 대총통이 발하는 명령에는 국무총리의 부서를 받아야 한다는 규정을 둠but 모조리 무시 - 임시정부를 북경으로 옮긴 반 년 만에 내각을 3번이나 교체(2) 당소의 내각 : 원세개가 대총통으로 취임할 당시의 내각① 당소의 : 원세개의 심복으로서 남북평화회담 때는 북방대표를 맡을 만큼 원세개의 신임을 받음but 남북평화회담을 하면서 동맹회의 이념을 자세히 알게 되고, 크게 감명 받아 동맹회에 가맹② 당소의의 조각 방침 : 이상적인 공화정부의 수립 but 각료들 사이에 의견일치가 이루어지지 못해 불안정→ 내무총장 조병균과 당소의의 의견대립, 보수와 진보라는 사고방식의 차이...⇒ 원세개의 조종에 의한 것 (원세개의 독재를 견제하려는 당소의에 대한 압력)③ 원세개가 중요한 결정에 독단적인 행위 → 분개하여 총리직 사퇴(1) 후임내각 : 중국동맹회와 그 반대세력 사이에서 치열한 경쟁 벌어짐① 동맹회 : 내각의 의사통일을 위해 단독내각을 주장② 반대세력 : 결집체인 공화당은 초연(초당파)을 주장⇒ 원세개가 이러한 다툼을 뒤에서 조정③ 당시의 정당동향 : 신해혁명을 주도해온 중국동맹회가 최대?1912년 3월 3일 : 혁명 실행기관으로서의 비밀조직인 ‘중국혁명동맹회’→ 국정참여를 위한 공개조직인 ‘중국동맹회’로 탈바꿈?남경에서 열린 조직대회 : 회원 4, 5천명이 참집- 전원일치로 손문을 총리에, 황흥?여원홍을 협리, 호한민?송교인?장계?전동을 간사로 선출그 중 여원홍은 곧 동지를 배반하고 원세개의 추종세력으로 돌아섬?동맹회의 정강 : 1. 중화민국을 공고히 한다. 2. 민생주의를 실행한다.but 동맹회가 공개적인 정당이 되면서부터 혁명정신이 퇴화되기 시작(1) 통일당 : 장병린이 이끄는 중화민국연합회 + 돈을 위해 범행), 많은 증거품 발견→ 원세개 : 북경에서 아무런 증거도 없는 암살미수 사건을 날조하여 빠져나가려 함3. 높아가는 원세개 타도의 소리(1) 선후차관 : 송교인 암살사건과 더불어 제 2차 혁명의 배경이 됨? 원세개의 차관 : 혁명파를 강압하고 자기의 독재정권을 확립하기 위한 돈줄→ 차관을 개인적 야욕만을 위해 유용함→ 차관을 제공한 나라들도 이것을 기회삼아 중국의 이권을 헐값으로 마구 집어삼키려 함(2) 4개국(영?미?독?불)은행단에게 최초의 차관 요청 : 대립관계에 있던 남경정부에 긴급융자를 하기 위한 것?혁명군에게 퇴직금을 주어서 군대를 해산시킴과 동시에 금력으로써 자기 과시?남쪽 세력을 북쪽으로 끌어가려는 정치적 목적을 가짐(3) 염세를 담보로 차관요구 : 4개국 은행단도 조건을 내세움?앞으로 중국이 필요로 하는 대부금은 4개국 은행단이 우선적으로 공급할 권리를 보유한다.?중국이 만일 다른 곳에서 차관을 하겠다면 그 차관조건이 4개국 은행단의 조건보다 유리한 것이어서는 안된다.?중화민국의 매월 예산은 외국 고문관이 그것을 검사, 승인함으로써 지출된다.?군대의 해산에는 외국 무관이 입회하고, 병사로부터 무기를 회수하는 건마다 수표 1매씩을 지출하여 은행에서 현금과 교환한다. (중국을 마치 금치산자 취급을 함)→ 4개국 은행단의 횡포(독점체제 구축) but 원세개 승인(4) 일본과 러시아도 합세 → 6개국 은행단 성립?6개국 은행단의 차관 : 모구 중국의 염세를 담보로 하는 것,세관 또는 기타의 기관을 모두 100% 열국의 관리체제하에 두자는 것→ 미국 : 중국의 독립을 침해한다하여 탈퇴 but 원세개 승인(1) 손문 : 원세개에게 차관을 받아들이지 말도록 요구, 외국공사관에 경고 but 조인 강행→ 원세개 토벌의 소리가 급속도로 높아짐 → 원세개 타도를 위해 거병할 것을 주장(2) 황흥 : 신중론, 군사적 대립을 피하고 법에 의한 해결을 도모하자고 주장→ 실제로 원세개의 강력한 군대에 대항할만한 군사력 부족(3) 자금원 봉쇄를 통해 원세개를 환하려하고, 일본과 영국이 이를 막기위해 원세개를 협박(1) 일본 : 산동성에서 제멋대로 전선을 확대 - 중국인에 대하여 온갖 악행을 자행 (식량 약탈, 부녀자 능욕...)독일군을 격파하고 중국 전토를 속국으로 만들려 이른바 21개조의 특권을 요구?내용 : 산동문제에 관한 4개조, 동북3성 남부와 내몽고 동부에 관한 7개조, 광산 채굴권과 경영권을 일본이 독점, 중국 연안의 항만 및 도서의 독점, 일본인 정치?경제?군사 등의 고문초빙, 중국경찰과 일본경찰의 합작, 병기창 합작, 일본에서의 무기 공급...... → 중국 전토를 일본에 예속시키려 함⇒ 일본의 중국에 대한 제국주의 + 원세개의 제제 야망(1) 21개조 요구가 세상에 알려짐 (처음엔 비밀~) → 미국, 영국 등 세계열강들 일본 비난(2) 원세개 : 속 - 일본의 요구를 받아들일 계획을 세움겉 - 국민여론에 동조하는 듯한 태도를 보임, 일본에 저항하는 척 함→ 최후까지 일본에 저항하는 척하면서 열국의 눈치를 살피고 21개조의 요구조항을 약간만 고쳐달라고 일본에 요구한 다음 수락함(3) 손문 : 원세개의 매국 의도를 꿰뚫음 → 당원들에게 21개조와 원세개의 제제 의도가 결부되어 있음을 밝힘(4) 중국 국민 : 일본에 항의 - 학생들 데모, 상인들 전등 끄기, 일본인의 상점 파괴, 난투사건...→ 원세개에 대한 반항심 + 반일감정(5) 일본 : 폭동진압을 이유로 일본해군 상륙, 원세개에 경고 → 원세개 : 엄중단속 명령3. 혁명군의 군함탈취(1) 원세개 : 미국의 프랭크 굿노트 - 중국에는 군주제도가 알맞다는 내용의 논문을 쓰게 함주안회 조직 - 제제운동을 추진하기 위한 조직, 표면적으로 학술단체를 표방→ 중앙의 고관들이나 지방의 장군들이 주안회에 입회(2) 두가지 주류 : ① 손문이 주장하는 삼민주의 아래에서의 민권운동으로 중국을 구제하자는 사상 - 혁명사상② 입신출세하자면 원세개에 붙어야만 한다는 탐관오리배들의 풍조 - 출세주의(1) 중화혁명당 : 1914년 9월 혁명방략 제정 - 중화혁명군 창설, 손세개 : 황제즉위 준비, 주안회 관계의 운동비, 여론조작 등에 막대한 돈을 사용제 10장 원세개의 최후와 군벌의 할거1. 전국을 휩쓴 討袁의 바람(1) 원세개에 대한 국민의 반발 거셈 → 토원의 움직임이 전국적으로 번짐 - 호국군이 최대 추진력이 됨(2) 호국군 : 원세개의 황제추대가 있은 후에 곧 운남장군인 당계요가 채악, 이열균 등과 함께 궐기하여 운남성의 독립을 선언함과 동시에 결성 → 이를 도화선으로 귀주, 사천, 광서 등 중국 서남부 각 성에서 토원활동(3) 채악 : 호국군의 중심인물, 신해혁명때 신군을 이끌고 운남성 전역을 해방, 그후 운남도독이 되어 운남?귀주에 서 큰 세력 → 원세개가 위험하게 보아 북경으로 소환, 연금상태에 둠 → 궐기준비, 연금장소 탈출→ 이열균을 만나 제제의 즉각적인 취소와 그것을 획책한 측근처단을 요구하는 최후통첩을 원에게 보냄 but 원세개 무시(4) 12월 25일 : 운남성 독립 선언, 장군이라는 명칭을 도독으로 환원, 당계요가 도독에 취임 군을 호국군으로 명명?주장 : ① 국민이 합심 협력하여 공화국을 옹호하며, 제제를 영구히 저지한다. ② 중앙과 지방의 권한을 정하고 각 성 민력의 자유로운 발전을 도모한다. 등 - 각 성이 동시에 봉기할 것을 호소 → 전국전 확산(5) 원세개 : 1919년 새해 즉위식을 할 예정이었으나 호국군의 공세로 미뤄짐진압할 자신이 있다고 말하였으나 현실적으로 쉽지 않아 일본에 특사파견을 함(1) 원세개 : 일본이 제제를 연기하라고 권고하고는 있지만 중국에 대한 이권을 쥐어주면 도와줄 것이라고 생각다이쇼 일황의 즉위식(1915년)때 주일공사만 출석시켰는데, 늦게나마 즉위 경하를 구실로 특사 파견(2) 각 국 : 중?일간에 밀약이 있을 것으로 보고 신경을 곤두세움 → 프랑스 공사 콘티가 비밀조약을 빼내어 폭로(3) 비밀조약 내용?증여조건 : ① 길림?봉천 양성의 사법권을 일본에 양도 ② 진포철도 북반부의 관할권을 일본에 양도③ 천진?산동 연해 일대의 해안선을 일본에 양도 ④ 일본인 재정고문을 중: 안휘성 독군, 청조가 부활해야 한다고 주장, 복벽운동으로 일부세력 규합?성구연합회 조직 : 복벽파 + 단기서 옹호파(1) 독일에 대한 선전포고 : 1917년 1월 31일 독일 - 독일 잠수함은 영국?프랑스?이탈리아 연안에서 중립국 함선 을 무차별 공격하겠다고 선언 → 미국 - 독일에 대해 국교 단절, 중국에 대해서도 동일한 조치를 권고?일본 : 국제적인 고립을 우려하여 참전권고에 앞장섬?중국 : 대부분의 여론이 참전 반대, 손문도 중립을 주장 but 단기서만 참전을 강력 주장why? 참전을 미끼로 일본으로부터 차관과 무기를 들여올 비밀약속 → 이를 통해 전국 장악하려 함(2) 단기서 : 독군단, 공민당을 동원하여 의원들 협박 → 내각 각료들 사표 - 단기서 혼자 남음(3) 여원홍 : 단기서를 파면하고 외교총장 오정방을 국무총리로 앉힘→ 단기서 : 안휘성장, 봉천독군, 상동독군, 하남독군, 직례독군을 사주하여 북경으로 진격할 태세를 갖춤(1) 여원홍 : 단기서의 태도에 당황하여 복벽파의 장훈에게 사태를 수습해 줄 것을 호소(2) 장훈 : 복벽을 실현할 기회로 생각 → 국회 해산 - ① 청국 황제의 우대조건을 헌법에 삽입할 것②공자의 가르침을 국교로 삼을 것 ③ 변발의 군대를 20영으로 조점함을 인정할 것 등을 요구→ 당시 12세의 폐제에게 왕정복구를 요청(3) 단기서, 풍국장, 세계 열강들의 거센 반발 → 여원홍 : 단기서에게 장훈의 토벌을 요청→ 단기서 - 국무총리 복귀, 여원홍 - 사임4. 일본의 산동반도 출병(1) 일본 : 세계의 대세가 중국의 참전을 요구하는 것으로 기울어버린 것을 간파→ 일본이 참전요구에 앞장섬으로써 중국의 산동성에서 독일이 확보한 각종 권익을 자기들이 가로채려 함?영국, 프랑스, 러시아, 이탈리아 : 일본이 중국의 참전을 승인하는 교환조건으로 산동에 있는 모든 독일의 권익 을 일본이 인계하며, 또 일본이 이미 점령한 적도 이북의 남양제도를 일본이 접수하는 것을 보장하라고 요구→ 각국의 동의를 얻어냄(2) 단기서 : 참전을 미끼로 일
    인문/어학| 2005.08.14| 10페이지| 1,000원| 조회(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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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사상사 평가B괜찮아요
    - 목 차 -Ⅰ. 제자백가1. 유가2. 묵가3. 도가4. 법가Ⅱ. 제국의 논리와 사상1. 경학2. 위진현학Ⅲ. 송대이후의 사상1. 남송성리학2. 양명학3. 고증학< 중국사상사 >Ⅰ. 제자백가1. 유가1) 유가 사상의 시대적 의미유가의 창시자로 불리는 공자는 자기가 살았던 춘추 시대를 ‘천하에 도가 사라진 상황’혹은 ‘예가 누너지고 악이 붕괴된 상황’으로 보았다. 원래 공자 이전의 서주 시기에 ‘예’는 광범윟나 의미를 지닌 사회규범으로서, 각종 예절과 의식의 규정일 뿐만 아니라 나라와 사회의 근본 질서를 유지하는 정치 제도와 통치 질서까지도 의미했다. 주의 건국 초기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무임금은 은을 정복한 후 모두 71개의 제후국을 이 중 55개국에 자신의 형제와 동성 씨족을 제후로 봉하여, ‘혈연적 유대’를 지키게 하고 ‘예’를 준수하게 함으로써 통치 질서를 굳건히 하였다. 그러나 춘추 시대에 들어와 주왕을 정점으로 하는 서주의 봉건 질서가 붕괴하게 됨녀서, 왕권의 약화와 제후 간 혈연적 연대의 쇠퇴 그리고 사회 경제적 기초의 변화에 따른 제후국 간의 관계 변환는 그대로 국내의 정치 구조에도 반영되어, 공실은 쇠퇴하고 사가가 대두하였으며, 신하가 군주를 시해하고 세자가 권력을 찬찰하는 무도한 행위가 빈번히 발생하게 되었다.이에 공자는 춘추 말기의 혼란 상태를 종식시키기 위하여 먼저 당시의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점을 다음과 같이 파악한다.첫째는 주 왕실과 제후간의 관계에서 볼 때 당사의 제후들이 주왕의 권한을 무시한 채 각자의 직분을 뛰어넘는 월권 행위를 하고 있다는 점이고, 둘째는 제후와 제후간의 관계에서 볼 때 강대국의 제후이 약육강식의 쟁탈전을 통해 약소국의 주권을 유린하고 있다는 점이다. 셋째는 일국 내에서 군주와 기층민과의 관계에서 볼때 군주들이 전쟁 물자 조달과 사사로운 부귀를 목적으로 징병, 부역, 공납을 통하여 참혹할 정도의 착취를 하고 있다는 점이다.이런 모순 상황에 대하여 공자가 제시하는 해결 방안은 세 가지로 정리 될 수 있다.첫째, 공 정치의 이상은 끝내 실현되지 못했다.하지만 이후 2천여년 동안 중국 사회를 유가는 지배했다. 이러한 유가 사상의 핵심은 정치 행위와 윤리, 도덕을 같은 연장선상에서 고려한다는 점이다. 이에 따라 통치자와 지배 계급의 자기 수양과 자기 절제를 중시하고 인간 본성의 선함에 근거하여 욕망의 극복과 도덕적 완성을 강조한다.2. 묵가1) 묵가의 시대적 의미묵가는 묵자에 의해 비롯된 학파이다. 묵가는 분명히 유가를 읳식하고 그에 반대한 역샂거 학파였다. 도가와 법가 사상이 고대 중국철학사 있어서서 유가 사상과는 다른 이질적 사상이기는 하나 도가와 법가가 역사상 유가보다 뒤이어 나온 역사적 학파였는지는 불분명하다. 법가와 도가 사상의 뿌리는 유가가 발생하기 이전이나 혹은 같은 시기로 볼 수 도 있을 것 같고, 또 읻르이 춘추전국 시대에 하나의 학파를 형성했다는 증거도 불분명하기 때문이다묵가는 유가의 직접적 영향하에서 성장했기에 유가와 많은 공통점을 가졌으면서도 상반되는 이론을 내세운다. 묵가와 유가의 유사성은 혼란한 시기를 극복하기 위한 규범적 체계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엘리트에 의한 백성의 통제를 옹호하는데 있다. 묵가가 유가와 구별되는 점은 묵가가 실용성과 논리성에 입각하여 유가 규범적 쳬계의 문제점을 지적한 데서 성립된다. 즉, 묵가는 유가의 규범체계로는 올바른 사회 통합을 이루지 못한다고 본 묵가는, 올바른 규범을 정하기 위한 객관적 기준을 생각한다.2) 묵가의 평가중국 진나라 이전 시기에 묵가의 위상은 상당했던 것 같다. 유가와 함께 나란히 지배적인 학문으로 병칭되고, 오히려 유가보다 더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집단을 이룬 것이 묵가였다. 세상에 앙주나 묵가의 무리가 가득했다고 한 맹자의 말도 진나라 이전 시대에 묵가의 영향력이 매우 컸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목가는 진이 중국을 통일한 이후 갑자기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고, 결국 역사의 전면에서 사라지게 된다. 따라서 실제로 진이후에는 묵가의 학파와 그 영향력이 미미했다고 할수 있다. 이러한 묵가의 갑작스런 쇠퇴 이 삶과 제도적 현실 사이의 괴리 등이 서로 얽혀 있다.2) 도가의 평가도가의 이상이 실현되는 데에는 결정적인 장애가 있었다. 그것은 현실적인 적합성을 담지 못했다는 것이다. 당시의 시대적 현실에서 보았을 때, 부국강병이라는 긴급한 현실적 수요를 직접적으로 만족시키지 못한다는 점에서 멀리 돌아오는 이야기라고 비판받았던 맹자의 경우보다 오히려 노자의 경우가 훨씬 더 멀리 돌아오는 우회로였다. 노자에서 시작된 정치적 주장이 그 형식만 남고 나머지 대부분이 굴절된 뒤에 법가를 통하여 현실화되었다는 사실에서 노자가 지녔던 취약점을 무엇보다 분명히 보여준다. 현실화되는데 장애가 되는 이런 취약점 때문에 노자의 생각은 거의 모든 시대에 걸쳐서 현실에 대한 비판적 역할만을 수행하게 되었는지도 모를 일이다.4. 법가1) 법가의 시대적 의미법가는 진나라 이전시대의 다른 학파와는 달리 철학적 깊이를 추구하기 보다는 실제로 현실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형성된 학파이다. 더구나 그들은 유가나 묵가와 같은 학문적인 수수 관계도 없었다. 당시에는 흔히 이들을 ‘법술지사’, ‘법사’, 또는 ‘경전지사’등으로 불렀다. 그러면 이들은 어떻게 다른 제자백가보다 뒤늦게 등장했으면서도 가장 효과적이고 실질적인 뿌리를 내릴수 있었을까?춘추시대에 접어들면서 나타난 가장 큰 변화는 종법제의 붕괴와 그에 따른 사회적 제 관계의 변화였다. 종래의 종법제 하에서는 사회전반이 수직 복종의 예속적 신분관계로 이루어진 데 비해, 일면 종교성을 지니는 종법제적 종족 관계가 와해됨으로써 공적인 부분에서는 주종 관계로, 사적인 부분에서는 대등한 관계로 상호 관계의 변화를 가져왔다. 이처럼 변화된 사회의 양상이 보편화되면서 사회 제도로 정착되어 규범력을 지니게 된 것이 바로 관습적인 불문법이고, 이것을 국가 제도로 받아들여 확정된 것이 법 제도이다. 경험적 태도로 현실을 직시해 문제를 해결하려 한 정치 행정가들인 법가들이 이와 같은 법제의 특성에 관심을 집중시킨 것은 당연한 것이였다.2) 법가 사상의 3요소① 법법이 지에 의해 보완되지만 이 양자를 가능하게 하는 실질적 근거는 막강한 통치권이다. 이것을 법가에서는 일반적으로 ‘세’라한다. ‘세’란 본래 외재적 상황에 편성해 주체가 발휘할 수 있는 집결된 힘으로 표현될 수 있다. 세가 통치 체제에 등장하면 권세가 되어 군주의 불가침적 통치력으로 나타나며, 힘 그자체를 의미 할 때는 세력이 된다.3) 법가의 평가법가가 혹독한 지탄을 받는 것은 무엇보다도 진나라 패망에서 찾아야 한다. 진의 패망은 중국정치사에서 중용한 것으로 취급되는 ‘역취순수(정권을 잡을 때는 상도에 어긋나는 방법으로 했어도 지킬 때에는 순리에 맞게함)’의 대원칙을 거역했기 때문이다. 법가가 오백여년 동안 지속된 혼란을 평정해 백성을 전쟁의 도찬에서 구한 공로는 중국 역사상 보기 드문 업적이다. 그러나 무단적 강권주의로 백성을 혹독하게 탄압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 준 것은 분명히 크나큰 과오였다.Ⅱ. 제국의 논리와 사상1. 경학1) 경학의 시대적 의미전국시대의 혼란을 평정하고 이른바 천하를 대통일로 이끈것은 진이었다. 그 진왕조의 정치적 실패로 천하는 다시 혼란에 바지고 만다. 이를 수습하고 등장한 것이 한이다. 한의 통치자들은 진의 멸망 원인을 지나친 무력 통치에서 찾고, 자신드른 문치를 통하여 새로운 제국의 기틀을 도모하려 하였다. 이는 한 고조 유방이 육가가 제시한 ‘역취순수’의 위대성을 어느 정도 인지했기 때문이다.그러나 한 초에는 오랜 전란의 뒤라서 이른바 휴양생식으로 새로운 기운을 충전하느라 충분히 문치의 부흥에 손쓸 만한 여유가 미처 없었다. 다만 황로학의 무위술에 내맡김으로써 소생의 기미만을 기다릴 뿐이었다. 대개 고, 해, 문, 경제의 시대가 그러하였다. 그러다가 문제때부터 유가 계통에서 활발한 움직임이 일면서 유가 경전의 중요성을 부르짖게 되고, 무제때에 오면 ‘백가를 내몰고 유가만을 높이는’시대가 열리게 된다.이러한 유학의 경전 속에 담겨진 이론을 이끌어 내어 현실 정치에 응용할 수 있는 방책으로 삼고자 하는 것이 경학이다. 그러므로 경학의 동의 움직임이 싹트고 그것이 한 말에 가서는 무시할 수 없는 사조로 자리잡게 되는 것은 이런 점에서 볼때 필연적이다.2. 위진현학1) 위진현학의 시대적 의미고대 중국 철학의 보편적 이상은 자연 질서와 도덕 질서를 하나로 일치시키는 것이었다. 즉 ‘천’과 ‘인’의 관계 문제가 바로 그것이다. 한 대의 통치 이념을 제공하였던 경학 사조도 이 문제 의식에서 벗어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한 대의 경학 사조는 자연 질서와 도덕 질서의 감응 관계를 ‘재이설’이나 ‘참위설’과 결부시켜 지나치게 견강부회환 이론을 제시함으로써 그 이론적 근거를 확보하는데 실패하고 만다. 황건적의 난이 일어나면서 사회 질서가 더욱 혼란하게 됨에 따라 현실 정치를 지탱하고 있던 경학의 통치 이념은 차츰 빛이 바라게 된다. 후한 말에 이르러 경학 사조가 퇴조하고 사회비판 사조가 등장하는 것은 당시의 사회적 위기의 산물이다. 후한 말의 일단의 사회 비판 사상가들은 인간 사회의 도덕 질서를 경전에 대한 주석 방식으로 해결하려는 경학 사조의 한계성을 극복하여 부조리한 현실 사회의 제도론적 모순을 제거함으로써 새로운 도덕 질서를 정립하려고 시도하였다. 그러나 사회 비판 사조도 당대의 시대적 관제를 진단하고 해결하는데는 일정한 한계성을 드러내고 말았다. 그것은 사회 비판 사조가 현실 사회의 도덕 질서를 정당화시킬 수 있는 그 나름대로의 일관된 세계관의 정립에 실패하고 말았기 때문이다.위진 현학은 중국사에서 한 획을 그을 수 있을 만큼 거대한 시대적 변혁을 이루었다. 그것은 위직 현학이 후한의 비판 사상가들과는 달리 현실사회의 도덕 질서를 우주 만물의 자연 질서에 근거하여 새롭게 설명할 수 있는 통계로 통합 할 수 있는 이론적 근거를 제시하였기 때문이다. 자연 질서와 도덕 질서의 관계를 하나로 일치시키려는 위진 현학의 노력은 그 당시의 사회현실의 시대적 문제의식을 반영하는 것으로 특정한 시대정신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2) 위진현학의 평가위진 현학은 현실 세계를 떠난 곳에서 이상 세계를 따로 실현하려고
    인문/어학| 2005.03.25| 9페이지| 1,000원| 조회(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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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역사] 중국 역사의 사회․경제적 흐름의 발자취 평가A좋아요
    중국 역사의 사회?경제적 흐름의 발자취(진~청)-목차-1. 서론2. 본론 (각 나라의 사회와 경제)1>진나라 2>한나라3>위진 남북조 4>수나라*5>당?송 변혁기 6>원나라7>명나라 8>청나라3. 결론1. 서론진나라에서부터 시작하여 한, 위진 남북조, 수, 당, 5대 10국, 송, 원, 명, 청에 이르기까지 중국은 많은 변화를 거듭하며 나라를 건국시켰다. 각 나라들의 사회, 경제, 정치, 문화, 사상 등은 비슷한 부분들도 있지만, 서로 다르게 다양한 양상을 띠며 변화?발전해 간다. 여기에서는 이러한 분야들 중에서도 특히 사회(정치와 경제)부분을 중심으로 각 나라가 어떠한 모습을 취하고 있는지 살펴보면서 한 나라의 멸망과 또 다른 나라의 건국을 바탕으로 한 시대의 변화상을 이해해 보고자 한다. 또한, 위에 열거한 나라들 가운데에서도 특히 당나라에서 송나라로 바뀌는 교체기에는 중국 역사에 있어 사회적으로 커다란 변동기로 인식되고 있기 때문에 당송 변혁기에 대해서는 더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겠다.2. 본론1>진나라의 사회와 경제진시황은 즉위하자마자 승상, 어사대부, 태위를 3공으로 두고 전국을 36현으로 나누어 군현제를 실시했다. 진의 군현제는 전대인 주의 봉건제와는 완전히 다른 성격의 통치체제로 강력한 중앙집권을 이루었다. 강력한 중앙 권력과 법가 사상을 발판으로 대규모의 토목 공사가 수년간 계속되었는데 이로 인한 백성들의 부담은 엄청났다. 만리장성, 진시황릉, 아방궁, 도로망 건설 등에 수백만의 인력이 사용되었다. 특히 만리장성 같은 경우는 초기 4년의 공사 기간 중 사망한 사람이 30만명이라는 기록도 있다. 한창 일할 나이에 노역에 동원된 청장년들의 공백으로 국가 경제는 수렁으로 빠졌으며, 황실은 군사비와 공사비 등 과도한 세금을 거두어 백성들의 원성을 샀다.그럼에도 불구하고 황실은 엄격한 법으로 백성을 강압하여 통제하려고만 하였고, 강력한 법의 보호 아래 지주들은 농민의 피를 빨았다.이에 백성들의 불만이 가중되어 결국 난으로 이어졌고 여러 가지 사회 모순을 안전한 시대이다. 한대의 수공업에는 농민 및 호족층의 자급자족적인 가내수공업도 있었으나, 중요한 경향은 민간수공업자의 상품생산의 발전이다. 철기 수공업과 염엄은 특히 발전하여 대상인에 의한 대규모의 경영이 출현하였고, 기타 청동기 수공업?칠기 수공업?섬유 염색 수공업?양조업?식품가공업?피혁업 등이 번영하였다. 또한, 한대는 대규모의 관영 수공업이 출현하였는데, 대부분은 소부가 관할하였지만 무제 때에는 소금?철?술의 전매제가 시행되어 대사농이 관할하였다.상업의 중심은 도시에 설치된 시(市)이며, 점포는 시내에서 업종별로 나뉘어 배열되고, 이것을 사(肆)라고 불렀다. 도시에서는 시사(市肆)에 점포를 가진 좌상이 일상적인 상품매매에 종사하였으나, 각 지역간 또는 도시간의 원격지 교역도 번영하여, 이에 종사하는 대상인?상려가 출현하였다. 외국무역도 사상 최초의 번영을 보였으며, 그 중에서도 서역무역이 가장 유명하였으나, 북변에 설치된 관시에 의한 북방유목민과의 무역, 사천성 방면을 경유하는 서남의 오랑캐?인도 등과의 무역, 광주를 거점으로 하는 남해무역도 번영하였다.상업의 번영에 대응하여 화폐의 유통도 활발하였으며, 화폐경제가 농민의 일상생활에까지 침투하여 통화제도가 확립되었다. 한대의 주화는 무제 때인 BC 119년에 오수전(五銖錢)이 제정되었으며, BC 113년 이후는 상림의 3관(官)에서 관주전(官鑄錢)이 나와 당나라의 개원통보가 제정되기까지 중국 화폐의 기본형식이 되었다.3>위진남북조의 사회와 경제위진남북조 시대에 접어들면서 전란이 계속 되자 도가의 노장사상에 심취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초야에 묻혀 세월을 보냈다는 유능한 선비 7명 죽림칠현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그후 화북의 전진에서 불교 장려정책이 시행됨에 따라 불경 번역사업이 진행되었고 중국인 승려도 많이 배출되었다. 전진의 불교 장려정책 후 불교는 각국으로 급속히 전파되어 나갔다. 유교, 도교 사상에 비추어 불교개념을 이해하려는 격의 불교도 생겼으나 곧 퇴조하고 불경 원전에 초점을 맞추어 번역하는 데 주력여 나이 등의 부정신고를 엄중하게 단속하였다. 이 같이 제도를 정비한 결과 인구의 장악수가 증대하여 609년에는 호수 890만 7,549, 인구 4,601만 9,956명에 이르러, 이후의 당나라 초기 때보다 월등히 많은 인구수를 나타냈다.또한 문제는 구품관인법이라 해서 그 때까지 귀족의 출세의 발판이 되어온 관리임용법을 폐지하였고, 양제는 관리임용법으로서 진사과를 두었는데, 이것은 뒤에 당나라에 과거제라 불리어 성행하게 된 관리임용제의 창시로, 고려에서도 이를 실시하였다. 양제는 즉위 후 문제의 율령을 개정하여 대업율령을 발포하였는데, 후에 당나라가 제정한 율령은 문제의 개황율령을 근간으로 한 것이다.5>당?송 변혁기송나라 왕조의 성격은 당나라?송나라 때의 시대변혁 가운데서 찾을 수 있다. 이전의 중국사에서는 군사?외교보다는 과도한 이상주의적 정치철학이 발달했던 송나라에 대한 관심은 적고, 정치?외교가 성했던 한(漢)나라?당(唐)나라?청(淸)나라의 역사가 자세하게 다루어졌다. 그러나 사회?경제?문화전반의 연구가 진행된 결과 송나라의 혁신성과 문화?기술 수준이 재인식되었다.당?송 변혁기는 당나라 현종때의 안사(安史)의 난으로 시작되어 이후 200여 년 간의 혼란 속에서 옛 전통은 새롭게 변화되었다. 육조시대 이후의 문벌귀족은 없어지고 신흥 지주와 부유한 상인이 새로운 지배층의 모태가 되었다. 이에 부응하여 관료제도 신인등용?승진제?행정감찰?직권분화?관료철학?교육제도 등을 정비하여 독재제가 강화된 반면에 사회의 지지기반이 확대되고 사회의 유동성?탄력성도 커졌다.재정상으로는 양세법이 채용되고 신흥사회세력에 대한 국가의 정책이 유연해졌으며, 화폐경제?산업분화의 세력에 교묘하게 대처하였다. 이렇게 하여 재정기반은 확대되고, 방대한 상비군과 관료집단을 양성하였으며, 교통이 발달되고 산업이 개발되었으며 교육문화의 시설도 충실해졌다. 사회경제상으로는 삼각주 간척을 포함한 생산개발, 신기술의 보급에 의해 생산성?생산량이 높아지고, 인구가 급증하였다.이것이 활력소가 되어 지주제어음이 보급되기 시작하자 정부도 이것을 채용하여 교자?회자?교초 등의 지폐를 발행하여 전국에 유통시켰는데 그 액수는 수천만 관에 달하였다. 각지에 거대한 도시가 생겼고, 북송의 변경, 남송의 임안은 인구가 100만을 넘어, 당시 세계에서는 가장 큰 도시였다.당나라 때까지 계속된 정부의 상공업 통제가 풀리고, 행?작이라고 하는 도시상공업자의 조합 또는 길드가 명확한 형태로 출현하였다. 상점?창고?요리집?술집?시장의 개설과 더불어 영업은 시간이나 장소에 구애 없이 허용되었고, 와자라 불리는 오락장이 도시 안팎에 생겨 연극?음악?야담?군담?광대 등 서민문화가 일어났다.농촌사회도 격변하였다. 귀족이나 군벌이 일소되자 새로운 지주계층이 토지경영자로 등장하였고, 특히 벼농사에 의한 변두리 개발과 인구집중이 이루어진 강남을 중심으로 지주제가 확대되었다. 그들은 가난한 소작인을 모아 농지를 개간하여 새로운 사회세력이 되었다. 당시 관료들은 농지의 보유가 유리하게 보증되어 있었으므로 신흥지주는 농업이나 상업으로 부를 쌓아, 관계에 등용되면 특권을 누릴 수 있었다.이렇게 하여 생긴 특권지주계층을 관호?형세호라고 하였다. 넓게 관료?지식인을 가리키는 사대부는 이런 지방 엘리트 속에서 생겼다. 다만 관직의 세습은 허용되지 않았으므로 가계는 오래 가지 못하였고, 구귀족의 부활은 있을 수 없었다.6>원나라의 사회와 경제원나라는 많은 이민족문화를 수용하고 있던 다민족국가였고, 복합적 사회였으며, 거기에 지배민족인 몽골인 사회는 근각(혈통)을 존중하는 봉건적 신분제사회였다. 따라서 통치에 있어서도 신분제 의식에 좇아서 이를 규제하려 하였다.먼저 몽골인을 국족, 서방계의 투르크?이란?유럽인을 색목인, 금나라의 유민 즉 화북의 백성을 한인, 강남에 사는 남송의 유민을 남인이라 불러서 구별하였다. 이 가운데 원나라의 황실을 비롯해서 유목영주층?몽골귀족층이 사회의 최상층을 차지하고 있었음은 물론이다.다음 계층은 몽골제국 또는 원나라 정권의 성립에 훈공을 세운 색목인 및 한인(漢人)으로, 여기에는뒤 정부당국자들은 재정정책의 중심을 국내의 상업이나 국제무역의 진흥, 특히 소금?차?술 등의 전매익금의 증대 방향으로 전환하였다. 당시 상업이 성행하였던 간선은 수도인 대도(大都)와 강남의 항주를 잇는 대운하선으로 그 선의 유역에는 많은 도시가 번영하였고, 수공업품의 생산이나 판매로 번창하였다. 북서쪽은 육상으로 대도에서 몽골초원을 거쳐 천산남로 또는 천산북로로 이어졌고, 남동은 항주에서 해로, 경원?천주?광동으로 통하였고, 다시 남해항로로 이어졌다.이처럼 원나라의 국내 상업로는 당시의 유라시아 대륙을 한 고리로 하는 국제무역선에 직접 이어져 있었기 때문에 역사상 유례 없는 번영을 누렸다. 원나라는 교초라 불리던 정부 신용의 지폐를 발행하였다. 이에는 중통초(中統)와 지원초(至元)의 두 종류가 있었는데 여러 액면표시의 지폐가 다량으로 발행되어 중국전역에서 유통되었다. 그러나 해외무역에서는 모두 은전(銀錢)에 의한 거래를 하였다.7>명나라의 사회와 경제태조는 민생안정을 위해 인구 과밀한 강남에서 황폐한 강북으로 농민을 이주시키고, 부유층을 수도로 불러들여 경제부흥에 주력하였다. 이로써 사상 최초로 남에서 북으로의 인구이동현상이 일어나고, 윈난?구이저우의 호구도 늘어나서 총인구는 처음으로 6,000만을 넘어섰다. 이 호구를 군호?민호?장호?조호 등 4종류로 구분하여 각각 군사?농상?장작?제염에 종사하게 하였다.이 호구는 그 대부분이 민호로서, 주현의 이갑제라는 자치조직에 편성되었다. 이갑제는 110호를 1리로 하고, 이 가운데 부유호 10호를 이장호로, 나머지 100호를 갑수호로 해서 10호씩 10갑으로 나누어 1년 교대로 이장 1명과 갑수 10명이 출역하도록 되어 있었다.태조는 중국 역사상 최초로 전국 토지의 실지측량을 시행하여 ?어린도책?이라는 토지대장을 만들고, 이장으로 하여금 부역황책이라는 조세 겸 호적대장을 만들게 하였다. 또한 이(里)에서 덕망 있는 연로자를 뽑아 이를 이노인(里老人)이라 하여 이민의 교화 및 쟁송을 맡도록 하고, 육유라는 교육강령을 공
    인문/어학| 2005.03.25| 9페이지| 1,000원| 조회(4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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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역사] 중국의 지배계층에 대하여
    진(秦) 말기에 진승, 오광이 진나라에 반란을 일으키자 각지에서 무장들이 봉기하였다. 한고조 유방도 이러한 무장 중 하나였다. 유방은 원래 농가태생으로 장년에 진의 하급관리가 되었으며 진시황릉의 공사에 인부 호송 책임을 담당했었다. 각지에서 군웅이 봉기하자 유방도 패땅에서 패공이라 칭하고 군사를 일으켰다. 그후 항양(항우의 숙부), 항우와 연합세력을 구축하여 진나라를 타도하였는데 항우의 군대가 진의 주력부대와 전투를 벌이는 사이 유방은 항우보다 먼저 수도 함양을 함락시키고 진왕 자영으로부터 항복을 받았다. 이보다 조금 늦게 함양에 이른 항우는 홍문에서 유방에게 항복을 받아내고 아방궁을 불태웠으며 팽성에 도읍하여 서초패왕이라 칭하였다. 유방은 BC 206년 항우로부터 한왕으로 봉해졌으나, 그 후 4년 동안 항우와의 쟁패전에서 장양, 한신 등의 도움을 받아 해하에서 항우를 대파하고 천하통일을 이루었다. BC 202년 유방은 황제의 자리에 올랐으며 장안에 도읍하였다.(BC 202년) 한 왕조의 통치조직은 대체로 진을 이어받은 군현제가 중심이었으나 한 왕조 건설에 공이 큰 공신들은 제후왕과 열후로 봉해졌다. 이것이 이른 바 군현제와 봉건제를 병합시킨 군국제이다. 하지만 유방 생전에 공신들이 모두 멸망함으로써 제후왕은 모두 유씨가 봉해지게 된다. 그후 제후황은 한왕일족 출신자에 한정된다는 것이 불문율이 되었다.5대 문제는 여씨 외척세력을 모두 축출해내고 백성을 위한 통치에 힘써 사마천으로부터 인제라는 평가를 들었다. 6대 경제 때에 이르러서는 내정이 안정되어 국고가 풍족해졌으며 조착을 등용하여 제후권력을 통제하고 왕권을 강화했다. 이로 인해 오초7국의 난이 일어났으며 난이 평정된 이후에는 제후왕의 세력을 삭감하였다. 7대 무제 때에는 제후왕의 통치 권력이 완전히 없어지고 군국제는 군현제와 다를 바 없게 되었다.7대 무제는 수많은 북벌을 단행하여 한제국의 영역을 최대로 넓혔다. 수많은 원정 끝에 흉노세력을 고비사막으로 내쫑았으며 한반도에도 한사군을 설치하였다. 서방으로는 있었는데 조조, 유비, 손권이 그 세명이다. 이 세명이 각각 세운 위, 촉, 오의 삼국 시대 속에서 한 왕조는 조조의 아들 조비에 의해 대가 끊기고 세로운 위 왕조가 들어서게 된다.그러나 곧 위의 실력자였던 사마의의 손자 사마염이 끝까지 남았던 오를 쓰러뜨리고 새로운 왕조인 진을 창시하며 천하통일의 대업을 이루었다.무제 사마염은 즉위한 후 정권강화 정책을 펴며 검소한 생활을 하여 모범을 보이는 듯 하였는데, 그후 점점 사치와 향락에 빠져들 게 되었다. 진 왕실의 사치가 도를 넘어서는 수준이 되자 귀족들도 사치향락 경쟁에 빠져들어 나라가 급격히 기울었다. 특히 석숭과 왕개의 사치 경쟁 일화는 유명하다.진 귀족 왕개는 자기 집에서 귀했던 꿀물로 그릇을 씻었다. 그러자 석숭이 경쟁심으로 역시 값비싼 밀랍을 땔감으로 사용했다. 이에 왕개는 40리에 이르는 자택 담장을 비단으로 단장하였는데 석숭 또한 50리의 담장을 더 비싼 비단으로 장식하였다. 또한 왕개가 진 무제에게 하사받은 2척짜리 산호를 내보이자 석숭은 3척, 4척이나 되는 산호를 6, 7그루나 구해왔다. 진 왕실과 귀족의 사치가 얼마나 극에 달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일화라 하겠다.무제는 아들 25명을 각지역 군왕으로 봉하고 영토를 나누어 주어 통치하게 하였다. 290년 진 무제가 사망하자 혜제가 즉위하였는데 혜제는 무능하여 같은 해 다른 형제들이 난을 일으켰는데 이것이 팔왕의 난이다. 이 팔왕의 난은 무제의 황후 양씨 일족과 혜제의 황후 가씨 일족들의 권력 다툼으로 비롯되었는데 이를 계기로 여남왕, 초왕, 조왕, 제왕, 장사왕, 성도왕, 하간왕, 동해왕의 팔왕이 16년에 걸쳐 싸움을 벌였다. 팔왕의 난 중 몇몇 세력은 북방의 흉노족을 용병으로 이용하기도 하였는데 이를 계기로 많은 유목 민족들이 중원에 대한 침략을 감행하였다. 전쟁에 종군했던 다른 민족들도 민족의 독립을 위해 난을 일으켜 영가의 난이 발생하였다. 이에 나라 정세가 극히 어려워지고 농민층이 몰락하였다.중원에 들어온 유목 민족 세력 중 남흉노 아들 양광(수 양제)의 군대에 의해 진 황제 숙보가 사로잡힘으로써 끝나게 된다.수(隨) 문제 양견은 북주의 외척 세력으로 사위 정제로부터 황제 자리를 선양받아 수왕조를 세웠다. 587년 남조 양의 황실 자손이 다스리던 후량을 무너뜨렸으며 589년 그의 차남 양광을 시켜 남조의 마지막 왕조인 진을 멸망시킴으로써 통일을 완성하였다. 원래는 문제의 장남 양용이 태자였으나, 진을 무너뜨리는 데 공을 세운 차남 양광이 태자가 되었으며 그는 아버지 문제를 죽이고 제위에 올라 양제가 되었다.(581년)양제는 문제의 뒤를 이어 대운하 공사를 계속 하여 중국의 남북을 수로로 이었으며 남북의 통일을 추진하여 동도를 낙양에 조성하고, 토욕혼과 돌궐을 토벌하였다. 또한 돌궐과 손을 잡을 수 있던 고구려를 정벌하기 위해 3번에 걸쳐 대군을 일으켰으나 모두 실패하였다.태원 유수 이연은 양제의 폭정에 반기를 든 농민반란을 진압하다 617년 자신이 반란군을 일으켰다. 그는 군사를 일으킨지 1년 만에 수도 장안을 점령하였는데 이 때 양제가 그의 친위대장인 우문화급에게 살해당하자 그가 양제의 손자인 양유를 공제로 세웠다. 그리고 공제에게 제위를 선위받아 당(唐)을 건국하였다.(618년)당 건국의 제1공로자는 이연의 차남 이세민이었는데 태자인 형과 동생이 시기하자 이들을 궁궐로 불러 죽인 후 이연을 몰아내고 2대 태종이 되었다. 태종은 제위에 오른 후 돌궐, 설연타, 위구르 등을 압박하여 조공을 바치게 하였다. 그는 내정에도 힘써 수나라의 균전제, 조용조, 부병제를 개선하여 효율적인 통치체제를 마련하였으며 민생안정에도 힘썼다. 이에 나라가 안정되어 태평성대를 누리게 되었으며 태종의 연호를 따 이 시기를 '정관의 치'라고 한다. 당 태종이 중앙아시아 서부에까지 안서도호부와 북정도호부를 설치하여 실크로드는 한 이후로 다시 크게 번성하게 되었다.태종의 뒤를 이어 즉위한 고종은 말년에 황후를 폐하고 태종의 궁인이었던 무씨를 황후로 내세웠다. 무씨는 고종에 이어 즉위한 자신의 아들 중종, 예종을 폐하남(荊南), 초(楚), 남한(南漢), 전촉(前蜀)·후촉(後蜀), 북한(北漢)을 말한다.당이 망하고 후량이 건국된 뒤 각지에서 세력을 키우던 절도사 및 번진 세력들이 각각 왕이나 황제를 칭하였다. 화북에서는 후당이 후량을 멸망시키고 화북 지역을 거의 통일하였다. 화남 지방에서는 남당을 중심으로 남한 등이 발전하였으며 중개무역 및 특산물 개발 등에 따라 소도시가 발달하게 되었다.후당은 반란에 의하여 세워진 후진에 의해 멸망하였다. 그때 북방에는 거란족이 발해를 멸망시키는 등 세력을 굳히고 있었는데 후진의 건국을 도운 대가로 연운 16주를 할양받고 폭정을 일삼았다. 이런 와중에서 결국 후진도 거란에 의해 무너지고 말았다.이쯤 후주에서는 세종이 통일의 기틀을 닦고 있었다. 그러나 갑자기 세종이 병으로 사망하자 7세의 어린 황제 공제가 즉위한다. 후주의 친위대 사령관이었던 조광윤(송 태조)은 북한과의 전투를 위해 진군했던 진교역에서 회군하여 조보, 조광의 등의 추대로 공제로부터 제위를 이어받게 된다. 이후 조광윤은 국호를 송이라 하고 남당 등의 여러 나라를 병합하여 통일 제국 송나라의 시대를 열 게 된다.당(唐)이 절도사 주전충에 의해 멸망하자 오대십국(五代十國) 시대가 시작되었다. 이때 통일을 위한 기반을 닦고 정치를 잘하여 명군이라 불려졌던 후주의 세종이 병사하였다. 이때 송(宋) 태조 조광윤은 후주 친위대의 총사령관이었다. 세종이 병사하자 7세의 황제 공제가 즉위하였다. 이에 조광윤은 북한을 치려고 진교역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곧 개봉으로 회군하여 공제에게 제위를 선양받고 국호를 송으로 고쳐 960년 송 왕조를 창시하게 된다.태조 조광윤은 즉위 후 최우선급무로 천하통일을 내세웠으며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구축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지방군사 세력을 억제하고 절도사의 권한을 빼앗았으며 지방의 관료들도 문관만 임명하는 정책을 폈는데 이것이 이른 바 '문치주의'이다. 태조 생전에 강남 및 사천에 난립하던 오대십국 시대의 국가들은 모두 멸망하였으나 산서 지방의 북한은 요나라(수많은 황족이 금으로 호송되어 갔다. 이를 '정강의 변'이라 하며 그전까지의 송을 북송, 이후 고종부터의 송을 남송이라 하여 구분한다.13세기 초 몽골 초원지대를 근거로 하던 몽골족에 칭기스칸이라는 영웅이 탄생하였다. 칭기스칸은 몽골고원을 통일하고 칼을 남쪽으로 돌려 금나라도 멸망시켰다. 몽골은 계속적인 원정으로 역사상 전례가 없는 사상 최대의 영토를 소유하며 유라시아 전역을 지배했다.그러나 유목민 지배층과 농경민 피지배층이라는 사회 구조는 정치적, 경제적 모순을 불러일으켰다. 이에 칭기스칸의 손자인 쿠빌라이는 유목과 농경이 공존할 수 있는 아건조지대에 강대한 제국을 세우려 하였다. 그는 형인 대칸 몽케의 뒤를 이으려 했던 막내 동생 아릭 부케를 몰아내고 대칸 자리에 올랐다. 그후 수도를 몽골고원의 카라코룸에서 연경(지금의 북경) 부근에 새 수도인 대도를 건설하여 천도하였다. 1271년에는 국호를 대원(大元)이라 칭하고 중국식 정통 왕조임을 자처하였다.이후 1279년에는 회하 이남의 남송을 평정하였고 그 이남까지 침략하여 대제국을 이루었다. 한때 오고타이칸국의 왕 카이두가 원의 종주권을 부정하며 반란을 일으켰으나 카이두가 사망함으로써 이는 무마되었다. 이후 원나라는 칸국들과 친교를 맺어 제국의 종주권을 회복하였으며, 하루가 다르게 국력이 발전하여 국제 무역이 성행하게 되었다. 원은 고려와도 강화를 맺어 정동행성을 설치하였으며 일본 정벌도 시도하였으나 태풍에 의해 실패하였다.원나라 말기 정치권이 부패하고 각종 재해까지 발생함에 따라 백성들의 삶이 어려워졌다. 이때 강남에서 한족 농민과 백련교도들이 이른 바 '홍건적의 난'을 일으켰다. 이때 명(明) 홍무제 주원장은 홍건적에 가담하여 대장이 되었다.주원장은 원래 유랑농민의 아들로서 기근으로 고아가 되어 탁발승 생활을 하며 걸식으로 끼니를 때우던 미천한 신분이었다. 그는 황각사에서 탁발승 노릇을 하다가 홍건적에 가담하여 전투력과 지도력을 인정받아 홍건군의 대장이 된다.주원장이 이끄는 홍건적은 마침내 1368년 원의 ).
    인문/어학| 2005.03.06| 8페이지| 1,000원| 조회(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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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서문화 교류{동서 문화 교류■주제 선택의 이유[실크로드]1. 장건 시대 이전의 실크로드2. 장건의 생존 당시의 국제환경3. 장건의 여행4. 장건의 서역 여행의 의의[초원로]1.초원로의 개념2.초원로의 노정3.초원로상의 문명4.초원로와 한반도[바닷길]1.바닷길의 개념2. 바닷길의 시대3. 정화의 남해 대원정의 시대적 배경4. 정화의 남해 대원정5. 대원정 이후 - 해외 원정의 중단과 그 이유■조사를 마무리 하며동서 문화 교류■ 주제 선택의 이유고등학교 때 수업 시간에, 혹은 얇은 책을 통해서나 단편적으로 접할 수 있었던 실크로드. 과거에는 비단과 향신료, 도자기로 대변되는 동양과 서양의 문물이 왕래된 길, 그러나 지금은 광활한 초원과 고독한 카라반의 그림자를 드리운 사막으로 존재하는 곳이 바로 실크로드이다. 그래서 실크로드에 대해 떠오르는 이미지는, 고작 낙타를 타고 무거운 짐을 싣고 가는 터번 쓴 아랍인들의 모습일 뿐이다.고대의 동방과 서방의 교류가 실크로드를 통해 지속되어 왔다는 것은 나의 얕은 지식으로도 알고 있었지만 실크로드라는 거대한 교류의 통로는 누가 개척하였는지, 실제적으로 무엇을 상호 교류 했으며, 교류의 최초 시기는 언제인지, 동방과 서방의 어떠한 국가와 민족들이 실제적으로 교류에 참여했는지는 알지 못하고 있었다. 어떤 동기로 동양과 서양은 머나먼 길의 여정을 떠나서 교역이 가능했을까? 그래서 제시된 과제들 중에서 망설임 없이 동서 문화의 교역로인 실크로드를 과제의 주제로 택했다. 실크로드를 중심으로 동서 문화 교류의 또 다른 통로인 초원길, 바닷길에 관해서도 함께 조사하였다.[실크로드]1. 장건 시대 이전의 실크로드가 월지족과 흉노족· 월지와 흉노에 대한 개괄 :장건이 실크로드를 여행하던 시기에 중국의 북방에서 세력을 떨치던 이민족으로 흉노족을 꼽을 수 있다. 하지만 흉노에 대해서 이야기 해 보기 전에 먼저 알아야 할 민족이 있다. 그 민족은 바로 월지이다. 장건이 실크로드 길을 가게 된 것도 근본적으로 월지족을 찾는 것이 이유였음으로 반드시은 당시 수도였던 장안 서남쪽에 있는 곳으로 넓게 보면 당시 로서는 수도권 지역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이곳은 오래 전부터 사람과 물자의 교 류가 많은 교통의 요지로 알려져 있다. 낭중이란 궁중 경비대의 한 책임자로 그리 높은 지위는 아니었다. 그가 왜 이 일을 지원하고 나섰는지 설명하고 있는 곳이 없 어 알 수 없다. 다만 사마천은 사기에서 그는 성격이 강인하고 의지가 굳었으며 견실 하게 임하고 마음이 넓었다 고 기록하고 있다.{ 사마천 『사기열전 下 - 장건 편』3. 장건의 여행가. 제 1차 여행· 월지로 파견된 사절단 :기원전 139년 장건을 단장으로 한 1백여 명의 사절이 도읍인 장안을 출발했다. 안내를 맡은 인물은 흉노의 포로로 감보라는 자였다. 감보는 활의 명수로 무제 조모 처소에서 잡일을 하는 자였다. 매우 중대한 사명을 띤 머나먼 월지로의 여 행이며, 운반해야 할 음식물과 토산물도 매우 많다는 것을 생각하면, 1백 명이 그 다지 많은 수의 사절은 아니었다. 장건과 그 사절단이 떠나는 모습은 둔황에 있 는 장건사서역도라는 벽화에 잘 묘사되어 있다.· 월지로의 여정 :1흉노의 포로가 된 장건 -농서를 지나서 흉노의 영토를 지났다. 흉노는 이들을 체포하여 선우에게 보냈 다. { 『사기 - 대원 전』, 사마천이 글은 사절단이 흉노에게 붙잡힌 사실은 기록한 것이다. 장건 일행이 호 송된 곳이 어딘지는 알 수 없다.‘사기 중 대원 전’에는 “월지는 우리의 북방에 있는데, 한이 어떻게 사자를 왕 복 시킬 수 있느냐. 만약 흉노가 월나라에 사자를 보낸다면, 한은 그것을 허락 했을 것인가. 그와 같은 이치이다.” 라고 군신선우가 장건에게 말하였다고 쓰여 있다.장건은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졌다. 선우로서는 장건을 한나라의 동정을 살필 수 있는 기회로 삼을 수 있었지만 장건에게는 살아남게 된 것이 하늘이 도움이었 다.장건 일행은 어딘지 모를 북방 초원 저편으로 연행되고, 그곳에서의 포로생활이 시작되었다. 선우는 장건이 독신이라는 것을 알고 아름다운 여자를 주어서 그의무거운 죄였고 군법 회의에서는 그에게 사형이 내려졌다. 하지만 장건은 박망후라는 지위를 반납하고 사형을 면해 평민이 되었다.3오손국 으로의 여행 -평민이 되어 아무 관직이 없는 몸이 된 장건이지만, 무제는 가끔 궁중으로 불러 서 보고를 듣곤 했다. 장건은 이 자리에서 오손국에 관한 보고를 했다. 그것은 오 손이 과거에는 흉노에 복종했으나 지금은 강성해져 흉노의 조회에도 나가려 하지 않으므로, 한과 오손이 형제의 맹약을 맺게 되면 흉노의 오른팔을 자르는 것과 같은 효과가 난다는 것 이였다. 무제는 장건의 이러한 생각에 공감하고 장건을 중랑장에 임명하고 오손으로 가는 사절로써 파견했다.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장건은 오손과 동맹은 맺지 못했다. 그러나 오손은 장건이 귀국할 때 안내인과 통역, 그리고 사신을 보냈다. 무제는 사신들을 몸소 접견하고 한나라의 융성함과 번영에 대하여 마음껏 견학 시켰다. 한의 문화에 감탄한 오손 의 사신들은 이러한 사실을 자국에서 널리 알렸다. 따라서 오손국은 점차 흉노와 거리를 두고 한과 교섭하게 되었다.4. 장건의 서역 여행의 의의가. 장건 사후, 한 무제의 대원 정벌무제는 외교를 통해서나 무력에 호소해서라도 하루 빨리 흉노에 대항할 수 있는 말을 손에 넣기를 원했다. 앞서 장건의 귀국보고에서 대원에는 한혈마가 있다고 장건이 보고한 바가 있다. 대원은 현재의 페르가나(러시아)에 해당하는 곳으로 파 미르고원을 넘은 지점에 위치해 있었다. 페르가나로 갔던 사신으로부터 “이사성 에 대원의 준마가 있다.”라는 보고를 들은 무제는 즉시 사절단을 구성해서 준마 를 사오도록 명령했다. 하지만 이 사절은 말의 구입에 실패했으며 사절로써 취할 수 없는 무례한 행동을 취하게 되고 이 사절은 귀국 길에서 어떤 자에 의해 죽음을 맞게 된다.이에 노한 무제는 토벌군을 파견하도록 하였다. 장군은 이광리였고 기병 6천과 부실한 무리로 원정군은 구성되어 있었다. 대원으로 가는 길은 멀고 도중에 있는 오아시스 국가는 비협조적 이였다. 목적지인 페르가나에 도착했을 때는 상이 지금으로부터 1만여 년 전에 이 초원로를 따라 북방 유라시아의 초원지대에 동서로 널리 전파된 것으로 짐작된다. 기원전 4000~3000년에 채도 문화가 이 길을 거쳐 서아시아에서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에 전파되었다는 주장이 있는데, 이러한 의미에서 초원로를 채도의 길 이라고도 부른다. 서아시아에 기원을 둔 청동기나 로만 글라스도 이 길을 다라 시베리아 동북아시아에 전파되었거나 그 영향을 미쳤다.기원전 8세기경 남러시아에서 흥기한 스키타이 문화 역시 이길로 동전하여 몽골 고원을 지나 중국 화북지방에까지 그 영향을 미쳤다. 그후 기원전 4~3세기에 몽골 고원 흥기한 흉노는 이 초원로의연변에서 북방 유목기마민족 문화와 한 문화를 융화시켜 이른바 호한 문화를 창출했으며, 이 길을 따라 북방 유목기마민족 문화가 동점하여 중국 동북지방을 거쳐 고조선과 한반도, 그리고 일본에 까지 그 자취를 남겨놓았다.한제에게 쫓긴 흉노족이 4세기 후반에 바로 이 길을 따라 서진해서 흑해 연안에 살고있던 게르만의 한 부족 서고트족을 로마제국 영내로 몰아넣었는데, 이것이 이른바 게르만 민족 대이동의 발단이었으며 이로써 서양에서 중세 시대가 막을 올리게 되었다. 초원로를 통한 흉노의 서진과 후일 징기스칸 몽골 대군의 대 유럽진공은 동아시아 문명이 유럽에 전해지는 일대 계기가 되었다.4.초원로와 한반도한반도에서 발견된 청동기를 비롯한 북방 유목기마민족 문화에 속하는 일련의 유물들은 이 초원로를 통해 전입된 것이다. 아직은 연구 미흡으로 초원로가 어떻게 한반도로 이어졌는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지금까지 발굴된 청동기 유물의 분포대 하나만을 추적해 보면 몽골로부터 중국 화북일대로 전향해서 요동을 거쳐 한반도로 이어졌음을 발견하게 된다. 따라서 이 분포대의 연결선을 한반도로의 초원로 연장으로 추정할 수 잇을 것이다. 한반도는 초원로의 동단일 것이다.[바닷길]1.바닷길의 개념자고로 동서교류는 초원로나 오아시스로의 육로뿐만 아니라, 해로를 통해서도 진행되어 왔다. 중세에 이르러 조선술과 항행술이 발. 중화 제국은 송대 이후의 도시 발달과 상품 경제의 발달, 유라시아 교역망과의 결합으로 농업 제국으로서의 전통이 약화되어 갔지만, 명 제국의 창시자 주원장(홍무제)은 전통을 부흥시켜 자급 자족의 농업을 기반으로 하는 내륙 국가로의 회귀를 결심하였다. 유라시아 교역망에서 중화 제국을 분리하려는 명나라의 시도는 유라시아의 역사 흐름을 역전시키려는 시도였지만 한편 강대한 유목 세계에 편입되었던 중화 제국으로서 자신의 전통과 자립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기도 했다.명나라의 정치적 결단으로 나타난 역류 현상 속에서 바다 교역망도 크게 변모하게 되어 민간 상인의 해외 무역은 금지되고 정크 교역은 밀무역으로만 존속할 수 있게 되었다. 홍무제는 정부 통제를 따르지 않는 세력이 연해 지방에서 성장하는 것을 두려워하여 모든 민간 무역을 금지시키고 조공 무역을 관리하는 시박사를 설치하였다. 시박사는 그 때까지는 내외 상인의 해외무역 관리와 징세를 임무로 했지만 명나라에서는 각지의 사절단을 접대하는 외교기관이 되었다.홍무제가 죽고 건문제가 등극하였으나 홍무제의 4남이었던 연왕(燕王) 주체가 일으킨 정난의 변 으로 인해 건문제는 실종되고 주체는 명의 3대 황제 영락제로 등극했다. 이 정난의 변 이후에야 겨우 명나라는 건국 이래의 혼란에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환관이 득세하기 시작하였는데 이후에 환관은 황제의 분신처럼 각지에 파견되면서 정화와 같이 공을 세우기도 했지만 명나라 후기로 가면서 발호하여 정치를 어지럽히게 된다.한편 이 때 실종된 건문제가 해외에서 병사를 모아 재기를 꾀하고 있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는데 이는 이를 우려한 영락제가 정화에게 해외 원정을 나가게 했던 또 하나의 이유라는 주장도 있기도 하다.영락제는 즉위 이후 중화제국을 중심으로 하는 세계 질서의 확립에 적극 나서기 시작했는데 특히 몽골족의 정벌에 힘을 쏟았다. 또한 안남(베트남)을 정벌하여 동남아시아에 명나라의 영향력을 확대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영락제는 직접 정벌을 통해 명나라의 .
    인문/어학| 2005.03.06| 18페이지| 1,000원| 조회(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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