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년여관’을 읽고우리나라의 근, 현대사는 유난히 잦았던 구성원들 간의 골육상쟁으로 인해 피로 얼룩진 것이 사실이다. 일제 치하에서의 말로는 차마 표현 못할 굴욕감이 채 가시기도 전에 동족간의 이념의 차이로 인한 끔찍한 분단의 아픔이 찾아왔고, 이후 강압적인 독재 정권에게 자유를 빼앗긴 국민에게 돌아온 것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과 상처였다. 유난히 아픈 역사적 기억들은 많은 문학 작품 속에서도 찾아볼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작품들은 각기 전쟁문학, 분단문학 등의 이름으로 분류되어 왔다.시간이 흘렀지만 우리는 아직도 세월의 아픔과 흔적을 몇몇 문학 작품 속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그 중에서 나는 이철우 작가의 '백년 여관'에 대해 짤막하게나마 이야기 해보려 한다.소설 '백년 여관'에서도 앞서 말한 것과 마찬가지로 한국 근, 현대사 속에서 일어났던 여러 사건들을 다루고 있다. 일제 식민지 시대, 제주 4 · 3 사건, 6 · 25 전쟁, 보도연맹 사건, 베트남 전쟁, 5 · 18 민주화항쟁 등의 끔찍한 사건들은 등장인물들의 가슴 속에 각기 다른 모습으로 새겨져 있다. 그리고 소설은 이러한 사건들이 인물들의 내면에서 얼마나 고통스러운 기억의 조각으로 자리 잡고 있는지를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이야기는 서해안과 남해안의 교차 지점쯤에 위치한 '영도'라는 작은 섬의 ‘백년 여관’을 중심으로 하여 시작한다. 소설의 프롤로그에서 ‘영도’라는 섬의 존재는 허구가 아님을 분명히 밝히고 있는 것을 통해 우리는 이 소설에서 다루는 믿을 수 없으리만큼 끔찍한 이야기가 Fiction이 아니라 상당 부분이 사실을 기반으로 한 Non-Fiction 임을 유추할 수 있다.소설에는 약 10명 내외의 주요 인물들이 등장한다. 어느 누구도 딱히 주인공이라 칭할 수 없는 것은 전지적 작가시점이라는 시점 상의 문제도 작용하겠지만, 인물들이 안고 있는 고통이 어느 누구도 그것의 우열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너무나 컸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가족들 모두와 생이별하고 홀로 입양된 요안, 무자비한 학살로 가족을 모두 잃은 복수, 베트남 전쟁에서 한 쪽 팔을 잃고 알콜 중독자가 된 문태, 5월 항쟁에서 동료들을 잃고 자책감에 시달리는 소설가 정우, 가슴에 맺힌 한을 핏덩어리를 토해내다 목에 혹이 생겨버렸고 결국 죽어서까지 눈을 부릅뜬 채 이 세상을 조용히 떠나기를 거부했던 설분네 노파 등 소설에 등장하는 거의 모든 인물들은 저마다 각기 다른 이유로 가슴에 응어리를 진 채 살아가고 있다. 영문도 모른 채 끔찍하고 안타까운 신체적, 정신적 상처를 말없이 당해야만 했던 이들의 모습은 더욱 나의 마음을 아프고 안타깝게 하였다.이 소설은 이러한 인물들을 통해 역사적 사건의 구체적인 배경이나 원인 혹은 사건 이후 벌어진 역사적 결과보다는 사건 당시의 참혹한 실상을 묘사하는데 주력하고 있다. 이것은 사건의 전모나 이러한 끔찍한 일들이 대체 무엇을 위해 벌어졌는지조차 알지 못하는 무고한 서민들의 입장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강자들의 핍박 속에서 약자인 서민들은 이유도 모른 채 도망쳐 다녔고 학살당했으며 더 나아가 투쟁까지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임철우 작가는 놀라울 정도로 리얼하게 이러한 사건들을 묘사하고 있다. 혹자들은 이러한 사건의 재현에 작가가 지나치게 집착한 것이 아니냐는 비판을 제기하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의견에 절대적으로 반대한다. 당시의 상황을 거의 완벽하게 재현하고, 인물들의 심적 고통을 사실적으로 드러냄으로써 독자들은 자신들이 미처 겪지 못하고 알지 못했던 역사의 뒤편의 사람들의 아픔을 느끼게 되었다. 이것은 단순한 문학 작품의 차원을 넘어서 민족적, 역사적 의식을 함양하는데 까지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고 생각한다.한편, '백년 여관'에서는 여타의 문학 작품들과 비교되는 중요하고 흥미로운 특징이 하나 발견된다. 바로 현실적인 요소들과 비현실적인 요소들의 오묘한 조합이다. '푸른 손'의 존재, 인물들의 귀에 들리는 갑작스러운 환청, '신지'와 '복수'의 눈에 죽은 귀신들의 혼령들이 보이는 등의 사건들은 과학적으로 증명이 어려운 사실들이다. 그러나 작가는 독자들이 잘 알고 있는 역사적 사건들을 사실적으로 표현함으로써 이러한 비현실적인 요소들을 그 속에 자연스럽게 배합되게 만들었다. 독자들로 하여금 비현실적인 요소들에 대한 황당함과 의아함 대신에 공감대와 연민을 갖도록 만들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작가는 대체 왜 이토록 이러한 요소들을 소설에 끄집어들이려 노력한 것일까?기억은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고통스러운 기억일수록 더욱 선명하게 마련이다. 인물들은 저마다 개인적인 아픈 기억들을 안고 살아가고 있으며 그러한 상처들은 어떠한 것으로도 쉽사리 보상될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여타 소설들이 살아있는 사람들의 상처를 치유하는 데에 초점을 맞추고 치우쳤던 반면, 이 소설에서는 살아있는 사람들의 고통스러운 기억들로 인한 아픔은 물론이고 죽은 사람들의 뼈저린 상처까지 위로하고 있다. 작가는 이미 현세에는 존재하지 않는 이들을 죽었다는 이유만으로 외면하지 않는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소설에서 유달리 비현실적이고 무속적인 요소가 많이 등장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미 죽은 이들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진 인물들, 그리고 죽은 이와 살아있는 이를 매개하는 무당을 통해 작가는 무참히 죽어버린 이들을 바라보고 위로하고 있는 것이다. 이승에서 맺힌 한이 너무 많아 차마 떠나지 못하는 수많은 가엾은 떠돌이 영혼들을 작가는 동정과 연민의 시선으로 달래고 있다. 그리하여 소설의 마지막은 원한에 사무친 억울한 원혼들을 달래는 씻김굿을 하는 것으로 마무리 되고 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살아있는 이'와 '죽어있는 이'들이 동시에 공존함을 강조하는 작가의 생각은 소설 속에서 이러한 방식으로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비극적인 역사 속에서 상처 받은 영혼을 달래려는 작가의 노력은 소설 여기저기에서 드러난다. 아니 어쩌면 해묵고 케케묵은 소재에 왜 그리 집착을 하냐는 비판 속에서 이러한 소설을 출간했다는 사실 자체에 박수를 쳐주고 싶다. 사실 많은 사람들은 과거를 잊고 산다. 특히 그러한 과거가 자신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느끼고 방관할 시에는 그러한 정도가 더더욱 심해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과연 지금의 우리는 피로 물들어버린 역사에 대해 얼마나 잘 깨닫고 있는가? 역사는 절대 망각해서는 안 될 존재이다. 현재, 미래 지향적인 사람들이 만연한 사회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를 잊지 말라 강요하는 것은 과거가 없는 현재, 과거가 없는 미래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왜 우리는 상처받았다는 이유만으로,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는 안하무인적인 생각으로 역사를 망각하려 노력하고 돌보지 않으려 하는가? 뒤틀린 역사 속에서 끔찍한 상처를 받은 사람들은 비단 소설에 언급 되어진 사람들 뿐만은 아닐 것이다. 정말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많은 사람들이 핍박받았고 고통 받았다. 다행히도 임철우 작가는 역사를 망각하려는 시류에 좌절하고 합류하려기보다는 이러한 현실을 조금이나마 바꾸어 보려는 노력에 힘을 실었다. 소설 마지막 부분에 등장하는 씻김굿은 이러한 모든 사람들을 위로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리고 이러한 굿이 진행되는 시간에서조차 한편에서는 폭죽을 터뜨리며 자신들만의 현재를 즐기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언급하고, 같은 시간속의 두 공간을 적나라하게 비교함으로써 이러한 현실에 대한 작가의 씁쓸함을 은유하고 있는 것이다.
반민특위의 못다 피운 꿈,그리고 6월의 비극- 개 요 -1. 머리말2. 친일파 청산 노력의 시발점 - 남조선 과도입법위원3. 이승만 정부 하에서의 반민특위 수립 과정 및 활동내용4. 정부의 반민특위 탄압과 6월 총공세7. 풀리지 않은 친일파 문제8. 결론 - 역사적 재조명 및 문제 각성의 필요성9. 참고 문헌반민특위의 못다 피운 꿈, 그리고 6월의 비극“프랑스가 다시 외세의 지배를 받을지언정 민족 반역자는 다시 나오지 않을 것이다”라는 발언을 기억하고 있는가? 이는 나치의 점령에서 벗어나 해방을 맞이한 프랑스의 샤를 드골 전 대통령의 해방 이후 내세운 목표로써 그를 비롯한 프랑스 정부가 과거사 청산에 대해 얼마나 강한 의지를 갖고 있었는지 뚜렷하게 보여주는 발언이다. 우리나라가 겪은 30년간의 식민통치 기간을 고려했을 때 상대적으로 짧은 단 4년간의 기간 동안 나치의 점령 하에 있었던 프랑스는 해방과 동시에 나치에 연합했던 비시 정부 세력을 처벌하기 시작한다. 약 1만 4백여 명의 반민족행위자를 직접적으로 처벌하고 나머지 세력은 간접적으로 처벌하여 성공적으로 반민족 행위자를 처벌했던 프랑스에 비해 우리나라 정부의 친일파 청산 과정과 결과는 부끄럽기 짝이 없다고 밖에 표현할 수 없을 것이다. 과연 해방 이후 잃었던 민족의 정기를 되찾고 민족의 융합과 민주 사회 건설을 위해서 무엇보다 시급하게 이루어져야만 했던 반민족행위자 처벌을 위해 어떠한 노력들이 이루어졌는가? 그리고 그러한 노력들이 무자비하게 짓밟히고 뭉개져야만 했던 이유는 무엇이었나? 여기서는 친일파의 정의 및 배경보다는 친일파의 처단 과정과 거기서 발발한 충돌들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아래에서 해방이후 친일파 청산 활동에 가장 큰 힘을 쏟았던 반민족행위자특별위원회, 즉 반민특위의 구성에서 해체까지의 과정을 당시의 정치적 상황과 연관시켜 하나하나 밝혀보고, 민족의 원흉인 친일파가 대체 어떻게 해방 이후에도 이 땅에서 떳떳하게 살아갈 수 있었는지 그 원인들을 파헤침과 동시에 그 문제점을 살펴보도록 하자.8지 않은 권력을 그대로 행사하며 강력한 힘을 가진 새로운 정치적 집단으로 떠오르게 된다. 민족의 원흉이 죄값은커녕 금은보화를 물려받은 아이러니한 상황. 이러한 와중에 친일파 숙청의 시발점이 된 기구는 ‘남조선 과도입법위원’이었다.‘남조선 과도입법위원’은 김규식을 비롯한 중간파 세력을 발판으로 미군정에 대한 지지를 넓히기 위해 미군정이 구성한 세력이다. 비록 미군정의 뒷받침으로 구성되었지만 과도정부의 입법의원들은 반민족 행위자의 진출을 봉쇄하기 위해 입법위원 선거법에 그들의 공민권을 제한하였으며 같은 해 ‘민족 반역자, 부일 협력자, 전범, 간상배에 관한 특별법’을 제정하여 반민족 행위자에 대한 숙청 문제를 거론하고 나섰다. 그러나 다소 친일파 세력에 대해 온건한 태도를 갖고 있던 김준연 등의 세력은 특별 법률에 대해 그 규정이 너무 가혹하다며 “조선 내의 사람들이 전부 백옥과 같았으면 좋겠지마는 36년간의 일본 통치가 그것을 용인하지 아니하였다”고 하여 처벌 대상을 극소수로 축소시킬 것을 주장하였다. 심지어 미군정은 특별 법률 자체를 거부하고 법령으로 공포조차 하지 않았다. 결국 내부의 의견 분열과 일제의 관료들을 포용하려 했던 미군정에 의해 공포되지 못한 반민족 행위자들에 대한 숙청 문제는 1948년 8월 15일 건국된 대한민국으로 그 바통이 넘겨졌다.1948년 8월 15일 마침내 ‘이승만 정권’이라는 남한만의 단독정부가 수립된다. 점증하는 여론의 압력 속에서 국회는 친일 민족 반역자에 대한 처벌 문제를 논의하기 시작한다. 국회는 행정부 내에 많은 친일파들이 도사리고 있다고 보고, 8월 16일 김인식 의원 등 12명의 제안으로 ‘정부 내 친일파 숙청에 대한 건의안’을 가결시켰다. 또 이에 앞서 8월 5일 “민족 반역자를 처벌함으로써 그들이 새 국가 건설에 참여할 기회를 박탈해야 한다.”는 김웅진 의원의 주장에 따라 법안 기초 특별 위원회를 구성하고 초안 작업을 시작함으로써 민족 반역자 처벌 문제가 본격적인 논의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처럼 국회에서 반민족 행위일 법률 제3호로 이를 전국적으로 공포했다. 이승만이 처음부터 반민법에 대한 반대 입장을 분명히 하였던 이유는 친일파가 이승만 정권의 가장 든든한 국내적 기반이었기 때문이다. 그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던 한민당에 친일파 세력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비록 이승만이 일본에 대한 반감이 컸다 할지라도 자신의 지지기반인 한민당을 중심으로 한 친일파 세력을 잃게 된다면 정치적 기둥이 무너질 것임은 분명했기에 그는 친일파 처단에 대하여 노골적으로 반감을 드러내었다.이러한 이승만의 반감과 우여곡절 속에서 반민특위는 마침내 10월 23일 국회의 승인을 얻어 특별재판부, 특별검찰부, 중앙사무국 및 각 시도에 조사정부를 세우면서 1949년 1월부터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다. 약 3개월간에 걸쳐 친일파들의 행적 조사 끝에 1949년 1월 8일 화신 재벌의 총수이자 대표적 친일파인 박흥식에 대한 검거를 개시로 그 활동은 포문을 연다. 이 때 체포된 민족 반역자에는 관동군 측탁이었던 이종형, 일본군에 비행기를 헌납한 방의석, 33인중 한 사람이었던 최린, 일제 경시 출신의 김태석, 창씨개명에 앞장섰던 친일 변호사 이승우 등이 있다. 2월에 들어서자 문화계에도 그 발을 뻗친 반민특위는 독립선언문을 쓴 최남선과 이광수 등도 체포한다. 국민들은 반민특위의 활동에 전폭적인 지지를 보냈으나 이승만은 불편한 심기를 감출수가 없었다. 이러한 이승만의 못마땅함이 폭발한 것은 그가 평소에 총애하던 수사과장 노덕술의 체포사실이 알려지면서였다. 악질 고문으로 유명한 노덕술은 이승만이 고문 기술자로 상당히 총애하던 인물이었다. 이튿날 이승만은 6명의 특위 위원을 불러 노덕술이 치안 확보에 힘쓴 공로를 인정하자며 석방을 종용하고 나섰으나 반민특위는 노덕술의 석방을 거부했고 이에 분노한 이승만은 반민특위의 활동이 헌법 위반이며 특별조사위원의 과도한 조사를 금지키로 하는 등의 담화문을 거듭 발표하여 반민특위의 활동에 찬물을 끼얹었다. 이렇듯 이승만 정권의 탄압은 나중에 더(49.5.20)’이다. 국회가 휴회 중인 5월 17일 국회 소장파 의원들인 최태규, 이구수 의원이 국가 보안법 위반 혐의로 돌연 구속되고, 다음날 이문원 의원이 구속되며 시작된 이 사건은 8월 14일까지 3차에 걸쳐 소장파 의원 15명이 헌병대에 구속되는 것으로 확대되었다. 구속된 의원들의 대부분은 반민법 시행의 강경론자들이었다. 이 사건의 핵심은 국회부의장 김약수 의원을 비롯한 소장파 의원들이 벌여 온 미군 철수와 평화 통일 주장이 남조선 노동당 7원칙의 하나로서 남로당의 국회 프락치 공작에 의해 추진됐다는 것이다. 이 때 주요 세력들이 구속됨에 따라 반민특위 활동은 치명적인 타격을 입는다. 결국 이들은 훗날 한국전쟁이 발발하였을 때 북한 인민군들에 의해 풀려나게 되고 할 수 없이 월북을 택한다. 이러한 이들의 월북으로 인해 아직까지도 그들은 ‘남로당 빨갱이’라는 오명을 쓰고 있으나 실상 이들은 북에서도 환영받지 못한 채 탄광촌에서 비참한 생활을 영위하였다고 한다.반민특위에 대한 탄압은 여기서 끝이 난 것이 아니다. 49년 6월 6일 이른바 ‘반민특위 습격사건’이 발발하면서 정부의 반민특위 탄압은 극에 달한다. 중부 경찰 서장 윤기병이 인솔한 무장 경찰대가 반민특위 본부를 포위하고 출근하는 특경 대원, 특위 직원 등 35명을 강제로 체포하여 트럭에 실어 시내 각 경찰서에 분산 수감하고, 특위가 가지고 있던 무기, 통신기기, 서류 등을 압수했다. 경찰대는 현장에 달려온 검찰 총장 권승렬에게까지 총을 들이대고 권총을 압수할 정도로 난폭했으며 수감된 요원들은 심한 고문까지 받았다. 이를 알게 된 국민들의 거센 규탄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은 6월 7일 AP통신과의 단독 회견에서 버젓이 ‘특경대 해산은 대통령인 자신이 직접 경찰에 지시한 것’이라 당당하게 밝혔다. 이러한 일방적인 진압과 구속 사태는 민주 국가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승만을 비롯한 정부의 암묵적 묵인 더 나아가 잔혹하고 반민주적인 지시와 명령은 이러한 말도 안되는 사건들을 가능하게 승만 정부는 “이들이 적에게 동조할 우려가 있다”며 이들의 제거를 지시한 것이다. 그리하여 북한군의 급속한 진격 때문에 학살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서울, 경기, 강원 지역을 제외한 남한 전역에서 군경, 우익 단체에 의한 보련원 대량 학살이 무자비하게 자행된다. 이들 중 적어도 80% 이상은 이념과 사상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순박한 민간인들이었고 전쟁 이후 약 15~20만의 무고한 민간인들이 무자비하게 목숨을 잃었다. 이러한 민간인 대량 학살이 가능했던, 그것도 정부에 의해 자행되었던 이유는 당시 이승만 정권이 느꼈던 사회주의 세력에 대한 위기감과 자신들의 정부를 유지하기 위한 어처구니없는 공포감에서 비롯되었던 것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생업에 종사하던 양민을 향한 잔혹한 총성은 우리 민족 역사에서 씻을 수 없는 치욕으로 기록될 것이다. 더욱이 보도연맹 사건이 있은 지 50여년이 지났음에도 희생자 가족들이 경찰의 신원 관리를 받고 있었다는 사실은 기득권층의 더러운 야욕과 이념 대립의 갈등이 무고한 국민들을 얼마나 뼛속 깊이 괴롭히고 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6월 총공세의 또 다른 충격적인 사건은 6월 29일 발발한 김구 암살 사건이다. 안두희가 범인으로 밝혀졌음에도 여전히 미스테리로 남아있는 김구 암살 사건은 당시 국민들을 비롯, 평화 통일 정부를 추진하며 김구를 따르던 민족주의자 세력에게 엄청난 충격을 안겨주었다. 그렇다면 왜 하필 김구였단 말인가? 당시 김구는 반민특위 활동을 지지하며 국회의 소장파 세력을 거느리고 있었고 이승만 정부에 대한 반감을 표시하였다. 김구 암살사건에서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과연 배후가 누구였냐는 것이다. 그리고 대체 김구를 암살한 안두희는 말년까지 어떻게 그렇게 안정된 삶을 영위할 수 있었단 말인가?일단 김구의 직접적인 암살범으로 확실시되고 있는 안두희는 임시정부 하의 한독당 세력이자 서북청년당 소속이었으며 CIS 미군 방첩대 요원이자 이승만 세력 하에 있는 백의사 소속이었다. 이렇듯 안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