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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알제리 전쟁
    알제리 전쟁1. 머리말알제리는 프랑스의 가장 오래되고 유럽인이 가장 많이 거주하는 식민지였다. 알제리 전쟁이 발발한 1954년 무렵 알제리에 거주하는 유럽인은 100만 명이 넘었으며 이 중 80%는 알제라 현지 출생이었다. 프랑스인들은 알제리에 여느 식민지와는 다른 집착을 보였으며 따라서 알제리의 독립운동은 거센 탄압을 받았다.오늘날 알제리 전쟁은 알제리에서 민족해방의 성전이요 건국의 초석으로 여겨지는 반면에 프랑스에서는 굳이 들춰내고 싶지 않은 상처로 남아 침묵과 망각에 빠져있었다. 프랑스 정부는 공식적으로 전쟁의 실체를 인정하지 않으며 숨기려 하였다. 때문에 알제리 전쟁은 종전 40년이 지난 1999년까지 전쟁의 실체를 인정하지 않는 ‘이름 없는 전쟁’이었다.이 글을 통해서 알제리 전쟁과 프랑스의 알제리 전쟁의 교육, 시기별 프랑스의 인식변화를 알아보도록 하겠다.2. 알제리 전쟁1839년 알지에를 점령한 프랑스는 군대를 주둔키로 하면서 1834년 알지에 지역을 정복 ? 합병하기로 결정하고 총독을 임명하였다. 1848년 프랑스 신헌법은 알제리를 ‘프랑스 영토’로 규정하였으며 프랑스는 알제리 식민화를 본격적으로 추진하였다. 식민화의 결과로 알제리 경제가 발전하기 시작하였으나 알제리인의 사회경제적 지위는 더욱 악화되었다.실업의 증가, 회교와 프랑스 문화의 이질성, 농촌의 파탄 등으로 알제리 해방의 힘이 커지게 되었다. 1930년대 소수의 아랍 지식인들에 의해 시작된 운동은 제2차 대전이 터지자 잠시 퇴색하게 되었다. 1945년 유엔에 신탁통치 위원회가 설립되지만 프랑스는 국내 문제라고 주장하며 식민 동화 정책을 계속 추진하였다. 47년 9월 공포된 ‘알제리법령’은 신생 알제리 의회를 구성하게 했지만 인구비례를 무시하고 유럽인과 알제리인이 각각120명을 뽑아 불만이 커지게 되었다.압바스의 U.D.M.A와 하지의 M.T.L.D의 단체들은 1947년부터 무장 폭동을 준비하였고 FNL(민족해방전선)로 결집되면서 1950년부터 본격적인 테러전과 게릴라전을 시작하였다. 54년 11월1일 만성절 봉기를 시작으로 격화되는 알제리 해방 투쟁을 진압하기 위해 프랑스 정부는 제 10공수 사단을 파견하면서 사단장 마쉬에게 테러와 치안을 위한 전권을 부여하였다. 정부 훈령에 따라 현지 군부는 FNL을 분쇄하고 테러범을 소탕한다는 명분으로 소위 ‘알제 전투’를 개시하였고, 이 과정에서 수많은 불법 처형과 고문이 자행되었다. 프랑스 군의 잔악행위는 국내외에서 비난을 일으켰고 결국 프랑스 제4공화정을 끝내고 제5공화정이 들어서게 되었다.프랑스 독립영웅으로 대통령이 된 드골은 알제리 방문에서 ‘나는 당신들을 이해합니다’라는 연설을 통해 알제리 독립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뜻을 내비쳤고 알제리와 프랑스 통합을 촉진하고 경제 사회 문제를 검토하기 위한 콩스탕틴 계획을 확정했지만 불확실하게 되었다.FNL은 58년 G. P. R. A를 튀니지에 세웠고 알제리 해방 전쟁에 국제적 지원을 얻으려고 하였다. 드골은 엄청난 인적 재정적 손실을 초래하면서 국제적 비난을 받는 전쟁을 종식하기 위해 60년 파리에서 첫 회담을 열었다. 그 후 에비앙에서 진행된 회담에서 휴전협정과 독립 국가 설립을 약속하는 선언문을 발표하였다. 에비앙 협약에 의해 1962년 4월 임시정부가 세워졌고 7월 국민선거에 의해 독립을 획득하였다.3. 알제리 전쟁과 프랑스인1) 60-70년대알제리에게는 독립을 위한 전쟁이 프랑스에서는 ‘알제리, 그것은 곧 프랑스다’라고 강경한 의지를 들어내며 전쟁상태가 아닌 국내적 문제로 취급하려하였다. 55년 공포된 긴급조치령은 “언론과 출판물에 대한 통제를 확보할 수 있는 모든 조치를 취할 권한”를 행정당국에 부여했으며 이에 따라 알제리에서 벌어지는 사태를 전쟁으로 묘사하거나 고문 등의 군 사기를 저해할 내용에 대한 검열과 압류를 시작하였다. 따라서 전쟁동안 언론은 만성절 봉기는 ‘알제리사건’, 정규군 투입을 ‘질서유지작전’으로 보도하였다.전쟁이 끝난 뒤 60-70년대 프랑스는 경제적 번영과 현대화를 경험했다. 경제적 팽창과 사회적 활력으로 충만한 대중소비사회에 접어든 프랑스인들은 희망찬 미래로 눈을 돌렸으며 현실의 풍요 속에서 지난날의 앙금을 잊고자 했다. 80년대 알제리 문제를 공론화한 프에르 노라는 “전쟁의 문이 닫히자마자 누구나 전쟁을 잊고자 했으며, 적어도 잊은 척하려 했다"고 지적했다.알제리 문제를 급히 처리하려는 프랑스 정부는 우선 알제리 문제에 대한 일련이 사면조치로 구체화했다. 사면정책으로 알제리 전쟁은 역사에서 잊혀져가는 듯 했으며 75년 종전 후 첫 방문한 프랑스 대통령 데스탱은 양국의 관계 정상화를 서둘렀다.정부의 입장과 달리 알제리 전쟁에 관한 출판물은 양적으로 많은 양이 쏟아져 나왔다. 그러나 서적의 70%정도가 ‘프랑스령 알제리’의 입장에 동조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 프랑스 입장에서 싸운 고위장성, 정치인의 증언이나 회고록이 주종을 이루었다. 마쉬 장군은 회고록 『알제전투의 진상』에서 프랑스군이 저지른 고문행위는 알제리측의 테러를 막기 위한 필요하고도 효과적인 조치였다고 술회하였다. 이에 반대하여 피에르 비달나케가 『공화국의 고문』을 통해 마쉬 장군의 주장을 반박하고 고문의 진상을 밝히라고 주장하였지만 정부의 사면령으로 인해 사건의 진상을 밝히는 일은 힘들게 되었다.2)80-90년대81년 이후까지 알제리 문제 처리에 관한 프랑스 정부는 국민화합정책을 통해 전쟁잔재에 종지부를 찍고자 하는 의지를 보였다. 이 정책으로 전쟁과 관련된 모든 사안에 복권을 단행하였다. 이는 고문, 전쟁 범죄, 인종학대 등 전쟁 동안에 자행된 모든 불법적 만행에 대해 더 이상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뜻이다.그러나 80년대 이후 프랑스 사회의 변모과정에서 새로운 양상을 보이게 되었다. 프랑스는 제 2차대전 이후 국가재건과 산업부흥을 위해 적극적으로 외국인이민을 수용했으면 많은 알제리인 들이 유입되었다. 이들은 프랑스의 경제성장에 일익을 담당했지만 70년대 중반부터 만성적인 경제 불황에 접어들면서 프랑스인들은 이민자들을 불안한 눈으로 대하였다. 또한 이민자들이 전통적인 이슬람 가치관을 고수하면서 프랑스식 문화와 마찰을 빚게 되었다.이런 문제들을 통해 알제리 전쟁의 패배 기억이 환기되고, 좋았던 식민시절을 그리는 이른바 ‘알제리 향수’현상이 나타났다. 알제리 전쟁과 아랍계 이민자들에 대한 프랑스인들의 인식 변화는 극우 보수여론의 확산에 이바지하였다.알제리 전쟁에 대한 기억의 희귀는 전쟁에 직 ? 간접으로 관련된 당사자들이나 시민단체들의 적극적인 참여와 지원 속에서 전개되었다. 우선 사건의 진상을 밝혀내고 그 역사적 의의를 자리매김하는 작업이 이루어졌다. 진보 언론과 공영방송을 중심으로 사건의 진상을 통해 자성을 촉구하였으며 학계에서는 88년 12월 파리에서 ‘알제리 전쟁 학술대회’를 여는 듯 대중적 공론의 장이 되었음을 보여주었다. 식민통치의 진상을 새로운 세대에 교육할 필요성에 의해 83년부터 중등학교 역사교과서에 알제리 전쟁에 대한 내용이 실리게 되었다.둘째는 관련 당사자들의 증언과 회고를 여론 속에 공론화하는 작업을 통해 나타났다. 이는 ‘증언의 시대’라 할 만큼 관련 당사자들의 다양한 증언을 통해 엇갈린 기억을 제시했다.셋째는 관련자들 및 희생자들이 제기하는 인정 요구와 보상 운동을 통해 나타났다. 전쟁에 참여한 참전병사들은 오랫동안 자신들의 희생에 국가적 보답을 받지 못 하였다. 그들이 한 행동은 전쟁이 아닌 질서유지작전으로 남아 어떤 기념행사도 벌일 수 없었다. 하지만 90년대 들어 그들에 대한 공식적인 법적 인정과 제도적 보장이 따르기 시작했다.4. 교육에 나타난 전쟁82년 교과서 수정지침을 통해 이듬해부터 고등학교 3학년 교과서에 전쟁에 관한 서술이 나오기 시작한다. 알제리 전쟁은 프랑스에서 제4공화정의 위기와 붕괴 및 드골의 등장과 제5공화정의 탄생으로 이어지는 정치사를 매개하는 연결고리로 서술된다.
    인문/어학| 2009.09.13| 3페이지| 2,500원| 조회(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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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일_사회와_이슬람_이민자_문제에_대하여
    독일 사회와 이슬람 이민자 문제에 대하여-터키 이민자를 중심으로1. 서문독일은 1950년 이래로 자국의 경제성장을 위해서 그리스, 스페인, 터키, 튀니지 등에서 외국인노동자를 충당하였다. 독일은 이들은 통해서 ‘라인강의 기적’이라는 경제성장을 이루어냈지만, 1980년대 중반 이래로 이들 외국인노동자들과 문제가 부각되었다. 특히 가장 큰 규모를 이루고 있는 터키인들과는 인종 및 문화적 차이로 인해 사회문제로 부각되고 있다. 그러나 독일 정부는 이 문제에 대해 무관심한 태도를 취하였다. 더욱이 독일의 보수정권은 독일이 이민국임을 부정함으로써 독일인간의 민족주의는 강화시켰지만, 터키 등 무슬림들이 동화되는데 힘든게 되는 상황을 만들었다.지금부터 터키인들의 이주 배경과 형성과정, 독일 사회의 대처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다.2. 이민사1950년대 경제부흥과 함께 2차 산업에 저 기술, 저 임금 노동자에 대한 수요가 급증한 독일은 1955년부터 지중해 연안 국가들(이탈리아, 스페인, 그리스, 터키, 포르투갈, 유고슬라비아)의 노동자를 ‘초청노동자(Gastarbeiter)’라는 이름으로 받아들였다. 터키의 경우 1961년부터 독일로 노동자를 보냈다. 그 이전까지 이동의 자유가 제한되어있던 터키는 새로운 헌법을 제정하여 독일로 노동자를 보내는 등 적극적이었다. 터키 입장에서는 자국의 열악한 노동 조건과 계절적 영향 등으로 증가한 실업자 해소와 외화조달 측면에서 장려되었다. 초기 터키 ‘초청노동자’들은 이스탄불 등 대도시 출신이 다수를 차지하였지만 시간이 지나며 농촌지역 노동자들이 이주를 하였고, 1970년 47만 명의 인구를 차지하였다.73년 독일 경제의 호황이 종식되면서 독일은 외국인 노동자의 모집을 중단하였다. 독일은 초기 외국인 노동자를 모집하면서 조건으로 단기 체류와 체류 기간이 종료된 후 자국으로 귀국을 요구하였다. 때문에 모집이 중지된 당시에 독일에 체류하던 터키 노동자들은 자국으로 돌아가야 했다. 하지만 열악한 시간과 높은 인플레이션에 시달리던 자국으로 돌아가기보다 독일에 머물 것을 결정하면서 독일에 무슬림 공동체가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독일에 오면서 남겨둔 터키의 가족을 독일로 이주하면서 독일의 터키인구를 지속적으로 늘어났다. 1973년 당시 91만 명에서 82년 158만 명, 2001년에는 210만 명으로 늘어났다.독일 내 최대 외국인을 차지한 터키인들은 다양한 무슬림 공동체를 조직하였다. 이들 단체들은 이민생활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을 해결하고 정부 기관들과 터키인을 연결하는 중개기능을 하고 있다.3. 독일 내 터키인 상황독일에서 많은 터키인은 시민권을 가지고 있지 않다. 따라서 EU의 국민들과 달리 지자체 선거권도 가지고 있지 않다. 이들은 외국인노동자의 신분을 가지고 있지만 그들의 자녀의 경우 일정 조건이 갖추어지면 독일의 국적을 부여하고 있다. 이민 1세대의 경우도 이중국적을 허용하지 않는 대신 속지주의의 국적 취득을 가능하게 하였다.경제적으로 터키인들은 독일인과 동등한 대우를 받지 못 하고 있다. 이민 초기의 인구들은 당시 이민을 허용한 목적과 같이 비전문적인 1차, 2차 산업에 종사를 하고 있으면 그들의 자녀 세대들은 사무직 등 전문적 직장에 종사하고 있다. 하지만 이들은 직장에서 승진에 제한을 받고 있으면 노동의 조건에서도 독일인에 비해 열악한 환경을 요구 받고 있다. 또 임금의 경우, 독일인에 비해 적은 임금을 받지만 상대적으로 많은 부양인구를 가지고 있어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또한 실업률도 독일 평균인 9%를 웃도는 12%를 기록하고 있다.언어, 문화적으로 독일의 터키인은 큰 문제를 가지고 있다. 1세대 이민자의 경우 노동에 필요한 기본적인 언어만을 습득하고 있다. 그들의 후손의 경우에도 학교 교육을 받는데 어려움의 겪어 전체 학생의 30%가 중도에 학업을 포기하고 있다. 더욱이 교육을 받는 사람들도 학교에서 학업을 따라가기 힘들어 유급이 되는 경우가 많다. 또 신앙적으로 부모의 영향으로 이슬람교를 믿지만 부모세대에 비해 상대적으로 종교에 대해 독실하지 못 하거나 신앙심이 없다.4. 독일의 이민자 정책독일은 1990년대까지 이민국이 아님을 주장하였다. 따라서 정책에 있어서도 이민이 아닌 노동시장이나 사회적 문제로 취급하였고, 통합이 아닌 분리 혹은 이민자들의 귀환을 시도하였다.1950년대 독일은 외국인 노동자를 모집하면서 앞서 얘기했듯 일정 기간의 계약기간과 그 이후에 자국으로 귀환을 규정하였다. 초기 이 정책은 목적에 맞게 잘 이루어졌다. 하지만 독일 내 노동시장 규모가 축소된 1970년대 이후 정책이 어긋나기 시작했다. 따라서 이민에 적극적이지 않던 독일은 70년대 외국인 유입을 제한하는 정책을 펴나갔다. 이 시기 집권을 하고 있던 사민당-자민련 연합정부는 외국인 유입 제한과 기존 거주자의 귀환 촉진 정책, 그리고 외국인의 사회적 통합정책을 수립하였다. 사회적 통합 정책은 연합정부가 주안점으로 내세운 정책으로 더 이상 그들을 외국 노동자가 아닌 이민자로 파악하고 통합 정책을 마련하였다. 하지만 1980년 정권이 바뀌면서 사회적 통합보다 이민의 제한이 주안점으로 변화되었다. 83년 제정된 “외국인귀환촉진법”은 이런 변화를 잘 보여준다. 이 기조는 90년대 말까지 지속되었다. 하지만 90년대 유럽통합의 운동이 심화되고 독일인구 증가가 둔화되고 노동력이 부족해지면서 이민자들에 대한 인식이 변화되었다. 2001년 효력이 발생된 이민법은 인식의 변화에서 만들어질 수 있었다.5. 독일 내 터키인의 문제들독일이 외국인에 대한 인식의 변화와 이민법을 제정한 이 시기에 모순적으로 많은 문화적 갈등이 나타났다. 그 이유는 독일 내 이민 2,3세들이 늘어갔고 결정적으로 9.11테러가 큰 작용을 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몇 가지 문제가 대두되었다.가장 우선 독일 국적을 획득할 때 이루어지는 테스트이다. ‘무슬림 테스트’로 불리는 이 테스트는 2006년 1월 바덴-뷔르뎀베르크 주정부에 의해 실시되었는데, 그 내용은 이슬람 종교와 문화에 대해 비하하는 내용을 가지고 있다. 테스트에서는 이 내용을 바탕으로 터키인들이 가지고 있는 무슬림 문화와 생활방식에 대해 자기비판과 독일 식 가치를 강요하고 있다. 이것은 9.11테러 이후 무슬림을 잠재적 적대 세력을 간주한다는 이유로 야당과 시민단체의 비난이 확산되었지만, 이 테스트는 다른 주에서도 받아들여져 시행되고 있다.다음으로 가장 근원적인 문제인 이슬람, 기독교 문화의 충돌이다. 이것은 히잡 착용 문제와 명예살인 등으로 나타났다.히잡 착용문제는 1998년 공립학교의 한 교사가 히잡 착용을 이유로 해고되면서 벌어졌다. 사건은 사회적 논란을 일으켰고 독일연방헌법재판소까지 이어지면서 큰 파장을 일으켰다. 재판소 판결은 ‘종교적 자유는 인정되지만, 히잡 착용에 관한 법률이 있는 경우 처벌이 가능하다.’라고 하였다. 이 판결은 해석에 따라 논란이 벌어질 여지를 남겼고, 각 지방정부가 히잡 관련 법률을 제정하는데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판결 문제뿐 아니라 재판 과정에서 무슬림 이주자와 독일인 사이에 가치관과 세계관 차이를 드러냈다. 또 히잡 착용을 이슬람의 전근대성, 여성차별을 상징한다고 여겨 문화적 갈등을 나타냈다.명예살인 문제는 독일인과 무슬림 사이의 문제는 아니지만 그 사건으로 이슬람 문화에 대한 선입견을 심어주었다. 독일에서 1996년부터 2004년까지 9년 동안 공식적으로 49건의 명예살인이 발생했다고 한다. 드러나지 않고 은폐된 사건까지 포함하면 더 많아 질 것으로 예상된다. 이런 사건은 근원적으로 무슬림 가정의 가부장적 구조로 보고 있다. 거기에 더해 독일에 있는 터키 가정은 독일 사회에서 차별과 소외 받고 여성은 경제적으로 남편에 종속되어 그 정도가 터키 내 가정보다 권위주의가 심하다고 한다. 이민 2,3세의 경우에는 독일 내 교육으로 인한 독일 문화와 가정교육의 이슬람 문화 사이에서 정체성 문제를 느껴 그것이 명예살인의 형태로 나타난다고 보고 있다.6. 맺음말독일은 갖추어진 사회보장 제도와 경제부국으로 이민자들이 선호하는 국가이다. 하지만 독일은 자신이 이민국임을 부정하고 이민자들을 손님으로 간주하였다. 이런 의식에는 자국 문화에 대한 자부심과 다른 문화에 대한 배타성이 있다. 이것은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의 경제 발전에 커다란 토대를 제공하였지만, 경제 발전이 이루어지고 세계화가 진행되면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외국인 이민자에 다수를 차지하는 터키 무슬림들은 그 과정에서 차별과 소외를 느꼈고, 다음 세대인 이민 2,3세대는 터키와 독일 사이에서 문화 정체성의 혼란을 느끼고 있다.이민법 제정 이후 독일 사회는 독일 문화 정체성을 확립하고 그 뒤에 이슬람 문화를 흡수하자는 동화를 강조하는 ‘선도문화론’과 유럽연합에서도 강조되는 문화 다양성에 기초하여 이슬람 문화도 인정해야 한다는 ‘다문화사회론’이 대립하고 있다. 하지만 어떠한 결론이든 이슬람과 독일 문화가 서로 인정, 존중되는 ‘통합’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이철용 “독일의 문화전쟁과 이민자 문제” 『한·독 사회과학논총』제17권 제1호, 2007박규정 “독일 무슬림 공동체의 형성과 현황”『인문학연구』경희대학교 인문학연구소 2006
    사회과학| 2009.09.13| 3페이지| 3,000원| 조회(4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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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한의 역사인식
    북한의 역사인식1.해방공간~6.25전쟁2.6?25전쟁~1960년대 중반3.1960년대 후반~1980년대4.1990년대 이후분단 후 남북한 역사학은 자신이 속한 사회의 정치적 사회적 변동에 따라 각기 다른 방향으로 발전해 갔다. 남북한 양 체제에 모두 분단의 극복과 민족통일을 완수한다는 민족사적 과제가 주어졌고, 역사학 역시 이 과제를 해결하는 역사학이 되어야 했다. 그러나 사회체제의 차이는 남북역사학의 연구 방향에서 근본적 차이를 가져오게 했다. 북한의 역사 연구는 북한체제의 변화를 그대로 반영하면서 바뀌어 갔다. 북한 정권은 1950년대의 내부적 권력투쟁을 거쳐 1960년대 중소분쟁등 외적 위기에 대처하면서 주체사상을 확립해 갔고 1970년대부터는 김일성 유일체제가 강화되는 속에서 주체사관의 완성을 보게 된다. 1980년 후반 사회주의 국가의 붕괴에 위기를 느끼고는 내부적 통합을 위해 민족을 자긍심을 심는 조선민족 제일주의가 등장해 현재에 이른다. 역사연구는 이같은 북한 내부의 변화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면서 전개되어 갔다. 따라서 북한 역사인식의 이해를 위해서는 역사연구의 변화와 함께 북한 사회의 변화를 전제로 해야한다. 각 시기 별로 달라지는 북한 사회의 내부적인 변화를 전제로 역사 인식의 변모, 그로 인한 구체적 역사서술 내용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통해 북한의 역사인식을 이해하고자 한다.1.해방공간~6.25전쟁해방 후 북한은 새로운 국가 건설을 위해 식민지 잔재의 청산이 절실했다. 식민지 잔재의 청산은 민족문화에 대한 연구와 보급을 통해 이루어 질 수 밖에 없었고 역사학 연구는 그 기초가 되었다. 더구나 북한 당국이 요구했던 인민의 혁명성과 맑스-레닌주의 교양의 고양을 위해서 역사 교육이 필요했다. 이에 따라 조선력사편찬회를 설치하고 최근세와 통사서술을 서둘렀지만 연구 축적의 부족과 연구자의 연구 역량 부족등 현실적 사정으로 편찬보급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북한의 역사학은 정립과정에서부터 국가적 지원과 통제아래 시작되었다. 조선 역사 연구회의 설치는 바로 역사연구의 활성화와 함께 국가적 통제아래 역사적 연구가 진행되는 계기가 되었다.이 시기의 연구의 기본 방향은 식민사학의 극복과 유물사관에 의한 역사 서술이 었다. 그러나 통사 서술은 각 시대별 연구 축적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상황에서 현실적으로 불가능 했지만 북한 정권에 긴급한 과제인 정체성 문제와 관련한 ‘혁명전통’에 관한 연구과 편찬은 이루어졌다. 1949년 『조선민족해방운동사』는 그 연구의 성과이다.2.6?25전쟁~1960년대 중반전쟁 시기인 1952년 10월 ‘과학원 조식에 관한 내각결정 제 183호’가 공포되면서 12월1일 조선과학원이 창설되었다. 력사연구소는 과학원 산하에 설치되어 연구사업을 진행하였다. 1955년 1월부터는 월간지 『력사과학』을 발행하여 북한 역사학계의 연구성과를 발표하는 주요한 연구지로 자리잡았다. 그리하여 북한 역사학은 1960년대 중반까지 력사연구소에 의해 한국사 전체에 대한 연구체계가 잡혔다.1961년 조선로동당 제4차 대회는 김일성 단일지도체계는 공고해졌고 주체사상의 성립에도 주요 전기가 되었다. 62년 김형석은 김일성의 활동에 조선 맑스-레닌주의 편사학의 발족과 개화를 결부시키면서 김일성의 ‘교시’를 역사연구의 중요과업으로 추진할 것을 주장했다. 실제로 이 시기부터 연구논문에 서두에 교시를 먼저 제기하는 서술형태가 등장하기 시작했다.유물사관의 주체적 적용은 1950년대 초부터 북한 내부의 권력투쟁에서 촉발되었다. 1952년 남로당의 숙청이라는 권력투쟁과정에서 김일성은 역사학계에 우리 역사와 문화에 대해 맑스-레닌주의적으로 분석하고 창조적으로 적응한 사례를 발굴하여 대중이 자긍심을 갖게 함으로서 종파주의적이고 교조주의적 편향을 극복해야한다고 제안하였다. 54년과 55년에 걸쳐 당의 역사를 독자적 체계로 교수하고 당의 혁명 전통과 당 정당성을 고양시키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당의 역사를 김일성 중심의 해방투쟁사로 체계화 시키는 작업이 진행되었갔다. 1956년 4월 조선로동당 제3차 대회가 열렸다. 이 대회에서 김일성은 종파주의와 교조주의가 당 사상사업의 주된 결합이라고 지적하고 역사학계에 대해서는 ‘혁명운동에 관한 일체 자료를 수집 정리하며 우리 혁명의 역사를 연국 편찬하기 위한 사업을 추진시킬 것‘을 강조하였다.56년 『조선통사』간행을 전후해서 북한역사학계에서 제기된 과제는 역사 인식상의 교조주의와 형식주의 타파하고, 주체노선에 입각한 사회주의적 사상개조에 기여할 수 있는 새로운 한국사상을 수립하고 이를 편찬, 대중에게 보급하는 일이었다.56년 당대회의 문제제기에 따라 북한 역사학은 비로소 연구의 방향성에서 당적 사상체계 속에서 체계적인 내용을 갖추게 되었다. 이 시기 역사연구는 맑스-레닌주의의 사적유물론을 바탕으로 혁명전통, 애국주의, 합법칙성, 주체성을 강조하는 방향을 가지게 되었다. 특히 혁명전통과 애국전통을 체계화하는 작업은 김일성의 무장투쟁과 관련되어 역사를 정리하게 되었다. 그 결과 3?1운동 이전의 단계는 부르주아민족운동 단계. 1920년대는 노동계급이 민족운동을 영도하는 단계, 1930년대는 항일무장투쟁으로 발전되는 과정으로 인민민주주의혁명이 시작된 단계로 구분되어졌다. 그러나 3?1운동 이전 단계에서의 연구 축적이 적어 집중적인 연구가 이루어져야했다. 이에 따른 근대사 연구로 얻은 성과가 『김옥균』이다. 이 책에서 갑신정변을 ‘당시 조선사회의 사회경제적 변화에 상응한 합법칙적 현상’이라고 하면서 북한 역사학계의 조선 후기에 대한 내재적 발전론적 시각을 토대로 부르주아 개혁운동의 필연성을 체계화시켰다.근대사회의 성격과 시대구분 문제에 대해서는 57년 첫 학술토론회가 개최된 후 5년간의 장기간에 걸친 논쟁이 전개되었다. 이 논쟁은 시대구분의 기본 원칙, 기준의 문제와 근대사의 시점 및 종점, 근대사에서의 소시기 구분의 문제였다. 이에 대해 계급투쟁설과 사회구성설이 대립했다. 결론적으로 62년 최종토론을 거쳐 양자를 절충하게 되었다. 1866년 반침략투쟁을 근대의 기점으로 사회주의 혁명이 시작되는 1945년을 종점으로 보았다. 그리고 해방전 사회를 식민지 반봉건 사회로 보는 데는 두 견해가 같았다.맑스-레닌주의의 ‘주체적’ 적용과정은 고중세사에 걸쳐서도 진행되었다. 1956년 ‘삼국의 사회경제구성’에 대한 토론이 열렸다. 이 토론의 논점은 노예소유자사회의 존재유무에 관한 것이었다. 이에 노예제 사회의 존재를 인정한 노예론자, 인정하지 않는 봉건론자의 입장으로 나뉘었다. 노예론자들의 경우 역사발전의 보편성과 합법칙성을 강조하며 모든 민족은 반드시 노예소유자적 사회구성체를 경과한다고 본 반면, 봉건론자들은 우리 역사의 특수성을 인정해서 직접 봉건제사회로 진입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 논쟁의 결과 삼국시기에 전형적 노동노예제가 발달하지 않았다는 합의에 이르렀다. 결국 61년 봉건론자의 입장에서 정리되었다. 이에 따라 삼국에 선행한 사회를 노예제 사회로 이해하고 연구를 진행하였다. 고조선의 연구에서 고조선이 노예제 사회라는 전제가 있는만큼 단군시화에 대한 이해와 고조선의 위치문제가 주된 쟁점이었다. 해방이후 북한고고학계는 평양설을 주장하였으나 63-65년 중국과 공동으로 실시한 중국 동북지방의 유적조사를 기초로 고조선의 중심지는 요하 유역이고 다수의 노예를 죽여서 무덤에 넣는 순장제가 보편적으로 실시된 노예제 사회라는 결론이 났다.3.1960년대 후반~1980년대중국과 소련간의 분쟁과 대립과 중국 문화혁명 과정에서 홍위병의 김일설 우상화에 대한 비판등으로 북한은 대외적 위기감은 높아져갔고, 그에 대한 대응이 김일성 유일지도체제의 수립, 지도사상으로서의 주체사상의 천명이었다. 주체사상의 확립은 김일성 개인 영도력의 절대화라는 요구와 동일한 것이었다.주체사관에서는 현대사의 경우 김일성 유일지도체계와 관련해 김일성 가계의 혁명활동에 집중되었다. 1960년대 근현대 시대구분 논쟁에서 마무리된 1945년 근대 종점설은 1919년 3?1운동으로 바뀌고 현대의 시점을 1926년 김일성이 결성한 ‘ㅌ.ㄷ동맹’에서 찾았다. 주체사관의 강조는 근대사의 변화를 가져왔다. 1960년대 연구 서적인 『김옥균』에 대한 해석이 대표적이다. 그 전과 같은 김옥균 개인적 지도성을 높이 평가하지 않게 되고 갑신정변에 대해서는 역사의 합법칙성을 중시하는 입장에서 ‘부르죠아혁명운동’으로 규정되었다.고중세사의 경우 고조선-고구려-고려로 이어지는 정통론이 등장해 고구려에 대한 연구가 집중된 시기였다. 주체사관에서는 유물사환의 사회발전법칙을 인정하지만 사회발전과 계급투쟁의 동인은 인민대중의 ‘자주성을 위한 투쟁’이라고 한다.4.1990년대 이후1960년대 이후 대외적으로 강한 민족주의적 성향을 나타내던 북한은 1967년 이후 수령에 대한 개인숭배가 전면화되고 모든 문화영역의 원천을 수령에게서 찾아야 한다는 주장 아래 민족문화의 강조가 둔화되었다. 그러나 1986년 김정일은 ‘조선민족제일주의’를 제기하였고 이와 함께 민족문화의 우수성과 민족에 대한 자긍심은 강조되었다. 이에 대해 김일성도 1991년 ‘참다운 민족주의’란 표현으로 새로운 민족문화와 민족주의의 고양에 대한 긍정적 인식을 드러냈다.
    인문/어학| 2004.12.02| 4페이지| 무료| 조회(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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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세 교회 건축 양식 평가B괜찮아요
    중세의 건축 -교회 건축 중심건축이라는 것은 개개의 건물뿐만 아니라 더 넓은 의미로 취락이나 도시의 설계와 건설도 건축의 행위라고 볼 수 있다. 건축에 있어서 선행적으로 인간의 피난처로의 기능을 가진 구축물이 만들어졌을 것이다. 그 이후 상징성이 결합된 정신성의 표현을 하는 건축물이 만들어졌다.중세에는 성과 성곽이 인간의 피난처등 실용적 의미로써 교회 건축이 정신성을 표현하는 건축물로 각각 발전을 이루었을 것 이다. 그중 우리는 중세인의 정신적인 면을 볼 수 있는 교회 건축에 대해 얘기 해 볼 것이다.교회 건축은 로마의 바실리카 양식에서 비롯되었다. 거기에 머무르지 않은 교회 건축은 게르만의 영향과 비잔틴의 영향을 받으면서 로마네스크, 고딕 양식등으로 발전을 이루었다.1.초기 기독교 건축(1)배경콘스탄티누스 대제 이래 기독교가 공인되고 니케아 종교회의에서 아타나시우스파의 삼위일체설을 교리로 하는 가톨릭이 성립된 이후, 테오도시우스는 마침내 기독교를 국교로 정하게 되었다. 그는 391년과 392년 사이에 일련의 칙령을 공포하여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임을 선언하고 모든 이교의식을 금지하였다. 이리하여 기독교는 약 3세기 반 동안에 로마를 정복하는데 성공한 셈이었다. 초기 기독교 건축의 연대는 기독교의 공인이후 로마네스크 건축이 시작하는 약 500년간을 말한다.박해에서 공인으로의 급격한 변화는 그들의 건축양식을 가질 시간을 주질 못 했다. 그런 이유로 초기의 건축은 로마 건축의 기초를 하였다. 당시의 활발한 교세의 확장에 비해 재정적으로 빈곤함을 느낀 교회는 로마 신전이나 바실리카(Basilica)를 활용하였다. 그 후 차츰 바실리카(Basilica) 형식을 발전시킨 회당(會堂)으로 발전시켰다.네이브(2) 특징간단한 바실리카(Basilica)형의 평면에 최초로 추가 된 것은 정면 입구부분의 신랑(身廊,nave)과 측랑의 전면에 현관을 둔 것이다. 제대(祭臺)가 놓여진 챈슬(chancel)(chancel) 부분이 신랑(身廊, nave)과 구분 짓게 되었으며 6세기경부터성 피터 바실리카 - 구 성베드로 성당, 성 마리아 마지오레 성당, 성 클레멘테 성당, 성 사비나 성당, 성 스테파노 로툰다이다.구 성 베드로 대성당은 베드로 묘소의 부지에 콘스탄틴 황제가 창건했다. 건물은 5랑식이며 중앙의 네이브 폭은 24m이다. 트란셉트(TRANCEPT)부분은 라틴 크로스로 돌출되어 있고 건물 정면에는 열주랑에 의한 전정이 있었다. 이 건물은 5세기에 파괴되고 이 자리에 현재는 르네상스 양식의 대성당이 세워져있다.로마 이외에 지역에서 볼 수 있는 건축은 라벤나에 있는 성 아폴리나레 인 클라세 성당이다. 교회의 평면은 로마의 것과 유사하나 동방에 트란셉트가 없다. 내부의 기둥은 주두, 주신, 기반 모두 독창적이고 특히 주두에는 부주두가 사용되었고 24개의 대리석 원주가 3랑 평면을 이루고 있다. 당초 전정이 있었으나 없어졌고 현관부분은 복원이 된 상태이다.다. 원형 및 8각형 건물이 형식은 두가지로 첫째는 바실리카식교회와 같은 구조법으로 얇은 벽에 목조의 지붕이고 기둥에 의하여 내부가 원형으로 만들어지며, 둘째는 돔을 갖는 형식으로 벽체는 두터우나 돔이 외부에 그대로 나다나지는 않는다. 원형의 평면은 교회당으로선 적절치 못한 것이며 제대부분을 원형의 중심부에 두지 않고 커다란 니치를 만들어 그 속에 둠으로써 교회기능에 만족되는 공간을 만들었다. 내부는 원형의 열주로서 네이브와 아일(AISLE)의 공간구획이 이루어졌다.이러한 양식은 세례당으로서 볼 수 있다. 세례당은 회당 밖에 독립된 건물로 만들어졌다. 1도시 1세례당으로 만들어졌으며 전정 옆이나 트란셉트 측면에 만들어졌다. 평면은 로마의 원형, 다각형 신전에서 발전된 형식이며 열주에 의해 네이브와 아일(AISLE)이 구분되고 클리어스토리에서 채광토록 되어 있다.2. 로마네스크 건축(1) 배경10세기 후반에 들어서면서 농업 생산성이 향상되고 사회전반에 여유가 생겼다. 그리고 수공업이나 원격지 상업이 부활하여 도시가 흥하기 시작했다. 제후들 사이에 전쟁이나 결혼정책의 결과 영지의 합병이 진행되 블라인드 아치 (후진)이다. 블라인드 아치가 있으면 그 교회는 로마네스크 식이라고 단정해도 틀리지 않는다.로마네스크 양식은 서유럽 각지에서 지역별로 특색 있는 발전을 이룩했다. 예를 들면 프랑스 내에서도 오베르뉴 로마네스크, 랑그도크 로마네스크 등은 모두가 다른 특징을 지니고 있다.영국에서는 로마네스크라고 하는 대신 노르만 양식이라고 한다. 1066년 노르만의 잉글랜드 정복 후 강건한 노르망디의 로마네스크식이 널리 잉글랜드 각지에 전해졌기 때문이다.이와 같이 지역별로 특징이 있었지만 블라인드 아치의 열이 외벽의 장식으로 자주 사용되었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작은 블라인드 아치를 나열하는 방식은 북이탈리아의 롬바르디 지방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를 롬바르디 대 (帶)라고도 한다.누가 보아도 금방 알 수 있는 블라인드 아치의 열은 로마네스크식을 분간하는 간단한 방법이다. 하지만 이것은 단순한 부수적인 장식에 지나지 않는다. 로마네스크식의 본질을 전체 구조에 있다. 로마네스크 건축 구조의 주역을 이루고 이루고 있는 것은 첫째 중후한 벽, 둘째 둥근 아치, 셋째 원통 볼트와 (원통)교차 볼트이다.로마네스크식 구조는 우선 3랑식 바실리카 전부를 교차볼트로 덮는 방향으로 진행 되었다. 그리고 창건 당시 목조 천장이던 것을 화재에 대한 보강을 목적으로 바실리카에 볼트를 덮기 시작했다. 이때 2개의 원통 볼트를 직각으로 교차시킨 교차 볼트로 횡압력을 네 지점으로 분산시켰다. 교차 볼트는 후에 리브만으로 지지되며 그 사이에 경량의 석판을 메워 만든 리브 볼트로 발전된다.로마네스크는 차츰 발전해서 다음의 고딕으로 이행하게 되지만 전성기의 고딕과 비교하면 로마네스크 구조의 특징을 알 수 있다. 로마네스크에서는 중후한 벽과 기둥이 건물을 받치고 있지만, 전성기의 고딕에서는 벽은 사라져 버리고 정확하게 말하자면 벽이 차지하는 면적이 극도로 작아지고 건물 밖으로 밀어낸 버트레스 (buttress)라고 하는 기둥으로 건물을 받치게 하였다. 벽이 사라진 자리에 전체적으로 넓고 산지에서 나는 양질의 대리석으로 치장을피사 대성당하였다. 대표적 건축으로 피사 대성당, 성 프란체스코 수도원이 있다.피사 대성당은 교회당,종탑,세례당을 갖는 대규모 성당이다. 교회당 평면은 네이브 좌우에 2열의 아일(AISLE)이 있어서 5랑 형식이다. 또한 라틴 크로스의 평면형식이며 좌우로 돌출된 트란셉트에는 원호상의 후실이 있다. 세례당은 원형평면을 이루고 있다. 14세기에 고딕 양식으로 개수되었다. 지붕은 반구형 돔이며 그 위에 원추형의 돔이 얹혀져 있다.남부에서는 동방의 사라센 문화와 북방의 노르만적 요소가 혼합되어 발전되었다. 비잔틴의 구조와 양식 사라센의 색채장식 노르만의 탑의 기법을 받아들였다. 건물의 지붕도 볼트구조 대신 돔이나 목조지붕으로 되어 있다. 몬레아레 성당이 유명하다.나. 독일 로마네스크밤베르크 성당독일의 로마네스크는 8세기에서 13세기에 걸쳐 발전 되었다. 독일의 특징은 첫째, 지나친 장식을 피하였지만 중점적인 장식은 큰 효과를 얻었다. 둘째, 평면은 기본적으로 바실리카 형식이나 교회건물의 동서양단 앱스(apse)(apse)(apse)를 두는 특이한 형식이 나타났다. 셋째, 네이브나 아일(AISLE)이 길어지고 천정은 높아짐에 따라 장엄한 내부공간을 이루는데 성공했다. 넷째, 내부에 나선형 계단을 갖는 원통형의 원탑이 건물의 동서에 2기씩 세워지고 지붕에 팔각탑이 놓이는 등 건물전체 윤곽에 다양한 변화를 주고 있다. 마인츠 대성당, 보름스 대성당, 성 아포스테른 성당 등이 대표적이다.다. 프랑스 로마네스크프랑스는 남,서.북의 민족이 각각 라틴,켈트,게르만으로 언어,풍속,관습이 달았다. 그런 이유로 건축의 발전에서 조금씩 차이를 보인다.남부인 프로방스는 사라센의 지배에 있던 이베리아반도와 근접해 있어 사라센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이 지방에서 로마네스크 건축은 초기에는 수평의 천장을 갖는 바실리카에 볼트천정을 덮음으로써 일랑식의 바실리카가 되었다. 바실리카가 발전되어 삼랑식이 되고 또한 아일(AISLE)(측랑)부분이 중이층형식으로 발전 아름다운 기독교적인 세계관을 표현하는 상징물로서의 건축을 창안해 내려는 욕구로 교회의 건축 양식은 계속 발전하게 된다. 안정적인 동유럽에서 보다 다변하고 있던 서유럽에서는 12세기의 로마네스크 양식에 이어 새로운 건축 양식을 만들어 내는 데 12세기 후반 북부 프랑스인들에 의한 성당 건축의 주심 원리를 시발점으로 보고 있다.고딕이란 명칭은 르네상스의 이탈리아인이 중세건축을 조야(粗野)한 만족(蠻族) 고트족이 가지고 온 것이라고 비난한 데서 유래한 것인데, 19세기 이래 서유럽 중세미술의 한 양식을 가리키는 미술사상(美術史上)의 용어로 등장하게 되었다. 이 중세미술에 명확한 형식을 부여한 것은 북프랑스였지만, 결국 전 서유럽적 현상으로까지 발전한 것이다.고트족들은 이 미술의 형성에는 직접 관계가 없었지만, 약간 모멸적인 뜻으로 말한 것이 이러한 이름으로 정착하게 되었다. 고딕미술의 양식은 먼저 건축에서, 특히 성당 건축에서 실현되었지만, 여기에 어울려서 형성된 조각·회화·공예에 대해서도 총괄적으로 이 양식의 명칭이 적용되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2). 특징고딕식 성당 건축의 특징은 일반적으로 구조 기술상(構造技術上)의 3요소(要素),즉 지골궁륭(穹? vault)(穹? vault)(支骨穹:ribbed vault)?버팀도리(飛樑:flying buttress)?첨두 아치(尖頭 arch)에 단적으로 보인다. 이것들의 조직적인 적용으로 말미암아 형태에 있어서는 앙고성(仰高性) 또는 상승감(上昇感)이 강조됨과 함께, 구조상에서는 사압력(斜壓力)이 크게 경감(輕減)된다. 이 3가지 요소는 이미 로마네스크 건축에도 있었다. 이런 것은 동방 기원(東方起原)임이 틀림없다. 12~13세기 북프랑스의 한 건축가는 이 가구(架構)에 편리하고 강한 궁륭(穹? vault)(穹? vault)(vau1t)을 쓰겠다고 결심하고, 이것을 제1전제(前提)로 해서 논리적으로 전개해 나가면서 차례를 따라 새 양식의 실현을 추진해 나갔다. 이렇게 새로운 성당 건축형식은 합리적인 탐구와 실제적인 기술.
    인문/어학| 2004.11.30| 10페이지| 2,500원| 조회(1,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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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양 중세에서 근대로 이행 평가D별로예요
    ? 중세에서 근대로의 이행 ?*들어가며교황 이노센트 3세의 시대 때, 중세 문명의 절정을 이루었던 13세기가 14세로 흘러가면서 중세 세계는 조금씩 흔들린다. 우선 중세 세계의 중심 축이라고 할 수 있었던 교황권의 쇠퇴가 그 시작이였다. 이어 각 나라 상위 세력의 다툼으로 인한 백년전쟁과 장미전쟁의 발발, 유럽 인구의 1/3를 죽음으로 몰고간 흑사병의 창궐, 그리고 각지에서 일어난 농민반란, 위클리프와 후스에 의한 종교개혁 운동 등 여러 가지 사건들이 맞물려 중세라는 세계는 서서히 해체 된다. 그리고 그 해체는 근대라는 또 다른 새로운 세계를 가져 오게 된다.그러나 여기에서는 ?봉건세계의 쇠퇴와 해체?란 측면에 핵심을 두고 언급해 나가겠다.*봉건세계의 쇠퇴와 해체중세는 봉건세계라고 칭할 수 있을 정도로 봉건적인 성격이 강한 세계였다. 봉건제는 각 지방의 영주를 중심으로 한 철저한 지방분권적 성격을 띄고 있다. 그러나 중세 말로 치닫을 수록 점차 중앙집권적인 면을 띄게 된다. 또한 교회에서 늘 그 정점에 있었던 교황권이 흔들리기 시작하면서, 분열을 야기하고 이 시기를 두고 ?14세기의 위기?라 이른다.봉건세계가 쇠퇴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사회ㆍ경제적인 측면이 가장 강하였다. 바로 ?농업 경영 구조의 변화?와 ?농노제의 붕괴?가 그것이다. 이것에 중점을 두고 봉건세계의 쇠퇴와 해체의 일로에 대해서 알아보자.? 흑사병의 창궐 → 급격한 인구 감소 → 노동력의 감소 → 농노제의 붕괴 →상업과 도시의 발전↗농업 경영 구조의 변화 → 봉건세계의 해체 ?「 흑사병의 창궐 」..유럽의 입구는 12세기와 13세기에 이르러 급속도로 증가하여 기존 인구의 2배 가까이에 이르게 된다. 이러한 인구증가가 가능했던 이유는 12,13세기때 봉건제가 안정적으로 정착하게 됨과 동시에, 교회로부터의 남녀평등이 거의 동등해 짐으로써 결혼을 장려하는 시스템이 정착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1347년 이탈리아 전역을 휩씀으로써 시작된 흑사병이 창궐하게 되면서, 이는 곧 프랑스와 영국, 아이슬랜드에서 러시아에 이르는 북유럽 전역을 휩쓸게 된다. 이로 인해 유럽은 총 인구의 1/4,(더 많게는 1/3까지도 바라보고 있다) 즉 25%의 인구가 목숨을 잃게 된다. 문제는 여기서 종결되는 것이 아니다. 흑사병은 규모가 크지 않더라도 이후에도 여러 세기 동안 유럽에 출현하였고, 특히 최초의 발생 이후 50년 동안에는 여러번 재발하였다. 그러나 여기서 더 중요한 것은, 흑사병이 전 유럽을 휩씀으로써 사라졌던 인구를 이전의 인구로 다시 회복하는데는 16세기에 이르러서였다는 것이다. 물론, 인구감소는 15세기 초반에 중단 되었고 15세기 후반에는 인구가 서서히 다시 증가하기 시작하였지만, 이미 중세는 이 사이에서 커다란 변화에 직면하게 된다.「 급격한 인구 감소 → 노동력의 감소 」..흑사병으로 인하여 인구가 급속하게 감소하게 되면서 그 여파는, 곧 노동력의 감소에까지 이르게 된다. 중세의 봉건세계는 주종제의 상부구조와 장원제의 하부구조로 운행되어 갔다. 특히 실질적으로 중세를 유지 시켜왔던 원동력은 장원제, 즉 ?농노제?에 그 기반을 두고 있었다. 그리고 그 농노제의 구성원은 ?영주?와 ?농노?이다. 영주는 자신의 장원을 수많은 농노들을 두고 그곳을 경작하게끔하여 얻어지는 생산물을 수취하여 부를 축적해 나갔다. 지대에서의 생산물 뿐만 아니라 그 외에도 반강제적인 가혹한 수취로 인해 농노들은 고통에 시달려야 했다. 12, 13세기 때에는 인구가 증가하던 시기였기 때문에 노동력의 공급이 풍부했고, 노동력의 공급이 풍부하다는 것은 바로 노동력에 지불하는 상응하는 대가가 그만큼 낮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영주들은 아무 거리낌없이 노동력을 구하고 또 착취해왔다. 그러나 한 차례 대규모 흑사병이 거쳐간 다음에는 상황이 달라지게 되었다. 급격한 인구감소는 영주들에게 가장 큰 타격을 가져다 준 것이다. 이용할 수 있는 노동력의 감소와 그로 인한 임금이 비싸지면서 노동력이 주 원천인 고용주로써는 큰 타격이 아닐 수 없었다. 이로 인해 영주는 어쩔 수 없이 기존의 운영 방식의 변화에 직면하게 된다.「 상업과 도시의 발전 → 노동력의 감소 」..상업과 도시의 발전은 봉건구조의 헤체에 영향을 미치고, 봉건제를 약화 시키는 힘이 성장하는 토양을 마련해 주었다. 12세기 이후 상업의 부활과 그에 따른 상인의 성장은 도시를 발전을 가져온다. 또한 이는 잉여생산물을 낳게 하고 시장생산의 경향의 증대를 가져왔다. 한 시장이 지닌 영향력은, 경제적ㆍ정치적 독립을 소유한 자치제로서의 도시의 성장을 이끌어 내었다. 이러한 도시 공동체가 독립적인 자치체로서의 성격을 띈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기존의 체제와는 이질적인 존재로써 봉건질서의 해체를 돕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도시 공동체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영주로부터 자유를 얻어내게 되고, 점차 경제적 지배권을 장악하게 되면서는 스스로 농촌과의 거래 관계를 규제하게 하게 된다. 이와 같은 도시의 성장은 그 동안 영주들에게 가혹한 착취를 당하던 농노들에게 하나의 탈출구를 제공하였다. 영주들의 착취에 견디다 못한 농노들은 주위에서 성장하고 있던 도시로 달아나게 된 것이다. 이러한 노동력의 도시로의 유출은 영주들에게는 장원 체제 내에서의 노동력의 감소를 가져오게 되어 큰 타격을 가져왔다. 또한 이 시기는 영국과 프랑스의 백년전쟁이 일어난 시기로, 전쟁이 일어나면서도 ㅁㅎ이 죽기도 하였지만, 영주들의 농민에 대한 통제가 약화 되면서 그 인구의 유출은 더 자연스럽게 이루어 질 수 있었다.「 농노제의 붕괴 」..노동력이 감소하고 그에 따라 임금이 상승하게 됨에 따라 영주들은 그 대응책으로, 노동력을 확보하면서 임금을 최대한 낮추기 위한 노동자조례등의 법령들을 임의로 만든다. 이러한 임금동결을 위한 조치는 곧 농민 수공업자들의 반발에 부딪힌다. 또한 남아 있는 부족한 노동력으로 기존의 생산치를 달성하기 위해 더 가혹하게 농노들을 착취함으로써, 농노들의 반발심 또한 더 커지게 되었다. 이는 즉각적으로 각지에서의 농민반란을 불러 왔는데, 영국에서의 ?와트 테일러의 난?과 프랑스의 ?자끄리의 난?이 대표적인 난이다. 농민반란은 빈번하게 발생하였는데, 대부분의 반란이 번번하게 실패로 돌아갔다. 그러나 이러한 농민반란은 가중한 부역을 통한 직영지 경작은 더 이상 불가능해지게끔 만드는데 일조하였다. 영주가 직영지를 임대해주고 농민들에게 화폐지대를 받는 형식, 또는 정기 소작인을 두거나 고용노동에 의한 경작으로 변화 한 것이다. 이는 즉 부역노동에 의한 기존 농노제의 붕괴를 의미한다.「 농업 경영 구조의 변화 」..기존의 농노제가 붕괴되면서 농업 경영 구조는 변화의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특히 이러한 변화는 크게 세 가지의 모습으로 구분되게 되는데, 프랑스와 영국, 그리고 동유럽에서의 체제가 바로 그것이다. 우선 프랑스와 영국의 구조 변화에 대해서 알아보자.먼저 프랑스는 원래 토양은 비옥하였지만 농업구조는 후진적이었다. 처음부터 자본주의식의 경제 구조로써의 모습은 실패 하였던 것이다. 또한 국왕이 영주의 손을 거치지 않고 전국의 국민에게 조세를 걷음으로써, 국왕이 주도하여 농민들이 안정적으로 토지를 보유하고 유지 할 수 있도록 추진하였다. 국왕이 국민에게 직접 조세를 걷을 수 있기 위해서는 농민들이 안정적으로 토지를 소유할 수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중세 전반적으로 농노제가 붕괴 되면서 프랑스는 ?소농 경영 체제?로 귀착 하게 된다. 프랑스의 북부 지방은 무조건 어느정도의 일정량을 지정해 놓고 납부하는 ?정기차지제?로, 남부 지방은 당시의 수확율에 따라서 비율을 조정해서 납부하는 ?분익소작제?로 자리잡게 된다.영국의 경우에는 처음부터 봉건적인 성격이 강하게 자리잡고 있던 곳이 아니었다. 때문에 농업 구조 또한 영주와 농노간의 철저한 이해관계에 얽힌 구조는 아니었다. 이해관계에 따라 여러 가지 제도를 규정 짓고 강제적이지 않은 ?자유 경제 체제?의 성격을 띄고 있었다. 이는 곧 어느 곳보다도 더 빨리 농노제의 붕괴가 시작되고 진행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유 경제 체제 내에서는 부농과 농촌 노동자의 출현이 어렵지 않게 일어난다. 특히 부농의 출현은 농민층의 분화를 가져오는데, 이러한 부농은 자본을 점차 축적하게 되어 상인 자본가로써 성장하게 되는 것이다. 상인 자본가들은 화폐 유통에 의한 시장경제를 발전 시키게 되고, 자본주의 경제으로의 모습을 띄게 된다. 이는 프랑스와는 상당히 대조적인 양상으로, 영국은 ?자본주의 경영 체제?로 귀착하게 된다.마지막으로 동유럽의 경우는 역으로 봉건제가 더 강화되고 고착되어 진 예외적인 경우이다. 폴란드와 보헤미아, 체코등과 같은 동유럽 지역에서는 영주와 농민과의 관계에서도 원래 농노제라는 제도가 없었다. 그러나 중세 말이 되면서 전 유럽이 위기를 맞게 되면서, 동류럽 또한 봉건제의 위기가 닥치게 된다. 그럼으로써 영주와 농민과의 갈등이 시작되고, 영주는 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농민들을 착취하게 된다. 이는 영주들의 의지가 관철 되면서 농노제가 생겨나고 강화되는, 서유럽과는 판이하게 다른 결과를 가져 온다. 그것이 가능했던 이유로는 크게 세 가지가 있다. 우선 동유럽에서는 원래 농노제가 없었던만큼, 서유럽에서와 같이 영주들의 착취에 반란을 일으키고 반발심을 표출할 수 있는 농민공동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동유럽은 지리적으로 고립되어 있었기 때문에 농민들이 영주들에게서 달아날 수 있는, 벗어 날 수 있는 도시라는 공간이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또한 국왕과 영주의 관계에 있어서 영주가 그 자치적인 권한이 상대적으로 컸기 때문에, 영주들의 의지를 규제 할 수 있는 국왕의 권력히 현저하게 미비 했다는 점이 농노제가 역으로 강화 된 이유이다. 이로써 원래 완화된 농노제(혹은 아예 없었다고도 볼 수 있는 지역)가 오히려 더 역기능을 발휘하게 되면서, 중세 후대까지 그 영향이 지속되거나 새로운 농노제가 생겨나는 결과를 낳았다. 그리하여 동유럽은 ?재판농노제(제 2의 농노제)?로 귀착하게 되면서, 자유로웠던 신분이 오히려 예속 되는 상황에 직면한다.
    인문/어학| 2004.11.30| 4페이지| 1,500원| 조회(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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