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콜 오렘(Nicole d' Oresme, 1325 ~ 1382)중세 유럽은 13세기 중반쯤부터 영국과 프랑스의 백년전쟁, 영국의 내란인 장미전쟁이라는 긴 전란이 계속되었고, 이로 인한 유행병이 만연하여 문화적으로는 거의 발전이 없었다. 그러나 이 시기의 수학자로서 빠뜨릴 수 없는 사람은 프랑스의 성직자 니콜 오렘이다. 그는 현대 수학, 과학과 프랑스어 문체, 특히 과학 어휘가 발전하는 데 기초를 마련했다. 파리에서 신학을 연구했고 1348~56년 파리대학교 콜레주 드 나바르에서 장학생으로 공부한 뒤 개인지도교사로 일하다 1361년 사임했다. 프랑스 루앙의 참사회원(1362)과 참사회장(1364)을 지냈는데, 1363년 크리스마스 전야에는 교황 우르바누스 5세 앞에서 설교를 하기도 했다. 그 뒤 프랑스 로마 가톨릭 주교직을 수행한 뒤인 1382년에 생을 마감하였다.? 수학자로서의 오렘 ?오렘은 그의 논문 중 한 곳에서, 작은 변화만이 허락된 독립변수에 대응하는 종속변수를 그래프로 나타냄으로써 어떤 법칙들을 제시했을 때, 해석 기하학의 또 다른 면을 예감했다. 해석 기하학의 발견자로서 오렘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그의 논문들에서 직선에 대한 방정식의 최초의 명확한 도입과 이차원 공간에서 삼차원으로 그리고 사차원 공간으로 확장하는 것에 대한 일분 개념들의 최초의 도입과 같은 그의 업적으로 꼽는다.그는 지수의 개념과 그 기호를 비롯하여 유리수라든지 음의 지수까지도 고안해 냈다. 오렘은 함수의 변화 상태를 그래프로 나타내는 방법에 대해서도 연구하였다. 물론 그때는 아직 '함수'라는 개념이 없었던 시대였지만. 특히 '무한'을 수학 안에 끌어들이는 것을 거부했던 그리스 시대와는 달리 오렘은 무한급수를 연구함으로써 '무한'을 수학 의 대상으로 삼았다. 무한이 이처럼 수학에서 적극적인 인식의 대상이 된 것은 무한을 신의 속성으로 간주하는 기독교의 영향 때문이었다.오렘은 다섯 권의 책 저술과 아리스토텔레스의 몇 작품을 번역하였다. 그의 저서 《비례에 관하여》는브래드와딘의 비례론을 더 일반화하여 임의의 분수 지수를 포함하는 비례의 결합법칙을 보여 주는데 그것은 xm*xn=xm+n과 (xm)n=xmn 과 같은 지수법칙에 해당한다. 또 《비례산법》이라는 다른 저작 뒤쪽에서 그는 이들 법칙을 기하학과 물리학 문제에 응용하고 있다. 또 오렘은 분수 지수를 나타내기 위해서 특별한 표기법을 사용하고 있다. 등비급수와 등차급수의 비교로부터 출발하여 자연수와 자연수 사이에 분수를 삽입하여 분수지수의 개념을 일반화하였다. 예를들면 “1의 비”,곧 제곱근의 세제곱근을 나타내기 위하여p112와 같은 표현을 사용하고, 또 다음 형태로에 대해서는와 같이 나타내고 있다. 그는 8을썼는데 이는을 의미한다. 오늘날 우리는 거듭제곱과 거듭제곱근을 나타내는 기호법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면서도, 수학의 역사에서 그런 기호법이 어떻게 조금씩 발전해 왔는가에 대해서 생각한 적은 거의 없다. 표기법보다 더 독창적인 점은 그가 무리수의 비의 가능성을 시사한 것이다. 보기를 들면이라고 표시되는 영역으로 연구를 진전시켰다. 수학의 역사에서 이것은 고등 초월함수에 대해 처음으로 시사한 바일 것이다. 그러나 적절한 용어와 표현법이 없었기 때문에 오렘은 무리수의 거듭제곱의 개념을 효과적으로 발전시킬 수 없었다.《형상의 위도에 관하여》라는 책에서는 점을 좌표로 표현했는데 현대 좌표기하학의 전조가 되었다. 14세기 말엽의 이 마지막 논문은 나중에 르네상스 시대의 수학자들과 데카르트에게까지도 영향을 주었다. 1494년에 이탈리아의 수도사 루카 파치올리(1445~1509)의 《산술요약집》이 출간되었는데, 그 곳에는 상업수학이 충분히 다루어지고 있고, 많은 문제들로 예증을 들고 있으며 특히 중요한 복식 부기(회계를 기계적으로 나타내는 획기적인 방법) 의 내용도 포함되어 있다.? 프랑스어 문체 발전(아리스토텔레스주의 학자) ?1370년 프랑스의 현명왕 샤를 5세의 궁정사제로 임명되었다. 샤를 5세는 조세의 적법성과 필수적인 지속성, 안정된 경화의 불가피성 등을 주장한 오렘의 이론에 따른 결과 재정문제에서 괄목할 만한 변화를 이룩했다. 오렘은 경화를 발행권자가 정확도를 보증하는 일정한 무게의 귀금속으로 보았으며 경화는 공공의 것이기 때문에 왕은 경화의 기준, 무게, 합금비율을 바꿀 권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오렘의 경제정책은 14세기에 널리 통용되던 채권과 지폐에 관해서는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샤를 5세는 서적과 정부를 도울 수 있는 지식인에게 특히 열렬한 관심을 갖고 있었던 까닭에 1375년경 오렘에게 아리스토텔레스의 책을 번역해줄 것을 요청했다. 당시에 사용되던 아리스토텔레스의《윤리학》《정치학》 《경제학》의 라틴어판을 대본으로 삼은 그의 번역은 프랑스어의 발전에 크게 이바지했다고 평가받는다. 1377년에는 리지외의 주교로 선출되어 이듬해 축성되었다.? 과학자(지동설의 선구자) ?오렘은 운동의 상대성을 통해 지구 자전의 가능성을 시사하여 지동설의 선구자로 불리고 있다. 과학 분야 에서도 메르통의 정리, 즉 등가속운동하는 물체가 일정 시간에 지나가는 거리는 그 시간의 중간 시점에 그 물체가 갖는 속도로 등속운동하는 물체가 지나가는 거리와 같다는 정리를 기하학적으로 증명함으로써 운동의 원리와 법칙을 다루는 운동학에 크게 이바지했다.오렘의 저서《천체론》과《천상과 지상론》 에는 그의 독창적인 과학 개념들이 드러나 있는데, 미래를 예연한다는 점성술의 주장과 마술에 반대하여 《예언론》이라는 책도 저술하였다. 그는 천체가 고정된 지구 둘레를 돌고 있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천체에 관하여》의 이론과 반대되는 이론을 주장하였는데, 그의 지구운동 이론은 코페르니쿠스보다 앞선 것이었다.
? 아메스 (Ahmose B.C 1700년경) 이집트 승려세계최초의 수학자이집트 왕실서기로서 '모든 것을 알게하는 책'을 저술하였고 내용은 산술, 대수학, 기하학 등의 문제가 실려져있고 인류역사가 생긴 후 최초의 수학책이다.린드 파피루스라고도 한다. 고대 이집트시대의 서기(書記) 아메스는 BC 1600년경 파피루스라고 불리는 사초과의 식물섬유로 만든 서사재료(書寫材料)에 산술, 대수(代數), 기하 등을 기록하여 남겼다.이것이 곧 아메스 파피루스로, 거기에는 ‘지름이 9, 높이가 10의 원통형의 사일로의 용적’을 구하는 문제 등이 있으며 그에 대한 해답도 나와 있다.그의 업적의 주요내용으로는1. 단위분수 사용:2. 일차 방정식 : 가법, 감법, 항등을 표시한 기호사용3. 넓이의 계산 : 정사각형, 직사각형, 이등변삼각형, 등변 사다리꼴, 원()등의 내용이 있다.? 탈레스 (Thales B.C 624~546)소아시아의 그리스 식민지 밀레토스 출생이다. 페니키아인의 혈통이며, 당초에는 상인으로 재산을 모아 이집트에 유학하여 그곳에서 수학과 천문학을 배웠다. 탈레스는 젊은 시절에는 상인으로서 돈을 많이 벌었지만 그 후에는 연구와 여행으로 여생을 보낸 듯하다. 한때 그는 이집트에도 머문 적이 있으며 그 곳에서 그림자를 이용하여 피라미드의 높이를 게산하여 주위의 감탄을 자아내게 했다. 밀레투스로 돌아온 그는 다방면의 천재성에 의하여 정치가, 고문, 공학자, 실업가, 철학자, 수학자, 천문학자로서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탈레스는 수학적 발견과 관련되어 알려진 최초의 인물이다. 기하학에서 그는 다음과 같은 기본결과들을 밝혔다.1. 원은 임의의 직경에 의하여 이등분된다.2. 이등변삼각형의 두 밑각은 같다.3. 두 직선이 만나서 생긴 맞꼭지각은 같다.4. 두 삼각형에서 각각 두 각과 한 변이 서로 같으면 그들은 서로 같다. (탈레스는 아마 해변에서 배까지의 거리를 계산하는데 이 결과를 이용했을 것이다.)5. 반원에 내접하는 각은 직각이다. (바빌로니아인들은 이보다 1400년 전를 끌어왔다.크세노크라테스는 이 개념을 이용해서 제논의 역설과 같은 수학적, 철학적 사상에서 고민 거리였던 많은 역설을 해명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아리스토텔레스도 제논의 역설에 매우 큰 관심을 보였으나 상식을 토대로 반박하려고 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당시의 추상개념이나 전문적 사항에 대하여 플라톤 학파 수학자를 따르기를 망설였으므로, 그 주제에 대해 계속 이바지하지 못했다.그는 피타고라스의 전기를 썼다고 이야기되지만 남아 있지 않다. 게다가 아리스토텔레스가 전개한 논리의 근거와 방대한 저작에서 수학적 개념과 정리에 대한 잦은 언급을 보면 그는 수학의 발전에 확실히 이바지했다고 볼 수 있다. 산술이나 기하학에서 잠재적 무한과 실무한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논의는 수학의 기초에 대해서 쓰려고 했던 뒤의 많은 저자들에게 영향을 주었다.그러나, 수학자들은 “무한을 필요로 하지도 않고, 사용하지도 않는다”는 그의 말은 무한은 수학자들의 낙원이라는 오늘날의 주장과 대비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업적으로 더욱 분명한 것은 수학에서 정의와 가정의 역할에 대한 분석이다.그의 주된업적은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1. 연역 논리는 조직화했다2. 기하학적 전개 방법을 확립했다.3. ‘점, 선, 면은 각각 선, 면, 체의 한계이고, 체는 3방면의 방향을 가진 것이다’? 유클리드 (Euclid B.C 330~275)기하학의 시조유클리드는 BC 330년경 시리아(Syria)의 지루에서 출생하였으며, 아버지는 노크라데스, 할아버지는 시날크스라고 하는 다마스크 출신의 그리스인 이었다.유클리드는 프톨레마이오스의 제자들과 함께 아테네에 위치한 플라톤 아카데미에서 연구를 했다고 알려져 있다. 이후, 그는 연구를 위해 그리스에서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로 이주했다.프톨레미 I세가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 수학학교와 박물관을 개장하기 위해 그를 초청했던 것이다.이곳에서 그의 위대한 작업인 '기하학원론'이 탄생했다.한편, 파포스의 책에는 아폴로니오스가 유클리드의 제자였다는 기록이 남아있다.파포스에 따르면 현재않으나 그의 연구업적은 프톨레마이오스의 저서 《알마게스트》에 수록되어 후세 천문학의 기초를 구축하였다.히파르코스의 천문학적 업적은 수학의 일부 분야를 발달시켰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삼각법의 초기 공식을 만들었으며 현의 계산표를 만들었다. 즉 단위원과 원의 중심에 주어진 각에 대응하는 두 점 사이를 연결하는 선의 길이, 예를 들면 각 α의 현=2 sin(α/2)로 표현되는 현의 길이를 구하는 표를 만든 것이다. 또한 그는 구면삼각형을 계산하는 방법을 알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평면기하학에서 '프톨레마이오스의 법칙'으로 알려진 정리도 원래는 히파르코스의 것인데 후에 프톨레마이오스가 모방한 것이라고 인정되고 있다. 18세기에 프랑스의 정치가이며 수학자인 라자르 카르노는 평면삼각법 전체를 이 공식들로부터 유도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헤론 (Heron B.C 130~75)그리스의 기계학자·물리학자·수학자종종 Hero(영웅)라고 불리우는 헤론(Heron)은 위대한 기하학자이자 기계학자였다.그의 저서 측량술(Metrica) 제1권은 삼각형, 사각형의 면적, 3부터 12면을 갖는 정다각형, 원뿔, 원기둥, 프리즘, 피라미드, 구 등을 다루고 있다.또한, 2000년 전 바빌로니아 사람들에게 알려진 대략적인 제곱근의 값을 구하는 방법도 다루고 있다. 또한, 헤론으니 그의 유명한 공식을 증명하였다.만약 a,b,c 세면을 가진 삼각형의 면적이 A이고 s=(a+b+c)/2 이면 A^2 = s(s-a)(s-b)(s-c) 이다.측량술(Metrica)의 제2권에서 헤론은 구, 원기둥, 프리즘, 피라미드 등과 같은 다양한 3차원 모양의 다루고 있고, 측량술(Metrica)의 제3권에서는 주어진 비(ratio)에 의하여 면적과 체적을 나누는 것을 다루고 있다.Dioptra는 경위의(經緯儀, theodolite)와 측량술에 대해 다루고 있다.이 책은 각 도시에서 관찰된 달의 위상의 차이를 이용하여 알렉산드리아와 로마 사이의 거리를 알게된 방법을 포함한 천문학을 포함하고 있다.Ca상도 못할 엄청난 작업이 아닐 수 없다.한 외국 수학가도 조충지가 계산해낸 원주율과 같은 결과를 얻어내긴 했지만 그것은 1천여년이 지난 뒤였다. 주충지의 뛰어난 기여를 기리기 위하여 일부 외국 수학 사학자들은 원주율π을 “주율”로 명명할것을 제의하였다.원주율계산면의 성과외에도 조충지는 아들과 함께 교묘한 방법으로 구체적 계산문제를 해결하였다. 서방국가에서는 “카바레리( Cavalieri)원리를 채용했는데 그것은 주충지의 뒤를 이어 1천여년 후에 이딸리아 수학가 카바레리가 발견한 것이다. 조충지 부자가 이 원리를 발견한 중대한 기여를 기리기 위하여 수학사상 이 원리를 “조원리”라고 부르게 되었다.수학분야에서 거둔 조충지의 성과는 중국 고대 수학성과의 한 면에 불과하다. 사실 14세기 이전에 중국은 세계적으로 수학이 가장 발달한 나라 중의 하나였다. 예를들면 기하 중의 구고정리는 중국 조기의 수학 전서 “주비산경(周脾算經 )” (약 기원전 2세기 경)에 논술되여 있으며 기원 1세기에 나온 중요한 수학전문 저작 “구장산술(九章算術 )”은 세계 수학사상 최초로 부수개념과 정부수 가감법 법칙을 제출하였으며 13세기에 이르러 중국에는 이미 10차 방정식 해법이 있었다. 유럽은 16세기에 와서야 3차방정식 해법을 제기하였다.? 아리압하타 (Aryabhata 476~550)인도의 수학자·천문학자5∼6세기경의 인도의 수학자·천문학자. 그가 쓴 《아르야바티야 Aryabhatiya》가 남아 있어, 그가 476년에 출생하여 499년에 이 저서를 냈다는 사실을 추정할 수 있고, 그 밖의 사항이나 경력에 대한 문헌은 없으며, 다만 성(姓)이 같은 천문학자가 또 한 사람 있었다는 설도 있다.《아르야바티야》는 4장(章)으로 나누어 천문학을 주로 다루고, 수학에 대해서도 언급하였다. 제1장에서는 문자에 의해 수(數)를 표시할 수 있는 독특한 방법이 제시되었으며, 그리스로부터 전수되어 온 사인(sine)함수표(函數表)가 있다.또 지구자전설(地球自轉說)을 기술한 내용이 있어, 이 점에 대해서는 들면이라고 표시되는 영역으로 연구를 진전시켰다. 수학의 역사에서 이것은 고등 초월함수에 대해 처음으로 시사한 바일 것이다. 그러나 적절한 용어와 표현법이 없었기 때문에 오렘은 무리수의 거듭제곱의 개념을 효과적으로 발전시킬 수 없었다.《형상의 위도에 관하여》라는 책에서는 점을 좌표로 표현했는데 현대 좌표기하학의 전조가 되었다. 14세기 말엽의 이 마지막 논문은 나중에 르네상스 시대의 수학자들과 데카르트에게까지도 영향을 주었다. 1494년에 이탈리아의 수도사 루카 파치올리(1445~1509)의 《산술요약집》이 출간되었는데, 그 곳에는 상업수학이 충분히 다루어지고 있고, 많은 문제들로 예증을 들고 있으며 특히 중요한 복식 부기(회계를 기계적으로 나타내는 획기적인 방법) 의 내용도 포함되어 있다.? 주세걸 (朱世傑 1300년경)중국 원나라 초기의 수학자주세걸은 방정식의 이론 방면에서 뛰어난 공헌을 했다. 산학(算學)에 관한 저작 외에는 생애에 대해 알려진 것이 별로 없다. 그는 베이징[北京] 부근의 옌산[燕山]에서 살았다고 한다. 또한 유명한 수학자로서 중국을 두루 돌아다녔으며, 많은 제자들이 그에게 배우기 위해 몰려들었다고 한다.저작으로는 〈산학계몽 算學啓蒙〉(1299)·〈사원옥감 四元玉鑑〉(1303)이 있다. 〈산학계몽〉은 초보자용 교재로 기초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책은 19세기 이후에 실전되었지만 일본과 한국에서는 15세기에 교재로 광범위하게 채택되었다.〈사원옥감〉은 더욱 중요한 저서이다. 4개의 원소라는 의미의 4원(四元)은 '천원술'(天元術)을 기본원리로 한 독창적인 발상으로, 4개의 미지수를 대수방정식으로 푸는 방법이다.? 봉필 (Bonfil, I. 1350년경)프랑스 수학자.소수(小數)의 기호를 최초로 사용? 파치올리 (Pacioli, L. 1450~1520)1. 1, 2차 방정식 해법의 표준형을 다룸2. 확률론을 연구3. 복식부기를 시작4. 산술서『Summa de Arithmetica』지음1494년에 이탈리아의 수도사 파치올리의 의 제 1판이 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