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
Bronze개인
팔로워0 팔로우
소개
등록된 소개글이 없습니다.
전문분야 등록된 전문분야가 없습니다.
판매자 정보
학교정보
입력된 정보가 없습니다.
직장정보
입력된 정보가 없습니다.
자격증
  • 입력된 정보가 없습니다.
판매지수
전체자료 9
검색어 입력폼
  • 나치 독일과 유태인 대학살
    유태인 대학살에 대한 연구는 전후 독일에서 어떠한 역사 연구보다 열띤 관심 속에 진행되어 왔다. 이는 600만이나 되는 유태인들이 근대 유럽 문명의 틀에서 조직적으로 학살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놀라운 것일 뿐만 아니라, 도덕적인 책임감이 항상 연구의 한편을 차지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독과 서독에서 연구가 본격적으로 진행된 시기가 서로 달랐는데, 동독에서는 전후 직후인 1950년대부터 유태인 대학살에 대한 연구가 진행된 반면, 서독에서는 그보다 20여년이 늦은 197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연구가 진행되었다.1950년대 동독에서 유태인 대학살에 대한 연구가 처음 시작되었을 때, 나치 독일의 사악성과 히틀러의 반유태주의는 논증이 불필요한 사실로 인정되었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제2차 대전과 유태인 대학살은 나치 독일의 철저한 ‘계획’에 의해 진행된 사건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하였다. G.플래밍, L.다위도위치, A.힐그루버, 그리고 K.브라허와 같은 일군의 학자들은 히틀러 개인의 반유태주의를 통해 모든 것을 설명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접근방식에 의하면, 유태인 박해의 다양한 단계는 단지 전술적인 일탈이나 기회를 기다리는 것이었으며, 결국에 최종적으로 시행하는 ‘최종해결'은 학살 의도의 일관성 있는 수행의 결과인 것이다. 이는 유태인 대학살의 해석에 있어서 반유태주의라고 하는 동기와 개인적 의지의 자율성을 역사 전개에 있어서 주요한 동인으로 수용하는 것이었으며, 엄밀한 학문적인 분석보다는 나치의 죄과를 알리는 도덕적인 단죄에 더욱 큰 비중을 둔 것이다.서독에서 유태인 대학살 문제는 사건이 일어나고 상당한 기간이 지나갈 때까지도 대중들의 큰 관심을 받지 못했다. 연합 군 측에 의해 나치 강제수용소의 참상이 알려지고 또 유태인대학살 시기에 운 좋게 살아난 생존자들의 증언이 그런 사건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주기는 했으나 사람들은 너무나도 끔찍한 그 사건의 전모에 대해 아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냉전의 격화도 한 몫을 했다. 반 볼셰비즘의 전선에 서게 된 서독에서는 과거의 청산한 일로도 생각되었던 것이다. 또 이스라엘의 건국사업이라는 미래지향적인 일을 시작하는 마당에 비참한 기억을 끄집어내는 일이 적절하지도 않다고 생각된 것이다.따라서 유태인 대학살에 대한 연구의 본산이 될 수밖에 없는 서독에서 학문적인 연구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70년대에 들어와서이다. 그것도 외부의 자극에 의해서였다. 60년대에 홀로코스트의 주된 책임자 가운데 한 사람인 아이히만이 이스라엘 정보기관에 의해 체포되어 사형을 당하는 사건이 일어났으며 이스라엘을 포함한 외국학자들이 자극을 가했던 것이다. 1979년에는 홀로코스트를 주제로 하는 미국의 소우프 오페라가 TV프로그램으로 방송되며 대중적 관심을 고조시켰다. 이리하여 뒤늦게 70년대 중반부터 본격적인 연구가 진행되었으나 이것은 나치시기의 모든 중요한 쟁점들과 관련이 되기 때문에 쉽게 결말을 보기가 어려운 문제였다. 하지만 한번 시작된 유태인 대학살에 대한 연구는 대부분의 서독 학자들의 관심을 받았고, 이후 열띤 논의가 시작되었다.구조주의와 기능주의유태인 대학살에 대한 논의가 본격화 되며 해석에는 두 개의 논리가 충돌하게 되었다. 구조주의와 의도주의가 그것이다.구조주의적 해석은 전후의 질서가 균열을 보이기 시작하고, 서방 사회의 ‘정상성’과 합리성이 좌파로부터 의문시되기 시작하던 1960년대 주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M.브로샤트, H.몸젠과 같은 독일 학자들에 의해 주로 진행된 이 접근 방식은 나치 정권의 구조에서 그 원인을 찾고 있다. 유태인에 대한 나치 정책은 비체계적이고 임시변통 적으로 만들어진 것으로서 결코 어떤 장기적인 목표나 계획에 의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즉 비체계적인 정부조직, 관련 기구들 사이의 주도권 경쟁, 나치 정권 핵심 인물들의 히틀러에 대한 충성 경쟁 등이 유태인 정책을 누적적으로 과격하게 만들어 유태인 대학살에까지 나아가게 했으며 학살은 1941년 이전에는 결코 현실적으로 구상된 적이 없다는 것이다. 이들은 유태인 대학살의 책임을 히틀러 개인이나 독일 정치문화의 이념적인 요소에만 예기치 않게 실패함으로써 점령지에서 이송된 많은 유태인들의 문제로 골치를 앓게 된 지구당 책임자, 경찰간부, 친위대 간부, 기타 나치 지도자들이 유태인 학살에 점점 더 지역적 주도권을 행사하게 되었고, 그것은 나중에 상부로부터 재가를 받았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학살은 체제가 궁지에서 벗어나기 위해 시작한 것인데 한번 제도화하자 점점 더 규모가 커지며 결국 광범한 계획이 되고 말았다.의도주의는 히틀러 주의라고 할 만 하다. 히틀러가 처음부터 유태인의 물리적인 절멸을 생각했고, 권력 장악 후에 그것을 실제로 이행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유태인 박해에서 학살로 이어지는 여러 단계는 히틀러의 의도나 목표와 직접적인 관련을 맺게 된다. 말하자면 ‘최종적 해결’은 히틀러의 정치생활에 있어 처음부터의 목표였고 학살은 그의 직접적인 명령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라는 것이다.이런 해석은 제 3제국을 독일 이데올로기가 발전한 결과로 보려는 역사가들의 견해와 잘 들어맞는다. 이런 이념적 분위기에서 히틀러의 과격한 반유태주의가 호소력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또 이런 견해는 히틀러가 제 3제국의 도전할 수 없는 주군으로서 국가와 사회가 총체적으로 히틀러의 뜻에 따라 조율되었다는 ‘전체주의’ 모델에도 들어맞는다.L.다비도비츠, J.톨란트, G.플래밍, K.힐데브란트 등 많은 역사가들이 이런 접근법을 채택하고 있다. 그리하여 그들은 1925년에 출판된 「나의 투쟁」제 2권에서부터 시작하여 30년대를 거쳐 전쟁 시기에 이르기까지 히틀러가 많은 연설이나 회의에서 한 발언의 내용을 그 증거로 제시하고 있다. 즉 히틀러는 처음부터 한결같이 유태인 절멸을 주장했으므로 유태인 대학살은 그의 명령에 의한 것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1980년대의 역사가 논쟁1980년대에 들어와 독일의 경제적, 정치적 힘이 커지고 자신감이 생기게 되자 독일의 우파 학자들을 중심으로 나치 시대를 재평가 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그 동안 말도 꺼내기 어려웠던 나치 시대를 긍정적으로 재평가함으로써 소위 ‘역사의 정상화’를힐데브란트, A.힐그루버, E.놀테 등의 우파 역사가들과 J.하버마스 등 진보적인 입장에 서 있는 학자들 사이에 수년에 걸친 일대 논쟁으로 발전했다. 이 논쟁은 과열화하며 말싸움 수준으로 전락하여 학문적으로는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또 1989년 독일 통일이라는 보다 중요한 문제 때문에 중단되었으나 독일인들의 마음속에 잠재해 있던 ‘민족주의적 경향’을 드러내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골드하겐 논쟁1996년에 다니엘 골드하겐이 「히틀러의 자발적인 처형자들 : 평범한 독일인과 유태인 대학살」이라는 책을 써서 국제적으로 큰 화재를 불러 일으켰다. 이는 학계보다는 일반 사회에서 더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는데 이는 골드하겐이 유태인 학살의 책임을 당시 독일의 일반대중들에게까지 확대시켰기 때문이다. 그때까지의 논쟁은 위에서 보았듯이 학살의 책임이 히틀러에게 있느냐, 당이나 정부, 군부의 고위간부들에게 있느냐 아니면 관료기구 자체에 있느냐 하는 문제였다. 따라서 일반국민들은 면책이 되어 있었다. 사실 그때까지 독일 역사가들은 독일 국민들을 나치 체제의 희생자로 묘사하고 있었으니 그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이제 이들의 책임 문제가 전면에 부상했으니 그 반향이 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골드하겐이 특별히 조명한 것은 지금까지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했던 학살집행자들의 문제이다. 이들이 어떤 사람들이며 어떤 생각으로 학살에 임했고 그 동기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하는 점이다. 그는 의도주의자들의 견해를 크게 확장시켜 반유태주의가 히틀러나 그 주위의 소수 광신자들뿐 아니라 일반 국민들의 의식을 광범위하게 규정했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학살은 소수의 광신적인 인사들의 행위가 아니라 다수의 독일인들이 참여한 ‘전독일적인 행위’였다는 것이다.골드하겐은 1942년에서 43년까지 폴란드 점령지역에서 유태인을 대량으로 학살한 함부르크 출신 101 경찰예비연대를 연구의 대상으로 삼았다. 1960,70년대에 이루어진 예비연대 대원들의 사법심문서를 사료로 하여 골드하겐은 3만 8천위험한 군대 복무를 피하기 위해 비교적 편한 예비연대를 지원한 사람들이었다. 한 마디로 나치와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었다.이러한 사례연구를 통해 골드하겐은 유태인 학살에 참가한 대원들이 ‘평범한 보통 독일인들’이라 주장한다.독일에서 이 책에 대한 논쟁은 “골드하겐 현상”이라 불릴 정도로 학계와 일반 대중 사이에 지대한 관심이 되었으며 독일에서 이 책에 대한 논쟁은 독일의 주간지인 Die Zeit가 1996년 4,5월에 연이어 이 책에 대한 서평을 싣고, 또 골드하겐에게 이례적으로 6페이지에 달하는 지면을 할애하면서 시작되었다. 이 책에 대한 서구 학자들의 서평도 수십 편이 넘는데, 한마디로 독일사에 관심이 있다 하는 학자들이라면 모두 한 마디씩 한 셈이다.‘유태인의 조직적인 학살은 독일의 “국가적인 과업”이었으며, 이는 전 독일인들의 암묵적인 승인과 열성적인 참여를 통해 발생했다’라는 이 책의 주장에 대해 전문 학술지에 실리는 서평은 비판적인 논지가 주류를 이루었다. 학자들은 골드하겐의 주장이 지니고 있는 문제점을 조목조목 지적하였을 뿐 아니라, 기존의 연구 성과 전체를 부정하는 골드하겐의 태도 또한 비판하였다. 이에 대해 골드하겐은 평자들이 그의 책을 고의적으로 잘못 읽었다고 주장하며 그들의 지적을 어느 하나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결국 논쟁은 골드하겐이 자신의 증거 자체의 타당성에 문제를 제기한 평자 한 명을 영국 법정에 명예훼손으로 고소하는 형국으로까지 발전하였다.지금까지 유태인 대 학살에 대한 여러 주장과 논쟁 등을 살펴보았다. 기능주의와 의도주의, 80년대의 역사가 논쟁, 최근의 골드하겐 논쟁까지, 이 모든 논쟁은 유태인 대 학살이란 문제가 역사적으로 얼마나 큰 논쟁거리인지 알 수 있다. 이러한 논쟁들은 일견 타당한 부분도 있고 이미 다른 학자들에게 문제점이 지적되어 타당성이 빛을 바랜 경우도 있다.이 중 개인적으로 제일 관심이 가는 주장은 구조주의와 골드하겐의 주장이다. 구조주의는 나치시대의 정치체제에 홀로코스트의 원인을 두고 있다.구조주의의 핵심은 것이다.
    인문/어학| 2007.05.13| 6페이지| 1,000원| 조회(830)
    미리보기
  • 대체에너지 평가B괜찮아요
    1.에너지의 정의인류 문명의 발달은 에너지의 발전에 의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춥거나 덥고 배고프다는 것 등을 해결하고자 하는 인간의 원초적 욕망에서부터 넓게는 하늘을 날고 바다를 건너 다른 대륙에 가거나 혹은 우주를 항해하고자 했던 인간의 욕망은 지금 우리에게 현실로 다가왔다. 이러한 일들은 모두 에너지에 의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에너지를 간략히 정의하면 일을 할 수 있는 총체를 의미한다. 모든 물질은 에너지 전환 공정의 형태로 사용될 수 있기 때문에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에너지(energy)의 어원은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이라는 그리스의 어원 ‘에르곤(erogon)’에서 파생되어 나온 ‘에네르게이아(energeia)'로부터 유래된 것이다. 에너지라는 말이 물리학적인 용어로 정립하게 된 것은 근래에 와서이다. 우리가 지금 열역학이라 부르는 에너지에 관한 기본 법칙도 19세기 후반에 와서야 확립된 이론이다.에너지란 용어는 확립 초기에는 물리학이나 화학과 같은 자연과학분야에서 사용되었지만 현재에는 경제학이나 경영학을 포함한 인문, 사회 전 분야에 걸쳐 사용되고 있으며 의미 역시 자연과학적 의미 뿐 아니라 복합적인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에너지 문제는 인류에게 흥미 있고 중요하며 그 폭과 깊이도 또한 깊다 할 것이다. 에너지 문제를 분류해 보면 첫째, 자원의 문제이고 둘째, 경제적 문제, 셋째, 정치적 문제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자원의 문제란 지구상의 유한한 자원을 계속 써버린다면 고갈되어 없어질 것이므로 이러한 유한한 자원을 어떻게 유효하게 낭비 없이 활용할 것인가가 문제가 된다. 따라서 재생성 및 순환성을 가진 자연에너지의 이용문제는 유한자원의 절약이라는 측면에서 파생된다.경제적 문제란 세계 각국에서 원유의 가격이 상승할 것으로 보고 에너지 절감을 위해 투자하는 한편 에너지원의 다양한 전환을 추구하여 왔다. 즉, 원자력, 조력 혹은 풍력에너지와 같은 석유에너지를 대체할 수 있는 에너지를 개발하여 석유의 사용량을 줄이게 되었다. 또한 과거량이 풍부한 하천의 중?하류에 적합한 형식이다. 댐식 소수력발전소는 하천홍수의 범람정도와 댐상류의 농경지 및 가옥 등의 수몰관계를 충분히 고려하여 댐높이를 결정하여야 한다. 댐식 소수력발전소의 일반적인 경로는 다음과 같다.▷ 댐→ 취수구→ 수압관로→ 발전소→ 방수로ⓒ 터널식 소수력발전소터널식 소수력발전소는 댐식과 수로식을 혼합한 방식으로 하천의 형태가 오메가 형이 s지점에 적합하며, 자연낙차를 크게 얻을 수 있고 댐은 일반적으로 월류식으로 한다. 터널식 소수력 발전소는 다음과 같은 경로를 갖는다.▷댐→취수구→ 터널→ 수조→ 수압관로→ 발전소→ 방수로③ 국내 개발 현황우리나라에는 21개소의 소수력 발전소가 운영되고 있으며 건설 중인 발전소를 포함할 경우 총 22개소에 32,320kw의 용량으로 이는 의암댐의 발전용량과 비슷한 용량이다.소수력발전 기술개발에 관한 정부차원의 사업은 제 1차 석유파동 이후. 1974년 ‘소수력개발입지 및 자원조사’가 수행되었고 1975년도에는 ‘시범 소게곡 발전소의 연구조사 설계’가 수행된 바 있으며 이를 기본으로 하여 한국전력공사에서 강원도 안흥에 설비용량 450kw의 소수력 발전소를 건설하여 현재 가동 중에 있으며 당시 소수력 발전 입지조사를 통하여 우리나라의 개발 가능한 소수력자원량을 평가하였다.제 1차 석유파동 이후 소수력 발전에 관한 관심이 약해졌으나 제 2차 석유파동 이후 대체에너지 개발의 중요성이 인식되어 정부에서는 민간자본에 의한 소수력 발전소의 건설을 장려하고, 이와 병행하여 소수력 자원 개발에 수반되는 기술적인 사항에 관한 연구를 지원하기 시작하였다.소수력자원개발 경제성을 포함하여 전국을 대상으로 하여 소수력 자원조사를 수행하였으며, 당시의 사회적인 조건에서 소수력부존 자원을 재평가하였다. 이를 통하여 실제 개발위치 및 개발 우선순위를 결정하기 위한 타당성조사 연구가 수행되어 소수력자원 개발자가 쉽게 개발입지를 확인 할 수 있게 하였다.④ 국외 개발 현황소수력 발전소는 전 세계적으로 아주 광범위하게 운영되고 있다. 지원 없이는 보급이 부진할 수밖에 없다. 정부의 지원과 함께 기업의 적극적인 개발 참여 의지는 전체 대체에너지 공급량의 2.6%를 담당함으로써 500만 달러에 해당하는 수입 대체효과의 발생을 유도할 수 있다. 이는 당해 연도 에너지 수입액 186억 4,500만 달러의 2.7%에 해당된다.1998년 IMF 이후 가정용 태양열온수기 매출이 급속히 감소하였으며, 1997년 30여개에 이르렀던 태양열 업체수가 이후 6~7개 기업으로 급격히 감소하였다가 현재 10여개 정도의 중소기업이 참여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중대형 설비형 온수급탕시설은 1996년 이후 오히려 꾸준히 증가하는 추세이다.④국내전망국내 태양열 분야는 대체적으로 산업체의 경쟁력 및 기술력이 낮아 보급기반이 약하며, 태양열 분야 전문가가 극히 제한되어 있다. 따라서 국내 태양열업체의 영세성 및 엔지니어링 기술부족에 다른 적용분야에 대한 시스템 설계기술이 취약하다. 이는 기술축적 미비로 이어져 새로운 분야에 대한 적정 설계능력(최적화 기법)의 부족을 유발하고 있다. 이의 보완책으로 설계 및 시공, 보급, 사후관리 등 태양열 시스템이 정상적으로 보급 및 관리될 수 있도록 하는 제도 및 기술적 지원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실정이다.현재의 태양열 시스템 보급의 부진한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태양열 보급 확대를 위한 기술적 지원 및 관리부서가 필요하고 제품의 인증제도 및 사후관리제도가 필요하다.현재 정부에서 정책적으로 지원하는 태양열 관련 시스템 보급이 각 부처 또는 자치단체별로 전문가의 검토도 거치지 않은 상태에서 지원되고 있으며, 그 관리상태도 문제점이 드러나고 있다. 심지어는 태양열을 적용하고자 하는 분야가 태양열을 적용하기에 적합한지 조차도 검토되지 않고 보급되고 있는 사례가 있다. 따라서 이 분야에 국내 전문가가 크게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타 분야와는 달리 철저한 보급 정책 및 관리제도가 필요하다고 판단된다.⑤ 향후전망태양열은 적용대상에 따라서 경제성에 큰 차이가 있다. 현 단계에서도 일부 분야에 대너지원으로서 중시되며, 인류 궁극의 연료로 지목되고 있다. 1973년 말의 석유 위기 이래 각국에서 활발히 전개되고 있는 탈(脫)석유기술 개발에는 수소에너지 개발도 포함되어 있다. 현재 세계의 수소 소비량은 수백 억 m3 에 달하지만 대부분 석유탈황(石油脫黃), 암모니아 제조 등 화학공업부문의 원료적인 것으로 쓰이며, 그 제조기술이 물을 원료로 해서 값싸게 대량생산할 단계에 아직 이르지 못하고 있으므로 열원(熱源)으로서의 이용도는 아주 낮은 편이다. 따라서 각국은 그 제조기술 개발에 노력하고 있는데, 현재 연구되고 있는 주된 제법으로서는 우선 원자력발전의 전력으로 물을 전기분해하는 방법이 있지만 효율이 나쁘고 핵연료를 쓴다는 난점이 있다.② 연구 현황여러 종의 물질을 결합시키고 원자로의 열을 이용해서 여러 단계의 화학반응을 일으켜 최종적으로 물을 수소와 산소로 분리시키는 열화학 사이클 법이 연구되고 있지만 설비 투자가 많은 것이 흠이다. 한편 어떤 물질에 물을 작용시키고 태양빛을 쬐어 광화학반응(光化學反應)을 일으키거나, 물속의 반도체에 태양빛을 쬐어 물을 직접 분해하는 등 태양에너지의 이용방법도 연구되고 있다. 이 밖에 고온의 수증기를 용융로 안에서 전기분해하는 방법, 방사선을 써서 물의 분자를 분단하는 방법, 물을 원자로나 태양로에서 3,000℃의 고온으로 분해하는 방법 등도 생각할 수 있다.③ 수소 에너지 개발의 종류수소 에너지의 개발은 에너지 체계 자체의 전환으로서, 다른 에너지처럼 단지 뭔가 새로운 방식으로써 발전을 한다든지 하는 그런 것과는 다르다. 수소에너지의 개발에는 세 가지의 테마가 있다. 우선 첫째는, 수소의 제조, 둘째는 수소의 저장과 수송, 셋째는 에너지로서의 수소의 이용이다. 다시 말해서, 모든 체계가 갖추어짐으로써 비로소 수소 에너지 시대가 찾아오는 것이며, 그 모든 체계를 끈질기게 개발해 나가야만 한다. 그 대신, 만약에 수소 에너지 시대가 된다면, 산업 경제가 근본부터 뒤바뀌어버릴 것이다. 현재, 수소 에너지의 연구에서 가장 곤란한 회전시킨다. 터빈에는 발전기가 연결되어 있어 에너지를 생산한다.열수(熱水)로써 분출하는 경우는 증기만을 얻고 물은 흘려보내거나, 열교환기에 보내어 물을 증발시켜 보내는 방식을 취하기도 한다.③ 지열발전의 세계 연구 현황지열 자원은 뜨거운 용융 마그마가 지표 가까이 나온 서미와 하와이 등지에서 쉽게 볼 수 있다. 미국에 있는 고온의 물 저장소는 전 세계 전기 수요에 약 30-45%에 해당하는90,000-150,000MW의 전력을 공급 할 수 있다. 현재는 지열 전기 용량의 약 3,000MW만이 작동 중이고 대부분이 캘리포니아의 지저스 필드에서 나온다. 캘리포니아는 지열 자원으로부터 약 6%의 전기를 얻는다.남부 캘리포니아의 San Bernardino 같은 지역에서는, 겨울 동안 건물의 난방용으로 땅 밑에서 생성된 뜨거운 물을 이용한다. 뜨거운 물은 수 십 마일의 단열 파이프를 통해서 십여 군데의 공공건물에 보내진다. 시청, 연금 생활자 센터, 그리고 그 밖의 건물들이 이런 방식으로 난방이 된다.지열 에너지 자원 개발 기술에는 지하에 존재하는 고온의 암반까지 굴착하고 물을 주입하여 수증기를 발생시켜 전기를 얻는 방식인 고온 암체 발전 기술의 가능성이 가장 높은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미국은 70년대 초부터 고온 암체 발전 기술의 개발에 착수하여 상당한 기술을 축적한 것으로 알려져 있고, 전형적인 화산 국가인 일본도 NEDO를 중심으로 고온 암체 발전 기술을 개발하고 있다.고온 암체 발전과 비슷한 개념인 화산 발전 기술은 마그마의 열을 이용하는 것으로서 미국은 70년대 중반부터 Sandia Lab.이 중심이 되어 기초 연구를 수행하고 있으며, 일본도 'Sun-Shine 계획'의 일부로 개발 연구를 추진하고 있다. 이 외에도 지열 에너지 이용 기술과 해양 온도차 발전 기술을 복합적으로 이용하는 GEOTEC(Geothermal&Ocean Thermal Energy Convesion) 기술도 개발이 시도되고 있다.지열 발전 기술로는 선진 각국이 저온 비등 매체를 이용하이다.
    자연과학| 2007.05.13| 32페이지| 3,000원| 조회(445)
    미리보기
  • 삼국사기에 나타난 허왕후 도래신화에 대해
    駕洛國記에 나타난 許王后 渡來神話에 대해△허왕후릉의 모습目次Ⅰ. 서론Ⅱ. 본론허왕후 혼인설화의 본문 내용허왕후가 三國遺事에서 지니는 역할허왕후 혼인설화로 추론할 수 있는 것들허왕후와 수로왕의 혼인으로 인한 효과허왕후의 출자(出自) - 아유타국은 어디인가?Ⅲ. 결론Ⅰ. 서론옛 설화의 신이한 내용은 우리에게 많은 영감을 준다. 그 설화의 어디까지가 역사적 사실인가를 논하는 것은 무모한 일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사료적 가치 자체를 따져 보는 것은 긴요하다.가야의 신화에는 세 가지가 전한다. 김해 가락국의 시조 수로왕(首露王)의 개국신화와 지금 여기서 다루려 하는 허왕후(許王后)도래신화, 그리고 고령 가라국의 시조 이진아시왕(伊珍阿?王)의 개국신화가 그것이다. 가야의 개국신화는 가락국과 가라국에만 전하고 있는데, 이것은 두 나라가 가야의 중심이었음을 말해주는 동시에 가야제국이 하나로 통일되지 못한 채 각기 독자적인 발전과정을 겪었던 사정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이 중 허왕후 도래신화는 『三國遺事』권2 기이 제2 駕洛國記조의 수로왕 개국신화에 이어 등장하는데, 인도 ‘아유타국(阿踰?國)’ 으로부터의 도래와 수로왕과의 혼인 내용이 중심을 이룬다.駕洛國記의 수로왕 신화와 허왕후 도래신화는 수로왕이 활동하였던 당대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상당한 부분이 가락국의 늦은 시기, 또는 멸망 후에 만들어진 설화나 지방 전승들이 불교나 인도에 의해 의탁되어 쓰인 것일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현전하는 여러 설화에 나타나는 인도와의 인연에 대한 모티브와 그 의미를 분석하기 위해서는 그 원형이라 할 수 있는 허왕후 설화의 형성과정을 살펴보는 게 무엇보다 필요하다. 허왕후 설화는 駕洛國記에 처음 등장한 이래 최근까지 다른 민속 신앙의 여러 요소들과 끊임없이 섞이면서 확대되었다. 그런데 그 과정을 보면 그것은 항상 특정 집단에 의해 주도적으로 이루어 졌음을 알 수 있다.이 글에서는 허왕후 혼인설화의 본문 내용을 살펴봄과 동시에 허왕후가 삼국사기에서 지니는 역할, 그리고 허왕후와 수로왕의루터에 배를 매고, 육지로 올라와서 높은 언덕에서 쉬었다. 그리고 자기가 입었던 비단바지를 벗어서, 그것을 폐백 삼아 산신에게 바치는 것이었다.이 외에 시종(侍從)해온 잉신(臣)(680) 두 사람은 이름을 신보(申輔)·조광(趙匡)이라 했고, 그들의 아내 두 사람은 모정(慕貞)·모량(慕良)이며, 노비(681) 까지 합해서 20여 명이었다. 가지고 온 금수(錦繡)·능라(綾羅)와 옷·필단(疋緞)이며 금은·주옥과 경구(瓊玖)의 장신구 등은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었다.왕후가 점점 행궁(行宮)(682) 으로 다가가니 왕은 나와서 그녀를 맞이하여 함께 장막의 궁전에 들어갔다. 잉신 이하의 여러 사람들은 섬돌 아래로 나아가서 임금을 뵙고 즉시 물러갔다.왕은 유사에게 명령하여 잉신의 부부를 인도하게 하며 말했다.“잉신은 사람마다 각방에 머무르게 하고 그 이하의 노비들은 한 방에 대여섯 명씩 있게 하라.”왕은 그들에게 난초로 만든 음료와 혜초(蕙草)로 만든 술을 주었다. 무늬와 채색이 있는 자리에 재웠으며, 의복·필단·보화도 주었다. 그리고 군인들을 많이 모아서 그들을 지키게 했다.이에 왕은 왕후와 함께 침전에 있는데, 왕후가 조용히 왕에게 말했다.“저는 아유타국(阿踰國)(683) 의 공주입니다. 성은 허(許)라 하고 이름은 황옥(黃玉)이며 나이는 열여섯 살입니다. 본국에 있을 때 올 5월 달에 부왕(父王)과 모후(母后)께서 제게 말씀하시기를 ‘우리 내외가 어젯밤 꿈에 함께 하늘의 상제(上帝)를 뵈오니, 상제께서 가락국왕 수로는 하늘이 내려 보내 왕위(684) 에 오르게 했으니 신성한 분이란 이 사람이며, 또 새로 나라를 다스림에 있어 아직 배필을 정하지 못했으니 그대들은 공주를 보내어 배필을 삼게 하라’ 하시고 말을 마치자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꿈에서 깨어난 뒤에도 상제의 말씀이 귀에 쟁쟁하니 ‘너는 이 자리에서 곧 부모와 작별하고 그곳 가락국을 향해 떠나라’ 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바다에 떠서 멀리 증조(蒸棗)(685) 를 찾고, 하늘로 가서 멀리 반도(蟠桃)(686) , 그 이하의 관료는 주나라의 제도와 한나라의 법도로써 나누어 정했다. 이것은 옛것을 고치고 새것을 취하여(693) 관직을 설치한 방법이었다.이제야 나라와 집안을 잘 다스리고 인민을 자식처럼 사랑하니 그 교화는 엄급(嚴急)하지 않아도 위엄이 서고, 그 정치는 엄혹(嚴酷)하지 않아도 다스려졌다.더구나 왕이 왕후와 함께하는 삶을 비유하면 마치 하늘에 대하여 땅이 있고, 해에 대하여 달이 있고, 양에 대하여 음이 있음과 같음에랴. 그 내조의 공은 도산(塗山)(694) 씨가 하나라 우왕(禹王)을 돕고, 당원(唐媛)(695) 이 순임금을 도와 요(姚)씨를 일으킨 것과 같았다. 그해 왕후는 곰의 몽조(夢兆)(696) 를 얻어 태자 거등공(居登公)을 낳았다. 후한(後漢)의 영제(靈帝) 중평(中平) 6년 기사(189) 3월 1일에 왕후가 세상을 떠나니 나이가 백쉰일곱 살이었다.나랏사람들은 마치 땅이 무너진 것처럼 슬퍼하고, 구지봉 동북쪽 언덕에 장사지냈다. 그리고 마침내 백성을 사랑하던 왕후의 은혜를 잊지 않으려고, 왕후가 처음 배에서 내려 닻을 내린 나루터 마을을 주포촌(主浦村)(697) 이라고 하였다. 또한 비단 바지를 벗었던 산등성이를 능현(綾峴)이라 하고, 붉은 깃발이 들어왔던 해변을 기출변(旗出邊)이라고 했다.잉신 천부경(泉府卿) 신보와 종정감(宗正監) 조광 등은 가락국에 온 지 30년 만에 각자 두 딸을 낳았는데 부부가 1, 2년이 지나 모두 세상을 떠났다. 그 밖에 노비들은 온 지 7, 8년에 아직 자녀를 낳지 못하였으므로 다만 고향을 그리워하는 슬픔을 품고 모두 고향(698) 을 생각하다가 죽어갔다. 그리고 그들이 살던 빈관(賓)은 텅 비어버렸다.허왕후가 三國遺事에서 지니는 역할『三國遺事』는 고려후기 충렬왕 7년(1281)경에 완성된 일연(一然)의 사찬(私撰)이다. 그리고 이는 대체로 김부식(金富軾)의 『三國史記』보다는 140년 뒤에, 각훈(覺訓)의 『海東高僧傳』보다는 70년 뒤에 편찬된 불교신앙 관계를 포함하는 역사에 관한 문헌이다.일연은 삼국유사를 편찬할 건너올 때 파사석탑을 가져왔다고 한다, 이 탑은 원래 호계사에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허왕후릉에 그 잔해가 남아있다. 파사석탑은 5층으로 4면으로 모가 나 있는데, 표면에 붉은 반점이 있고 석질이 매우 부드럽다. 이 돌은 이 지방에서는 없고 중국의 남해지방 또는 인도에서 난다고 한다. 지금도 용원?녹산?명지 등에는 허왕후의 도래 및 파사석탑과 관련된 설화가 많이 전하는데, 특히 진해 용원에는 1908년에 세워진 유주비각(維舟碑閣)이 있고 왕후가 ‘돌배’를 타고 와서 정박한 곳이라고 하여 마치 거북 모양을 한 바위 위에 ‘망산도(望山島)’라는 글귀가 새겨진 돌이 있다.이들 이야기는 가락국의 불교가 허왕후 도래 때 가져온 파사석탑과 함께 인도에서 전해졌음을 말해주는데, 전형적인 탑상연기설화(塔像緣起說話)라고 하겠다.일연은 이처럼 駕洛國記에서 가락국의 건국설화의 불교적 요소를 함께 다루는 한편, 인도에서 왔다는 허왕후 설화를 기록함으로써 우리나라가 불국토임을 증명하려 하였다.◁허왕후릉 앞의 파사석탑허왕후 혼인설화로 추론할 수 있는 것들가야의 시조 수로왕은 신라와 거의 비슷하게 9干의 추대를 받았으면서도, 9干중 누구 한사람을 딸과 결혼하지 않고 아유타국에서 왔다는 허왕옥과 결혼한다. 이는 허왕옥의 출신이 토착계인 6촌장이나 9간과 연결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말해주며 동시에 당시 토락 세력들이 권력의 집중을 이루지 못하고 분산되어 있고, 그들 세력 상호간에 우열의 차이가 분명치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새로이 대두하는 중앙 권력자가 세력이 미약할 경우에는 주변 세력들의 협조를 이끌어 내야 하는데 여러 비등한 세력들 중 하나의 세력에서 왕비를 지정하는 것은 중앙집권적 왕권 창출에 부담을 주기 때문이다.또한 허왕후 혼인 설화와 관련하여 허왕후의 정체나 그 이동 경로 혹은 합혼 과정 등이 駕洛國記에 너무나 구체적으로 나타나 있어 많은 부분이 여러 차례에 걸쳐 후대에 첨가되었을 것으로 추론된다. 하지만 이 혼인설화가 만들어진 것은 신라 중대 시기로 보인다.) 그것후가 되었고, 이 때 가야에 불교가 전래되었다고 말하고 있는 점이 다.물론 혼인설화라는 형식 이전에 허왕후의 도래는 그 자체로서도 신성성을 가지고 있다. 즉 수로왕이 천명을 빌어 허왕후의 도래를 예견한 점, 허왕후가 天神인 上帝의 명령으로 가락국에 오게 되었다는 점, 그리고 ‘붉은 돛’과 ‘붉은 깃발’을 휘날리며 항해하는 모습 등은 신성자(=천제자)로서의 도래의 당위성을 말하는 것임에 다름 아니다. 사실 수로왕의 개국신화도 허왕후와의 혼인을 통해 비로소 완결적인 의미를 가지게 된다.수로왕과 허왕후의 혼인은 신성집단 간의 결합을 의미하는데, 같은 시기에 역시 신성성을 가진 탈해(脫解) 집단이 가락국에 왔다가 수로왕에게 패하여 계림(鷄林)으로 쫓겨나는 상황과는 대비된다고 하겠다. ) 그러나 허왕후 집단은 비록 신성족이고 결혼담을 통해 가락국 개국신화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기는 하지만, 정치세력의 면에서 볼 때 수로집단 보다는 열세였다고 할 수 있다. 왕비족으로서의 위상에 만족한다든가, 독자적인 난생설화를 가지지 못한다든가, 도래과정이 개국설화의 모습을 취하지 못하고 이 지역의 전통적인 유희(遊戱)로서만 전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허왕후의 출자(出自) - 아유타국은 어디인가?허왕후의 설화와 관련하여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이 허왕후의 出自이다. 駕洛國記에서는 인도 ‘아유타국’에서 온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를 근거로 그녀의 출자를 인도 갠지스 강 상류에 있던 불교왕조 아유타국(=아유디아왕국)설, 아요디아 왕조가 식민국으로 건설한 태국 메남강의 아유티야설, 아요디아를 거쳐 중국 사천성 안악현에서 온 허씨족 소녀설 등이 제기된 바 있다. 이와는 전혀 다른 견해도 있는데, 일본 열도에서 돌아온 가락국 왕녀설과 낙랑에서 온 상인설 등이 그것이다. 가락국 왕녀설과 낙랑 상인설을 제외하면 모두 인도 불교의 저래와 연결짓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가야(伽倻, kaya)’는 인도의 산 이름 혹은 드라비다 어로는 ‘물고기’라는 뜻이고, 불교 경전에도 자주 나오는 ‘가라(伽羅,
    인문/어학| 2007.03.07| 12페이지| 1,500원| 조회(586)
    미리보기
  • 역사왜곡과 우리의 역사교육을 읽고
    「역사왜곡과 우리의 역사교육」을 읽고지금은 조금 잠잠해 졌지만 올해 초 까지만 해도 우리나라 최대의 이슈는 바로 일본의 역사 교과서 왜곡 문제였다. 지난 1996년 12월 생겨난 ‘새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 이라는 단체가 검정 출원한 일본중학교 역사 교과서(일명 후소샤 교과서)는 황국사관의 관점에서 일본의 역사를 재정리하고, 과거 일본이 행했던 제국주의적 침략을 합리화 하거나 미화하고 있다. 한국 정부는 일본 정부에 대해 ‘새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의 교과서를 검정 심사에서 통과시키지 말 것을 요구 했지만 ‘새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이 만든 역사 교과서는 결국 검정을 통과했다. 애초 일본의 검정 심사는 통과 여부를 심사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내용의 적절성 여부를 검토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일본과 한국 모두 큰 진통을 겪었다. 일본에서는 ‘새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의 교과서를 적극 지지하는 극우세력과 그 반대 세력이 대립했고, 우리나라에서는 일본의 역사 왜곡 사실에 분노하며 대규모의 항의 시위를 벌였다.바로 이 과정에서 새롭게 수면 위로 떠오른 것이 바로 양국의 교과서 문제와 역사 교육 문제이다. 일본의 교과서만 왜곡되었다고 주장할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의 교과서도 객관적 시점에서 다시 보자는 반성의 목소리가 이어졌고, 미술과 음악 등 예체능 과목보다 더한 홀대를 받는 역사 수업에 대한 개탄도 이루어 졌다.이 시점에서 탄생한 책이 바로 내가 읽은「역사왜곡과 우리의 역사 교육」이란 책이다.이 책에서는 우리나라 역사 교육의 현실부터 역사 교육의 새로운 모색까지 우리나라 역사 교육에 대한 다양한 의견을 제시하고 있다. 이 중에는 아주 공감이 되는 부분이 있고 그렇지 않은 부분도 있었다.우리나라의 대중 역사 교육저자는 우선 우리나라의 대중 역사교육에 대해 언급 하고 있다. 저자가 이야기 하는 대중 역사 교육이란 역사 소설과 역사 드라마, 그리고 대중 역사서와 역사 다큐멘터리 이다. 저자는 지나친 허구로 이루어진 역사 소설과 드라마를 문제로과 드라마가 학생들의 역사 인식에 혼란을 주고 비판적 역사관을 무디게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지적에는 문제가 따른다. 대중 역사 교육의 문제점을 크게 부각시킨데 비해 그 순기능은 비교적 아주 작게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나는 대중 역사 교육에서 드라마나 소설의 역할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리고 이들이 갖고 있는 순기능이 역기능 보다 더 많다고 본다. 물론 요즘 텔레비전에서 방영하는 사극이 허구가 많이 섞인 퓨전사극이 주류를 이루고 있어 이를 무작정 받아들이는 어린 학생들의 역사관에 혼란을 주는 경우도 충분히 있다고 보아진다. 하지만 그 사극으로 인해서 역사에 더욱 관심을 가지는 학생의 수가 월등히 많을 것이다. 사극을 보면서 저것이 100% 진실에 입각해서 만들어 졌을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학생들도 마찬가지이다. 나도 어릴 때 사극을 많이 좋아했고 ‘용의 눈물’ 이라든지 ‘여인천하’같은 정통 사극과 퓨전 사극 등을 많이 보았지만 그것이 교과서처럼 완전한 내용이 아니라는 것은 당연히 알고 있었다. 극의 전개를 이끌어 나가는 큰 사건이나 인물 등은 실제 역사에서 따 온 것이겠지만 세부적인 내용은 허구라는 것을 충분히 알 고 있었다는 것이다. 가짜라는 것을 알면서도 본 사극은 재미도 있었지만 실제로 학교 수업시간에 도움이 아주 많이 되었다. 가령 왕건이 혼인 정책으로 호족들을 통합했다는 내용을 배울 때에는 ‘태조 왕건’이란 사극에서 왕건(최수종)이 여러 여자들과 결혼 하는 장면을 자연스레 떠올리면서 이해가 쉽게 되었고,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 장면이나 왕자의 난 같은 경우도 드라마의 내용을 떠올리면 머릿속에서 상상이 쉽게 되면서 더 이해가 잘 되고 암기도 더 잘 되었다. 이것은 소설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소설 「토지」를 읽으면서 구한말 우리 민족의 처한 상황이나 일제 지배 하에서 만주에서 생활해야 했던 우리민족의 생활상을 자세히 알 수 있었다.사극의 내용을 역사 수업에서 활용하면 효과는 더욱 커진다. 나는 고등학교 때 당시 관심을 받는 사극 한편비교하는 수업을 받은 적이 있는데 그 사극의 배경이 되는 역사에 대해 더욱 쉽게 이해가 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역사 교육이란 교실에서 정해진 교과서에 정해진 지도 등을 보면서 건조하게 진행되는 것이 보통이어서 멀티미디어 세대인 요즘 아이들에게는 아주 지루한 과목으로 이해될 수 있는데, 이렇게 사극 같은 영상 자료를 활용하면 학생들에게 더 효과적인 역사 교육을 진행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그리고 요즘의 사극을 보면 그 역사적 해석이 분분한 인물을 주제로 그 인물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는 시각이 아닌 다른 시각으로 그 인물을 재해석 하는 사극도 늘고 있다. 대표적인 예로 충무공 이순신을 다룬 사극이나 최근에 방영되고 있는 신돈을 다룬 사극이 있다.우리는 학교에서 역사를 배울 때 충무공은 나라를 구한 영웅이고 용맹한 장군이었다고만 배운다. 그가 실제 성격은 나약하고 우유부단 했으며 몸까지 약했던 인물이라는 것은 전혀 배우지 않는다. 그런데 ‘불멸의 이순신’이란 사극에서는 우리가 알고 있는 이순신에 대해서만 다룬 것이 아니라 우리가 잘 몰랐던 유약한 이순신에 대해서 다루었다. 우리나라 국사 교과서는 국가에서 출판하는 교과서 한 권 뿐이라서 편향된 시각을 가질 수 있는 우려가 많다고 생각한다. 역사적으로 논란이 되는 부분에 대해 한 가지 시각만을 학교에서 배운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렇듯 대중 역사 교육에서 여러 다양한 시각에 대해 다룬다면 역사를 배우는 학생들은 하나의 사건에 대해 여러 시각으로 볼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다.우리나라 역사 교육 제도의 문제점저자는 현행 역사 교육에서 역사과목의 비중이 크게 줄어든 것에 아주 큰 실망감을 드러낸다. 이것은 나의 견해도 마찬가지 이다.2001년에 접어들면서 일본의 역사 교과서 문제가 사회의 관심사가 되면서 각종 매스컴에서 역사교육 문제에 대해 많은 관심을 보였다. 사실 일본의 역사 왜곡은 한두 번 거론된 문제가 아니다. 일본 각료들이 바뀔 때마다 으레 누군가가 지난날 일본의 침략 행위를 미화하는 발언을 해서 파문을 일2년에는 문부성이 검정심사를 통해 역사교과서를 왜곡해 아시아 각국의 격렬한 반발을 샀다. 그런데 2001년에 나타난 우리사회의 대응 태도는 1982년에 비해 달라졌다. 우선 1982년에는 일본의 역사 교과서와 교육에 대한 비판 일변도였다면, 2001년에는 일본뿐 아니라 우리 역사교육의 문제점도 되짚어 보고 있다는 점이다. 중?고등학교에서 국사수업의 시수가 줄어들었다는 것과 고등학교에서 한국의 근?현대사를 사실상 선택과목에서만 배우게 된 것에 비판의 초점이 맞춰졌다. 교육과정이라는 제도적 틀이 역사교육의 위기를 가져온 중요한 원인임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지금 우리나라에서 실행되고 있는 교육과정은 제 7차 교육과정이다. 이 7차 교육과정에서 실제 역사 수업 시수는 매우 줄어들었다. 특히 국사 과목이 선택과목으로 분류되면서 국사 과목을 고등학교에서 제대로 배우기가 매우 힘들어 졌다. 교육부 에서는 국사Ⅰ이나 국사Ⅱ를 선택해 공부하게 되면 국사에 대한 심화 학습이 강화되어 결과적으로는 국사 수업이 더욱 강화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이것은 국사Ⅰ이나 국사Ⅱ를 선택한 학생에게만 해당되는 말이다. 바꿔 말하면 국사Ⅰ이나 국사Ⅱ를 선택하지 않는 학생에 대한 국사교육은 현제보다 약화된다는 의미로 해석되는 것이다. 게다가 7차 교육과정에서 국사 과목은 이전 6차 교육과정에 비해 다른 어떤 과목보다 수업시수가 큰 폭으로 줄었다. 이는 아주 큰 문제이다. 하지만 이것에 버금가는 문제가 또 하나 있다. 바로 근현대사 교육에 관한 것이다.학교에서 국사 수업을 들을 때 고대사에 비해 현대사는 아주 작게 다루어진다. 다뤄지는 현대사도 문호개방 이전의 역사나 일제강점기 역사에 대해 집중적으로 배울 뿐 해방 이후의 역사 등에 대해서는 거의 다뤄지지 않고 있다. 특히 여러 가지로 문제가 될 수 있는 한일 협정 문제나 최근 정권 등에 대한 문제는 아주 미약하게 다뤄지거나 거의 생략 되고 있다. 설혹 교과서에 그러한 내용이 실려 있다 하더라도 그 내용을 배울 때 쯤 되면 학기가 거의업이 제대로 이루어지지도 않는다. 요즘 학생들이 고대사보다 현대사를 훨씬 어려워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이번 동양사 세미나 시간에 일본의 전범재판에 대해 발표를 맡게 되어 일본의 2차 세계대전 이후의 전범재판에 대해 자세히 조사해 보게 되었다. 이번 발표를 준비하면서 나는 도쿄 재판에 대한 대략적인 내용을 처음 알게 되었다. 현행 교과서에는 도쿄재판이나 샌프란시스코 조약에 대해 다루어지고 있는지는 몰라도 예전에 내가 배울 때에는 이러한 내용은 수업시간에 전혀 다룬 적이 없었다. 물론 교과서에서는 짤막하게 다루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수업시간에서는 다룬 적이 없다. 그러니 도쿄 재판이나 샌프란시스코 조약에 대한 개념도 생소했고, 그 내용도 어려웠다. 하지만 자세히 공부해 보니 우리나라 근현대사에 아주 중요한 개념이었다. 도쿄재판이나 샌프란시스코 조약이 한일 협정으로 이어지고 이것은 아직까지 큰 문제가 되고 있는 전후 보상 문제나 독도 문제, 군위안부 문제로 이어진다. 현재우리나라와 일본과의 사이에서 쟁점이 되고 있는 문제들의 출발점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이런 사건들은 우리 교과서에서는 제대로 다루고 있지 않다. 우리나라 역사 교과서에서 근?현대사가 얼마나 소홀이 다뤄지고 있는지에 대한 것은 이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나는 이러한 근?현대사 문제가 우리나라 역사 교과서의 종류가 국가에서 출판하는 1종으로 제한되어 있는 것에 일부 원인이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 역사 교과서가 현재 집권하는 집권층의 주도로 만들어 지다 보니 그들의 입장에서 교과서가 서술되어 근?현대사를 객관적으로 서술하는 것이 아니라 다소 편향적인 시각으로 서술되고 있는 것이다.그러므로 우리나라도 다른 수학이나 영어 같은 다른 과목들처럼 여러 기관에서 교과서를 만들게 하고 각 학교에서 그것을 채택하는 방법을 사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일본의 후소샤 교과서처럼 극단적이고 우익의 성격을 짙게 띤 교과서가 나올 수도 있다고 생각되지만 이러한 문제점은 의식 있는 교사들에 의해 해소 될
    독후감/창작| 2007.03.07| 5페이지| 1,000원| 조회(468)
    미리보기
  • [경제]경제개발5개년계획 진행과정
    경제개발5개년계획의 진행 과정1. 제 3공화국이전의 경제개발 계획⑴ 7개년계획(1960~66)제 3공화국의 경제개발 계획 이전에도 제1공화국은 경제개발 계획을 발표 했었다. 우선 1950년대 미국 원조 당국이 원조정책의 일환으로 원조의 배분과 방식과 관련해 당시 한국 경제의 재건과 부흥 방침을 한국정부에 제시했다. 대표적인 두 가지 경제계획이 ‘네이산 보고서’ 로 알려진 ‘한국 경제 재건계획’과 ‘타스카 3개년 대한 원조 계획’이다. 이외에 1954년 7월에 입안된 ‘경제부흥5개년계획’(1954~1958)은 이승만 대통령의 방미에 앞서 대미교섭용으로 급조된 것이었다. 이상의 것들은 경제계획이라기보다는 미국이 얼마의 경제원조를 제공하면 전선 수준으로 부흥하겠는가에 중점을 둔 부흥계획 이었다.그 후 3대 부흥부 장관에 취임한 송인상(1957년 6월에서 1959년 3월까지 역임)은 대미원조교섭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경제개발계획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송인상 장관은 점차로 감소추세에 있는 미국 원조에 직면해 연도별 원조교섭에 신경을 쓰다가 그 해결책을 경제계획에서 구했다. 매년 원조액수의 흥정에 한미 양국이 피차 신경을 쓸 것이 아니라 장기경제계획이란 기본 프레임을 작성하고 그 프레임의 범위 내에서 필요한 미국의 원조규모를 확정하면 좋을 것이라는 아이디어였다. 송장관은 1958년 방미해 허터 국무장관 대리를 만났고 그 결과 전적으로 미국의 원조재원인 대충자금으로 유지되는 산업개발위원회가 문흥부 산하 자문기관으로 1958년 봄에 대통령령에 의거해 설립 되었으며, 미국 오레건대학 교수 5명이 자문역으로 초청되었다. 당초 계획은 7개년으로 잡고 전반부를 3년, 후반부를 4년으로 잡아 먼저 3개년계획의 작성에 착수했다.) 경제개발7개년계획(1960~1966)의 전반계획으로 경제개발3개년계획(1960~1962)은 한국정부가 독자적으로 만든 최초의 경제개발이었다. 2년의 작업 끝에 1959년 12월 31일 안이 확정되었으며 1960년 4월 15일 국무회의에서 수정?채택되었다한국경제의 자립의지를 최초로 계획화한 것이다. 농?공의 균형과 중?경공업의 조화 그리고 국제수지의 균형 등 자립적 균형성장을 개발목표로 삼고 있었다. 5대 계획목적은 생산력의 극대화, 국제수지의 개선, 고용기회의 증대, 국민생활수준의 향상, 그리고 산업구조의 근대화였다. 그러나 ‘3개년계획’은 1960년 최종 인쇄단계에서 4?19혁명을 만나 말 그대로 ‘계획’에 그치고 말았다. 이승만은 별다른 열의를 보이지 않았으므로 부흥부의 독립 방계 기관인 산업개발위원회의 주도와 송인상의 개인적 열의에 의존했던 것이다.⑵ 장면정부의 경제계획(14961~1965)장면 국무총리는 국무총리에 당선되기 2개월 전인 1960년 8월 18일 경제성장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었다. 그는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보낸 서한에서 정치 경제적 개혁이 긴요함을 역설하면서 경제성장은 새로운 정부의 핵심정책이 될 것이라고 했다. 따라서 제2공화국에서는 출범 직후부터 경제제일주의를 표방하면서, 경제개발계획의 시행 의사를 밝혔다. 또한 미국의 경제 고문은 장면정부가 장기경제계획을 수립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이 계획중 대부분이 1961년 군정의 경제개혁에 흡수되었다. 경제제일주의를 표방한 민주당정권은 부흥부 산업 개발 위원회를 통해 자유당정군의 3개년계획을 발전시켜 경제개발5개년계획안(5개년종합경제재건계획안이라고도 칭함)을 편성했던 것이다.5개년계획은 김영선 재무부장관을 중심으로 주요한 상공부장관, 태완선 부흥부장관 등의 경제팀에 의해 1960년 10월부터 착상되었다. 장면 총리는 “후세에 남길 대역사를 하자”면서 경제개발계획 추진을 지시하는 한편 김영선 재무부장관과 차균희 부흥부차관을 미국에 파견해 재정지원 규모를 타진했다. 장면 총리는 1960년 10월 4일 경제개발계획 의지를 표현한 ?한국의 경제개혁방책에 관한 각서?라는 외교문서를 미국무장관 허터(Christian A. Herter)에게 보냈다. 장면 국무총리는 이 각서의 전달공함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본 각서는 오늘날 한국이 직면하고 있는 를 극복하는 데 필요한 몇가지 대책과 아울러 이러한 광범한 개혁을 신정부가 강력히 수행해 나가는 데 소요될 재정적 부담도 동시에 밝히고 있습니다. … 따라서 우리는 귀국의 증여 원조가 현수준에서 유지되어야 할 것은 물론 이에 더하여 새로운 경제개발사업을 추진하는데 소요되는 특별경제원조와 경제안정기금을 마련하여 줄 것을 간절히 요청하는 바입니다.장면 국무총리는 1960년 10월 경제개혁과 경제개발계획 의지를 표명하면서 이에 필요한 원조를 미국측에 공식적으로 요청했던 것이다. 이 때 수교한 각서에는 이미 5개년경제개발계획이 언급되고 있고, 산업기반 시설 건설에 집중할 경제개발계획을 세우고, 내자 동원을 위해 국방비 감축을 계획하고 있음을 밝혔다. 그리고 당면 문제로서는 실업자와 농촌 빈곤의 문제를 크게 의식하고 있으며, 구체적인 사업 계획으로서는 국토건설사업 실시, 중소기업 육성 방침, 노동 집약적 산업 육성, 국제수지 개선 등이 언급되고 있다. 여기에는 이미 제2공화국의 제1차5개년경제개발계획의 대체적 골격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경제개발 자금을 주로 미국의 원조나 차관으로 충당할 계획임을 보여 주고 있다. 이 때 미국에 요청한 지원액은 경제개발 지원비 4억 2천만 달러, 행정개혁 비용 8천만 달러를 합쳐 모두 5억 달러였다. 한국경제개발계획이 대외적으로 발표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하지만 미국은 이미 1950년대 중반부터 장기적인 개발계획의 입안을 종용했으나 구체적인 지원요청에는 다소 냉담했다.제2공화국에서의 경제개발계획의 수립 작업은 제1공화국에서와 마찬가지로 부흥부 산하 산업개발위원회에서 추진되었다. 민주당 정권이 수립되면서 산업개발위원회 위원 일부가 교체되었다. 이승만 정권 시기 위원장이었던 주원 이하 몇 사람이 교체되었고, 새로운 인원이 충원되었다. 위원장은 부흥부 장관이 당연직 위원장이 되었다. 새롭게 충원된 위원은 재무부 이재국장 김종대, 성대 교수 임원택, 홍성유 등이었다. 이 때 산업개발위원회에서 김입삼은 재정과 조세 부문, 한국은행업개발위원회는 이승만 정부에서보다 위상이 강화되었다. 부흥부 산하 기관이라는 형식은 동일했다. 그러나 장면 국무총리의 지시로 경제개발계획 입안 작업은 오위영 무임소 장관 책임 하에 진행되었다. 따라서 오위영 무임소 장관이 추천한 김종대 부위원장이 실질적인 책임자가 되어 경제개발계획을 입안했다.1960년 12월 장면 정부는 국회 답변을 통하여 ‘자유당 정부가 수립해 놓은 3개년계획을 7개년 계획으로 연장하기 위한 연구에 착수하는 일방, 장기개발계획의 입안과 집행?감독을 전담할 부(部)의 신설을 고려 중에 있다.’고 했다. 이것은 이미 산업개발위원회를 통해 장기적인 경제개발계획을 수립하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음을 밝힌 것이다. 이 시기 제2공화국에서는 경제발전을 위한 각계의 의견을 수렴하는 작업을 수행했다. 그것은 이른바 종합경제회의 개최인데, 1960년 12월 15일부터 19일까지 각계 인사 305명이 참석했다. 이 회의는 행정기구 개편, 재정 금융, 산업구조 개편, 공기업, 국제수지, 고용 및 생산 수준, 지방개발사업 등 7개 분과위원회로 나뉘어 진행되었는데, 경제발전을 위해 정부에 건의하는 정책이 망라되었다. 여기서 제기된 주요 정책들은 경제개발계획에 반영되었다. 이것은 민주당 정권의 경제개발계획이 당시의 광범한 여론 수렴을 거친 결과임을 말해 준다.1961년 4월 말 5개년 계획안의 성안이 완료되었다. 정부는 미국측의 동의를 얻기 위해 재무부의 이한빈 예산국장과 김영록 이재국장, 부흥부의 이기홍 기획국장등 3인을 교섭실무단으로 파견했다. 그러나 군사쿠테타 소식이 곧 전해지고 실무교섭단은 도중에 귀국해 버릴 수밖에 없었다. 오위영 무임소 국무위원은 5월 12일 오후 4시부터 장면 총리를 방문한 뒤 약 한 시간 반 동안 정부가 1962년부터 시행할 경제개발5개년계획을 협의했으나 이것도 너무 늦은 협의였다.결국 민주당정부의 계획은 실행을 위한 재정적 뒷받침이 없었고 실천에 옮길만한 확고한 준비가 없었으므로 1961년부터 시행시키지 못했으며(확정된 안도 1961년 획의 입안과 추진⑴건설부안군사정부는 출범과 동시에 경제개발을 공약했다. 이 공약의 실천담당 부서를 만드는 것이 시급했는데 1961년 5월 26일 이승만?장면정권하의 부흥부는 건설부로 개편되었고 부흥부 산하의 산업개발위원회는 건설부 종합기획국에 흡수되었다. 건설부는 5.16전부터 산업개발위원회에서 입안되기 시작했던 5개년계획안을 거의 그대로 복사해 5월 하순 제1차 5개년경제개발계획(시안)을 발표했다. 2공화국 부흥부가 군사정부에서 건설부가 되었듯 민주당정부의 부흥부안이 건설부안으로 표지만 바뀐것과 마찬가지였다. 자유당정부의 경제개발3개년계획 수립과 계획안 작성시에 부흥부차관과 장관을 역임한 신현확의 증언에 의하면, 5.16군사정변이 발생한 지 3개월 만에 정부가 5개년계획을 발표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자유당 정부가 2년에 걸쳐 미리 마련한 3개년계획안과 장면정부의 5개년계획 등의 사전준비작업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유당 시절부터 자문했던 미 오레건대학교 경제자문단의 의견도 참조해 미국의 요구를 상당부분 반영했던 것으로 평가된다. 그렇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농어촌을 개발하고 생산력, 소득을 증대시킴으로써 실업을 해소함과 함께 국내시장을 확대시키려는 자립적 성장의 방향성도 지니고 있었다.⑵최고회의안5월 16일부터 6월 사이에 산업개발위원회의 김종대 위원장대리는 박정희와 이주일에게 민주당정권에서 만든 경제개발계획(건설부안으로 추정됨)에 대해 보고를 했다. 하지만 박정희의 핀잔을 들게 되었다. 결국 최고회의 유원식 최고위원의 책임하에 새로운 구체적 계획이 만들어 졌다. 이 계획의 이론적 근거는 최고회의 의장 자문위원이었던 민간 경제학자 박희범 서울상대 교수가 제공했다. 그의 이론은 ‘자립경제를 지향하는 자주적 공업화전략’이었다.최고회의안은 최고회의 종합경제재건기획위원회(위원장 유원식)라는 기구에 의해 작성되었다. 당시 산업은행 조사부의 김성범, 재무부 사세국 토지 조사과장 정소영, 부흥부 산업개발위원회 보자위원을 역임한 백용찬 3인이 1961년 했다.
    경영/경제| 2007.03.07| 5페이지| 1,000원| 조회(670)
    미리보기
전체보기
받은후기 1
1개 리뷰 평점
  • A+최고예요
    0
  • A좋아요
    0
  • B괜찮아요
    1
  • C아쉬워요
    0
  • D별로예요
    0
전체보기
해캠 AI 챗봇과 대화하기
챗봇으로 간편하게 상담해보세요.
2026년 05월 28일 목요일
AI 챗봇
안녕하세요. 해피캠퍼스 AI 챗봇입니다. 무엇이 궁금하신가요?
1:20 오전
문서 초안을 생성해주는 EasyAI
안녕하세요 해피캠퍼스의 20년의 운영 노하우를 이용하여 당신만의 초안을 만들어주는 EasyAI 입니다.
저는 아래와 같이 작업을 도와드립니다.
- 주제만 입력하면 AI가 방대한 정보를 재가공하여, 최적의 목차와 내용을 자동으로 만들어 드립니다.
- 장문의 콘텐츠를 쉽고 빠르게 작성해 드립니다.
- 스토어에서 무료 이용권를 계정별로 1회 발급 받을 수 있습니다. 지금 바로 체험해 보세요!
이런 주제들을 입력해 보세요.
- 유아에게 적합한 문학작품의 기준과 특성
- 한국인의 가치관 중에서 정신적 가치관을 이루는 것들을 문화적 문법으로 정리하고, 현대한국사회에서 일어나는 사건과 사고를 비교하여 자신의 의견으로 기술하세요
- 작별인사 독후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