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하는 말 - 당신은 면접을 보실 준비가 되셨습니까?아르바이트생의 면접을 보는 것은 매장을 책임지는 관리자로서 자주 행하게 되는 중요한 업무 중의 하나이다. 한 쪽 팔에 커다란 문신이 있는 사람, 오른쪽 눈썹과 목 뒤의 피어싱이 두드러져 보이는 사람, 불타오르는 오렌지 빛깔의 화려한 머리색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 죄송하지만 이분들의 개성은 내가 몸담고 있는, 남녀노소 내외국인 모두를 상대해야 하는 휴게음식점의 특성에는 어울리지 않는 부분들이다. 아르바이트를 하고 싶다고 요청한 면접자들을 거절할 때는 이 밖에도 다양한 요인들이 사유가 된다. 그렇지만 그 중에는 종종 면접자 자신들은 알지 못하는 작은 부분들이 이유가 되기도 한다. 면접을 보러 오면서 껌을 씹고 오는 사람, 맨발에 슬리퍼를 신은 사람, 심각할 정도로 다리를 떠는 사람, 혹은 말투가 불량스러운 사람. 이 모든 것들이 면접을 보는 당사자들에겐 대수롭지 않은 부분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입장을 바꿔 생각해 보아도 마찬가지이다. ‘내가 알고 있는 나’와 ‘다른 사람들이 평가하는 나’가 같을 수는 없다. 내가 무심코 행한 사소한 것들이 ‘나’를 만들어 내는 척도가 되기 때문이다. 눈빛 한번, 손짓 한번, 미소 한번. 그 작은 것에서부터 판가름되는 당신의 모든 것, 이것이 바로 디테일의 무서움이다. 이 '디테일'이라는 것이 개인과 기업, 국가의 경쟁력에 결정적이라는 사실이 대두되면서 화제가 되었던 책이 바로 ‘디테일의 힘’이라는 책이었다. 사람의 인상을 좌우할 뿐만 아니라 모든 사회 전반에 디테일이 빠져있는 부분이 없다. 때문에 말단 영업사원부터 시작하여 기업의 CEO와 컨설턴트로 성공한 저자가 이야기 하는 성공과 실패의 사례들은 개인적으로, 더 나아가 한 사회 살아가는데 있어 더 없이 좋은 교훈이 될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0.01초의 차이가 한 사람을 영웅으로 만들고 한 사람은 기억조차 나지 않게 만든다는 이건희 전 삼성그룹 회장의 말은 무한경쟁시대에 부각되고 있는 디테일의 중요성을 이야기 하는데 있어 전혀 부족함이 없다.작지만 강력한 디테일의 힘 - 모든 것은 디테일에서 시작된다.디테일의 힘을 읽으면서 가장 먼저 떠올랐던 것은 'Retail is Detail'의 모토 아래 강력한 가구 왕국으로 거듭난 스웨덴의 ‘IKEA'였다.1945년 소규모 통신판매업체인 IKEA는 경쟁기업보다 싼 가격으로 판매하는 방식으로 열악한 경기 속에서도 계속해서 매출을 증가시키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 결과 가구당 마진율은 감소하였지만 더 낮은 가격으로 많은 양을 판매함으로써 상쇄되었으며, 운송비 절감을 위하여 가구를 가능한 한 작고 납작하게 포장하는 전략을 취한다.스웨덴 같은 나라에서 집은 사람들의 일상적인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것이지 내보이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밝고 친근한 느낌의 재료와 똑바른 모습을 좋아하는 스웨덴 사람들의 Needs를 정확히 파악, 균형과 깔끔한 선의 디자인을 기반으로 한 기능중심 가구, 단순하고 현대적 디자인의 가구들을 제작하여 소비자에게 다가섰다.IKEA의 성장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카달로그인데, IKEA의 카탈로그는 가장 중요한 마케팅 도구이며 가장 효과적인 광고 수단이다. 25개 언어 33개국에서 배포되는 336쪽의 카탈로그는(2006년도 기준) IKEA의 판매 제품들 중 4000여개를 보여준다. IKEA 카탈로그가 다른 카탈로그와 다른 점 가운데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완전한, 진짜 사람이 살고 있는 듯 한 공간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책장에는 전자기타가 비스듬이 기대어 있고, 장난감들이 놓여있는, 하지만 각 공간의 인테리어는 일관적 분위기를 가지고 소비자에게 접근한다. )25개국의 언어로 4000여개의 제품을 보여주는 카탈로그.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는 IKEA 카달로그 속 사진들은 고객들의 구매 욕구를 충분히 불러일으킬 만하다. 아직 우리나라에는 공식적으로 입점해 있지 않지만 많은 사람들이 IKEA의 저렴하면서도 창의적인 제품들을 선호하고 있다. 외국에서 처음 창고형 IKEA 매장을 보았을 때의 놀라움은 아직도 생생하다. 실제 방과 같은 규모로 꾸며진 수 십 개의 컨셉룸은 매장에서 판매하는 물건들로만 이루어져 있으며, 조립식 가구 위주로 인건비를 줄여 엄청나게 저렴한 가격으로 가구를 구매할 수 있다. 특히 기억에 남는 것은 매장 중간 중간에 비치되어 있던 종이 줄자와 몽당연필이다. 가구를 구매하는 사람들의 편의를 위해 자체적으로 제작된 물품들을 보며 그 세심함에 감탄했던 기억이 난다. 물품을 다 고른 다음에는 직접 창고에 가 고른 것과 같은 물품을 찾아야 한다. 물품을 직접 고르고, 직접 찾고, 배송비를 아끼기 위해서는 직접 싣고 가기도 해야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IKEA에는 언제나 사람이 넘쳐난다.디테일의 힘의 저자인 왕중추는 개인의 지능과 체력에는 큰 차이가 나지 않으며, 기본적인 것은 누구나 다 갖추고 있다고 말한다. 결국 미묘하고 작은 차이에서 성공과 실패가 나뉜다는 것이다. IKEA의 사례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아무도 시도하지 않았던 것을 시도하는 것이 ‘돈’을 벌어다 준다. 세부적인 것을 얼마나 중시하는가, 하나하나를 얼마나 세심하게 관리하는가 하는 것에서 경쟁력이 결정되는 것이다. 구겨진 이력서 때문에 입사시험에서 떨어진 사람, 233년의 역사와 명성을 자랑하던 영국의 베어링스 은행이 파산에 이르게 된 것, 제품에서 발견된 작은 문제점을 외면하다가 중국 시장에서 도태되고 만 에릭슨 사, 한 끼의 저녁식사가 문제되어 그만 ‘제휴 불가’라는 통보를 받아야 했던 중국의 국유기업. 이 모두가 디테일을 소홀히 한 대가였다. 잠시만, 조금만 더 ‘조그만 것’에 눈을 돌린다면 아주 작은 결함과 부주의로 야기된 엄청난 피해를 줄일 수가 있는 것이다.
1. 기술혁신과 산업의 발달 (1)인쇄기술의 발전 - 당시 인쇄술은 ‘조판인쇄술(彫版印刷術)’ - 목판(木版)에 글자를 조각하는 인쇄- 몽계필담 - 심괄(1031 - 95) 판인(板印)된 서적은 당시대에는 아직 왕성하지 않았다. 풍도(馮道)가 처음으로 오경(五經)을 각인하고 나서 그 뒤의 전적(典籍)은 모두 판본이 되었다. - 초본(抄本) 위주의 시대에서 인쇄본의 시대로 : 많은 사람들이 동일한 서적을 입수하여 이용할 수 있는 시대가 됨으로써 당연히 문화 및 지식과 정보의 전달에 큰 혜택 - 송,원시대의 제지기술의 발달이 인쇄술 발전의 배경 - 출판의 주체 관각본(官刻本) : 중앙과 지방의 정부기관이 출판, 방각본(坊刻本) : 각지의 서방이 출판 ;이들에 의해 유학경전, 역대정사(正史),제자백가의 책이나 당송시대의 시문(時文),자서(字書) 등이 각인 각서출판(刻書出版) :개인이 출판 - 출판된 곳은 사천의 성도와 미산지역, 절강의 항주 임안부, 복건의 건안 그리고 수도인 하남의 개봉이 특히 유명, 이들 지역은 죽목등의 출판자료 입수가 용이하고 인구집중 지역에 가깝거나 교통이 편리한 지역. - 그 뒤 조판인쇄의 기술수준은 북송에서 남송에 이르는 사이 다시 진보. 이시기 각인,출판된 서적 은 송판宋版, 송본宋本이라 불려 현재까지 크게 중시. - 북송 중기 ‘활자인쇄술(活字印刷術)’의 고안 : 몽계필담(권18)에 인종경력연간에 민간인 필승이 활자를 제작했다는 사실과 그 활자 제작방법에 대해서 간략한 기록. (2) 화약 - 송대에는 화약기술이 군사기술에 도입되기 시작한 것이 중요 ; 북송의 인종경력 4년(1044)에 완성 된 군사백과전서인 무경총요에는 이미 많은 화기 예를 들어 화포 화약편전 등의 명칭이 열거되어 있다. - 화기의 제작은 무기제조와 더불어 전문관청에서 담당하여 병기를 제조하는 기술수준이 향상되었 고, 그 기술적인 기초로서 강철을 정련하는 기술도 진보되었음은 물론이다. - 화기제조 지식은 북송 말년 개봉공략을 통하여 금에 전해졌고 금에서 원으로, 원에서 아라비아 상 인 등을 통하여 서남아시아 각국에, 다시 서유럽으로 파급되어 갔다고 한다.
1. 서 론역사는 그 시간 속을 살아가는 인간들의 이야기라고 말한다. 이에 역사를 공부하면서 가장 중시해야 할 것은 내가 알아보고자 하는 그 시대 사람들의 생활과 모습, 생각들을 통틀어 살펴보는 것이다. 우리 역사의 시대구분론적 시각에서 중세사회에 해당되는 고려는 918년 건국된 뒤 1392년에 멸망할 때까지 475년의 세월을 이어가며 독특하고 다양한 문화와 전통을 만들었다. 역사를 위주로 공부한지 2년이라는 시간이 지나가지만, 아직까지는 모르는 것이 더 많다. 그저 게으름을 부끄러운 핑계로 삼아 내가 가지고 있는 고려에 대한 지식은 고등학교 국사시간에 배웠던 내용과 크게 달라진 것이 없었다. 따라서 고려시대에 대해 개괄적이면서도 다양하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모은 이번 서평 책이 고려에 대한 기초를 쌓는데 기본 받침이 되어 준 것 같다. 전체적인 책의 내용을 살펴보면 대학생의 수준에서 읽기에는 쉽고 간략하다는 느낌이 들 수도 있다. 책에 대한 내용을 알아보려 도서관 자료를 검색해 보았을 때 같은 책이 아동도서실에 꽂혀 있다는 사실에 조금 민망하기도 했다. 그러나 어찌됐든 딱딱한 역사를, 보다 쉽고 편하게 접할 수 있었다는 계기가 되었다는 만으로도 이번 서평과제에서 이 책은 나에게 그 의미가 크다.잘 알려지지 않았던 고려사를 특히 그 사회를 살아갔던 우리 조상들의 생각과 생활을 중심으로 살펴본다면, 지금의 우리 사회와도 비교해서 구체적인 흐름이 체계화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고려는 우리 역사 속에서 소외된 사회였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삼국시대는 일찍부터 찬란한 민족의 성장기였으며, 활기에 넘친 사회였고, 동시에 원시적인 소박성을 벗어난 찬란한 문화·예술의 발전기였기에 민족적 동경의 대상으로서 큰 관심과 연구의 과제가 되어 왔다. 또한 조선시대는 주로 비판적인 관점에서 일제의 식민지 지배라는 비극적결과를 초래한 직접적인 기원이 되는 시기로서 관심의 대상이 되어왔다. 그런데 고려시대는 위의 두 시대의 중간에서 동경의 대상도 비판의 대상도 고 있다. 이러한 행위는 인쇄술의 발달과 불경에 대한 관심과 연구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면서 가능할 수 있었다. 대장경판을 오늘날까지 상하지 않게 보존해 준 판고의 건축술도 뛰어난 것이다.불교가 가장 융성하고 발달하였던 것이 고려시대임에는 틀림이 없으나 우리나라의 대표 불교문화를 이야기하면서 고려시대를 떠올리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다. 이것은 통일신라가 이상화된 인체 묘사와 그 선으로 인해 후대 미술까지 창작의 모범이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고려의 불상이나 보살상은 통일신라와는 다른 시대정신과 미적 특징으로 그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다. 무엇보다 고려시대는 서민적이고 대형화된 ‘거대 불상의 시대’였다. 고려 전기 불상의 대형화는 관촉사석조보살상이 대표적이며, 이는 몸체를 여러 부분으로 나누어 조각한 뒤 차례로 올렸을 것으로 보인다. 또 다른 거대 석상으로 마애불이 있는데 이는 자연 암벽을 몸체로 사용하고 머리 부분은 별도의 돌로 만든 혼합형과, 머리까지 암벽에 새긴 완전한 마애불 두 종류가 있다. 고려시대 석불의 천개는 모자처럼 불상 위에 얹은 것으로 고려석불의 중요한 특징이다. 미의식보다 불상의 규모를 중시한 고려 불상은 충분히 중앙집권화 되지 않은 상태에서 중앙정부는 새로 일으켜 세운 불교국가의 위상과 저력을 과시하려는 의도에서, 지방 세력가는 부처님의 힘을 빌어 자신들의 기득권을 강화하려는 방편에서 경쟁적으로 더 큰 불상을 세웠던 것으로 보인다. 불상의 대형화는 석불상 뿐 아니라 좌상에서도 나타나고 그러한 불상들은 짙은 지방색을 띄기도 했다. 중 ? 후기에는 귀족적 미의식이 엿보이는 불상들이 나타나는데 철불 2호구와 금동대세지보살좌상등이 그러하다. 이 불상은 라마미술의 영향을 받은 듯, 색다른 조각으로 이국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이러한 고려불상의 특징들은 일관된 특징을 추출해 내기 어려운 각양각색의 불상에서 드러나듯이 ‘대형화와 다양화’ 되었다고 요약할 수 있다.불교에 깊은 신앙심을 가지고 계시는 어머니 덕분에 다른 종교보다 불교는 그리 낯설지 않침해 주지 않는다. 김부식이 정지상을 죽인 직접적인 이유는 정지상이 묘청의 난에 연루되었기 때문이다. 묘청의 일파에는 정지상이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었고, 그들의 비합리적인 사상체계는 김부식과 같은 유교관료들에게 받아들여지기 힘든 것이었다. 난의 진압을 맡았던 김부식은 총애를 받았던 정지상들에 의해 국왕이 정책을 다시 되돌리지 않을까 우려하여 반란군의 배후세력을 일소한다는 구실로 당시 개경에 있던 정지상을 즉결 처분하였고, 이에 정지상의 죽음이 억울한 죽음이 되면서 왜곡된 설이 전해지게 되었다. 김부식의 시가 말하고자 했던 문인의 사회적 책임감과 정치참여에 대한 자신감은 정치적 지도력을 상실한 당시의 문인들에게는 쉽게 이해되지 않았을 것이고, 그의 시는 단지 따분하고 재주 없는 사람의 글로밖에 여겨지지 않으면서 김부식이 자신의 문학적 부족함을 감추기 위해 천재시인을 죽였다는 전설이 출현하게 된 것이다.김부식이 활동했던 12세기 전반기는 고려사회 내부갈등이 심화되어 간 시기였고 이러한 상황 속에서 그는 삼국사기를 편찬했다. 이후 무인정변이 일어나고 몽고족이 세운 원나라의 간섭을 받게 되었고 이 무렵 일연이 삼국유사를 찬술하였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신라를 중심으로 삼국에 관한 일들을 기록했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모든 면에서 차이가 난다. 그렇지만 두 책은 서로 보완적이다. 1145년 김부식은 삼국사기 편찬을 주도하였는데, 책임자인 김부식의 의견이 크게 반영되었던 것은 사실이나 실제 자료수집, 분석, 서술에는 많은 이들이 참여하였다. 당시 임금이었던 인종과 김부식세력은 계속되는 사회변동과 정치변란에 대응하여 지배질서를 재정립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고 이에 삼국의 역사를 정리, 편찬하면서 역사 바로 세우기를 강조하였다. 삼국사기는 유교 정치이념을 바탕으로 국가를 다스리는 데는 인정을, 신하에게는 충절을, 자식에게는 효행을 강조하여 서술된 책이다. 이 삼국사기는 인간의 능력을 초월하여 일어나는 초자연적이고 신비한 것에 대해서는 가능한 서술을 피하고 있어 합리적이라는 평대단했지만, 지금은 그 기술이 점점 더 소홀히 전해지고 있지 않는 것 같아 안타깝다. 다른 나라에 명품으로 그 이름을 알려 대표적으로 국위선양에 앞장섰던 고려청자를 보면 우리 옛 선조들의 창조적이고 독창적인 감수성을 느낄 수가 있다. 이에 그것만으로도 우리 역사에 자부심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은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김부식과 정지상은 설화는 우리 역사 속에서 흔히 전해지고 있는 잘못된 설화를 바로 알 수 있게 해주었고,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너무나도 유명한 역사책이라 모를 수가 없는 이야기였지만 이번 기회에 한 번 더 확실히 그 개설적인 비교를 되새길 수 있어서 좋았다. 풍수지리 또한 지금에까지 사람들의 삶에 많은 영향을 주고 있는 문화풍습인데, 누구네 집에는 수맥이 흘러 터가 안 좋다던가, 어느 방향으로 된 집을 사야 일이 잘 풀린다던가 하는 이야기들은 주위에서 흔히 들어볼 수 있는 것들이다. 나도 어렸을 적에 그런 쪽에 지식이 있다는 친척분이 집에 오셔서는 철사 옷걸이를 풀어 휘어서 수맥을 짚어본다고 온 방으로 옮겨 다니셨던 것을 본 기억이 있다. 불교와 마찬가지로 이러한 모든 문화들은 그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과 연관 짓지 않고서는 생각해 볼 수가 없다. 이 모든 것들이 고려시대 사람들이 어떤 시도를 하고, 어떤 모습으로 삶을 이루어 갔는지를 알게 해주는 귀중한 자료이다.정말 그들은 어떻게 살았을까농업사회였던 고려시대는 왕이 친히 농사를 짓기도 하였다. 이 시대 백정은 당시 농민의 대표적 존재였다. 그러나 농업사회라 해도 고려 말에 이암이 원나라 농서인 농상집요를 발간하여 참고한 것을 빼면 전해지는 농서는 없다. 이 시대에는 이앙법이 있었는데, 이는 조선 전기까지 금지되어 일반적으로는 직파법으로 파종하였다. 그러나 지배층의 불법적인 수탈과 세금에 농민들은 적자를 면하기 어려웠다. 자신의 이름으로 된 땅을 갖는 것이 소원인 농민은 농지를 개간하였고 이는 농민에게 안정된 생활을 제공하고, 국가에게 더 많은 세금을 거둬줌으로 인해 일석이조였다. 산전과 진전과 더중앙과 지방에 술을 관장하는 관청을 설치하기도 하였다. 국가에서는 금주령을 내리기도 했는데, 이는 홍수나 가뭄 등의 자연재해로 곡식이 부족하거나, 나라에 대상이 있어 자숙해야 할 때에 내려졌다. 고려시대 가전체 소설인 국순전과 국선생전은 술을 모델로 삼은 것으로 이 시대의 술은 권력을 휘두르는 집권층과 사치스러운 귀족층의 전유물이 아니라 일반 백성들의 위안이자 벗이 되기도 했다.고려장에 관한 이야기는 누구나 한번쯤 들어봤을 것이다. 그러나 이 고려장에 얽힌 이야기는 우리나라에만 있는 것이 아니며 고려시대의 장례제도는 더더욱 아니다. 이는 고려시대가 불효죄를 엄격하게 처벌한 것과 어느 정도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고려사회에서는 매장과 화장이 사체 처리 방식으로 널리 이용되었다. 이 시기 지배층은 화장을 많이 했다고 하는데 이는 불교식 의례로 장례를 치르는 모습이다. 상제례 비용은 아들과 딸이 균등하게 부담하였는데 이는 균등상속의 고려시대 사회상을 반영한다. 서민의 경우에는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대체로 구덩이에 시신을 그대로 매장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 밖에 화장을 한 후에 재를 산이나 강물에 뿌리는 방법이 있었다. 국왕의 경우에는 대체로 매장하여 성대한 분묘를 만들었다. 묘지는 풍수지리설의 유행에 따라 그 위치를 정한 것으로 보인다. 고려 후기가 되면 지배층의 묘지 선정지는 전국으로 확대되어 가고, 합장과 부장도 본격적으로 등장하는데, 이 같은 변화는 고려 지배층이 후기로 갈수록 재지세력화 하는 경향을 보여주는 것으로 성리학적 예제 보급이 이에 영향을 미친 듯하다. 고려시대는 오복제도를 통해 친족의 대상에 따라 상복을 구분하였는데, 부모가 돌아가시면 3년 상을 시행하였다. 약식 3년 상이 허용된 오복제도는 사족을 배려하기 위한 것이었다. 고려인들은 국상에 대한 의식은 제정하지 않고 임시로 전례를 인용하여 장례를 치렀다. 고려시대는 사찰에서 상장례를 치렀는데 이 의식 속에는 인간존중의 정신이 새겨져 있었다.이번 장에는 특히 책의 제목대로 정말다.
시작하는 말그동안 제대로 일본사를 배워보지 못했던 나에게 '주신구라'는 조금 생소한 책이었다. 기억 속에서 사무라이라 하면 오래전부터 당연하게 일본의 전형적인 표상으로 굳어져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일상을 다룬 소재로 이루어진 책은, 특히 고전은 읽어본 적이 없었다. 이번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주신구라는 일본에서나 우리나라에서나 꽤나 유명한 고전이었다. ‘주신구라’가 어떤 것인지에 대한 자료를 조사하면서 이를 우리나라 고전인 춘향전과 비교분석하여 정의내린 것이 많음을 볼 수가 있었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춘향전처럼 일본 사람들도 TV, 드라마, 마당놀이, 연극, 소설 등을 통해 다양한 방식으로 주신구라를 즐긴다고 하였다. 변화해가는 사회 속에서도 명절이면 우리네 tv프로그램에서 고전영화를 되풀이 해주듯, ‘주신구라’도 여러 방면에서 매년 재해석되어진다고 한다. 책으로 편찬 된 주신구라는 일본 역사 속에서 매우 유명했던 '아코낭인 습격 사건'을 소설화 한 것이다. 춘향전과 주신구라가 오늘날에도 명작으로 손꼽히는 것은 춘향전에는 한국인의 정서가, 주신구라에는 일본인의 정서가 각각의 문화 속에서 잘 반영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사건은 분명 당 시대의 정치 현실이나 지배체제와 는 부합되지 않는 면을 지니고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이에 대한 해석은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는 문제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감한 소재를 다루고 있었던 가 발간된 이후부터 지금까지 계속해서 일본인의 사랑을 받는 것을 보면 이는 그만큼 이 작품이 일본인의 정서를 잘 대변해주고 있다는 얘기가 된다. 주신구라의 근간을 이루는 축은 주군의 복수를 이루고자 하는 칼의 문학적 측면이며, 무사들의 죽음을 그린 죽음의 문학, 무사들의 복수를 다루면서도 서민들이 공감할 수 있는 표현 양식으로 서민들이 참여할 틈을 제공하는 서민 문학적 측면이다. 책 속에는 진정한 무사 정신이 강조되어있고, 복수에 성공한 아코 의사들에 대한 숭배가 투영되어 있으면서, 동시에 서민들을 대상으로 한 만큼 서민들의 입장과 시각이 나오와 엔야 한간의 관계가 어떻게 전개되어 갈 것인가에 대한 복선을 드러내고 있다. 모로나오가 엔야의 부인인 가오요에게 흑심을 품은 것을 눈치 챈 모모노이가 가오요를 돌려보내고 상황을 마무리함으로 인해 모로나오는 모모노이에게 불쾌한 마음을 품고서는 참을 수 없는 모욕적인 말을 내뱉었다. 모모노이는 화가 치밀었으나 신전 앞인데다가 주군이 오신 자리라 참을 수 밖에 없었다.제 2 장은 모모노이의 저택을 배경으로 한다. 저택을 오랫동안 지켜온 가신인 혼조 유카쿠니가 등장하고, 그의 부인과 딸도 등장한다. 저택으로 돌아온 모모노이는 참을 수 없는 모욕에 모로나오를 죽이고 자신도 할복할 것이라는 계획을 혼조에게 털어놓는다. 자신을 경멸하느냐는 모모노이의 물음에 혼조는 “「주군의 말씀을 업신여기거나 하지 않는 저의 마음을 보여드리겠습니다.」하고는 주군 옆에 있던 작은 칼을 뽑아 들고는 서원 안에서 갈아 신는 짚신 한 짝을 들어 서둘러 칼을 갈았다. 그리고는 툇마루 끝의 소나무 가지를 휙 자르고 나서 재빨리 칼집에 넣는다. 「자, 주군님. 이런 식으로 단호히 베어버리십시오!」”(p27)라며 동의한다. 그러나 이는 표면적인 것이었을 뿐 혼조는 말을 타고 주군 몰래 모로나오를 만나러 간다.제 3 장은 다다요시의 저택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모로나오를 만나러 간 혼조는 그에게 자신의 주군이 보냈다며 뇌물을 건낸다. “돈의 힘으로 사람을 굴복시켜 주인의 목숨을 산 것이다. 주판알을 튕겨가며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일을 처리한 혼조의 충실함”(p34) 이라는 내용은 그 상황을 설명하며 사무라이 혼조의 충성심을 여지없이 드러내고 있다. 이 일로 모로나오는 모모노이에게 자신의 행동을 사과하지만, 이번에는 엔야 한간에게 듣기 거북한 말을 내뱉는다. 성미 급한 엔야 한간은 칼을 빼들고 모로나오를 죽이려 하지만 혼조가 막는 바람에 그를 죽이지 못하고 만다. 그 후 지체 높은 집사인 모로나오에게 칼로 상처를 입히고 무례를 범한 죄로 엔야 한간은 감금형의 하나인 폐문의 명을 받고 들것에 실려 간다지를 몰수당하고 할복을 명 받는다. 그러나 놀라는 주변 사람들과 달리 “엔야 한간은 동요하는 기색도 없이「분부 잘 알았습니다. 그럼, 이제부터는 두 분의 노고를 풀기 위하여 자, 마음 편히 한잔 드시지요」”(p51)라며 사자들에게 술을 권한다. 죽음을 초월한 무신의 모습이 잘 나타나 있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억울함을 가신인 오보시 유라노스케에게 남겨 복수해 줄 것을 부탁한 채 목숨을 다하였고, 주군을 잃은 한간의 가신들은 졸지에 로닌의 신세가 되고 만다. 유라노스케는 엔야 한간의 단도를 들고 “「이 칼끝에는 우리 주군의 피가 흘러내리고 있다. 주군의 원통한 혼이 깃들어 있는 9촌 5분, 이 칼로 원수 모로나오의 목을 베어 원한을 풀자!」”(p58)라며 복수를 다짐하였고, 다른 무사들 역시 그에게 동참할 것을 약속하였다.제 5 장에는 “”(p60)는 말처럼 엔야 한간의 복수를 위해 때를 기다리던 하야노 간페이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는 엔야 한간의 호위를 소홀히 하였다는 생각에 야마자키에서 복수를 준비하다가 옛 동료인 센자키 야고로를 만나 엔야 한간의 비석을 세우기 위한 공금 - 사실상은 복수를 위한 공금에 돈을 보태고 싶다는 의지를 표한다. 그러나 이 날 간페이의 장인이 돈을 노린 강도 사다쿠로에게 살해당하고 또한 간페이는 사다쿠로를 멧돼지로 착각하고 사냥총을 쏴서 죽여버린다. 그리고는 사다쿠로가 장인에게서 빼앗았던 돈뭉치를 주워 하늘의 은총이라 생각하고 집으로 돌아간다.제 6 장의 주된 이야기는 하야노 간페이의 할복이다. 사실상 간페이의 장인이 가지고 돌아오던 돈은 유곽에 간페이의 아내를 파는 댓가로 지불 된 돈이었다. 간페이의 장인은 “차라리 이 요이치가 사위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딸을 팔겠다. 다급해지면 사람을 해쳐서라도 돈을 취하는 것이 무사의 관습, 아내를 팔더라도 수치가 되지는 않을 거다. 게다가 주군을 위한 돈, 돈을 만들어주면 화를 내지는 않겠지”(p74)라며 간페이의 아내 오카루를 유곽에 넘긴다. 주군의 복수를 위해서는 아내를 파는 것도 의 이름을 올려주기로 한다.제 7 장의 배경은 기온의 유곽이다. 배신자인 구다유와 모로나오의 가신인 반나유가 유라노스케의 동향을 살피고 있다. 유라노스케는 주색에 빠져 방탕한 생활을 하기로 소문이 나 있었다. 옛 동료들까지 변해버린 그의 모습을 보고 의아해하지만 사실 그는 복수를 위해 연기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는 장남인 리키야를 통해 가오요로부터 서찰을 받고, 그 내용을 엿본 간페이의 아내 오카루를 유곽에서 빼내주기로 한다. 오카루의 오빠인 헤이에몬은 역시 “남편을 위해서나 주군을 위해서나 몸을 판 일은 잘했다. 훌륭하다, 잘했어”(p105)"라며 오카루의 행동을 칭찬하는 전형적 사무라이다. 그런 그는 유라노스케의 편지를 오카루가 읽었다는 말을 듣고는 여동생을 죽이려 하고, 남편까지 죽었다는 소리를 들은 오카루는 스스로 목숨을 끊고자 한다. 유라노스케는 이 오누이의 행동에 감복해 의심을 걷고는 주군의 복수전에 동참하도록 하며, 계획을 엿듣던 배신자인 구다유를 죽여버린다.제 8장에는 “세상에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는 것이 의리로다”(p111)라는 의미심장한 말이 나온다. 혼조의 부인인 도나세와 그의 딸 고나미가 유라노스케의 아들 리키야와의 혼인 문제를 위해 교토 야마시나로 그들을 만나러 가는 길이다. 고나미의 리키야에 대한 애정은 옛날부터 이제껏 변함이 없었다.제 9장의 배경은 유라노스케의 거처가 있는 야마시나이다. 눈 내린 아침 리키야는 아버지가 만든 눈을 보고 “눈이라는 것은 내릴 때에는 약한 바람에도 흩어지고 가벼운 것이지만, 이처럼 뭉쳐서 둥글게 해놓으면 산의 눈보라 속 바위에도 뒤지지 않는 큰 돌처럼 단단한 것입니다.”(p117)라며 47명의 사무라이들이 힘을 합치면 능히 일을 행할 수 있음을 이야기 한다. 이후 도나세와 고나미가 그들의 집에 도착하여 유라노스케의 아내 오이시에게 고나미와 리키야의 혼인을 성사시키자고 간청한다. 그러나 오이시는 주군 엔야 한간이 할복하게 된 것은 정직을 소중히 하는 마음에서 비롯되었으나, 혼조는 아첨을 통해 무사의 찔린다. 그러나 이는 혼조가 생각하던 바였을 것이다. 그는 그 자신이 리키아의 손에 죽으면서 원한을 풀고자 한 것이었다. 그는 죽기 직전 자신의 일로 인해 엔야 한간에게 화가 돌아간 것을 사죄하였다. 유라노스케와 리키야도 “주군의 원수를 같은 다음에 다른 주군을 섬기지 않고 사라진다는 마음을 담아 눈으로 만든 탑”(p131)을 보여주며 자신들의 생각을 전하였다. 혼조는 죽기 전 모로나오의 저택의 상세지도를 유라노스케에게 건내고 짦은 인연을 가진 이들은 마음만을 남겼다.제 10장에는 유라노스케를 돕는 아마가와야 기헤이라는 상인이 등장한다. 그는 유라노스케 일행을 돕기 위해 가정에까지 소홀한 모습을 보여준다. 기헤이의 의중을 떠보기 위해 사무라이들은 연극을 벌이지만, 그의 의리는 변하지 않는 것이었다. 집으로 쳐들어온 자객들 앞에서 자신의 흔들리지 않는 마음을 보라며 아마가와야는 아들 요시마쓰를 자신의 손으로 목 졸라 죽이려고까지 한다. “여러분은 주군의 은혜를 칼로 갚는 행복한 분들이십니다. 그러므로 목숨을 버리시는 것은 부러운 일이라 생각되옵니다”(p148)라며 아마가와야는 자신의 마음을 표했다. 이에 사무라이들은 아마가와야의 부인을 그의 곁에 있을 수 있도록 도와주고 함께 복수하고 싶다는 그의 도움에 대한 보답으로 와 로 암호를 정해 적지에 습격하기로 하였다.마지막 장인 제 11장은 유라노스케가 유흥에 빠져 있다는 것을 듣고 방심한 모로나오가 주연을 열고 있었다는 것으로 시작한다. 유라노스케 일행이 들이닥치는 소리에 모로나오 저택 주위의 니쓰키 하리마노카미가와 이시도 우마노죠가의 사람들이 무슨 일인지 의아해 하였다. 유라노스케는 주군의 원수를 갚기 위한 것이라 설명했고, 양가의 사람들은 그 소리를 듣고 “장한 일이로다. 누구라도 주군을 모시는 자의 마음은 당연히 이렇게 되어야 하는 법이다. 무언가 힘이 필요하다면 사양 말고 말하시오”(p.162)라며 그들의 소동을 묵인해 주었다. 교전 끝에 야자마 주타로가 모로나오를 생포하였고, 주군이 할복했던 그 칼로 모였다.
중세의 길드- 중세 도시를 기반으로 한 길드 성립에 대하여 -{{목 차Ⅰ. 머리말Ⅱ. 본 문1. 길드의 기원2. 중세의 길드 - 서설(序說)3. 중세도시의 경제구조4. 도시 발달과 길드의 성립1) 자치 도시와 상인 길드2)수공업 길드1 수공업 길드의 성립2 길드 문장(紋章)3 크래프트길드와 준프트투쟁5. 길드의 성격과 몰락Ⅲ. 맺음말{{Ⅰ. 머리말기원전 1000년경 무렵부터 중세사회는 어느 정도의 안정을 확보하게 되었다. 바이킹과 마자르족, 이슬람세력의 위협이 다소 가라앉고, 서서히 최소한의 평화와 질서가 유지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정치적 사태의 변화에 힘입어 농업이 발달하고, 농업생산의 증대에 의거하여 직접 식량생산에 종사하지 않아도 되는 잉여인구를 부양할 능력이 축적되기 시작했다. 도시는 이러한 조건에서 형성되기 시작했다. 물론 중세초기에도 고대 로마의 도시적 전통이 완전히 절멸된 것은 아니었다. 이탈리아에서는 로마의 도시문화 와 전통이 끈질기게 살아남아 비교적 이른 시기에 상업, 특히 지중해 무역으로 부를 축적하는 도시가 나타나게 되었다. 기본적으로 경제발전과 정치적 안정에 의거하여 유럽 전역에는 중세 전기부터 도처에 각양각색의 도시가 건립되었다. 이들 중세도시는 그 규모와 외형에서만이 아니라, 경제기반, 내부의 사회구조, 정치구조 그리고 무엇보다 도시 외부의 왕권, 영주와의 관계에서 다양한 차이를 보이고 있었다.{) http://bh.kyungpook.ac.kr/~leor/ma/matop09.htm11세기부터 13세기에 이르기까지 사회가 안정되는 시기를 기점으로 활발한 상업 활동이 꽃피기 시작하였다.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하는 지중해 무역은 물론, 플랑드르를 중심으로 새로운 모직물 무역이 점차 내륙에 전파되어 전 유럽에 경제적 활기가 감돌게 되었다. 중세도시는 바로 이 상업 부흥의 흐름을 타고 상공업의 중심지로서 생겨났다.대체로 중세 초기의 교회도시나 성곽도시는 자연적 교통의 중심에 위치한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그곳에 각지의 상인들이 모여들기 시작하였다수도 콘스탄티노플(지금의 이스탄불)에서 그 존재가 뚜렷했다. 900년에 비잔틴 황제 레오 6세의 명에 따라 작성된 듯 한 정부 간행물인 유명한 〈행정장관의 책 Book of the Prefect〉은 길드의 구체적인 조직에 관해 자세히 기술하고 있는데, 그 주된 목적은 콘스탄티노플 시내의 모든 수공업과 상업을 특히 자금 조달과 징세 목적으로 엄격히 통제하려는 데 있었다. 일부 역사가들은 중세 유럽의 길드가 비잔틴 제국의 '콜레기아'에서 유래했다고 주장했지만, 이 상이한 단체들 사이에 직접적인 관계가 정립된 적은 전혀 없으며, 중세 길드의 기원은 암흑시대로부터 벗어날 당시의 서유럽과 북유럽에서 경제기구들이 변화해간 과정에서 찾아볼 수가 있다.중세 유럽의 봉건사회가 성립되어가는 과정에서, 지연적 요소 보다는 혈연적 요소가 짙은 공동체로서 중세도시가 성립, 발전했다. 그 공동체의 공권력인 도시당국이 봉건영주로부터 자치 권력을 서서히 획득해가는 한편, 상인이나 수공업자가 스스로의 가부장적 가정경영(家政經營)을 물심양면에서 지킬 목적으로, 우애적 상호부조단체를 자발적으로 결성했던 것이 길드제이다. 고대의 노동과 중세 길드의 노동 사이에는 많은 차이점이 있다. 고대의 노동은 노예제도에 의지한다. 노예제도는 주인의 편의를 위한 것이고, 노예는 관리해야 하고 부양해야 하는 재산이었다. 길드가 형성되기 이전에 중세의 노동은 농노 제도가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중세의 농노는 기존의 노동조건보다 더욱 큰 어려움 속에서 일을 해야 했다. 반면에 상공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활동의 본성상 봉건적 지배로부터의 해방, 즉 자치권을 원했다. 그들은 마침내 길드라는 조직을 형성하기에 이른다.{) 서희주, 「윌리엄 모리스의 미적 사회주의」, 영남대 대학원, 2005, p.35길드 조직 이전에 중세에서는 일찍이 공동의 이해관계를 가진 상인들과 생산자들 사이에 단결이 있었다. 이것이 길드라는 조직을 형성하게 되는 토대가 된다.{) 13세기부터 길드는 도시 생활의 대부분에 연수를 겪은 뒤 직공이 되었다. 직공은 몇 년 동안 장인 밑에서 일한 뒤 다른 장인 밑에서 수업하고 장인 시험인 Masterpiece를 만들어 합격하면 장인이 되었다.3. 중세도시의 경제구조{중세도시의 市場 - 복원상상도http://bh.kyungpook.ac.kr/~leor/ma/B09/04stadtmarkt.jpg봉건경제는 자연경제에 입각하고 있었지만, 완전한 자급자족이란 불가능하였기 때문에 극소수이기는 하나 화폐경제가 존재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고대 문명의 유산으로 상업이나 화폐를 사용할 수 있게 된 것은 직접적 생산자인 농민들이 모든 물자를 그들 스스로 생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철, 소금, 어류(魚類), 염료 등은 교환에 의하지 않고는 입수할 수 없었다.또 촌락에는 마을을 순회하는 수공업자가 있었고, 영주(領主)의 주변에는 전문 수공업자들이 있었다.11세기에 이르자 유럽적 규모로서의 원격지상업의 발달이 일어나 유럽 각지에 도시가 발생하고, 상인 및 수공업자에 의한 상인 길드(Merchant gild)와, 한자(Hansa)가 형성된다. H. 피렌느에 의하면, 유럽의 상업 활동은 서(西) 로마제국의 멸망 후 사회적 불안이 수세기에 걸쳐 경과하면서 고대사회에서 계승한 상업 활동은 침체상태에 빠지지만, 10 11세기에 이르러 중세 봉건사회가 확립되고 안정이 되어감에 따라 생산력이 확대되고, 원격지 상업도 활발하게 회복되어 경제 르네상스(la renaissance economique)가 일어나게 된다(H. 피렌느의 『유럽 세계의 탄생』). '상업의 부활'은 지중해 연안과 북해(北海) 및 발트해(海) 연안을 2대 중심지(二大 中心地)로 하는 해상상업의 발달에서 시작되었다. 지중해 상업은 십자군 원정과도 관계되어 13 14세기 초에는 눈에 띄게 번영하였다. 베니스, 제노아, 피사 등 이탈리아의 모든 도시의 상인은 알렉산드리아, 트리폴리 등 테반트 지방에서 유럽에, 동양에서 생산되는 '동양물산'(東洋物産) - 향료, 사프란(Saffraan), 염료, 건조 과실,으로 하는 주시(週市;market)가 열렸고 이때 도시 영주는 통행세(toll)등의 명목으로 수입을 취하고 있었다. 도시는 도시 영주의 장원에 해당하는 일부이고, 도시 주민은 부역을 의무로 하는 농노나 자유민, 수공업자, 상인 등 법적 신분과는 달리 여러 계층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다만 도시가 발전하고 상인 길드의 힘이 증대하기 시작하자 도시 주민들은 영주의 성가신 지배로부터 벗어나 자치권을 요구하게 되는 코뮨운동(commune movement)이 일어났다. 폭동을 동반한 격심한 코뮨운동의 결과 도시가 영주로부터 자치권을 획득하면 그 도시는 자치도시로 되었다. 이 투쟁에 의해서 도시 주민은 자유민, 비 자유민이라는 종래의 신분과는 달리 도시 공동체를 형성하는 보다 통일적인 시민(burgess, Burger, bourgeois)으로 되었다. 이처럼 유럽에서의 길드의 성립은 고질화된 사회적 탈구(脫臼)와 농업의 후진성을 특징으로 한 암흑시대의 뒤를 이어 10~11세기에 도시들이 생겨나고 성장함으로써만 가능할 수 있었다. 이때까지의 상인들은 시장에서 시장으로 또는 마을에서 마을로 직접 돌아다니는 행상인에 지나지 않았다. 이들은 장사하러 돌아다닐 때 산적들이나 봉건 영주들의 착취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그들끼리 단결하는 경향이 있었다.점차 상인들은 특정 도시를 생활터전 겸 영업활동의 거점으로 삼아 활동 범위를 확대하고 상품 운송 같은 작업은 다른 사람들에게 위임하게 되었다. 상인들의 조합은 곧 빈틈없이 조직화되었고 시정부의 인가를 받아 합법화되었다. 이들 상인 길드는 장거리 교역과 시내 거주민들의 필요에 부응하는 영업활동에 있어서 회원들의 상업을 규제하고 보호하는 일에 깊이 관여했다. 상인 길드를 중심으로 한 자치 도시는 시민이 공동체로 하여 재판권 및 징세권(徵稅權)을 획득하고, 도시법이 지배하는 독자의 법 영역을 형성하고 시민에 의해서 시참사회(市參事會)를 선발하여 외부의 권력으로부터 자치 도시를 보호하기 위한 성벽을 구축하고, 시민에 의한 민병조직(民兵組織)을적으로 증진하기 위해 단결하기가 쉬웠다. 수공업자들은 그들의 전문 직종을 관리하고 품질 기준을 설정하는 등의 기본적인 규정에 쉽게 합의를 보았다. 이런 식으로 최초의 수공업 길드가 결성되었다. 수공업 길드와 상인 길드는 흔히 특정 산업의 서로 다른 분야들을 지배했다. 예를 들어 양털가공을 하는 마을이나 도시에서 상인 길드는 원모의 구입과 가공 섬유의 생산 판매를 지배하는 한편 수공업 길드는 양모의 소모(梳毛) 염색 방직 등 생산과정을 지배했다.중세 수공업 길드의 내부 조직은 문서들을 통해 잘 알려져 있으며, 유럽의 어디서나 대체로 비슷했다. 길드 구성원 전체회의는 몇 개의 입법권을 보유했지만, 실제로 길드의 정책 통제권은 소수의 임원 및 자문(또는 보좌)위원회가 장악했다. 길드는 도제제도를 기초로 하여 위계질서를 극도로 중시하는 집단이 되어갔다.이 위계제도에서 길드의 회원들은 장인(匠人) 직인(職人) 도제로 나뉘었다. 장인은 도구를 소유하여 직인이나 도제를 고용해서 그의 직장(work shop)에서 독립적으로 소규모 수공업 경영을 운영하는데, 소비자의 주문에 따라 제품을 제조하고 판매하였다 - (주문생산, 고객생산). 직인은 고용주의 집에 입주하거나 혹은 가족이 있는 경우에는 주인 밑에서 일하면서 번 돈을 저축하여 길드의 정해진 일정한 조건을 만족시키는 경우에는 주인의 주(株;seat)를 취득하여 주인이 되었다. 도제는 주인과 계약에 의해서 일정기간 - 예를 들면 런던에서는 당초 직종에 따라 2 15년 등 다양하였지만 후에는 일률적으로 7년간으로 고정되었다 - 고용주의 집에 입주하여 연봉이나 계봉을 받고 주인으로부터 기술을 전수받아 직인이 되었다. 장인은 공인 된 실력으로 자기의 공장을 경영하며 도제를 거느리는 기술자였으며, 도제는 장인의 집에 묵으며 그의 직업의 제반 요소에 관해 교육을 받는 10대 또는 사춘기의 소년들이었다. 도제는 숙식 의복 교육을 제공받는 대가로 장인을 위해 무보수로 일했다.5년 내지 9년의 정해진 수습기간을 마치면 도제는 직인, 즉 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