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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체호프의 희극 (갈매기) 분석 평가A+최고예요
    체호프의 희곡 의 등장인물 연구- 등장인물 ‘뜨레쁠레프’와 ‘니나’를 중심으로 -Ⅰ. 서론러시아에서 ‘체호프’는 일반적으로 단편작가로 통한다. 그는 모스크바 대학에서 의학을 전공하던 시절 학비 보충을 위해 단편소설을 쓰기 시작했으며 1904년 4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800편 이상의 단편과 7편의 장막극을 썼다. 그 7편의 장막극 가운데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받는 4편이 와 , , 이다.희곡 는 1896년 10월 성 빼쩨르부르그의 알렉산드린스끼 극장에서 초연 되었다. 그러나 는 체호프의 혁신적인 연극적 기교를 이해하지 못한 극단으로 인해 리허설조차 이루어지지 못했고 끝내 실패로 돌아갔다. 이 일을 계기로 체호프는 다시는 자신의 극작품이 극장에서 상연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을 것이라 맹세한다. 그러나 의 가치를 알아 본 네미로비치-단첸코의 끈질긴 설득 끝에 1898년 모스크바 예술 극장을 통해 다시 상연하게 된다. 이번에는 성공했으며 이로 인해 현대연극의 새로운 장이 열리게 된다. 우리나라에서도 몇 번 공연되었고 올해 2007년 3월에도 공연되었다. 당시 배우 조민기가 소설가 뜨리고린 역을 맡았다.전반적으로 체호프 희곡은 ‘미묘하다’, ‘모호하다’, ‘비밀스럽다’, ‘수수께끼 같다’는 것이 보편적인 평가이다. 그리고 기존의 “전통적인 희곡의 틀과 달리 외적인 사건이나 갈등 없이,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을 통해 그들의 내면 세계를 객관적으로 표현하는 체호프의 새로운 극작술은 많은 논란의 대상”되었다. 러시아 문학가 미르스끼는 “체호프의 희곡 속에는 주제도, 플롯도, 행동도 없다.··· 실제로 그의 희곡들은 세계에서 非극적이다”라고 정의하였다. 이러한 체호프 희곡의 전반적인 평가 그대로 희곡 는 이야기를 격정적으로 이끌어 가는 사건도, 영웅도, 선인이나 악인도, 악당도 등장하지 않는다. 극의 전개에 있어서의 연극적 효과를 야기하는 사건들은 무대 뒤에나 등장인물들의 입을 통해서 전해진다. 예를 들면 니나와 뜨리고린의 불행한 결혼 생활은 뜨레쁠레프의 입을 통레프의 ‘새로운 형식’은 무엇인지 뜨레쁠레프와 소린, 뜨레쁠레프와 니나의 대화를 통해 살펴보자.뜨레쁠레프: 어머니는 극장을 사랑하고 당신이 인류애와 신성한 예술에 봉사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제 생각에 요즘 극장은 진부하고, 편협해요. 막이 오르면 저녁 빛 아래, 3면 벽의 방에서 위대한 예술가들, 신성한 예술의 봉사자들이 어떻게 먹고, 마시고, 사랑하고, 거닐고, 옷을 입고 다니는지 묘사하고; 저속한 장면과 말속에서, 일상적인 삶에서 유용하고 알기 쉬운 작은 도덕심을 낚아 올리려고 노력하지만; 그 종류가 수천 개 되더라고 나한테는 다 똑같이, 똑같이 여겨져서-자신의 머리를 누르는 에펠탑의 저속함에서 도망치던 모파상처럼, 저도 도망치고 또 도망치게 돼요.소린: 극장이 없으면 안 되지.뜨레쁠레프: 필요한 것은 새로운 형식입니다. 새로운 형식이 필요하고, 만일 그게 없다면, 아무 것도 없는 게 더 나아요.뜨레쁠레프와 소린의 대화를 보면, 뜨레쁠레프는 기존의 전통극에 부정적인 입장을 가지고 ‘새로운 형식’의 희곡을 만들고자 한다. 뜨레쁠레프가 생각하는 ‘새로운 형식’은 “위대한 예술가나 신성한 예술의 봉사자들이 어떻게 먹고, 마시고, 사랑하고, 거닐고, 옷을 입고 다니는지”를 묘사한 내용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또한 “일상적인 삶에서 유용하고 알기 쉬운 작은 도덕심”이나 낚아 올리는 그런 내용이 아님을 알 수 있다. 희곡 는 앞에서 말했듯이 사랑과 예술의 이야기로써, 모든 체호프의 희곡이 그러하듯 “체호프 자신의 경험과 주변 사람들의 모습이 작품 속에 그대로 투영”되어 있다. 뜨레쁠레프 또한 체호프의 분신으로서, 체호프는 뜨레쁠레프를 통해 전통극과 다른 자신의 ‘새로운 형식’의 희곡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뜨레쁠레프가 말하는 '새로운 형식'은 희곡 의 ‘새로운 형식’과 그대로 맞아떨어진다. 뜨레쁠레프의 대사처럼 희곡 은 예술가들의 고뇌를 다루고 있으면, 일상적인 삶에서 유용하고 알기 쉬운 작은 도덕심 같은 것은 나오지 않는다. 다음은 뜨레쁠레프와 니나의 대 희곡과 희곡에 대한 의견 차이는 두 사람의 결함이 어려울 것임을 한편으로 암시한다.뜨레쁠레프의 ‘새로운 형식’의 희곡인 ‘극중극’은 ‘살아 있는 인물이 없다', '연기하기 힘들다'라는 문제점을 안고도 니나에 의해 연기된다. 그러나 연극은 시작 된지 얼마 되지 않아 중단된다. 뜨레쁠레프의 어머니인 유명한 여배우인 아르까지나는 아들의 희곡을 두고 ‘퇴폐주의적’이라는 비난한다. 또 뜨레쁠레프의 ‘극중극’에 대해 니나는 뜨리고린에게 “정말, 이상한 희곡이죠?”라고 묻고, 뜨리고린도 “전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라고 대답한다.뜨레쁠레프는 ‘새로운 형식’으로 쓰여진 자신의 희곡을 누구보다 어머니 아르까지나에게 인정받고 싶어한다. 이는 외삼촌인 소린의 대사 속에 잘 나타난다. “저 앤 너를 기쁘게 해주려 했어”. 뜨레쁠레프는 늘 어머니의 관심 밖에 있다. 어머니 아르까지나에게 있어 아들 뜨레쁠레프는 '자신이 젊지 않음'을 상기시켜주는 존재이다. 무엇보다도 어머니 아르까지나의 모든 관심은 소설가 뜨리고린에게 가 있다. 뜨리고린는 아르까지나에게 “나의 멋지고 경이로운 사람······ 내 인생의 마지막 페이지! (무릎 꿇고) 나의 기쁨, 나의 자랑, 나의 행복····· 나의 멋지고 훌륭한 지배자······”이다. 아르까지나의 뜨리고린에 대한 관심과 아들에 대한 무관심은 희곡 군데군데에 나온다. 제4막에서 빙고 게임을 하면서도 아르까지나는 뜨레쁠레프의 작품을 읽어보았느냐는 도른의 질문에 “아직 읽어보질 못했어요. 시간이 있어야죠.”라말한다.마치 '빙고 게임 할 시간은 있어도 아들의 작품을 읽을 시간은 없다'는 씩으로, 뜨레쁠레프에 대한 아르까지나의 무관심을 행동과 대사로 표현하고 있다. 또한 아르까지나는 뜨리고린의 저녁식사에 대해서는 “우리 유명인사께서 점심도 안 드셨어요.”라고 신경을 써는가 하면, 아들이 점심은 먹었는지 묻지도 않고 저녁식사에 생각 없다는 뜨레쁠레프에게 마음대로 해라며 신경을 쓰지도 않는다. 이러한 아르까지나의 무관심은 뜨레쁠레프에게 뜨리고린에 대한 질투심을 품은 명확하고 확실한 사상이 있어야 하며, 목적도 없이 그림 같은 길을 걷는다면 길을 잃고 “당신의 재능이 당신을 파멸시킬” 것이라고 충고하지만, 뜨레쁠레프는 도른의 충고에 경청하지 않은 채 니나가 어디있는지만 묻는다. 도른의 대사는 뜨레쁠레프의 ‘새로운 형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핵심이다. 이후 제4막에서 작가가 된 뜨레쁠레프는 도른이 지적했지만 가볍게 흘린 문제로 인해 실패한 작가가 된다.뽈리아나 안드레예브나: 꼬스짜가 연주하고 있어요. 가엽게도 울적한 거예요.샤프라예프: 여러 신문에서 아주 악평을 하더군요.마샤: 77!아르까지나: 관심이 많으시네요.뜨리고린: 운이 없어요. 자기가 진정한 스타일을 전혀 찾지 못하고 있어요. 뭔가 이상하고 애매한데다 떼론 잠꼬대 같기조차 해요. 살아있는 인물이 하나도 없어요.(······)도른: ······ 단지 아쉬운 건, 뚜렷한 주제가 없다는 겁니다. 인상만 남기고는 그 이상 아무 것도 없는데, 인상만 가지고는 멀리 가지 못해요.제3막에서 제4막 사이 2년이란 세월이 흘려 뜨레쁠레프는 작가가 된다. 제3막에서 “재능 없는 사람들은 진짜 재능 있는 사람들을 불만스럽게 비난하는 것말고는 아무 것도 가진 게 없으니까”라는 어머니 아르까지나의 말에 “(비꼬듯) 진짜 재능 있는 사람들이라뇨! (격노하며) 사실, 전 당신들 보다 더 재능이 있어요!”라면 당당했던 뜨레쁠레프 이지만, 제4막에서의 '여러 신문에서의 악평'과 '진정한 스타일을 전혀 찾지 못하고 있다'라는 지적은 그가 실패한 작가임을 대화를 통해 간접적으로 드러낸다. 그리고 실패한 원인은 제1막에서 도른이 이야기한 ‘명확한고 확실한 사상’의 부재(不在)에 있음을 제4막에서 다시 드러난다. 도른은 여전히 뜨레쁠레프의 작품은 ‘뚜렷한 주제가 없다’라는 지적한다. 그리고 뜨레쁠레프 스스로도 지쳐가고 있다.뜨레쁠레프: (글을 쓰려다가 쓴 것을 훑어보며) 새 형식에 대해 그렇게 많이 이야기해 놓고는, 이제는 나 스스로 진부한 관습에 빠져드는 것을 느끼니 ···· 뜨리고린은 자기 내가 작가라면 민중과 그들의 고통에 대해, 미래에 대해 말하고, 학문과 인간의 권리 등에 대해 말해야만 하는 책임이 있다고 느끼지만....체호프는 뜨레쁠레프와 뜨리고린, 두 명의 작가를 통해 결국 작가로서 가져야 하는 신념과 무엇을 어떻게 써야 하는 지 이야기하고 있다. 작가는 뜨리고린처럼 작가로서 무엇을 쓸 것인가에 대해 신념을 가진 채 ‘마음에서 흘러나오는 것’을 쓰는 동시에 뜨레쁠레프처럼 늘 ‘새로운 형식’에 대해 고뇌해야 함을 말한다. 그리고 뜨레쁠레프의 실패를 통해 작가는 작품을 통해 무엇을 이야기 할 것인지 정확히 알고 그림 같은 길을 걷지 말아야함을 이야기하고 있다.2. 니나의 ‘명예와 광채’에서 ‘인내와 믿음’으로제1막에서 배우지망생인 니나의 관심은 뜨레쁠레프의 희곡에 없다. 오직 유명한 작가와 배우가 자신의 연기를 본다는 것에 있다. 또한 니나의 “그분 단편들은 정말 휼륭해요!”라는 대사에서 알 수 있듯 소설가 뜨리고린에 대한 존경심과 환상을 가지고 있으며, 이는 여배우 아르까지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1) 니나: (뽈리나 안드레예브나에게) 이리나 니꼴라예브나 같은 유명한 배우를 거역하다뇨! 그분 소원이라면, 변덕부리시는 거라도, 영지 경영보다 더 중요한 게 아녜요? 정말 믿을 수 없어요!2) 니나: 유명한 여배우가 그런 사소한 일로 운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해! ······ 유명한 소설가는 하루종일 낚시만 하고, 잉어 두 마리 잡았다고 좋아하니 정말 이상한 일이야. ······ 자신들의 명성과 명예로 귀한 혈통과 부유함을 무엇보다 중시하는 그들에게 복수한다고 생각했어...3) 니나: 선생님의 인생은 정말 멋있어요!니나: 하지만 영감이나 창작 과정 그 자체는 고상하고 행복한 순간을 주잖아요?1)은 아르까지나가 시내 외출을 위해 말을 쓸 수 있냐는 것에 대해 쌀보리 운반을 위해 나가 있는 말을 쓸 수 없다는 샤므라예프의 말에 대한 니나의 대사다. 니나는 아르까지나가 유명한 배우이기에 변덕을 부리더라도 들어주어야 된다고 생각한다. 2)에서도간다.
    독후감/창작| 2012.10.08| 10페이지| 1,500원| 조회(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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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전쟁의 시작
    한국전쟁의 시작개요지금으로부터 60년 전 동족상잔의 전쟁이 일어났다. 무엇을 위해 한 민족은 서로에게 총대를 겨눠야 했으며, 이런 비참한 전쟁은 누가 일으켰는가?우리는 북한에 의한 남침으로 한국전쟁은 발발되었다고 믿어 의심치 않고 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은 남한에 의한 인민군의 반격에 의해 전쟁은 발발하였다고 터무니 없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조국의 땅에 민족의 피를 뿌린 이 비극은 어디서 어떻게 시작하였는지 면밀히 살펴보도록 하겠다.한국전쟁전쟁이 일어난 첫날 이후부터 대한민국 정부와 UN한국위원단은 전쟁이 북한의 전면적인 공격에 의해 일어났음을 UN측에 알렸으며 개전 다음날인 1950년 6월 26일(미국 뉴욕시간 6월 25일) UN 안전보장이사회는 UN한국위원단의 보고를 받은 후 이를 확인하고 북한측에 전전(戰前) 상태로 군대를 되돌릴 것을 촉구했다. 그러나 북한군은 전 전선에서 공격을 계속 시행하여 6월 28일 새벽에는 서울을 함락시킬 기세였다.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은 6월 28일(미국 워싱턴 시각 6월 27일)에 해?공군으로 침공하는 북한군을 저지할 것을 결정하는 한편, UN 안보이사회는 UN 회원국들에게 경고를 무시하고 공격을 계속하는 북한에 맞서 대한민국을 지원하라는 결의를 통과시켰다. 미국은 평화를 깨뜨린 북한군을 38도선 이북으로 격퇴하기 위해 6월 30일에는 지상군 파견을 결정하였다. 미국의 제의에 의해 7월 7일에 UN 안전보장이사회는 유엔 회원국으로 UN군을 결성하여 침략자인 북한군을 격퇴한다는 결의를 통과시킴으로써 전쟁은 북한군과 UN군의 대결로 변했다.북한은 개전 첫날 아침부터 전쟁이 남한의 공격에 의해 시작된 것이라고 비난하면서 북한군의 국경경비대와 인민군은 남한의 공격에 대해 ‘반격’으로 넘어갔다고 정반대의 주장을 했다. 당시의 소련과 중국도 북한의 이러한 주장에 손을 들어주며 대한민국이 먼저 38도선을 넘어 북한을 공격해왔으며 이것은 ‘미 제국주의의 사주에 의한 침략’이라고 주장했다.이러한 북한측의 주장은 몇 가지 점에서 상식을 벗부 수립 시에 내건 ‘국토완정’이란 용어는 엄격히 말해서 꼭 무력 통일을 말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말 그대로는 국토를 사회주의 방식으로 완전하게 정리하겠다는 것을 의미했다. 레닌-스탈린주의에 따르면 그 방법은 남한 내부의 혼란과 ‘인민봉기’를 야기하여 국가를 내부적으로 전복하는 것이거나, 무력으로써 강점하고 사회주의 체제를 세우는 것 두 가지였다. 김일성과 박헌영은 이 두 가지 방법을 모두 고려하고 있었다. 그러나 남한에 지지기반을 갖고 있던 박헌영은 남노당의 폭동과 게릴라전을 결합하여 남한 내부의 혁명을 더 선호하는 경향을 보였고, 만주에서의 유격대 전투와 1940년대 초 소련영내에서의 정규군 군사훈련으로 다져진 김일성은 무력에 의한 통일을 더욱 선호하는 경향을 드러냈다. 박헌영의 남노당은 1948년 10월 여수 반란 사건을 주동하여 체제전복을 꾀했으나 실패하였다. 여수-순천 반란의 패잔병들은 지리산에 들어가 게릴라 활동을 계속했다. 그러나 대한민국 정부가 성공적으로 여순반란을 진압하고 이를 기화로 국군 내부의 숙군과 남노당 와해공작이 성공함에 따라 북한은 무력행동을 적극적으로 고려하게 되었다. 1949년 3월 김일성과 박헌영은 모스크바 공식 방문 시에 스탈린을 만난 자리에서 북한에 대한 소련의 경제, 문화, 군사 지원을 요청하는 한편, 비밀회담에서 무력에 의한 통일 방안을 내비쳤다. 당시까지 남한에 주둔하고 있던 미군과의 충돌이 곧 세계대전으로 비화될 것임을 염려한 스탈린은 이 때 북한에 대해 경제적, 군사적 면에서는 전폭적으로 지원할 것을 약속했지만 무력 통일방안에 대해서는 아직 국제정세 상 불리하고, 남북한 간의 군사력 대비 면에서 북한이 압도적 우위를 달성하지 못했다는 점을 지적하며 김일성에게 자제하도록 하였다.1949년 1년간은 무력통일에 안달이 나있었던 김일성의 연속적인 ‘전쟁 허가’ 요청과 스탈린의 ‘북한의 전쟁 기도 통제’가 반복된 기간이었다. 김일성은 1949년 5월 경에 중국 홍군이 국민당에게 승리하여 양자강을 넘고 여세를 몰아 중국 부터 극동에서의 힘의 균형이 미국과 영국에 비해 충분히 강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는 1949년 12월부터 4개월 동안 모스크바에 머물었던 모택동과 함께 외몽고 문제, 신장 문제, 만주에서 여순, 대련, 동만철도 문제 등에 관한 현안들을 토의하고 소련의 중국에 대한 지원 문제를 협의하였다. 여기서 모택동은 미국 제국주의에 반대하며 소련과 공동보조를 취한다는 의사를 재확인하며 스탈린과 중소동맹을 맺기로 1월중에 합의하였다. 스탈린은 이 자리에서 1945년 2월 얄타에서 맺어진 미국과의 세력권 분할 합의를 파기하며 중국과 소련이 동맹을 이룰 경우 아시아에서 미국-영국 세력을 약화시킬 수 있다고 말했다. 스탈린이 김일성의 ‘전쟁승인 요구’에 청신호를 보낸 1월 30일은 바로 스탈린과 모택동과의 중소동맹 체결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진 직후라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스탈린은 이 시점에도 북한 행동에 의해 소련이 이끌려 들어감으로써 미국과의 전면전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한반도에서 북한의 남한 공격 사실만으로 미국이 세계대전을 일으키지는 않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는 전쟁이 한반도 내부 문제 때문에 일어난 것으로만 보이도록 위장할 수 있다면 소련은 간접적인 지원만으로 북한의 ‘무력 통일’을 성공하게 할 수도 있다고 보았다.전쟁에 관한 문제를 토의하기 위해 김일성과 박헌영이 1950년 3월 30일에 모스크바를 방문하기 전부터 소련은 우선 북한군의 전력증강을 시행할 수 있는 조치들을 취했다. 그 중 가장 중요한 지원은 새로운 사단을 창설하기 위한 무기의 공급과 전쟁계획을 수립하는데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군사고문단 요원을 파견하는 것이었다. 1950년 2월에는 2차대전 당시 독소전역에 참전하여 풍부한 전쟁경험을 갖고 있던 장군들과 장교들로 군사고문단을 교체해 파견했다. 2월 24일에는 독소전쟁의 영웅 바실리예프 중장이 인민군 총참모부 총고문으로 북한에 도착했다. 그 외에 3월부터 새롭게 북한군 3개 사단을 편성하기 위한 훈련에 들어갔다. 무기는 1950년 4월부터 작전계획은 모두 소련군사고문들에 의해 세워졌다는 것을 증명해 주고 있다. 1966년 소련 외무성이 당시 수상 브레즈네프를 위해 작성한 ‘한국전쟁 개요’에 의하면 소련고문단은 남한의 완전 점령에 22일 내지 27일이 소요되는 작전계획을 수립하였다. 최근에 국방군사연구소에서 입수하여 번역한 [소련군사고문단장 라주바예프의 6.25전쟁 보고서]는 북한군의 남침작전계획을 세부적으로 보여준다. 이 작전계획은 ‘반격계획’이라고 명칭이 붙여졌으며, 남한 전역을 석권하는 4단계의 작전단계가 명시되어 있고, 개전과 동시에 전방사단 및 여단들의 임무가 명시된 사단(여단)별 전투명령들이 포함되어 있다. 전쟁 첫해까지 평양주재 소련대사를 역임한 스티코프가 1950년 6월 26일에 소련군 총참모차장 자하로프 장군에게 보낸 비밀서신에서도 북한의 남한침공작전계획은 소련군사고문단에 의해 수립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전쟁 기간동안 북한군 작전국장을 지냈던 유성철은 그와 소련계 북한군인 몇 사람이 완벽하게 통제된 북한군 총참모부 건물에서 비밀리에 러시아어로 작성된 전투명령을 한국어로 번역했다고 증언한 바 있다. 작전계획은 6월 초에 완성되고 6월 15일에는 김일성이 이를 비준했으며, 이 때 최종적으로 공격날짜를 6월 25일로 결정한 후, 이 계획안은 6월 16일 스탈린에게 보고되어 최종승인을 받았다.이렇게 남침작전계획이 준비되고 있을 동안 북한은 4월의 모스크바 회담에서 약속된대로 남한에 대해 평화공세를 계속 제시하는 한편 북한군 사단들을 비밀리에 38선 가까이 이동시키는 작업을 동시에 시행하였다.북한군은 하계기동훈련 명목으로 은밀히 38도선 북쪽의 집결지로 이동하였다. 북한군 사단들은 6월 12일부터 이동을 개시하여 6월 23일까지는 38선 북쪽 집결지에 전개를 마쳤다. 옹진반도에는 북한 내무성 휘하의 제3경비여단과 제6사단의 제1연대, 개성방면에는 제6사단, 문산-고랑포 방면에는 제1사단, 철원-동두천 축선에는 제4사단, 신철원-포천 축선에는 제3사단, 춘천 방면에는 제2사단, 인제-홍천정부 군대의 진공을 좌절시키었습니다.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정부는 조성된 정세를 토의하고 우리 인민군대에 결정적 반공작전을 개시하고 적의 무장력을 소탕하라고 명령을 내리었습니다.1950년 6월 25일 각 지역의 38도선 상황-옹진소련측 자료에 의하면 옹진 반도에서 인민군 제3경비여단은 옹진반도에 예성강까지의 전선에서 공격하여 다음날까지 옹진반도를 완전히 점령하는 임무를 받고 있었다.노획된 북한문서에 의하면 북한의 제3경비여단은 이미 6월 21일부터 예하 부대에 정찰명령을 내려 이를 시행하고 있었다. 6월 24일에는 옹진 북쪽의 제1연대가 ‘전리품 수집조직에 관하여’라는 제목의 전투를 예상한 명령까지 내렸다.소련측 내부문서에는 6월 25일자 전투상황 첫 줄에 “조선인민군은 20-40분간의 공격준비포격 후 04시 40분에 반공격으로 전환하였으며 공격개시 이후 3시간 동안 구분대와 연합부대들은 3내지 5킬로미터를 진격하였다”고 쓰고 있다. 여기에도 남한군이 먼저 공격해왔다는 내용은 없다.옹진반도에서 북한군이 먼저 선제 공격을 한 것은 틀림없다. 북한군의 공격준비포격은 04시에 시작되었고, 보병들은 04시 20분과 40분 사이에 옹진의 국군 17연대 진지를 공격한 것이다.-개성개성 방면에는 6.25 개전 당시 38도선 남쪽에는 국군 제1사단 12연대가 방어하고 있었고 38도선 이북에는 송악산 정상을 차지한 북한군 제6사단의 13연대와 15연대가 남쪽을 내려다 보는 상태로 국군과 대치하고 있었다. 당시 남한측에서는 알지 못했지만 북한군 제6사단 병력은 사리원에 주둔하고 있다가 이 지역에서 기차로 이동하여 1950년 6월 18일에는 개성 북방에 도착하였다. 이 부대들은 이곳에서 집결지 행동을 하다가 6월 23일부터 은밀히 이동하여 개전 2일전에는 38도선 바로 북쪽의 공격준비 진지에 도착하였다.-철원 방면‘철원 방향’은 북한측이 6월 25일 남한의 국방군이 침입해 왔다고 주장한 지점 중의 하나이다. 철원 방향에는 동두천에서 38도선 바로 남쪽의 전곡을 거쳐 북으로 철원
    사회과학| 2010.07.09| 9페이지| 1,000원| 조회(1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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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진호 전투 ppt자료 평가D별로예요
    ..PAGE:1장진호 전투..PAGE:2장진호 전투의 개요날짜 1950.11.26 ~ 12.13장소 장진호교전국 vs지휘관 올리버 스미스 vs 송스룬병력 미국1 해병사단미국7 보병사단 vs 중국9병단대전투단피해상황전사(2500여명) vs 전사(25,000여명)실종(219명) 부상(12,500여명)부상(5,000여명) 동상자 다수동상자 다수..PAGE:3장진호12..PAGE:4장진호 전투는 한국전쟁중인 1950년 겨울, 미국 1 해병사단이 함경남도 개마고원의 장진호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임시수도인 강계를 점령하려다 오히려 장진호 근처의 산속 곳곳에 숨어있는 중국군 제 9병단 (7개 사단 병력, 12만 명 규모)에 포위되어 전멸 위기를 겪었다가, 간신히 성공한 후퇴 작전장진호 전투..PAGE:5장진호 전투의 과정10월 26일 ~ 12월 10일..PAGE:6미국 1 해병사단은 유엔군의 북진에 맞추어 장진호 방면 진출을 위해 원산에 상륙미국 1 해병사단은 북한군의 정부가 도피중인 강계를 점령하기 위해 장진호쪽으로 북진1950년 10월 26일..PAGE:7함흥 북방 수동 일대에서 미국 1 해병사단 7연대 1대대와 북한의 수도 평양에서부터 후퇴한 인민군 344전차대대 잔존 병력과 전투가 벌어졌다.11월 2일 수동(水洞) 전투..PAGE:811월 7일 황초령 문턱에서부터 15일에는 장진호 남단 하갈우리를 거쳐, 25일에 장진호 서편 유담리에 진출26일에는 7연대는 장진호를 중심으로 서쪽, 5연대는 하갈우리 북방, 1연대는 후방을 담당하는 형태로 배치11월 7일 ~ 11월 26일..PAGE:9장진호 전투의 중국군 공격10군단장 알몬드 소장의 명령으로 미 8군을 포위하고 있던 중국군을 격퇴11월 27일..PAGE:1027일 밤, 중국군 제79 및 제89사단은 유담리에 대하여 공격을 개시 서로 막대한 피해중국군의 31연대전투단에 대한 공격 (Task Force Maclean)27일 밤 11시경부터 중국군의 공격이 시작그런데 유무선 통신이 전혀 연결되지 않아서 제각기 중국군과 맞서야 했음중국군의 유담리 공격..PAGE:11중국군은 27일 밤부터 28일까지 미 해병 16개 소총중대 가운데 3개 중대를 격멸하고 많은 고지를 탈취해병사단을 세 개의 조각으로 분산시켜 각 부대를 유담리, 하갈우리, 고토리로 각각을 고립시겼으며 부대 간의 연결도로도 차단11월 28일..PAGE:12에드워드 알몬드 미 제 10군단장은 적에게 빼앗긴 고지를 탈환하고 북쪽을 향한 공격을 재개하라는 명령극동사령부의 판단..PAGE:1327일부터 공격을 시작한 중국군은 28일 자정무렵부터 중국군 80사단의 예하 부대로 새로운 공격을 개시주보급로를 개통할 병력은 물론 하갈우리 방어에도 병력이 부족11월 29일..PAGE:14하갈우리에는 육군, 해군, 해병대, 한국군 등 58개의 대부분이 10명 이하로 구성된 선발대나 파견대였기 때문에 통합 지휘가 필요하여 리지 중령이 하갈우리지역 방어작전의 통합지휘관으로 임명11월 28일..PAGE:15하갈우리는 2개 중대 병력의 규모가 방어하고 있었으며 동부고지는 3개 소대가 겨우 진지를 유지하면서 중국군과 대치중11월 29일..PAGE:16전 8시에 미군이 소대와 배속된 공병 2개 소대로써 중국군이 점령한 동부고지를 공격했지만 큰 성과를 얻지 못하였다.괴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고 후퇴하갈우리로의 철수를 위해 병력을 재 배치11월 30일..PAGE:17중국군은 12월 1일 자정무렵부터 공격을 개시하여 31연대 3대대의 방어선을 돌파출발과 동시에 네이팜탄을 터트려 아군 행렬 내에서 폭발하였다. 이로 인해 부대의 전술적 통제가 무너졌고 퇴각 도중에 밤이 되어 항공지원이 끊기자 페이스 중령을 포함한 부대원 대부분이 사살페이스 특수임무부대..PAGE:18새벽6시경, 해병 7연대 1대대는 5일동안 고립12월 2일해병대가 유담리에서 하갈우리까지 약 22km를 돌파거의 모든 장비를 철수대한민국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실제 수도였던 평양에서 철수12월 4일..PAGE:19장진호에서 흥남으로 향하는 후퇴로하갈우리에서 부상자가 일본으로 후송부전선의 미 제8군은 평양-원산간의 방어선 형성이 불가능하여 이날 평양에서 철수12월5일
    사회과학| 2010.07.09| 24페이지| 1,000원| 조회(1,4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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