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차 례 ◈1. 여는 말2. 조선통신사란3. 해신제란4. 조선통신해신제 감상문5. '미지의 세계' 새 경험 창작으로 승화6. 문학의 소재가 된 부산, 문학적 공간 일본까지 확장7. 맺는 말8. 첨부 사진9. 참고 자료 출처1. 여는 말‘ 일본의 역사왜곡은 현재진행형이다. ’마주할 수 있을 만큼 가깝지만 서로 등을 보이는 나라, 한국과 일본을 난 이렇게 설명하고 싶다. 가깝고도 먼 나라 일본은 지금까지도 역사의 과오를 인정하지 않는 꼿꼿한 고집쟁이이다. 세계를 정복할 야심으로 많은 사람의 목숨을 앗아간 전범국가 독일이 지난날을 반성하고 사죄하는 모습과는 크게 다르다.오히려 일본은 반성하기는커녕 적반하장으로 과거사를 부정하거나 자국에 유리한 방향으로 역사를 왜곡한다. 문제는 그들이 역사를 날조ㆍ왜곡하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후세들에게까지 잘못된 역사를 가르치려 한다는 데 있다.세계 제2의 경제 대국이라는 위상에 걸맞지 않은 그들의 역사의식은 한국, 중국 등 많은 아시아 국가들에게 여전히 많은 상처를 남기고 있다. 그리고 그 상처는 현재진행형이다.이런 상황에서 한국과 일본 사이에 이미 400년 전에 통신사가 활약했다는 점은 그래서 더 놀랍다. 학창시절 국사시간에 통신사에 대해 배울 때는 응당 외워야할 역사라고만 생각했을 뿐 그 시절 통신사가 내포한 의미를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다시 생각해보니 그 역사의 깊이가 실로 놀랍니다.2. 조선통신사란올해 400주년을 맞는 조선통신사는 1607년(선조 40년)에 시작해 1811년까지 12차례에 걸쳐 일본에 갔다. 평균 18년 만에 한 차례씩 갔다.조선통신사가 내왕했던 당시 일본은 도요토미 히데요시 이후 패권을 잡았던 도쿠가와(德川) 집안의 에도시대(1603~1867년)에 해당한다.애초 조선과 일본이 사신을 주고받은 것은 1404년 태종 때부터였고, 통신사라는 명칭을 사용한 것은 1428년 세종 때가 처음이었다. 그런데 왜 1607년을 조선통신사의 기점으로 삼고 있을까? 그것은 임진왜란 직후 한일간의 상처를 씻고 새로운 평화의 시대를 열었던 것을 크게 기념하기 위해서이다. 조선통신사는 새로운 화해의 시대를 열었던 상징인 것이다.초기 3차례의 사절 명칭은 (조선)통신사가 아니라 '회답겸쇄환사(回答兼刷還使)'였다. 사절은 일본 측의 요청에 대한 답으로 보내는 것이고, 조선의 주목적은 임란 때 끌려간 조선 포로를 귀환시키는 데 있다는 것을 명시했다.하지만 일본 측 추정으로 5만~6만 명에 이르는 포로 중 3차례에 걸쳐 조선으로 돌아온 이들은 총 7천600여명에 불과했다. 일본이 성의를 보이지 않은데다가 세월이 흐르면서 조선 포로들도 일본에 뿌리를 내렸기 때문에 극히 일부만 돌아왔다.조선이 조선통신사를 파견한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당시 조선은, 북 방이 명청 교체기에 들어 어수선하자 남방의 일본 쪽을 안정시킬 필요가 있어 일본의 통신사 파견 요구에 응했다.한편으로 일본의 막부는 "통신사를 지극히 대접하라"고 60여개 번에 명령을 내려놓고 이를 어길 때는 가차 없이 영주를 처단하는 것을 통해 막부의 통제력을 확보해 나갔다.조선통신사는 당시 동아시아 정세 속에서 한·일 국내외 상황의 절묘한 균형 속에서 이뤄진 것이다.조선은 1636년 병자호란을 겪고 삼전도의 굴욕을 당할 즈음 대일외교에 더 큰 비중을 두었는데 1636년 4번째 사절 파견 이후부터 정식으로 '통신사' 명칭을 사용했다.조선통신사는 400년 전의 한류를 구가했다. 조선통신사 사절은 한 차례 400~500명에 달했으며 조선 최고의 지식인들이 속해 있었다. 일본의 지식인뿐 아니라 일반 백성들도 사절단을 찾아와 "가보로 남기겠다."며 글씨를 써 달라고 애원하기도 했다.조선통신사 길은 남방으로 이어지는 길이었는데 그 길을 통해서 17세기에 고추와 담배가,18세기에 고구마가 조선에 들어왔다. 그 길은 중국 '연행사의 길'과 함께 당시 조선이 세계로 통하는 두 갈래 길의 하나였다.☞조선통신사 파견시기회서기(조선연대)11607(선조40)21617(광해군9)31624(인조2)41636(인조14)51643(인조21)61655(효종6)71682(숙종8)81711(숙종37)91719(숙종45)101748(영조24)111764(영조40)121811(순조11)3. 해신제란‘ 해신제와 전별연으로 무사귀환 빌었다. ’뱃길을 따라 멀리 섬나라까지 간다는 것은 당시 사람들에게는 큰 부담이 아닐 수 없었다. 중국으로 가는 조천사(朝天使)나 연행사(燕行使)가 있었지만 뱃길은 색다른 경험이었다. 그래서 통신사의 무사귀환을 비는 자리가 바다를 앞둔 부산에서 마련됐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해신제(海神祭).해신제는 국가의 주요 행사 때 절차를 명시한 '국조오례의'에 따라 열렸으며 통신사 일행이 일본으로 떠나는 그날에 치러졌다. 지금의 동구 자성대 부근에 있던 영가대가 무대다. 해신제에 대한 기록은 1719년 통신사로 갔던 신유한의 '해유록(海遊錄)'에 비교적 잘 남아 있다.해신제가 아주 엄숙하게 치러졌다면 먼 길을 떠나는 통신사에게 잘 다녀오라는 뜻으로 걸게 열어주는 것이 전별연이었다. 잔치는 경상좌수사가 베풀었다. 원래 충주, 안동, 경주에서도 열렸지만 해당 고을의 경제적 부담이 너무 크다는 비판에 따라 1655년 이후 부산에서만 열렸다.4. 조선통신사해신제 감상문- ‘ 평화의 행렬 400주년, 다시 깃발을 들다. ’‘ 파도를 넘어 새 길을 열다. ’‘ 해신제, 복원해야할 뜻 깊은 문화 ’5월 4일 저녁 7시경 부산시 동구에 있는 자성대에 도착했다. 자성대 근처 영가대에서 행사를 한다고 했지만 장소를 몰라 사람들이 향하는 곳을 무작정 따라갔는데, 알고 보니 매일 등?하교를 할 때 지나치던 곳이었다.도착한 곳에는 많은 관련자들과 행사요원들이 가득했다. 해신제가 막 시작한 상태였다. 난 받은 안내책자와 해신제를 번갈아 지켜보았고 나도 모르는 호기심에 고개를 쭉 빼 한순간도 이 신기한 광경을 놓치지 않으려 애썼다. 그리고 해신제에 오기 전 내가 나름대로 조사해본 내용을 머릿속에 떠올려 비교해보며 상상했던 것과 현실의 풍경을 비교해보는 재미도 쏠쏠했다.조선국왕이 일본 막부장군에게 파견하였던 조선국왕의 외교사절들이 바다를 무사히 건널 수 있도록 제사를 지내는 것이 해신제라고 알고 있었다. 제사라고 해서 집안에서 치르는 보통의 제사를 생각하고 갔지만 많은 것이 달랐다. 이번에 재현된 해신제는 조선시대의 제사 의식이나 풍경을 볼 수 있어서 흥미로웠다. 명절이나 제사 때 아버지와 형가 함께 제를 올릴 때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아주 공식적이고 깍듯한 종가집의 제사에 참여한 느낌이랄까?그래서 자세한 내용까지 속속들이 이해하지는 못하였지만 평생 한번 볼까 말까 하는 행사를 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더 가까이에서 제사상이나 제사를 진행하는 모습 등을 보고 싶었지만 많은 사람과 기자들이 때문에 가까이에서는 지켜보지는 못했다. 해신제를 지켜보기 위해 모인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 다음부터는 스크린을 설치해 화면으로 의식을 더 자세히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보았다.제사상에 음식을 올릴 때 마른 음식은 대나무 그릇에 올리고 젖은 음식은 목 그릇에 올리는 데 사소해 보이는 이 작은 행동 역시 음양의 조화를 생각한 것이라는 대목에서는 선조들의 지혜와 슬기를 엿볼 수 있었다.해신제의 제사상 차림은 8변 8두 차림이다. 황제에게 바치는 가장 큰 제사상 차림인 '12변 12두' 다음이다. 이것으로 보아 해신제가 조선시대에 얼마나 중요한 제사였는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부산에서 재현되는 해신제가 제대로 재현되는 것이 올해가 두 번째이며 그 뜻 깊은 현장에 내가 있었다는 것이 자랑스러웠다.해신제의 재현은 후손에게 물려줄 수 있는 중요한 문화인 것 같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재현에 노력하고 문서화했으면 좋겠다.행사를 직접 보고 돌아와 다시 해신제에 대해 조사를 해보니 해신제에 오르는 제사 음식과 유래 등에 대해 더 자세히 알 수 있었다. 해신제야 말로 어른들이 아이들과 함께 체험할 수 있는 뜻 깊은 문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20대인 나에게 생소한 제사 문화는 어린 아이들에게 더욱 큰 감응과 놀라움을 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갈수록 전통문화는 줄어들고 종교의 영향으로 제사는 물론 차례조차 지내지 않는 가정이 많아졌다. 그런 사람들에게 우리 고유의 문화를 알 수 있는 해신제를 언론 등이 널리 알려 하나의 축제로 승화시키면 어떨까? 책으로 읽는 문화와 눈으로 직접 보고 귀로 듣는 문화는 엄청난 차이일 것이다.다음 행사부터는 행사 주최 측에서 해신제에 대한 간략한 소개, 제사 의식 등을 설명하면 이를 지켜보는 사람들이 더 깊은 이해를 할 수 있을 것이다.5. '미지의 세계' 새 경험 창작으로 승화사행문학의 정점은 현재 '해행총재'에 들어 있는 19권이다. 조선통신사로 갔던 정사 부사 종사관 역관 등이 썼던 기행문학이다. 이 중 조선통신사 사행의 전범이 될 정도로 내용이 풍부한 해유록(신유한·1719년)을 비롯, 부상록(남용익·1655년) 해사일기(조엄·1764년)가 3대 사행록으로 꼽히고 있다.중국 사행은 그간 책에서 배우고 익혔던 것을 직접 확인하는 '수학여행'의 성격이 강했다. 그러나 일본은 미지의 세계였다. 앞선 경험이 없었을 뿐더러 생사마저 기약할 수 없었다. 이런 덕분에 현지에 무사히 도착해 보고 느끼는 체험들은 더없이 소중했다. 이런 경험들이 기록과 창작에 대한 욕심으로 승화된다. 한국에 비해 현재 일본에는 조선통신사 사행원들이 남긴 시문들이 많이 남아 있다. 대표적인 곳이 시즈오카에 있는 세이켄지(淸見寺). 에도(지금의 도쿄)로 가는 길목에 있고 워낙 풍광이 좋아 절로 창작욕이 일었다. 세이켄지는 1994년 국가사적으로 지정됐다.또 현지인들의 문화적 향수 욕구도 한몫한다. 에도나 교토, 오사카 등 바쿠후가 직접 관할했던 지역에 비해 바닷길 주변에 있던 곳은 고급문화를 누릴 기회가 적었다. 각 번(藩)끼리 경쟁관계도 사행원들의 시문창작을 북돋았다. 현재 일본 사행과 관련한 자료들은 '해행총재(海行摠載)'에 잘 남아 있다.
1. 3상 제어정류회로를 구성하여 Pspice로 simulation하라.1) 입력 상전압의 실효치는 100+학번 마지막 2자리2) 점호지역각은 출력의 평균전압이 최대출력전압의 20+학번 마지막 3자리*0.07[%] 되도록 설정3) 부하 저항은 2)에서 정한 평균 전압에 의해 10A가 흐르도록 설정4) 인덕터를 삽입하고 출력의 가장 낮은 주파수 성분에 대하여 임피던스가 부하저항의 10배가 되도록 인덕턴스를 설정5) 결과: 부하 전압과 부하 전류2. Buck converter를 구성하여 Pspice로 simulation하라.1) 입력전압 [V]: 50+학번의 뒤 2자리/22) 스위칭 주파스 [kHz]: 40+학번의 뒤 2자리*0.43) 듀티 [%]: 40+학번의 뒤 2자리+0.454) 부하 저항 [ohm]: 1)과3)에 의해 결정되는 이론적 전압으로 1[kW]가 되도록 설정5) 결과: 정상상태의 다이오드 양단 전압과 인덕터 전류3. 전브릿지 인버터를 구성하여 Pspice로 simulation하라.1) 입력전압 [V]: 100+학번의 뒤 2자리2) 스위칭 주파수 [kHz]: 10+학번의 뒤 2자리*0.13) 모듈레이션 인덱스 [%]: 40+학번의 뒤 2자리*0.454) 부하: 저항 10 ohm+인덕터 2mH로 설정하라.5) 결과: 정상상태에서 저항 양단 전압과 흐르는 전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