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서 론예술 이라는 단어에 대한 정확한 정의는 명확하게 내릴 수 없을 것이다.다만, 대다수의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예술에 대한 추상적인 의미만이 우리가 내릴 수 있는 예술의 정의일 것이다.예술은 삶의 과정 그 자체일 수도 있고, 추상적인 개념에 대한 구체적인 증거일 수도 있으며, 다른 면으로 생각해 보면 일상생활과는 대립된 정제된 삶의 정수일 수도 있다.이처럼 예술은 우리에게 다양한 의미로 다가오고 그 표현되는 형식 또한 그만큼 다채롭다.음악, 미술, 연극, 영화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 우리는 예술을 접하고 있으며 이런 점에서 이미 예술은 우리 삶의 일부분을 차지하고 있지만 일상생활과 정확히 부합하고 있지는 못하다.그렇다면 과연 예술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목표는 무엇이며, 우리에게 무엇을 전하려고 하는 것일까?그리고 우리에게 있어 예술은 무엇인가?이런 의문에 대해서 예술에 대해 문외한이지만 지금까지의 생각을 통해 나름대로의 해답을 구하고자 한다.Ⅱ. 본 론1. 예술의 목표인류의 생성과 동시에 예술이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지금까지 발굴해 낸 유적들이 그러한 사실을 말해주고 있고, 더 고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발굴해 내지 못한 유적이나 예술품은 지금까지 발견해낸 것을 넘어 설 것으로 생각된다.그렇다면 그 오래전부터 인류는 왜 예술활동을 했던 것일까?아마도 처음에는 예술과 생활이 분리되는 개념이 아닌 예술이 생활 그 자체였을 것이다.자신들의 삶을 위해 우상물을 조각하고 동굴에 벽화를 그리는 행위들을 오늘날 우리들은 그들의 예술활동으로 간주하고 있다.그런 면에서 생각해 보면 예술이란 자신이 추구하고 원하는 것이 유형이든 무형이든 외부로 표출된 것 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예술은 작가의 상상력의 모토 위에서 작가가 일반인에게 보내는 질문일 수도 있고 웅변일 수도 있으며 갈구일 수도 있다.예술가들은 그러한 그들의 활동을 통해서 과연 무엇을 추구하고 있는 것일까?예술은 철학이라기 보다는 직관적인 것이다.이것은 작품의 세계가 아무리 정신적인 것과 연결되고 철학적인 의미를 지닌다 하더라도, 그 의미는 작품을 바라보고 직관적으로 느끼면서 얻는 내용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따라서 예술은 지관의 감성적 특질과 그 의미에 따라 가치가 규정되는 세계이며, 그렇기 때문에 감성의 총체적 능력인 직관에 의존한다는 것이다.직관이란 어떤 추리도 요하지 않으면서도 사물의 정수를 단번에 깨닫는 능력으로서, 감성 세계 자체의 신비를 나타낸다.그래서 나는 우선 예술이라고 하면 아름다움 이라는 단어가 먼저 떠오른다.아름다워야 예술이지 추한 것은 예술의 범주에서 벗어난 것이라고 생각한다.하지만 최근의 예술작품의 형태들을 보면 기괴스러운 조각작품이나 불협화음의 음악 등이 수준 높은 예술작품으로 여겨지고 있다.그런 면에서 이미 예술은 외적인 아름다움보다는 내적인 메시지에 치우치고 있는 것 같다.하지만 나는 아직도 예술은 아름다워야 한다고 생각한다.아름다움은 예술에 있어 필요충분조건이기 때문이다.우리는 직관적으로 추한 것에는 눈을 돌리고 아름다운 것을 응시하고 그것을 느끼기 마련이다.예술은 무엇보다도 교육적 덕목을 지닌 것이다.이것은 예술이 사회속의 한 중요한 영역으로서, 특히 문화적인 차원에서 어떤 교육적 기능과 효과를 지닌 것이고, 아무리 개인적 감성의 주관에 달린 세계라 할 지라도, 사회적인 객관적 의미의 맥락에서 인간성 자체의 질적 향상에 고무적인 작품세계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그렇기 때문에 예술가들은 -누구나 예술가일 수 있지만- 일반인들에게 격정이나 흥분보다는 안정과 사색을 줄 수 있도록 추구해야 한다.그리고 예술가들에 의해 이루어지는 예술작품은 현실적이고 물리적이며, 상징적이고 정신적이다.현실적인 이유는 그것이 실제로 현실에 물질적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에 근거한 것이고, 상징적이라 함은 실제적이면서도 실제적인 것을 떠난 초현상계적인 정감의 세계를 낳기 때문이다.따라서 복합적인 예술작품의 의미는 우리에게 이중적 의미로 주어지는 내용이며, 이 내용은 이중성을 통하여 항상 우리의 현실 속에서 색다른 의미의 존재로 느끼게 해주는 것이다.이 색다른 의미는 특이함이라 할 수 있는데, 예술세계의 특이함이 생겨나는 것은 바로 이같은 맥락에서이고, 우리는 그런 특이함을 통해 새로움을 맛보며 때로는 즐거워한다.이러한 의미의 존재는 정신의 차원에 있는 것이며, 하나의 가치가 형성됨을 가리킨다.즉, 예술작품의 가치는 현실적인 인간에게 새로운 의미의 인간적 존재를 느끼게 해주면서 정신적으로 영향을 끼친다는 것이다.예술작품을 느끼고 사고하는 가운데 인간은 삶의 의미를 새롭게 구성할 수 있는 것이고, 이런 구성이란 바로 아름다움의 느낌과 상통하며 아름다움의 느낌 속에서 인간은 새로움을 맛보고 있다는 것이다.예술작품의 의의와 의미는 이런 측면에 있다고 생각한다.이처럼 예술은 아름다움을 통한 인간의 아름다운 변화에 그 목표가 있다고 생각한다.2. 일반인의 예술예술이 아름다움을 통한 변화라고 할 지라도 우리 일반인들이 예술을 예술 자체로 바라보기에는 예술에 대해 아는 것이 너무 부족하다.흔히들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사랑한다. 라고들 말한다.그러니 예술에 대해 아는 것이 없는 우리는 그렇게 아는 것이 없는 만큼 예술을 사랑할 수 없게 되어 버린 것처럼 보인다.그래서 나는 영산에 핀 꽃을 찬미하기 보다는 다만 면전의 수줍은 꽃 한송이를 바라보고자 한다.예술도 너무 높은 경지만을 추구하다 보면 우리들이 주변에서 접할 수 있는 아주 많은 그리고 소박한 아름다움들을 지나쳐 버리기 쉽기 때문이다.나를 비롯한 많은 일반인들이 그러하듯이 미술사조가 어떻게 변천되어 현재에 이르렀는지, 수많은 작품들이 내포한 진정한 의미는 무엇인지, 감상하고 있는 그림의 작가가 어떤 화풍인지 전혀 알지 못한 채 자신의 느낌에 의지한 채 감상을 한다.전문가들은 그것이 잘못된 감상법이라 할 지 모를지만, 어차피 작품의 진정한 의미는 작가만이 알고 있고 전문가들의 평가 또한 그들의 개인적인 감상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볼 때 우리 일반인들이 느끼는 작품에 대한 감상이 그 작품이 가지고 있는 또다른 일면이 아닐까 생각한다.예술은 객관적인 것일 수도 보편타당한 것일 수도 없다.한 점의 그림, 한 곡의 음악에 수많은 서로 다른 느낌과 평가가 내려지곤 한다.그래서 나는 예술에 관한 한 느끼는 만큼 사랑한다 라고 말하고 싶다.우리가 흔히 쓰는 감탄사 가운데 거 참, 예술이다! 라는 말이 있다.우리들이 예술이다 라는 감탄사를 연발할 때는 색다른 그 근원을 두는 듯하다.자신들의 상상을 뛰어 넘는 행동이나 말 혹은 사물에 대해서 우리는 곧잘 놀라곤 한다.또한 권태로움에 젖어 있다가 맛보는 신선함에도 감탄을 한다.어린 아기가 처음 내뱉는 엄마, 아빠 소리에도 예술이다 라며 감탄하고, 일상과는 다른 자연이 주는 색다른 매력에도 예술을 운운하는 것이다.이러하듯 우리는 새롭고 참신한 것을 대하게 되면 예술이라고 말하게 되는 것이다.그러면 왜 이런 색다름을 예술과 결부시키게 되었을까?이것은 일상과 관계가 있는 듯하다.산업 혁명 이전만 하더라도 물질과 자본이 충분하지 못해 사람들은 삶을 지속시키는데 관심이 집중되어 있었다. 하루하루를 힘들게 살아가는 이들 일상에서 벗어나 어떤 것들에 쉽게 감탄하게 되었을 것이다.서양의 예술이 종교라는 초인적인 것에 기대어 발전하였고 동양의 예술이 대부분 상류 계층에 의해 발달했다는 사실에서 일반인들은 일상에 찌들지 않고 일상을 초탈한 색다름에 감탄하게 되고 또 이런 색다름은 곧 예술로서 받아들여 진 듯하다.그렇지만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 중 일상에 찌들리면서 색다름을 추구한 사람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외면을 당했다.이들의 시도는 다른 이들에게 색다름이라기 보다는 현실도피 혹은 미친 짓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이다.따라서 이들의 색다름은 동시대에는 예술로서 인정받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다.이렇듯 예술은 일상과는 격리된 색다름으로 인식되어 왔고, 그 결과 우리는 새롭고 신선한 것을 접하면'예술이다'라고 자신 있게 말하는 것이다.하지만, 지금까지 이야기되어진 '예술'은 일반적으로 혹은 학술적으로 규정지어진 그것과는 많은 차이를 나타낸다.일단 색다름이란 것은 인공적인 사물뿐만 아니라 말과 같은 추상적인 사물 그리고 자연경관 같은 자연적인 사물 모두를 포함하는 것이기 때문이다.그렇다면, 우리는 예술에 관한 좀더 확실한 정의를 위해 일반적으로 규정된 예술에 관해 살펴보아야 하겠다.예술은 인공적이며 인위적이어야 한다.울창한 숲이나 아름다운 형태를 이루며 흘러내리는 시냇물, 노을이 비친 저녁 바다 등을 예술이라고 하지는 않는다.숲을 연상시키는 분재, 전기 모터를 사용한 분수 그리고 노을이 비친 바다를 찍은 사진들을 예술이라고 한다.'그저 있는 그대로'에서 '이렇게 있도록'이 바로 예술인 것이다.또한 예술은 아름다워야 한다.밝은 빛깔과 아름다운 선율, 균형 잡힌 구도, 희망을 주는 이미지 등 긍정적이어야 한다.그럼 비극이나 우울한 음악은 예술이 아니란 말인가?그렇지 않다.그러한 것들도 카타르시스를 유발하여 궁극적으로는 심미적인 무엇을 준다.비극을 읽고 한바탕 울고 나면 작품 속의 인물을 애도하고 동정하는 것을 넘어 그렇지 않은 자신의 처지를 기뻐하며 삶에 희망을 갖게 한다.이렇듯 예술은 언제나 아름다움를 추구한다.예술은 인간과 관련이 있다.예술이라는 것을 만든 것도 인간이요 줄기는 것도 인간인 만큼 예술은 반드시 인간과 관련이 있다.이것을 더욱 확장시켜 이야기하면 예술은 인간의 삶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는다.예술 작품을 만드는 예술가들은 자신들이 본 세상 그리고 자신들이 살아온 삶, 거기에 더해 자신들이 꿈꾸는 삶 등을 예술이라는 도구를 통해 표출한다.
Ⅰ우리나라가 안고 있는 교육의 모든 문제는 사교육비와 과외교육의 문제로 귀결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교육정책의 탐구’ 이 책에서 제시한 교육쟁점인 학교제도, 평준화 정책, 교육환경, 대학입학 전형제도 등 모든 문제들이 사교육과 과외교육의 배경과 근본적인 원인으로 작용한다는 것을 우리는 실제 교육현장에서 경험하며 자라왔다. 입시제도는 물론, 관련 없어 보이는 교육정책까지도 사교육비에 크게 영향을 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정부에서 역시 해결해야할 시급한 문제로서 지적 하고 있는 바이다. 이에 대한 해결방안이 다양하게 나왔지만, 급속도로 증가하는 과외교육과 관련한 사교육비 문제의 심각성이 커지면서, 결국 해결이 불가능 하다는 견해까지 나오게 되었다. 이러한 견해가 나오기까지 이 땅의 과외교육의 현황과 문제점, 그로부터 발생하는 교육의 폐해는 무엇 인지 그리고 해소를 위한 대책을 논의 해보도록 한다.Ⅱ현재 과외교육의 현황을 논의하기 앞서, 정확한 쟁점 분석을 위해 ‘과외 교육’ 의 개념과 지금까지의 변천 과정을 간략하게 살펴보도록 하자. 과외 교육이란 용어는 ‘과외’를 어떻게 규정하느냐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질 수 있다. 학교 이외 일체의 교육이라는 광의의 개념이 될 수 있고, 부족한 지식을 보충-보완 하는 수업 외 활동을 지칭할 수도 있다. 그에 따라 유형 역시 다양하게 갈린다. 그러나 여기서는 사회적 문제를 야기하는 주요 원인으로서 특정 문제 사태만을 집중하여 정상적인 교육과정이외에 개인적-집단적 입시준비 활동으로 한정하여 논의를 전개하고자 한다.사회문제로 대두되기 시작한 것은 초등학교 의무 교육 정책의 추진으로 중학교 진학단계에서 병목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한 1950년대를 1기로 볼 수 있다. 이를 해소하기 위해 중학교 무시험 제도를 시행하여 자연스럽게 과열과외를 방지하는 효과를 얻었다. 그러나 중학교 무시험 입학제도는 고등학교 단계의 급격한 교육수요를 창출하게 되었고, 이는 다시 고등학교에서의 과열과외로 변모되어 문제로 부각되었다. 해소를 위한 방안으 2기로 분류할 수 있겠다. 평준화 정책 결과 입시 경쟁은 대학진학을 위한 경쟁으로 넘어가게 되었고 전국 과외비의 총 비용이 3,275억원이라는 엄청난 충격에서 교육은 사회문제로서 대두되는 그 심각성을 깨닫고 전면적인 금지 개혁조치를 내리는 3기로 들어선다. 그러나 부족한 것을 보충하겠다는 교육의 기회를 금지시키는 제도에 대한 모순점을 지적하며 과외교육 허용론이 대두되면서 금지조치에 대한 점진적 완화에서 전면허용기로 지금까지 정책을 유지하고 있다.과외 교육은 크게 학교 내 과외 수업, 교외 교습활동 그리고 방송을 통한 과외교육으로 구분할 수 있다. 과외교육이 원칙적으로 금지되면서 보충 수업, 자율학습이 권장되었다. 과외욕구를 학교 내로 흡수하려는 노력을 기울인 것이다. 그러나 보충이나 심화학습보다는 정규수업의 연장으로 부진학생들의 교육기회를 오히려 제한하고, 교사들에게 과중한 부담만을 가져 다 주면서 부작용을 초래 하였다. 결국 학교나 지역 실정에 맞게 실시하도록 하는 방침을 내렸고, 학생의 소질, 적성 계발 특기 신장을 위한 방과 후 교육활동이 생기게 되었다.교외 교습활동은 1990년대 초 학원수강까지 허용되면서 교외 과외가 보편화 추세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허용조치가 심리를 자극하게 되면서 대입경쟁과 맞물려 과외교육의 규모가 확대되고 팽창되어 지금의 문제 상황을 야기하게 된다. 과열 과외의 해소와 교육의 정상화를 도모한다는 취지아래 교육개혁을 단행하는데 교육방송이 실시된다. 애초에 과외문제에 대한 잘못된 진단과 처방에 기초하고 있어 과외를 경감시키기 보단 오히려 열풍으로 휩싸이게 하고, 지식위주의 입시교육에만 몰두하게 함으로써 전인교육에 방해 요소가 되고 있다. 실제 교육입시와 관련하여 교육방송의 열풍이 불었을 무렵, 많은 수험생들이 방송을 청취했지만, 방송 교육의 능력수준과 교육진도에 맞는 학생은 일부에 불과하여 학습효과로서 모두에게 만족스러울 수 없었다. 바로 이때 고3이었던 나는 그 문제점을 몸으로 체험하였다. 겉핥기식의 수업방식과 심화과정의 전문성이에 있어 실효성을 발휘할 수 있는 유용한 교육방법으로 적절치 못하였다.이렇게 전개된 과외교육의 현황과 교육부의 대응 속에 불거지는 문제점은 세 가지 측면에서 다음으로 압축할 수 있다. 우선 교육적 차원에서 단편적 지식전달로 지적-정의적-신체적 발달과 창의력, 비판적 사고력과 같은 고등정신 기능의 발달을 억제 시켜 전인적인 발달이 저해된다. 또한 학생들의 학교교육에 대한 중요성과 교사에 대한 존경심을 소홀히 하여 학교교육을 불신하여 정상적인 학교기능의 마비에 이르게 한다. 경제적 차원에서 과열된 과외교육은 서민에게도 압박을 불어넣어 가계의 적자에도 불구하고 투자하게 되는 소득 분배상의 불공정을 야기 시킨다. 과중한 과외비는 사회적 차원에서 불평등을 야기하는 결과로 이어지고 국민의 공동체 의식에 와해를 가져온다. 인간이라면 헌법에 의거한대로 누구나 균등한 교육의 기회를 갖아야하지만, 시장경제의 논리가 지배한 사회 속에서는 과외교육역시 개인의 자유인 것이다. 그로부터 계층간 위화감이 심화되고 결과적으로 사회적 불안을 조성하게 된다. 과외교육을 받아왔고 현재 과외로 용돈을 충당하는 나는 이 현실을 뼈저리게 느낀다. 내가 가르치고 있는 상위권의 한 학생은 학교교육은 도무지 도움이 되질 않는다고 하고, 과외를 구하면서 집안사정을 걱정하고, 많은 과목을 과외로 교육받고 있는 친구가 부럽다고 이야기 한 적이 있다. 이처럼, 교육제도와 사회 구조 안에서 아이들은 학업성취만을 지나치게 강요 받아왔고, 학교 교육으로는 그것을 충족시킬 수 없다고 판단한 이상- 아이들은 사교육에 기댈 수밖에 없는 현실이고, 그 자유 시장경쟁의 현실에서 경제적 문제로 부딪힌 아이들은 사회적 불평등과 위화감을 갖게 되는 것이다. 과외교육정책이 실질적으로 전면적인 허용을 실시하고 있으나 그에 따라 역시 문제가 생기면서 과외금지정책에 대해 정당성과 부당성의 두 갈래로 쟁점이 부각되고 있다. 과연 과외교육 금지조치가 교육의 기회균등의 측면에서 정당한 것인지 부당한 것인지 계속해서 제고해야할 과제로 남아있다.석해 보면 파생한 교육적 사회적 경제적 측면에서 발생한 문제 들 만큼이나 원인 또한 다양하다. 어떤 요인이 한 가지 문제에만 관련된 것이 아니라 두 가지 문제 혹은 그 이상의 문제에 모두 관련 되어 있어 명확한 인관관계를 관련짓기 어려우므로 과열과외의 발생원인을 크게 교육내적 원인과 외적 원인으로 구분해 본다. 내적으로는 대학진학 수요에 비해 부족한 진학기회, 지역 - 계열 간 불평등하게 배분된 고등교육기회, 올바른 평가 도구로서 신뢰성이 부족한 대학입학전형제도, 교육과정의 비정상적 운영, 교원의 사회 경제적 처우 미흡, 획일적인 교육, 영세한 교육제정으로 인한 학교교육 여건 부실 등이 있다. 교육 외적 원인으로 학력간 임금 격차와 같은 고용조건 불평등, 교육을 출세수단으로 보는 전통적 가치관, 학력위주의 풍조, 학생의 적성과 소질을 고려치 않는 부모의 교육관 등 사회적 배경과 맞물려 물질 만능주의, 오도된 평등주의, 행정편의주의, 권위주의가 교육문제를 야기하는데 영향을 주고 있다.이러한 과외교육 문제에 대한 대책으로 많은 대안들이 나왔지만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과열 입시 과외의 문제는 여전히 교육의 고질적인 병폐중의 하나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어려운 까닭은 과외 문제가 본질적으로 복잡하고, 그 원인 다양하게 파생되는데 여기에 다가 그동안의 대책들이 단기적이고 임시방편적 이었다는 것이 문제를 더욱 심화시켰다.교육부의 근시안적인 대책들에 대해 질책을 가하고 분석 비판을 한 자료를 살펴보겠다.단기 대책에 대한 교육인적 자원부의 분석, 평가의 문제점을 이야기하면서 보충 및 자율학습의 강제성과 학생들의 건강권, 인권은 고려하지 않은 채 참여율만 가지고 자화자찬하는 식이라고 지적한다. EBS 교육 서비스에서 수능 출제 ‘협박’의 결과를 성과라 자화자찬하며, 그 강도를 높이고 있다고 분석한다. 단기적인 대책을 꾸짖기도 하는 듯 사교육비 대책에도 불구하고 입시학원의 증가세는 여전하고 석 달 새 서울에서는 183곳이 늘어났다는 보도가 일고 있다.Ⅲ위와 같은 대책에 대으로 접근하고 시간이 걸리더라고 장기적이고 거시적인 관점에서 대책이 마련되어야할 것이다. 그래야만 근본적인 치료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우선, 과외 금지 위헌 결정에는 공교육을 내실화 시켜서 과외에 대한 욕구를 해소하고 동기유발을 줄이겠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결론적으로 학교교육의 여건을 향상시켜 학생들의 공교육에 대한 기대를 높이고 신뢰를 갖게 하게 하는 것이다. 교육환경의 개선에서 가장 우선시 되는 것이 교사 1인당 학생수 이다. 여러 교육환경이 공교육의 여건과 질에 고려되어야 하겠지만, 1차적으로 가르치고 배우는데 있어 구조적 문제점을 해결해야 할 것이다. 두 번째로는 대학 입시제도의 개선이 요구된다. 시험성적의 단일기준의 경쟁 구조에서 다양한 자기 주도적 학습활동과 실적을 평가에 반영함으로써 시험위주의 교수-학습관행의 변화를 유도하는 것이다. 이는 곧 학생선발의 적합성(relavance)을 높이는 길이다. 사적인 노력의 결과가 교육경쟁에서의 위치를 결정하는데 지나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데, 이것이 사교육에 대한 의존도를 높이고 있으며, 반비례적으로 공교육의 약화와 위상을 낮추고 있다. 사회경제적 지위의 차이에 따라 개인적인 노력의 수준이 결정되기 때문에 교육기회의 불평등을 야기하기 때문에 따라서 교육소외계층에 대한 지원이 필요하다. 세 번째로 교육제정을 GNP 6% 이상 확보 하는 것이다. 이것은 사교육이 공교육을 압도하는 상황에서 학교교육의 경쟁력을 제고 하는 방안이다. 국가 경제적 위기에 처할 때 마다 교육투자를 삭감하는 현실에서는 공교육의 경쟁력 확보란 기대하기 어렵다. 또한 지식기반사회에 필요한 학생들의 학습의 요구를 충족하는 “새로운 교육중점”과 기준을 설정하여 “참다운 학업 성취(Authentic achievement)” 의 개념 정립하고 교육적으로 의미 있는 homework을 수행하는 자기 주도적 학습이 강조해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수요자 중심 교육의 실현의 중요한 일환으로 학교 내에서 다양한 교육 욕구를 수용할 수 있도록 “방과 후 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