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의 의포에니 전쟁은 로마와 페니키아의 식민시 카르타고와의 전쟁이다. 포에니라는 말은 라틴어로 페니키아인을 가리킨다. 지중해 세계의 패권을 둘러싸고 BC 3세기 중엽에서 BC 2세기 중엽에 이르기까지 전후 3차에 걸쳐 있었던 고대의 세계적 전쟁이다. 이른바 동서 결전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2. 전쟁 전 상황(1) 카르타고카르타고는 기원전 8세기 후반 레바논 중심의 페니키아 사람들이 지배하고 있었다.기원전 6세기부터는 명목적인 지배였고, 실제적인 독립국가가 되었다. 서지중해 있어서 일찍부터 상업교역이 발전했으며 뒤로는 넓은 평야가 있어 식량을 자급할 수 있었기 때문에 기원전 6세기 경에 이르러서는 서지중해에서 가장 강력한 나라가 되었다. 기원전 5세기 경에는 아프리카 북부 영토가 이집트에 버금갔으며, 서부로 가기 위해서 시칠리아가 더욱 중요해졌다. 그들은 시칠리아의 서부 사르디니아, 코르시카, 이베리아 반도의 동남부 해안지역 및 북아프리카의 서반부 등지에까지 세력을 뻗치고 있었다. 또한 그들은 멀리 브리타니아에까지 진출하여 청동의 주원료인 주석을 가져왔고 스페인의 철을 동부로 실어 나르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아프리카 서해안에서는 상아를 채취하는 등 지중해에서 맹위를 떨쳤다. 에뚜루리아와 카르타고는 공조체제를 이루고 있었으며 에트루리아 령 카에르는 로마에서 불과 48km 떨어져 있다. 기원전 3세기 초에는 로마 인구의 세 배가 거주 하고 있었다.< 카르타고 유적 >(2) 로마로마는 기원전 265년에 이탈리아 반도 통일하고, 새로운 방어 전쟁(Defensive war) 필요했는데, 최강의 적은 카르타고였다.(3) 전쟁발단배경이탈리아의 정복사업이 진행됨에 따라 로마의 상품이 동맹시 및 식민시에 판로를 얻어, 로마는 상업 도시로서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때마침 일어난 남 이탈리아의 정복은 로마의 역사에 중대한 의의를 가져 왔다.그 하나는 헬레니즘 문화가 급속히 흘러 들어온 것이며, 다른 하나는 로마가 그리스인의 뒤를 이어 서지중해로 진출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서 나포한 카르타고 배를 모형으로 건조하여 군함 제조에 성공하였다. 그런데 항해 기술이나 뱃머리의 뾰족한 부분에 우는 금속철을 만드는데 있어 원래가 해군인 카르타고의 기술을 앞지를 수 없어 새로운 전법을 생각해낸다.Ironspike(까마귀)라도 불리는 것이 있는 사다리 장치를 만들어서, 적선이 접근하면 돛대에서 풀려난 갈고리가 적선 갑판으로 떨어지면서 고정되고 이때 로마군들이 전선으로 물밀듯 들어가는 것이다. 이러한 육전식의 기습 전법은 큰 효과를 거두어 기원전256년 로마는 시칠리아섬 남부에서 카르타고의 대함대를 격파하고, 북아프리카에 상륙한다. 로마의 대군이 카르타고를 포위하자, 카르타고는 강화를 제의했으나 로마가 너무나 지나친 조건을 내세워 강화는 결렬되고 말았다. 그러자 카르타고는 스파르타 출신의 전술가 크산팁포스를 채용하여 코끼리와 기병을 써서 로마군의 격파하였고, 후퇴하던 로마의 함대 300여척도 폭풍우를 만나 80여척만 돌아오게 되었다.이때 로마의 부유한 사람들이 재산을 털어 다시 200여척의 함대를 건조하였고, 이에 힘을 얻은 로마는 카르타고의 함대를 격파하고 항복을 받게 되었다.(3) 로마의 패배와 또 한번의 전쟁 준비BC 260년 시칠리아 북안의 해전에서 카르타고 해군에게 대승을 거두었으며, BC 256년 로마는 대함대를 거느리고 아프리카로 원정하였으나 크게 패하였다. 카르타고에 비해 군함이 뒤떨어지고, 수도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후 함대를 재건하고 전장은 다시 시칠리아 서부로 옮겨져 시칠리아 서단 아이가테스해전에서 승리하여 카르타고를 무조건 항복시켰다. 이 전쟁의 결과로 로마는 거액의 배상금을 얻는 한편, 카르타고 세력은 시칠리아에서 일소되어 시칠리아를 포기하고시칠리아는 로마의 속주(프로빈키아, 해외속주의 시작)가 되었다. 이어 로마는 사르데냐 ·코르시카를 제2의 속주로 하는 등 시칠리아를 장악하게 된다.(4) 로마의 승리 요인강한 육군과 시민과 연합 도시의 충성, 생존 의지, 행운 등이 로마의 승리요인이다.(5) 카르타고의 약점전쟁에 로마와의 전쟁에 들어갔다. 용병의 반란을 진압한 카르타고의 장군 하밀카르 바르카스는 이베리아반도의 경영에 착수하였고, 그의 사위 하스도르바르와 아들 한니발이 뒤를 이어 세력을 기른 후 한니발이 로마의 동맹시(同盟市) 사군툼을 공격, BC 218년 다시 로마와의 전쟁에 들어갔다. 복수의 칼을 갈던 카르타고의 명장 한니발은 보병 7만, 기병 1만 2천, 코끼리 37마리, 군선 30척을 이끌고 이탈리아 반도를 향해 진군을 시작했다. 에스파냐를 거쳐 피레네 산맥과 험준하기로 이름난 알프스를 넘는 대장정이었다.피레네 산맥 기슭에 도달하는 데만도 4개월이 걸렸다. 험준한 산을 보고 기가 질린 병사들 중 상당수가 도망쳐 버리고 남은 것은 보병 5 만, 기병 9천뿐이었다. 악전고투 끝에 산맥을 넘은 한니발 군은 론 강을 단숨에 넘어 알프스로 향했다. 하얗게 눈 덮인 알프스를 넘는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으나 한니발은 과감하고 용의주도하게 알프스를 넘었으며 로마와의 첫 싸움에서 특유의 지략으로 대승을 거두었다. 대군을 거느린 한니발은 남프랑스를 석권한 후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에 침입, 반도의 각지에서 로마군을 격파하였다(티키누스 전투). 특히 BC 216년 8월 2일 남이탈리아의 칸나전투에서는 용병(用兵)의 묘(妙)를 발휘한 한니발이 로마군을 포위 ·섬멸하였으나, 반도에 있는 로마의 동맹시는 로마에서 이반(離反)하지 않았다.2) 카르타고는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5세(世) 및 시칠리아의 시라쿠사와 동맹을 맺었으나, 로마는 이를 게릴라 전법으로 교묘히 저지하여 전선(戰線)은 교착상태에 빠졌다. 끝내 굽히지 않고 마침내 퇴세(退勢)를 만회한 로마군은 BC 206년 카르타고군의 거점인 이베리아반도를 완전히 평정한 대(大)스키피오(아프리카누스)의 인솔하에 북아프리카로 건너가 BC 202년 자마전투에서 한니발군을 격파, 두 번째의 전쟁도 로마군의 승리로 끝났다. 그 결과 카르타고는 해외영토를 모두 잃고 거액의 배상금을 지불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한편 한니발은 동방 시리아의 을 확대해 나간다.*******한니발*********하밀카르 바르카스의 아들이다. 제1차 포에니전쟁에 패전한 후 아버지를 따라 카르타고(아프리카 북부)에서 에스파냐로 갔으며, 아버지와 매형 하스드루발의 뒤를 이어 BC 221년 26세의 젊은 나이로 에스파냐 주둔군의 총지휘관이 되었다. 어려서부터 로마에 대한 복수심에 불탔으며, BC 219년 로마군 점령하의 에스파냐 도시 사군툼을 함락시키고, 이듬해 에브로강을 건너자, 로마로부터 선전포고를 받아 제2차 포에니전쟁(한니발전쟁)의 전단(戰端)이 열렸다. 그는 육로로 이탈리아 진공계획을 세우고 피레네산맥을 넘어 남프랑스를 석권하고, 다시 눈덮인 알프스를 넘어서 이탈리아로 침입, BC 217년 트라시메누스 호반(湖畔)의 전투를 비롯하여 각지에서 로마군을 격파하였다.특히 BC 216년 칸나이전투에서는 교묘한 용병술(用兵術)을 발휘하여 로마군을 철저하게 격파하였으나 전선은 점차 교착상태에 빠졌다. 점차 전세를 회복하기 시작한 로마군에 의하여 에스파냐로부터의 원군(援軍)도 격멸당하였으며, 로마의 장군 대(大)스키피오가 에스파냐를 정복하고 카르타고로 육박하였다. 한니발은 고국에 소환되었으며, BC 202년 자마전투에서 스키피오에게 대패함으로써 결국 제2차 포에니전쟁도 카르타고의 패배로 끝났다.그후 카르타고의 집정관(執政官)이 되어 로마에 대한 보복기회를 노렸으나, 정적(政敵)에 의해 시리아와의 통모(通謀)를 획책하고 있다는 통고가 로마로 보내졌기 때문에, BC 196년 그는 시리아로 피신하였다. 시리아의 안티오코스 3세와 함께 로마군과 싸웠으나, BC 190년 안티오코스군이 마그네시아에서 로마군에 패배하자, 그는 다시 소아시아의 비티니아로 피신하였으며, 로마가 그의 신병인도를 요구함에 이르자 자살하였다. 그는 알렉산드로스대왕, 피로스와 비견되는 고대사상 굴지의 전술가였다.*****하밀카르 바르카스 *****한니발의 아버지로 제1차 포에니전쟁 말기인 BC 247년 이후 시칠리아에 근거지를 두고 카르타고군을 지휘하여 이탈리아의 는 이름으로 속주가 되었다. 200년 이상에 걸친 전쟁의 범위가 서지중해 전역에 걸쳤을 뿐만 아니라 제2차 포에니전쟁 때의 카르타고와 동방 마케도니아의 동맹이 보여주듯이, 이 전쟁은 고대에 있어서 세계대전의 양상을 띠었다. 따라서 민족적 시련을 극복한 로마가 일대 도시국가에서 지중해 세계 전체에 걸친 세계제국으로 발전하는 전환점이 된 전쟁이라고 할 수 있다.그러나 로마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굴욕적인 강화 조건을 내걸어 결국 3차 전쟁에서 카르타고를 완전히 멸망시키고 전 시가를 불태워 버렸다. 전쟁에서 자금을 대주었던 로마의 귀족들은 엄청나게 넓은 땅의 주인이 되었고 몰락하는 농민의 토지와 속주의 토지를 사들여 라티푼디움을 경영하고 전쟁에서 잡아온 포로들을 노예로 삼아 경작시켰다. 몰락한 소규모 농민들은 농토를 떠나 로마로 몰려들고 이로써 공화정의 기반은 근본적으로 무너져 갔다(2) 전쟁 결과카르타고는 초토화된다. 거의 모두 죽이고 생존자는 노예로 팔아 넘겼다. 카르타고는 종말을 맞이하고 로마는 카르타고를 지도상에서 없애 버리는 등 로마의 잔인성을 볼 수 있다.*****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Publius Cornelius Scipio Africanus Major, BC 236 ~ BC 184고대 로마 정치가·장군으로 스키피오가(家)는 로마 최고 귀족의 하나인 코르넬리우스 가문에 속하며, 뛰어난 정치가를 많이 배출하였다.스키피오는 제 2 차포에니전쟁(BC 218∼BC 201)이 일어남과 함께 이탈리아에서 참전했으며, 칸나에에서 로마군의 대패배도 체험했다. 부친과 백부가 적의 근거지 에스파냐에서 싸웠으며, BC 212년 무렵 두 사람 모두 전사하자 그 뒤를 이어 20대 초반에 집정관(consul) 상당관(相當官)으로 에스파냐에 파견되었다.BC 209년에는 카르타고 노바(지금의 카르타헤나)를 공략했으며, BC 206년까지 카르타고 세력을 에스파냐에서 몰아내었다. 에스파냐 원주민의 지배층을 복속시키고 아프리카에도 건너가 누미디아의 시팍스·마시니사 두 왕을 자기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