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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중, 미일 간 환율협상 분석
    미중미일 환율협상사례비교 보고서목차1. 배경2. 과정3. 쟁점4. 전략5. 결과6. 비준7. 분석8. 협정문9. 기타공통점과 차이점미일 환율 협상과 미중 환율협상에서 공통적으로 찾아 볼 수 있는 부분은 자국의 이익으로 국제적 공조로 협력을 해가는 것이 아닌, 각 국의 이해관계, 특히 미국의 패권지위를 유지시키고자 했던 성격이라고 볼 수 있다.미·중·일의 환율 전쟁은 이제 선전포고 단계를 넘었다. 언제 불을 뿜어도 이상하지 않을 분위기다. 세 나라의 생각은 똑같다. 어려워진 자국 경제상황을 자국 통화가치를 낮춰 경기를 부양하겠다는 것이다.중국·일본의 통화가치는 폭은 다르지만 상승세를 타고 있다. 2010년 9월30일 외환시장에서 달러당 원화 값은 전날보다 2.0원 오른 1140.0원에 장을 마쳤다. 지난해 말과 비교하면 절상률이 2.6%다.이 기간 중 일본 엔화는 10.5%, 중국 위안화는 2.0% 절상됐다. 하지만 중·일의 대응방식은 다르다. 중국은 위안화 가치가 더 오르지 않게 사실상 묶어둔 채 버티고 있다. 일본은 지난달 15일, 6년6개월 만에 처음으로 외환당국이 시장에 개입해 엔화 강세를 일시나마 돌려놓기도 했다.미일의 경우를 먼저 본다면, 미국과 일본정부 역시 더 이상의 달러강세에는 반대할 것이다. 먼저 미-일간 금리차가 지금보다 더 확대되기는 힘들다. 미 연방 준비이사회가 금리인상을 단행하면, 이 경우는 일본은행 역시 금리인상을 단행할 것으로 보인다.과도한 달러강세가 일본경제에 큰 도움이 되지 않는 데다 일본경기가 회복세를 보이고 있어 금리인상을 단행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최근 일본 기업들의 해외 제조업 진출이 상당히 진행되어 있고 원가절감 노력이 어느 정도 성공했기 때문에 모든 기업에게 엔저가 유리하게 작용하는 것은 아니다.예를 들어 일본의 대형 전자업체들은 사업구조를 조정하여 엔화가 절상되더라도 예전보다 영향을 작게 받는다.무역수지와 자본수지 측면에서도 달러강세가 지속되기는 힘들 것이다. 일본의 무역수지 흑자가 감소하고 일본이 미국상품을 예전보 되고 있지 않으며, 강제적인 위안화 절상요구를 단호히 거절한다고 중국 정부의 입장을 분명히 표명했다.양국 정부의 입장만 첨예하게 대립하고 말과 말로 기와 기로 힘 겨루기를 했을 때 협상의 발판은 대한민국의 경주에서 열린 G20회의 였다.재무장관회의에서 양국의 입장 차이에 대한 견해가 조금 누그러지는 듯 한 모습을 보이며 공동 성명서를 발표하는 결과를 도출해냈다.성명서의 주요 골자는 장기적으로 지속가능한 무역 균형 상태를 유지하기 위한 가이드라인을 제정, 양 국이 서로 협력하며 대화 하자는 골자였다.미일의 과정은 일본은 향후 그 끝이 어디인지 알 수 없는 잃어버린 10년이란 사상 초유의 경제 불황 터널로 진입하고 있었다.일본 경제가 살아나야 미국으로써도 아시아 지역에서의 무역 부담을 일본과 분담할 수 있고 미국 제조업의 많은 부분 영향을 미치고 있는 일본 부품업체들의 경제 불황에 따른 줄도산은 결국 미국의 제품완성 및 수출에 있어서도 막대한 영향을 끼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이 같은 일본 경제침체에 대응하기 위해, 미국은 통화조작이라는 일련의 압력수단을 대일본 경제회복에 대한 전략으로 채택했다.미국으로써는 엔화의 절상만이 자국의 무역적자폭을 감소시킬 수 있는 최후의 방법이었고 더 이상의 다른 선택이란 존재하지 않았다.결국 1985년 미국의 요구에 따라 G5 재무장관들은 엔화의 절상을 요구하는 플라자합의를 체결했다.플라자합의가 체결되기까지 미국정부가 가장 큰 쟁점으로 삼은 것은 자국을 비롯한 세계 무역의 불균형 문제였다.당시 일본과 독일은 대외수출에 따른 막대한 무역흑자를 유지하고 있던 반면 미국의 무역적자에 따른 재정부채는 하루가 다르게 증가하고 있었다.이 같은 상황이 지속된다면 미국 경제는 사상최악의 침체를 맞이할 것이 분명했고 그 다음에 결과는 미국 경제의 파탄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전망들이 속속 등장하기 시작했다.미국경제의 파탄은 대미무역에 있어 지속적인 흑자를 유지하고 있던 독일과 일본에게도 결코 이로운 상황은 아니었으며 특히 세계 긴축통화의 역할을 담국의 금리인상으로 절상 압력이 완회되고 있다고 인식하고 있는 실정이다.중국은 지난 20여 년간 경제개혁과 대외개방의 추진을 통해 연평균 9%가 넘는 고도의 경제 성장을 이룩하여 2009년도 중국 국내 총생산(GDP)은 4조9,093억 달러로 미국, 일본 다음으로 세계 3의 경제대국으로 부상) 했다.또한 중국은 대외무역 부문에 있어서도 1994년 위안화의 절하 이후 중국산 제품의 해외 수출이 급증하고 2001년 WTO 가입 등과 대외여건의 개선에 따라 2010년 9월 말 외환보유고가 2조6480억 달러(약 3005조원)로 압도적으로 1위의 자리를 고수)하고 있다.이 같은 중국의 위협적인 경제성장에 비해 미국 경제현실은 2007년 발생한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836만개의 일자리가 소실되고 한순간에 중산층에서 빈민으로 전락한 국민의 비율이 점차 증가되고 있는 추세이며 거대 금융기업들의 줄도산으로 인한 내수경제의 극심한 재정적자 확대와 함께 이라크 및 아프간에서 진행 중인 전쟁의 여파로 인한 정부 재정의 적자또한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는 상황이다.위안화 절상압력을 완화시키기 위해 중국은 무역과 투자의 외환수지 균형을 추구하여 외환보유고 안정화 현행의 강제적 외환 결제제도를 개선, 기업의 외환보유 증대, 국내외 이자율 격차를 점진적으로 축소, 외자기업에 대한 우대정책을 철폐, 해외기관의 위안화 채권 발행 장려 등을 또한 검토했다.그러나 이러한 검토과정과 중국 내부에서는 회의적인 입장이 많고 2004년 이후로 이러한 정책들이 검토 되었는데 절상되지 않았다.따라 서, 2011년 현 시점에서 미국과 중국의 힘겨루기는 당분간 계속될 것으로 보여 진다.1989년 일본 경제는 최대정점에 도달하기 이르렀다. 그러나 부문별한 부동산 투기남발은 이 헛된 호황의 가장 큰 문제점으로 등장하기 시작했고, 90년대 초반 일본의 버블경제는 붕괴하기 시작했다.버블경제의 붕괴는 일본경제 전반에 대한 엄청난 영향을 몰고 오기 시작했다. 기업들과 은행들이 줄줄이 문을 닫았으며 이에 따른 영향으로 미국의 요구 대부분을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고 볼 수 있다.미국의 위안화 절상에 대한 압력은 오바마 행정부에 들어와서 점차 더욱 확대되어 나가고 있다. 오바마 대통령은 자신의 취임식 연설에서 유례 적으로 위안화 절상에 대한 문제를 거론한 것을 시작으로 2007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에 의한 높은 실업률의 발생과 지속되는 대중국 무역 적자, 미국의 11월2일 중간선거 등 다양한 외부적 요인에 의해 더욱 압력의 폭을 넓혀 가고 있다.2010년 9월8일 백악과 대표단의 중국 방문 및 2010년 9월16일 미 상원이 환율 관련 청문회 실시, 2010년 9월23일 UN 총회 정상회담에서의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위안화 절상발언과 2010년 9월26일 미 하원에서 가결된 공정무역을 위한 환율개혁 법안. 이 같은 미국의 압력전략은 당분간 지속될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2007년 발생한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의 후유증이 현재도 진행형으로 매우 심각한 경제 불황을 초래하고 있기 때문이다.미국은 기본적으로 위안화의 가치가 현재에서 40%가량 절상되는 것을 기본목적으로 하고 있다.40% 가량의 절상이 이뤄져야 미중 간의 무역적자 폭이 감소하고 미국 기업들의 대중국 무역에서의 흑자가 진행되며, 그것을 기반으로 미국 경제의 전반적인 재 경기부양이 가능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기 때문이다.중국의 대미 위안화 절상 압력에 대한 전반적인 전략은 단호한 반대와 이를 바탕으로 한 자국 경제의 보호라는 목표에 그 주요 골자가 담겨있다고 볼 수 있다.현재 중국의 환율시스템은 기본적으로 복수통화바스켓제도, 즉 교역상대국의 통화가치 변동을 감안하여 환율을 결정하슨 시스템에 기반 하여 운영)되고 있다. 즉 복수통화바스켓제도만 놓고 보았을 때는 중국 위안화의 가치가 결코 저평가 되고 있지 않다는 사실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중국은 2005년 전 까지만 해도, 고정환율제를 국가 환율정책의 기반시스템으로 운영해 왔다. 그러나 중국 경제의 고도성장과 대외무역에서 차지하는 무역흑자 비중이 점차 증가하기 시작하일본 경제가 안고 있는 구조적인 문제점은 오늘까지도 일본 경제의 불황, 즉 잃어버린 20년이라는 경제침체기를 지속시키고 있다.위처럼 미-중, 미-일 각국의 협상결과를 보면 미-중, 미-일 환율협상의 원인은 미국의 경제 불황에서 비롯되지만 결과는 상이하다는 걸 알 수 있다.미-중 협상결과에서 미국은 적극적인 자세와 다각도 적으로 위안화 절상을 요구하였으나 중국의 입장은 단호했고 결과적으로 미국은 의도대로 결과를 이끌어내지 못했다.중국 위안화에 대한 법적 구속력을 지니는 공동 합의문 대신 중국 및 각 국의 환율가치 균형을 위한 노력을 확대시켜 나간다는 공동 성명서 발표에 그치고 말았다.중국은 미국의 압력에도 흔들리지 않고 확고한 입장을 내세웠으며 결국 자국의 이익을 잘 지켜냈다.하지만 미-일 환율협상에서는 미-중 협상처럼 미국이 플라자합의와 루브르합의로 적극적으로 엔화절상을 요구하였고 일본은 대미무역 흑자에 대한 각 국의 부정적인 입장과 미국경제의 장기적 불황이 자국 경제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판단하여 절상에 응할 수밖에 없었다.결과적으로 일본은 20년간의 경제침체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즉, 미-중, 미-일 협상결과의 차이점은 중국과 일본 양국에게 미국은 적극적으로 절상을 요구하였지만 중국과 일본의 대응은 달랐다는 것에서 생겼다.미국의 요구에 강력히 대응했던 중국은 미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자국의 이익을 잘 지켜내었고 강대국으로 부상하고 있음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주었으며, 일본은 미국의 요구에 순응하였고 결과적으로 경제 불황이라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그리고 공통점으로는 두 협상에서 모두 미국의 힘이 작용했고 세계 패권국으로써의 지위를 새삼 느끼게 했다고 볼 수 있다.미국의 힘이 있었기에 애초에 중국과 일본 양국에게 적극적인 요구를 할 수 있었을 뿐더러 다른 결과지만 중국과 일본의 협상 결과를 통해 아직까지 세계강대국의 입지를 보여준 것 같다.공통점과 차이점미중미일 간의 환율협상 비준 내용을 서로 비교해 보면 우선 공통점의 경우, 사실상 미중, 미일 간의 .
    경영/경제| 2012.03.29| 22페이지| 2,000원| 조회(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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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러시아와 북한의 관계
    러시아 외교론러시아와 북한의 외교관계소속 : 한림대학교 정치행정학과학번 : 20073640성명 : 김한솔1. [들어가며]러시아와 북한은 2차 대전이후 시작된 냉전시기부터 전통적 혈맹으로써 양국 간의 굳건한 외교관계를 구축해 왔다. 북한의 국가건국에 있어 러시아, 즉 구소련은 사상, 정치, 군사, 경제 등 모든 면에 있어 원조와 국가건설을 위한 기반 마련에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이와 같은 러시아와 북한의 긴밀한 외교적 관계는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더욱 확대 재생산 되었고 90년대 초반 냉전이 붕괴될 때까지 사회주의 진영의 핵심적 동맹관계로써 그 위치를 굳건히 지켜왔다고 볼 수 있다.그러나, 냉전의 붕괴이후 양국 간의 외교관계는 소련의 자유경제화와에 따른 급속한 정치적 변화로 인해 냉각되기 시작하였으며, 더 나아가 경제적 협력과 자유시장 경제의 기반을 확대하기 위한 러시아 정부와 한국 정부 간의 외교적 관계의 확대로 말미암아 더욱 멀어지는 양상을 보였다.본 과제물은 러시아와 북한의 외교적 관계를 냉전시기와 탈냉전 시기 등 크게 2가지로 나뉘어 그 안에서 나타난 외교적 관계의 변화를 세부적으로 관찰하고 향후 진행될 양국의 외교적 관계에 대해 분석해 보고자 한다.2. [냉전시기 러시아와 북한의 관계]냉전시기 당시 러시아와 북한의 외교적 관계는 한국과 미국의 관계와 마찬가지로 사회주의 진영의 가장 중요한 전략적 동맹 중 하나였다고 분석할 수 있다. 북한에게 있어 냉전당시 러시아의 존재는 자신들의 사회주의 정권에 있어 가장 크고 막강한 후원세력이자 정치적 기반 그 자체라고 볼 수 있다.북한의 지도자인 김일성은 해방이후 소련군 장교출신으로 북한지역에 들어와 자신의 미약한 정치적 기반을 소련군부의 막강한 후원으로 극복하고 스탈린식 사회주의 정권의 기틀을 마련하였다.북한의 건국에 이같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러시아의 영향력은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이어져 한국전쟁 당시 남침에 대한 스탈린의 정치, 군사적 후원을 약속받기 위해 김일성이 모스크바에 방문, 이에 대한 암묵적 지지를 받아내었고 전쟁과 관련한 군사물자와 기술에 대한 지원을 바탕으로 1950년, 6월25일 한국전쟁을 일으킬 수 있었다.전쟁은 북한과 러시아의 예상과는 달리 장기적인 성격을 띠며 유엔군의 참전과 북한군의 이북지역으로 전략적 후퇴를 가져왔고 중공군의 참전과 함께 끝을 알 수 없는 교착상태에 빠지고 말았다.결국 러시아는 북한 측의 전쟁에 대한 패배와 그에 따른 한반도 지역에서 자신들의 세력이 붕괴될 가능성, 이후 전쟁의 확전과 이에 따른 동북아 지역에서의 안보적 불안을 우려하여 1951년 7월10일 유엔군 측에 휴전과 관련된 협정을 제의, 2년에 가까운 회의 끝에 1953년 7월27일 북한과 남한의 휴전협정을 체결하였다.이후 러시아는 북한의 전후복구와 관련한 사안들에 대한 지원 등을 통해 지속적인 양국 간의 우호관계를 유지하는 등 보였다. 그러나 전쟁이후 북한 내 정치권력은 매우 급속히 변화되기 시작하여 김일성을 위시로 한 갑산파와 중국의 후원을 받는 연안파, 소련의 영향력 아래 있던 소련파 등으로 각 각 분리되어 전쟁의 책임과 관련하여 치열한 공방을 벌이기 시작했다.결과적으로 8월 종파사건을 통해 김일성을 중심으로 한 갑산파가 연안파와 소련파를 북한정치권력의 중심에서 완전히 숙청함으로써, 외부세력의 지원을 받는 정치세력을 차단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으며 동시에 이 같은 북한 지역의 정치적 환경의 변화는 소련으로 하여금 북한지역에 대한 자신들의 영향력을 감소시켜 버리고 말았다.북한과 러시아와 냉전시기 당시 관계는 해방이후부터 8월 종파사건까지 비교적 북한이 러시아에 대한 전폭적인 후원을 받으며 사회주의 종주국과 종속국 간의 불평등한 정치적 관계를 유지하였다고 볼 수 있는 반면 60년대 초반부터 양국 간의 관계는 스탈린의 사망이후 소련 내부에서 등장한 흐루시초프의 수정주의와 러시아와 중국 간의 국경분쟁을 통한 긴장감 등으로 인해 과거와는 매우 다른 양상의 정치적 환경을 만들어 내기 시작하였다고 분석할 수 있다.즉 북한에서는 자신들의 정치적 사상의 기반으로 삼던 스탈린식 사회주의를 과감히 던져버리고 김일성을 중심으로 한 주체사상을 전면에 내세우는 새로운 실험을 시작하였다. 이와 같은 북한의 러시아에 대한 정치적 중립성의 강화는 양국 간의 외교적 관계를 과거의 수직적 관계와는 달리 매우 수평적인 방향으로 전환시키는 동시에 냉전시기 당시의 양국관계를 과거와는 다른 차원으로 구분 짓는 새로운 전기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3. [탈 냉전기 러시아와 북한의 관계]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러시아와 북한의 외교적 관계는 냉전초기 당시 북한에 대한 러시아의 정치, 군사, 경제 측면에서의 무조건적인 지원과 사회주의 종주국의 입장으로써 상호 간 수직적인 관계를 유지해 왔다.그러나, 한국전쟁의 종전과 이후 북한 내부에서 벌어진 8월 종파사건 등으로 인해 북한 지역의 정치적 환경이 급속히 변화하기 시작하고 러시아와 중국 간 국경을 둘러싼 분쟁으로 인해 양국 간의 관계가 긴장감을 띠기 시작하면서 러시아와 북한 간의 관계는 과거와는 달리 조금은 중립적이고 수평적인 모양으로 변화되기 시작하였다.이와 같은 양국 간의 관계변화는 고르바초프의 서구사회에 대한 개방정책인 신사고 외교를 표방하기 시작하면서 더욱 확대되어 80년대 후반 소련의 붕괴라는 탈 냉전기를 겪으며 과거의 우호관계에서 완전히 탈피하는 양상을 보였다.소련의 붕괴와 함께 새로운 등장한 자유주의 체제의 러시아 정부는 자국의 부족한 경제기반과 이를 극복할 수 있는 협력사안의 확대를 위해 동북아 지역에서 새로운 경제 성장의 상징으로 불리우 던 남한 정부와 냉전시기 시도조차 하지 않았던 외교적 관계의 정상화와 양국 간의 협력확대에 중점적으로 노력을 기울이기 시작하였다.이와 같은 러시아의 외교적 변화모습은 북한으로 하여금 러시아에 대한 실망감과 함께 과거 사회주의 종주국으로써 속해있던 세력에서의 탈피를 가속화 시켰으며 양국 간의 관계는 점차 악화일로의 길을 걷는 모습으로 변화되었다.특히 양국 간의 관계는 1994년에 발생한 북 핵 위기 당시 북한이 정치, 군사적으로 동북아 지역에서 매우 민감한 이 문제를 러시아를 철저히 배제시키고 미국과의 단독협상으로 마무리 짓고자 하는 모습을 강력히 피력함으로써 더욱 확대되었다.그러나, 북한과 미국 간의 북 핵문제 협상이 긴 시간을 지속했음에도 불구하고 난황을 거듭하고 뚜렷한 가시적인 성과를 나타내지 못하면서 북한의 핵문제와 관련된 외교적 해결의 환경은 북한과 미국 간의 협상에서 러시아를 비롯한 중국, 일본, 남한 등이 참가하는 다자간 회담의 성격으로 변화되기 시작하였으며 북한에 대한 러시아의 정치, 외교적 영향력은 조금씩 회복되는 모습을 다시금 보이고 있다.또한, 북한 측의 자국 내 경제난과 식량문제에 대한 해결을 위해 러시아와의 경제, 외교 협력을 다시금 회복하기 위한 여러 움직임들도 보이고 있다는 점에서 향후 양국 간의 관계는 비교적 낙관적이라고 생각한다.러시아는 푸틴집권 이후 균형외교와 함께 자국의 지속적인 경제발전을 위해 동북아 지역의 안보적 불안을 최소화시키고자 하는 노력들을 병행하고 있다. 이는 한국, 북한 양국 모두와의 관계개선 및 유지를 통해 자국의 동북아 지역 발언과 함께, 탈 냉전기에 들어와 상실한 동북아 지역에서의 영향력을 어느 정도 회복하기 위한 움직임으로 이해된다.북한 또한 2012년 강성대국 원년의 해와 함께 90년대 초반부터 지속되고 있는 극심한 식량난을 해결하기 위해 러시아와의 관계개선을 적극 추진하고 있으며 한국의 이명박 현재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시베리아 가스관 및 철도 연결에도 협력적인 자세를 취함으로써 경제발전에 대한 기반을 마련코자 하는 움직임으로 보이고 있다.또한, 북한은 자국의 외교가 지나치게 중국 중심으로 기울어져 가는 것을 인식하고 러시아와의 외교확대를 통해 중국에 대한 일정부분의 외교적 견제수단으로 이용하고 이를 통하여 외교적 균형추를 유지코자 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4. [결론, 향후 러시아와 북한의 관계에 대한 전망]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러시아와 북한의 외교적 관계는 냉전기와 탈 냉전기를 겪으며 급속히 변화되고 시대적 변화에 따른 다차원의 양상을 보여 왔음을 발견할 수 있었다.이처럼 양국 간의 외교적 관계가 어떠한 일정수준을 유지하는 것이 아닌 대외적, 그리고 양국 간의 대내적 정치 환경의 변화에 따라 급격히 변화되어 감은 향후 양국의 외교적 관계가 현재의 현상유지 상태에 그치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을 가능케 한다.그렇다면 러시아와 북한의 향후 관계는 어떠한 방향으로 흘러갈 것인가? 사실 이에 대한 명쾌한 해답을 제시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양국이 보여주고 있는 서로에 대한 모습을 확인하고 이에 대한 국제정치적 환경을 함께 분석해 본다면 어느 정도의 유추는 가능하다는 결론을 낼 수 있다.
    사회과학| 2014.01.27| 5페이지| 2,000원| 조회(2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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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베트남의 민족주의 (베트남의 독립투쟁사)
    반식민지 운동을 통해 본 베트남의 근대 민족주의와 정치이념[1] 들어가며베트남은 동남아시아의 남북 단에 걸쳐 위치한 비교적 작은 나라로 전체적인 경제규모나 국력의 측면에서 볼 때 오늘날 전 세계적인 영향력을 발휘하는 선진국이라 보기는 어렵다.그러나 세계 근대사적 측면에서 베트남의 역사는 그 어디에서도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민족주의의 역사 그 자체의 특징을 지니고 있으며 반세기 가까이 지속된 그들의 외세에 대한 투쟁과 희생은 민족주의가 어떠한 성격을 가지고 민족이라는 하나의 공동체에 영향을 주는 것인가에 대한 가장 뚜렷한 사실적 증거라고 볼 수 있다.이와 같은 베트남의 근대 민족주의 역사에 대한 다양한 사실을 조사하고 연구하는 것은 오늘날 우리가 점차 그 방향을 잃어버리고 있는 민족주의의 근본적 개념을 다시금 확인하고 앞으로 발전시켜 나가는데 중요한 이정표가 될 것이라 생각한다.[2] 배경(1) 내부적 갈등과 프랑스의 침략18세기 말 베트남의 내부적 사정은 정치, 사회, 경제 등 모든 측면에서 매우 심각한 혼란의 시대를 맞이하고 있었다.기원전 111년에서 15세기 까지 지속된 오랜 중국의 지배에서 벗어난 이후 다시금 이어진 남북조 시대는 민족 간의 내부적 갈등과 함께 베트남의 국토를 황폐화시키고 서구열강이라는 대외세력의 침략을 가속화 시키는 외교적 환경을 조성하였다.15세기 아시아에 대한 항로가 개척된 이후 17세기에 들어와 본격적으로 베트남에 등장하기 시작한 프랑스인들은 당시 지배세력이던 서산조 왕조에 맞서 남부지역의 패권을 가지고 있던 완조 왕조에 적극적으로 접근하기 시작했다.프랑스의 목적은 완조 왕조에 대한 대외적 원조를 통해 통일을 완성하고 이를 통한 베트남 내의 경제적 이득을 차지하기 위한 일련의 전략들이었으며 이와 같은 프랑스의 전략은 성공적으로 이뤄져 완조 왕조는 1802년 서산조를 무너뜨리고 베트남의 통일을 이룩하게 되었다.프랑스는 완조 왕조의 통일 직후 그들과 수호조약을 체결하여 동부 3성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할양받았으며 1867년에는 서부 3, 사회, 문화 등 모든 면에서 새로운 변화와 함께 외세의 억압이라는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을 안기기 시작했다.또한 식민지의 새로운 주인이 된 서구열강의 침략자는 기존 베트남 사회를 중앙정부와 지방으로 각 각 분리시켜 지역주민들의 전반적인 관리를 담당하던 마을공동체를 해체시키고 모든 행정권한을 중앙식민통치기관으로 이양시키는 작업에 착수하였다.이 같은 일련의 조치는 마을공동체를 통해 정신적 안정감과 정서적 통합의 기능을 소멸시켜 버리는 결과를 가져옴으로써 베트남인들이 프랑스 식민정부에 대한 강한반감을 가지게 만드는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였다.또한 프랑스에서 들어오는 막대한 외국자본은 베트남에 새로운 대농장들을 형성시키고 도시에는 프랑스 자본가들이 장악한 상업시설이 들어섬으로써 기존 베트남의 소작농과 노동자들 대부분이 외세자본의 노예로 전락하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결국 이와 같은 프랑스 식민지배에서 오는 다양한 내, 외부적 수탈은 베트남 민중으로 하여금 민족주의를 바탕으로 한 반식민지 운동과 함께 근대화에 나서야 한다는 새로운 시대적 사명을 부여하게 되었다.[3] 전개(1) 민족주의 운동 초기초기 베트남의 민족주의 운동은 근대화의 부재에 따라 정치적 사상이나 강력한 이념의 무장 없이 단순한 국왕의 권위회복 운동으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이시기 베트남의 민족주의 운동을 주도한 인물은 판 보이 쩌우로 그는 일본의 근대화에 영향을 받아 1904년 베트남 유신회를 창설, 베트남 또한 일본과 마찬가지로 입헌군주정의 국가체제를 수립하고 프랑스에 대한 무력적 투쟁을 위해 외국의 무기를 적극 도입해야 한다는 운동을 추진하였다.또한 일본에 직접 방문하여 근대화 지식인들을 접하고 그들에게 베트남의 독립에 대한 적극적인 지지를 호소하였다.그러나 이와 같은 일련의 노력들은 프랑스 정부의 직접적인 탄압과 함께 당시 일본과 맺어져 있던 프랑스와 일본 간의 협정으로 인해 무산되고 말았으며 그는 베트남을 떠나 중국 광동으로 망명하는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광동으로 망명한 이후 판 보이 운동에 대한 강한 결속력을 가지게 만들어 줄 정치적 모델을 찾기 시작했다.그들에게 있어 가장 시급한 해결과제는 민족주의를 기반으로 한 해방운동에 있어 지속적이고 결집력 있는 조직의 기반을 마련하는 것이었다.1927년 11월 중국국민당의 영향을 받아 결성된 베트남국민당은 그와 같은 지식인들의 염원을 담은 첫 정치적 결사체였다.베트남 국민당은 근대교육을 받은 지식인들을 바탕으로 120개의 세포조직과 1500명의 지지 세력을 확보하였으며 이와 같은 조직적 기반을 통해 프랑스 관리에 대한 암살 및 테러를 감행하였으며 이외에 1930년 2월 북부 변방지역을 바탕으로 하는 대규모의 무장봉기를 계획하기도 하였다.그러나 베트남 국민당의 이 같은 일련의 행동들은 프랑스 식민정부에 의한 강한 탄압과 함께 점차 소멸되어 가기 시작하였으며 대대적인 무력공격으로 인하여 지도부 대부분이 체포되거나 사망하면서 와해되어 버리고 말았다.베트남 국민당은 민족주의 운동초기 아무런 밑바탕도 없었던 시절에 경험한 실패들을 바탕으로 근대적 교육을 받은 지식인들이 중심이 되어 비교적 체계적인 조직의 결속과 함께 정치적 투쟁의 성격을 띠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하지만 베트남 국민당 역시 민족운동 초기에 나타난 문제점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미약한 대중적 기반과 함께 소수중심의 민족주의 운동은 결코 이뤄질 수 없다는 교훈을 남겼으며 이후 등장할 새로운 정치세력들에게 많은 시사점을 남기며 역사의 한편으로 소멸되어 버렸다.(3) 민족주의 운동 후기초기에 비해 비교적 정치조직을 이룩한 중기의 영향을 받은 민족주의 운동 후기는 다양한 사상들의 등장과 함께 1954년 이룩된 베트남의 민족해방을 이끈 가장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하였다.1930년대 초 외국에서 유학을 한 새로운 지식인들의 귀환은 베트남에 존재하지 않던 새로운 정치사상들을 유입시키는 계기가 되었다.특히 오랜 기간 지속된 프랑스의 식민지배에서 오는 사회계층 분화현상은 당시 세계를 휩쓸고 있던 사회주의를 베트남 사회 전면에 확베트남의 최초 사회주의 단체인 베트남 혁명청년연합을 결성하였으며 회원들은 베트남의 광산, 공장, 농장 등에 취업하여 노동자와 농민들을 조직하고 일부는 교사로 취업하여 학생들에 대한 사회주의 이념의 확산에 주력하였다.호치민은 이와 같은 대중적 지지기반의 확산을 통해 기존의 민족주의 운동들이 가지고 있던 한계점을 보완하고 더 나아가 민족주의를 바탕으로 한 사회주의 국가건설의 초석을 다져나갔다.1930년 호치민을 위시로 한 베트남의 공산주의자들은 최초의 사회주의 정치결사체인 인도차이나 공산당을 결성하고 대내적 지지기반을 확대하는데 더욱 매진하였다.특히 이시기 베트남은 내부적 정세는 국제 쌀시장의 불안정에 따른 베트남 소작농들의 경제적 부담이 가중되고 있었으며 설상가상으로 30년대 초 전 세계를 강타한 경제 대공황으로 인하여 농민과 노동자 모두는 누구 하나를 가릴 것 없이 전반적인 한계 상황에 놓여있었다.이 같은 베트남 내부의 불안정한 사회정세는 국민들의 식민정부에 대한 불만을 더욱 가중시키는 원인으로 작용하기 시작하였으며 호치민을 중심으로 한 사회주의 세력은 이러한 상황을 놓치지 않고 자신들의 정치적 이념을 전국적으로 전파하는데 매우 유용한 계기로 이용하였다.1930년 5월 베트남 중부지역에서 노동자와 농민이 연합한 대규모 반 식민주의 시위가 발생하였다.이후 시위는 남부지역으로 까지 확산되어 1년 이상 지속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몇 군데 지역을 중심으로 16개의 사회주의 공동체가 건설되어 식민지 행정체제를 무너뜨리고 토지의 분배 및 경제개혁을 단행하였다.또한 혁명세력들은 학교의 건설과 함께 민병게릴라를 조직하고 각 계층의 연합조직을 구성하여 향후 다가올 프랑스에 대한 무력적 투쟁의 준비를 시작하였는데 이와 같은 사회주의 공동체의 건설은 기존 민족주의 운동이 가지지 못했던 대중적 기반을 확보하고 대중동원을 통한 식민정권을 대체하는 대안적 정치구조의 건설이라는 점에서 그 의미가 매우 중요했다.1939년 발발한 제2차 세계대전은 베트남의 민족주의 운동에 있어 새로운 전환점치 기구의 권력와해 현상을 가져오기 시작하였으며 호치민은 이 같은 정치적 상황을 적극이용, 민족해방노선의 기본방향을 수립하고 베트남혁명청년연합 및 기타 사회주의 세력들을 모두 규합하여 베트남독립연맹을 창설함으로써 확고한 대내적 통일전선 세력을 형성하였다.1945년 일본군이 연합군에 패배하자 영국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진주세력은 일본군의 무장을 해제시키는 동시에 기존의 권한 대부분을 프랑스에게 다시금 양도 하였다.그러나 프랑스의 영향력은 과거와 같이 베트남에서 막대한 힘을 발휘하지 못하였는데 이는 이미 베트남의 대부분 지역에서 사회주의 민족운동 세력에 의한 정부 장악이 손을 쓸 수 없는 상황으로 확산되었기 때문이었다.1945년 9월2일 호치민은 하노이 광장에서 군중집회의 개최와 동시에 베트남공화국의 독립을 공식 선포하였으며 민족해방과 사회주의 혁명의 성공을 전 세계에 알리는 동시에 잔존하고 있는 프랑스 식민지배 세력에 대한 선전포고를 감행하였다.이후 1946년 11월 하이퐁에서 양국의 충돌이 일어난 이래로 1954년 디엔 비 엔푸에서 프랑스 군이 항복할 때까지 전투는 지속되었으며 베트남은 마침내 긴 투쟁의 역사 끝에 자주적 독립의 기쁨을 쟁취하였다.[4] 성격(1) 부르주아 중심의 정치세력 부재베트남의 근대 민족주의가 보여주는 가장 중요한 성격 중 하나는 한국을 비롯한 대부분의 아시아 국가들에서 나타난 부르주아 중심의 우파적 정치세력이 전무하다는 점이다.이는 프랑스의 식민지배 정책과 큰 연관이 있는데 타 식민지배 국가가 내적으로 원주민의 경제적, 상업적 활동을 자유롭게 보장하고 허용한 것과 달리 프랑스는 자국민을 중심으로 하는 대지주 및 사업가들의 경제적 활동만을 적극 추친 함으로써 베트남 내에 원주민 출신의 부르주아 형성을 원척 적으로 차단하였다.결국 이와 같은 부르주아 계층의 부재는 베트남이 반식민지 운동을 펼치는데 있어서 비교적 이념적 갈등이나 계급적 투쟁에 의한 내부적 갈등을 불러오지 않음으로써 사회주의를 위시로 한 민족주의 운동의 활발한 전개를 가능케 있다.
    사회과학| 2014.01.27| 9페이지| 2,000원| 조회(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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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한, 주일미군 재배치와 기지이전에 대한 분석
    - 미군 기지이전 협상 -1. 주일 미군 기지이전 협상1-1. 배경주일미군의 재배치는 2000년 11월, 보수진영인 공화당 조지부시 대통령의 당선과 함께 계획, 실행된 전 세계 미군 재배치의 핵심적 일환으로 실행되었다.전통적으로 미국에서 군사력의 재조직, 전력체계 개편 및 군사문화 전반에 대한 검토는 군사변환 (Military Transformation) 개념을 통해 진행되어왔다. 그 일환으로 해외 및 국내의 미군 배치 태세 검토는 국방태세보고서 (GPR : Global Defense Posture Review) 및 통합 글로벌 국방태세 주둔전략 (IGPBS) 에 의거해 이루어 졌으며 미국 정부는 세계적 범위에서 이를 더욱 확대시키고자 하고 있다.)이 같은 해외주둔 미군의 재배치 전략은 변화하는 국제질서 속에서 국제분쟁이 발생하는 어느 지역에든 미국 군사력의 신속한 이동과 대응에 주목적을 두고 있었으며, 이는 2001년 발생한 9.11테러로 발발한 이라크, 아프간 지역 등의 테러와의 전쟁에 의해 더욱 가속화 되었다.이와 같은 핵심적 배경을 바탕으로 주일 미군기지 이전 협상의 구체적이고 중점적인 배경들을 살펴보면, 첫째, 탈냉전의 붕괴로 인한 안보위협 구도의 변화, 즉 소련의 붕괴와 경제발전을 매개로 급속히 동아시아 지역의 새로운 맹주로 떠오르고 있는 중국에 대한 군사적 견제의 필요성이 과거에 비해 더욱 확대 되었다고 볼 수 있다.이는 지상군 중심의 편재였던 기존 일본 오키나와 지역 주둔 미 해병대를 괌으로 전원 철수시키고, 대신, 신설되는 일본 항공자위대 통합사령부와 주일 미5공군 사령부, 13공군 사령부를 일본 요코타 지역으로 이전하여 항공전력 중심의 미일 군사정보 교류 확대의 새로운 편재로 개편하는데 그 중심 목적이 있다고 분석할 수 있다.둘째, 테러와의 전쟁 및 대량살상 무기 확산의 방지 등을 목적으로 하기 위한 차원으로, 이는 기존 일본 주둔 미 육군1군단을 자마기지로 이전, 자위대의 육, 해, 공 전력 사령부와 통합 운영하는 지위체계의 일원화를 바탕으 자국의 군사적 제약약화를 더욱 확대시키기 위해 일환으로 전시법체제인 “ 무력 공격 사태 법 ”, “ 자위대 법 및 방위청 직원 급여 법 ”, 또한 개정 법률안인 “ 안전보장회의 설치법의 개정법률 ” 등, 유사 3법을 의회에 제출하였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발생한 북한의 일본인 납치 시인에 대한 반발 여론을 바탕으로 자민당과 민주당의 타협에 따라 90%에 가까운 찬성 율로 의결되었다.)사실상 북한의 미사일 발사는 미 · 일 동맹의 강화와 일본 자국의 군사력 증강 등 군사노선을 꾀하는 일본 정부에 좋은 재료로 쓰였다. 자민당은 ‘북한위협’이라며 주장했고 언론과 국민감정을 이용해 스스로의 군사노선 언론과 국민의 반응은 한반도 식민지배 역사에 대한 국민적 반성의 결여를 기초로 하여 납치, 수상한 선박 등의 사건으로 부채질된 북한에 대한 불신감, 한반도 위기와 1998년 대포동 미사일 발사로 만들어진 북한 위협론 등이 복합적 · 동시적으로 작용하였다.)이외에도 중국 위협론은 일본경제가 장기 침체되고 중국의 경제는 급부상함에 따라 미국과 일본의 우려 또한 급부상하고 있다. 경제적인 면에서 중국제품의 수입과 일본 기업의 중국진출에 대한 우려와 안보적인 면에서 구소련 붕괴 후 동북아시아에 있어 패권국가의 행위자로 등장한 중국의 세력 강화는 일본에게 있어서 자국의 위협요인인 동시에 미일동맹의 중요한 구심점으로 작용하게 되었다.)결과적으로 일본의 오늘날 대미군사전략은 주일 미군기지 이전이라는 하나의 명제와 그 명제를 포함하고 있는 미일동맹 강화라는 중요한 대명제를 북한의 미사일 위협과 중국의 경제, 군사적 부상에 의한 위협론 등 동북아지역의 새로운 각종 군사안보불안 요인 등과의 복합적 상호작용을 통한 적극적인 응용을 통해 점진적으로 자국의 군사적 이익을 확대시켜 나가는 방향으로 추진되어 나가고 있다. 이는 지난 50년 가까이 법으로 제약되어 있던 자국의 방위 자율성에 대한 적극적 도전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일본방위 전략의 변화)1-5. 결과 양국의 협상결과미국과 일본은 정화 대상 기준이 ‘급박하고 실질적인 위험’으로 모호하게 규정돼 있는 점이 문제다.실제 정부는 2005년 6월부터 9월까지 SOFA 환경 분과위원회에서 미군과 이전기지의 오염정화 협상을 진행하면서 오염자인 미군이 국내 환경기준에 맞게 기지를 정화해 반환해야 한다고 요구했다.)그러나 미군은 양해각서를 내세워 자체 기준에 따라 오염을 제거한 뒤 기지를 반환했다. 반환 이후 발견된 오염 처리 문제는 한·미 간 합의조차 없어 정부가 대부분 환경오염 처리 비용을 떠안았다.이미 47개 반환기지의 정화 비용으로 1500여억 원이 투입됐고, 향후 반환될 미군기지의 정화 비용까지 고려하면 추가로 투입될 비용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전망이다. 반면 미군은 무슨 기준으로 어떻게 환경오염을 정화했고, 소요된 비용이 얼마인지 전혀 공개하지 않고 있다.)이 때문에 SOFA의 추상적인 내용을 구체적이고 실효성 있게 고쳐 주한미군 스스로 오염을 방지하고 제거하도록 강제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미군기지 고엽제 매립 파문으로 논란이 되고 있는 현재 정치권에서도 불평등한 SOFA 규정을 고치고, 미군기지에 대한 전면조사를 실시하라고 연일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전시작전통제권 환수한미양국은 2003년 7월 미래한미동맹정책구상(FOTA) 3차 회의에서 한미연합지휘관계연구를 의제 화하는 데 합의하고 그 해 11월부터 공동연구를 해왔다.)이후 2006년 8월, 노무현 대통령이 전시작전권을 환수하기로 방침을 정하자, 한나라당과 군 원로 등 보수진영의 반대로 논쟁이 있었으나, 2009년 10월 22일 한미안보연구회 국제회의(SCM)에서 당초 2012년 4월 12일자 환수를 재확인 하였다.)그러나 2010년 6월 27일, 이명박 대통령과 미국 오바마 대통령은 전시작전권 환수를 2015년 12월로 연기하기로 합의하였다. 대신 재 연기는 없는 것으로 하였고 전작 권 전환 시기 조정에 맞춰 필요한 실무 작업을 진행하도록 양국 국방장관에게 지시하기로 하였다.◇ 주한미군 감축한미 국방당국은 추구하고 있는 것이다.)아태 지역 내 미군 재배치는 21세기 평화 유지활동의 수행, 국제테러단체와 중국의 잠재력 위협 등에 대처하기 위한 목적으로 진행되고 있다.신속대응군의 구축, 동맹군과 군수물자의 태평양 연안지역에 집중배치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보병위주로, 일본의 오키나와와 괌에는 해군과 공군위주로 배치된 미군을 보다 긴밀하게 엮으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미국에서 볼 때 주한미군 재배치는 해외 주둔 미군 재배치 계획에 따라서 진행되는 모범적인 예이며, 미국 정부는 현재 진행하고 있는 상황에 대해서 만족하고 있는 바이다.미국은 주한미군이 이전부터 담당해온 북한위협만 대응하던 것에서 벗어나 지역안보를 위한 동맹의 형태로서 변화시키려는 목적으로 재배치를 진행하고 있다.육군위주로 편성된 주한미군의 수를 줄이며, 패트리어트 미사일 배치 등을 통해 실질적인 작전수행능력을 강화시켜나가고 있다. 한국에서는 미국과 정부차원에서 주한미군 감축과 재배치에 대해서 논의되기 이전에 한미 간에 연합 토지 관리계획(LPP)에 합의하였다.그리고 2003년도부터 미래 한미동맹정책구상(FOTA)에서부터 주한미군 재배치에 대해서 논의되기 시작하였다.)합의된 주한미군 재배치 계획은 2단계과정을 거쳐서 진행되게 된다. 1단계는 한강 이북에 위치한 미군을 캠프 케이시와 캠프 레드 클라우드 지역으로 통폐 하는 것이고, 2단계로 한강이북에 위치한 미군이 한강이남 지역으로 이전하는 것이다.)이에 따라서 한국에서는 용산 기지가 이전하게 되며, 용산 기지 이전과 LPP개정 협정에 따른 재배치가 완료되면 주한미군은 오산과 평택을 중심으로 한 중부권역과 대구?포항?부산을 중심으로 한 남부권역의 2개의 핵심 지역으로 통합하게 된다.용산 기지가 평택으로 옮겨갈 경우 미국은 평택 항과 근처의 오산 공군기지를 이용할 수 있어서 북한의 위협뿐 아니라 새로운 안보위협과 국제분쟁에 신속하게 대응할 수 있게 된다.미국은 1, 2차 아미티지 보고서에 따라 일본을 아시아 전략을 수행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국가로 분류하고 관련이 없는 사람이다. 당장 자기 땅을 내놓아야 하는 사람들은 농민들인데도 언론은 찬반양론으로 보도 할 뿐 이라는 것이다.또 평택이전을 기정사실화 하는 언론의 태도가 주민들이 결정된 사안에 대해 이해관계를 내세워 고집 피우는 것처럼 비춰지고 있다는 것이다.이렇게 한국 사회 내에서는 미국과 우호관계를 유지해야 한다는 인식과 미군주둔에 대해 어느 정도 인정한다는 인식이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인식은 평택주민들이 미군기지가 평택으로 이전하는 것에 대해서 국가시책이기 때문에 따라야 한다는 것에 영향을 준 것이다.국가 안보와 관련된 일이기 때문에 국가 시책에 순응하여야 한다는 것은 한국인들내에서 전반적인 성향이며(앞의 주한 미군과 미국에 대한 인식), 기지이전에 대해 해당하는 지역주민들도 거부할 수 없는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이러한 해당지역 주민들과 한국인 전반적인 인식에 영향을 준 요소로는 우리나라가 처한 국제적인 환경을 생각할 수 있다. 세계 유일의 분단국이며 핵무기 계발 의혹과 위험에 처한 우리나라의 현실은 미국과의 동맹관계를 중요시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게다가 2005년에는 북한의 핵보유 선언과 핵연료추출 등으로 인해 북한의 위험이 높아졌던 해이다. 따라서 독자적으로 북한의 핵을 다루기 어려운 한계가 있기에, 한국 국민들은 미국과의 관계에 더 우호적일 수 있는 환경이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한국과 일본의 기지이전 예정지 주민들의 기지이전 인식(반대여론)에서 나타나는 차이점이 설명될 수 있다.3-4. 전략공통점과 차이점한·미 전략 부문에서 한국의 전략은 용산 주둔 미군의 전면 철수 및 한강이남 재배치 결정이 양측의 협상 과정을 살펴볼 때 환국측이 열렬히 원하던 바는 아니었다.한국 정부는 용산 미군기지의 폐쇄가 정말로 한국 안보에 아무런 문제가 없도록 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노력과 희생이 필요하다. 군 복무기간 단축, 과학 군 건설을 통한 병력의 감축 등 낙관론을 전하고 있으며 미군이 수도권에서 담당했던 특정임무를 이양 받을 준비를 철저히 갖추려는 노력을 하고 있였다.)
    사회과학| 2012.03.29| 45페이지| 4,000원| 조회(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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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미 간 역사적 관계 연표
    한미관계(1982~2008)(1) 1882. 조미수호통상조약. (조선과 미국의 첫 공식적 국가조약 수립)(2) 1883. 보빙사 파미. (조선의 자주대외주권을 알리기와 미국의 국력 답습)(3) 1918. 파리 강화회의와 미국. (한국의 독립의지 표출과 미국의 입장)(4) 1945. 얄타/카이로/ 포츠담 회담과 미국. (독립에 대한 회담 시 미국의 입장)(5) 1945. 조선의 해방과 맥아더포고령. (해방 이후 전개된 불평등한 한미 관계)(6) 1946. 미소공동위원회와 미국. (해방 이후 한반도의 국가수립의 관계)(7) 1948. 한미원조협정. (미 정부 재정, 물질적 지원 후 한미경제기술원조협정으로 확대)(8) 1950. 애치슨라인과 한국전쟁.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변화와 한국전쟁의 발발관계)(9) 1950. 한국군 전시 작전 통제권. (한국전쟁 발발 이후 전작 권 이양~반환)(10) 1953. 한미상호방위조약과 한미동맹. (한미 간 정치, 군사적 동맹의 시작)(11) 1961. 5.16과 군사정부의 출현. (쿠데타와 정치적 변화 그리고 미국의 입장)(12) 1966. 베트남전 참전과 브라운 각서. (한미 간 월남파병 및 양국 군사관계 확대)(13) 1966. 한미행정협정. (한미 간 주한미군 주둔관계에 대한 지위협정)(14) 1969. 닉슨독트린과 한미갈등. (미군철수 문제와 자주국방의 확대)(15) 1974. 한미 원자력 협정. (원자력 연료 이용에 관한 상호 협정)(16) 1976. 한미합동군사훈련. (팀스피릿부터 키리졸브 까지)(17) 1979. 신군부와 한미관계. (12.12 및 광주진압과 미국의 대한정책)(18) 1982. 부산미국문화원 방화사건. (미국의 신군부 묵인과 한국 내 반미주의의 확산)(19) 1994. 제네바합의. (북핵문제에 대한 한미 양국의 외교적 관계 분석)(20) 1998. 햇볕정책과 한미관계. (김대중 정부의 대북 포용정책과 한미관계)
    사회과학| 2012.03.29| 2페이지| 2,000원| 조회(1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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