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영삼 정부의 개혁과 한계 2004721022 이동권◈ 민주주의 정착과 개혁의 과제민간 정부가 구성된 것은 제2공화국이 1961년 쿠데타로 붕괴된 이후 32년 만의 일김영삼 정부의 정치적 과제는 권위주의 정권의 잔재를 청산하는 동시에 노태우 정부에서 시작되었던 정치적 민주화를 심화 시키는 일, 신정부는 군사 정권하에서 고착되었던 정경 유착과 부패구조, 그리고 각종사회.행정. 사법적인 병폐들을 개혁해야할 과제를 안게됨민주적 절차의 확립에는 어느정도 성공, 광범위한 사회. 정치 개혁에는 실패하였음◈ 민주주의의 진전과 한계김영삼 정부 - 민주주의 재생의 제2단계를 의미정부에 이르러 정착의 단계에 들어서게 된 것김영삼의 집권도 구 권위주의 세력과의 연합을 통한 것이었기 때문에 이들과의 정치적. 도덕적 단절이 완전할수 없고, 정치적 한계를 규정지었을 뿐 아니라 집권기간동안 내내 정부와 여당을 괴롭힌 요인1. 군정 유산의 청산과 민간화의 완성김영삼 정부의 노력은 군의 개혁에서 대표적으로 나타남신정부는 정보 사찰 기구로서 민간 정치 영역에 적극적으로 개입했던 기무사의 조직과 권한을 축소하여 본연의 업무에 충실토록 하였다.2. 사정과 도덕 정치의 표방신정부는 사정작업에 착수 하였다.감사원이 처음으로 제 역할을 찾아 사정을 주도하였다.3000명의 관료들이 체포 해임, 혹은 다른 형태의 처벌을 받았다.정치 보복의 시비를 낳고 구조적인 부패 척결에 실패함으로써 정부가 처음 제시했던 깨끗한 정치의 정착에 기여하지 못하고 막을 내리고 말았다.3. 민주주의의 제도적 기반 강화민주주의 정착을 향한 제도적인 조치들로서 신정부는 선거법 개정과 지방 자치제의 확대등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4. 정권과 정치 사회의 문제점① 일인 지배의 정권 구조② 지역 붕당 체제의 강화③ 민자당 내 세력 다툼과 김종필의 이탈④ 6. 27 지방 선거와 김대중의 정계복귀⑤ 15대 국회 의원 선거5. 국가. 사회 관계의 변화① 시민 사회의 활성화② 노사 관계 - 전면적인 노동 관계법 개정(노동자들의 단체 결성과 교섭의 폭이 넓혀져 노사간의 불균등한 관계가 어느정도 시정되었다.)③ 재벌과 정부 - 당시의 재벌개혁은 단기적인 국제 경제력 강화에 초점을 맞춘 정책 수정으로 나타남◈ 개혁 정치의 실패1 개혁의 요약김영삼 정부는 그 정통성을 정치의 민간화 완성과 함께 각종의 정치. 사회. 경제 개혁에서 찾으려고 함처음 과거 정권의 비리에 초점을 맞추어 사정 개혁이 진행국가 정책의 방향을 경쟁력 강화로 전환2 경제. 사회 개혁김영상정부의 경제. 사회 개혁중 전국민적인 관심사로 정치적인 중요성을 지녔던 금융 실명제와 부동산 실명제의 실시는 큰 성과였다.① 금융실명제 ② 부동산 실명제3 개혁정치의 문제점 (김영삼 정부)① 체계적이고 일관된 철학과 논리에 입각하지 못하고 즉흥적.임기 응변적② 개혁을 정치적 사고로 접근하는 능력이 부족, 광범위한 개혁 연합을 형성하는데 실패③ 특히 대통령 한사람에 집중된 권력 구조와 정치권의 파당적 정치 행태는 이러한 문제를 더욱 악화
세계정치론I 2004721022 이동권7장 현실주의현실주의는 국제관계의 주된이론이다. 왜냐하면 현실주의는 국제 체제의 표준적인 삶의 형대인 전쟁상태에 관해 가장 설득력 있는 설명을 제공하기 때문이다.머리말 : 영속적인 현실주의의 지혜현실주의가 제공한 처방은 미국이 세계적인 패권국으로 부상하는데 특히 적절했다.현실주의가 적대적인 환경에서 국가의 이익을 최대화하는 지침서와 같은 것을 제공했다는 사실은 왜 현실주의가 세계정치의 연구에서 중심적인 전통 으로 남아 있는지를 부분적으로 설명해준다. 현실주의자들은 보편적인 도덕률이 존재한다는 생각에 회의적이다. 나아가 현실주의자들은 생존의 필요성 때문에 국가 지도자들은 인류 전체에 대한 관심, 경애, 보다 넓은 이익에 긍정적인 가치를 부과하는 전통적인 도덕성으로부터 거리를 둘 필요가 생긴다고 주장한다. 현실주의는 학문 영역 밖에서 훨씬 오랜 역사를 갖고 있다. 냉전의 종언은 자유주의의 재생을 가져왔고 탈실증주의의 기치 아래 다양한 더욱 비판적 접근들이 모여들고 있지만, 천년기의 말에도 현실주의는 계속해서 학자들의 관심을 끌고 정책결정자들에게 지침을 제공하고 있다.하나의 현실주의, 아니면 여러 가지?마키아벨리는 국가의 생존을 위해 모든 시기와 장소를 걸쳐 통용될 수 있는 보편적인 교리를 고안하는 것의 어려움을 인식했다는 점에서 역사현실주의의 대표적인 고전적 주창자라고 할 수있다. 구조현실주의의 계보는 투키디데스가 인간행위의 철칙으로서 권력정치를 묘사한 데에서 시작된다. 권력의 추구와 지배하려는 의지는 인간 본성의 기본적인 측면으로 간주된다.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이기적인 행위자로서의 국가의 행태는 단지 국가를 이루고 있는 사람들의 특성을 반영한 것으로 이해된다.모겐소는 정치란 일반적인 사회와 같이 인간 본성에 기초한 객관적인 법칙에 의해 지배된다. 라고 말한다.현실주의로 분류되는 다양한 이론가와 실천가들에게 일관성의 신화 를 강요하는 위험성을 인식하는 한편, 모든 현실주의자들이 동의하는 공유된 명제의 핵심을 판별하려고 노력하는 것 에도 중요한 이유가 있다.첫 번째로 단순함의 미덕이 있다. 두 번째의 이유는 전통을 가로지르는 다양한 분파에도 불구하고 모든 현실주의가 공통의 명제를 공유하고 있다는 느낌이 있기 때문이다.현실주의의 핵심다양한 분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모든 현실주의자가 다음의 세 가지S :국가주의, 생존, 자조에 동의한다고 주장한다.* 국가주의현실주의자들에게 국가는 주된 행위자이며, 주권은 그 특징적인 속성이다. 주권국가의 의미는 불가피하게 무력의 사용과 연결된다. 국내적인 차원에서 무력과 국가 사이의 관계를 보여주기 위해서는 주어진 영토 내에서 물리적인 힘의 정당한 사용의 독점 이라는 국가에 대한 베버의 유명한 정의를 살펴보는 것으로 충분하다. 이러한 영토적 공간 내부에서 주권은 국가가 법을 만들고 집행하는 최고의 권위를 갖는다는 의미이다.현실주의자들은 국가들이 무정부 상태에서 다른 국가들과 안보와 시장, 그리고 영향력 등을 놓고 경쟁을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경쟁의 속성은 종종 제로-섬 관계, 즉 한 행위자의 이득은 다른 행위자의 손해가 되는 것으로 묘사된다.모겐소는 권력을 다른 사람들의 마음과 행동에 대한 지배 라고 정의한다. 권력의 모호한 개념에 대해 현실주의자들은 두 가지 요점을 언급한다. 첫째, 권력은 관계적인 개념이다.둘째, 권력은 상대적인 개념이다.* 생존모든 부류의 현실주의자 대부분을 묶는 두 번째 원칙은 국제정치에서 가장 두드러진 목표가 생존이라는 것이다.
국제관계의 역사 (1948년 이후) 2004721022 이동권1) 2차 대전 이후 ‘제국주의’의 붕괴제국주의의 붕괴는 세계정치의 중재자로서 유럽의 중요성이 줄어든 것을 반영하는 동시에 촉진시켰다. 민족자결이 국제정치의 기본 원칙이어야 한다.는 믿음이 제국주의에 대한 기존의 태도와 가치체계의 전환을 가져왔다. 제국주의 시대에 제국들은 구제정치적 지위를 인정받았다. 하지만 1945년 이후 제국주의를 보는 국제적인 시각은 적대감의 증가로 바뀌었다.식민세력의 태도, 반제국주의 세력의 이념과 전략, 외부 강대국의 역할등 탈식민화 과정에 영향을 준 요인들은 다양했다.영국1945년 영국의 제국은 지구전체에 퍼져 있었다.1945년 이후 자결을 점차 정의로 인식하고 민족주의의 힘을 체험하면서 제국주의 정책의 재검토가 이루어졌다. 1947년 ‘영국제국의 보석’으로 불린 인도에서의 철수는 가장 극적이었다.영국제국의 전환은 전반적으로 평화적이었으며, 민주적. 안정적인 국가들을 탄생시켰다.영국의 경험은 프랑스에 비해 훨씬 성공적이었다.1948년 이후 남아프리카공화국은 제국주의의 인종적 형태로 널리 인식되는 인종차별정책을 시행했다. 또한 남아프리카공화국은 나미비아의 점령에서 보다 전통적인 형태의 제국주의를 실천하였고, 앙골라와 모잠비크의 탈식민화/냉전 투쟁에서 중요한 영향을 행사했다. 제국에서의 철수 결정은 흔히 민족주의자들과 싸우는 비용이 너무나 크다는 판단에서였다. 이러한 경우에도 영국은, 프랑스와 마찬가지로, 독립이 식민세력에서 유리한 조건에서 이루어지도록 노력했다. 영국과 프랑스는 자신들의 우위에 봉사하도록 짜여진 경제적. 정치적 틀을 통해 자신들의 이익을 극대화하고자 했다. 이러한 시도의 주요한 수단은 아프리카에서 영국연방과 프랑스연합이었다. 하지만 영국연방은 자체의 독자적인 정체성을 형성하고 자주 영국정부와 다른 시각과 관심을 표명했다.프랑스프랑스는 제 2차 세계대전 중에 점령되었었고, 전후 프랑스의 역대 정부는 제국의 지위를 유지하여 프랑스의 국제적 위신을 보존 하고자 했다.장기적인 게릴라전과 호치민이 이끄는 베트남혁명세력에게 군사적 패배를 당한 이후 철수하게 되고 만다. 그러나 프랑스는 알제리에서는 철수하려 하지 않았다. 그 결과로 1954년부터 1962년까지 벌어진 전쟁은 4만 5,000에 가까운 사망자를 내고, 프랑스 자체를 내전 직전까지 몰고 갔다.포르투갈아프리카의 마지막 유럽제국을 유지ㅏ고 있던 포르투갈은 리스본의 군부독재가 무너지자 제국에ㅓ 신속하게 물러났다.기니-비사우,카보베르데, 상투메에서 독립으로의 전환은 비교적 쉽게 이루어졌다. 그러나 모잠비크와 앙골라에서 반식민주의 투쟁은 lal 다른 집단 사이의 갈등으로 전환되어 가고 있었다. 이들 반식민주의 집단들은 다양한 외부 세력으로부터 재정적.군사적 지원을 받았다. 그 결과 이들의 갈등은 반제국주의적. 부족적. 이념적 충성이 봅합된 형대로 나타났다.냉전의 시각과 적대의시이 지역적 불안정을 초래하고, 지역적 불안정의 상승과 장기화는 다시 지구적인 미.소간의 긴장을 악화시켰다.그결과로 지역주민들은 지속적인 내전에 시달렸고, 궁극적으로 모잠비크의 경우에는 흉작과 대규모 기아에 직면했다. 일반적인 수준에서 신생 독립국들의 정치적 안정성을 검토하는데 있어, 어느 정도로 제국주의 국가들이 부족적 분열을 만들어 내고 악화시켰는가는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그 못지않게 중요한 다른 문제는 자신의 정치적. 경제적 문제들을 처리하는 신생 독립국의 정치적 리더십의 능력이다.탈식민화가 성공적인지에 대한 판단은 부분적으로 유럽의 시각을 택하느냐 혹은 독립운동의 시각을 택하느냐에 달려있다.2 )냉전의 발단과 경과1945 - 1953 : 냉전의 발단유럽에서 냉전의 발단은 전시 얄타와 포츠담회담의 원칙들이 지켜지지 않은 결과였다.서구에서는 소련의 동유럽정책이 전통적인 안보의 고려가 아니라 이념적 팽창에 의한 것이라는 인식이 커졌다. 트루먼 독트린 및 그와 연관된 봉쇄정책은 미국이 본연적으로 방어적이라는 미국의 자기 인식을 반영하고 있었다. 사회 민주주의자들과 여타 반공주의자들은 체계적으로 약화되고 제거 되었다. 유일한 예외는 자신의 정권을 공고히한 유고였다. 이후 티토의 유고는 제 3세계의 비동맹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냉전의 첫 번째 주요한 대결은 1948년 베를린에서 발생했다. 독일의 이전 수도였던 베를린은 동서로 나뉜채 소련 점령지역의 심장부 깊숙이 남겨져 있었다. 스탈린은 1949년 5월 베를린 봉쇄를 끝냈다. 1949년 4월의 북대서양조약기구조약은 유럽방위에 대한 미국의 공약이었다. 이는 현실적으로 미국이 소련의 ‘침략’을 억지하기 위해 핵무기를 사용할 의지를 의미했다. 소련의 입장에서 자본주의 세계의 ‘정치적 포위’는 곧 점증하는 군사적, 구체적으로는 핵의 위협을 초래했다. 냉전의 기원은 유럽에 있었지만, 아시아와 다른 지역의 사건과 갈등들도 중요했다. 1949년에 중국의 30년 내전이 마오쩌둥이 이끄는 공산주의자들의 승리로 끝났다. 1950년 남한에 대한 북한의 공격은 세계 공산주의의 전반적인 공세의 일환으로, 그리고 그에 대항하는 미국의 결의와 국제연합의 의지에 대한시험으로 해석되었다.1953 - 1986 : 경과(1953-1969 : 갈등, 대결과 타협)(1969-1979 : 데탕트의 부침)(1979-1986 : ‘제 2의 냉전’)한국전쟁의 결과중 하나로 서유럽에서 미국의 재래식 병력이 증강되었다. 이는 한국전쟁이 서유럽 침공이란 소련의 진짜 목적을 감추기 위한 책략일 경우에 대비하기 위한것이었다.유럽에서 냉전의 대결이 공고해질수록 유럽의 미국에 대한 안보 의존은 깊어갔다. 1954년 서독의 재무장은 1955년 바르샤바조약의 창설을 촉발 시켰다. 소련은 유럽의 ‘전역 핵’ 군비를 통해 미국의 전반적인 핵 우위를 상쇄하고자 했다. 1950년대 후반에 미국 역시 핵 미사일을 유럽에 배치했다.스탈린의 후계자가 된 니키타흐루시초프는 소련사회의 현대화를 시도하였는데, 이는 그 동안 억눌려 있던 동유럽의 개혁적 추세를 풀어놓는 결과를 초래했다.자유민주주의와 민족자결에 대한 미국의 공약은 미국의 경제적.정치적 이익에 대한 인식과 냉전의 시각에 의해 조정되었다. 1961년의 베를린과 1962년의 쿠바를 둘러싼 위기는 냉전에서 가장 위험한 순간이었다. 두 경우 모두 직접적인 군사적 충돌의 위험이 있었으며, 특히 1962년 10월에는 핵전쟁의 위험이 분명히 존재했었다. 1962년의 사태 이후 공존과 경쟁의 보다 안정적인 시기가 도래했다. 유럽에서 데탕트는 서독 총리 빌리 브란트의 동방정책에서 유래하여 베를린의 독특한 위상과 동독의 주권을 인정하는 합의를 이끌어내었다. 미.소간의 데탕트는 핵위기를 피해야 한다는 약국의 공동인식과 통제되지 않은 군비 경쟁을 피해야 할 경제적 군사적 요구에 그 뿌리를 두고 있었다.데탕트로 알려진 시기는 두 초강대국들이 타협과 합의의 틀에서 양자관계를 종정하려시도했다. 서구에서 데탕트는 미.중의 화해를 이끌어내기도 한 닉슨대통령과 그의 참모 키신저의 정치적 지도력과 연관되어 있다. 미.소관계의 이 새로운 시기에 양국의 정치적 대결이 끝난것은 아니었다.초강대국간의 긴장과 대결이 이어진 1979~1986년 시기는 냉전 초기 1946~1953년과 비교하여 ‘제2의 냉전’으로 불린다. 서유럽과 소련에서는 핵전쟁의 실제적 공포가 존재했다.레이건 행정부의 군사력 사용은 제한적이었다. 수사와 인식은 현실과 거리가 있었던 것이다.1983년 소련 방공부대는 소련 영공에 있던 한국 민항기를 격추시켰다. 이에 대한 미국의 대응과 미국 핵미사일의 즉각적인 유럽 배치는 동서관계의 긴장을 고조시켰다.외교정책과 국내 개혁에 관한 고르바초프의 ‘신사고’는 소련의 대외관계와 소련사회 내의 혁명을 창조햇다. 소련 내부적으로 글라스노스트와 페레스트로이카는 민족주의와 여타 비공산주의 세력의 활성화를 가져왔고, 고르바초프에게는 당황스럽게도 이는 소비에트사회주의 공화국연방을 붕괴시키게 된다.외교정책에서 고르바초프의 목적은 소련의 대미.대뮤럽 관계의 전환이었다. 고프바초프의 국내 개혁들 역시 동유럽 변화의 기폭제로 작용했다.시나트라 독트린은 동유럽이 이제 자신의 방식을 모색하는 것이 허용되었음을 의미했다. 동유럽 전역에서 모스크바와 연계된 정권들이 민주화되었고, 이관정은 대부분 크바와 연계된 정권들이 민주화 되었고, 이 과정은 대부분 평화롭고 신속하게 이루어졌다.
6월 항쟁과 6.29선언 2004721022 이동권5공은 강권 통치로 일관되어 왔음전정권의 4.13 호헌조치라는 위급처방은 개헌 공방을 심화시키기에 충분전국 주요도시에서 '박종철 고문치사사건과 호헌 철폐에 대한 규탄대회'를 강행직선제 개헌의 쟁취로 민중에 의한 정권의 굴복을 가져 온 획기적인 투쟁으로 한국 현대사에 자리매김(1) 6월 항쟁의 전개1 항쟁 준비시기전정권의 4.13 호헌 조치 이후 이에 대응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재야세력의 응집된 결정체인국민운동본부의 탄생과 민정당의 6.10전당대회에 초점을 맞추는 시기2 항쟁 1차시기직선제 개헌운동의 동시다발적 개최를 합의한 시점, 대규모시위행사를 기화로 침묵하던 민중의 참여를 유도한 시기3 항쟁 2차시기6.10대회의 성공적인 개최와 국민적 지지 속에 운동본부의 미비한 조직과 인원을 점검하면서 호헌 반대, 구속자 석방을 요구하면서, 그 요구의 관철을 위해서 18일을 최루탄추방운동시기로 설정하여범국민 운동을 전개하기까지의 시기4 항쟁 3차시기최루탄추방운동으로 점차 고조되는 국민적 운동을 호헌 철회와 양심수 석방, 최루탄 사용중지,언론자유보장 등으로 유도시키면서 평화 대행진으로 연계된 시기5 항쟁 쟁취시기연일 격화되는 국민적 호헌 철폐운동에 정부여당의 승복을 의미하는 6.29선언의 발표와 아울러 정권의 승복까지의 시기로서, 국민 운동측과 대다수시민의 참여하에 직선제 개헌을 쟁취한 최후의 항쟁시기(2) 6.29선언의 수용의미6.29선언을 수용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첫째, 제2의 광주항쟁을 우려한 것 과 미국의 평화적 해결촉구가 부담둘째, 전면적인 민주화안을 수락하도록 촉구한 점셋째, 미국이 6.10 항쟁이후 적극적인 자세를 보여주었으며,군부개입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는 점(3) 6.29선언의 평가6.29선언의 결정시기 및 과정을 논의의 대상으로 하여 3가지로 요약1 전두환 대통령과의 사전협의가 없이 노대표 단독으로 감행한 것으로 보이는 측면2 전대통령과 노대표 간에 사전협의를 거친 합작품으로 보는 관측3 6.29선언은 전대통령의 독자적 작품이라는 측면→ 6.29 선언은 6.10 시민항쟁의 필연적 결과◎ 성격1) 민중이 지배권력과 외세를 동시에 후퇴 시킨 점2) 지배권력과 외세의 교활한 후퇴전술 및 교란작전인 점→ 6.29선언의 한계, 군부에 의해 주도되고 외세에 의해 여전히 간섭받는 지배질서와통치 이데올로기를 청산하지 못한 점 지적◈ 6.29 직후 민주화 운동6.29직후의 민주화 운동 → 노동자계급의 대투쟁에서 비롯광범위한 노동대중이 자주적, 민주적으로 참여했다는 점 → 대중적 민주화 운동7∼9월 노동자 대투쟁 전개상 세 시기로 구분。첫 번째 시기 : 노동정책에 억압받다가 6.29선언을 계기로 노동권의 쟁취에 앞장서는 시기。두 번째 시기 : 전국적 현상으로 확산된 시기。세 번째 시기 : 노동자 투쟁이 하강국면에 들어간 시기평가1) 노동자계층 내부의 반성과 민중민주운동의 발전을 촉진하는 계기2) 대중적, 연대 투쟁으로의 집단 투쟁역량을 보여준 점3) 해방이후 임금 노동자 계급의 형성이래 최대규모의 파업 투쟁이 있으며 대중적 항쟁으로의 승화4) 노동자들의 단결과 연대의식을 강화하고 집단, 분임 간 조직 형성을 발전시키는 중요한 계기5) 국가 권력과의 충돌과정에서 정치 투쟁으로 전화될 수 있는 가능성 보여줌◈ 결론⊙ 5공정권의 직접적 배경신군부 세력에 의한 정권찬탈과정에서 표출된 12.12와 5.17쿠데타법적. 제도적인 정권토대를 구축→ 5.17 계엄령 확대라는 또 다른 쿠데타를 계기로 그들의 집권이 표면화됨을 의미
유신체제와 민주화운동 2004721022 이동권◈ 유신체제란?결국 1971년 12월에 선포된 국가 비상사태 로부터 시작하여 1972년 12월 공포된 유신헌법을 전후하여 나온 일련의 법개정과 새로운 체제형성을 의미▣ 박정권 북한의 침략위협 과 안보를 이유로 국가비상사태를 선언국가비상사태의 내용1) 안보 최우선을 통한 만전의 안보태세 확립2) 일체의 사회 불만 불용3) 언론의 안보논의 억제4) 국민의 안보상 책무수행상실5) 안보위주의 새 가치관 확립→ 자유의 일부를 유보하는 선언◈ 유신체제의 제도적 특징유신헌법- 민주체제에 필수적인 선거에 의한 경쟁관계를 무의미하게 함- 대통령의 절대권력과 장기집권을 제도적으로 보장해 놓음- 의회 민주주의의 기본적 원리를 부정- 자유선거제도의 경쟁성을 유보하는 것을 의미◈ 통일주체국민회의와 유정회 (유신체제 출범이후 그 권위단체로서 생겨난 정치조직)♣ 동일주체국민회의- 박정권의 한국적 민주주의라는 체제의 버팀목으로서의 존재- 국민의 직접선거에 의해 선출되는 대의원으로 구성♣ 유정회- 유신체제의 붕괴와 더불어 와해된 시대적 산물- 박정권의 유신이념과 정치이념을 추종하는 정치집단- 정당이나 사회 단체가 아닌 바, 강령이나 정강정책도 부적합- 정당정치의 페습을 탈피하고 국가적 이념의 구현과 목표달성을 위해 원내 정치 세력화 꾀함♣ 유신체제 전개와 정치적 반대유신체제 : 국민이나 정당에 의해 좌우되는 걱이 아니라 대통령 1인의 영도적 권한을 지닌 체제→ 관료적 권위주의 정권의 속성을 가져와 민중부문의 탈정치화를 의미※. 야당의 기능이 한계에 미치는 상황에서 활력을 불어넣어준 것은 학생 및 재야세력의 반체제운동1973년 2월 27일 총선은 유신이후 처음 실시되는 선거여서 국민의 유신체제에 대한 평가를 둘러싼 선거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공화당이 도시와 농촌에서 우위를 보인 이유는 중선거구제를 채택한 유신헌법 덕택 → 금권, 관권, 타락선거로 점철, 동대문선거구와 목포선거구에서 사전 무더기 투표 적발박정권은 여러 가지 목적으로 여러개의 긴급조치를 선포한다▣ 10대 총선거긴급조치와 불공평한 선거법아래서 치러지는 만큼 여건상 야당이 불리, 여당의 부정과 관권, 금권선거10대 총선거에서 야당이 공화당에게 초유의 승리를 이룸 → 당내외적으로 유신반대와 민주헌정 회복에 나설 수 있는 명분을 의미◈ YH사건과 야당(김영삼)총재 제명YH사건동기 소수의 신민당의원과 취재기자등이 중경상을 입음→ 정치문제화되어 경색정국의 흐름을 초래, 야당의 존재를 무시한은 중대한 폭거◈ 부마민중항쟁- 1970년대의 한국사회가 노정한 첨예한 지배/피지배계급, 민족/계급 모순의 보편성 뒤에부산과 마산이라는 지역적 특수성이 결합되어 표출된 민중항쟁- 유신철폐, 독재타도를 근간으로 했다는 점에서 반독재 민주화운동◈ 10. 26사건- 제 3공화국과 유신체제를 이어 온 박정희의 18년 독재정권의 종식- 박정희 사후 신군부 세력에 의해 또 다른 군부정권을 태동시키는 직접적 계기가 됨♠ 나의 생각..안보를 이유로 국민들의 자유를 유보시킨다는 것은 큰 것을 위한 작은 것의 희생이라고 생각한다.그런데 박정권은 북한의 침략위협이라는 제목을 달아 국민들의 자유를 유보시켰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