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된 교회.hwp회(현대 그리스도인을 위한 새로운 공동체 이해) / 김영선 박사님31참된 교회(현대 그리스도인을 위한 새로운 공동체 이해)제1부 참된 교회의 배경제1장 교회론의 역사적 배경교회는 항상 이 세계 속에서 보이는 형태, 즉 역사적 형태를 취한다. 교회는 본질적으로 사회학적 현상이며 역사적인 현상이기 때문이다. 교회는 세계의 수많은 조직 가운데 존재하는 하나의 종교적 조직이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가 없다. 세계 속에 존재하는 교회는 시대마다 자신만의 특정한 교회론을 가지게 된다. 왜냐하면 교회론은 특정한 시대의 역사적 상황 속에서 특정한 역사적 교회에 의해 형성되고 특정한 신학자들에 의해 개념화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교회의 본질은 플라톤적 불변의 이데아의 세계에서 발견될 수 없고 오직 이 세계 속에 존재하는 교회의 역사 속에서 발견된다오순절 성령강림 사건과 교회의 기원오순절 날 예수님의 사도들과 제자들을 비롯한 120명의 추종자들이 마가 요한의 다락방에 모여 기도할 때 성령이 임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때부터 이들은 예수님을 기억하고 그분의 약속이 실현되기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모여 기도하고 복음을 전하였다. 이들은 예수님이 그들의 생전에 재림할 것을 믿었다. 이들은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주었으며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썼다. 기독교 공동체는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교회의 모습과는 거리가 있는 공동체였다. 이들 원시 기독교 공동체가 언제 유대교로부터 독립되어 교회가 되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이 원시 기독교 공동체가 현대 교회의 모체가 되었다는 것을 분명한 사실이다.로마의 박해와 속사도 교부들의 교회론초기 교회 공동체가 나타난 시기는 로마의 통치 하에 있는 시기였다. 초기 교회 공동체는 처음에는 그 세력을 크게 확장하지 못했다. 따라서 로마정부는 초기 교회 공동체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여 박해를 가하지 않았다. 당시 로마 제국은 자신들의 평화를 위협하지 않는 한 그 어떤 종교나첫째 서방교회는 성령이 성부와 성자에게서 유출된다고 보지만, 동방교회는 성부에서만 유출된다고 본다. 둘째 서방교회는 동정녀 마리아의 무죄성과 그녀의 승천설을 주장하지만 동방교회는 부정한다. 셋째 서방교회는 교황의 권위와 무오성을 주장하지만 동방교회는 부정한다. 넷째 서방교회는 사제의 결혼을 금하지만 동방교회는 하급 교직자의 경우에는 결혼을 허용한다. 다섯째 서방교회는 성만찬시 평신도들에게 떡만 배분하지만 동방교회는 떡과 포도주를 배분한다. 여섯째 서방교회는 화상숭배를 허용하지 않지만 동방교회는 허용한다. 동서방교회의 분리는 기득권을 획득하려는 데서 기인되었다고 볼 수 있다. 만약 교회가 기득권을 획득하려하기 보다 교회의 본질에 충실했다면 교회의 분리나 종교개혁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종교 개혁의 교회론중세 후기에 이르러서 참된 교회는 제도적 지배하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배하에 있다는 의식이 생겨났다. 이런 의식은 위클리프(John Wycliff, 1330-1383)와 후스(John Huss, 1372-1415) 같은 사람들을 통하여 중세교회의 개혁운동으로 나타났다.종교개혁의 교회론은 로마교회의 위계적인 교회론에 대항하여 발전되었다. 종교개혁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과 성도의 교제(communio sanctorum)로 보았다. 루터에게 교회의 유일한 표지는 말씀이었다. 그는 베드로전서 2:9에 근거하여 세례받은 모든 성도들은 하나님과 적접 교통할 수 있다는 만인제사장직을 주장했다.루터가 제기한 95개 조항의 핵심적인 부분은 면죄부와 교황무오설이다. 로마 가톨릭 교회는 로마의 베드로 성당 건축비를 마련하기 위하여 면죄부를 판매하였다 루터는 면죄부 판매는 비성서적이고 비신학적이라고 주장하였다. 또한 교황의 주장이 무오하다는 것도 용납할 수 없고 교황보다는 주교회의가 의결권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다.이처럼 루터는 교회의 무오성, 특별사제직, 또는 마술적으로 행하는 성례 개념을 거절하고, 신자는 누구나 다 사제직의 의무가 있다는 성경적 입장을 부활시켰다. 그도를 통하여 새롭게 세워진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그리스도의 몸으로 파악된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과 교회에 속한다는 것은 불가분리적으로 사로 연결된다.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교회 안에 있다는 것이고, 교회 안에 있다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이다.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교회 개념이 하나님의 선택에서 출발하여 현재를 통해 미래로 나아가는 시간적 표상을 나타내는 개념이라면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 개념은 언제 어디서나 그리스도의 몸을 구성하는 공간적 표상을 나타내는 개념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두 교회 개념들은 모두 교회와 그리스도의 결합 및 신자 상호간의 결합을 표현한다는 점에서 서로 통일을 이루고 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이해된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 해석되는 것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 사상으로부터만 그리스도의 몸으로 이해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개념은 하나님의 새 백성의 새로운 측면과 독특성을 표현해 주는 개념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인 한에 있어서만 그리스도의 몸이며 그리스도에 의해 새롭게 구성된 하나님의 백성인 동시에 그리스도의 몸이 된다.“공동체의 지체들은 ‘한 몸’이어야 한다. 그들이 ‘한 몸’이어야 하는 것은 그들은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믿는 자들이 일상의 삶 속에서 한 몸의 지체로서 살아야 하고 한 몸의 통일을 실현해야 하는 것은 그들이 세례 속에서 성령을 통해 그리스도의 몸에 편입되었고 성만찬을 통해 한 몸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몸은 서로 한 몸으로 결합하고 하나되려는 사랑과 의지를 통해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몸은 오히려 그리스도 자신에 의해 구성된다. 이러한 의미에서만 그리스도의 몸에 관해서 말할 수 있다.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란 명제는 그리스도와 교회의 한 몸된 관계를 나타내는 것이다. 교회의 토대는 그리스도이고 교회 성장 또한 그리스도에 근거하여 있다. 교회가 있는 곳에 야 할 그리스도인의 방향과 기준을 말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교회가 거룩하게 되는 길은 이 세계로부터 구분되는데 있다. 교회는 이 세계로부터 구분되며, 구분됨으로써 거룩하게 된다. 교회는 하나님이 부르신 거룩한 사람들의 공동체이다. 따라서 교회는 거룩하다고 말해 질 수 있다.교회는 자신을 스스로 의롭다고 인정하거나 성화시킬 수 없다.” 교회의 어느 것도 스스로 거룩해 질 수 없다. “제도나 선한 의지 그 자체가 거룩성을 창출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 모든 것은 불의한 자를 의롭게 만드시고, 인간과 그의 행위를 거룩하게 만드시는 분, 즉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만 거룩해진다.믿는 자는 개인으로서 구별될 뿐 아니라 의롭다함을 받고 성화됨으로써 성자들의 공동체에 편입된다. 하나님은 개인을 신앙으로 일깨우고, 의롭다고 인정하며, 성화시킴으로써 공동체를 거룩한 것으로 선별하신다.거룩한 교회는 회개하고 용서하는 교회이다. 교회가 거룩하다는 것은 교회는 항상 회개와 용서의 길을 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거룩한 교회는 자신만의 길을 가야 한다. 거룩한 교회는 가족, 민족, 국가와 같은 공동체와는 다른 길을 가야 한다.교회의 거룩성은 교회에게 주어진, 교회가 언제나 소유하고 있는 속성이 아니라, 교회 자신의 회개와 개혁을 통하여 쟁취해야 할 종말론적인 목적이요 과제이다.교회는 속된 것과 세상적인 것과 싸우면서 그 자신을 거룩하게 해야 한다. 회개와 용서를 산출하며 항상 갱신의 길을 가는 교회는 거룩의 길을 가는 교회이다.교회 자신이 거룩하게 되는 길은 예수의 뒤를 따라 이 세계에서 하나님의 정의를 세우는데 있다. 교회는 말과 행위를 통하여 정치적 정의를 추구해야 할 것이다. 또한 교회가 거룩하게 되는 길은 생태계의 위기를 저지하고 모든 피조물들이 평화롭게 살 수 있는 세계를 이루는데 있다. 하나님에 의하여 거룩하게 된 교회는 신음하는 피조물들을 구원함으로써 자기의 거룩함을 증명해 보여야 한다.가톨릭의 의미가톨릭(catholic)이란 말은 ‘전체와 관련된’, ‘전체를 지향하신자들에게 확신을 주는 징표의 역할을 하는 등의 목적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예언은 사랑과 겸손한 자세를 가지고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수행되어져야 한다. 또한 그 수행되는 예언은 영분별에 의하여 성령에 의한 것인지, 아니면 사탄에 의한 것인지 분별되어야 한다. 인간의 죄의 결과로 발생한 질병은 치유되어야 한다. 병의 치유를 위해서 우리는 안수, 믿음의 기도, 말씀, 기름 바르는 방법 등을 사용할 수 있다. 신유 은사자는 약과 의술도 하나님이 주신 치유 방법이기 때문에 배제하지 말아야 한다. 또한 모든 병이 치유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바울의 가시 신학과 같은 대처 신학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신유의 은사도 예언의 은사와 같이 겸손한 자세와 교회의 복종하는 자세를 가지고 수행되어야 한다. 예언과 치유 은사는 교회 성장의 힘이 될 수 있다. 왜냐하면 교회에서의 예언과 치유 사역은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를 가장 자연스럽게 보여주는 사역이 되며, 불신자들에게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직접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표적이 될 뿐만 아니라 이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고, 우리의 믿음의 성장과 성화를 이룰 수가 있기 때문이다. 병은 치유되어야 하고 하나님의 말씀은 예언의 사역을 통해 들려져야 한다. 오늘도 하나님은 예언과 치유 은사를 주셔서 하나님 나라를 세워 가신다.제 11장 방언의 은사방언은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우리의 발성기관을 통해 하나님께 드리는 배우거나 학습되지 않은 기도의 언어라고 할 수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방언은 다음과 같이 정의 할 수 있다.첫째 방언은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와 찬송의 언어이다. 바울은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라고 기록했다. 우리는 이 구절을 통해 방언은 사람을 위한 사람을 향한 말이나 언어가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언어임을 알 수 있다. 둘째 방언은 인간이 이해하지 못하는 언어이다. 바울은 방언을 말하는 자는 그 말하는 바를 알아들을 수 없으며 그의 영으로 비밀을 말한다고 하였다. 또한 “방언을 말하는 자.
1장 근원적 관계와 관계성의 모델과 본질1.관계와 관계성의 근원적 모델관계신학이 무엇인지 말하기 전에 관계or관계성이 무엇인지 물어야 할 것이다. 말 그대로 관계신학은 관계성을 기초로 하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신학과 과학은 서로 거의 대화가 불가능하고 양립이 불가능하다는 편견과 오해가 존재하나 관계성에서 두 영역이 그러한 진리를 발견할 수 있다. 다양한 차원에서 관계, 관계성을 논할 수 있다. 우리는 그러한 유형들을 신학적, 과학적, 인간학적 차원에서 통찰할 수 있을 것이다.1)신학적 모델(1)삼위일체의 페리코레시스신학은 하나님이 인간을 비롯한 이 세상의 모든 만물을 창조, 섭리하신다는 것을 의심의 여지없이 진리로 간주한다. 이는 그 전에 하나님이 이미 존재한 것과 우주, 세계가 없었던 때를 말하는 것이다. 고로 근원적 관계와 관계성의 모형 찾기를 하나님으로부터 시도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우린 삼위일체 하나님은 관계 자체고 관계 가운데 존재한다는 진리도 발견할 수 있다.성령이 성부, 성자와 나누는 삶은 코이노니아의 삶이다. 내적 특성은 페리코레시스란 개념으로 설명될 수 있다. 관계적 특성을 이르는 말이다. 삼위 서로의 정체성이나 상호성을 잃지 않고 서로 내재하며, 서로 관통하는 역동적 관계성을 의미한다.페리코레시스란 상호침투, 상호내재를 말한다. ‘상호내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들어있는 신성과 인성의 관계성을 나타내기보다는 삼위일체적 특성을 나타내기에 더 적합한 용어다. 왜냐면 상호내재의 특성이 그리스도의 본성을 통해 인간에게 계시되었다 하더라도, 그 원형적 특성, 그 궁극적 표현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내적 삶 속에 들어 있기 때문이다.모든 창조된 관계성들은, 창조되지 않은 관계성, 즉 삼위일체적 관계성에 의존되어 있다. 우리는 관계의 근원적 모형을 삼위일체 속에서 본다. 하나님의 존재방식으로서의 ‘페리코레시스’는 모든 피조세계 관계성의 근원이 되는 최상의 관계성이라고 할 수 있다.(2)그리스도의 두 본성과 성육신 논리우린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관계의 궁극신의 죄에 대한 용서를 구해야 한다. 왜냐하면 회개가 선행되지 않고는 진정한 관계회복이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오늘날의 교회의 실상을 보면 목회자나 교인들이 제 길을 잃고 있다. 세상이 교회를 찾을 때 교회는 길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아니 교회 자체가 길을 잃었다. 하나님의 창조의 모습을 잃었고,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잃었다. 거룩성과 순수성을 잃었다. 오히려 교회는 세상의 영향(휴머니즘)을 받고 있다. 교회는 회개해야 한다. 이 회개를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된다. 회개를 통해 이웃과 세계의 관계가 회복된다. 회개는 자신을 돌아보게 만든다. 자신을 되돌아볼 때 많은 상념들이 있게 된다. 그러나 상념은 일념으로 바뀌어져야 한다. 상념은 생각의 마음으로서 행동이 따르지 않는 마음이다. 그러나 일념은 행동할 수 있는 마음이다. 행동이 없으면 삶이 없다. 행동은 관계를 만든다. 긍정의 힘을 가지고 우리는 회개의 길을 가야한다. 그래서 교회가 잃어버린 길을 찾아 그 길을 가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회개는 관계를 회복하는 방편이 된다.9) 관계형성 능력으로서의 영성어반 홈즈(U. T. Holmes)는 기독교 영성을 관계경험으로 보고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첫째로, 영성은 인간의 관계성 형성에 대한 보편적인 능력이다. 홈즈에 따르면, 영적인 사람과 비영성적인 사람이란 없다. 왜냐하면 영성이란 관계성을 향한 개방성이며, 이는 누구나 갖는 보편적인 능력이기 때문이다. 둘째로, 영성은 감각 현상을 초월하는 그 무엇과 관계를 맺고자 한다. 영성에서 말하는 초월성 경험이란 자신의 힘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보다 더 위대한 그 무엇에 의해 물질세계를 초월하여 주어지는 경험이기 때문이다. 영성은 하나님의 마음과 관계성을 형성할 수 있는 능력이라 할 수 있다. 셋째로, 영성은 습득하여 가질 수 잇는 것이 아니다. 영성은 일종의 수용성이요, 기다림이요, 신뢰인 것이다. 이런 면에서 영성은 능동적인 수동성(An Active Passive)이다. 영성은 개인이 하나님을 알 때, 즉관계가 잘못되었기 때문이고, 만일 자아가 재형성되거나 변형된다해도, 그것은 관계 속에서 일어날 것이다.쉐릴은 인간 자아를 살아 있는 몸 곧 육과 영을 총체로 보았다. 쉐릴은 자아를 하나의 정체된 실체로 보지 않고 계속 형성되어 가고 있는 존재로 이해했다. 쉐릴은 인가의 자아를 ‘기능적 자아’와 실존적 자아로 구분하여 이해 하였다. “기능적 자아는 한사람에게 있어서 되어야 할 자아이다. 기능적 자아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의 본래적인 자안의 모습으로 이 가능적 자아의 강조점은 하나님게 응답할 수 있고 하나님과 의사소통하며 하나님과 관계를 유지할수 잇는 독특한 피조물이라는데 있다.3)‘대면’으로서의 계시쉐릴은 하나님의 만남의 길을 제시하기 위하여 인간의 ‘실존적자아’ 상태로부터 인간의 ‘기능적 자아’ 상태로 전환을 추구한다. 쉐릴은 그가 이해한 인간의 자아로부터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이해를 시도한다. 다시 그가 이해한 계시개념으로부터 ‘대면’과 ‘만남’을 찾아 낸다. 그리고 대명과 만남에 의해 하나님과의 만남의 길이 열리게 된다는 것을 주장한다. 인간이 자신을 계시하시는 하나님과 만날 때 그는 하나님과 대면하게 된다. 여기서 계시에 대한 인간의 응답은 부정적일 수도 있고 긍정적일수도 있다. 부정적 응답은 인간이 거루한 자아를 거부하는 것이다. 그것은 서로가 자기를 내어주는 자아와 자아의 관계 속으로 끌어 들이는 어떤 형태에서의 거부이다 긍정적인 형태에서 있어서 계시에 대한 응답은 우리가 인간관계의 가장 깊은 순간에 “예” 라고 말하는 것같이 계시하시는 거룩한 자아에 대한 인간 자아의 “예” 인 것이다.만남이란 말은 대면된 존재의 경험을 의미한다. 계시가 대면이라면, 그리고 대면은 하나님의 주권을 의미한다면 우리는 대면되 개인의 직접적인 응답 외에 하나님과의 만남에 인가이 어떻게 소통 할수 있는 지를 물어야 한다.4)하나님 만남을 위한 인간의자세하나님을 만나기 위하여 우리는 말씀을 듣고 그 말슴대로 살아가야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만난 자는 성경을 믿고 전달을 필요로 한다. 라너 역시 삼위의 상호관계를 설명하면서 아버지와 아들과 영은 상호 관계적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아버지와 아들과 영이 가지는 상호관계는 상대적으로 다르다고 보았다.(3)피터 하지슨의 하나님의 관계성에 대한 이해피터 하지슨은 “관계성은 하나님의 본질”에 속하는 것으로 보았다. 하나님의 존재는 “하나님은 완전한 인격으로서, 그 인격성은 사랑과 자유라고 하는 관계적 행위에 의해 구성된다.”, “오직 나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나와 동등한 너도 있으며, 나아가 궁극적인 동일성은 내가 아닌 우리이다. 이 우리가 바로 영인데, 이것은 타자성을 동일성에 환원시키지 않고 주체들의 상호 존재중에 의해 형성되는 간주체적이고 사회적인 관계망이다”라며 하나님의 관계성을 말한다.하지슨에게 하나님의 관계성은 위계적인 어떤 것이 아니라, 평등하고 상호적인 것으로 이해되어 진다. 하나님의 관계성의 개념은 먼저 논리적 설명이지 존재론적 설명이 아니다. 하나님 안에서 소로 다른 위격은 상호관계라는 관계성에 의해서만 가능하다.(4) 사회적 삼위일체론의 관계성사회적 삼위일체론은 하나님의 통일성을 앞세우는 어거스틴, 바르트, 라너와는 달리 삼위성을 앞세우고 그의 통일성을 제 2차적으로 취급한다. 사회적 삼위일체론자들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세 위격을 인정하면서도 그 위격이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그 세위격이 신적 공동체를 형성한다고 보았다.사회적 삼위일체론은 12세기 신학자 빅터의 리처드에 의하여 처음 논의되었다. 빅터의 리처드는 삼신론에 빠지지 않으면서 세 위격들의 구분에 대한 강조를 발전시켰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위격들로 시작하여 본질의 통일이 어떻게 위격들 사이에 구성되는지 사랑의 개념을 통하여 설명하였다.하나님은 절대적 사라오가 절대적 권능과 절대적 덕이다. 그의 사랑의 응분의 대상으로 제 2의 위격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데 두 위격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왜냐하면 하나님 안의 두 위격은 서로가 가지는 사랑을 제 삼자에게 나누어주여야 두 위격이 가지는 덕이 완성된핵심은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그리고 인간과 자연 사이의 깨진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다. 이 깨진 관계를 회복하는 길, 즉 구원의 길을 가기 위해서 인간의 결단을 요청하는데, 그것이 바로 회개이다.기독교의 구원론에서 기독론은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갭을 메워주고, 단절되었던 관계를 회복시켜주시는 중재자이시다. 그리스도는 인간의 현재의 죄 된 모습과 하나님이 창조하신 대로의 인간성의 모습, 모두를 보여주는 거울의 기능을 갖는다.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과정은, 코헛의 자기 심리학적 용어에서 ‘변형적 내면화’라고 부르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현실에서 부딪치는 의심과 자신의 연약함과 좌절 속에서 자기대상이 되는 하나님을 내재화함으로써 성화되어진다.지금까지 우리는 하인즈 코헛의 대상관계이론의 면면을 통해 얻어지는 이해와 자각은 자기 또는 ‘자기대상’은 서로 분리될 수 없는 관계성 안에 있는 존재로서 경험된다는 것이다. 자기대상은 관계적 존재로서의 속성을 지니고 있다. 자기대상 관계이론과 연결해서 기독교는 본질적으로 관계적 종교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인간 역시 관계적 존재임을 파악해 낼 수 있다. 더 나아가 자기대상 관계이론은 기독교의 구원론을 관계적으로 취급할 수 있는 여지주며 이러한 여지와 실체는 인간론이나 구원론을 관계신학적으로 다룰 수 있는 신학적 기초를 제공하고 있다.2. 관계적 실존으로서의 인간1) 관계 속에 있는 인간신학적 인간학은 인간은 하나님과 관계를 가지고 있는 존재로 본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는 것이 신학적 인간학의 출발점이다.(1) 관계성으로서의 하나님 형상웨슬리가 이해하고 있는 하나님의 형상이란 인간이 소유하고 있는 어떤 재능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은혜로 부르심을 받은 살아 있는 관계성이라고 보았다. 런연은 웨슬리가 의미하고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하나님과 관계를 가지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 간계적인 것으로 보았다. 하나님의 형상 때문에 인간은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를 맺게 된다. 인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