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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안학교 (간디 , 썸머힐 ), 제도권 학교와의 비교 ppt발표
    성 신 여 자 대 학 교 SUNGSHIN WOMEN'S UNIVERSITY비 교 교 육대안학교와 일반학교 비교성 신 여 자 대 학 교 SUNGSHIN WOMEN'S UNIVERSITY1. 대안학교 란대안학교의 정의대안학교의 유형대안학교의 실태대안학교의 특징대안학교의 성과대안학교의 한계기존교육의 대체나 부정이 아닌 새로운 형태의 교육 기존교육 비판 / 대안 탐구 열린 개념인가 형태 미인가 형태 위탁교육 형태 공립 대안학교 형태 일반학교 내 대안교실 형태'07년 현재 총 28개교 (중7 / 고21) 총 학생수: 2478명, 총 교사수: 383명 전체교원 중 대안학교 교사 비율: 3% 교사 1인당 학생 수: 평균 7명- 조직과 운영의 측면 작은 학교 자율규제의 원칙 적용 평등, 민주, 자율적 참여- 학습과 생활의 측면 다양성의 학교 업적중심에서 탈피, 과정모두를 평가 자기주도의 학습프로젝트의 발견 빅 프로젝트 생태주의 교육과정의 실현학교의 제도적 · 인습적 한계 교사의 확보 · 재교육 · 이직문제 학교 재정과 운영의 난점성 신 여 자 대 학 교 SUNGSHIN WOMEN'S UNIVERSITY2. 간디학교산청 간디학교 전경금산 간디학교 전경간디학교 조직도성 신 여 자 대 학 교 SUNGSHIN WOMEN'S UNIVERSITY2. 간디학교간디학교 발자취…간디농장 설립간디 청소년 학교 설립미인가 중학교 문제로 지역 교육청과 마찰 발생중고 통합과정으로 전환중학과정 불법운영 사유로 경남 교육청으로부터 피소첫 졸업생 9명 배출성 신 여 자 대 학 교 SUNGSHIN WOMEN'S UNIVERSITY2. 간디학교특성교과 개발 및 개설7차 교육과정 편성실제개인/진로별 시간표 자율 구성특성화 교과 이수 원칙7차 교육과정 편성특징규율의 재배치학생의 재배치시간의 재배치공간의 재배치n-1의 배치교육과정 편재 단위시간 배당간디학교의 특 징간디학교 학생들성 신 여 자 대 학 교 SUNGSHIN WOMEN'S UNIVERSITY3. 서머힐 (Summerhill School)예술관 입구와 대형 체스판교무실과 도서관 전경기숙사 입구 및 스케이트 보드램프하키필드농구장과 그네 그리고 수학교실음악실과 공연장숲 속 오두막과학 연구실언어교실A. S. Neill3. 서머힐 (Summerhill School)니일의 아동과 교육 원칙현명하고 현실적성 신 여 자 대 학 교 SUNGSHIN WOMEN'S UNIVERSITY성실성사랑과 이해의 필요이기적일하기 싫어함직접적 흥미게으른 아이는 없다입학: 5 ~ 15세 / 평균 15세까지 재학 학생수: 약 45명 수업: 흥미에 따라 자율적 선택 교사: 정직성을 바탕으로 학생들의 자발성을 믿고 사랑으로 기다림아동들이 스스로를 규정할 수 있는 환경 제공 자신만의 목표 설정/성취감을 느낄 수 있도록 도움 충분한 놀이를 위한 완전한 자유 제공 다양한 영역의 느낌을 체험할 수 있는 환경 제공 공동체 생활 환경 제공3. 서머힐 (Summerhill School)성 신 여 자 대 학 교 SUNGSHIN WOMEN'S UNIVERSITY교육목표교육내용정책노선아동이 일을 즐기고 행복을 추구하도록 도움 행복 = 삶에 흥미를 가짐 지적 능력과 정서적 능력의 성정 균형3. 서머힐 (Summerhill School)성 신 여 자 대 학 교 SUNGSHIN WOMEN'S UNIVERSITY서머힐 학교의 네 가지 목적아동들이 감정에 있어서 자유롭게 자라날 수 있게 해준다아동들이 자신의 인생을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을 준다아동들이 자연스럽게 발달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준다어른들에게서 받는 두려움과 강압을 제거하여, 좀 더 행복한 아동기를 보낼 수 있게 해 준다.4. 일반학교와 대안학교 비교성 신 여 자 대 학 교 SUNGSHIN WOMEN'S UNIVERSITY대 안 학 교일 반 학 교교 육 형 태기능교육, 암기교육, 출세교육, 경쟁교육, 타율교육, 입시교육학생에 대한 이해잠재능력 점수화 창의성과 독창성 억제 자율성 무시 욕구 억제가능성에 대한 믿음 잠재능력에 대한 신뢰 자율성에 대한 믿음 욕구에 대한 존중 자연발생적인 흥미, 관심, 욕구를 최대한 존중노작교육, 협동교육, 인성교육, 자율교육, 교양교육, 전인교육교 육 내 용단순한 지식의 전달 입시준비 위주의 인문 지향적 내용 획일화된 교육내용과 방식 분리된 교과노작, 체험 통한 지식습득 유도 교육수요자가 원하는 내용 유용하고 쓸모 있는 교육 신앙교육, 영성교육 통합된 교과교 육 방 법경쟁 강조 교실에 한정되어 수업 지식 배분자로서의 교사 학생의 수동적 역할 결과중심적 학습 엄격한 학년제와 학급제협동적 집단 활동 중시 교실내에 한정되지 않는 수업 교육경험의 안내자로서의 교사 학생의 능동적 역할 결과보다 과정을 중시 무학년, 무학급제성 신 여 자 대 학 교 SUNGSHIN WOMEN'S UNIVERSITYThank You{nameOfApplication=Show}
    교육학| 2008.09.11| 11페이지| 3,000원| 조회(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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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육심리학] 자아정체감
    1. 서론 - 연구의 목적, 동기, 필요성한 인간이 세상에 태어나 자라며 기억할 수 있는 순간부터 그 인간은 ‘자아’가 생겨난다고 한다. 그리고 이 자아는 자라는 동안 계속해서 발달을 거듭하게 된다. 이런 과정에서 특히 청소년기에 누구나 자신의 존재에 대해 의문과 회의를 갖게된다. 청소년기는 급격하게 신체적 성장이 이루어지는 시기이다. 하지만 아직 심리적, 정신적 성숙은 신체적 성장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게 되면서 자아정체감의 혼란이 찾아온다. “나는 어떤 사람인가?”라는 질문에서 시작된 자문은 자신의 외모, 재능,미래에 대한 고민으로 끝도 없이 이어지며 방황과 자기탐색을 하게된다. 이렇게 자기탐색으로 타인이나 다른 사물들과의 종전의 종속적이었던 관계에서 벗어나 점차 감춰져 있던 내면세계로 집중하게 되고 자신의 주관적 세계 속에서 스스로를 발견하며 독립적 자아형성을 희구한다. 이런 과정 속에서 불안도 경험하게 되고 기성세대에 대한 반항적 태도를 보이게 된다. 그리고 이들의 정신적인 면에 있어서도 지적문제 해결능력이 최고 수준에 도달, 통찰력, 판단력은 물론 사고력으로서 추상력과 논리성에 있어서도 상당한 수준에 이르게 된다. 이런 것들이 제대로 이뤄지기 어려운 상황에 부딪쳐 바르게 정리되어 수용하고 신장되지 못할 때 문제로 나타나게 된다. 따라서 청소년은 자신에 대한 바른 이해를 바탕으로 한 자신의 잠재력에 대한 확신을 갖고 이것의 신장과 촉진을 위한 기성세대의 노력이 바르게 이루어질때 청소년들은 자신의 존재이유와 삶의 목적을 뚜렷이 설정하고 보람찬 나날을 살아가게 될 것이다. 이런 이유로 자아 정체감에 대한 연구는 계속 이루어 져야하고 기성세대들은 그 시대의 청소년들을 위해 끊임없는 격려와 교육을 해야할 것이다.2. 본론1) 자아정체감의 의미자아정체감이란 인간의 전 생애에 걸쳐 반드시 획득해야만 할 발달과업임과 동 시에 청소년기의 중심적인 과업이다. 일반적으로 자아정체감은 ‘나와 무엇 무엇 과는 동일하다’고 하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나는 지구인이다’ 만남 그리고 완전한 책임을 수반하는 실존적 자아의 상태를 자아정체감이라고 할 수 있다.2) 자아정체감이론의 특징첫째, 인간의 행동과 기능의 기초로 원초아가 아닌 자아를 강조하였고 둘째, 가 족상황 속에서 개인과 그 부모와의 관계 뿐 아니라 가족이 위치한 역사적, 문화 적 상황 속의 사회적 관계에 관심을 가졌다. 셋째, 생의 심리적 위험을 극복할 수 있는 인간 능력에 관심을 가졌다.에릭슨의 자아정체감(ego identity)은 두 가지 측면을 가진다. 첫째, 내적 측면 은 시간적 자기 동일성과 자기 연속성의 인식으로, 시간이 경과하면서 자기 자 신을 지금까지의 자신과 같은 존재로 지각하고 수용하는 것이다. 둘째, 외적 측 면은 문화의 이상과 본질적인 양상을 인식하면서 그것과 동일시하는 것이며, 타 인과 본질적인 특징을 공유하게 되는 것이다. 그는 자아정체감이 없는 상태에서 자아정체감의 상태로 이동하는 인간발달을 "내적, 외적 갈등의 과정이고 인간이 위기를 극복하면서 통합감, 판단력, 자기 자신과 주위 사람들의 판단 기준에 적 합한 대처 방법을 익히면서 성장하는 과정"이라고 설명하였다.(1) 심리사회적 자아발달 단계Erkison의 심리사회적 자아발달 이론은 세 가지의 특징을 가진다. 첫째, 유 아기에서 노인기까지 일생에 걸친 생활주기 속에서 성장을 논하고 있다. 둘째, 인간의 발달이 전적으로 생물학적 혹은 환경적 영향에 좌우되지 않는다고 가 정한다. 인간은 각 단계의 심리적 발달을 주도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자 신을 보호하고 생의 과정을 지시함으로써, 경험을 통합하며 조직화한다는 것 이다. 셋째, 개인의 성장에 문화가 기여하는 것에 주목하였다. 그는 각 발달 단계마다 문화적 목표, 사회적 기대와 요건, 문화가 개인에게 제공하는 것이 있어 개인에게 양육방법을 전수하고 교육 기회를 제공하며 성이나 일에 대한 가치와 태도를 전달한다고 보았다. 인간의 심리발달은 생물학적 성숙 과정의 요구와 일상생활 중에 직면하는 사회의 요구 및 사회적 기대간의 상호작용에 서 비롯되는(1) 청소년기의 정체감 위기자아정체감의 문제는 유아기나 아동기를 거치는 동안에는 비교적 무의식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으나 청소년기에 이르면 차츰 의식적인 수준으로 떠오른다. 이와 같이 청소년기에 자아정체감의 문제가 심화되는 근원은 다양하다.첫째, 우리의 성격의 구성요소인 원초아, 자아, 초자아가 청소년기 이전까지는 비교적 균형 상태를 유지해오나 청소년기의 급격한 신체, 성적인 성숙으로 인 하여 그 균형상태가 깨지기 때문이다.둘째, 주변인으로서의 입장 때문이다. 즉, 사회는 청소년들이 사회적인 문제에 직접적으로 관여하고 참여하는데 제약을 가한다. 그러나 한편으론 가정과 사회 는 젊은 청년들이 가족이나 사회문제에 대해 관심을 보이고 어서 성인다운 책 임과 역할을 수행하도록 자극한다는 데에 있다는 것이다.셋째, 중요한 선택과 결정을 해야만 하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청년들은 자기이해를 위해 새삼스럽게 자신에 대한 탐색작업을 시작해야 하고 자신이 처한 상황과 가능성을 점검해야만 한다.넷째. 고도로 발달된 인지적 능력 역시 정체감 갈등의 원인이 되고 있다.다섯째, 지금까지 자신을 해석하고 설명하는 내적 참조체계가 되어온 동일시 의 내용들이 그 유용성을 상실하게 된다.(2) 청소년기 정체감의 구체적 양태① 이름으로 나타나는 정체감인간에 있어서 자기가 자기인 것을 나타내는 가장 대표적인 수단이 바로 이 름인데 이 이름을 사용한 자기표현은 정체감의 근본이며, 청소년기의 이름에 대한 사랑과 미움은 현재 나에 대한 사랑과 미움의 반영이라 할 수 있다.② 발달적 정체감자신의 나이, 위치, 지위, 재능 등을 자각하는 것이 곤 정체감이다.③ 부정적 정체감자기가 미워하거나, 싫어하거나, 반발하고 있는 사람이 희망하는 자아상과 반 대의 방향으로 행동하는 것을 말한다. 그들은 성인들을 골탕먹이는 데서 기 쁨과 희열을 맛보며 그것을 통해 자신의 존재가치를 자각한다는 데 심각한 문제가 있다.④ 성역할 정제감자신을 남자 또는 여자로 인지하는 것, 남녀의 구별에 기초하여 남자다움 것으로 보고되어 있다.James Marcia는 정체감 성취?유예?조기 완료?혼란의 단계를 주장했다. 청소년 기 정체감 형성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으로는 인지발달의 수준, 부모의 양육태 도, 학교생활 그리고 사회 문화적 맥락이 있다.4)교육에의 적용(1) Erikson-유능한 유아학교 교사들은 어린 아동들에게도 과제를 독립적으로 수 행할 기회를 제공하며, 유능한 교사는 아동들이 되도록 많은 학교 활동을 스스 로 결정하도록 허락하는 것, 또 학생의 성공에 관심을 갖고 칭찬하여 학생자신 의 능력에 자부심을 갖도록 해주는 것, 정체감 형성의 과정을 거치는 것이 정 상적임을 보여줌으로써 자기자신과 학생들을 격려하는 것.을 들 수 있다.(2) Marcia-정체감 확립을 위한 역할 모델을 보여주기, 다양한 가치체계와 각각 의 장단점을 탐색하도록 도와주기, 학생들이 자기 연령 수중에 맞는 무엇인가 에 전념하도록 격려하기, 문화적 차이 고려하기, 정체감 형성의 지속적인 면을 인식하기. 가 있다.5) 자기보고나의 자아정체감 형성 시기는 평범하게도 중?고등학교 시절이었다.중학교 시절은 대혼란의 연속이었다. 여중을 1년 다니다가 전학을 오게 됐고, 사춘기가 시작되었다. 내가 다녔던 여자중학교는 경희대 안에 있는 부속학교였 는데, 정말 힘들었다. 전혀 환경이 다른 세 부류의 친구들과 합쳐지면서 한 반 안에서 갈등도 많았고 초등학교 때와 달리 오로지 공부, 성적으로만 평가하며 이름한번도 제대로 불러주시지 않는 선생님들이 싫었다. 그 때부터 공부를 하기 시작했고, 친구는 초등학교에서같이 올라간 친구 한명에게만 마음을 열었었다. 그 시기에 내 인생에 중요한 시기가 한번 있었다. 바로 교사의 길이 확실해 졌 던 것이다. 중학교의 선생님들은 정이 안가고 싫었지만, 당시 초등학생 세 명을 가르친 적이 있었는데 내가 참 가르치는 일을 좋아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 일 이 즐거웠고 내가 생각해도 참 수월하게 잘 해냈던 것 갔다. 그 경험이 나의 진 로에 큰 영향을 주었다.나의 사춘기는 끊임없는 반항만 말이다. 그렇게 자신 있던 외고시험에는 원서조차 쓰지 못했고, 두 번째 수술을 받았다. 두 번째의 장기입원생활은 나를 좀 더 크게 만 들었다. 첫 수술은 너무 어렸기 때문에 기억이 없지만 두 번째 입원에서 많은 것을 보고 느꼈다. 실제로 죽음이라는 것을 감당했다. 입원하는 날 앞 침대에서 저 세상으로 떠난 갓난아기를 보았고 그 다음 날 나는 긴 수술에 들어갔다. 눈 을 떴을 땐 꿈인지 생시인지 구분이 안갈 정도였다. 중환자실에서도 이승을 떠 난 아이들은 많았다. 또 소아병동이라 환자들이 모두 아이들이었는데 그래서 울 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잘 참고 항상 밝은 여자아이가 있 었고 그 아이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다. 병원생활 내내 의사들과 간호사, 인턴들 을 대하며 밝은 사람이 얼마나 환자에게 그리고 환자 보호자들에게 힘을 주는지 깨달았고 나의 사춘기는 끝나갔다. 덕분에 지금의 나는 참 밝은 사람이다.고등학교에 입학해서는 중학교 때보다는 수월한 생활을 했다. 선생님들과도 그 동안보다도 훨씬 더 깊은 유대감이나 친밀감을 갖었었다. 친구들과도 잘 지내며 밝은 생활을 했다. 고등학교 때의 나의 관심사는 대학, 그리고 나의 미래였다. 지금생각해보면 성적이란 것에 너무 매여 있었던 것 같다. 지금도 학점에서 자 유롭지는 못하지만 그때만큼은 아니다. 고3이 벼슬인 것 마냥 항상 집에 투정부 리고 짜증내고, 주위사람들을 참 힘들게 했었다. 가끔은 나의 장래에 대한 정체 성에 휩싸이며 진로를 바꾸기도 했었다. 정말 재미있는 것은 고등학교 한 학년 이 올라갈 때 마다 꿈은 점점 작아지고 있었다. 의사에서 약사로, 높은 대학에서 점점 낮은 대학들로. 고등학생 때는 내가 한없이 초라하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 다. 그때 써놓은 일기들을 지금 읽어보면 정말 인생에 대한 자신 없음이 보인다. ‘겨우 이 한고비에 이렇게 허덕이는 내가 앞으로 더 무거워질 삶의 무게를 어떻 게 견딜지 스스로부터가 걱정 된다’ 이런 말들이 꽤 많다. 참 여유가 없는 고등 학생 이었던 것 같.
    교육학| 2005.07.11| 6페이지| 1,500원| 조회(4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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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육학] 천원 오천석과 그의 교육사상
    1.천(天)원(園) 오(吳)천(天)석(錫)에 대하여..교육철학(敎育哲學)자·문인(文人). 호(?)는 천원(天園). 평안남도(平安南道) 강서(江西) 출생(出生). 1919년 일본(日本) 도쿄[東京(동경)] 아오야마학원[靑山學院(청산학원)]을 졸업(卒業)하고 이광수(李光洙)·전영택(田榮澤) 등과 함께 《창조(創造)》의 동인(同人)으로 참가(參加), 시와 소설(小說)을 발표(發表)하였으며, 귀국(歸國)하여 잡지(雜紙) 《학생(學生)계》에서 근무(勤務)했다. 그 뒤 미국(美國)에 건너가 1925년 미국 코넬대학교와 노스웨스턴대학교에서 교육학을 전공(典工)했으며, 1931년 미국 컬럼비아대학교와 1982년 청주대학교에서 각각 철학(哲學)박사(博士) 및 명예(名譽)행정학(行政學)박사학위(博士學位)를 받았다. 1932~50년 보성(輔成)전문학교(專門學校)(지금의 고려(高麗)대학교(大學校)), 1945~47년 미군(美軍)정청(政廳) 문교부(文敎部)장, 1950년 이화(梨花)여자(女子)대학교 대학원장 및 대한(大韓)교육(敎育)연합(煉合)회장(回章)을 지냈고, 1950~55년 미국 극동(極東)총사령관(總司令官) 자문(自問), 1955~60년 한국(韓國)교육학(敎育學)회장(回章), 1960~61년 문교부(文敎部)장관(壯觀) 등을 지냈다. 1962~63년 미국 맥머리대학·일리노이대학교·피바디대학 등에서 초빙(初氷)교수(敎授)를 지냈고, 1963~67년 주멕시코 대사(大士), 1965년 국제연합(國際聯合) 총회(總會) 한국(韓國)대표(代表) 등을 지냈으며 1976년 학술원(學術院) 회원(會員)(교육철학 분야(分野))이 되는 등 한국 교육계의 발전(發展)에 크게 기여(寄與)했다. 대한민국(大韓民國)학술원(學術院) 공로(功勞)상을 수상(受傷)했으며, 저서(著書)로 〈민주주의 교육의 건설(建設)〉(1946)·〈교육철학(敎育哲學)신강(新講)〉(1972)·〈교육사상(敎育思想)전집(全集)〉(1975) 《민주교육을 지향(志向)하여》, 편저(編著)에 《노란 손수건》이 있다.2.서론(序論)서론은 교. 학생들에게 일정한 지식(識)을 주입(注入)하는데는 그다지 소명의식이 필요없어 보인다. 하지만 그는 교사의 임무(任務)를 단순한 직업(職業)이나 노동(勞動)이 아니라고 하였다. 그는 비전과 헌신(獻身)을 속성(速成)으로 하는 소명(召命)감에 움직이지 않는 교육은 산 교육이라 할 수 없다 하였다. 소명감이 있으면 교사는 산 스승이 될 수 있고. 어린 학생들을 대상(代償)으로 영(靈)의 성장(城將)을 돕는 참된 교육자가 될 수 있다고 하였다. 게다가 이런 소명의식은 교사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직업에 있어 정열(情熱)이라는 이름으로 존재(存在)해야 함을 강조(强調)하였다.그 다음에선 선배(先輩) 라는 제목(題目)으로 얘기하고 있는데 이는 교사의 외로운 길에 불을 밝혀주는 선인(先人)들에 대해서 다룬다. 교사는 고도(孤島)를 지키는 등대수(燈臺手)와 같이 옆에 그를 동무(童舞)해 줄 동료(同僚)가 없다는 말이 아닌 외로움이 있다. 우리가 존경(尊敬)하고 우리의 마음을 헤치고 우정을 나눌 수 있는 교사가 많지 않다는 말이다. 하지만 교사가 외롭지 않고, 긍지(矜持)를 가져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이유를 다른 직업(職業)에서 찾아볼 수 없는 훌륭한 선배(先輩)를 가졌다는 사실(事實)을 들 수 있다고 한다. 역사상(歷史上) 가장 존경(尊敬)을 받고, 인류(人類)에 고귀(高貴)한 업적(業績)을 남긴 사람은 다름아닌 교사의 역할(役割)에 선 선인들이었다고 밝히고 있다. 먼저 동양(東洋)에서는 공자(孔子), 아테네에서의 소크라테스가 그러했고 새교육의 선구자(先驅者)라 불리우는 페스탈로치 역시 그러한 인물(人物)이다. 또한 북방(北方)의 예언자(豫言者) 덴마크의 그룬트비히와 우리나라의 도산(逃散) 안창호 선생(先生)이 그러하다고 볼 수 있다. 교사는 이런 든든한 선배들이 뒤에서 자랑스럽게 지켜주기에 결코 외롭지 않다고 하였다.다음으로 스승의 마음을 설명하고 있다. 마음이란 형태(形態)도 크기도 구성(構成)물질(物質)도 주소(住所)도 기능(技能)도 알지못한다. 아무리 위대 대한 겸허를 갖춰야 한다. 마지막으로 극단적(極端的) 사상에서 벗어나 올바른 판단(判斷)과 비판(批判)으로 다른 것들을 받아들일 수 있는 열려 있는 문(問)을 품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교사라는 직업과 교직에 대한 사랑, 아이들에 대한 사랑을 담고있는 얼굴 역시 중요(重要)하다. 여기서 얼굴이란 세속적인 판단(判斷)에 의한 좋은 얼굴과는 차이(差異)가 있다. 교사는 안내자(案內者), 벽돌을 쌓는 자인 동시(同時)에 창조(創造)자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교사가 살아가는 길이란 고달픈 행로(行路)일 수 있다. 교사라는 직업이 가져다 주는 박봉(薄俸)과 고독(孤獨) 그런와중에도 부정(不定)과 불의(不義)의 폭풍우로부터 자라나는 어린 생명(生命)의 싹을 보호(保護)하기 위하여 밤샘을 하여야 하는 그런 생활(生活)속에서 교사는 고달픈 행로를 걷는다. 그러나 이 길이 자신의 생활에 참된 의의(意義)와 가치(價値)를 주고 나라와 겨레와 인류(人類)의 복지(腹肢)에 이바지하는 길임을 잊지 않기에 교사는 절대 이 외로운 길을 벗어나지 않는다. 교사의 길이 항상 외롭고 험난하지만 언제나 고달프지만은않다. 교사는 어린이의 천진난만함에 반한 길벗이 될 수 있다. 동시에 아이들과 함께 세상을 알아가는 탐험가(探險家)일수 있다. 교사의 길은 가능성(可能性)을 탐험(探險)의 과정(過程)을 통하여 발견(發見)하고 이를 개발(開發)하는 길인 것이다. 마지막으로 겸허(謙虛)한 태도(態度)로 지식(知識)탐구(探究)의 길을가며 지루하고 끝업는 이길을 마다않고 꾸준히 말없이 걷는 교사야 말로 영원한 구도자(求道者)이며 탐구자(探究者)인 것이다. 그것은 곧 교사의 거룩한 모습인것이다.두 번째는 ‘기본적(基本的) 오리엔테이션’이라는 장이다. 여기서는 교육(敎育)분야(分野)에만 국한(局限)된 것이 아니라 근대화(近代化)와 민족주의(民族主義)에 대해서도 다뤄지고 있다. 먼저 교육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자. 먼저 교육의 이념(理念)과 범위(範圍)에 대한 언급(言及)이있다. 교사는 연자(姸姿)매의 말이 은 자아를 성취시키는 일을 뛰어넘어 자아를 초월(初月)하는 유일한 길이라고 하였다. 즉 자아의 성취와 자아의 초월-이 둘이 교육의 궁극적(窮極的) 목적이라 하겠다.혼탁한 방안의 공기 속에서 화초(花草)가 꽃을 피울 수 없듯이, 교육의 성과(成果)도 청정(淸淨)한 자유(自由)의 풍토(風土) 위에서만 기대(機臺)될 수 있다고 하였다. 마찬가지로 명령(命令)과 통제(統制)가 지배(地排)하는 곳에선 자율적(自律的)인 인격(人格)이 클 수 없으므로 성장(城將)의 자유(自由)가 보장(報狀)되는 곳에서만 교육의 성과를 기대할 수 있다고 하였다. 이런한 자유외에 사고의 자유, 학문의 자유. 그리고 민주주의 양대(兩大) 지주(支柱)인 평등(平等)이 필수(必修) 요소(要素)라 하였다. 그리고 모든 어린이가 무한한 가능성(可能性)의 씨알이므로 모두 동등한 존엄(尊嚴)성을 갖으며 교사는 아이들을 존중해야 함을 당연시 생각했다. 소수의 엘리트에게 관심(觀心)과 집중(集中)을 쏟을것이 아니라 모든 아이들을 존중하며 평등한 관심과 교육을 해야만 한다고 강조(强調)하였다. 이런한 자세가 바로 민주 사회가 지향하는 교육이라고 하였다.사람의 길이 무수하게 많은 것처럼, 교육의 길또한 그렇다. 민주 사회가 오직 민주적 수단(手段)에 의하여서만 성취(成就)할 수 있는 것처럼. 교육역시 그러하다 할 수 있다. 교사의 길은 푸는 길. 묶는 길. 북돋우는 길 ,만드는 길 터진 길 막다른 길. 대략 이렇게 세분화(細分化)되어지는데 교사는 푸는 길. 북돋우는 길. 터진 길로 아이들을 안내(案內)해야 할 의무(義務)를 띄고잇다.다음으로 근대화(近代化)에 관한 언급(言及)이다. 근대화는 우리에게 인류의 안녕을 증진(增進)시키는 축복(祝福)으로만 인식(認識)되지만 동시(同時)에 파괴적인 세력(勢力)을 동반(同伴)하고 있다는 사실(事實)을 기억(記憶)해야 한다. 근대화란 사회 뿐 만이 아니라 사람에게 또한 적용(適用)된는 단어(單語)이다. 새로운 경험(經驗)을 위한 마음의 채비와 혁신(革新)과 변화(變化)에 대 나라에 비극(悲劇)을 가져왔다는 사실은 대한민국(大韓民國) 국민이라면 모두들 기억하고 있는 일이다. 그러므로 또 다시 같은 보수주의가 우리에게 또 하나의 비극을 가져와서는 안 될 것임을 또한 명심해야 한다.마지막으로 명일(明日)을 여는 교육 부분이다. 우리는 과거를 배워 현재를 살아가며 미래를 준비한다. 특히나 교사에게 있어서 , 교육이란 부분에 있어서 내일이란 실로 중요한 문제(問題)이다. 현재의 교사는 미래에 이 세계를 이끌어 나갈 인재(人才)들을 대하고 교육하는 직업이다. 세계는 지금 급속도(急速度)로 변화(變化)하고있으며 끊임없는 혁명(革命)속에 휩쓸리고 있다 그 충격(衝擊)이 우리에게도 미칠 것을 시간(時間)의 문제(問題)이며 이 변동(變動)은 때가 경과(經過)됨에 따라 더욱 급 템포로 파급(波及)될 것이 불 보듯 뻔하?. 국경(國境)의 경계(警戒)는 터지고 있으며 변화의 급류(急流)는 전 세계 방방곡곡으로 밀려들고야 말것이 확실(確實)하다. 현재는 즉 과거의 것이 변화한 것들과 미래(未來)를 준비(準備)하는 현재의 것들이 혼재(婚材)해 있는 상황(狀況)인 것이다. 이러한 거창(巨創)한 변화(變化)에 전면적(全面的) 혹은 직접적(直接的)인 충격(衝擊)을 현재로서는 받고 있지 않다라고 느끼는 우리로서는 아직 절박(切迫)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을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불원(不遠)한 장래(將來)에 이 충격(衝擊)이 우리를 침공(侵攻)할 것만을 틀림없다. 때문에 지금도 많을 혼란(混亂)과 상처(傷處)를 담고 살아간다. 우리는 전통주의(傳統主義)의 장벽(障壁)을 초월(初月)하여 새 해석(解釋)으로ㅆ 전통(傳統)을 살리며 현재를 살아나가야만 하는 것이다. 팽창 일로(一路)를 걷고 있는 물질주의(物質主義) 는 도덕적(道德的)인격(人格)의 성장(城將)을 요구(要求)한다. 물질주의(物質主義) 개인주의(個人主義)에 도전(挑戰)할 수 있는 정신적(精神的) 지주(支柱)인 인격(人格)의 중단(中斷) 없는 성장(城將)이 긴요(緊要)하다 그리고 양적(良籍) 확대(擴大)를 미덕이다.
    교육학| 2005.07.11| 9페이지| 1,000원| 조회(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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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교육사] 성균관 평가B괜찮아요
    成均館1. 성균관(成均館)의 역사(歷史)와 교육(敎育),문묘(文廟)의 역할(役割)조선시대(朝鮮時代)에 인재(人才)양성(養成)을 위하여 서울에 설치(楔齒)한 국립대학(國立大學)격의 유학(儒學)교육기관(敎育機關). 태학(太學) · 반궁(泮宮) · 현관(賢關) · 근궁(芹宮) · 수선지지(首善之地)라고도 하였다.우리 역사상(歷史上) 국립(國立) 최고(最高)학부(學部)의 명칭(名稱)으로 ‘성균(成均)’이라는 용어(用語)가 처음 사용(使用)된 것은 고려(高麗)시대(時代)인 1298년(충렬(忠烈)왕(王) 24)에 국학(國學)(國學, 國子監을 개칭(改稱)한 것)을 성균감(成均監)이라 개칭(改稱)한 데서 비롯된다. 그 뒤 1308년에 충선왕(忠宣王)이 즉위(卽位)하면서 성균감(成均監)을 성균관(成均館)이라 개칭(改稱)하였으며, 공민왕(恭愍王) 때 잠시 국자감(國子監)으로 환원(還元)되었다가 다시 성균관(成均館)으로 복구(復舊)되었다. 성균관(成均館)은 조선왕조(朝鮮王朝)가 세워진 뒤에도 그대로 존치(存置)되었는데, 고려시대(時代)의 국자감(國子監)이 기술교육(技術敎育)까지 담당(擔當)했던 것과는 달리 유학(儒學)교육(敎育)만을 전담(全擔)하였다.성균관(成均館)은 조선(朝鮮)태조(太祖) 때 한양(漢陽)(漢陽)으로 천도(遷都)한 뒤 새 도읍지(都邑地)의 동북(東北)부지역(지금의 종로(鐘路)구 명륜동 성균관대(成均館大)학교(學校) 구내(區內))에 터(攄)가 정해져 대성전(大聖殿, 단종때 大成殿으로 바뀜)과 동무(東무) · 서무(西무)의 문묘(文廟)를 비롯하여 명륜당(明倫堂) · 동재(東齋) · 서재(西齋) · 정록소(正錄所) · 식당(食堂) · 양현고(養賢庫) 등의 건물(建物)이 신축(新築)됨으로써 새로운 모습을 보이게 되었다. 이밖에 도서관(圖書館)인 존경각(尊經閣)과 반궁제(泮宮制)의 필수(必修)적인 요소(要所)인 반수(泮水)는 1478년(성종 9)에 갖추어졌다.제사(帝師)의 기능(技能)또한 성균관(成均館)의 역할(役割)이었다. 이것은 유교(儒敎)의 성현(聖賢)들에 대한 제사를 나누어 모셨다.그러나 1949년 전국유림대회 결의에 의해 동무와 서무에 종사한 중국 명현의 위판을 묻고 우리 나라의 명현 18위를 대성전으로 올려 배향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봄가을로 2회에 걸쳐 제사를 행한다. 이때의 제사를 문묘석전제(文廟釋奠祭)라고 하고, 이때 쓰이는 음악을 문묘악·문묘제향악·석전악·응안지악이라고 한다.2.성균관의 직제와 학생성균관의 직제는 조선 개국초에는 고려시대의 것을 그대로 답습하다가 1466년(세조 12)의 관제 개혁 때 대폭적으로 바뀌어 정비되었다. 그 얼마 후에 반포된 법전인 《경국대전》에 의하면 성균관에는 지사(知事) 1인, 동지사(同知事) 2인, 대사성(大司成), 1인, 사성(司成) 2인, 사예(司藝) 3인, 직강(直講) 4인, 전적(典籍) 13인, 박사(博士) 3인, 학정(學正) 3인, 학록(學錄) 3인, 학유(學諭) 3인의 관원을 두었다.성균관유생의 정원은 개국초에는 150인이었으나, 1429년(세종 11)에 200인으로 증원되었다. 이 중 반은 상재생(上齋生) 또는 상사생(上舍生)이라 하여 생원 · 진사로서 입학한 정규생(正規生)이었으며, 나머지 반은 기재생(寄齋生) 또는 하재생(下齋生)이라 하여 유학(幼學) 중에서 선발된 자들이었다. 기재생은 대체로 사학생도(四學生徒)로서 소정의 시험에 합격하여 입학한 승보기재(升補寄齋)와 부조(父祖)의 공덕에 힘입어 입학한 문음기재(門蔭寄齋) 등이 있었다. 성균관에 입학할 수 있는 자격은 ① 생원과 진사, ② 사학생도 가운데 15세 이상으로 《소학 小學》 및 사서(史書)와 오경(五經) 중 1경에 통한 자, ③ 공신과 3품 이상 관리의 적자(嫡子)로서 《소학》에 통한 자, ④ 문과 및 생원 · 진사시의 초시(初試)인 한성시(漢城試)와 향시(鄕試)에 합격한 자, ⑤ 관리 가운데 입학을 원하는 자에게만 주어졌다.3.원점제도성균관에 입학하여 동재와 서재에 기숙하며 공부하게 된 유생들은 아침 · 저녁 식사 때마다 식당에 비치된 명부인 도기(到記)에 서명하게 되어 있었는데, 아침 · 저녁자, 사치한 자, 교묘한 말과 보기 좋게 꾸민 얼굴빛으로 남의 환심을 사려는 자 등은 재(齋)에서 쫓아낸다. ⑤ 강경시험(講經試驗)의 점수는 대통(大通) · 통(通) · 약통(略通) · 조통(粗通)으로 나누며, 조통 이하는 벌한다. 6) 매월 8일 · 23일은 정기휴일로 세탁하거나 부모를 찾아뵈옵는 여가를 준다. 7) 해마다 품행이 단정하고 시무(時務)에 밝은 유생 1∼2인을 천거하여 서용(敍用)한다.5,교육내용과 특전성균관의 교육내용은 가장 기본적인 《대학》, 《논어》, 《맹자》, 《중용》의 사서와 《예기》, 《춘추》, 《시전》, 《서전》, 《주역》의 오경을 비롯하여 《근사록 近思錄》 《성리대전 性理大典》 《통감 通鑑》 《좌전 左傳》 《송원절요 宋元節要》 《경국대전 經國大典》 《동국정운 東國正韻》 등이었는데, 과거시험과목에 따라서 변동이 되기도 하였다. 이밖에 시(詩) · 부(賦) · 송(頌) · 책(策)과 같은 글을 짓는 방법을 비롯하여 중국의 왕희지와 조명부의 필법도 익히게 하였다. 성균관유생들에 대한 교육평가로는 학령에 명시되어 있는 학관일강과 순과를 비롯하여 예조월강(禮曹月講)이 있었는데 그 성적은 연말에 종합되어 식년시(式年試)와 천거에 참작되었다.한편 성균관유생들은 과거(科擧)에 있어서 여러 가지 특전을 부여받았는데, 관시(館試) · 알성시(謁聖試) · 춘추도회(春秋都會) 등이 그것이며, 그밖에 천거(薦擧)의 특전을 받기도 하였다. 성균관은 문과 준비를 위한 과업교육(科業敎育)을 담당하는 기관이었기에, 입학규정은 엄격하면서도 일정한 재학기간이나 졸업일이 없었다. 과거에 합격하는 날이 바로 졸업일이었다고 할 수 있다. 재학 중인 유생들에게는 성균관의 교육재정을 담당하는 양현고(養賢庫)에서 음식과 학용품 등의 생활필수품 일체를 제공하였다. 이러한 비용은 국가에서 성균관에 내려준 학전(學田)의 세수(稅收)와 성균관외거노비(成均館外居奴婢)의 신공(身貢)으로 충당되었다. 15세기 후반경 학전(學田)은 2,400여 결이었으며, 성균관 노비는 400여명이었다.의 실력행사로 맞섰다.7. 성균관의 기능과 조선왕조성균관은 대체로 인재양성의 기능과 함께 선성(先聖)과 선현(先賢)에 대한 봉사(奉祀)의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조선 초기에 있어서는 성균관이 주자학(朱子學)을 연구 보급하는 학문의 전당으로서의 기능과 주자학을 연구 보급하는 학문의 전당으로서의 기능과 주자학이념(朱子學理念)에 입각하여 관리를 양성하는 관리양성소로서의 기능을 발휘함으로써, 조선왕조의 지배사상과 관료체제를 재편성 강화하는 데 기여하였다는 점에서 그 역사적 의의를 찾을 수 있다.그러나 조선왕조가 안정되어감에 따라 공신(功臣) · 훈신(勳臣)의 자제들에 대한 각종의 교육 · 과거의 특전이 부여됨으로써 성균관은 주자학에 대한 학문적 연구보다는 집권 양반자제들의 입신출세의 도구로 이용되게 되어 성균관교육은 침체되어 버렸고, 그 대신 주자학의 학문적 연구를 바탕으로 하는 사학(私學)인 서원(書院)이 지방 양반자제들의 과거준비교육기관으로 발흥하게 되었다. 그러나 조선시대의 성균관은 관념적인 면에서 19세기말 신교육제도가 실시될 때까지 ‘풍화지원(風化之源)’ ‘현사지관(賢士之關)’으로서의 위치는 면면히 지켜왔다.임진왜란의 병화(兵火)로 성균관이 소실되자 난 후에 곧바로 복구사업이 이루어져 우선 문묘(文廟)와 명륜당(明倫堂) · 동재(東齋) · 서재(西齋) 등의 주요건물이 중건되고, 이어 존경각 · 정록청 · 식당 · 양현고 등의 부속건물도 다시 세워졌다. 그리고 그 뒤에 비천당(丕闡堂) · 일량재(一兩齋) · 벽입재(闢入齋) · 계성사(啓聖祠) · 육일각(六一閣) 등의 새로운 건물이 건립되어 그 규모가 전보다 확대되었다. 조선 후기에는 성균관의 직제가 일부 바뀌어 좨주(祭酒, 정 3품) 1인과 사업(司業, 정 4품) 1인을 신설하고 대신 사성(司成, 종 3품)과 사예(司藝, 정 4품) 각 1인을 감축하였다. 그리고 실제 운영상의 직제로서 임시직이거나 겸직(兼職)의 성격을 갖는 겸직강(兼直講) 1인 및 겸박사(兼博士) · 겸학정(兼學正) · 겸학록(兼學錄)의 응시에 주로 적용된 원점 300점의 기준도 크게 완화되어 1744년(영조 20)에는 50점으로 낮추어졌다.성균관의 교육재원으로 중요한 것은 학전(學田)과 노비였으며, 이밖에 조선 중기 이래 성균관의 수세지로 각 지역의 토전(土田)을 절수(折受) 받기도 하였다. 그런데 15세기 후반경에 2,400여결이나 되었던 학전은 17세기 중엽인 효종대에 358결로 크게 감소되었으며, 그 뒤 400결을 지급받았을 뿐이다. 그리고 성균관에서 절수받은 토전도 조선 후기에는 여러 궁가(宮家) 또는 국가기관에 의하여 빼앗기는 형편이었다. 한편 성균관 노비의 수는 15세기 후반경에 400여명이던 것이 18세기 전반경에는 신공(身貢)을 바치는 장노비(壯奴婢)의 수가 크게 늘어나 7,000여명이나 되었다. 그러나 성균관 노비가 1750년(영조 26)에 호조(戶曹)로 이속(移屬)됨으로써, 이후로는 호조에서 신공을 거두어 1750년에 성균관에서 거두었던 노비의 신공 총액만큼을 성균관에 보내게끔 되었다. 대체로 조선 후기에는 성균관 자체의 교육재정이 궁핍해지고, 과업교육(科業敎育)의 기능까지 담당하는 서원(書院)이 발달한 데다 성균관유생들이 당쟁에 휩쓸려 학업을 소홀히 하고, 집권층인 벌열(閥閱)들이 과거시험을 불공정하게 운용함으로써 성균관은 그 교육기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부진하게 되었다.8.개항 이후 성균관1876년(고종 13) 개항 이후 개화의 분위기 속에서 구교육의 총본산인 성균관은 더욱 침체하게 되었다. 이에 성균관 교육의 강화를 위하여 1887년에 성균관에 경학원(經學院)을 부설하였지만, 종래의 유학교육만을 답습함으로써 당시의 개화풍조에 부응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큰 성과는 거두지 못하였다. 그 뒤 1894년의 갑오경장(甲午更張) 때 과거제의 철폐와 함께 새로운 관리등용법이 마련됨으로써 성균관은 인재양성의 교육기능을 상실한 채 학무아문(學務衛門)의 성균관급상교서원국(成均館及庠敎書院局)으로 변신되고 말았다.그러나 이듬해 성균관은 관제가 새로이 마련되어 장(長) 1인, 교수(었다.
    교육학| 2005.07.11| 6페이지| 1,000원| 조회(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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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육학] 한국 교육의 양적 팽창과 정책의 변화
    교육(敎育)의 양적(兩的) 팽창(膨脹)과 정책(策)의 변화(變化)1.서론(序論)해방(解放)이후 일제(日帝)에 억압(抑壓)으로 인해 받지 못했던 교육열(敎育熱)이 타오르며 양적(兩的)으로나 질적(質的)으로 많은 팽창(膨脹)과 발전(發展)을 해 왔다. 해방(解放)직전(直前)인 1940년대(年代) 후반(後半)은 한국교육의 제도적(制度的) 기틀을 마련한 정초(定礎)기이고, 1950년대(年代)는 기반구축(基盤構築)기, 70년대(年代)는 다양(多樣)한 교육정책(敎育政策)이 시도(始睹)되기 시작(始作)하였으며 양적으로 크게 성장(城將)한 시기이기도 하다. 1980년대는 이제까지의 성장을 토대(土臺)로 질적인 발전을 지향(志向)한 시기로 볼 수 있다. 한국교육사50년 사를 살펴보면 전체적(全體的)으로 ‘양적(兩的) 팽창(膨脹)’으로 집약(集約)할 수 있다. 해방(解放) 당시(當時)와 비교(比較)해서 학교수와 학생수 교원수가 전체적으로 크게 성장하였다. 고등학교의 경우 이전(以前)까지 고등교육의 기회(機會)가 크게 제한(制限)되었던 상황(常況)에서 해방이후 가장 두드러진 성장을 보였다. 양적 팽창과 정책(政策) 변화를 좀 더 세부적(細部的)으로 살펴보기로 하자2.본론(本論)1)의무교육(義務敎育)의 실시(失恃)와 확충(擴充)‘모든 국민(國民)은 능력(能力)에 따라 균등(均等)하게 교육을 받을 권리(權利)를 가진다’ 헌법(憲法) 31조의 내용(內容)이다. 의무교육은 기회균등(機會均等)의 원칙(原則)에 입각(入閣)하여 모든 국민에게 사회적(社會的) 신분(身分)이나 경제적(經濟的) 지위(地位)에 차별(差別)을 두지 않고 국민으로서 요구(要求)되는 자질(資質)함양(涵養)을 위한 최소한(最小限)의 필수(必修)적인 공통(共通)교육을 보장(保障)하기 위한 제도(制度)이다. 초등(初等)학교의 경우 해방전 진학(進學) 학생의 비율(比率)이 64%에서 해방후 74.8%까지 향상(向上)되었으며 의무교육 실시(失恃) 10년도 안된 1959년 96.4%까지 크게 성장(城將)하엿다. 70년대는 초등교육(財政的)이유(理由)로 실현(實現)되지 못했었다. 정부(政府)수립(樹立)이후(以後) 헌법(憲法)16조를 재정(在廷)해 의무교육(義務敎育)실현(實現)에 법적 기초(基礎)를 마련하였다. 그 후 1952년 ‘의무교육(義務敎育)완성(完成) 6개년(改年)계획(計劃)’을 수립(樹立)하여 취학률(就學率)을 96.1%호 끌어올리고 부족(不足)교실(敎室)을 신축(新築)하고 재원(財源)을 확보(確保)하는 목표(目標)를 세웠다. 이 목표는 취학률에 있어서는 초과달성(超過達成)을 이루었지만 교실(敎室)과 교원(敎員)등의 확보(確保)는 턱없이 목표(目標)에 그치치 못하였다. 그래도 이 계획(計劃)은 한국(韓國)교육계획(敎育計劃) 가운데 가장 성공적(成功的)으로 집행(執行)된 정책(政策)으로 기록(記錄)된다. 1967년엔 ‘도서벽지교육진흥(敎育振興)법’이 제정(帝政)되어 교육(敎育)의 지역(地域)간 균형발전(均衡發展)을 도모하엿다. 이 시기에 경제개발(經濟開發) 5개년(改年) 계획(計劃)이 발표(發表)되었는데 이 결과(結果)로 학교(學校)의 증설(增設)과 교실(敎室)의 신축(新築), 그리고 재정투자(財政投資)액도 2배가까이 초과(超過) 달성(達成)되는 쾌거(快擧)를 올렸다. 또한 사립학교(私立學校)의 설립(設立)을 국가에서 적극(積極) 권장(券狀)하여 교실(敎室)부족문제(問題)를 해결(解決)하려 하였다. 이 조치(調治)로 사립(私立)초등(初等)학교(學校)가 72개교(改敎)가 늘었고 1979년(年)에는 교과서(敎科書)의 완전(完全) 무상(無償)공급(功給)이 실현(實現)되었다. 또한 평준화(平準化)와 과외수업(課外授業)을 없애기 위해 1969년(年)부터 중학교(中學校) 무시험(無試驗) 입학(入學)제도(制度)는취학률(就學率)을 높여 의무화(義務化)를 위한 기반(基盤)을 조성(助成)하는 역할(役割)을 담당(擔當)했다. 교육법(敎育法)에 ‘모든 국민(國民)은 6년(年)의 초등교육(初等敎育)과 3년(年)의중등교육을 받을 권리가 있다’ 고 규정(規定)하였지만 당시(當時)의 여건(與件)상 불가능(不상(現象)을 일으켜 과열(過熱)입시경쟁(入試競爭)을 중학교(中學校)에서 고등(高等)학굥로 옮겨놓은 결과(結果)를 초래(招來)하였다. 당시(當時) 직면(直面)한 교육의 문제(問題)들을 살펴보면 먼저 입시(入試)준비(準備)로 학생들이 공부(貢賦)만을 중시(重視)했기 때문에 체력(體力)적으로 정신적(精神的)으로 발달(發達)을 하지 못하였으며 정서적(情緖的)으로 많은 불안감(不安感)에 시달려야 했다. 또한 학교교육(學校敎育)이 입시(入試)위주(爲主)인 주입식(注入式)수업(授業)으로 변모(變貌)하여 그 운영(運營)이 비정상적(非正常的)이었으며 경쟁심(競爭心)유발(誘發)로 인한 이기주의(利己主義) 풍토(風土)가 만연(漫然)되어 갔다. 그리고 학교간 지역(地域)간의 교육 수준(水準) 격차(格差)가 날로 심화(深化)되어가고 잇었다. 이런 상황(常況)속에서 부모(父母)들은 자식(子息)의 교육을 위해 사교육에 많은 돈을 들였고 치맛바람이라는 말이 생겨났으며 입시학원만을 최고로 여겨 공교육이 불신(不信)되고 있엇다. 그렇게 진학(進學)한 학교이기에 학벌(學閥)중시(重視) 풍토도 만연되고 있었다. 이런 고교입시(高校入試)제도(制度)의 개혁(改革)을 핵심(核心)내용으로 하고 학교간의 극심(極甚)한 격차(格差)를 완화(緩和)하기 위한 시설(施設), 교원(敎員) 등의 여건(與件)을 평준화(平準化)하는 것을 주요(主要)내용으로 하여 고교평준화 정책(政策)을 입안(立案)하게 되었다. 정책적(政策的)인 면에서 살펴보자면 교육부(敎育部)에서 실태조사(實態調査)를 하여 폐교(廢校), 학급(學級)감축(感祝), 조거부 학생배정(拜呈) 등의 조치(調治)를 취하는 한편 공립학교(公立學校)의 공납금(公納金)을 사립(私立)수준(水準)으로 끌어 올렸다. 교원(敎員)의 질적(質的) 평준화(平準化)를 위해 단기연수를 실시(失時)하는 동시(同時)에 순위고사(順位考査)를 실시(失時)하였고 잡무(雜務)경감(輕勘)을 위한 법적(法的) 장치를 마련하여다. 그러나 이 정책(政策)은 평준화(平準化) 지역(地域)의 일부(一夫등 정책의 수정(綏定)이 있었다. 평준화 정책의 성과(成果)로는 치열(治熱)한 입시경쟁(入試競爭)의 해소(解消)와 어느정도 교육(敎育)여건(與件)의 평등화를 이룬것. 실업(實業)고교에 우수한 인재(人才)들이 몰리게 한것. 대도시 집중현상(集中現狀)이 해소된 것등이 있다. 하지만 그 부작용(副作用)도 있었다. 내용으로는 학생의 선발(選拔)권(權)을 학교가 박탈(剝奪)당했다는 것, 개인차(個人差)로 인한 학습(學習)지도(志道)와 생활지도(生活指導)를 하기 어려워 졌다는 점 , 사학(私學)의 위축(爲祝), 학군(學群)간의 격차(格差) 상존(尙存)등이 있다.3)7.30 교육개혁대학 입학을 목표로 한 과열과외 현상은 고등교육을 마비시키고 창조력(創造力) 응용력(應用力) 종합(綜合)력을을 저해하고 전인적 발달을 저해(沮害)하고 과다한 과외를 가져왔다. 과외열풍은 고등교육(高等敎育)협소(狹小)와 대학간의 질적격차 입학시험(入學試驗)제도의 불합리성(不合理性) 재수(再修)생의 적체(積滯) 학교교육불신 학력간 소득(所得) 격차(格差) 심화(深化) 등에서 기인(基因)하였다. 따라서 1980년 7월30일 ‘국가보위(國家保衛)비상대책(非常對策)회의(會意)’는 ‘교육(敎育)정상(正像)화(化) 및 과열(過熱)과외(課外) 해소(解消)방안(方案)’을 발표하고 ㄱㅇ개혁에 나섰다. 그 내용으로는 내신성적(內申成績) 반영(反影), 대학 졸업정원(卒業定員)제실(帝室)시. 전일(全一)수업(授業)제(制) 대학의 운영(暈影) 대학입학 정원(正員)의 대폭(大幅) 확대(廓大). 방통대의 확대 대학을 4년으로 연장(延長) 등이 있었고. 재원(財源)확보(確保)책을 강구(講究)함과 동시에 교원의 처우(凄雨)를 개선(改善). 학력(學力) 평가(平價)의 관리기구(管理機構)를 설치(楔齒)한다는 것을 대책(對策)으로 내놓았다. 그리고 사회(社會)대책(對策)으로 불필요한 학력(學力)제한(際限)의 철폐(鐵肺), 직원(直員)의 학력(學力)별(別) 비율(比率)에 의한 채용(採用), 산학(産學)연계(連繫)의 강화, 건전한 교육 있다. 시대적으로 살펴보자면, 먼저 1045~1960년까지의 양적 팽창기가 있다 일제치하아래 한국인의 고등교육의 기회는 아주 협소했으며 공학분야는 아예 폐쇄되어있었다. 광복과 함께 정부는 대중교육을 정책의 중심으로 두고 전환을 시도하였다. 그로인해 그 동안 억압되었던 고등교육 수요가 분출하여 정부에서는 교원양성을 위한 사범대학을 신설하고야간대학을 설립하는 등 고등교육의 확충에 주력하게 되었다. 그러나 6.25동란으로 인해 그 동안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정부는 또다시 국립대학을 창립하고 사립대학의 인가를 추진하고 징병의 유예와 같은 특혜를 주어 고등ㄱㅇ의 팽창을 유도하였다. 또 연합국가고시제도를 실시하고 대학설치기준령을 공포하는 등의 정책을 수립하였다.1961~1970년?지의 조건정비기는 교ㅇ의 질적 향상을 위한 조건의 정비에 초점을 두고 통제를 보다 강화하는 정책을 취한 시기이다. 이때는 대학입시의 개혁 대학정비 정원령의 제정 등의 현식적 정책들이 수립되었다. 또한 사립학교법 제정으로 난립을 막았으며 지원과조성보다는 정부의 통제권을 강화하고 공공성을 강조하는 경향을 띄었다. 5.16군사혁명의 정부는 국가고시제, 교수자격심사제, 학사자격고시제와 같은 정책을 추진하엿는데 이는 고급인력의 과잉 공급으로 인한 실업률 증가, 간판을 중요시하는 풍토, 영리위주의 사학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함이었다. 따라서 대학의 통합과 폐지, 학생정원감축등의 방법으로 다스렸다. 또 연구교수제를 도입하여 연구비를 지급하였으며 우수한 학생들에게 장학금의 혜택과 산업교육진흥법을 제정하였다. 이러한 조치로써 학교법인이나 장학재단의 건전한 육성과 발전을 도모하였다.1971~1987년까지는 계획 개혁기라하여 고등교육의 개혁사업이 본격적으로 추진된 시기이다. 제1차 2차 5개년계획의 성공으로 노동인력의 질적 개선을 통한 생산성의 향상이 절실히 요구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교육의 국제경쟁력 신장과 개발이 필수적인 것을 인식한 까닭이다. 이로 인해 방송통신대학, 개방대학 등이 설립되었으며
    교육학| 2005.07.11| 7페이지| 1,000원| 조회(4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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