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 삼국의 중세 - 일본200321578 소규섭◎ 서론고대 사회에서 중세 사회로 넘어간다는 것은 여러 방면에서 가시적이고 커다란 변화가 있었음을 의미한다. 사실 그러한 시대 구분이 서양의 역사학에서 발생한 개념이기 때문에, 이를 동아시아 역사에 적용한다는 것은 무리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흔히 그러한 구분을 지어본다면, 동아시아 삼국의 중세는 각각의 특징과 차이점이 있음을 알게 된다. 시기적으로 한국은 일반적으로 고려의 후삼국 통일(936)을, 중국은 위진남북조 시대(220~589)를, 일본은 호겐의 난(1156)과 가마쿠라 막부의 성립을 각각 중세의 시작으로 보고 있다. 이러한 일치되지 않는 시기를 볼 때에도 각 나라의 중세 형성은 상호간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지 않았으며, 외적인 요인 보다는 내적인 요인이 작용하여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커다란 범주 안에서 공통점을 찾자면, 세 나라 모두 고대 사회의 모순과 갈등이 분열과 내전으로 표출된 끝에 새로운 사회를 맞이하게 되었다는 점이라고 할 수 있겠다.◎본론◆ 새로운 지배계층과 중세사회중국, 한국, 일본 삼국의 중세사회는 새로운 지배 계층의 대두로 시작된다.1) 중국의 중세 사회의 시작인 위진 남북조 시대는 귀족 세력이 지배하는 사회였다. 후한 시대의 지배 계층이었던 호족 세력은 삼국 시대를 여는 주체가 되었고, 그들은 조조의 위나라 시대에 실시한 구품관인법(九品官人法))에 의해 차츰 중앙 귀족 세력으로 탈바꿈 하였다. 즉, 출세의 집안이 고정되어 신분이 고정화 되었고, 귀족사회가 출현하게 된 것이었다. 이러한 지배 세력은 사대부 계층이 지배한 송나라 이전까지 사회의 중심세력으로, 당나라 시대에는 세력의 절정을 맞이하였다. 절도사들의 흥기로 귀족 세력이 몰락한 당말 이전까지 귀족 계층은 수백년간 깊은 뿌리를 내리고 중국 사회를 지배하였던 것이었다.2) 한국의 중세는 고려 귀족 사회로 정의된다. 통일 신라 말기에 중앙의 정치가 혼란해지면서 지방의 유력자들이 흥기하였는데, 이들을 호족이라고 불렀다게 되는데, 이들 사무라이는 훗날 귀족 세력을 몰락시키고 막부(寞府)정권을 세우게 된다. 막부 정권을 처음 수립한 이는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賴朝)였다. 12세기 중엽에 이르러 일본 왕실 내의 권력 다툼이 치열하였고, 섭관(攝關; 섭정)가 내부의 권력을 놓고도 알력이 심하였다. 왕실 내에서는 스토쿠 조우고(上皇)와 고시라카와 덴노(天皇)가 왕위 계승을 놓고 전투를 시작하였는데, 고시라카와 덴노는 사무라이인 미나모토노 요시모토(源義朝)와 다이라노 기요모리(平淸盛)를 끌어들여 스토쿠 조우고를 물리치는데 성공하였다.(保元의 난)) 그 뒤 미나모토와 다이라 사이에는 대립이 일어났는데, 미나모토노 요시모토의 아들인 요리토모는 마침내 최후의 승리를 거두고 가마쿠라 막부(鎌倉幕府)를 세웠다. 이로써 일본은 무사계급이 지배하는 본격적인 중세 사회를 맞이하게 된다.◆ 중세의 대외 관계세 나라는 중세에 접어들어 복잡한 대외관계의 양상을 보인다.1) 중국의 중세는 어지럽던 국내의 정세와 맞물려 대외 관계가 여러 방면으로 복잡하게 얽히던 시기였다. 위진 남북조 시대의 시작인 위,촉,오의 삼국정립(三國鼎立)시대에는 삼국이 모두 타 민족이나 국가와의 교류를 활발히 하면서 정립 상태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노력하였고, 때로는 전쟁을 통한 정복을 시도하기도 하였다. 위나라는 동쪽의 고구려와 충돌하였으며, 북방의 흉노족이 위나라에 살도록 허용하면서 흉노중랑장(匈奴中郞將)이라는 관리를 파견하여 이를 감독하였다. 이는 흉노를 비롯한 이민족을 위나라 군대에 사역시키면서 그 군대의 힘으로 이민족을 통치하기 위함이었다.) 촉나라는 서쪽의 강(羌)족과 동맹을 맺고 위나라를 공격 하였다. 오나라는 일시적이지만 고구려와 통교하였으며, 남쪽으로 진출하여 지금의 베트남 지역을 정벌하기도 하였다.서진 시대 이후의 중국은 5호 16국 시대, 남북조 시대에 접어들었다. 이 시기는 특히 한반도 국가들과 많은 교류가 있었는데, 고구려와 통교한 북위, 백제와 통교한 남조의 양나라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이 시기에는 북방) 한국의 중세사회인 고려시대 역시 국제적인 성향을 띄었으며, 이민족이나 타 국가와의 항쟁이나 교역도 활발하였다. 고려는 건국 초기부터 북방 민족인 거란(契丹)과 긴장 관계에 놓여있었다.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을 고려는 매우 적대시 하였으며, 화친을 요구하는 거란의 사신을 유배 보내고, 선물로 가져온 낙타를 만부교에 붙들어 매 굶겨 죽일 정도로 적개심을 드러내었다. 결국 거란은 고려 성종시기부터 3회에 걸친 침략을 자행하였으며, 고려는 회담과 무력으로 이를 물리쳤다. 그 결과로 고려와 거란 사이에는 타협이 이루어져, 고려는 거란과 중국의 송(宋)나라 사이에서 외줄타기 외교를 하며 동아시아 정세를 안정시킬 수 있었다. 여진족과는 대체로 우호 관계를 가지며 그들로부터 조공을 받는 관계였으나, 뒷날 여진족이 강성해지면서 긴장이 조성되었다. 윤관의 동북 9성 정벌, 훗날 여진족의 금나라 건국 등으로 고려와 여진의 관계는 급변하였다. 결국 강대한 제국을 세운 금나라에 대하여 고려는 사대를 할 수 밖에 없었으나, 금의 침략을 피하고 귀족 문화를 온전히 발전시킬 수 있었다. 고려는 송과의 외교에 있어서는 무엇보다도 경제적, 문화적 실리를 중요시하였다. 그랬기 때문에 고려는 송나라와 거란, 금나라의 투쟁에 깊게 개입하지 않으려고 노력하였다. 고려는 거란과의 화친 후 송나라와 국교를 단절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송나라의 문물을 수입하기 위해 노력하였으며, 송나라 황제 휘종과 흠종이 금에 의해 포로가 되고 남송이 건국 된 뒤에는 고려를 통하여 그들을 맞이하려고 하였으나, 고려가 이를 거절한 일도 있었다.고려는 교역에 있어서도 그 어느 때 보다 활발한 시기였다. 송과 활발히 무역을 하고 있던 대식인(大食人; 아라비아인)들의 상선까지 개경의 해상 문호인 예성항(禮成港; 벽란도)에 출입하며, 수은, 향료, 약품 등의 물품을 들여왔다. 이리하여 예성항은 당시에 국제적인 무역항으로 크게 번창하였다). 당시 고려의 수도인 개경은 이러한 활발한 무역 활동으로 인하여 크게 번창하였는데, 인구는 50부한 여몽 연합군에 의해 수세에 몰렸으나, 카미카제(神風)라 불리는 태풍에 의해 여몽 연합군은 막대한 피해를 입고 철수하였다.반면 이 시기의 상공업의 발달과 관련하여 송이나 원과의 해외 무역이 발달하게 된다. 가마쿠라 막부는 송에 대하여 적극적인 외교 정책을 취하였으나, 정식의 외교 관계는 수립되지 않아, 무역은 민간이 행한 사무역의 형태로 발달하였다. 주요 무역품으로 일본에서는 금, 은, 수은, 유황, 마키에(蒔繪), 도검 등이 수출되었고, 송으로부터는 비단을 비롯한 직물, 도자기, 향료, 약품, 서적과 송전(宋錢)이 수입되었다. 특히, 송전의 수입은 화폐 경제 발달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가마쿠라 막부의 멸망 후 남북조 시대를 거쳐 일어난 무로마치 막부 시대에는 중국의 명, 한반도의 조선과 류큐(琉球)와의 관계가 긴밀하였다. 남북조 시대부터는 왜구가 고려와 중국의 명나라를 약탈하기 시작하였고, 그 정도가 점점 심해졌다. 그리하여 중국 명나라의 태조 홍무제는 남조에 왜구를 금하도록 요구하였고, 무로마치 막부(室町幕府)의 아시카가 요시미츠(足利義滿)와 공동 작전을 펴 왜구를 소탕하기도 하였다. 또한 이 시기에 명나라는 외국과의 교역에 있어 조공 무역을 고수하였는데, 일본 역시 이 체제에 편입되어 아시카가 요시미츠는 명나라에 의해 책봉을 받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이 명과 수교를 계속한 것은 교역에 의한 경제적 이익에 대한 욕구가 컸기 때문이었다. 무로마치 막부는 또한 류큐와도 무역을 활발히 하였다.중세 말기에는 포르투갈과 스페인과도 무역이 시작되었다. 1543년 포르투갈인을 태운 중국의 해적선이 규슈(九州)에 표착한 것을 시작으로 포르투갈과 교역이 시작되었으며, 스페인도 1584년부터 일본과 무역을 시작하였다. 서양에서는 일본을 금이 풍부한 나라로 인식하여 일본과 교역을 원하고 있었다. 일본에서는 이들을 남만인(南蠻人)이라고 부르며 교역하였는데, 이들은 중국으로부터 주로 생사(生絲)를 사들여 일본으로 수출하고, 그 댓가로 일본의 은을 받았다.) 또한 대표적인 예였으며, 안록산의 난이 진압된 이후에도 당나라는 절도사들의 횡포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황소의 난을 평정하고 당나라를 멸망시킨 주전충(朱全忠)의 집권과정에서도 절도사들은 깊게 개입해 있었다. 결국 당나라 멸망 후 5대 10국의 혼란기에도 이러한 군진 세력들이 난립하였으며 당나라 시대까지 사회의 지배세력이었던 귀족 계층은 이로써 완전히 몰락하게 되었다.2) 고려 귀족 사회가 기울어지기 시작한 것은 이자겸의 난,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으로 귀족들의 세력이 약해지면서부터 이다. 결국 무신정권으로 인하여 문벌 귀족 사회는 급격히 무너져 갔으며, 몽골의 침략으로 인하여 사실상의 종말을 맞이하였다. 몽골의 세력을 등에 업은 권문세족이 한동안 고려를 지배하였으며, 이들에 대항하여 일어난 신흥 사대부 세력의 대두는 새로운 사회의 등장을 알렸다. 이는 중세가 근세 사회로 넘어가는 과도기의 현상이라고 할 수 있었다.3) 일본은 중국이나 한국에 비해서 귀족 사회의 종식이 빨랐으며, 그 중세의 종식은 중국과 한국과는 달리 새로운 세력의 등장을 계기로 삼지 않는다. 무사 세력이 여전히 정권을 쥐고 있었으며, 그러한 현상은 개화기 이전까지 변함이 없었다. 중세 사회의 종식은 바로 일본의 첫 실제적인 통일이 이루어지면서 부터였다.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에 의하여 일본 전국 시대의 혼란은 수습되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의 도쿠가와 막부 수립을 근세의 시작으로 보기도 한다. 즉, 가마쿠라, 무로마치 막부의 혼란 끝에 전국시대가 도래한 중세사회는, 이러한 혼란의 수습과 일본 전 국토의 통일로 종결된다고 할 수 있다.※ 추가- 일본 중세의 문화중세 일본은 한반도와 중국의 일방적 영향에서 벗어나 나름대로의 문화가 형성되고 있었다. 또한 한반도 보다는 중국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편이었다. 송나라가 멸망한 후에도 그 문화에 대한 향수가 크게 작용하여, 송나라를 모방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중세의 두 축인 가마쿠라와 무로마치 막부 아있다.
고려시대는 관료제 사회였다고려시대는 그 동안 단순하게 「신라 골품사회」, 「고려 귀족사회」, 「조선 양반사회」라고 통칭되듯 별다른 이론이 없이 단순히 귀족사회로만 치부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1960년대 이후 다양한 이의가 제기 되면서 별다른 생각없이 귀족사회로만 생각되어온 고려사회가 과거를 통해 관리가 된 관료가 이끄는 사회였다는 관료제설이 제기되기 시작하였다. 귀족제설은 일제시대부터 주장되어 왔는데, 그렇듯 일찍이 자리잡힌 통설을 무조건 따른다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볼 수 있다. 귀족제를 뒷받침 하는 증거로는, 음서와 공음전이있는데, 이들에 대한 종래의 논증의 무리, 음서와 과거에 대한 종래의 평가도 전도되었기 때문에 이들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할 필요가 있다.고려 광종~현종대에 이르는 시기를 살펴본다면, 우선 광종 9년부터 실시된 과거제부터 면밀히 검토할 필요가 있다. 광종은 호족세력을 타파하고 자신에게 충성하는 유능한 관료를 양성하기 위해 중국 후주의 귀화인 쌍기의 건의를 받아들여 과거제도를 시행하였다. 광종은 이런 과정을 통해 뽑힌 자들에 의거하고 이들을 수단으로 하여 전제군주국가의 건립을 실현해야 했기 때문에 그들은 황제에게 직접적으로 완전히 종속될 것이 요구되었다. 그들은 그 어떤 종족 친척적 배경과의 연관에서 황제에 종속되는 것이 아니라 그 개인 각자와 황제와의 직선적인 상하관계에 들어서야 했다. 그들을 황제의 지배의 자율화 아래 넣어야 했기 때문이다. 황제는 유능한 과거 관료들을 되도록이면 넓은 계층에서 전국적 규모에서 획득하는 것이 바람직 하였다. 광종은 이를 통하여 유능한 과거 관료들을 조직적으로 생산 확보함으로써 그들을 골간으로 하는 관료제를 수립할 수 있었다.쌍기, 왕융 등이 지공거가 되어 그들에 의해 선출된 과거 관료는 39인으로서 이들 중 성명이 확인되는 사람이 6명인데, 그들은 전국적 범위에 걸쳐 있음을 알 수 있다. 급제자에 대한 특별한 기록은 많지 않으나, 그들이 광종대와 후에 성종대까지도 관료로써 고려 정계의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고려의 전체적인 기틀이 확립된 성종대에는 과거제는 더욱 탄력을 받아 정력적으로 운영되었다. 성종대에 이르러서는 광종대의 급책출신 지공거가 과거를 주관함으로써 이제 과거제는 지공거까지도 자체에 의한 재생산이 가능하기까지 성장하게 된 것이다. 성종대에 정계에서 주도적 위치에서 활약했던 인물들 중 이름이 확인되는 사람은최승로, 서희 외 17명에 이르는데, 이 들중 과거 출신은 11명에 이른다. 요컨대 성종대의 주도적 세력은 그 압도적 다수가 과거집단이라는 것이며 그 중에서도 서희, 최량 등 신생 과거관료의 뚜렷한 진출을 보게 되었다는 것이다. 더구나 이들은 전국적으로 다양한 지역 출신으로 분포되어 있었다.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성종대는 압도적으로 과거계통 또는 과거관료에 의해 주도되는 관료제가 운영되고 있었던 것이다.이러한 사실과는 달리 종래의 귀족제설에서는 「성종대의 정치적 지배층이 최승로에 의해 대표되는 신라의 귀족 = 육두품계통 의 유학자들로 구성되었다」또는 「신라의 지배층은 그대로 고려의 지배층을 형성하게 된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것은 특히나 최승로의 위치에 관한 논란에서 두드러진다. 종래 최승로에 대해서는 그 출자가 신라 육두품계통 이며, 그의 유명한 상소문의 내용이 광종의 급진정책을 공박한 것이고, 그것이 성종의 정책에 반영되었다고 하여, 성종대에는 광종대의 개혁의 반동으로 인해 최승로에 대표되는 신라계통의 유학자들이 정치적 지배세력으로 등장하였다고 설명되어 왔다. 그리하여 최승로의 정치이념은 집권적인 귀족정치를 실현하는 것이라고 이해되고 있다. 그러나 최승로는 지공거로서 과거제운영에 적극 참여하였으며, 성종은공종대에 이어 과거제를 정력적으로 운용해갔었다. 성종대는 광종대에 수립된 관료제를 보다 합리적이고 안정된 것으로 강화해 갔다. 결국 신라출신 세력자들이 과거관료라는 테두리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는 데서 성종대는 결국 관료제가 지배적으로 관철되었다는 데는 변함이 없는 것이다.이후, 목종대의 정치적 주도세력을 살펴보면, 류방헌, 한언공, 김치양, 최유부, 채충순, 유진, 최항, 강조, 고의, 최성무, 최숙, 김승조 등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들중 5명은 명백한 과거계통으로서 이미 성종대에 등용되었던 인물들이다. 이중, 최항은 채충순과 더불어 김치양의 「不軌」를 막고 현종을 영립하는 데에 큰 공을 세웠다. 그는 여러 보로 보아 전형적인 과거관료라고 할 수 있는데, 최항은 평장사 최언위의 손자로서 성종 때에 과거에 급제하였고, 지공거도 두 번이나 역임하였던 당시 정치지배세력의 중심적 위치에 있었던 인물이다. 그러면, 무엇이 그를 이러한 위치에 설수 있게 한 것일까? 그 요소들을 알아보면 그의 가문에서가 아니라 순수한 그의 자질과 개인적 능력에서 찾아야 한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이미 과거급제시절부터 황제로부터 그 능력을 극찬하는 말을 들을 정도로 발군의 재능을 가진 인물이었다. 그러므로 최항은 능력과 충성, 청렴결백함을 모두 겸비한 이상적인 관료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과거제가 시행되니 이미 50년이 경과한 이 목종대의 관료제는 더욱 그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으며, 그것은 다음의 현종대에서 발전하여 고려왕조에서의 과거관료의 지위가 크게 진전됨을 볼 수가 있는 것이다. 현종대의 주도적 정치세력들은 황보유의, 류방헌, 소태보, 왕국모, 강조, 유진, 최항, 김심언, 채충순, 최사위, 최충, 강감찬, 서눌, 이기도, 최제안, 강민첨, 이주좌, 김맹, 곽원, 황주량, 김은부, 양규, 류소, 지채문, 하공진 등 25명으로 볼 수 있는데, 이들 중 명백히 12명은 과거 출신들이다. 이들 중 강감찬의 경우는 공부하길 좋아하고 기략이 있어서 과거를 통해 관직에 진출하고 전공을 세워 스스로 입신한 경우라고 할 수 있고, 서눌의 경우는 현종에게 「納女」를 했다고 하니, 이는 곧 과거관료와 황실과의 통혼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사례는 즉, 황실과 통혼이 있을 정도로 과거관료세력이 성장하였음을 보여주는 좋은 예라고 볼 수 있겠다. 이후, 정종~문종대의 주도세력은 바로 이 목종~현종대에 준비되어, 누대적으로 그 지반과 세력을 확대하여 「가문=문벌」로 발전하기에 이른다.이번에는 고려시대의 관리등용의 법과 문벌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겠다. 고려시대의 관리등용의 법은 우선 6가지 형식으로 갖추어져 있었지만 대표적으로 과거와 음서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열전에는 약 650명의 인물의 전기가 열기되어 있는데, 이중 급제자가 340여명, 음서자는 40여명에 불과하다. 또한, 성종~현종대의 공신 37명 중, 급제자 또는 지공거는 23명이지만, 순수음서자는 1명에 불과했으며, 열전의 전기에 나타나는 태조 왕건 또는 삼한공신의 후손들 20여명 중 순수음서자는 1명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모두 급제자였을 정도로 이미 관료제는 고려 사회 속에 뿌리박으면서 관리 등용법에서 거의 절대적인 기능을 해왔음을 알 수 있다. 개별적 예를 들어보자면, 태조 왕건의 당제의 7세손에 해당하는 왕충이라는 인물은 비록 황족이지만 同進事로서 급제하였고, 왕충의 제6대 외손에 해당하는 허공이라는 인물 또한 과거급제를 통해 관직에 진출한다. 이러한 예는 즉, 신분이나 혈통을 떠나 그 당시의 주도세력이 되기 위해서 과거급제는 꼭 필요한 단계라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이다. 또한, 고려사회는 그 자손이 과거관료로서 가업을 이은 가계가 사회적으로 권위있는 문벌로서 성장하게 되는데, 흔히, 「문벌귀족」이라고 알고 있는 계층이다. 하지만 이러한 문벌들을 귀족으로 보는 귀족제설의 관점은 그들 문벌이 처음 기반을 세우고 그것을 공고히 하고 확대하면서 권위를 지속시켜 간 근본요인을 과거제와의 관련에서 고려하지 않았거나, 이 과거제가 지니는 반귀족적 성격을 등한시한데서 오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