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랑(滄浪)장택상목 차서론본론1. 광복회사건과 장택상 가문2. 장택상의 일생3. 이승만 정권의 흐름 속에 장택상1) 대구폭동 그리고 최능진과의 대립2) 몽양 여운형 암살사건3) 제주 4.3 폭동 사건4) 여. 순 반란 사건5) 1948년 5?10 선거와 최능진6) 백범 김구 암살사건7) 발췌개헌안에 의한 부산정치파동8) 헌번개정안과 사사오입의 개헌9) 장택상 후보 등록 방해 사건▶ 신문 자료결론서론국가와 민족이 위기에 처해 있는 상황에서의 모든 기득권 세력이 그렇듯이 자신의 이익만을 챙기려고 하고 생각하는 그런 풍토 속에서 우리민족의 정치인들은 어떻게 행동하였는가?우리는 장택상이라는 인물을 통해서 보여 지는 일제하 독립운동가와 친일파의 향후 대립적인 모습을 생각할 수 있다.1930년대부터 3공까지 애국우익의 거두요 반공반일의 화신이며 옥스퍼드 유학중에는 유럽지역 독립운동가의 정신적 지주였고 해방후에는 경찰총장 수도경찰서장으로 봉직하며 수도서울의 치안을 담당하며 좌익 빨갱이들 처단에 공을 세운 장택상에 대해 한평생 삶의 흔적을 알아보도록 하자.본론1. 광복회사건과 장택상 가문친일부호 장승원 피살 경술국치 이후 우국청년들의 일부는 공허한 이론공방을 거부하고 곧바로 무력항쟁의 길로 나선 경우가 적지 않았다. 경주사람 박상진을 중심으로 한‘광복회’회원들이 친일부호들을 대상으로 국권회복운동자금을 강제 모금하던 중, 1917년 11월 전 경북관찰사 장승원을 권총으로 살해한 사건이 그 대표적인 예였다. 칠곡군 인동의 거부였던 장승원은 1904년 봄, 당시 의정부 삼찬직에 있던 왕년의 의병장 왕산 허위선생에게 매달려 보직에 힘써주면 20만 원의 의병군자금을 내겠다는 맹약을 하고 경북관찰사직에 오른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1908년 왕산이 일군에 잡혀 순국하자, 이 약속을 추궁하는 왕산 문하의 의병들을 오히려 고발하는 무리수를 저질렀다. 이 밖에 1934년 일제의 경북도 경찰부가 펴낸 '고등경찰요사'란 책에 따르면 장승원은 왕실 토지의 편에 떨친, 장씨 가문을 중흥한 인물이 되었다.2. 장택상의 일생정치가이며 호는 창랑이고 본관은 인동, 경상북도 칠곡 출신으로 경상관찰사, 일제시대 중추원 의관, 청송 군수, 비서원승, 궁내특진관 등을 역임한 장승원의 아들이다.7세 때부터 한학 공부를 시작하였고 14세 되던 해에 서울에 올라와 당시 우남학회서 경영하던 학교에 입학하여 신학문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15세 되던 해에는 일본 산구현으로 가서 소학교에 입학하여 공부하였고 16세 때에는 조도전대학에 입하하였으나 그러던 중 상해로 건너가서 유학길에 올라 영국 에든버러대학에 유학하여 중퇴하였다. 유년시절부터 문학을 좋아하여서 한시뿐만 아니라 영시 독ㆍ불시까지 탐독하였다.해방 후의 미 군정차하에서 처음에는 경기도 경찰부장이란 이름으로, 후에는 수도청장으로 치안의 유지에 전념하였다. 오늘날과 다르게 ‘미군정’이라는 특수한 상황 아래 말할 수 없는 정치적, 사회적 혼란을 뚫고 건국에 이르는 험난한 과정에서 경찰의 임무란 여러 가지로 어려웠었다. 그리고 해방이 되자 바로 ‘건준’이 조직되어 얼마동안 다소 행정력을 발휘하려고 하였지만 9월 11일 미 군정이 선포된 후에 나라의 행정은 완전히 하지 중장 휘하의 진주군의 손에 넘겨지고 수십 개의 정당 ? 사회단체가 일시에 나타나는 상황에서 10월 초순 미 군정에서는 아놀드 미 군정 장관의 고문으로 인촌김성수를 비롯한 한국인 11명을 임명하였다. 또한 이후 얼마 후에는 경기도와 미국인 지사가 35명의 한국인을 그의 고문으로 임명하였는데 이 고문단은 경기도 일원의 중심으로 경기도 일원의 명사들로 구성되었다.이 고문단에서 주요한 인사 문제를 투표로써 결정짓기로 하였는데 그 결과 장택상이 경찰부장으로 명록에 올랐으며 그 후 정부 수립까지의 3년 동안에 걸쳐 전국에 영향을 미치는 수도청장으로서 치안 업무를 책임지게 되었다. 장택상은 스톤에게 14가지의 항목을 제시하였는데 그 항목이란 인사 문제에 미 군정이 간섭하지 말 것, 우리가 요구하는 경찰 예산을 무조건 들어 줄 것 등 치안 이에 공산당은 이 사태에 대한 반발로 여러 가지 파업과 폭력 사건 등을 유발하려고 책동하여 철도 파업에 이어 직장 파업까지 선동하자 이에 경찰은 파업 조종자의 색출과 파업의 금지에 나서 경찰과의 충돌이 벌어졌다.10월 1일 [남조선파업공동투쟁위원회]라는 간판을 내걸고 노동자들과 좌익 학생들이 주동대구역전 전평사무소를 중심으로 일어난 10 ? 1대구 폭동사건은 좌익의 비합법폭력노선에 의한 대대적인 반미군정 공세였다.해방후 북의 우익 세력 검거 선포에 월남한 민족주의자 최능진은 친일청산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상황을 보고 곧바로 친일경찰 퇴진을 추진했다. 이에 조병옥과 장택상은 반발하였고 생계를 위한 PRO-JOB이였고 경찰은 기술직이여서 어쩔수 없었다며 발언하였다.친일 경찰 문제를 둘러싸고 사사건건 논쟁을 벌이던 최능진과 조병옥 ?장택상은 1946년 10월 1일에 결정적으로 충돌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으며 최능진은 강하게 일제시대의 고등계 형사들이 해방 후에도 버젓이 경찰에 몸담고 있어 일반 양민의 원성을 사고 있다며 공동결의문까지 작성하여 호소하였다. 이것이 하지 중장에게 전달되었고 친일파 출신을 조사해서 경찰에서 배제하라는 성명서를 발표하였지만 받아 들여지지 않아 최능진은 12월 5일 사직서를 제출하며 ‘대조병옥 성명서’를 발표한다.경찰 숙청문제와 조병옥 개인의 비행을 지적하는 최능진의 공개서한으로 그에 대한 진상을 조사하기 위해 사문위원회가 구성되는 등 조병옥이 수세의 입장에 처하게 되자, 12월 7일 같은 한민당계열로서 경찰 수뇌부에 몸담고 있던 장택상 수도경찰청장이 조병옥을 지원하는 성명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그는 이 성명에서 오히려 최능진이야말로‘말살과 탄압과 억류와 체포를 좌익에 대하여는 주저하지 말라'고 자기를 '협박'할 정도로 극우의 '편당적인 경찰행정을 강행'하여 왔다고 몰아세웠다. 그는 최능진이 자신에게 '위협적인 언사로 공갈'했다는 것을 내세웠다.최능진 수사국장의 해임배경을 설명하는 장택상의 성명서가 나오자 12월 13일 최능진은 다시금 반박성가 성립될 수 있고 실제 암살을 누가 조종했냐와는 상관없이 그 혐의는 결과적으로 김구 측에 돌아갈 것이기 때문이다.그리고 1947년 7월 1일 몽양은 서재필을 출영하기 위해서 인천항에 장택상, 김규식, 군정장관 고문인 윔스 중령과 동행했었는데 장택상과 윔스는 운형의 신변이 위태롭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경찰은 당신을 보호할 수 없다. 몸을 피신하지 않으면 누구도 책임질 수 없는 사태가 발생할지도 모른다”는 말을 반복했다. 그리고 버취 중위가 만든 비망록에는 장택상이 운형을 보고 서울에서 떠날 것을 경고하며 만약 서울에 남아 있으면 안전을 책임질 수 없다고 말한 점에 대해 강한 유감을 표명한 적도 있었다. 그 후 여운형이 살해된 곳은 우연히 파출소에서 50보도 채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고 암살범이 저격할 수 있을 만큼 여운형이 탄 차의 속력을 줄이게 만든 것도 파출소 앞에 서 있던 경찰차가 우연히 가로막았기 때문이였다. 게다가 현장근처에선 우연히 고장 난 경찰차를 수리하던 경관 3명이 있었고 우연히 범행현장을 목격한 이들은 범인 대신 범인을 추격하던 여운형의 경호원을 공범으로 체포했다. 범행현장 일대는 우연히 모든 전화가 불통되었지만, 운형의 측근과 추총자들은 즉시 체포되었다.이런 너무 많은 우연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암살이 파출소 앞에서 버젓이 행해졌다는 사실만으로 암살범과 경찰의 연관관계를 단정 지을 순 없으나 몇 달 전 동일한 장소에서 동일한 방식의 총격테러가 있었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적어도 범인들이 경찰을 두려워하지 않거나 염두에 두지 않았다는 점을 알 수 있다.이 후 몽양 여운형의 비서였던 이기형은 수도경찰청장 장택상 총감이 정복을 입고 병실에 들어오자 아버지의 시체를 부둥켜안고 울던 맏딸 난구가 장택상 총감을 보고 마구 소리를 지르며 “우리 아버지를 죽인 자가 무엇 때문에 여기까지 나타났느냐”라고 쓰여진 글과 김두한이 몽양 암살 후 당시 수도 경찰청장 장택상에 불려 갔을때, 장택상은 “죽이지는 말라고 하지 않았나? 그저 혼만 내어주라고 했는데 이 보면서 확고해 졌다. 때문에 1948년 5?10선거에서 이승만의 정권장악을 막기 위해 동대문 갑구에 자신이 입후보해서 이승만의 정체를 만천하에 폭로하기로 결정하였는데 이승만 추종세력의 선거등록 방해 공작으로 무산되었다5) 여 ? 순 반란 사건1948년 10월 19일에 전라남도 여수에 주둔하던 국방경비대 제 14연대의 좌익계 장병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군인들은 다음날 여수와 순천을 점령했고 지역 좌익세력과 민중이 가담하였다.8 ·15광복 후 한반도의 남북분단이 고착화되어가자, 북한 공산세력은 전한반도의 적화를 기본전략 목표로 삼고 온갖 책략을 일삼던 중, 공산당을 비롯한 좌익세력의 활동이 불법화되면서 그들의 활동은 모두 비합법적인 지하활동으로 전환, 남한의 각계각층에 공산당 프락치를 심어 지하당을 조직하고 동시에 국민을 선동 · 조종하여 태업? 파괴 · 폭동 · 방화 · 살인 등으로 사회질서를 극도로 혼란케 하고 민심을 불안에 빠뜨림으로써 이른바 혁명적 여건을 조성하려고 안간힘을 썼다. 1948년 대한민국의 건국이 눈앞에 다가오자 그들은 온갖 수단으로 그것을 저지 · 방해하려고 혈안이 되었다. 1948년 4월 3일, 공산분자들의 조직적이고도 대규모적인 공작으로, 제주도 일원에 폭동사건이 발생하였다. 물론 현지 주둔 국군 병력과 경찰이 합동으로 진압작전을 벌였으나 폭동의 규모에 비하여 병력이 열세여서 시급한 증원 병력이 필요하였다. 이에 정부는 그 해 10월, 여수 주둔 국군 제14연대 병력 약 3,000명의 제주도 급파를 결정하였다. 한편 이 14연대에는 이미 공산당의 프락치가 침투되어 있었는데, 이보다 수일 전에 이 부대 소속 오동기 소령이 공산당 프락치임이 밝혀져 검거되었다. 그래서 또 다른 프락치와 반란 음모 관련자들의 색출을 위한 조사가 극비리에 진행되고 있었던 참이었다. 이에 자신들의 검거가 임박했음을 직감한 적색분자들과 관련자들은 극도의 불안과 절망에 빠지게 되었고, 어차피 음모가 노출된 이상 최후 수단을 택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제주도로 향발하기로
죽산(竹山) 조봉암(曺奉岩) 선생: 한국 현대사에서재조명 되어야 할 인물목 차I. 서론- 죽산(竹山) 조봉암 (1898~1959)II. 본론(1) 해방이전의 활동 : 조봉암 선생의 출생과 일제하의 민족해방 투쟁과 공산주의 운동(2) 해방 공간에서의 정치활동 : 해방 후 대한민국 정부수립 때까지의 정치활동- 민주주의민족전선 참여, 공산당과 결별- 민주주의독립전선 결성(3) 5.10 총선거와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 정치활동 : 대한민국 제1공화정에서 정치활동(4) 진보당 창당과 진보당 사건(5) 역사의 뒤안길에서 묻혔던 죽산 조봉암 그에 대한 재평가.Ⅲ. 결론- 한국 현대사에서 재조명 되어야 할 죽산(竹山) 조봉암(曺奉岩) 선생Ⅳ. 참고문헌 및 자료I. 서론우리가 반드시 풀고 넘어가야 할 우리 현대사 또는 한국 현대사 바로잡기의 주요 사건 중에 일제시대에는 독립 운동가였으며, 해방 후에는 민주 사회주의 운동의 지도자이며 진보정치인이었던 죽산 조봉암 선생을 무소불위의 탄압을 일삼는 이승만 정부의 독재 권력에 의해 이른바, "진보당 사건으로 해방이 되고 우리 정부가 수립된 후 이름난 정치인으로써 첫 사형이 집행된 정치인으로 죽산 조봉암 선생이 자주 거론됩니다.다행이도, 1959년 7월31일 사형집행 이후 48년이 지난 2007년 9월27일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는 국가보안법 위반죄로 사형당한 죽산 조봉암 선생과 유가족에게 국가가 사과하고 피해구제와 명예회복을 위한 조치를 취할 것을 권고했습니다.)이로써, 한국 현대사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해냈던 죽산 조봉암 선생에 대해 재조명 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된 것입니다. 젊은 시절 독립운동가로서, 해방 이후에는 진보 정치인이었던 그가 61세의 나이로 건국이후 정치인으로서 첫 사형이 선고되어 죽음을 맞게 된 그의 파란만장한 인생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II. 본론1) 조봉암 선생의 출생과 일제하의 민족해방투쟁과 공산주의 운동죽산 1898년 당시의 경기도 강화에서 태어났습니다. 4년제 공립보통학교와 2년제 보습학교를 거차 미소공동위원회가 무기 휴회되면서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된다. 1946년 5월 7일 자의 신문에 박헌영의 노선을 비판한 죽산의 편지가 공개되었기 때문이다. 편지의 내용은 라는 제목으로 5월 7일 각 신문에 보도되었습니다. ‘오직 당을 사랑하고 동무를 아끼는 마음으로 아니 쓸 수 없어서 쓰는 것’이라는 전제였지만, 박헌영의 노선을 조목조목 비판함으로써 죽산은 당과의 관계를 청산하고 마침내는 종산주의와 결별하게 됩니다. 편지에서 죽산은 박헌영에 대한 비판뿐만 아니라 자기비판도 했습니다. 즉, 국제혁명전사자가 구원회의 돈을 썼으며, 당원을 버리고 비당원과 결혼했다는 등 자신에게 제기되고 있는 5개 항에 관해 비판함과 동시에 변명한 후, 혁명가적 양심에 비추어 반계급적 반당적 반혁명적인 것인지를 분명히 처리해달라고 건의했습니다. 죽산은 민족통일을 위하고 자주독립을 위한 대중운동을 일으킬 생각이며, 신당 조직은 대중의 의견을 들은 뒤 시작할 작정이라고 밝혔다. 이를 계기로 죽산은 모든 공산당 관계의 좌익단체에서 이탈했으며, “공산당과 극우파들의 반민족적인 정치행동을 규탄하고 민족자주의 정신을 조취하고 민족 자주적 입장에서 독립운동이 계속되어야 할 것”을 기회가 있을 때마다 주장하게 됩니다.- 해방과 정치활동 : 민주주의독립전선 결성공산당과 결별한 죽산은 기자와의 회견에서 밝힌 것처럼 민족통일과 자주독립을 위한 대중운동을 일으키기로 하고, 이를 위해 가능한 한 널리 대중의 의견을 듣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죽산이 침묵을 지키며 대외적인 정치활동을 자제하면서 새로운 대중운동 조직을 모색하고 있는 도중에 좌우 양 진영의 합작을 모색하기 위한 좌우합작위원회가 구성되었으며, 1946년 10월 7일에는 합작 7원칙이 발표되기도 했습니다. 이들은 미소공위의 무기휴회를 민족의 위기로 파악했고, 일부에서 추진하는 대로 단독정부가 수립될 경우, 국토가 분단되어 민족상잔의 비극을 초래할 위험이 있다고 느꼈다. 이들은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좌우가 힘을 합쳐 미소공위의미한 것이어서 민족자주연맹에 참여하고 있는 중도적인 입장에 있던 정치인들로서는 어떤 방식으로든지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 처하게 되고 말았습니다. 여기서 민족자주연맹은 두 개의 노선으로 양분된다. 하나는 김규식을 중심으로 한, 어떠한 명분으로든지 단독정부 수립에는 참여하지 않겠다는 노선으로, 이들은 남북협상에 참여하게 됩니다. 다른 하나는 조봉암을 중심으로 한, 단독정부 수립은 현실적으로 불가피하다는 노선으로, 이들은 5?10선거에 참여하게 됩니다.인천시 을구에 출마한 죽산은 17,620표를 얻어 당선되어 2년 임기의 제헌의원으로서 대한민국정부의 수립을 위해 많은 노력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이로써 죽산은 남북협상파와는 정치적으로 다른 길 즉, 외형상으로는 이승만 노선을 따르게 된다. 국회의원에 당선된 죽산은 1948년 6월 1일 30명으로 구성된 헌법기초위원회의 일원으로 선출되어 헌법 기초작업에 임했습니다. 헌법이 통과되고 정부조직법이 통과된 후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 선포되었습니다. 정부를 조직할 때 죽산은 초대 농림부장관으로 추천되어 임명 되었는데 죽산 자신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던 벼락감투였고 또 농림행정을 알지도 못하는 까닭에 사양했지만 이대통령이 “적임이니 나라를 위해서 일하라”는 권유로 그는 농림장관이라는 직책을 맡게 되었습니다. 죽산은 이승만 정부의 초대 농림부 장관으로 기용되어 농지개혁법, 양곡매입법 등 진보적인 정책을 폈습니다.(4) 진보당 창당과 진보당 사건새로운 창당 운동은 1954년 11월에 3선 개헌안이 제 3대 민의원을 통과한 것으로 공식 해석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됐습니다. 이 대통령에게 3선의 기회를 열어주기 위해 여당인 자유당을 중심으로 추진된 개헌안이 사사오입(四捨五入)이라는 이상한 수학 계산법에 의해 통과된 것으로 처리되자 민심을 들끓었으며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민국당 중심의 반이승만 세력은 호헌동지회를 결성하고 이것을 기반으로 신당 운동을 벌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조봉암은 이 운동에 참여하고자 했장기집권체제의 큰 위협으로 등장했습니다.그 후 1957년 10월 조봉암은 라는 잡지에 )이라는 제목의 논문을 기고하여 대한민국과 북한이 대등한 입장에 서서 양측 정부를 해체하고 통일선거를 실하여야 한다는 요지의 통일방방법론을 제시였습니다.진보당 측의 이러한 평화통일론은 당시 정부의 공식 입장이던 북진통일론을 부정한 것으로 크게 정치문제화 되었습니다. 이에 자유당 정권은 1958년 1월13일 진보당은 북한의 주장과 유사한 국제 연합 감시하의 남북한 총선거를 주장하였고, 북한 간첩들과 접선하여 공작금을 받았으며, 공산당 동조자들을 국회 원에 당선시켜 대한민국을 음해하려고 하였다고 발표하였습니다.- 진보당 사건의 결과:1958년 1월 경찰은 진보당에 대한 내사활동을 전개하여 위원장 조봉암이 간첩 박정호와 접선하 바 있고, 진보당의 평화통일론은 북한 공산집단의 주장에 동조하여 국제변란을 획책한 것이라는 이유로 조봉암 위원장, 박기출 부위원장 등 간부 10명을 국가 보안법 위반혐의로 구속, 검찰에 송치하였습니다.1958년 2월20일 간첩 양명산이 검거되어 조봉암이 북한의 공작금 4만불을 전해받아 정당자금으로 사용한 사실이 밝혀져 파문이 보다 커졌으며, 2월25일 진보당 등록 취소 결정으로 정점에 이릅니다. 진보당의 평화통일론이 ‘대한민국의 국법과 유엔의 결의에 위반되는 통일 방안’이며 조봉암이 북한 간첩과 내통했다는 것이 주된 이유였습니다. 법원은 진보당의 평화통일론의 위헌성 여부를 살피고,1958년 7월2일 서울지방법원은 선거공판에서 "진보당을 대한민국 전복과 변란을 목적으로 한 결사라고 볼 수 없다"고 판시면서 박기출 등 17명의 간부들에게 무죄를 선고했고, 사형이 구형되었던 조봉암에 대해서는 간접방조죄만을 유죄를 인정하여 징역5년 형을 선고했습니다. 이 판결의 선고 후, 반공청년단원을 자칭하는 폭도들이 서울지방법원 청사에 난입하여 "용공판사 타도"라는 구호를 외치면서 시위를 벌여 법관들이 피신하는 사태가 벌어 졌습니다. 이후 1959년 2월 27일 대법원 판결에서귀결 되었습니다. 이 세 운동은 극좌도 아니고 극우도 아닌 중간노선 이었습니다. “제3의길”이라 할 수 있는 중간노선을 바탕으로 그는 비미비소(非美非蘇)의 민족자주노선을 걷는 정당을 창당 하려 했다는 것입니다. 진보당은 결코 공산주의 정당도 용공 정당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조봉암의 노선은 시대를 앞서 갔었던 문제는 있었지만, 문제를 잘못 파악하고 잘못 이끌려고 시도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특히 민중에 대한 애정과 실천에 있어 ‘목적윤리’ 만이 아니라 ‘책임윤리’를 중시한 인물이었습니다.조봉암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30년이 흐른 후인 1988년 7월에 ‘죽산 조봉암 선생 추모회’가 결성되고, 이 조직을 중심으로 본격적으로 조봉암의 명예회복운동이 전개되어 왔습니다. 그 결과 1991년 10월 25일 ‘죽산 조봉암 선생 사면?복권에 관한 청원’이 국회에 제출되었는데 ‘간첩’인 조봉암의 명예 회복에 대해 여야를 막론하고 정치권 전체가 동참하였다는 점은 조봉암에 대한 ‘정치적’의미에서의 복권은 사실상 이루어졌음을 보여줍니다.다행이도 더 나아가 2007년 9월27일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는 국가보안법 위반죄로 사형당한 죽산 조봉암 선생과 유가족에게 국가가 사과하고 피해구제와 명예회복을 위한 조치를 취할 것을 권고했습니다.이로써 한국 현대사에서 재조명 되야 할 죽산(竹山) 조봉암(曺奉岩) 선생이 기나긴 역사의 뒤안길에서 드디어 명예 회복을 하였습니다.저는 조봉암이 주장했던 평화통일노선은 지금 우리 현대사에서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하며, 1970년 이후 한국의 모든 역대 정부는 평화통일 정책을 택했는데, 조봉암의 그리고 진보당의 평화통일 노선과 그 이후 한국 역대 정부의 평화통일 정책 사이에는 어느 정도 관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더더욱 조봉암 선생의 평화통일 정책은 높은 가치를 매겨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근현대사에 있어서 독재정권의 반공이데올로기로 인해 조봉암은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았으며, 그에 대한 연구 또한 미비한게 현실입었다.
「 존하지와 미군 점령통치 3년 」* 목 차 *1. 서론2. 존하지와 미군 점령통치- 존하지 그는 누구인가- 미국의 한반도점령 계획- 군정초기의 하지- 하지와 신탁통치- 굿펠로와 이승만이 남한만의단독정부수립을 공개적으로 제기- 하지와 이승만의 애증관계- 군정의 종식3. 결론4. 출처1. 서론1945년 해방직후부터 1948년 남한 내 정부수립까지의 미군정이 존재했던 시기는 비록3년이라는 짧은 기간이었지만 식민지 이후 한국 사회구조가 재편되고 새로운 국가권력 및 분단국가가 형성된 중요한 시기였다.2차세계대전이 종결된 후 미국 육군중장 하지는 38도선 이남지역에 있는 일본군의 항복을 접수하는 책임을 맡게 되었다. 원래 하지가 이끄는 제24군단은 1945년 11월로 예정된 일본 본토의 공격에 참여하기 위해 오키나와에 주둔하고 있었다. 하지장군이 남한지역 미군사령관으로 임명된 중요한 이유는 일본이 항복할 무렵 그의 병력이 한국에 가장 빨리 이동해 올 수 있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었다.맥아더는 하지에게 남한 점령을 위한 3단계 작전명령을 지시했고, 미군에 맡겨진 또 다른 구체적인 임무들로서 점령군의 작전수행에 방해가 될지 모르는 한국인들과 그 조직들에 대한 감시와 억압, 육해로의 교통수단과 통신수단의 확보, 그리고 남한 내에 법과 질서의 유지를 주된 목적으로 하는 군사정부의 설치 등이 포함되었다.2. 존하지와 미군 점령통치- 존하지 그는 누구인가?: 하지는 1893년 6월12일 미국 일리노이 주의 시골 도시 골콘다에서 태어나 일리노이의 농장에서 성장기를 보냈다. 그는 1912년~1913년 사이에 남일리노이 사범대학에서 공부했고, 1917년에 일리노이 대학에서 건축학을 전공했다. 그는 웨스트포인트(정규육사) 출신은 아니었다. 그는 1917년 5월 셰리든 요새에 있는 고등사관양성소에 입학함으로써 직업 군인으로서 첫발을 내디뎠다. 제1차세계대전기에는 보병 장교로 프랑스전선에 참전했고, 1921년에는 미시시피 농과대학 군사학 및 전술학 교관이 되었다. 1925년에는 교관직을 떠나 지휘·참모학교에 입교하였고, 이 학교와 육군군사대학을 졸업했다. 그는 항공대 전술학교를 졸업한 몇 안 되는 육군 장교였지만 계속 보병으로 복무했다. 하지는 여러 전쟁에 참여하였고, 탁월한 지휘능력을 갖추고 있었으며, 또한 그는 장병들과 고락을 같이 하고 솔선수범하는 스타일이었고, 자신의 부대를 정예 전투부대로 유지함으로써 수많은 전투에서 혁혁한 전공을 쌓았다.미 육군 남조선 주둔 사령관으로 임명된 하지는 ‘군인 중의 군인’이라는 평판처럼 전형적인 야전 지휘관형 무장이었다. 하지는 ‘무뚝뚝하고 직선적 접근방식’을 통해 문제를 풀어나가는 것으로 유명했다.- 미국의 한반도점령 작전계획: 하지는 8월19일 태평양 방면 미 육군사령관 맥아더로부터 한반도 점령 작전계획을 하달 받았고, 이날로 미 육군 남조선주둔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제 24군단에 의한 한국에 대한 실시계획은 처음부터 많은 문제에 직면했다. 특히 무엇보다도 문제가 되는 것은 미군정의 한반도 점령성격에 관한 것이었다. 당시 하지가 채택한 것은 적전의 군사작전기간에 적절한 군정형태인 군인에 의한 직접적인 통치체제였다. 다시 말하면 하지의 미군정은 바로 적전상륙작전의 일환으로 전개된 통치 형태라고 할 수 있다. 보다 더 구체적으로 미군정의 성격에 대한 또 다른 설명은 하지의 24군단이 한국에 진주하기 직전의 한국인들에 대한 미군들의 통상적인 인식 속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즉 “한국인들을 해방된 국민으로서 대접해야 할 것 인가” 의 여부에 대하여 그들은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물론 한국인은 해방된 국민으로서 대접받아야 한다. 그러나 한국인들은 스스로 독립국가를 유지할 능력을 결여하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대우를 급격하게 할 수는 없고, 점진적으로 적용시켜야 한다.”· 미군은 한반도에서 카이로 선언의 이행에 중점을 두기보다는 점령군으로서 무력적인 지배자의 성격을 보여주었다.본관 휘하의 전승군은 일본천황 정부 및 대본영의 명에 따라 서명된 항복 문서상을 점령한다. ········ 한국인의 점령의 목적이 항복문서 조항의 이행과 한국인의 인권 및 종교상의 권리의 보호에 있다는 것을 깊이 인식해야 한다. ········ 본관은 본관에게 부여된 태평양 미육군 최고 사령관의 권한을 가지고 북위 38도선 이남의 지역 및 주민에 대하여 군정을 실시한다.· 1945년 9월 8일 인천에 상륙함과 동시에 맥아더 사령부는 다음과 같은 포고문 제1호를 공포했다.· 미군이 남한에 진주함으로써 해방은 되었으나, 제 24군단은 통치행정에 필요한 세부적인 사항을 전혀 준비하지 못 한 상태였다. 한국임무에 관한 지침서도 거의 없었을 뿐더러 하지중장에게 제시되었던 정책 설명은 빈약하게 불명료했기 때문에 그는 모든 단계에서 그의 방식대로 행동하게 되었다.- 군정초기의 하지· 한반도에서 군인정치가로서의 출발은 혼동과 좌절감을 느끼면서 시작되었다.· 서울에 진주한 뒤 기자회견을 통해 조선인 각 정당 대표를 만나는 자리를 만들었다.· 당시 미군정 당국의 주요 정책 방침. ① 일제의 기존 행정기관의 계속 존속과 종래의 직무에 종사 ② 미군정 이외 어떠한 한국인 정권(“조선인민공화국”과 임정)의 불인정 ③ 한국 내 모든 정당의 자유로운 활동 보장과 미군정의 엄정 중립 태도의 유지· 정부형태를 가진 국내의 조선인민 공화국과 해외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처리.· 이승만과 독립촉성중앙협의회- 하지와 신탁통치· 역사의 흐름을 바꾼 왜곡보도: 1945년 말 삼상회의 결정의 한국관련 내용이 국내에 보도되자 국내에서는 반탁운동이 거세게 일어났다. 이는 반탁투쟁의 열풍과 신탁통치 논쟁으로 남한 정치에 좌·우 대립이 확연하게 자리 잡는 계기가 되었다. 삼상회의 결정의 한국관련 내용은 “소련은 신탁통치 주장, 미국은 즉시 독립 주장, 소련의 구실은 38선 분할점령” 이라는 보도 내용은 삼상회의 결정전에 전달된 오보였다.· “나를 속이면 죽여 버리겠다”고 김구 위협: 임시정부는 김구를 중심으로 1945년 말의 반탁운동을 정부수립 운동으로 연결시켰다. 삼상회의 결정이 국내에 알려지자 임정 주도로 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가 결성되었다. 임정주도의 반탁시위가 전국 총파업 등 강경하게 이루어지자 미군정은 임정의 기도를 쿠데타로 규정하면서 단호한 태도로 저지했다. 하지는 1946년 1월1일 김구를 만나 반탁시위가 군정이 아닌 신탁통치에 반대하기 위함이라는 것을 라디오 방송을 통해 밝히도록 하고 그 자리에서 하지는 ‘나를 속이면 죽여 버리겠다’고 김구를 위협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하지가 김구를 위협하면서 강조한 내용으로 하지는 반탁운동 자체를 문제 삼은 것이 아니라 반탁운동이 미군정을 향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홍보하는데 주의를 기울였다. 반탁운동을 거치며 남한에서는 좌, 우 대립이 본격화되었다.· 신탁통치 문제에 대한 타스통신의 반격: 반탁운동으로 미군정과 남한 우익이 수혜를 받았다면 소련과 남한 좌익은 피해자였다. 하지만 반탁운동의 열기가 남한을 휩쓸고 있는 상태에서 남한의 좌익세력이 이 문제를 정면 대응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 문제에 대한 정면 대응은 모스크바로부터 나왔다. 1월 24일 자로 삼상회의에서 신탁통치 제안자가 미국이었다는 사실을 타스통신이 공개하가, 미군정은 이 보도가 하지와 미군정에 대한 야비한 공격이라며 사실을 부인했다. 그러나 타스통신은 모스크바 현지시간으로 24일 밤에 라디오 방송을 통해 삼상회의에서 신탁통치의 원래 제안자가 미국이었다며 미국 측 제안 내용과 협상전말을 자세하게 공개했다. 그리고 소련정부는 맥아더와 하지가 사실을 부인한다면 이 사안을 외교문제로 삼겠다는 의지를 보임과 동시에 남한에서 반탁 선전의 근거를 없애버린 결정타를 날렸다.· 모순으로 가득 찬 하지의 대응 : 하지의 반탁입장은 반탁운동에 반영된 한국인의 독립 열망에 진정으로 동조했기 때문에 나온 것이 아니었다. 반탁운동은 하지의 정치적 목표를 실현해 줄 수 있는 수단이었을 뿐이고, 반탁운동이 자신이 동기 부여한 이외의 영역으로 확대될 때 즉 한국인의 독립 열망과 반외세 정서로 비화될 때에는 오히려 단호히 견제해야 할 대상이었다.- 굿펠로와 이승만이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공개적으로 제기.: 1차 미소공위 결렬 이후 미국의 대한정책은 온건 좌·우파 정치세력의 합작을 통해 보다 대외적인 정치적 대표기구를 설립하고, 이를 미군정의 한국인에 대한 행정권 이양계획과 결합시킨다는 방향으로 공식 표명되었다. 이 구상은 계속 발전하여 이 양자의 결합에 의한 ‘남조선 과도정부’의 수립을 계획의 완정 형태로 간주하였다. 바로 이 시점에 오히려 국내에서는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 논의가 크게 부각되었는데 굿펠로와 이승만이 남한만의 단독정부수립을 공개적으로 제기했다.- 하지와 이승만의 애증관계: 이승만과 하지의 관계는 그가 방미를 결심하게 만든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승만이 유엔과 미국 여론을 향한 직접 호소를 구사하던 당시 국내에서 이승만의 지위가 그렇게 안정적이었다고는 할 수 없다. 이런 상태에서 국내에서 이승만이 자신의 구상을 전면적으로 실현 시키는 것은 불가능하였을 뿐만 아니라 미국을 향한 그의 선전활동도 제약이 따를 수밖에 없었다. 이승만 방미의 배경에는 단정안을 본격적으로 선전할 기회를 마련하겠다는 생각과 함께 어떻게 하든지 미국의 대한정책, 구체적으로는 그 집행자인 하지와의 관계를 새롭게 조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정이 크게 작용하였다. 이승만의 도미 과정을 설명한 기존의 연구들은 대부분 이승만과 하지 사이의 갈등을 과장하면서, 이승만이 하지의 방해와 반대를 무릅쓰고 맥아더의 도움을 받아 겨우 도미할 수 있었던 것처럼 얘기하였다. 그러나 여태까지 알려져 있던 것과는 정반대로 이승만에게 미국행을 먼저 권유했던 것은 주한 미군사령관 하지 중장이었고, 이미 11월 초부터 양자 사이에는 도미를 둘러싼 사전 조율이 이루어졌다. 하지의 의도는 두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는 미군정이 처한 입장을 상부에 알리고 상부의 정책 결정을 촉구하는 데에 이승만을 이용하려는 것이고, 둘째는 이승만을 외유시켜 그를 잠시 한국정치로부터 분리시키고, 언론의 조명으로부터 물러나 있게 하려는 의도이다.
조소앙(趙素昻)서론본론1. 항일 자주의식의 형성2. 중국망명과 초기독립운동3. 임시정부에서의 삼균주의와 독립운동4. 삼균주의와 대한민국건국강령5. 광복 후의 국가건설 운동결론참고문헌 및 자료서론조소앙은 민족적 시련과 고통으로 얼룩진 일제하를 비롯하여 혼란스러운 해방정국의 한 가운데에 서서 국권회복과 조국독립을 위해 헌신하였고 또한 독창적이고 주체적인 삼균주의 사상을 창안하여 민족이 나아가야 할 바를 제시한 민족해방 운동가였으며 그것을 통해 우리 나름의 자주적인 근대국민국가를 수립하고자 했던 사상가이기도 하다. 다음에서 조소앙의 생애와 독립운동을 중심으로 그의 행보 전반에 있어 언제나 기본 전제이자 목표가 되는 삼균주의 사상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한다.본론1. 항일 자주의식의 형성본명은 조용은(趙鏞殷)이고 자는 경중(敬仲), 아호는 소앙이었는데, 통명으로 사용하여 본명처럼 불리었다. 조소앙 선생은 1887년 4월 30일 경기도 교하군 월롱면에서 부친 조정규, 모친 박필양 여사 사이에서 6남 1녀 중 차남으로 출생하였다.일찍 개화파가 된 맏형 조용하에게서 독립협회의 취지와 활동을 전해 듣고 감복 받음으로써, 형의 영향으로 어릴 적부터 개화와 서양지식, 열강의 동향을 비교적 소상히 배울 수 있었다. 1902년 성균관에 최연소자로 입학하였으며 1904년 성균관을 수료하고 7월에 황실유학생으로 선발되어 도일 도쿄부립제1중학교에 입학하였다. 조소앙은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도쿄 유학생들과 같이 우에노 공원에서 7층신 추모대회와 매국적신 및 일진회의 매국행각 규탄대회를 열어 일제를 비판하였다. 또 1908년 샌프란시스코에서 전명운, 장인환 의사의 일제 앞잡이 스티븐슨 처단의거를 계기로 도쿄 유학생들과 항일운동을 적극 추진하였다. 이어서 1909년에 도쿄에 있는 유학생들의 각 단체를 통합한 대한흥학회(大韓興學會)를 창립하여 회지의 주필이 되어 국내 신문 및 학회 등과 호응하여 배일사상을 고취 시켰다. 제 1중학을 거쳐 정칙학원에서 영어를 배우고 1912년 메이지대 법학5년 조소앙은 국내외 동포의 대동단결과 민족의 종교적 단결을 목적으로 ‘육성교’)라는 새로운 종교를 제창하기도 했다. 이 같은 사상이 바탕이 되어 조소앙은 1917년 7월에 상해에서 독립운동계의 국내외의 변화에 대응하여 ‘대동단결선언(大同團結宣言)’을 기초하여 신규식? 박은식? 신채호 등 14명의 명의로 발표한다. 조소앙의 독립운동은 대동단결선언에 이어 1918년 2월에 ‘대한독립선언서(大韓獨立宣言書)’를 기초하여 이동녕? 안창호? 이시영 등을 비롯한 당시 여러 곳에 있는 저명한 민족독립운동자 39명의 명의로 발표한다. 이는 국외 특히 중국 본토 및 동삼성지역을 주무대로 항일투쟁을 전개하던 민족지도자 다수가 참여한 선언으로 3?1운동과 임정수립 이전의 민족연합형태를 취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때를 즈음해서 조소앙은 신한청년단원으로서 도쿄에 잠입하여 일본 유학생들의 궐기를 고취하여 2 ? 8 독립 선언서의 계기를 조성하며 그들의 독립운동을 지도하였다. 이는 3 ? 1 독립선언서에도 그대로 반영, 계승되었고 3 ? 1 운동으로 전개되었다.3. 임시정부에서의 삼균주의와 독립운동1) 임정참여와 유럽외교활동1919년 3?1운동이 일어났고 같은 해 4월 상해에서 임정이 세워진다. 소앙은 처음부터 참여해 임정의 헌장 기초를 잡는데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1919년 4월 10일 상해에서 개회되어 절차에 따라 초대 국무총리에 이승만이 선출되고 국무원이 구성되자 임정초대 국무원 비서장에 선임된다. 임정에서 ‘대한민국청년외교단’을 조직하게 되자 조소앙은 외교특파원으로 임명되어 각지에 파견, 활동을 한다. 그리고 6월 국제사회당대회 준비위원회에 참석하기 위해 김규식과 합류하여 한국의 독립 승인 및 국제연맹에의 가맹을 요구하는 등의 외교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리하여 8월에는 스위스에서 개최되는 국제사회당대회에 참석하여 ‘한국독립의 승인안’을 제출하여 통과시킨다. 이어 네덜란드서 개최되는 대회에도 한국의 독립을 승인하는 결의안을 통과시키는 외교적 성과를 거두게 된다. 그 뒤 그는 덴마와 사회주의를 적절히 배합하되 평등에 역점을 두었고 정치의 균등, 경제의 균등, 교육의 균등을 하나의 축으로 삼고 개인과 개인 사이의 균등, 민족과 민족 사이의 균등, 국가와 국가사이의 균등을 다른 축으로 삼아 2개 차원에서의 삼균을 강조했다. 소앙의 삼균주의 가운데 독특한 대목은 교육의 균등이다. 그는 조선 사람들은 대부분 교육을 받지 못해 남에게 눌려지낼 수 밖에 없다고 보고 국가가 의무교육제를 충분히 실행해 교육의 불평등을 해소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삼균주의의 중요한 점은 민족통합적 성격이다. 소앙은 민족의 통합을 위해서라면 좌우합작이 반드시 선행돼야 한다는 믿음 아래 좌우가 모두 받아들일 수 있는 이데올로기로 삼균주의를 정립한 것이기 때문이다. 삼균주의 성격이 그러했기에 중국에서 활동하던 한인들의 항일정당들 가운데 좌와 우익 주요한 정당들은 삼균주의를 자신의 공식이념으로 채택했다.3) 한국독립당창당 그리고 활동이에 앞서 1927년 국내에서 신간회가 성립되자 이에 호응하여 11월 상해에서 한국유일독립당촉성회를 결성하고 상임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이는 민족세력통합운동이었으나 좌우익의 대립심화로 와해되었고 1930년 1월 김구, 이동녕 등을 포함한 28명과 함께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을 창당하게 된다. 이때 조소앙은 당의 ? 당강을 작성하였는데 삼균주의 사상이 공식 반영되어 여기에서 ‘태극기민족혁명론’을 제창하고 적기혁명론을 배격하였다. 즉 당의는 “국토와 주권을 완전히 광복해서 정치경제교육의 균등을 기초로 한 신민주국가를 건설하고 안으로 국민 각개의 균등생활을 확보하며, 밖으로는 민족과 민족, 국가와 국가의 평등을 실현하고 나아가 세계일가의 진로로 향한다.”라고 하였다. 당강은 보통선거에의 참정권과 기본권 보장, 토지 및 대생산기관의 국유화에 의한 생활권의 평등화, 국비의무교육에 의한 교육권의 평등화, 또한 민족자결과 국제평등, 세계일가의 조성 등을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인류, 민족, 국가는 정치 경제 교육의 ‘삼평(三平)’을 획득하여 서로 공생해야 어 광복전선을 강화하기 위하여 조소앙 자신의 한국독립당과 김구 중심의 한국국민당, 이청천의 조선혁명당과 제휴하여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를 남경에서 결성하였다. 이어서 3당의 합당을 추진하여 ‘한국독립당’이라는 당명으로 정식 통합되었으며 창당 선언에서 ‘삼균주의’ 정립을 확정 시켰다. 또한 그 해 9월에 임정은 중경에 정착하면서 민족진영의 모든 항일독립군 요인들이 임정산하로 총결집되어 한국광복군을 창립하여 독립운동의 최후단계를 맞이할 준비를 갖추기에 이르렀으며, 자신이 기초한 광복군포고문을 광복군 창립식에서 공표하였다.10월에는 김구 주석 체제하에서 외무부장으로 선출되었고 이듬해 임정은 조소앙의 삼균주의에 입각한 ‘대한민국건국강령’을 공표하였다. 또한 1942년 1월 조소앙은 임정내부에서 선전위원회를 구성하여 주임이 된 뒤 ‘한중문화협회(韓中文化協會)’를 창설하는 등 내외에 대한 선전활동에 힘을 쏟았으며 그는 이 협회에서 김규식과 함께 부회장직을 수행하였다. 그리고 1943년 조소앙은 한국독립당 중앙집행위원회 집행위원장이, 2년 뒤에는 한국독립당 부위원장이 되었으며 또 임정의 외무부장으로서 ‘대일선전포고문’, ‘대독선전포고’ 등을 비롯하여 많은 대외문서를 작성, 발표하기도 하였다.이 당시 영국과 미국, 중국 등을 상대로 한 외교활동에 있어 많은 활약이 두드러졌는데, 한국독립운동을 하는데 있어 필요한 물질적 지원과 임정의 승인을 끌어내기 위해 중국정부에 구체적인 지지를 요구하였고 미국과 영국 등에 대해서도 광복이후 임정의 정통성 확립과 신민주국가 건설의 바탕을 마련하기 위해 임정에 대한 승인을 해줄 것을 요구하였다. 또한 1945년 3월 한국의 독립과 임정의 정식승인, 일제의 침략행위에 대한 처리 등을 요구하기 위해 샌프란시스코에서 개최된 연합국 국제회의에의 임정대표로 참가를 정식 요청하기도 하였다. 비록 외교적 성과를 얻지는 못했으나 외교적 수완을 발휘하여 민족세력의 통합을 모색하였고 세계에 한국의 독립문제와 임정의 존재를 알리는 데 큰 역할을 하였음은 분명한 우리 민족 국가의 역사적 배경과 임정의 정통성을 표명하고 있으며, 단군의 홍익인간과 이화세계(理化世界)의 이념이 담겨 있고 삼균제도를 건국의 기본이념으로 삼을 것을 규정하고 있다. 제 2장 복국은 주권을 되찾기 위한 독립운동의 방략을 모색한 것으로, 이 시기에는 광복운동자 전체가 주권을 대행하며 임정의 국무위원회가 임시헌법에 의거하여 복국에 관한 업무를 집행할 것을 규정하였다. 또 전 민족적 역량을 동원하여 국제적 협력을 얻어 일제를 분쇄하고 건국을 준비할 것을 제시하였다.제 3장 건국은 일제의 통치기구가 박멸하고 새로이 정부가 수립되면서 보통선거를 실시하고 토지와 대생산기관의 국유화를 이룩하며 고등기초교육까지의 의무교육을 실시함을 그 내용으로 하고 있다.본 강령에 대해 토지 국유나 대생산기관의 국유화 등에 대해 반대의견도 있었으나 어느 외부사상을 모방하거나 변화시킨 것이 아닌 우리 민족의 역사적 정통사상과 배경을 근거로 자유주의와 사회주의를 평등한 입장에서 모두 수용하여 완전한 민족연합전선에 의한 투쟁론을 전개하였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결국 광복 후의 국가건설을 세계평화에까지 연결시켜 한민족의 자유민주국가로 향한 방향을 제시해 주었고, 본 이념이 바탕이 되어 중경의 임정은 김원봉 등의 사회주의 세력을 포용하여 민족대연합전선을 이룩하여 거국내각을 구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삼균주의에 입각한 건국이념은 동서양의 사상을 포용한 민족주의에 바탕을 두었으며 그것을 통해 자유민주적이고 독립적인 민족의 미래를 설정한 것이다. 그리하여 삼균주의에 바탕을 둔 건국강령은 임정의 기본이념 및 정책노선으로 확정되었고 이후 독립운동의 방향이 됐으며 복국과 건국에 지침이 되어 광복 후 대한민국이 수립되면서 헌법을 통해 그 정통성이 계승되었다.5. 광복 후의 국가건설 운동해방이 되고 그 해 12월 임정 대변인으로 상해 한국독립당 부위원장으로 귀국한 조소앙은 임정인사들과 미군정하에서 건국을 위한 정치활동을 하였다. 그러나 임정이 미군정으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하고 신탁통치안이 모스크바
인촌(仁村) 김성수목 차Ⅰ. 서론-김성수[金性洙]Ⅱ. 본론ⅰ. 제1기(1915~1923년)ⅱ. 제2기(1924~1935년)ⅲ. 제3기(1936~1945년)ⅳ. 제4기(1945~1948년)ⅴ. 제5기(1948~1955년)Ⅲ. 결론1. 서론김성수는 두 가지의 입장에서 평가가 내려지는 인물입니다.하나는 민족주의자라는 입장의 평가이고 다른 하나는 친일파라는 입장의 평가입니다.왜 이러한 상반되는 평가가 내려지는지 이에 대하여 살펴보도록 합시다.2. 본론김성수에 대해서 알아보기 위해서 김성수의 태어난 환경과 일제하 활동을 알아보기 위해 그 성격의 변화에 따라 5가지로 나누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ⅰ. 제1기(1915~1923년)제 1기를 살펴보기에 앞서 김성수의 출생과 함께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교육가ㆍ언론인ㆍ정치가인 김성수는 본관은 울산, 호는 인촌(仁村)으로 전라북도 고창에서 호남의 거부였던 김경중의 장남으로 출생하였으며, 3세에 큰아버지인 김기중의 양자로 들어갔으며, 1906년 전라남도 창평에서 송진우(宋鎭禹)와 영어공부를 하고, 1908년(18세)군산의 금호학교(錦湖學校)에 다녔습니다.그해 10월에 새로운 학문을 배우겠다며 송진우와 일본 도쿄로 건너가 세이소쿠영어학교(正則英語學校)와 긴조중학교(錦城中學校)를 거쳐 1910년 와세다 대학(早稻田大學)에 입학하여 1914년 정경학부를 졸업하였습니다.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한 후 ‘내 나라의 독립을 되찾기 위해서는 먼저 민족의 교육이 앞서야 한다.’고 사립학교 교육의 중요성을 절감한 김성수는 최남선, 안재홍 등 일본 유학시절 만났던 친구들과 함께 관련 자료를 모아 1915년 봄 백산학교라는 이름의 사립학교 설립 안을 만들었으나 조선총독부에 의해서 좌절당해야 했습니다. 그러던 차에 운영난에 빠진 중앙학교(中央學校)를 1915년 4월 인수하고 근대적인 경영방식을 도입하며 학교운영을 근대적, 합리적으로 바꾸며 직접 영어와 경제를 가르쳤으며 특히 한국어 교습이나 민족주의 교육을 통해 민족교육을 자리 잡았으며 1917년 3월 교장에치운동입니다. 또한 l923년 )민립대학설립운동(民立大學設立運動)에 참여하며 민족의식을 불러일으키고자 힘썼습니다.ⅱ. 제2기(1924~1935년)1929년 2월 재단법인 중앙학원(中央學院)을 설립하였고 식민지라는 여건 때문에 유능한 젊은이들이 고등교육을 포기하거나 외국으로 나가야 하는 현실을 지켜본 김성수는 이를 민족의 큰 손실이라고 생각하며 유럽과 미국을 비롯한 세계 여러 나라의 문물과 교육 실태를 두루 살피고 돌아와(1929-1931), 이듬해인 1932년 3월에는 어려운 형편에 있던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를 인수하여 미국 여러 대학의 선진적인 제도와 시스템을 도입하였으며 교장에 취임하였습니다.1930년 조선내의 “자치”가 완전히 무너지고 신간회(1927~1931)가 해소되자 1931년부터 동아일보는 새로운 운동을 전개하는데 이는 ‘)브나르도 운동’이라 던지 ’만주동포 구제운동‘ ’이 충무공 유적보존운동‘ 등을 전개하는데 특히 ’브나르도 운동‘은 학생들로 하여금 대중들의 계몽활동과 문맹퇴치활동 등을 전개한 것입니다.1935년 동아일보는 ‘브나르도 운동’을 포기하고 그 주도권을 일제에 맡김으로써 친일의 색채를 띠기 시작합니다.ⅲ. 제3기(1936~1945년)1936년 손기정의 올림픽 재패를 계기로 이른바 ‘)일장기 말소사건’이 일어나 동아일보는 무기 정지됩니다.하지만 이는 동아일보의 활동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한 체육부 기자의 활동이라고 보아야하는데 이 사건으로 동아일보는 이 기자를 퇴진시키고 이에 대한 조건으로 1937년 신문을 다시 속간시킴으로써 일제에 투항하기보다는 일제의 보호망 속에 더욱 깊숙이 들어가게 됩니다.1937년 중?일 전쟁을 전후하여 김성수는 언론. 교육. 산업 보국의 정신에서 일탈하여 친일 전쟁협력행위도 본격화 됩니다.1939년 9월 서울시의 라디오 강연에 출연하여 일제의 전시동원을 호소하였으며, 1938년 6월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의 발기인 및 이사로 참석하고, 연맹 산하 비상시생활개선위원회의 위원으로 참여하였습니다. 또한 1939년 히 발포된 조선에 징병령 실시의 쾌보는 실로 반도 2천5백만 동포의 일대 감격이며 일대 광영이라 당시 전역을 통하여 선풍같이 일어나는 환회야말로 무엇에 비유할 바가 없었으며 오등 반도청년을 상대로 교육에 종사하는 자로서는 특히 일단의 감회가 심절{深切)하였던 바이다.(중략} 그런데 이 징병제 실시로 인하여 우리가 이제야 명실상부한 황국신민의 자격을 얻게 된 것은 일방으로 전 반도청년의 영예인 동시에 반 천년 문약의 분위기 중에서 신음하던 상술한바 모든 병근(病根)을 일거에 쾌치(快治)하고 거일{去日) 생산할 제2의 양질(養質)을 얻은 것이다. 어찌 반갑지 아니하며 어찌 감격치 아니 하리오. 하고{何故)오하면 상술한 문약의 고질 을 치료함에는 오직 상무(尙武}의 기풍을 조장함이 유일무이의 양약인 까닭이다. 그러나 여하한 능라주단이라도 차(此)를 재지봉지(裁之縫之)하여 의상을 만들어 착용치 아니하면 금수(錦繡)의 가치가 없을 것이요, 아무리 기효(奇效)를 주{奏)할 양약이라도 이를 전지환지(煎之丸之) 하여 복용치 아니하고는 필경 그 실효를 들지 못할 것이다. 그러면 이 징병제 실시의 이 영예를 청년제군은 여하히 착용하며 이 양약을 여하히 복용하여 외관으로나 내용으로나 그 실효실예(實 效 實譽)를 완전히 현양(顯揚)하려는가. 무릇 의외(意外)의 영예가 돌아올 때에는 그 영예의 소종래(所從來)를 잘 생각하여 그것을 완전 향수할 준비가 없지 못할 것이며 양약이 입수(入 手}되었을 때에는 먼저 잘 조리복용 하여 완전히 효험을 발휘케 할 연찬(硏讚)이 없지 못할 것이다 이 점에 있어서 오인(吾入)은 금후 제군에게 일단의 인고와 일층의 단련을 요청하는 바이다. 그러면 이것을 실천할 첩경은 어디 있으며 비방은 무엇인가. 오인은 이제 새삼스럽게 제군에게 지교(指敎)할 것도 없이 4~5년 이래로 우리 일석제송(日夕齊誦)하는 황국 신민서사{皇國臣民誓辭)를 한번 다시 되풀이하고자 한다.1. 아등(我等)은 황국신민이다. 충성으로써 군국에 보(報)하자, 이 조는 말할 것도 없이 우리의 )하라' 이 일절 중에 소위 신애협력의 전부가 포함된 것이다. 여기에 특히 '충군'의 2자는 표시되지 아니하였으나 기실 효도 충군의 일단이요, 우도 충군의 일단이요, 화신(和信)도 또한 그러하다. 신민(臣民) 이 모두 상호 신애협력하여 단결을 굳게 하였다가 일단 완급(緩急)이 있으면 의용봉공(義勇奉公)하는 것이 충군{忠君)의 지상방법(至上 方 法)이며 우리 생활의 의미가 전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즉 자(子)가 되어서는 자의 직 (職)을 다하고 형제간에는 형재의 책(責)을 다하고 부부. 붕우가 각기 그 소처(所處)의 직책 을 다하는 것이 곧 신애협력 의 요체이다.3. 아등 황국신민은 인고단련(忍苦穀練)을 양(養)하여서 황도(皇 道)를 선명(宣明)하자. 금은 주옥(金錄珠玉)도 이를 단련 조탁치 아니하면 일개 토석(土 石)에 불과하고 교목거재(喬木巨 村)도 이를 승연부단(繩硏理斷)치 아니하고는 고루거각의 동량이 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아무리 위 인성자의 소질이 있다 할지라도 인고단련이 없이 생지천성(生知天成)은 바라지 못할 것이다. 사람이 사람다운 사람이 되려면 일도 인고단련이요 이도 인고단련이다. 저 금옥이 열화중에 용해되며 철석 (鐵石)으로 조탁될 때에 그 고통이 여하하였으며 저 동량(棟梁)이 작지단지{斫之斷之) 준지부지(準之斧之)할 때에 또한 얼마나 고통을 받았으랴. 그 온갖 고통을 인내하였으므로 만인이 경앙하는 동량이 되며 진중(珍重}하는 금옥이 되지 않는가. 인간도 또한 절대적이므로 이 원칙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이같이 인고단련을 쌓아 완전 위대한 신민이 되어서 황도를 양(揚)하는 것이 곧 오등의 최종 목적 에 도달하는 것이 다. 이상의 이론이야 누가 모르리요만 금후의 성과 는 오직 이상 서사{誓詞)의 심송체행{心 誦體行)에 달렸음을 다시 한번 강조하여 자타의 경성(警醒)에 공(供)코자 한다.=================================================================================ⅳ. 제소하는 구실을 하고 정치적 정면에 나설 수 있는 자격을 주었기에 김성수는 교육심의위원, 대한체육회 고문 등으로 사회활동을 계속하였습니다.또한 12월 1일에는 동아일보의 사장으로 취임함으로써 언론의 주도권을 장악하였고 좌익의 타도에 앞장서게 됩니다.12월 30일에는 한국민주당의 수석총무인 송진우가 피살당하자 김성수가 수석총무로 취임합니다.또한 이승만(李承晩)과도 결탁을 하는데 이는 친일이라는 치명적인 결함을 보완하여 미군정을 방패막이로 삼고, 자체의 기반이 취약한 이승만을 통해 권력에 더욱 접근하고자 한 것입니다. 이러한 접근을 통해 김성수는 1946년 4월 이승만이 주도하던 독립촉성국민회의 부회장으로 취임하게 됩니다.1946년 11월 입법의원 의원 선거에 서울에서 출마하여 당선되나 부정선거로 선거무효 판정을 받고 재선거를 실시하였으나 낙선하였습니다. 이는 한국민주당이 미군정의 지원을 받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대중적 기반이 취약하였는지를 보여줍니다.1947년 12월 단정 수립의 불가피성을 강조함으로써 이승만과 더불어 형성하였다.ⅴ. 제5기(1948~1955년)이승만과 더불어 단독 선거를 주도함으로써 대한민국 건국에 기여하였던 한국민주당 세력은 정부 수립 이후에 주도권을 상실하였습니다. 이는 이승만이 권력을 장악하는데 크게 기여하였지만 권력을 유지하는 데는 거추장스러웠기 때문에 한국민주당의 세력을 배제함으로써 새로이 권력을 다지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이에 이승만은 국무총리로 지명되리라 예상되던 김성수를 )무임소장관에 입각할 것을 권유함으로써 한국민주당과의 결별을 선언합니다.이후 한국민주당은 귀속재산의 불하를 통하여 지주계급을 산업자본가화한다는 전략아래 토지개혁정책을 수용하나 조봉암이 주도하던 농지개혁과정에서 완전히 배제됨으로써 자본가로의 변신을 하지 못한 채 토지를 분배당하고 맙니다. 이런 상황에서 1949년 2월 한국민주당은 신익희의 대한국민당, 이청천의 대동청년당과 합동하여 민주국민당으로 개편합니다. 그리고 내각책임제 개헌을 시도하여 정권의 장악을 시도하나 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