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세계 젊은이들에게 우상이 되어 버린 그 이름, 에르네스토 체 게바라. 1952년 1월, 의대 졸업을 앞둔 스물셋의 에르네스토 게바라는 친구 알베르토와 함께 고물 오토바이를 타고 무일푼으로 남미 종단여행을 떠난다. 영화 는 그 여정을 그린 짧은 여행의 기록이다.이 영화의 감독 월터 살레스는 이전의 영화 과 을 통해서 단순히 브라질 민중의 고단한 삶만을 현실적으로 담아냈다면 이 영화 에서는 소재를 한층 더 넓혀 남미 전체를 영화화 하고 있다. 영화는 에르네스토 게바라가 쓴 과 그리고 알베르토 그라나도의 여행일지 을 원작으로 하여 그들의 여행을 다루고 있다. 그리고 영화에서 주인공들이 나누는 대화와 주인공들이 부닥치는 상황들은 대부분 위의 책에서 인용했다고 감독은 말한다. 그러나 가끔 영화에서 보여지는 길 위에서의 에르네스토와 알베르토의 상황은, 감독이 미리 정해놓은 시나리오를 파기하기도 하고 새로운 사건을 넣기도 하여 즉흥적으로 연출한 것과 같은 느낌을 준다. 그래서 이 영화는 기본 텍스트에 감독 자신만의 세계를 가미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생동감과 현실성을 가지고 있는것 같다.이러한 효과를 얻을 수 있었던 또 다른 이유에는 살레스 감독이 이 영화를 두 젊은이의 ‘남아메리카 여행기’ 라는 사실에 주목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감독이 영화를 통해 표현하고자 했던 주 포커스는 ‘에르네스토 체 게바라’ 가 아닌 ‘남아메리카 대륙’ 이었던 것이다. 감독은 젊은 시절의 게바라가 그러했듯이 자신의 열성을 다해 라틴 아메리카를 카메라에 담아냈기에 이 영화에는 여느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것과는 다른 느낌의 생동감과 현실성이 넘쳐난다.이 영화의 시작부분에 등장하는 에르네스토 게바라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열정적인 삶을 살다간 쿠바의 정치가이자 혁명가였던 ‘체 게바라’의 모습이 아닌 젊은 시절의 한순간을 여행이라는 일종의 일탈행위로 장식해보고자 하는 순박한 대학생의 모습이었다. 어릴 때부터 천식을 앓아온 에르네스토 였기에 가족들은 그들의 기나긴 여행을 걱정하지만, 에르네스토는 아랑곳 하지 않고 조금만 달리면 곧 고장이 나버릴 것 같은 모터사이클 '포데로사' 와 함께 친구 알베르토와 길을 떠난다. 에르네스토와 알베르토의 여행길에는 로맨틱하고 감상적인 사건들은 잘 일어나지 않는다. 대신에 가난과 고난에 지친 남아메리카 민중들의 삶이 담겨져 있다. 그들이 당도하는 남아메리카의 구석구석마다 미 제국주의에 의해 억압된 남아메리카의 민초들이 있었다. 아르헨티나에서 출발하여 칠레와 페루를 거쳐 남미 대륙을 종단하는 과정에서 그들은 수많은 사람들을 만난다. 무일푼으로 여행하면서 만나는 낯선 사람들의 친절에 의존하면서, 때론 오해를 받고 쫓겨나면서, 고장 난 모터사이클 대신 두 발로 걸으면서, 나환자촌에서 환자들을 치료하면서 에르네스토는 세상을 보는 새로운 눈을 뜬다. 남미의 모든 여자들과 자보는 게 목표라며 농담을 던지며 여행을 시작한 알베르토와 에르네스토 였지만 이들의 종착지, 즉 영화의 마지막부분에서는 남미 민중의 미래와 자유로의 해방을 걱정하는 또 다른 모습의 알베르토와 체 게바라가 서 있었다. 그들이 로맨틱하고 감상적인 사건들 대신에 목격한 남아메리카 민중들의 피폐한 모습들이 게바라의 의식을 자극하는 각성제로써 작용했던 것이다. 영화 속 황무지 한 가운데서 마주친 노동자 부부의 희망이 보이지 않는 어두운 눈빛을 바라보던 게바라는 미 제국주의에 대한 깊은 문제의식을 느낀다. 여행이라는 일종의 일탈행위를 통해 젊은 시절을 장식해 보려고 장난반 진심반으로 시작했던 그들의 여행은 이윽고 안데스 산맥을 넘고 칠레를 지나 마침내 페루의 꾸스꼬에 당도한다. 고대 잉카제국의 수도 꾸스꼬의 유적지에서 알베르토와 에르네스토는 잉카의 후예들인 원주민들과 만난다. 그들은 원주민들과의 대화를 통해서도 많은 부분의 의식이 전환됨을 경험한다. 그리고 여행중에 단 한번도 정치적인 입장을 표하지 않았던 에르네스토가 알베르토와의 대화중에 총 없는 혁명은 불가능하다고 외치는 장면을 비추면서 영화는 본격적으로 남미의 해방과 그들의 고민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시작한다.그러다가 마침내 그들은 영화에서 가장 중요하게 부각되고 있는 곳으로 이동한다. 이들의 마지막 여행지였던 산 파블로의 나환자촌은 를 통해 감독이 그려내고자 했던 모든 정서와 의도가 함축된 공간으로 해석될 만한 곳이다. 어떤 의미에서 거대한 남아메리카 대륙의 축약판인 이 나환자촌은 아마존 강을 경계로 하여 나환자들의 집과 의사, 수녀들의 섬으로 나뉘어져 있다. 에르네스토는 나환자촌을 떠나는 마지막 날 밤 자신의 생일파티에서 이렇게 짧은 여행소감을 남긴다. “오늘 날 남미 대륙이 보이지 않는 경계선으로 나뉘어져 서로 반목을 일삼고 있지만 결국 우리는 단일한 메스티소 민족이며 하나라는 사실을 확신합니다.” 그리고 이후에 파티 도중 빠져나온 에르네스토는 건너편의 나환자들에게로 건너가기 위해서 배를 타고 노를 저어 편하게 강을 건너가는 대신 맨몸으로 센 물살을 거슬러 강을 건너는 무엇인가 특별한 행위를 한다. 노인이 된 알베르토가 가장 인상 깊게 기억하는 이 사건은 남아메리카 여행이 이 젊은이를 어떻게 바꿔놓았는가를 생생하게 드러내고 있다. 에르네스토는 강을 헤엄쳐 건넌다는 의미를 통해 라틴민족을 보이지 않는 경계선으로 나누고 있는 어떠한 힘을 극복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 순간 에르네스토는 이미 '체' 가 되어 있었다. 이들은 여행을 통해 과연 무엇을 얻었던 것일까? 에르네스토와 알베르토가 걸어간 길을 가상으로 따라가 보며 나는 그들이 얻었던 느낌들과 그들이 살을 부딫혀 가며 얻은 진솔한 경험들을 상상해본다.2004년 10월 4일. 여기는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 아이레스. 오늘부터 약 7개월간에 걸쳐 과거 에르네스토 게바라와 알베르토 그라나도가 내 또래 나이 때 했던 남아메리카 종단여행을 시작한다. 그들이 그랬던 것처럼 나도 500cc 오토바이 한 대에 몸을 맡기고 베네수엘라까지 12000km 의 장정을 시작하려한다. 남미 남단인 아르헨티나에서 북단 베네수엘라까지 꽤나 먼 길이 될 것이지만 여행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진솔한 경험에 대한 기대가 크기에 난 쉽게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2004년 10월 13일. 여기는 아르헨티나의 미라마르. 에르네스토가 여행길에 여자친구 집에 잠시 들르기 위해 멈춘 곳이다. 두고 온 것을 안타까워하는 떠난 자의 마음을 알기에 나는 여기에서 에르네스토가 느꼈을 아쉬움을 감흥해보기 위해 약 두 주간. 꽤나 긴 시간을 멈춰본다. 자신의 여인의 품에서 떠나기 싫은, 그리고 자신의 연인을 떠나보내기 싫은 여인의 마음이 애타고 간절하게 와닿는다.2004년 10월 29일. 여기는 아르헨티나 삐드라델아길라. 강가근처에서 텐트를 펴려다 텐트가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 할 수없이 주변의 농장에서 하룻밤을 지내야 한다. 에르네스토나 알베르토가 의사라는 특권덕분에 쉽게 무료 숙식을 할 수 있었으나 나는 그런 특권이 없어 외국인이라는 특권을 이용하기로 했다. 나와 비슷한 환경에서 살아온 이들은 아니었지만 마구간에서 일꾼들과 나눴던 진솔한 대화는 밤이 셀 줄 모르게 이어졌다. 가난과 고난에 지친 이들의 모습 속에서 그 옛날 힘들게 살았던 우리의 소작농들의 모습이 떠올랐다.2004년 10월 31일. 여기는 아르헨티나 로스 안데스. 안데스 산맥은 남아메리카에서 가장 높고 험악한 산맥이다. 히말라야 산맥 다음으로 높은 산맥이지만 에르네스토와 알베르토가 했던것 처럼 낡은 500cc 오토바이로 통과해볼 만하다. 눈이 내려 쉽게 올라가지 못하는 안데스의 고지대를 소형 오토바이로 넘었다는데서 나는 엄청난 자신감을 느낀다.2004년 11월 3일. 여기는 아르헨티나 바질로체. 에르네스토처럼 어린 시절부터 천식이 있었던 나는 안데스 산맥을 넘으며 힘에 부치기 시작한다. 여정에서 에르네스토처럼 꽤나 여러번 고생을 하게 된다. 이럴 때 알베르토처럼 옆에서 도움의 손길을 줄 수 있을 친구가 없어 나는 못내 아쉽다.2004년 11월 15일. 아르헨티나의 프리아스 호수. 드디어 칠레에 도착했다. 아르헨티나와 칠레의 국경지대인 푸에르토프리아스를 건너 에메랄드빛이 나는 호수인 에스메랄다 호수에 도착해 있다. 에르네스토와 알베르토가 이 강을 보며 가졌을 푸른빛 꿈과 큰 포부를 가질 수 있게 되길 기도하며 나는 에스메랄하 호수를 응시하고 있다.2004년 11월 26일. 칠레의 로스 앙헬리스. 에르네스토와 알베르토가 그랬던것 처럼 500cc 오토바이는 여기까지가 한계인가보다. 더 이상 복구가 불가능한 오토바이를 트럭에 실어 보냈다. 12월 3일에 칠레에 도착한 나는 수도인 산티아고에서 포데로사를 포기하고 만다. 하지만 히치하이킹만으로 베네수엘라까지 갈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문득 든다.2004년 12월 7 ~ 11일. 칠레의 항구도시인 발파라이소를 지나 북쪽으로 가는 다른 배에 몸을 싣는다. 그리고 칠레의 아따까마 사막에 도착한 나는 여기에서 공산주의자로 3개월간 옥고를 치른 한 노동자 일행을 만나게 되었다. 황폐화된 민초들의 생활상을 보며 나는 동정심에서가 아닌 같은 경험을 했을지 모르는 우리 할아버지때의 상황을 생각해보며 그에게 내가 가진 돈을 쥐어주었다. 진정으로 가난에 헐떡이고 있는 그들의 모습을 보며 나는 또한 미국에 종속된 자본가들과 그들의 플랜테이션 농업이 가난한 소작농들을 억압하고 있다는데서 큰 문제의식을 느끼게 되었다. 내가 도착하는 곳의 구석구석마다 억압받으며 살아가는 민중들의 모습이 보인다. 진정으로 이들의 해방을 위해서 필요한건 혁명인가? 총없는 혁명은 정말 불가능한 것인가? 의구심이 들기 시작한다.2004년 12월 15일. 칠레의 추키카마타 광산. 이곳은 남아메리카 노동자들이 불합리한 대우를 받고 있는 곳으로 에르네스토의 사상에 엄청난 영향을 미친 곳이다. 영화 속에서는 정치적인 냄새를 없애기 위해 이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문제들을 단지 계층차별정도로 표현해 버리고 지나치지만 내가 지금 보고 있는, 직면하고 있는 상황은 그것보다 더욱 심하다. 죽을듯한 노동의 강도에 비해 노동자들의 손에 쥐어지는 건 하루양식거리도 안 되는 정도.
황석영의 삼포 가는 길, 서정인의 江? 들어가며「삼포 가는 길」과 「강」은 각각 1970년대를 전후로 하여 쓰여 진 글이다. 시대의 리얼리티를 대변하는 두 작품은 70년대의 산업화로 인한 소시민의 소외와 상실을 밀도 있게 그려내고 있다.? 제목의 의미「삼포 가는 길」삼포는 지도상에 존재하지 않는 서구의 지명이다. 그리고 작품에서 삼포는 고유명사를 넘어서 고향이라는 보통 명사로 쓰이게 된다. 삼포가 개발된다는 것은 정착하고 안주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고향이 상실되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그들의 삼포 가는 길은 끊임없이 계속되어지고 유랑의 삶의 끝도 맺을 수 없는 비애를 짙게 그려 내게 된다.「강」강은 나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제목은 왜 강이 되었을까. 이는 김씨가 소년을 만나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혼자 주절대는 부분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너는 아마도 너희 학교의 천재일 테지. 중학교에 가선 수재가 되고, 고등학교에 가선 우등생이 된다. 대학에 가선 보통이다가 차츰 열등생이 되어서 세상으로 나온다..】- 서정인의 「강」에서 -이 말의 과정은 강의 흐름과 연관 되어진다. 한 방울의 물이 산을 뚫고 흐르다 다른 공짜기 물들과 합쳐지고 그 물들은 자꾸 더 합쳐져 나중에 넓은 바다로 조용히 흘러든다. 처음 한 방울의 물은 이미 다른 물들과 섞여 알아 볼 수도 없고 의미도 잃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이처럼 인간이 태어나 삶을 살아가는 것은 한 방울 물이 꾸었던, 세상에 대한 아름다운 꿈이 서서히 상실 되어 지고, 그를 인식해 가는 과정인 것이다.? 작품의 배경두 작품은 배경이 모두 눈 내리는 겨울로 설정 되면서 사람들의 내면적 추위를 드러나게 하고 있다.「삼포 가는 길」에서 마지막 - 기차는 눈발이 날리는 어두운 들판을 향하여 달려갔다. - 문장은 인물들의 삶이 완전히 어둠으로 이르는 절망적 모습을 드러낸다. 이는 달리는 기차처럼 그들의 삶이 정착되지 못하고 유랑하며 살아갈 것을 나타내 주고 있으며, 현재의 유랑과 미래도 그러 할 것이라는 절망적인 성격을 암울하게 드러내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강」에서의 눈은 조금 다르다. 눈 내리는 날 혼사 집에 가는 세 남자와 버스에서 우연히 만난 여자가 엮어내는 이야기에서 서정적인 느낌을 받는다. 남자들은 혼사 집을 가는 같은 목적을 가지고 있지만 공통적인 교감은 없다. 그들은 진눈깨비가 내리는 장면을 보며 각각 다른 생각을 하는 것이다. 마지막 부분에서는 함박눈이 내린다. 세 사람은 눈에 의해 과거를 떠올리며 감상적 분위기에 젖는다. 무엇보다 술집 작부 여자가 늙은 대학생 김씨를 찾아 갔을 또, 눈은 그녀로 하여금 신부가 되는 꿈을 꾸게 하고 그 꿈이 결코 이루어 질 수 없는 허망한 것은 아니라는 점을 알게 한다. 즉, 눈은 작품 속에서 인물들이 환상에 젖게 하는 매개가 되어 있는 것이다.? 작품 속의 인물성격「삼포 가는 길」공사판을 찾아 돌아다니는 뜨내기 노동자 노영달과 출옥한 후 고향인 삼포를 찾아가는 정씨, 술집에서 도망친 작부 백화를 인물로 내세우고 있다. 이들은 각각 산업화의 물결 속에 떠도는 노동자들이다. 영달은 대전에서 옥자라는 여자와 살림을 했으나 실직을 하여 그녀를 서울 식모로 떠나보냈고, 돈 모으면 모여 살자는 그녀와의 언약이 떠돌이 생활을 하는 자신에게는 지킬 수 없는 것이라며 비애에 젖는다. 정씨는 고향인 삼포에 정착하려고 길을 떠나나 고향이 개발로 인해 변했다는 것을 알고 낯설음을 느낀다. 백화는 18살에 집을 나와 22살이 되기까지 술집 작부로 많은 남자들과 함께 3년을 보내고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주점에서 도망을 친다.셋 모두 정착하고 싶은 욕망을 가지고 있으나 현실은 그들을 어느 곳에도 안주 할 수 없도록 한다. 근대화에 밀려 고향을 등진 채 계속 떠돌아야 하는 인물들의 비애는 70년 전후의 소시민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보여준다.「강」전직 초등학교 교원이며 하숙집 주인인 박씨, 세무서 주사인 이씨, 늙은 대학생 김씨와 술집 작부인 여자를 인물로 하고 있다. 박씨는 군 기피자이며 초등학교 교사를 그만두고 나름대로 삶을 즐긴다고 자부하지만 자신감은 서서히 상실되어 간다. 이씨는 멋을 잘 부리나 속물근성이 있다. 김씨는 가난 때문에 좌절을 맛본 후 우울한 패배주의에 빠져있다. 여자는 세 남자를 만나 신부의 꿈을 꾸는데 무엇보다 김씨가 대학생이라는 말을 듣고 김씨의 방을 찾아 드는 것은 신분적 열등감에서 오는 환상적 꿈임을 알 수 있다. 이들은 모두 현실적 삶의 무게에 짓눌려 있으며 분열된 자의식으로 방황하고 있다.또한 두 작품 모두 술집 작부가 함께 동행을 하게 된다.삼포 가는 길의 여자 백화는 이점례라는 실제 이름을 감추고 가명을 사용하고 있다. 이는 허위와 진실을 나타내며, 영달과 정씨에게 실제 이름을 알려 준 것은 그들에게 순수한 인간애와 연대감을 느꼈기 때문이다.강에서의 여자는 아예 이름조차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김씨가 잠들어 있는 방을 들어가 그를 보며 어린 아이처럼 감싸는 부분은 창녀의 모성이 드러난다.【춧, 춧, 옷도 벗지 않구. 가엾어라. 그녀는 누나가 되고 어머니가 된다. 넥타이를 풀고, 이불을 젖혀서 바지를 벗기고. 와이셔츠를 벗기고, 요를 바로 펴고... 기씨가 꿈틀하더니 일어날 듯하다가 다시 요 밑으로 파고든다. 여자는 화가 난다. 그의 팔다리를 요 밑으로 빼어내고 그를 안아서 간신히 요 위에 눕힌다.】- 서정인의 「강」에서 -? 작품에서의 ‘서울’의 의미그들이 머물렀던 곳의 이름도 ‘서울 식당’, ‘서울 집’ 으로 같다. 서울이라는 고유 명사는 이미 서울 사람들만의 소유가 아니다. 한국 안에 있는 모든 곳에서 서울은 존재하고 그 서울은 이상적인 꿈처럼 드러나 있는 것이다.? ‘길’의 의미두 작품에서 인물들이 떠나는 길, 그 길은 사회의 현실에 부딪히고 현실을 인식해 가는 길이다. 두 소설 모두 추운 겨울 날 상처를 가진 사람들이 함께 떠나는 길이라는 점에서 비슷한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둘 다 소외와 상실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도 같다. 「삼포 가는 길」에서 영달은 일을 찾아 떠나다 정씨를 만나고 그와 함께 삼포로 가기로 한다. 그리고 삼포를 가는 도중 주점에서 도망친 백화를 만나 함께 가며 서로의 처지를 이해하려 한다. 「강」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버스 안에서 일과 군하리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또한, 이씨, 박씨 세 남자가 시골의 혼사 집을 가다 주막에서 술을 마시는 간단한 줄거리이지만 담담하고 잔잔한 어조 속에 사회의 모순이 강하게 드러나 있음을 볼 수 있다. 박씨와 이씨는 그들이 처한 상황이 초라하고 소외 된 것이라는 자각이 없다. 그러나 김씨는 한때 이상을 꿈꾸다 사회 앞에서 좌절을 맛 본 경험이 있다. 그 모순은 김씨가 술에 취해 여관집으로 들어가 사내아이를 만나는 장면에서 확실하게 드러난다. 김씨는 반장이라는 뱃지를 달고 있는 아이로부터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된다. 김씨에게 방을 준 반장이라는 아이는 이모 집에서 학교를 다니며 늘 1등을 하는 시골 천재이다.【1등을 했다고? 좋은 일이야. 열심히 공부해라. 기회는 얼마든지 있다. (중략) 내 돈 한 푼 안들이고 나랏돈이나 남의 돈으로 얼마든지 공부할 수 있다. (중략) 그는 입을 다물고 흥얼거렸다. 그 말이 끝나자 그의 머리 속에는 몽롱한 가운데에 하나의 천재가 열등생으로 변모해 가는 과정들이 하나씩 떠오른다. 너는 아마도 너희 학교의 천재일 테지. 중학교에 가선 수재가 되고, 고등학교에 가선 우등생이 된다. 대학에 가선 보통이다가 차츰 열등생이 되어서 세상으로 나온다. 결국 이 열등생이 되기 위해서 꾸준히 노력해 온 셈이다. (중략) 천재라고 하는 화려한 단어가 결국 촌놈들의 무식한 소견에서 나온 허사였음이 드러나는 것을 보는 것은 결코 즐거운 일이 못 된다. 그들은 천재가 가난과 끈질긴 싸움을 하다가 어느 날 문득 열등생이 되어 버린다는 사실을 몰랐다.】 - 서정인 「강」에서 -이 길은 김씨가 걸어 온 길이다. 그러나 지금의 김씨는 박씨나 이씨와 다를 바가 없는 사람이 되어 있다. 이는 그들의 삶이 가난과 초라함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자신이 생각했던 삶에 대한 꿈. 그것은 현실 속에서 비참하게 곤두박질 쳐 이제는 사라지고 없는 것이다. 또한 꿈이 상실 되는 시간의 과정 속에서 특별한 아픔이나 고통, 장애가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렇기에 평범한 사람들 속에서 꿈이란 아무 사연 없이 허망하게 상실 되어 지는 것이다.? 문장의 표현과 묘사두 작품은 문장의 표현과 묘사 면에서도 유사한 점과 차이점을 알아 볼 수 있다. 3인칭 전지적 작가 시점을 사용한 두 작품은 작품 밖 서술자가 모든 것을 다 말해주기 보다 관찰자 시점처럼 서술하는 부분이 더 많다. 배경과 인물에 대한 객관적인 묘사는 작품과 거리를 두고 생각하며 읽게 하는 효과를 거두고 있다. 또한 삼포 가는 길에서 처음 영달과 정씨가 만나는 부분은 초점자가 영달이 되어도 무리가 없을 듯 정씨의 행동이나 모습이 객관적으로 묘사되어 졌다. 또한 ‘쌍둥’, ‘이마빡’, ‘천가 놈’, ‘후려 패’, ‘여편네 노릇’같은 단어 사용은 꼭 영달의 입에서 튀어 나온 듯한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둘 다 인물간의 대화가 소설의 반절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데, 「삼포 가는 길」에서는 대화로 인물들 간의 동정애가 이루어지도록 하고 있으며 「강」에서는 웃음과 함께 각 인물들의 페이소스를 느끼게 한다.
대학생활과 성의식의 진보제 출 일 : 2005. 6. 171970년대 들어서 미팅이 대학생들의 최대 관심사로 등장하면서 남녀 간의 교제가 활발해지고 자유로워지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애정 표현이 오늘날에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조심스러웠다. 1970년대 후반 어느 한 대학에서 영화 「러브스토리」의 주인공처럼 두 남녀가 흰 눈이 가득 쌓인 교정 위에서 부둥켜안고 뒹굴다 총장의 눈에 발각되는 바람에 정학처분을 받았다는 일화가 있다는 것을 보면 당시의 애정표현이 얼마나 조심스러웠는지 알 수 있다. 하지만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사정이 이전과는 약간 달라진다. 1980년대 중반 이후에는 캠퍼스 커플이 대학교정에 넘실대었고 이따금 교정의 으슥한 곳에서 진한 애정표현을 하는 커플도 심심찮게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어둠이 짙게 깔린 캠퍼스는 남녀의 은밀한 연애장소로 변해갔고 이전 시대에는 상상도 하지 못할 정도의 애정관이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1990년대 들어오면 상황은 한층 더 급진전한다. 1990년대에는 애정표현이 한층 대담해지고 성에 대한 의식이 매우 개방화 된다. 주로 ‘대학’ 이라는 공간을 중심으로 그동안 금기시 되어왔던 성에 대한 이야기가 시도되고 심지어는 동성애자들이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하기 시작했다. 1970년대에서부터 1990년대, 그리고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대학생활에는 큰 변화가 있어왔고 성에 대한 대학생들의 의식도 그만큼 많이 바뀌었다.1960년대 혹은 1970년대까지만 해도 많은 대학생들은 유교적인 윤리관에 따라 혼전 순결은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고 믿었다. 1970년대 혹은 1980년대 여고생과 여대생을 대상으로 혼전순결에 대한 설문을 한 결과 응답자 전체의 90% 정도가 혼전순결을 지지한다는 태도를 보였다. 물론 혼전순결이라는 주제만을 통해서 당시의 성의식이 ‘어떠했다’ 라고 결론을 내리기는 어렵겠지만 그 당시에는 분명히 오늘날 보다는 폐쇄적인 의식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러한 성에 대한 보수적인 경향은 먹고 살기도 힘든 경제란 속에서 즐거움과 쾌락을 맛보고자 하는 것은 배부른 소리라고 붙여지던 사회상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그때 당시 자신의 쾌락을 쫓는다는 것은 성실과 반대되는 개념으로 우리 윤리?문화적 측면에서 비판받는 행실이었다. 그러한 사회적 상황이 사람들의 성에 대한 태도나 행동 대부분에 영향을 미쳤음을 알 수 있다.1980년대에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사회는 급변하게 변했고 사회의 변화를 민감하게 받아들이는 대학문화에도 적잖은 변화가 있어왔다. 과거에 예기치 못했던 새로운 성문화와 성의식이 빠른 속도로 나타나게 되었고 오늘날의 대학생들이 가지고 있는 성규범이나 성의식은 기성세대의 그것과는 다른 형태의 것이 되어버렸다. 다시 말해, 엄청난 양의 섹스산업과 성 소비주의를 부추기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성에 대한 자율과 자유를 가장 먼저 경험하게 된 대학생들은 이전 시대와는 다른 성의식을 가지게 되었다. 물론 그것이 완벽하게 진보된 형태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전 시대보다는 한층 성의식이 많이 개방화 되었고 성에 대해 자연스러운 감정을 느끼게 되었다는 점을 생각해 볼 때 어느 정도 진보된 형태를 띤다고 할 수 있겠다.1994년 한국 사회문화 연구원이 전국의 남녀 대학생 1500여 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혼전 성 관계에 대해 응답자의 58%(남학생 66.4%, 여학생 50.6%) 가 서로 원하면 가능하다 , 6.1%는 상대가 원하면 가능하다 고 대답했다. 1995년 서울대 학생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도 얼마든지 가능 7.6%, 사랑하면 가능 42.7%, 결혼을 약속했으면 가능 20.1%등 전체의 70.4%가 혼전 성 관계도 무방하다는 태도를 보였다.) 이런 결과는 아직까지 혼전 순결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많은 기성세대에게는 충격으로 다가올 수도 있다. 그러한 문화적 충격에 아랑곳하지 않고 혼전 관계에 대한 대학생들의 생각은 결혼한다면 가능하다 에서 ‘사랑하면 가능하다 를 거쳐 이젠 ‘서로 원하면 가능하다 는 단계에까지 이르렀다. 또한 1999년 경향신문이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혼전동거’ 에 대해 설문조사를 벌여 찬성이 57%, 반대가 43%인 결과를 얻어내었다.이러한 두 결과는 과거와 달리 많은 대학생들은 이전 사회에서는 금기시 되었던 ‘동거’ 를 어렵게 생각하지 않게 되었고 ‘혼전순결’ 역시 반드시 지켜야 할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는 점을 보여준다. 우리에게 있어 이러한 개방화된 성의식을 가지게 되었다 것이 성적 주체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까?지금 우리 사회의 성문화는 조선 시대로부터 확립되어 온 가부장적 성문화와 성의 개방과 자유화라는 서구의 성문화, 그리고 남성 중심의 상품화된 성문화가 혼합되어 혼란한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서구 문화가 우리 사회에 들어와 사회 각 분야에 커다란 영향을 끼침으로써 우리의 고유한 성문화에 대한 의식을 바꾸어 놓았고 다른 영역에 까지 큰 영향을 미쳐왔다. 그러나 그것이 긍정적으로 영향을 미친 부분도 있지만 '성개방과 자유화' 라는 서양의 성풍속이 성을 금기시하는 우리의 전통적 성문화와 섞여 있어, 오늘날 우리 사회에는 올바른 성문화와 성윤리가 정착되지 못하게 하는 부정적 영향을 미쳤다. 현재와 같은 복잡한 상황 속에서 민감하게 영향을 받는 대학생들 역시 성역할, 성의식에 관해 모호한 태도를 보이고 있으며 단지 개방적인 사고방식만을 갖추고 있다.우리 사회의 혼란스럽고 잘못된 성문화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성에 대한 우리의 생각과 가치관, 태도 등을 바꿔야 한다. 많은 대학생들은 성을 단순히 종족 보존의 수단, 혹은 쾌락의 도구만으로 생각하고 있는 경향이 강하다. 물론 우리에게 성은 그러한 측면에서 큰 역할을 하고 있는 행동 양식임에 틀림이 없지만 그것은 동시에 친밀하고 조화로운 남녀 간의 인간관계를 이끌어 내게 해 주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과거처럼 성을 불결한 것, 금기스러운 것, 죄악스러운 것으로 보지 않는 오늘날의 태도는 바람직한 것이라 할 수 있겠다.우리 인간은 성적인 존재이지만 또한 이성적인 존재이므로, 사회에서 인정하는 범위 내에서 성에 대한 본능적인 욕망을 스스로 조절하면서 남녀 간의 바람직한 관계를 유지해 나가야 할 것이다. 인격적이고 평등한 남녀 관계를 추구해 나갈 때, 인간다움을 잃지 않으면서 성적인 욕구도 충족할 수 있는 것이다. 대학이라는 공간은 수많은 남녀를 만나게 해주며 엮어 주는 공간으로서의 의미를 가진다. 또한 그러한 환경 하에서 남녀에게 어떠한 것이 올바른 성인가, 성이 어떠한 모습을 지낼 때 사회에 바람직한 풍토로 자리 잡을 수 있는가를 가르쳐 주는 공간이기도 하다. 그러나 오늘날의 대학은 전자의 역할만을 수행하고 있지 후자의 역할을 크게 하고 있지 못하는 실정이다.
영어 공용화론, 나는 반대 한다목차? 영어 공용화 주장의 발단ⅰ) 영어 공용화 도입 찬성론 쪽의 입장과 그에 대한 비판ⅱ) 영어 공용화 도입에 대한 재고? 경쟁력 있는 국가로 나아가기 위해 필요한 우리들의 노력Ⅰ. 서론영어 공용화 주장의 발단‘1998년 6월에 소설가 복거일씨가 쓴 책 「국제어시대의 민족어」가 같은 해 7월 2일 출판 면에 소개되면서 우리 사회에 영어 공용화 논쟁이 촉발되었다. 그리고 복거일씨의 주장에 대한 찬반 논쟁이 신문 지상을 통해 지속되면서 영어 공용화에 대한 우려와 관심이 고조되었다. 국내에서 영어 공용화에 대한 찬성과 반대 주장이 격돌하던 그 즈음에 일본에서도 일본 총리 자문기관인 ‘21세기 일본구상 위원회’가 ‘영어를 제2공용어로 삼을 것을 제안하였다’는 소식이 국내 언론에 보도되었다. 또 대만이 중국어 외에 영어를 적극적으로 도입하여 10년 이내에 공용어로 지정하는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는 보도가 나오면서 영어 공용화 주장은 더욱 탄력을 얻게 되었다. 이러한 분위기에 편승하여 포항공대와 연세대가 영어 공용 구역을 캠퍼스 내에 지정하였다. 그리고 정부는 제주도를 국제자유도시로 만드는 계획안에 제주도 지역에 한하여 영어 공용화 정책을 추진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이러한 영어 강세 추세를 굳이 거론하지 않더라도 오늘날 거대한 지구촌 시대에 살아 남기위해서는 세계어 내지 국제 통용어가 된 영어를 습득하지 않을 수 없다는 논리는 이제 거부할 수 없는 논리가 되어 버렸다. 대학을 나온 사람도 외국인을 만나면 간단한 대화조차도 못하는 현실 속에 영어 능력 향상을 위한 근본적인 대책이 필요하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영어 공용화는 마치 모든 문제들을 일거에 해결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으로 비쳐지게 되었다.Ⅱ. 본론ⅰ) 영어 공용화 도입 찬성론 쪽의 입장과 그에 대한 비판그렇다면 우리는 영어 공용화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 1998년에 시작된 복거일씨의 주장을 중심으로 지금까지 영어 공용화를 지지하는 목소리가 많이 있어 왔다. 우리는 먼저 영어 공용화 논쟁의 불씨를 지핀 복거일씨의 논의부터 살펴보아야 한다. 그의 저서와 신문기사에서 그는 영어가 이미 국제어로서 절대적인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 이상 이를 부정하는 것은 시대에 어긋나는 나는 발상이며, 앞으로는 영어가 우리생활에서 더욱 중요한 도구가 될 것이므로 우리 민족도 영어 공용화를 도입하여 점차적으로 영어를 모국어로 하는 정책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그러한 그의 주장을 지지하는 영어 공용화 찬성론자들은 몇 가지 주장을 펼치며 영어 공용화의 도입이 시급함을 강조한다.우선 찬성론자들의 주장은, 지금은 영어를 사용하는 미국이 세계의 중심에 우뚝 서 있는 패권국가인 시대이고 그러한 흐름에 발맞춰 우리가 주변부에서 중심부로 진입을 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영어를 잘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몇 가지 문제점이 있다. 우선 영어를 공용어로 사용하고 있는 나라인 필리핀이나 인도와 같은 국가들은 아직 세계의 변두리에 있으며 중심부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는 영어가, 어떠한 국가를 세계의 주변부에서 탈출시켜 주리라는 영어 공용화 찬성론자들의 입장에 모순되는 예로써 한 나라가 세계의 중심부로 진입하는데 영어만이 유일한 수단이 아니라는 것을 볼 수 있다.찬성론자들은 게다가 현재 세계의 여러 지역에서 소규모로 사용되고 있는 각종 언어들이 조만간 쇠퇴 할 것이며, 결국 그 중 대부분이 사멸해 버려 현재 세계 공용어로써 통용되고 있는 영어가 그 위치를 확고히 잡을 것이라 내다보고 있다. 하지만 곰곰이 따져보면 예전에 서구에서 라틴어를 영어와 같이 공용어로 채택해 주로 쓰다가 그 내부에서 영어로 교체가 일어난 것처럼, 영어가 지금 표준이라 할지라도 과거에 라틴어가 그랬던 것처럼 영어 내부에서 교체가 일어날 수 있다. 즉, 언제까지고 영어가 영원하리라는 보장이 없는 것이다.또한 찬성론자들은 전 국민이 영어를 구사하게 되면 실시간으로 정보를 획득하는 것이 가능하게 되어 국가 경쟁력에 이바지 한다는 주장을 내어 놓고 있다. 그것은 빠르게 변화는 오늘날 일부의 사람들에 의해서 행해지고 있는 번역이나 통역은 더 이상 대안책이 될 수 없음을 뜻하며 번역이나 통역의 힘을 빌지 않고도 온 국민이 영어를 해독할 수 있게 된다면 실시간으로 쏟아지고 있는 세계 각 지역의 정부들을 모두 수용할 수 있게 된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과연 전 국민을 영어 전문가로 바꾸어 사회에서 매일 쏟아지고 있는 수백만의 정보들을 실시간으로 해독할 필요가 있을지 궁금하다. 이미 우리에게는 필요한 정보만을 뽑아내서 그것들을 수집하여 대중에게 알기 쉽게 가공해 전달하는 사람들이 충분히 있으며 그 사람들만으로도 우리는 별 불편함 없이 정보를 얻고 이해하는 데 문제를 겪지 않고 있다.영어 공용화에 찬성하는 사람들의 또 다른 입장은 영어 공용화가 교육기회의 평등에 이바지 한다는 측면이다. 많은 사람들이 영어를 완벽하게 익히기 위해서는 비싼 돈을 내고 영어와 관련된 수업을 들으며 해외로 유학을 떠나야 한다고들 말한다. 그러한 양질의 교육시스템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이른바 우리 사회에서 ‘가진 사람들’ 에 속해야 하며 ‘가지지 못한 사람들’ 은 그러한 사람들에 비해 영어를 더 잘 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영어 공용화가 도입 된다면 굳이 유학을 떠나지 않고서도 실생활에서 영어를 접할 수 있으니 양질의 교육은 부가적으로 필요 없게 된다. 그러므로 자연히 ‘가진 사람들’ 과 ‘가지지 못한 사람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격차가 줄어들게 될 것이라는 게 찬성론자들의 주장이다. 이 주장은 타당성이 있어 보인다. 하지만 영어 교육 기회의 불평등을 해결하는 것은 현재 학교 교육의 정상화로도 충분히 가능하다. 물론 국가 경쟁력 제고를 위해 요구되는 영어가 아닌, 단지 시험을 보기 위한 문법위주의 외우고 쓰는 영어로서 교육되어온 현실을 단시간 안에 바꾸기는 어려울 것이지만 지속적인 노력을 통해 그것을 양질의 교육으로 바꿔놓을 수 있다.끝으로 영어 공용화 찬성론자들은 미래사회는 장차 필연적으로 영어와 민족어가 공존해서 시민들이 함께 쓰는 이중 언어의 상태로 될 것이며, 민족어들은 대중의 외면을 받고 박물관 언어가 되어 버리고 말 것이지만 전문가들에 의해 쓰이고 보존되고 이어질 것이라는 주장을 한다. 그리고 언어가 아무리 중요하다고 할지라도 언어가 도구라는 사실은 변화하지 않으므로 영어를 우상으로 떠받드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어서 한국어가 쇠퇴하거나 완벽하게 사멸해 버리지는 않을 것이라는 의견도 내어 놓고 있다. 그들은 동시에 영어를 공용화 하면 오히려 우리 민족 문화가 국제어를 통해 훨씬 구체화되어 현재보다는 더 많은 사람들이 향유하고 활력을 얻을 수 있다는 입장을 더해 영어 공용화의 당위성을 주장한다. 하지만 언어는 찬성론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단순한 도구가 될 수 없다. 언어는 인간 생활의 모든 측면을 규정하는 핵심요소이다. 그러므로 우리 생활의 모든 측면을 관장하고 있는 언어에 문제가 생길 경우 우리 사회 전반이 흔들리게 될 것이다.이처럼 영어 공용화에 찬성하는 입장을 보이는 사람들은 위에서 제시된 의견들에 동의를 하며 영어를 공용화하는 길이 국가의 발전을 위해 가장 옳은 방법임을 강조한다. 그러나 그들이 동의를 하고 지지를 하는 입장의 각각에는 문제점들이 있으며 비판의 여지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ⅱ) 영어 공용화 도입에 대한 재고우리는 다시 한 번 영어공용화가 과연 최선의 방책인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오늘날 세계 속에서 영어를 습득하고 구사할 수 있는 능력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에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러나 영어 공용화만이 국가경쟁력을 제고하고 우리의 위상을 드높이는 최선의 방책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현재 한국 사회는 마치 ‘영어’ 라는 주인 아래 에 있는 ‘노예’ 와 같은 상태라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전 국민이 영어에 목을 매달고 있으며 다분히 관심을 영어로 집중시키고 있다. 한글도 제대로 습득하지 못한 어린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치기 위해 영어를 조기 교육하는 현상에서부터 시작하여, 초?중?고등학생은 말할 것도 없고, 학문의 탐구는 뒷전인 채 토익, 토플에만 매달려 있는 대학생, 살아남기 위해 뒤늦게 영어공부에 한창인 직장인들까지 영어와 사투를 벌이는 모습은 가히 눈물겹다고 할 수 있다. 영어 공용화가 실시된다고 해서 국민들의 영어 실력이 한순간에 향상되거나 하는 것은 절대 아니며 한 순간에 영어의 전문가가 되는 것 역시 불가능한 일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섣부른 제도의 시행이 아니라, 제대로 된 영어교육 환경의 구축이다.
흑사병 발생 이전의 유럽의 모습은 매우 낮은 농업의 생산력으로 주민의 대다수가 굶주리던 상태였다. 1000년경 유럽의 인구는 3600만명 정도였다. 그 뒤 300년 만에 두 배 정도로 불어나서 1300년경에는 인구가 8000만명에 달하였다. 유럽의 거의 모든 곳에서 인구가 넘쳐나서 ‘인구 과잉’ 의 상태였다. 이탈리아나, 파리 지역은 낮은 식량 생산성에도 불구하고 19세기 초만큼 인구가 많았다. 이러한 인구의 과잉으로 인해 사람들은 숲, 구릉지, 심지어는 바다를 막는 간척 사업 등을 통해 빠른 속도로 개간에 앞장서기 시작했다. 그러한 노력으로 13세기 말에는 새로이 경작할 수 있는 토지가 없을 정도로 땅이 많이 늘어나게 되었다. 그러나 단지 식량 생산력을 증대시키기 위해서 땅을 경작하였기 때문에 식생이 황폐해 졌고, 설상가상으로 날씨가 변덕스러워져서 큰 문제가 일어났다. 유럽전체에 기온이 낮아지면서 알프스 산간지역, 북극에서 빙하가 내려왔고 비가 오면 카스피 해의 수면이 상승했다. 그러한 이유로 아이슬란드의 곡물재배, 영국의 포도재배는 흉작으로 끝이 났고 덴마크와 프랑스 고지대의 밀 경작은 불가능하게 되었다. 유럽의 거의 모든 지역에서 적어도 한, 두 번은 흉작이 들었다. 경작지가 부족한 상황에서 인구는 계속적으로 증가했고 식량 생산성은 이전보다 나아지지 않았다. 유럽의 많은 지역에서 사람들은 영양실조로 고통을 받아야 했고 중세의 농부들은 겉잡을 수 없이 황폐해져가는 땅에서 얼마 되지 않는 식량을 수확해 내며 힘겨운 삶을 영위할 수밖에 없었다. 흑사병이 유럽에 도래하기 직전 많은 사람들은 흑사병에 저항할 힘조차 가지고 있지 못했다. 흑사병은 유럽을 휩쓸고 지나가면서 사람들이 기존에 가지고 있던 많은 것들을 크게 바꾸어 놓았다.1200년에서 1350년 사이 전성기를 이루었던 몽고 제국은 중앙아시아의 스텝과 사막을 가로질러 한나라 시절 장건이 개척해 놓은 실크로드를 다시 열어 놓았다. 페스트는 처음 아시아에서 시작되었다. 페스트를 유발하는 쥐와 쥐벼룩은 중앙아시아에서 마멋을 잡아 가죽을 팔던 사냥꾼 그리고 서역상인 사이의 교역을 통해 가장 먼저 옮겨지게 된다. 마멋의 가죽에 붙어 있던 쥐벼룩은 아스트라칸과 사라이(구소련 볼가강 하류: 중국 상인 근거지)에서 물건이 내려지며 서역상인과 함께 유럽으로 이동하게 된다. 쥐와 쥐벼룩은 돈 강을 거쳐 흑해의 카파 항으로 이동하게 되고 드디어 1346년, 크리미아 반도의 교역의 중심지였던 카파 항에서 처음 발병으로 나타난다. 몽고군이 아시아로부터 서쪽을 석권하고 흑해에 인접한 카파의 무역기지를 공격하고 있을 때였다. 몽고군 몇몇이 쥐벼룩에게 물린 뒤 흑사병으로 쓰러졌다. 몽고군들은 병사가 이 병으로 쓰러지면 시체를 카파의 성벽 안에 대포로 쏘아 넣었다. 카파 항에서 흑사병이 유행하자 많은 대상들은 고향으로 발길을 돌리게 된다. 이들과 함께 배에 올라탄 검은 쥐와 감염된 벼룩이 배를 타고 옮겨짐에 따라 병도 함께 유럽으로 옮겨 가게 되었다. 병의 희생자들은 극도로 고통스러워하며, 보통 수일 내에 사망하였다. 병자들은 기침을 하며 많은 땀을 흘렸다. 그들의 신체에서 나오는 땀, 피, 배설물 등 모든 것에서는 역겨운 냄새가 났다. 병이 림프절에 감염되는 경우에는 종기가 생겨났고, 내부 출혈이 있었다. 폐 페스트의 경우에는 병이 호흡, 예를 들어 환자들의 기침과 재채기에 의하여 확산되었다. 일단 감염되면 열이 치솟아 고열에 시달리며 피를 토하며 호흡 곤란을 일으켜 정신을 잃게 되었다. 대개 발병한 지 24시간 내에 대부분의 환자들이 사망하고 말았으며, 사망 직전에 환자의 피부가 흑색 또는 자색으로 변하기 때문에 중세의 사람들은 이 병을 흑사병이라고 불렀다. 1348년 1월에 이 병은 튀니스를 통하여 북아프리카로, 그리고 마르세유를 통하여 프랑스에 침투하였다. 흑사병은 그 해 3월 무렵에 서쪽으로는 스페인까지, 그리고 북쪽으로는 프랑스 중부까지 확산되었다. 5월 무렵까지는 흑사병은 로마와 플로렌스로 침입하였다. 또한 6월이 되어서 병은 파리, 보르도, 리옹, 런던까지 이동하였다. 스위스와 헝가리는 7월에 흑사병의 희생자가 발생하기 시작하였다. 1349년에 흑사병은 파리를 다시 엄습해 왔고, 결국 네덜란드, 아일랜드, 스코틀랜드에까지 퍼졌다. 1349년 말엽까지는 스웨덴, 덴마크, 프러시아와 같은 북유럽에 퍼졌고 바다 건너 있는 아이슬란드와 그린란드도 흑사병의 영향을 받았다. 하지만 흑사병은 등장한 만큼이나 재빠르게 사라졌다. 1350년 중반 무렵이 되어서야 흑사병은 유럽 대륙에서 그 활동을 마쳤다. 14세기 중반까지는 유럽의 대도시는 파리, 플로렌스, 베니스 등 이었는데 이곳에는 대부분 인구가 십만 명을 넘었다. 흑사병은 이런 도시 모두에 확산되어 어떤 곳에서는 인구의 30% 내지 60%가 죽었다. 흑사병으로 인한 사망률은 지역에 따라 20%에서 심지어 100%까지에 이를 정도로 다양하였다. 인도에서 아이슬란드에 이르는 지역에서는 1347년에서 1350년 사이의 3년 동안에 30% 내지 35%의 유럽인들이 사망했다고 추산되고 있다. 이것은 당시의 유럽 전체의 추정인구였던 7천 만 중에서 약 2천 만이 죽었던 것을 의미하였다.흑사병은 유럽 전역에 걸쳐 퍼져나간 질병이었기 때문에 그 파장이 클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수많은 희생자를 낸 전염병이었기 때문에 그 영향은 지대했다. 흑사병은 경제적인 부분과 문화적인 부분, 그리고 인간의 심리적인 부분에도 영향을 미쳐 많은 이들의 사고방식을 바꾸어 놓았으며 이는 곧 종교계에도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영향들이 르네상스의 문예부흥을 불러왔다고 볼 수 있겠다.흑사병이 유럽전역을 휩쓸고 가면서 많은 사람들이 흑사병으로 인해 죽어갔다. 이로 인해 유럽전체 인구가 격감하여 노동력이 크게 부족하게 되었고, 봉건 영주들은 어쩔 수 없이 부족한 노동력을 잡아두기 위해 농민들에 대한 처우를 개선하게 되었다. 게다가 빈민들의 생활조건이 개선되고 농노제도가 붕괴되어 사람들은 보다 많은 자유를 누리게 됐다. 많은 곳에서 농민의 지위가 향상되었고 토지를 구입해서 직접 경작하는 농민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상업도 노동력이 줄어들자 자연히 인건비가 상승하여 정체되기 시작하였다. 흑사병이 유행하기 이 전에 부를 누리던 지주들은 높은 인건비로 대부분이 파산하였다. 이것은 곧 ‘중세’ 라는 사회를 굳건하게 받쳐주고 있던 봉건제도의 붕괴를 알리는 것이었다. 봉건제도가 붕괴된 틈을 타 사회에는 개인주의가 싹을 틔게 되었고 이전 사회에서처럼 길드를 통해서가 아닌 인건비를 통해 돈을 번 개인들의 상업 활동이 활발해 지기 시작하였다. 그렇게 되면서 길드라는 폐쇄적인 형태의 경제구조를 중시하던 옛날과는 달리 경제는 개방화 되었고 자본의 유동성을 중시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현상들은 자본주의의 태동을 알리는 전조였다. 완벽한 형태의 자본주의는 아니었지만 그와 비슷한 형태의 경제체제 하에서 사회적으로 지위가 낮았던 사람들은 전에 없던 부를 누릴 수 있게 되었고 부유한 사람들은 더 부유하게 되어 르네상스 문예부흥을 위한 경제적인 면에서 사회적 조건을 갖추어 나가게 되었다.흑사병은 문화적인 면에서도 큰 영향을 미쳤다. 우선 하나의 큰 변화로 라틴어 대신 영어나 프랑스어와 같은 세속적인 말들이 공식문서에 쓰이기 시작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라틴어를 구사할 수 있는 성직자들이나 교사들이 흑사병으로 인해 많이 죽었기 때문에 라틴어 사용은 자연히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라틴어는 이전 사회에서 지식인층 사이에서 쓰이던 언어였고 상층사회에서는 라틴어를 통해 제한된 범위 내에서 폐쇄적으로 문화적 혜택을 누렸다. 그러나 영어나 프랑스어가 라틴어를 대체하게 되면서 많은 문화적인 것들, 즉 기록되어 내려오던 문서들이 부를 획득한 새로운 계층들에게 읽혀질 수 있게 되었다. 이는 곧 상층사회만이 독점하던 것들을 부를 획득한 새로운 계층들이 향유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흑사병은 건축분야에도 일정 부분 영향을 미쳤다. 많은 사람들은 다시 안정을 되찾기 시작한 사회에서 깨끗한 기분으로 집을 수리하고자 했다. 그러나 고딕양식의 장식물들과 조각물들을 만들 수 있는 장인들이 흑사병에 의해 많은 희생을 당하였기 때문에 살아남은 장인들은 급증하는 수요에 의해 자신들의 재능을 발휘 할 수 없었다. 급증하는 수요와 부족한 시간을 매우기 위해서 많은 석공들은 간단한 방법으로 집을 건축하기 시작했다. 장인들은 집을 재건축 할 때 과거 방식의 복잡한 설계 법은 이용하지 않았고, 건물 짓기가 다소 용이한 수직적 양식으로 집을 지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장인들은 건물을 더욱 다양한 방식으로 짓게 되었고 사회에는 좀 더 광범위한 방식의 건축법이 유행하게 되었다. 흑사병은 예술 분야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흑사병이 몰고 온 ‘죽음’ 이 예술 작품의 소재로 널리 사용되었다. 유명 작가들에 의해 그려진 작품들에는 해골과 시체가 흔히 등장하였고 흑사병이 유행했던 당시를 배경으로 보카치오가 쓴 ‘데카메론’ 역시 예술적인 면에서 큰 의의를 가지는 작품이었다. 이렇듯 흑사병 이후 볼 수 있는 많은 문화적인 측면에서의 변화 역시 르네상스 문예부흥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