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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침묵의봄
    살충제의 남용을 넘어서 인간의 탐욕의 억제로- ‘침묵의 봄’을 읽고 나서 -‘침묵의 봄’은 어떤 책인가?이 책은 살충제의 환경 파괴 위험을 지적한 환경 분야의 고전으로 1962년 발간과 함께 엄청난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고 한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무분별한 살충제 사용으로 파괴되는 야생 생물계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공개했다.“전에는 아침이면, 울새, 검정지빠귀, 산비둘기, 굴뚝새를 비롯한 여러 가지 새들의 합창이 울려 퍼지곤 했는데, 이제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들판과 숲과 습지에 오직 침묵만이 감돌았다.”이 책의 제목 ‘침묵의 봄 (Silent Spring)’은 이처럼 무분별한 살충제 사용으로 인해 파괴된 생태계의 모습을 나타내는 말로서, 모든 것이 파괴되어 고요한 상태를 나타내는 말이다.내용을 간단히 요약한다면, ‘유독성 살충제 같은 화학물질이 생태계 순환고리에 끼치는 막대한 악영향’이 될 것이다. 좀 더 자세히 설명한다면, ‘해충’이라고 불리는 곤충,잡초,설치류와 다른 유기체들을 없애기 위해 개발된 화학물질이 그들을 없애기는커녕 오히려, 생태고리를 통해서 각종 다른 유기체를 파괴하고 궁극적으로 우리 몸에 축적되어 인류 자체의 파멸까지 이르게 한다는 것이 저자가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또한, 강한 살충제는 해충들의 내성을 강하게 하고, 그것은 결국 더 강한 살충제를 요구하는 악순환은 궁극적으로 인간을 위협한다는 내용도 있다. 이렇게 농약과 살충제와 제초제를 남용하는 그 당시의 상황 속에서 저자는 여러 가지 사례들을 통해 그 위험성을 지적하고 있다. 그러면서 지구에서 살아가는 생물이 모르는 사이 오염되어서 서서히 죽어가는 현실을 고발하는 것이다.화학물질은 숲속에 사는 생물들의 공생관계를 완전히 교란시킬 뿐이며 해충에 의한 재앙은 점점 더 짧은 주기로 되풀이된다. ----- 우리에게 남아있는 최후의 자연 생태계를 위험에 빠뜨릴 수 잇는 이런 부자연스러운 기만은 당장 중지되어야 한다.저자는 현실고발에 그치지 않고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마지막 장에서 살충제 대신에 좀 더 친환경적인 생물학적 곤충방제법을 사용할 것을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다. 예를 들어서, 보이지 않는 미생물을 이용하는 방법, 천적으로 이용하는 방법, 독물, 유인제, 기피제, 유전자 조작을 통한 생식능력의 절멸 등이 바로 그것이다. 지금으로서는 초등학교 교과서에도 나오는 내용이지만, 이 당시에는 매우 혁신적인 내용이었고, 반발도 심했다고 한다.‘침묵의 봄’을 넘어서레이첼 카슨의 ‘침묵의 봄’은 출간당시 다원의 ‘진화론’ 만큼 혁신적이어서 엄청난 공격을 받아야 했다고 한다. 그러나,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제는 이미 보편화되어 상식에 속하는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유기농 야채가 훨씬 비싼 값에 팔리고, 유전자변형식품에 대한 논란이 뜨거운 지금으로서는 이 책의 내용은 말 그대로 ‘고전’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이미 알고 있는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살충제가 인체의 변이와 발암의 원인이 된다는 저자의 분석은 아직도 등골이 서늘하다. 즉, 우리는 이러한 위험에 대해서 우리가 어느 정도까지 안전한지 확신할 수 없는, 다시 말해, 이 책의 내용이 아직 유효한 상황에 아직 머물러 있는 것이다.게다가, 현재 저자가 지적한 살충제의 위험은 이미 많이 알려져서 사용이 금지되거나 혹은 과거보다는 친환경적인 형태로 변화했지만, 아직도, 수많은 살충제와 제초제 등이 우리의 주변에서 뿌려지고 있다. 그리고, 그에 대한 해결책으로 나온 것 또한 그 어느 것도 완전한 것이 없다. 심지어, 이 책에서 저자가 제시한 많은 해결책도 궁극적으로는 살충제의 위험보다는 덜 즉각적이고, 더 알아보기 어렵지만, 인간에게 위협을 끼칠 수 있는 것이라는 연구결과가 발표되고 있지 않은가? 예를 들어, 천적을 이용한 방법은 다른 종류의 생물이 생태계에 갑자기 침입함으로써 생태계의 교란을 일으킬 수 있고, 유전자 변형을 통해 생식을 억제하는 방식은 좀 더 질이 나쁜 해충을 발생시킬 위험도 있다.그러면 궁극적인 해결책은 무엇인가?결국, ‘침묵의 봄’을 막는 방법은 환경문제의 근원을 해결하는 방식 밖에는 없다. 그러면, 왜 환경문제가 발생하는가? 이 책 제 2장에는 그에 대한 명쾌한 설명이 제시되어있다.지구 생명의 역사는 생명체와 그 환경의 상호작용의 역사라고 말할 수 있다. 넓은 의미로, 지구에 서식하는 동식물의 물리적 형태와 특성은 환경에 의해 규정된다. 지구 탄생 이후 전체적인 시간을 고려할 때 그 반대 영향, 즉 생물들의 주변 환경에 미치는 영향은 상대적으로 미미하다. 20세기에 들어서 오직 단 하나의 생물종(種), 즉 인간만이 자신이 속한 세계의 본성을 변화시킬 수 있는 놀라운 위력을 획득했다.즉, 환경문제의 근원은 인간의 탐욕에서 나온다는 점을 잘 지적해 준 것이다. 저자가 지적한 대로 대규모의 밀밭이 없으며, 대량의 메뚜기 떼가 있을 이유가 없다. 소위 문명화라는 인간의 탐욕 때문에 자초한 문제로 지금 인간이 고통을 받고 있는 것이다. 저자가 초기에 지적한 대로 이런 것은 자연의 질서를 깨뜨리는 것이고 어떤 식으로든 인간은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초기의 살충제가 그러했듯이 눈에 보이지 않을 따름이고 우리가 모를 따름이지 인간의 이기심에 대해서 자연은 분명히 대가의 지불을 요구할 것이다. 따라서, 해결책은 우리 인류의 탐욕을 좀 더 줄이는 것이 최종적인 해결방안이 될 것이다.4. 그러면 우리는 원시상태로 되돌아가야 하는가그러면, 우리는 제초제나 살충제 등 인간이 만들어낸 각종 화학물질을 포기하고 원시 상태로 돌아가야만 하는가? 불행히도 그럴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렇게 하기에는 사람들의 겪을 고통이 너무나 크다. 따라서 그러한 방안의 현실성은 떨어질 수 밖에 없다. 현실적으로 어느 정도의 타협이 필요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타협의 여지는 충분히 있다. 인류의 삼분의 일이 굶어죽고 있지만, 인류의 10%는 비만으로 고통 받고 있다. 지금과 같은 속도로 계속 생산한다면, 2020년쯤 에는 인류는 지금보다 40배나 더 많은 식량을 생산해낼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과연 그럴 필요가 있을까? 제초제나 살충제 같은 것을 조금 덜 쓰고, 조금 덜 생산해서, 좀 더 효율적으로 배분한다면, 인류는 자연과 잘 공생해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식이라면, 우리가 그 동안 쌓아왔던 것을 버리지 않고도 이 문제를 잘 해결해 나갈 수 있는 방식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 해결책 이 실제로 집행되기 위해서는 우리 인류의 근본적인 자세의 변화가 필요하다. 즉,이 해결책은 매우 간단해 보이지만, 실제적으로 실행되기 위해서는 약간의 의지가 필요하다. 그래서 이 해결책이 이상적으로 보일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저자가 지적한 살충제가 불러올 아주 무서운 해악을 피하면서도 원시상태로 돌아가는 것보다는 쉬운 일이 될 것이다. 이런 식의 타협의 어느 정도까지 이루어져야 하는지는 더 많은 논의가 필요한 사항일 것이다.5. 결국 중요한 것은 우리의 자세그러나, 어떤 식으로든, 어느 선까지의 타협이든,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의 자세일 것이다.“자연은 정복하고 이용해야 할 대상 아니냐”는 기자의 질문에 대해 이 책의 저자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고 한다.“미생물이든 인간이든 모든 생명체는 지구에서 생존할 가치와 권리가 있습니다. 누구라도 힘으로 이것을 밀어내면 안됩니다. 인간이 자연을 상대로 전쟁을 벌인다면 자연은 언젠가 인간을 상대로 더 참혹한 전쟁을 벌일 겁니다.”저자가 지적한 것처럼 자연을 정복 혹은 통제의 대상으로 바라보고 자연이 인간의 편의를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생물학과 철학의 네안데르탈 시대에 태어난 오만한 표현이다. 그런 식의 사고 방식은 문명으로 위장하고 있지만, 사실상 자신의 무지함과 원시적 행동 양식을 드러내는 일일 뿐이다. 그러한 철학을 바탕으로 소위 현대적이라는 무시무시하고 끔찍한 무기인 과학을 휘두른다면 그것은 그것의 목적 대상인 해충을 넘어서, 인간 나아가서는 지구 전체를 겨누게 될 것이다. 생태계는 한편으로는 너무나 연약해 쉽게 파괴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튼튼해서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역습해와 자신의 당한 것에 대해 몇 천 배로 보복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단독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계라는 거대한 네트워크의 넓은 그물 한 가운데 있기 때문이다.결국, 최종적인 대안은 인간이 오만을 버리고 자연을 섬기는 자세로 매사에 조심하며, 자연과 공존 공생하는 길 이외에는 대안이 없다고 할 수 있다. 결국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바도 그것일 것이다.
    독후감/창작| 2010.02.03| 5페이지| 2,000원| 조회(4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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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Ⅰ.들어가면서`라인강의 기적'이란 경제부흥기를 거친 독일의 청년 영화는 성장의 뒤켠에 엉킨 부르주아적 이기주의와 냉전의식, 나치즘이란 원죄에 짓눌린 독일인들의 열등감과 패배감, 나치청산 구호에도 불구하고 남아있는 편협한 인종주의 따위와의 치열한 몸싸움의 흔적이기도 하다.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의 는 외국인 노동자와 50대 독일여자의 사랑을 공격하는 독일인 자신들의 음험한 인종주의적 편견을 놀랍도록 적나라하게, 그리고 아름답고 불안하게 그려냈다.Ⅱ.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이 영화는 다음과 같은 경구로 시작한다. “행복은 늘 달콤한 것은 아니다.” 신분과 나이차이가 나는 두 남녀가 우연히 만나게 되고 주변의 냉대와 어려움 속에서도 사랑을 꽃피우고 결국 주변사람들도 그들의 사랑을 이해하게 되고 그래서 행복하게 결말을 맞는다. 이것은 전형적이고 상투적인 멜로 드라마의 서사구조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그런 구조를 철저히 따르면서도 왠지 비틀려 있어서 결코 다른 전형적인 멜러영화처럼 기분 좋게 보고 있을 수는 없다.1) 내용분석중년의 과부 에미(브리지테 미라)는 신비한 아랍음악에 끌려 매일 지나치던 한 술집에 들어선다. 이곳은 아랍인들이 눈총을 받지 않고 드나들 수 있는 몇 안 되는 술집이다. 그러하기에 독일사람이 이곳에 들어올 일이 없고 또한 그러하기에 에미가 들어오자, 바텐더가 쌀쌀하게 주문을 받을 때까지 그 곳에 있는 사람들은 마치 마네킹처럼 어떠한 미동도 하지않고 그녀의 얼굴을 쳐다본다. 첫 장면서부터 그들의 사랑이 순조롭지 않을 것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모로코 출신 청년 알리(앨 헤디 벤 살렘)가 에미에게 춤을 청하고, 알리는 외로움에 지친 에미의 노골적인 유혹을 받고 하룻밤을 같이 보내게 된다. 다음날 아침 에미는 침대에서 뛰쳐나가며 끊임없이 “내가? 내가?” 라고 외친다. 아랍인과 같이 잤다는 사실이 부끄러워서 그러는 것일까? ‘왜 그러냐?’ 는 알리의 물음에 에미는 자신의 나이에도 사랑을 할 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워서 그렇다고 말을 한다. 이들이 출근하려고 서로 해어지려할 때 종소리가 울리는데 이것은 아름답기보다는 날카롭게 그리고 파국을 암시하는 것처럼 들린다.에미는 알리와의 사랑에 대해 주변사람들한테 이야기 해보지만 주변의 냉대만 확인할 뿐이다. 딸과 사위는 비웃고 그들의 동료는 외국인과 결혼하는 여자를 창녀로 몬다. 그리고 에미의 이웃 역시 다른 사람과 다를 것 없이 냉정하긴 마찬가지이다. 이들은 결국 결혼에 이르게 되지만 주변의 시선은 여전히 쌀쌀하기만 하다. 결혼을 알리자, 방문한 에미의 아들들은 TV를 부수고 자기 엄마를 창녀라 외치는가 하면 딸은 돼지우리 같은 집을 떠나자며 아랍인과 결합한 엄마를 질책한다. 에미는 알리에게 독일어를 더 배워 오라며 물건을 팔지 않는 식료품 상점 주인과 다투고 같은 건물에 사는 이웃은 연일 두 사람을 구경하며 수군거리며 항상 꼬투리를 잡는다. 일터에서 만나는 동료도 마찬가지다. 알리와 결혼한 사실이 알려지자 에미는 일터에서 동료들에게 소외받는다. 고향에서 불리는 자신의 자랑스러운 긴 이름보다 알리(검은 피부의 노동자를 총칭하는 말)로 불려진 그의 말처럼 ?독일인은 주인이고 아랍인은 개인 것?이다.주변의 차가운 시선에 지친 두 사람은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싶어 여행을 떠난다. 하지만 여행에서도 마찬가지로 어려움을 겪는다. 파스텔톤의 푸른 숲속의 노란테이불이 가득있는 아름다운 곳에 그 들은 나란히 손을 잡고 앉아 있지만 이런 아름다운 풍경과는 대조적으로 그 곳에는 그들뿐이고 다른 사람들은 그들을 바깥에서 차갑게 응시하고 있다. 결국 에미는 울음을 터뜨린다.그런데 이들이 여행에서 돌아오자 상황은 신기하게 변해있다 주변사람들이 친절해진 것이다 역시 사랑의 힘은 위대한 것이어서 주변사람들을 감동시킨 것일까? 지하실을 빌리기 위해서 친절해진 이웃사람, 임금을 올려 받기 위해서 에미가 필요했던 직장동료, 자식을 봐달라고 하기위해 달라진 아들, 모두들 자신의 이익을 위해 갑자기 그들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구역질나는 자본주의가 만들어 놓은 사람들의 속물근성이지만 사랑을 위해서 필요한 조건은 어느덧 만족이 된 것 같다.하지만 문제는 이번에 그들 사이에서 생긴다. 에미가 고통스러워했던 인종주의의 병균들에 에미가 모르는 사이 어느덧 에미도 이미 감염이 되어있던 것이다. 이웃들의 태도가 달라진 후 에미는 이제는 피해자에서 가해자가 되어버린다. 잔인한 일이지만 에미 역시 그러한 것들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나보다. 자신의 요리솜씨를 자랑하던 에미는 쿠스쿠스를 먹고 싶다는 알리의 청을 독일 사람은 그런 것을 안 먹는다며 요리해주기를 거절 한다 그리고 자신이 그들의 동료들에게 당했던 것처럼 유고슬라비아 동료를 자신의 이익을 위해 다른 동료들과 함께 소외시킨다.(유고 동료가 소외되는 장면이 직장동료들이 에미를 소외시킬 때와 장면이 똑같은 구도, 위치를 가진다). 또한 그녀는 집에 데려온 동료들 앞에서 ?(다른 아랍 남자와) 이 남자는 달라요?라며 남편의 근육 자랑을 하고 또한 동료들에게 그러한 그의 근육을 만져보게 한다. 이 장면에서는 에미의 사랑이 혹시 알리의 젊은 육체 때문이 아니었나라는, 사랑의 순수성조차 의심하게 하는 행동을 한다. 에미도 결국 그들의 이웃과 다들 것이 없었던 것이 아닐까? 아마도 감독은 이러한 장면들을 통해서 인종의 차별이라는 편견이 얼마나 뿌리깊게 사람들 사이에 박혀 있는지 보여주고 싶었던 같다. 정신은 결코 체제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으므로 …….쿠스쿠스를 먹기 위해 찾아간 카페 여주인집에서 알리는 그 여자와 외도를 하게 되고 집에 들어가지 않는다. 에미는 한없이 울면서 알리의 직장을 찾아가지만 알리의 직장동료들에게 나이로 인해 조롱을 받는다. 알리가 인종 때문에 조롱받았던 것처럼……. 결국 알리는 집으로 들어가지 않고 도박에 빠진다. 그러는 자신이 싫은지 알리도 화장실에서 거울을 보면서 뺨을 친다. 에미가 카페에 찾아오고 둘은 춤을 추면서 (처음에 그랬던 것처럼) 서로의 사랑을 확인한다. 그러다가 갑자기 알리는 에미의 사랑의 고백을 듣고 쓰러진다. 의사의 말에 따르자면 병명은 이민 노동자들이 곧잘 걸리는 ‘위궤양’ 이다. 여기서 감독은 다시 한번 사회의 편견과 억압이 개인에게 얼마나 큰 타격을 주는지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동시에 또 한 편으로는 앞으로 역시 이들의 삶이 순탄치 않을 것을 암시한다. 이미 불안은 영혼을 잠식해 버린 것 같다.2)심층분석이 영화는 일상의 구석구석에 배어든 나치즘의 폐해와 자본주의의 야만성, 사회의 폐쇄성, 이기주의 따위를 고발한다.㉠일상의 구석구석에 배어든 나치즘결혼식을 마치고 에미는 알리를 평소에 가고 싶었다던 식당에 데려간다. 에미가 평소에 거기 가고 싶었던 이유는 평소에 히틀러가 자주 갔었기 때문이었다. 거기서 에미와 알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그러나 숨이 막히도록 집요한 냉대를 받는다. 또한 에미는 알리 앞에서 자신의 아버지가 나치즘의 열렬한 신봉자였다는 것과 에미 자신이 역시 나치당원 출신이었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이야기한다. 이러한 장면들에서 사회 곳곳에 아직도 남아있는 나치즘이 얼마나 집요한지를 보여준다. 뒤의 장면은 에미가 고통스러워했던 그러한 것들에 대해 에미 역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보여주기도 한다. 에미의 이런 모습은 영화상에도 여러 번 나온다. 쿠스쿠스를 먹고 싶다는 알리의 청을 독일 사람은 그런 것을 안먹는다고 거절하는 장면이나 ,자신이 당했던 것처럼 유고슬라비아 동료를 소외시키는 장면 , 그녀의 동료들 앞에서 마치 물건처럼 자신의 남편의 근육을 자랑하는 장면이라든지, 나치즘의 페혜는 불온한 공기처럼 영화 속을 내내 떠다닌다. 이러한 불온한 공기가 퍼져있는 곳에서는 진실한 사랑은 가당치도 않은 것처럼 보인다.㉡자본주의의 야만성주변 사람들이 그 두 사람에 대한 편견을 버리는 것은 그들이 이들의 사랑에 대해 감동을 받아서가 아니다. 단지 그들의 이익을 위해서이다. 주변사람들과 그 두 사람이 화해하는 장면이 아름답고 감동적이지 않고, 역겨울 정도로 추악해 보이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인종주의의 편견을 걷어간 것은 자본주의의 역겨운 속물근성이었던 것이다.㉢ 독일인의 패배감에서 비롯된 인종편견한 가지 더 주의해서 볼 점은 에미와 알리를 멸시하고 냉대하는 사람들도 사회에서 그리 대접받는 사람들이 아니라는 점이다. 청소부인 에미의 직장동료들 (이들이 하류층이라는 것은 에미가 처음 알리에게 자신의 직업을 말하기를 주저하는데서 드러난다.) 그리고 주인집 아들에게 아부하는 이웃집 여자들. 이들 역시 사회에서 멸시받고 소외받는 사람들인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사실을 통해서 이들의 에미와 알리에 대한 멸시가 그러한 처지의 자신들에 대한 열등감에 비롯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영화에서 나오는 유일한 자본가인 집주인의 아들은 에미와 알리의 사랑에 대해 별로 그렇게 다른 사람들처럼 냉담하지 않다는 점에서 뒷받침된다. 감독은 이러한 설정을 통해서 아직도 남아 있는 인종편견이 독일인의 패배감이나 열등감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라는 점을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예체능| 2010.01.17| 4페이지| 2,000원| 조회(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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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술사적 관점에서 본 미지의 걸작
    프랑스 미술사의 흐름 속에서 바라 본발자크의 ‘미지의 걸작’의 의미- 아르놀트 하우저의 관점을 중심으로 -1. 서론: ‘시대배경’과 연관지어 바라본 ‘미지의 걸작’‘신비평’의 등장 이후 작가가 마주한 시대 배경과 그가 쓴 작품을 연관지어 설명하는 방식은 그 전만큼 절대적인 권위를 가지지 못하게 되었다. 하지만, 발자크의 경우에는 특별히 예외가 되어야 할 것 같다. 그의 작품에서 19세기 전반의 프랑스 사회를 빼놓는다면 과연 무엇이 남을 것인가? 바로 그의 그러한 점 때문에 1888년 4월 여성작가 라느네스에게 보낸 유명한 엥겔스의 편지가 지적했듯이 그의 보수적인 정치적 입장에도 불구하고 자신도 원하지도 않게 근대 사회주의의 한 선구자가 되어버리지 않았던가? 다시 말해서, 그의 작품이 가지고 있는 19세기 전반의 프랑스 사회와의 연관성은 그 작품을 낳은 작가의 정치적 신념마저도 작품이 배신할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하다는 뜻이다. 그래서 이 글에서는 발자크의 ‘미지의 걸작’이 그 당시 프랑스의 미술계 나아가서는 프랑스 사회의 갈등을 어떻게 반영하고 있는지를 분석하고자 한다. 또한 이러한 분석의 틀로서는 아르놀트 하우저의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2권, 3권, 4권’에 나타나 있는 문화사에 관점을 이용하고자 한다.2. 발자크가 이 책을 발간했을 때의 시대 배경 –1830년대‘미지의 걸작’은 1831년 지에 발표되어, 같은 해에 단행본으로 출간되고, 1837년에 수정되었다. 이 작품이 발표되고 수정된 1830년대 전후 약 70여년간 프랑스의 역사는 한 마디로 정치적 격동기였다. 왕과 귀족 계급, 브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가 서로 치열한 대립으로 서로 편을 바꾸어 가며 대립에 대립을 반복했던 시기였다. 문학과 미술을 비롯한 예술계 역시 이러한 대립과 갈등의 시대를 피해갈 수가 없었다.1)정치적 격동기이 당시의 주요 연표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1804년 ~ 1814년 : 제 1제정 (나폴레옹의 시대)1814년 나폴레옹의 몰락1814년 ~ 1830년 : 부르봉 왕조 (왕정복고장은 미는 ‘상대적’인 것으로 사람마다 개성과 감성이 틀리듯 미 또한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지 않느냐 하는 것이었다.또한 이러한 논쟁은 ‘선’과 ‘색’의 대립으로 불리우기도 했다. 고전주의 미학은 선으로 정확하게 데셍하는 것을 기본하는데 비해 낭만주의의 들라크루아는 신비한 색채의 힘을 빌려 마음의 밑바닥에 깔린 정념을 보인 사람에게 호소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양쪽 진영이 ‘선’과 ‘색’의 한 쪽 측면만 일방적으로 강조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선이나 색을 쓸 단계가 되면 의견이 엇갈렸다. 대표적으로 앵그르 같은 경우 색채를 너무 강하게 사용하면 화면의 조화가 깨지므로 차라리 회색을 칠하는 편이 낫다고 말한 반면에, 들라크루아는 회색이야말로 회화의 적이라고 말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자연 광선 속에서 바라보면, 그림은 실제보다 더 회색에 가까워 보이므로 우중충한 색깔은 금기라는 식이었다.3) 정치와 미술16세기부터 이어져 내려온 이런 식의 대립은 당시 혼란스러웠던 사회상과 맞물려 당시의 정치적 대립 즉 왕과 귀족 vs 브루주아지과 프롤레타리아 계급 좀 더 시간이 지나고서는 브루쥐아지 vs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갈등을 배경으로 깔고 어느 쪽이든 선택을 강요하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3. 작품 내의 시대 배경이 작품은 다음과 같은 구절로 시작한다.‘1612년 말경 12월의 어느 추운 날 아침’이러한 시작 방식은 그 당시 유행하던 월터 스콧의 방식을 따라한 것으로 보이지만, 또한 1594년 생인 푸생과 관계하여 선택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더 나아가서 작가 발자크가 살고 있는 시대 즉 1830년대와의 유사성을 주목하는 것도 필요하다.1)바로끄 시대의 성립16세기 말에서 이 작품의 배경이 되는 17세기 초에 미술사에서 중대한 변화가 일어난다. 차갑고 복잡하며 주지주의적인 메너리즘이 물러나고 그 대신 관능적•감정적이고 일반적으로 이해하기 쉬운 양식인 바로끄가 들어선다는 것이다. 이것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바로끄가 예술과 감상자의 관계에서 하나의 중요한 바로끄의 특징적인 현상이었다’둘째, 그러한 대립이 프랑스에서는 다만 더욱 심하였다.셋째, 바로끄 시대 이전에는 공적 예술과 대중적 예술 사이에 원칙적인 구분이 지어질 수는 없었다.즉, 바로끄 시대에 비로서, 공적 예술과 대중적 예술 사이에 원칙적인 구분이 생겨났으며, 그것이 바로끄 시대의 특징이 되며, 그러한 대립이 프랑스에서는 다른 곳보다는 더욱 심하다는 뜻이다. 즉, 19세기 후반의 프랑스 미술계의 대립은 17세기 초반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하겠다. 나아가서 이러한 대립은 작품이 쓰여질 당시의 들라크루와와 앵그르가 대립과 놀랄만한 유사성을 보여준다.3) 푸생파 VS 루벤스파작품이 쓰여진 19세기 전반이 들라크루아와 앵그르의 대립의 시대였다면 이 작품의 배경이 되는 17세세기 전반은 이 작품에도 등장하는 푸생을 옹호하는 측과 그에 대항해 루벤스를 옹호하는 축으로 양쪽이 대립되고 있었다.먼저 푸생보다 한 세대 위였던 피터 폴 루벤스(Peter Paul Rubens : 1577 ~ 1640) 에 대해서 이야기하자면, 그는 플랑드르(지금의 네달란드와 벨기에 북부를 가리킴)출신의 화가였다.네달란드 출신의 이들 화가들은 항상 다채로운 사물의 표면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그들은 옷감과 살아있는 신체의 감촉을 표현하기 위해서, 다시 말하자면, 눈으로 볼 수 있는 모든 것을 가능한 최고로 충실하게 그리기 위해서 그가 알고 있는 모든 기법과 수단을 이용하려고 노력했다. 그들은 이탈리아 화가들이 그렇게 신성시했던 아름다움의 기준에 대해서는 별로 개의치 않았으며, 또 품위 있는 주제에 대해서도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루벤스는 이러한 전통 속에서 성장했기 때문에 이탈리아서 전개되고 있던 새로운 미술에 대해 경탄했지만 그의 본질적인 신념 즉 화가의 임무는 자기 주위의 세계를 그리며,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그림으로써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화가 자신이 사물의 생동감 넘치는 다양한 아름다움을 즐긴대로 느끼게 해주는 일이라는 신념이 흔들리지는 않았던 같다.결국 그런 루벤스에게 ‘ 화가 니콜라 푸생(Nicolas Poussin , 1594 ~ 1665 ) 이었다.즉, 이 작품의 중요한 인물인 니콜라 푸생은 이 당시 신고전주의의 태두(泰斗)의 역할을 한 사람이었다. 물론 작품 속에서는 아직 그의 이름이 세상에 알려지기 전으로 나와 있다. 즉 19세기 초반에 들라크루와와 앵그르가 대립했던 것과 같은 이유로 뿌생의 방식을 옹호하는 사람들과 루벤스의 방식를 옹호하는 사람들로 나누어지게 되는데, 아르놀트 하우저에 따르면 바로끄 시대 즉 이 시대 이전에는 못 보던 현상이었다고 한다.이 당시의 프랑스 미술계의 대립을 표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17세기 전반의 미술계 내부의 대립뿌생파루벤스파아케데믹하고 공식적인 예술비공식적이고 자유로운 예술의 대립추상적이고 계획적으로제시된 예술이론생동적이고 실천 속에서발전하는 예술이론고전주의적•선(線)묘사적 경향감각주의적•회화적 경향2) 정치와 미술그러나, 한가지 흥미로운 것은 19세기 후반기와 마찬가지로 이 때도 역시 정치적 입장에 따라서 유파를 선택해야만 했다는 것이었다.선이나 색채냐 하는 것은 기술적 문제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색채파에 가담하는 것은 절대주의의 정신 즉 경직된 권위와 합리주의적 삶의 규율화에 반대하는 입장을 표명하는 것이었으며, 새로운 감각주의의 도래를 알리는 하나의 징후로서 ~~~4. 작품과 시대 배경과의 연관성프레노페와 푸생과 포르뷔스를 이러한 틀 속에서 배치를 한다면 어떻게 될까? 푸생과 포르뷔스는 실존인물로서 당연히 신고전주의 혹은 아카데미학파로 배치될 수 있다. 프레노페의 경우에도 다음과 같은 말을 고려해 본다면 비교적 쉽다.comme une foule d’ignorants qui s’imaginent dessiner correctement parce qu’ils font un trait soigneusement ébarbé je n’ai pas marqué sèchement les bords extérieurs de ma figure et fait ressortir jusqu’ 색채를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그는 푸생과 앵그로보다는 루벤스와 들라크루와 쪽에 더 가깝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5. 결론이 가지는 의미‘미지의 걸작’은 다음과 같이 끝이 난다.결국 포루뷔스와 푸생은 그림을 보고야 만다. 그러나, 그들이 본 것은 단지 이해하기 어려운 추상화일 따름이다.Je ne vois là que des couleurs confusément amasses et continues par une multitude de lignes bizarres qui forment une muraille de peinture.“보이는 것이라고는 혼란스럽게 쌓인 색깔들이 수 많은 기이한 선에 의해 억제되어 그림 벽을 형성하고 있는 것 뿐입니다.”겨우 발 한 쪽 만이 그러한 해체의 과정에서 살아 남아 있을 따름이었다. 결국 작품을 이해하지 못하는 둘을 내버려두고 그림에 불을 질러버리고 자살하고야 만다. 이러한 결론에 대해서 아르놀트 하우저는 다음과 같은 말로서 찬탄을 보냈다.여기에서 발자끄는 19세기 예술의 운명을 예견하고 탁월하게 묘사하고 있다. 그는 생활과 대중으로부터 예술이 소외된 결과를 인식했으며, 예술을 위협하는 심미주의와 허무주의와 자기파괴의 위험을 가장 학식 있고 날카로운 동시대인보다도 더욱 정확하게 파악했던 것이다.이 당시 그리고 이후에 예술가들 사이에는 ‘유미주의’, ‘예술을 위한 예술’, ‘탐미주의’, ‘심미주의’같은 것이 유행을 했는데, 이것은 예술가들을 일반 대중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역할을 했다. 당시의 지배적 이념이었던 ‘예술을 위한 예술’ 예술을 자주적 유희로 생각하고 예술가 개인의 것으로 생각했으며, 예술은 보통 사람들에겐 금지된 비밀의 유희이자, 그들은 결코 이해 할 수 없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플로베르의 말을 통해서 잘 드러난다.“인생에서 참되고 좋은 유일한 것, 그것은 예술”(1851년 9월)“인간은 아무것도 아니고 작품이 전부다.” (1875년 12월)하지만, 이러한 경향은 일반 대중 즉 당시의 주된 었다.
    인문/어학| 2006.11.20| 8페이지| 2,000원| 조회(3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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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법철학]볼테르의 관용론
    관용론(한길사) - 작자 : 볼테르얼마 전 미 대선이 조지 부시 현 미국 대통령의 승리로 끝이 났다. 미국 국민들이 투표를 통해 이라크전쟁이 잘못된 것이었다는 보여주었으면 했던 기대는 안타깝게도 충족되지 못했다. 그러는 와중에 최근까지 이어지고 있는 이라크에서의 살육과 갈등을 보면서 서로 다른 인종과 문화가 상보적으로 공존할 수 있는 평화적 질서는 과연 영원히 불가능한 것인가에 대해서 고민을 해보게 된다.이쯤에서 생각나는 것이 구교와 신교 간의 불관용에 대항한 18세기 계몽사상가 볼테르와 그의 책 ‘관용론’이다. 볼테르는 이 책에서 1762년에 발생한 칼라스 사건을 다루면서, 종교적 편견에 의해 조작된 칼라스의 억울한 죽음의 진실을 규명하고자 동서양의 역사와 성서, 강론, 도덕론을 뒤져 불관용에 대한 반론의 논거를 찾아 그만의 독특한 감각과 재치로서 시대와 인간의 오류를 고발했다. 결국 이러한 볼테르의 노력에 힘입어 3년이 지난 1765년, 칼라스의 무죄와 복권이 선고되어, 볼테르는 인간의 자유와 존엄을 억압해온 옛 체제의 낡은 권위를 무너뜨리고 야만적 형벌제도에 대한 계몽의 승리를 가져올 수 있었다.불행히도 이러한 승리에도 불구하고, 그가 옹호한 관용은 그의 사후에도 여전히 완전히 뿌리내리지 못했다. 우선 프랑스만 해도, 프랑스 대혁명 이후 이어진 대규모의 반복된 숙청 작업과 그 뒤에 이어진 드레퓌스 사건 그리고, 프랑스 제국주의의 범세계적 식민지 착취, 결국 프랑스의 몰락을 재촉한 두 차례의 세계대전에 이르기까지 모두 불관용이라는 맥락 하에서 이어져 내려온 것들이다.그리고, 우리에게 시선을 돌려본다면 우리 역시 이러한 불관용의 문제에서 전혀 자유롭지 못하다. 극단적인 갈등과 대립이 지배하고 승복의 문화가 부재한 것은 먼 나라만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우리 스스로가 너무나 잘 안다.그렇다면, 우리 인간들은 과연 그러면 우리는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존중하며 평화롭게 공존하는 방안을 결코 배우지 못할 것인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연의 섭리이기 때문이다. 볼테르는 우리에게 자연이 이렇게 말한다고 알려 주었다.“나는 당신들 각자의 가슴에 서로를 도와 삶을 견디어나갈 수 있도록 동정심의 싹을 심어주었소. 이 동정심의 싹이야말로 신이 내려주신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하오. 그리고 당신네들의 가련할 수밖에 없는 당파적 논쟁의 격양된 고함소리로 자연의 목소리를 지우지 마시오.”따라서, 우리가 서로의 차이로 인해 갈등하고 대립한다면 그것은 자연의 섭리를 어기는 것이 된다. 그가 뿌렸던 관용의 작은 씨앗이 조만간 커다란 열매로 맺어지기를 기대하면서 ,이 책에서 그가 신에게 올린 기도 한 구절로 이 글을 마치고자 한다.‘인간이라 불리는 티끌들 사이에 존재하는 사소한 차이들이 증오와 박해의 구실이 되지 않도록 해주소서.’
    법학| 2006.11.06| 1페이지| 1,000원| 조회(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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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언어학] 책상은 책상이다의 언어학적인 해석 평가D별로예요
    책상은 책상이다. - 페터 빅셀언어학적인 해석페터 빅셀의 '책상은 책상이다'는 흔히 '아웃사이더'의 이야기로 해석이 된다. 하지만, 난 이 소설을 가지고 소쉬르의 '일반 언어학 강의'의 일부분을 설명해 보고자 한다.이 소설에는 한 남자가 등장한다. 작중화자의 말대로 그를 묘사하는 것은 소용없는 일이다. 그는 단지 '너무나 평범해 자기 자신조차도 그런 자신이 지겨워지는 그런 남자'이다. 어느 날 그는 소쉬르가 말한 '기표(시니피앙)'와 '기의(시니피에)'간의 恣意的(arbitrary)인 결합에 대해서 깨닫는다."나는 책상을 책상이라고 부르고 사진을 사진이라고 하고, 침대를 침대라고 부르지. 또 의자는 의자라고 한단 말이야. 도대체 왜 그렇게 불러야 하는 거지?" 프랑스 사람들은 침대를 '리'라고 하고 책상을 '타블', 그림을 '타블로' 그리고 의자는 '쉐즈'라고 한다. 그러면서도 서로 다 알아듣는다.그래서 이 남자는 '시니피앙'과 '시니피에'가 '필연적'으로 결합된 것이 아니라 '자의적'으로 결합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해보기 위해서 '침대'를 '사진'이라고 부르고 '책상'을 양탄자라고 부르고 '의자'를 '시간'이라고 부르기로 한다. 그런 식으로 모든 사물의 이름을 자신의 마음대로 바꾸고 나서 그 남자는 만족스럽게 새로운 생활을 시작한다.어찌 보면 매우 어처구니없는 이 일은 우스워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작중화자의 말대로 이건 전혀 우스운 이야기가 아니다.'이 이야기는 슬프게 시작되었고 슬프게 끝이 난다.왜 이런 일이 발생했을까? 그 남자의 말대로, 그리고 소쉬르의 말대로 '기표'와 '기의'는 자의적으로 결합한 것이 분명해 보이는데 말이다. 예를 들어서 'horse'가 굳이 말을 가리키는 말이 되어야 할 이유는 없다. 그것에 대한 증명으로 프랑스에서는 그것을 'cheval'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한 언어 내에서도 여러 가지 사투리를 통해 다른 이름으로 불릴 수가 있다. 그렇다면 왜 이런 일이 벌어질까?그것은 이 남자가 '시니피에'와 '시니피앙' 간의 관계가 자의적이라는 말을 잘못 이해했기 때문이다. 그 말뜻은 그 두 가지의 결합이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 되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지 그 남자가 마음대로 그 언어 기호를 마음대로 붙여도 된다는 뜻은 아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시니피에'와 '시니피앙'간의 관계는 자의적이지만, 그 것을 연결시키는 것은 언중(言衆)들 간에 협약이 필요하다. 결국 '언어는 협약이며, 합의된 협약은 기호의 성격과는 무관하다.'는 말이다. 이 남자는 그러한 개념에까지 이르지 못하였고, 결국 아무하고도 이야기를 할 수 없는 그런 불행한 사람이 되어버리고 만 것이었다.
    독후감/창작| 2005.06.08| 2페이지| 1,000원| 조회(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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