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성의 발현과 서울의 도시 공간’[목차]1. 머리말2. 근대식 건축의 등장과 도시 경관의 변화? 서양식 건축물의 등장? 절충주의 건축양식? 합리주의 건축양식? 도심과 외곽3. 경성京城의 공간구조? 행정구역의 재편? 도로계획4. 도시교통의 변화5. 경성京城의 소비 공간? 요릿집? 진고개 백화점? 카페, 극장6. 맺음말1. 머리말근대화 [近代化, modernization] : 정치·경제·사회·문화·가치관 등의 모든 면에서 전반적으로 구조적 변화가 진행되어 후진적인 상태에서 보다 향상된 생활조건을 조성해 가는 과정?근대성의 발현은 곧 근대화를 의미한다. 오늘날 근대화라는 말은 많은 곳에서 논의되고 있지만, 아직 그 개념규정이나 내용에 관해서 일치된 견해가 없다. 그래서 근대화라는 말은 경우에 따라서는 서구화, 공업화, 민주화, 합리화, 도시화 등 다의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렇듯 넓은, 그러나 명확히 정의되지 않은 의미를 지닌 근대화과정을 총체적으로 살핀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총체적인 방법대신 근대성의 발현, 곧 근대화를 상징적으로 가장 잘 보여주는 대상을 통해 근대화의 여러 단면들 중 서구화, 도시화 등에 해당하는 단면을 펼쳐보이고자 한다.조선왕조 500여년의 도읍을 지나 개혁, 침략, 저항, 건국의 중심이 되었던 도시. 근현대에 있어 일극중심이라는 말이 꼭 어울릴 정도로 한국의 모든 것이 집중되어 있는 도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가치관의 변화를 가장 먼저 느낄 수 있는 도시. 근대화를 가장 잘 보여줄 수 있는 대상은 바로 서울이다.근대식 건축의 등장, 도시 경관의 변화, 행정구역의 개편, 도로 계획, 도시 교통의 변화, 소비 문화 등을 통하여 서울이 근대도시로 이행하는 과정을 살펴봄으로써 근대화 과정의 한 단면을 살펴보도록 하겠다.2. 근대식 건축의 등장과 도시 경관의 변화이 장에서는 경성에 새롭게 등장한 근대식 건축물의 형태와 분포양상을 통해서 경성 지역의 입체적 형태 변화를 검토함으로써 도시의 경관의 변화와 공간구조의 특징을층빌딩들이 많이 세워지게 되는데, 그에 따라 경성의 도심과 주변 지역의 입체적 경관은 더욱더 차이가 날 수밖에 없었다. 대부분 도시 외곽의 풍경은 여전히 농촌적 분위기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일제시기 외곽지역에 들어선 건물들은 전반적으로 보면, 도심에서 볼 수 있는 거대한 석조건물. 이른바 ‘빌딩’들은 거의 없었다. 물론 학교나 관공서 같은 새로운 건축물이 이 지역들에도 들어선 것이 사실이었지만, 이러한 건물들이 도시 변두리의 경관을 주도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경성의 도시화가 진행됨에 따라, 도심에는 들어서기 어려운 여러 가지 도시 기반 시설물이 변두리 지역에 자리 잡게 되었다. 예를 들어 쓰레기, 분뇨 처리장이나, 화장장, 공동묘지, 도축장, 그리고 도시 빈민의 집단부락 등이 도심과는 다른, 또한 농촌지역과도 다른 ‘도시 변두리’만의 성격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도시빈민들은 몇몇 도시주변 지역에 집중되어 있었고, 토막촌은 변두리 지역을 상징하는 시설물이었다. 그리고 이전 혹은 신설되는 등 시기적으로 변동이 있었지만, 공동묘지가 있던 곳은 아현동, 신당리, 이태원 수철리, 미아리, 망우리 등이었고, 그 중 신당리와 아현리에는 화장장이 있었다. 또한 광희문 밖 독립문 밖의 아현동, 동대문 방면으로는 용두동에 쓰레기, 분뇨 처리장이 위치하였고, 처음에는 합동, 아현동, 현저동에 그리고 나중에는 숭인동과 영등포구 대방동에 도축장이 신설되어 운영되었다.) 이렇게 도심과는 현격히 다른 공간이 주변 지역에 형성됨으로써 두 지역이 만들어내는 대조적인 도시경관은 근대적 도시화의 명암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3. 경성京城의 공간구조? 행정구역의 재편경성의 행적구역 변화를 살펴보자면 한성부시대 서울은 행정적으로 관할 구역은 5부, 중부를 제외한 4부는 모두 성안(城內)지역과 성밖지역(城底十里)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따라서 한성부의 도시구조에서는 행정적 구분과 관계없이, 성안 구역이 중심지역, 성밖 구역은 주변지역에 해당되는 것이었다. 한일합방 직후 결국 1900년부터 1920년대까지 일제는 세종로와 종로에다 경성역-남대문-태평로, 남대문-남대문로-진고개로 이어지는 일본인 지역중심의 도로망을 기형적으로 덧붙여 놓은 것이다. 그 결과 부각된 도로가 바로 남대문로다. 이곳에 조선은행을 필두로 동일은행, 한성은행, 십팔은행 등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들어서면서 남대문로는 조선 제일의 상업 금융 중심지로 자리를 굳히게 된다. 총독부는 남촌에서 북촌 쪽의 세종로와 종로 쪽으로 파고드는 방사형 모양의 장곡천정길(오늘날 소공로)도 만들어 일본 상인들의 진출로를 도모하는 반면 전통의 큰 거리 종로가 있던 북촌 쪽은 1930년대가 되도록 도로 부설의 혜택에서 소외되었다. 남촌중심의 가로 개발정책은 조선 금융의 중심지였던 본정(명동)과 황금정(을지로)의 상업가로 형성 등으로 계속 확산되며 경성의 중심 도로망을 형성해나갔고 이런 가로 시스템은 해방 뒤에도 그대로 유지된 채 오늘에 이르고 있다.일제는 도시가로 정비 과정에서 눈에 보이지 않게 교묘한 전통 유산 말살 전략도 구사했다. 그들은 종묘. 광화문. 경희궁 등 많은 궁성과 전통 건물들의 상당 부분을 도로선에 포함시켜 남은 건물이나 시설물들이 반쪽이 된 채 쇠락하도록 방치하는 고사전략을 썼다. 특히 경성부 시구 개수사업에서는 중심가의 노폭 확장 못지않게 직선화에 초점을 맞추었다. 또한 일본은 서울의 독립운동 시위를 막기 위해 고단수의 정책 수단을 동원했다. 궁궐쪽길과 도심의 인파 집산지를 반듯한 도로로 블록화하면 조선인들의 불온행위를 감시하기도 쉽고 소요가 일어날 가능성이 적어질 것이란 치밀한 계산도 있었다.경성지역의 가로구조가 직선격자형으로 바뀌었음은 공간구조의 근대적인 성격을 보여주는 것으로) 경성의 도심부에서 시작하여, 주변으로 확대되어 갔다. 하지만 가로구조가 직선격자형이 되었다고 경성지역의 공간구조가 등질적인 형태를 띤 것은 아니었다. 형태상으로는 전통시대의 위계적 구조에서 벗어났지만 경성지역의 도시공간은 새로운 기준으로 분할되고 위계화 되었다.4. 도시교통의 변화새용되었지만, 청일전쟁 이후 일본인이 10대의 인력거로 점포를 차려놓고 영업을 하면서 차츰 일반에 보급되기 시작했다. 전차가 운행되기 전 자전거를 제외하고는 별다른 교통수단이 없었기에 급격히 늘어나게 되었고 전차가 생긴 이후에도 인력거는 좁은 골목까지 어디나 통행이 가능하다는 장점 때문에 많이 이용되었다. 전통적인 승용물이던 교자가 없어지고, 전차 이외에 탈 것이 없는 시기라 특히 봉건적인 습성에 젖어 있던 사람들이 인력거를 많이 이용하였다. 인력거가 제일 많았던 때는 1920년대 전반기였는데, 비록 자동차가 들어오기 시작했지만 그것이 아직 일반 승용물로는 자리잡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은 점차 도로가 정비 신설되고 자동차가 더욱 보급되면서 달라지기 시작해, 1920년대 중반 이후 급격히 줄어들어 1930년대 들어서서는 천대 이하가 되었다. 1920년대 말 인력거의 표준요금을 예로 들어보면, 경성역에서 파고다공원까지는 45전. 경성역에서 조선은행 앞까지 25전. 조선은행 앞에서 이화동 중앙시험소 앞에까지 55전, 총독부 앞 교차점에서 돈화문까지는 40전. 경성역에서 대학병원 앞에는 65전, 종로 네거리에서 용산역은 80전이었다. 하지만 눈, 비, 폭풍우가 있을 경우 표준요금에서 3할을 더 줘야했다. 따라서 날씨가 나쁘거나 혼자가 아닐 때는 인력거 보다 택시가 더 저렴했다고 볼 수 있다.특히 1931년 말부터 택시 요금이 시내균일 80전이 되자, 자동차 타기가 옛날의 인력거 타기보다 더한 다반의 일이 되면서 인력거의 이용은 많이 줄게 되었다. 그래서 1930년대 쯤 되어서 인력거는 극히 좁은 범위의 계급 예를 들어 요릿집에 불려가는 기생이나 왕진을 나가는 의사 등의 전용물이 되었다. 근대적 가로계획에 의해 도로가 정비되고, 그 길로 근대적인 차량이 늘어날수록 그들은 밀려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1920년대 중반 이후 특히 자동차가 많이 등장하면서 급속히 쇠퇴하였다.1920년대초까지 자전거)가 ‘모던’한 것으로 각광을 받았다면, 1920년대말에 들공연하는 화류계의 주인공, 바로 기생 때문이었다.기생은 궁중이나 관청에 소속되어 있던 관기에서 출발하여, 1894년 갑오개혁으로 인해 자유업으로 바뀌게 되었다. 이 때 경제적 자립능력이 없는 기생들은 포주 또는 수양부모에게 의탁을 했고, 다른 기생들은 그들로부터 독립하기도 했다.1920년대 말 기생들의 화대는 보통 처음 1시간은 1원 95전. 그 이후부터는 1시간당 1원 30전이었다.) 이 시기 쌀 한가마니가 약 5원 정도였던 것을 감안하면 당시로서는 큰 돈 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식민지 시기에는 돈만주면 몸까지 허락하는 기생이 허다했다고 한다.이렇게 경성의 명물 가운데 하나였던 종로의 요리집과 기생도 1930년대 카페와 바가 등장하면서 한풀 꺾이기 시작하여 태평양전쟁 무렵 대부분 문을 닫았다.[종로 대표 요릿집, 명월관])1890년 고종의 수랏간 내인(대한제국 마지막 연회 책임자)으로 있던 안순환(1871-1942)은 나라가 망하자 궁중 조리사와 기생들을 모아 종로거리(현 동아일보)에 연 조그마한 요리점이 ‘명월관’이었다. 이곳에서는 궁중 음식을 시중에 내놓았고 궁중에서나 볼 수 있는 가인과(歌人) 무인(舞人)들의 연극까지 곁들임으로써 당대 최고의 명사들을 단골로 확보하여 빠른 시간 안에 경성시내 최고의 고급 요릿집으로 거듭났다.[그림 ] 명월관에서 기생이 춤추는 모습이시기 시스템은 요릿집 안에서 기생이 사는 것이 아니고 권번이라는 기생조합에서 연락을 하면 기생들은 인력거를 타고 요리집에 출근해 손님접대를 하는 방식이었다. 당시는 인력거를 탄 기생을 힐끗거리는 것만으로도 서민들에게는 눈요기 거리였다. 그러나 명월관은 우산 쓴 기생행렬을 종로바닥에 풀어 놓는 어마어마한 광고를 하기까지 했다.명월관은 당대 유명인사들이 자주 출입하는 곳이었지만, 일반 서민들 사이에도 아주 유명한 요릿집 중 하나였다. 심지어는 명월관 기생의 노래를 들으면서 궁중요리 맛을 보기위해 논 팔고 집 팔아 서울에 올라오는 시골 부자들도 있었다고 한다.? 진고개 백화점[그림] 본정통어갔다.
헌팅턴, 문명의 충돌20040358 사학과 심보람1. 책 저술의 배경1991년 소련 연방 해체 이후의 국제 정세 변화를 중앙일보 기사를 통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통일과 분열」)세계지도 재편/민족갈등의 현장 집중 재조명92년 새해 소연방이 해체되면서 세계는 또 하나의 역사적 대전환을 맞고 있다. 지난 89년 동유럽사회주의 붕괴로 시작, 소연방 해체로까지 이어진 역사적 대변혁은 민족단위의 통일과 분열의 형태로 진전하고 있다. 동서독은 게르만민족의 대통일로 나타났으며 유고슬라비아는 민족 간 갈등이 연방해체로 발전하면서 연방 내 내전을 불러왔다. 74년 역사의 소연방은 이미 리투아니아 · 에스토니아 · 라트비아 3국이 완전 독립하고 우크라이나 등 슬라브계 공화국과 카자흐 등 이슬람계 공화국이 독립을 요구하거나 이미 연방에서 분리를 선언, 사실상 해체됐다.동유럽 국가들은 각국 내 소수민족 또는 다른 나라 거주 민족들의 통일 · 합병 요구로 민족분쟁의 소지를 안고 있으며 특히 체코슬로바키아는 체코와 슬로바키아의 민족 간 결별이 예상되고 있다. 동유럽 국가들의 사회주의 붕괴가 이 같은 민족 간 통일과 분열로 이어지면서 오랫동안 내연해온 서유럽 · 중동 · 중국은 물론, 아프리카 각국에서도 새로이 민족문제가 전면에 부상하고 있어 세계는 이제 이데올로기시대에서 민족주의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 따라서 세계는 사회·자본주의 이데올로기에 의한 냉전시대가 민족 간 갈등과 분쟁으로 인한 지역적 열전시대가 되고 있는 셈이다. 이 같은 세계의 대변혁은 같은 민족으로 분단된 한반도에도 그 여파가 닥치고 있으며 남? 북한간의 대화진척은 민족통일의 꿈에 부풀게 하고 있다. 세계사의 변화 속에 한민족통일의 가능성을 점치면서 한국이 처해있는 입지를 세계 민족 간 분쟁 내지 통일의 테두리 속에서 조명해본다.(생략)2. 문명들의 세계탈냉전 시대에 접어들면서 사상 최초로 세계 정치는 다극화, 다문명화 되었다. 그동안 인류의 역사는문명과 문명의 접촉이 이루어지지 않았거나, 간헐적)으로만 이루어지다가무너지고 정권도 왔다가 사라지지만 문명은 유지되며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이념적 격변의 와중에서도 살아남는다.헌팅턴은 위에서 언급한 문명의 주요 특성에 의거하여 세계를 중화, 일본, 힌두, 이슬람, 정교, 불교, 서구, 라틴아메리카, 아프리카의 아홉 문명으로 나누었다. 그리고 문명권간의 관계는 우호적이거나 교류와 협력을 추구하기보다는 상호 배타적인 갈등관계의 원리를 지니고 있으며 그러한 원칙하에 내부의 결속이 이루어진다고 말한다.다음으로 각 문명과 문명의 관계(상호작용)는 어떻게 변해왔는가?1) 조우문명이 처음 등장하고 3천 년이라는 기간 동안 문명들 사이의 접촉은 일부 예외를 제외하고는 전혀 없었거나 있었다 하더라도 제한적이며 간헐적이었다고 위에서 언급한 바 있다.(표1 참조) 그 이유는 지리적 거리와 그런 거리를 극복할 수 있는 운반 수단의 한계 때문에 각 문명들이 시공간적으로 분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몇 안 되는 문명의 접촉은 한 문명권의 사람들이 다른 문명권의 사람들을 정복하여 제거하거나 자기들 밑으로 복속시켰을 때 일어났다. 그러나 이런 식의 접촉은 짧은 기간 동안 폭력적으로 이루어 진 것이고, 어디까지나 간헐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었다.2) 격돌: 서구의 부상1500년에 이르러 유럽의 르네상스 문화는 안정기로 접어들었다. 또한 사회적 다원주의, 무역의 팽창, 기술의 발전은 세계 정치의 새 시대를 열어주었다. 문명과 문명 사이의 제한적, 간헐적 접촉은 비 서구 사회에 대한 서구의 지속적, 일방적, 압도적 영향력 행사로 성격이 바뀌었다. 바야흐로 서구의 정복 시기가 도래한 것이다. 이 때 부터 탈냉전 시대에 이르기까지 문명과 문명의 관계는 서구문명에 대한 다른 문명들의 종속으로 나타났다. 문명은 곧 서구화를 뜻하는 것이었으며, 서구는 세계의 대부분을 통제하거나 지배하였다.3) 교섭20세기에 들어와 문명 간의 관계는 한 문명이 나머지 모든 문명들에게 일방적으로 영향을 미치던 단계에서 벗어나 모든 문명들끼리의 다각적인 교섭이 이루어지는 단계로 접문화가 나오고 있다는 사실이다.⇒ 교역과 통신을 통한 사람들의 교류가 반드시 그들 사이의 유대감을 조성하는 것은 아니다.③ 문명화를 18세기 이후 전개되고 있는 광범위한 근대화 과정의 결과로 이해한다. 근대화는 과학기술에 의해 산업화, 도시화를 촉진시키고 결국 세계의 국가들을 하나의 방향으로 동질화 시켜준다는 것이다.⇒ 서구는 근대화 이전에도 서구일 뿐, 근대화가 곧 서구화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근대화라는 특징 외에도 서구만의 특성들은 많이 있고, 이것은 비 서구 국가들에게 녹아들지 못 하고 있다. 오히려 비 서구 국가들은 서구의 기술을 이용해 근대화를 추구 한 뒤 다시 자신들의 전통 문화를 옹호하는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는 추세다.다음으로 서구가 제공하는 보편문명(서구화, 근대화)에 대해 그동안 비 서구 국가들은 어떻게 반응했는지 살펴보도록 하자.1) 쇄국개화기 중국이나 우리나라의 경우를 들 수 있다. 그들은 외교 문을 굳게 닫고 무기구입과 같은 부분적인 근대화만을 허용했을 뿐 기독교를 포함한 서구사상의 유입을 철저하게 억제하였다.2) 케말주의(근대화+서구화)오스만제국의 폐허를 극복하기 위해 터키 공화국을 근대화하려 했던 케말 아타튜르크의 정책을 가리킨다. 케말주의란, 사회를 탈바꿈하기 위해 자신의 토착문화를 포기하고 모든 것을 서구의 것으로 탈바꿈 하고자 하는 것이다.4) 개량주의(근대화)개량주의적 방법은 위의 쇄국과 케말주의의 문제점들을 보완한 것이다. 개량주의자들은 기술적 발전은 추구하지만, 자신의 전통 사상은 바꾸려 하지 않는다. 자신들의 전통문화를 고수하면서 근대화를 이루려는 방식이다. 중국의 ‘중체서용(中體西用)’이나 우리나라의 ‘동도서기(東道西器)’와 같은 운동이 이에 상응한다.그렇다면 이제 탈냉전 시대에서는 비 서구 국가들이 서구화에 대해서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가?[표 ]비 서구 사회의 대응서구에 대항하든 아니든 결국 모든 사회는 발전을 이루어왔고 근대화를 이루기 위해 노력했다고 할 수 있다. 서구는 그 와중에 다른 주변국보다 먼저 근대화를20,290192025,447197112,806199312,711[표 ] 서구사회가 정치적으로지배하는 면적의 변화 1900-1993⇒ 옆의 [표 3]을 보면 알 수 있듯이 1920년 서구는 전 세계 육지의 절반에 가까운 2550만 평방마일을 다스렸다. 그러나 1993년 서구가 지배하는 영토는 그 절반 수준인 1270만 평방마일로 줄어들었다.중화1,340,900이슬람927,600힌두915,800서구805,400라틴아메리카507,500아프리카392,100정교261,300일본124,700[표 ] 세계의 주요 문명에 들어가는나라들의 인구, 1993년(단위 천명)⇒ 서구인은 수적으로 보아 세계 인구에서 갈수록 소수 집단으로 떨어지고 있다.([표 4]참조) 또한 서구문명이 정치적으로 지배하는 세계 인구비중도 1900년 45%에서 1993년 13%로 하락하였다.⇒1950년대 세계 총 생산의 64%를 차지하던 서구의 생산량은 1980년 49%로 하락하였다. 반면 점차 중국, 인도, 일본 등의 비 서구 국가 경제력은 계속 성장할 것으로 예상된다.⇒NATO)의 군사비 지출은 1985-1993년간 약 10% 감소한 반면 동아시아의 군사비 지출은 50%나 늘었다.2) 탈 서구화 현상이와 함께 탈 서구화 현상(비 서구 문화의 부활)이 두드러졌다. 과거의 역사를 보면 한 문명의 힘이 팽창하면 동시에 문화가 융성하였고 그 문명은 막강한 힘으로 자신의 문화를 다른 사회에 확산 시켰다. 또 경제력과 군사력이 단단해지면 자신감과 자부심도 올라가 자기 문화에 대한 상대적 우위에 대해서 굳은 믿음을 갖게 된다. 비 서구 사회는 눈부신 경제 발전을 통해서 자기네 문화를 토대로 막강한 문명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이제 서구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던 시대를 떠나 복수의 다양한 문명들이 교류하고 경쟁하고 공존하고 화해하는 시대로 진입하고 있다.20세기의 합리주의, 실용주의노선을 물리치고 미신, 주술, 종교가 다시 부상했다. 비 서구 사회는 자신들 공동체의 전통종교로 돌아가 거기서 새로운 정통성과 의미의 동질성이다.⇒ NATO, WEU)는 공통된 문화의 소산인 반면에 OSCE)는 상이한 문화들로 인하여 활동범위에 한계를 가졌다.⇒ 문화적으로 비슷한 EU는 관세연합을 성공적으로 이뤘지만, 복수문명으로 이루어진 ASEAN은 경제통합에 성공하지 못했다.헌팅턴이 제시하는 새로운 문명구조탈냉전 시대의 국가들은 관계를 맺는 성질에 따라 소속국, 핵심국, 고립국, 단절국, 분열국으로 나눌 수 있다1) 핵심국과 소속국핵심국은 그 문명 안에서 가장 막강한 힘을 가진 문화적 중심 국가를 말한다. 그 안에 자리 잡고 있는 소속국들은 자기 문화의 근원을 핵심국과 동일시하는 경향을 보인다.2) 고립국고립국은 다른 나라들과의 문화적 동질성이 결여되어 있다. 에티오피아는 고립국의 대표적인 예로서 인접한 이슬람 국가들과의 종교적 차이 때문에 문화적으로 고립되어 있다. 그리고 일본은 일본 문명의 유일한 국가이자 핵심국이기에 고립국이라 할 수 있다.3) 단절국문명과 문명사이의 단층선에 위치한 단절국은 국가의 통일성을 유지하는데 어려움을 겪는다. 기독교와 이슬람의 대립이 격심한 아프리카의 수단, 나이지리아, 탄자니아, 케냐가 이에 속하고, 이슬람과 힌두의 대립이 있는 인도와 이슬람과 기독교의 대립이 있는 필리핀 등등이 있다.4) 분열국분열국은 한 문명 안에서 지배력을 가진 문화가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그 지도자는 다른 문명으로 옮겨가기를 바라는 국가다. 분열국의 국민들은 자신들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일치된 의견을 보이지만 어떤 문명에 들어가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일치된 합의를 도출해내지 못한다. 러시아는 서구에 속해있는지, 아니면 유라시아 정교문명권에 있는지 결정을 내리지 못한 채 분열국으로 남아있다.탈냉전 시대에서 각 문명의 핵심국들은 전 시대의 두 강대국을 밀어내고 새로운 세계정치판도의 중요한 축으로 부상한다. 이미 언급한 것처럼 비슷한 문화를 가진 나라들은 뭉치려는 경향이 있고 문화적 동질성이 결여된 국가들은 견제한다. 이것은 핵심국들에게도 적용 된다. 핵심국은 문화적으로 비슷한 집단을 이다.
Rene Descartes사학과 심보람1562년-위그노전쟁(~1598)1565년-에스파냐, 필리핀 점령1581년-네덜란드, 독립선언1582년-그레고리력(현재의 태양력) 제정1582년-갈릴레이, 중력의 법칙 발견1588년-영국 해군, 에스파냐 무적함대 격파1598년-낭트칙령1600년-영국, 동인도회사 설립(~1858)1603년-영국, 스튜어트왕가 성립(~1714)1603년-일본, 에도막부 성립(~1867)1613년-로마노프왕조 성립(~1917)1618년-30년전쟁(~1648) 시작1620년-영국의 청교도, 신대륙으로 이주1628년-영국, 권리청원 제출1632년-갈릴레이, 지동설 주장1640년-영국, 청교도혁명(~1660)1644년-크롬웰의 철기대, 왕당군 격파1648년-베스트팔렌조약 체결1649년-영국, 공화정(~1660)1651년-크롬웰, 항해조례 발표1665년-뉴턴, 만유인력의 법칙 발견1688년-영국, 명예혁명르네 데카르트는 스콜라 철학이 기울고 계몽주의가 시작되는 시기에 살았다. 그의 청년 시절에는 렌즈와 망원경이 새롭게 발명되어 사고의 전환이 이루어졌다. 데카르트와 같은 시대를 산 갈릴레오 (1564-1642)는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돈다고 주장한 코페르니쿠스의 견해를 입증했다. 데카르트 역시 1629년부터 태양이 중심에 있음을 연구하고 있었지만, 갈릴레오가 이탈리아에서 교회와 갈등을 겪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는 그 주제에 대한 저작 발표 계획을 취소했다고 한다.성장배경과 교육데카르트는 1596년 3월 31일 프랑스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조아섕은 렌 지방의 브르타뉴) 의회 의원이었으며, 어머니는 그가 1세 때 죽었다. (어머니가 물려준 재산, 데카르트가 프랑스에 있을 때 아버지의 유산덕분에 그는 일할 필요가 없는 부자가 되었다.) 그의 가족은 로마 가톨릭교를 믿었지만 가족의 연고지인 푸아투 지방은 위그노교)의 본거지였다. 10살인 1606년 라 플레슈 예수회 대학에 입학하여 8년 동안 공부하였고, 1614년 푸아티에 대학에 가서 1616년 법학 학위를 땄다.(당시 푸아티에서는 위그노교도들이 루이 13세)에게 격렬히 반항하고 있었다.)1618년 네덜란드 브레다로 가서 군대에 귀족 지원병으로 입대하였고, 15개월 동안 수학과 군사건축학을 배웠다. 22살의 데카르트는 여기서 의사 이사크 베크만을 만났으며 그 관계는 계속 이어졌다. 이 시기에 베크만의 격려로 수학을 공부하고 「음악에 관한 소고 Musicae Compendium」(1618 저술, 사후 출판)를 썼다.(베크만과의 심도 있는 토론과 논쟁은 수학적이었고, 베크만 덕분에 게으름에서 깨어나 다시금 생각하게 되었다고 말했다.)그는 1619-28년에 북·서 유럽을 여행했다. 보헤미아에 머물렀던 1619년에는 인간의 능력에 관한 지식을 추구하는 과학자 및 철학자가 되려는 포부를 지니게 되었다. (다른 책에서는 데카르트가 난로 불을 지핀 방에서 하나의 환영을 보고 세 차례 연속적으로 꿈을 꾸었고, 이것을 계기로 그는 배움과 철학에 인생을 바치기로 마음먹었다고 한다. 그는 그 후 수년 동안 유럽 전역을 방랑하며 새로운 관념과 경험을 찾아 나섰다고 서술한다.) 또 그는 자연에 대한 식도 검토했으며, 1621년에 잠깐 군복무를 하기도 했다가 1622년 프랑스로 돌아왔다.데카르트는 1626년부터 1628년까지 파리에서 지내면서 자신의 관념을 발전시킬 시간과 친구)들을 얻었다. 특히 메르센은 라 플레슈 학교에서 알게 된 사람이다. 그는 수 백 명의 학자 · 저술가 · 수학자 · 과학자 등과 연락하는 정보통이었다. 덕분에 데카르트는 새로운 소식이나 발전의 흐름에 뒤지지 않을 수 있었고, 또 데카르트가 당시 무신론적인 자유사상가들을 공격했을 때 메르센은 그를 변호해주었다.데카르트는 1628년 네덜란드로 옮겨갔다. 그는 암스테르담에서 하녀인 엘렌의 사이에서 딸 프랑신을 얻었으나, 다섯 살에 죽었다. 그는 네덜란드에서 거의 은둔생활을 하였으며, 모든 서신은 메르센을 통해 전해 받았다고 한다. 그는 네덜란드의 개방적이고 너그러운 사회 분이기속에서 방법서설(1637), 성찰(1461), 철학의 원리(1644) 등의 위대한 저작을 완성했고, 거의 말년까지 네덜란드에서 지냈다.데카르트는 은거 생활을 하면서, 점차 동시대의 논쟁으로부터 점점 물러나 윤리적인 문제들을 생각했다. 그는 수 년 동안 편지를 주고받았던 스웨덴의 크리스티나 여왕을 가르치기 위해 스웨덴에서 지내던 중 1650년 폐렴으로 사망했다. 새벽 5시부터 시작되는 수업과 추위로 인해 폐렴에 걸린 탓이었다.주요저서1. 「세계 Le Monde」데카르트는 1633년 코페르니쿠스적 관점에서 우주론과 물리학을 다룬 「세계 Le Monde」(사후 출판)를 출판하려 했으나 이탈리아 천문학자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지동설을 주장하여 유죄판결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서, 훗날 교회가 유죄판결을 철회하면 출판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갖고 출판을 자제했다. 교회가 두려웠지만, 한편으로는 자신의 물리학이 언젠가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물리학을 대체할 것이라는 희망도 품었다.2. 「방법서설 Discours de la methode」1637년 「방법서설 Discours de la methode」을 출판했다. 이 책은 라틴어로 쓰지 않은 최초의 근대철학서이다. 「방법서설」의 각 부를 이루고 있는 세 논문에서 데카르트는 과학적 진리를 찾기 위한 이성의 사용법을 예증했다. “광학”에서는 굴절법칙을, “기상학”에서는 무지개를 설명했으며, “기하학”에서는 대수방정식으로 기하학적 도형을 표현하여 지금까지 풀 수 없었던 많은 문제를 푸는 방법인 해석기하학을 제시했다.그는 「방법서설」과 「정신지도 규칙 Regulae ad Directionem Ingenii」(1628 저술, 사후 출판)에서 데카르트는 추론의 4가지 규칙을 제시했다.1) 자명하지 않다면 그 어떤 것도 승인하지 말 것2) 문제를 가장 단순한 부분들로 세분할 것3) 단순한 것에서 복잡한 것으로 나아가며 문제를 풀 것4) 추론을 다시 검토할 것 등이다.3. 「제일철학에 관한 성찰」1641년 데카르트는 「제일철학에 관한 성찰」을 라틴어로 출판했다. 책이 나오기 전 메르센은 얀센주의 철학자이자 신학자 앙투안 아르노, 영국 철학자 토머스 홉스, 에피쿠로스주의 원자론자 가생디 등에게 책을 보냈으며 그들의 비평을 모아 「반론과 응답Objectiones Septimae」(1642)을 출판했다. 「반론과 응답」은 독단이 지배하던 시대에 철학과 과학에서 공동 토의를 보여주는 상징이었다.
「아미스타드」20040358 사학과 심보람지나간 과거의 상처를 들춰내는 영화 「아미스타드」, 그것이 상처받은 자들을 치유해줬는지는 모르겠지만 잔인했던 과거를 많은 사람들에게 각인 시키는 데는 한 몫 한 것 같다. 노예제,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미국 노예제에 대해서 나는 전혀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러했을 것이다. 적어도 십년간 미국 전체를 혼란으로 몰아넣은 전쟁과, 그 후유증이 있었음에도 말이다. 영화 중간 중간에 등장하는 잔인하기 그지없는 미국인들의 행동을 보고 동정심이 발동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을까. 관심 밖, 생각 밖에 있던 사건들을 내 관심의 테두리로 밀어 넣기 까지 영화 3시간이면 충분한 시간이었다.‘노예는 사람이 아니다. 소유물이며 재산이다’라는 사고방식을 2006년의 시각으로는 이해할 수 없지만, 그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150년 전의 이야기 밖에 되지 않는다. 놀랍게도 150년 전의 시각에서 노예제는 당연한 것이었다. 고대국가 시절의 이야기도, 중세시대의 이야기도 아닌, 우리와 150년 밖에 떨어지지 않은 이야기라는 사실이 경악스럽다. 적어도 나의 증조할아버지 세대에 일어난 일이라고 생각하면 더욱 소름 돋는 사실이다.요즘 들어 자주하는 생각은 ‘관용’에 대한 생각이다. 그것은 내가 볼테르의 「관용론」을 읽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볼테르의 책 처음에 보면 장 칼라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는 당시의 광신도들 때문에 억울한 죽음을 맞이한 인물이다. 장 칼라스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시대와 신앙은 모두 당시의 진리이다. 노예제가 존재했던 시대의 진리는 바로 노예제인 것이다. 반면 우리 사회도 지금은 진리로 여기는 것들이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이해할 수 없는 논리가 되어버리진 않을까. 우리가 받아들일 수 없는 문제들, 동성애와 같은 민감한 문제들에 대해 우리는 관용을 베풀어야 하는 것일까, 그 관용은 어디까지일까, 하는 생각들 말이다. 과거에 벌어졌던, 지금의 사고로는 절대 이해할 수 없었던 사건들을 접할 때면 항상 이런 생각들에 빠져 헤어 나올 수 없게 된다.인터넷 신문 사이트에 들어가 ‘노예제’라는 단어를 검색해보면 노예제, 그것과 관련된 사건들에 대해서 ‘사과한다. 혹은 사과 하라’하는 식의 기사들을 많이 찾을 수 있다. 미국이 지금의 영예를 얻기 위해 저질렀던 많은 죄들이 지금에 와서 미국을 억압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 사회 안에서 노예제의 진실 밝히기를 시도했던 스필버그의 용기는 실로 놀랍다. 또한 그 만큼 우리 사회가 이완되었다는 뜻으로도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수많은 영화 관람객들(그것이 어느 나라 사람이건)에게 미국이 저질렀던 과거의 범죄들을 고발하면서, 노예제는 다시금 사회 이슈가 되었다. 이것이 스필버그의 힘일까.
제르미날 감상문20040358 심보람「제르미날」은 헐리우드식 스토리에 익숙한 대한민국 국민의 정서에는 맞지 않는 영화였다. 이 영화를 본 적은 없었지만, 행복한 결말은 아닐 것이라는 것을 느낌으로 알 수 있었다. 영화 시작부터 끝까지 진한 흑색이 스크린을 가득 메웠다. 사람들이 입고 있는 옷 색깔 뿐 아니라 맑은 날도 없었고 모두 질퍽질퍽 거리는 음침한 배경이었다. 영화의 ‘블랙이미지’는 백 마디 말을 하는 것보다 당시의 사회를 잘 묘사하고 있었다.제르미날과 같이 이야기 하고 싶은 영화가 있는데, 그것은 내가 고등학교 때 본 「빌리엘리어트」이다. 이는 발레리나를 꿈꾸는 ‘소년’의 이야기다. 제르미날과 약간 시간차가 있기는 하지만 ‘광부’와 ‘광부의 아들’이 주인공 이라는 점에서 함께 이야기 하고 싶다. 너무 오래전에 본 영화라 잘 기억나지 않는다. 대강 기억나는 것은 빌리의 아버지는 광부였고, 모두들 회사의 착취에 반대하기 위해 집단 파업을 했지만, 그는 아들에게 발레를 계속 가르치기 위해 파업에 참여하지 않고 일을 나가 동료들의 비난을 받았다. 빌리엘리어트는 발레를 꿈꾸는 소년이라는 단순한 주제이지만, 그 안에 당시 영국의 사회적 배경이 아주 잘 드러나 있었다. 마지막 빌리가 국립발레단이 되어 공연을 하는 모습은 아직도 가슴을 뜨겁게 만든다. 제르미날은 오직 암울한 광부의 삶, 그것만을 이야기 하고자 한 영화였다면, 빌리엘리어트는 좀더 복잡하고 많은 것을 이야기 하고, 관객을 충분히 감동 시키는 영화이다. 나는 빌리엘리어트에게 더 많은 점수를 주고 싶다.영화 중간에 파업 대표자들이 고용주에게 찾아가 협상을 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때 사장은 이야기한다. “프랑스의 많은 회사들이 부도가 났다. 회사가 살아야 너희들도 산다. 너희들이 싸워야 할 것은 내가 아니라 다른 경쟁회사들이다.” 사실 그렇다. 나에게 임금을 주는 회사가 아닌, 다른 경쟁회사를 없애기 위해 그들은 투쟁해야 한다. 그렇다면 그들은 매일 굶주리더라도, 임금을 깎이더라도 더 먼 미래를 위해 다른 회사와 경쟁을 해야 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고용주는 다른 경쟁회사들이 계속 치고 올라오는 상황에서, 부도의 위기에서 인도주의를 베풀어 노동자들의 배를 채워줘야 하는 것일까?거울에 비친 유럽을 읽으면서 모든 것에 포스트-모더니즘적 해석을 하기 시작했다. 모든 것이든 진리는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드는 생각은 ‘부르주아는 과연 착취하기만 하였는가?’이다. 오늘의 노동조합, 특히 대기업 노동조합은 그야말로 깡패집단이다. 19세기 노동자들이 ‘빵을 달라’외쳤다면, 오늘의 노동자들은 ‘더 많은 휴가를 달라. 여가를 위해 임금을 높여 달라’외친다. 노동조합 뿐 아니다. 우리나라 사람들 대부분은 대기업의 사회 환원을 당연하게 생각한다. 우리 국민들이 많이 사랑을 해주었기 때문에 대기업이 번 돈의 일부는 자신들의 몫이라는 생각이다. 이런 사회 분위기는 우리 기업들이 한국을 벗어나 세계의 기업과 경쟁을 할 때 큰 손해로 작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