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공화국 정부의주요 특징과 선거사례 분석- 목 차 -1. 제 5공화국 정치체제의 성립과정1.1 사회 ? 경제적 상황1.2 제 5공화국 등장과정의 정치변동2. 제 5공화국의 전개과정2.1 제 5공화국 체제정비기2.2 제 5공화국의 위기2.3 제 5공화국의 단절과 연속3. 제 5공화국의 선거사례 분석3.1 대통령 선거3.2 국회의원 선거1. 제 5공화국 정치체제의 성립과정1.1 사회 ? 경제적 상황1970년대를 국가권력의 남용과 권위주의적 통치로 얼룩지게 했던 유신체제는 10?26사건으로 인해 붕괴되었다. 그러나 유신체제의 붕괴는 체제의 완전한 청산을 의미하지는 못했다. 당시 유신체제의 붕괴는 또 다른 독재 권력의 등장 가능성을 내재적으로 담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광주민주화운동’을 진압하고 제 5공화국이 들어서기까지의 시기는 지배세력과 민중 간의 치열한 정치 대립의 국면이었다고 할 수 있다.이러한 정치형태 등장의 사회경제적 근거는 한국자본주의의 침체와 성장이었다. 1980년대 한국경제는 과거와 매우 다른 조건들에 부딪쳤다. 60, 70년대에 걸쳐 급속한 양적 성장과정에서 누적되어온 많은 구조적인 문제들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국제적인 여건도 새롭게 변화하였다. 제2차 석유파동과 정치 불안정, 농작물 흉작으로 한국경제는 마이너스 성장을 면치 못했으며 국제수지악화, 고물가라는 문제에 빠졌다.대내외적으로 경제침체상황이 반복되자 과거와 같은 성장 위주의 정책을 고수하기 어려웠고 물가를 잡지 않고는 성장과 경기회복에 문제를 초래하게 될 상황이었다. 이 때문에 정부는 물가안정을 최대목표로 설정하고 성장 위주에서 안정 우선으로 내실에 중점을 두는 것으로 방향을 잡았다.5공화국의 ‘안정화 정책’은 대내외적 경제상황에 맞게 설정된 방향이었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대외 지향적 경제정책의 포기를 의미하지는 않았다. 안정화 정책은 중화학공업 투자조성, 부실기업 정리등을 통해 국내적으로 독점적인 대기업에 특혜를 주면서 대외지향성을 강화하겠다는 것이었다. 때문에 경제 일반은 고금리와 배 등의 강경조치를 취함으로써 지배세력의 공세를 시작하였다. 또한 유신헌법의 철폐와 민주헌법의 개정문제 역시 유신국회에서의 여 ? 야 모두의 헌법관계심의특별위원회를 본회의 만장일치로 통과시킴으로써 제도권정치의 틀 내에서 처리하고자 하는 의지를 분명이 하였다. 그리하여 12월 6일 통일주체국민회의가 최규하를 10대 대통령으로 선출함으로써(단독입후보, 찬성 2,549표, 무효 84표) 거국민주내각의 구성이라는 국민적 요구에 대한 반대의 의사를 분명히 밝혔다.당시 정국방향의 열쇠는 군부가 쥐고 있었다. 군부를 어떤 성격의 집단이 장악하는가에 따라 민주화를 향한 순조로운 정치일정의 가능성이 판가름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12?12사태가 발생하였다. 12?12로 인해 군부는 전두환의 신군부에게 넘어갔으며, 5?17과 국보위설치, 최규하 대통령의 하야와 전두환의 대통령 취임으로 이어지는 10개원에 걸친 정권찬탈의 첫 단계였다. 한편 정치권은 공화당 및 범여권에서 친여성향의 신당창당 움직임과 함께 ‘이원집정부제’를 검토하기 시작하였으며, 헌법개헌의 문제 역시 국회가 아니라 현행헌법에 의해 정부가 주도하여 대통령이 발의하는 형식으로 진행시킬 것임이 공표되었다. 정부차원에서 입헌독재를 통해 행정부의 권력이 집중됨을 의미하는 것이다.신군부는 12?12사태 이후 1980년 2월 9일 계엄사령부 발표로 정치발전이 우리의 안보태세를 약화시켜서는 안 되며 정치과열현상은 결코 용납될 수 없는 것이라고 강조함으로써 정치적 입장을 최초로 표명하였다. 그 후 신군부의 지휘자인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중앙정보부장서리의 자격으로 국무회의에 참석함으로써 내각을 직접적으로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이에 따라 국민의 저항은 더욱 거세져 갔다. 2월부터의 학원민주화운동과 노동운동의 전개는 5월 2일의 서울대집회와 고려대시위를 계기로 하여 정치투쟁으로 전환되었다. 비상계엄철폐, 이원집정부제구상철회, 노동3권보장, 언론자유보장 등의 구호가 집약적으로 드러내듯이 민주화운동세력은 5월에 들어서면서 그간의 침묵과 정치 협력체제에 돌입하게 되었다.한편, 경제적 측면에서는 대외개방과 그에 따른 부차적인 마찰을 수반하면서도 일관되게 종속성이 심화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당시 외국기업의 대한 투자문호를 확대하고 일부 수입품에 대한 수입자유화를 발표하기도 했다. 그러나 자본시장과 상품시장의 개방에도 불구하고 국제독점자본에 대한 개방요구는 지속적으로 상승하였으며 외채관리에 대한 더욱 신중하고 구체적인 방안이 요구되었다.제 5공화국의 대외관계가 대체로 종속성의 심화라는 경향으로 진행되는 반면, 국내 민주화운동세력은 광주민주화운동 이후 산발적인 형태이지만 점차로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였다. 이에 따라 전통적인 한미관계 인식에 대한 전면적인 재고를 요청하고 학생운동도 점차 활성화시키기에 도입했다. 학생들은 본격적으로 83년 9월 30일 민주화운동청년연합을 창립하여 사회운동단체가 공개적으로 활동을 시작하는 정치국면의 변화를 추동하기도 했다.여기에 더하여 83년 5월 18일부터 6월 9일에 결쳐 진행된 20여일간의 김영삼의 단식은 구속인사의 전면석방, 전면해금, 해직교수 ? 근로자 ? 제적학생의 복교, 복직, 복권, 언론자유, 개헌 및 국가보위 입법회의 제정 법률의 개폐 등을 내세우면서 정치권에 상당한 충격을 주게 되었으며 재야정치활동에 중요한 근거를 마련하였다. 또한 83년 민주화후진협의회(민추협)를 결성하여 반정부 재야 세력의 구심체가 등장하기도 했다.이와 같이 81년 3?4월~83년말 ? 84년초 사이의 시기는 제 5공화국이 체제정비를 시도한 시기였으며 국내외 지배세력의 정치적 요구수용의 신속하고 구체적인 진행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러나 반면 국민대중의 체제내화와 민주화운동세력에 대한 수용에는 근본적인 한계를 드러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2.2 제 5공화국의 위기 (1984년 중반 ~ 86년말)광주민주화운동을 딛고 일어선 국민대중의 정치역량은 점차 그 성장속도를 빨리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5공화국 정부는 민주화운동에 대한 대응과 국민 대중에 대한 통제방식을 둘러싸고 최초의 정치적화국정부에게 보다 강력한 대응을 촉발시켰다. 85년 5월 현재까지 시위진압으로 동원된 전투경찰이 연 184만 명, 최루탄사용액이 29억여 원에 이르렀던 것은 이러한 상황을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이러한 강경적 대응에도 불구하고 신민당은 86년 3월부터 개헌추진위 각 지부 결성식을 통해 직선제 개헌쟁취투쟁을 대중 집회의 형식으로 추진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35만 명의 시민이 참가하여 직선제개헌쟁취투쟁의 대중성을 크게 고양시켰다. 또한 지식인 ? 종교인 ? 교수들의 시국성명서등이 동원되어 당위성을 대중적으로 선전하는데 커다란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 시기의 개헌공방의 주요한 장은 정부와 민주화운동세력 간의 공방이었다. 당시 정부는 민주화운동세력에 대한 대량구속을 매개로 인권상황의 악화를 유발하고 물리력의 일반적 사용만을 능사로 정권의 도덕성을 근본적으로 뒤흔들게까지 되었다.2.3 제 5공화국의 단절과 연속 (1987년 ~ 88년 4?46)1987년 5공화국은 민주화운동세력에 대한 제압과 그 과정에서의 고문시비는 끊이지 않았다. 87년 1월 15일 박종철 학생의 사망이 신문에 처음 보도되었다. 사망원인은 일명 쇼크사로 밝혀졌다. 고문시비에 대한 사건의 조작과 은폐였던 것이다. 이에 2월 7일 ‘고 박종철군 추모대회’가 열리고 6만여 시민, 학생들에 의해 ‘고문철폐’, ‘독재타도’, ‘민주쟁취’를 대중적 구호로 정착시키면서 성공적으로 수행되었다.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은 5공화국의 도덕성에 치명타를 입혔다. 그로 인한 민주화 운동세력의 위축이라는 정치상황을 역전시키는 데 결정적인 계기로 작용하였다. 다시 한 번 민주개헌의 대중적 요구는 구심력을 갖기 시작한 것이다.박종철 고문치사 사건과 더불어 1987년의 전국적인 항쟁을 불러온 계기가 된 것은 4?13호헌 조치였다. 헌법 개정을 둘러싸고 야당의 직선제 주장과 여당의 내각제 주장이 팽팽히 맞서고 있는 가운데, 1986년 12월 이른바 ‘이민우 구상’이 터졌다. 정치공작의 냄새가 나는 사건으로 양김은 이민우 총재를 물러나라고 대통령선거, 88년 2월의 정부이양, 대통령선거법개정과 시국관련사범의 석방, 언론자유창달 등을 포함한 노태우 민정당대표의 시국수습방안 8개항 선언은 당시의 정치상황이 위기적이었던 만큼 극적인 효과를 가져왔다. 이러한 선언은 제도정치권의 정치를 재개함으로써 제도권 내 정치세력들의 입지를 보장해주고 다시 한 번 정권연장을 도모하겠다는 주장을 주요한 내용의 본질적 성격보다도 야권과 민주화운동세력들의 승리가 확실히 보장된 5공화국의 항복 선언으로 받아들여지면서 국민대다수의 지지를 획득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6?29는 6월 항쟁을 종식시키는데 성공하였을 뿐만 아니라 6월 항쟁에 결집했던 국민대중 대다수를 체제 내화시키는 데도 대단한 위력을 발휘했다. 그러나 6월 항쟁과 6?29선언은 단순한 직선제쟁취의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6?29에도 불구하고 더욱 본질적으로 대중의 민주화 열기가 시작되었다.1987년 8월 17일, 우리나라 최대의 공업단지 울산, 현대그룹 6개 사업장의 노동사 4만 여명이 연합 가두시위에 나섰다. 이날의 시위는 7~9월 노동자대투쟁의 절정이었으며 7월의 전개와 8월의 절정을 거쳐 9월의 정리로 이어지는 하나의 흐름을 형성한 운동이었다. 사회 전반에 민주화 공간이 확대되자 가장 먼저 노동자들이 진출을 시작한 것이다. 1987년 노동자대투쟁은 군사정권 아래서 거의 자취를 잃어버리다시피 한 민주노조운동에 새 지평을 열었다. 그러나 7?8?9월의 정리과정은 6월 항쟁의 주역 중의 하나였던 보수야권의 정치적 입장이 어떻게 이중적인 것인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 정치적 계기였다고 할 수 있다. 보수야권으로서는 7?8?9월 노동자대투쟁은 자신들의 통제영역을 넘어서는 것이었을 뿐만 아니라 사회 ? 경제적 입지에 대한 훼손을 결과할 수 있다는 것으로 받아들어졌기 때문이다. 이 시기가 보수야권에게는 제도정치권의 규칙이 최소한도로만 지켜진다면 최초의 집권을 할 수 있는 기회와 대권경쟁구도로 편입될 수 있다는 상황적 근거가 이중성의 결과를 낳은 것이다.이어 대통령.
Andre Gunder Frank (1929~2005)베를린에서 태어나 시카고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저발전은 원래적인 것도 전통적인 것도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대표적인 종속 이론가였던 그는 후에 세계체제론에 합류하였다.● 핵심 주장 : ‘저발전의 발전’을 통해서 ‘저발전’의 관계를 분석하였다. 남미의 지속적인 ‘경제빈곤’의 문제는 일국적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세계적 규모의 자본주의체계속에서 이루어지는 ‘저발전’의 상태라고 규정한다. 즉 남미의 빈곤은 ‘근대화’ 또는 ‘산업화’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이미 플랜테이션 농업 등의 노예제 농업 또한 ‘자본주의적 노예제’라는 형식으로 세계적인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작동하기 때문에 발송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핵심과 주변’의 관계로서 ‘핵심’인 서구선진국과 ‘주변’인 남아메리카의 착취관계가 그것이다.● 의의 : 당시의 라틴아메리카가 처한 ‘경제불황’과 ‘쿠바혁명’이라는 역사적 상황속에서 빈곤문제의 국제관계를 체계적으로 분석했다는 점● 오늘날의 국제적 빈곤은 단지 미개발된 국가의 ‘빈곤문제’가 아니다. 국제적 경제체제 내에서 이루어진 다는 점은 이미 폐기된 듯한 ‘종속이론’에서 빈곤의 원인을 찾음으로써 ‘빈곤문제’의 국제적 인식을 제고하는데 그 중요성은 더 해진다.[프랑크의 가설]1. 중심부는 발전하고 위성은 저발전되는 경향이 있다.2. 위성은 중심과의 유대가 약해질 때 발전한다.3. 현재 봉건적이고 후진적으로 보이는 지역들은 사실 고립되어 있거나 전자본주의적인 것이 아니라 중심부에 상당한 양의 자본과 1차 산품을 제공해 줄 수 있다.4. 저발전 지역에서 라티품디움 또는 대토지 소유는 국가와 세계시장에 대응한 상업기업으로 확립되었다.5. 일부 라티품디움의 후진적, 봉건적 성격은 세계적 중심부에 의해 방기된 농업과 광산지역의 쇠퇴 결과이다.[‘저발전의 발전’이란 무엇인가?]Frank는 1969년에 발표한 “저발전의 발전”논문에서 종속이론을 최초로 주장하게 된다. 그는 라틴아메리카의 국민경제를 세계경제체제의 일부분으로 파악한다. 라틴아메리카의 ‘저발전’이 기존의 발전이론이 주장하는 것처럼 ‘봉건적 틀’을 때문이 아니라는 것이다. ‘저발전’은 세계자본주의체제내부의 구조적 모순(자본주의 도입과 성숙의 결과)으로 인해 발생했다는 것이다.프랑크에 따른다면, 남미 대부분이 이미 식민지시기의 상황은 자본주의적 부문과 비자본주의 부문이 공존하는 것이 아니라 수세기에 걸친 자본주의적 확장을 통해 저발전된 세계의 가장 고립적인 부문도 자본주의적으로 변모하였다는 것이다.[‘핵심-주변’관계와 ‘저발전의 발전’ 매커니즘]Frank는 라틴아메리카의 “저발전”의 원인을 세계자본주의 체제의 3가지 모순에 의한 것으로 보았다. 첫째, 자본주의 체제는 경제잉여를 착취하는 중심부와 주변부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이른바 “핵심과 주변”의 관계이다. 둘째, 경제잉여의 착취와 전용의 모순은 세계자본주의의 확대재생산으로 인해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세계자본주의의 확산은 중심부와 주변부간의 양극화를 지속적으로 확대재생산을 발생시키며, 이것이 ‘저발전’이라는 것이다. 셋째, 이러한 세계자본주의 체제는 역사상 그 구조가 변동없이 지속된다고 한다.[대표사례 : 저개발되는 칠레]칠레의 북부는 1520년 마젤란에 의해 발견되기 전 16세기 초까지 잉카제국의 영토였으나 1540년 에스파냐의 P.발디비아 장군이 아라우칸족 정복전쟁을 시작한 이후 270여 년 동안 에스파냐의 식민지가 되었다. 1810년 9월 18일(칠레의 독립기념일) 전(前) 페루 부왕(副王)의 아들인 베르나르도 오이긴스를 최고 총독으로 삼아 독립을 선언하였으나 이후 100년 간은 영국의 경제지배를 받았다.독립 직후의 칠레는 광업과 농업(특히 수출을 위한 밀생산) 그리고 자체 수요를 위한 조선업을 근간으로 국내경제를 조직하여 괄목할만한 경제성장을 이룩하였다. 실로 칠레는 남미에서 가장 강한 국가가 되었다. 대통령 만뉴엘 몽뜨는 광범위한 철조망을 건설함으로써 성장의 기반을 확고히 하려고 했지만 칠레의 어린 경제는 여전히 외부로부터 오는 충격을 견디어낼 수 없었다. 1857년의 세계적 불황과 이에 뒤따른 태평양 전쟁의 충격을 견디어낼 수 없었다. 1857년의 세계적 불황과 이에 뒤따른 태평양 전쟁의 충격을 받고 칠레의 경제는 크게 후퇴했다.하지만 태평양 전쟁에서 패배한 페루는 국토의 일부를 칠레에게 양토했으며 이 땅에는 인광석이 풍부하게 매장되어있었다. 새로이 개발을 시도하는데 기반이 되어 줄 것으로 기대되었던 거대한 매장량의 인광석이 오히려 칠레의 개발을 저해하고 오늘날까지 이 국가를 저개발 상태에 억류한다는 사실이 판명되었다. 이미 전쟁 전부터 인광석 광산은 칠레와 페루의 자본으로 운영되어 오고 있었다. 이제 칠레의 자본이 투입되면서 인광석의 생산이 본격화되었고 이렇게 생산된 인광석은 같은 기간 동안 유럽의 농업생산력이 향상되는데 기여하게 되었다. 1878년 당시 페루와 칠레의 자본구성비는 67%였고, 영·미의 자본은 13%에 지나지 않았다.
‘파놉티콘 - 정보사회 정보감옥’을 읽고...파놉티콘은 공장제 생산이 보편적 생산 양식으로 자리잡아가던 산업혁명 초기에 본격적으로 등장했다. 노동자들을 효율적으로 감시하고 그들에게 규율을 세워주기 위해 고안된 파놉티콘은 인간의 몸과 마음을 시키는 대로 묵묵히 일을 하는 기계가 되도록 만들었다. 뿐만 아니라 공장과 학교의 파놉티콘화는 자본주의 생산과 규율 학습이라는 현대 사회의 권력 구조를 지탱하는 두 기둥을 세웠다. 산업혁명 당시 규율과 노동에 대한 통제는 공장 시스템을 원활하게 작동시키기 위한 핵심적인 요소였다. 대부분이 공장 노동자들은 기계의 움직임을 끊임없이 주시해야 했고, 자신의 노동을 반복적인 기계의 운동에 맞춰야 했다. 당시 의사로서 공장에 대한 조사 활동에 종사했던 제임스 케어는 이를 가리켜 공장에서는 “살아 있는 기계들(노동자)이 힘들지도 지치지도 않는 무쇠 기계에 사슬로 단단히 묶여” 작업에 종사한다고 한탄했다. 과거 파놉티곤 감옥의 궁극적인 목적이 감시를 내화해서 규율을 만들어내는 것이라면, 공장에 도입된 기계는 바로 이런 기능을 담당하는 파놉티콘과 같았다. 노동자에 대한 근본적인 감시와 통제는 공장에서 천천히, 그렇지만 쉬지 않고 돌아가는 기계가 담당해주었기 때문이다.20세기 중엽 이후 정보통신이 발전하고 전자 컴퓨터가 사용되고 컴퓨터 데이터베이스가 확산되면서 ‘데이터 감시’라는 새로운 단계로 진화했다. 초기 데이터베이스 구축의 목적은 보호 관찰과 같은 사법적인 절차를 용이하게 만드는 것이었지만, 이후 고용과 자격증 허가 등에 있어 개인 신상 조회와 민간적, 상업적 목적으로 더 자주 쓰이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 데이터베이스를 이용하여 실행된 전자 지문 데이터베이스는 범인 색출, 변사자 신원 확인 등 경찰 수사를 놀랍도록 효율적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전 국민의 신원이 노출되는 등 엄청난 프라이버시 침해의 소지를 안고 있었다. 작업장에서의 감시도 전자화, 컴퓨터화 되고 있다. 직원이 보고 있는 컴퓨터 화면을 캡쳐해서 수 초 간격으로 감시자에게 전송한다던가, 직원들의 전자메일을 감시하는 등 사생활 침해가 광범위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정보통신 기술의 발전은 국가와 기업 같은 집단에게만 적용 된 것이 아니다. 정보통신 기술의 발전은 사람들로 하여금 서로가 서로를 훔쳐볼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다른 사람의 사생활을 훔쳐보거나 자신의 일상을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는 등의 공개적인 훔쳐보기 생활이 정보통신의 발달로 인하여 가능해졌다. 공개적인 훔쳐보기와는 반대로 해킹과 몰래카메라는 은밀한 훔쳐보기이다. 타인의 정보를 해킹하는 횟수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증가하였고 이미 인터넷 상에서는 손쉬운 해킹 프로그램과 이를 익히는 방법이 공유되고 있으며 몰래카메라도 성능이 점점 광범위하게 공유되고 있다.이러한 정보통신의 발전으로 인하여 형성된 새로운 형태의 감기 체계를 전자 파놉티콘 또는 정보 파놉티콘이라고 부른다. 전자 감시는 파놉티콘의 감시 능력을 전 사회로 확장했다. 컴퓨터를 통한 정보 수집은 국가적이고 전 지구적이기 감시의 시선이 갖는 한계를 초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전자 감시의 색다른 점은 피감시자의 자발적인 협조에 의해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이를 수퍼파놉티콘이라고 하는데, 기업이 소비자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할인, 경품, 현상 공모, 멤버십 카드 등의 혜택을 내새워 소비자들이 자발적으로 소비자 정보를 제공하게 만든다. 이러한 자발성이 가능한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개인의 신상, 상품 구매 정보를 알려줄 때 얻은 수 있는 편리함과 이득만을 고려하고, 자신의 정보가 광고 회사나 기업, 정부로 넘어갈 수 있다는 사실은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산업사회 이전부터 정보사회까지 소수가 다수를 감시하는 파놉티콘이 존재했다면 다수가 소수의 권력자를 감시할 수 있는 언론과 통신기술의 발달로 인한 시놉티콘도 존재한다. 정부와 행정기관, 의정과 언론 등 사회의 권력 집단을 감시하고 대안적인 정책을 제시하기 위한 다양한 시민운동이 실시되고 있으며, 이러한 시민운동의 주요 타깃은 권력의 부패이다. 신문, 라디오, 텔레비전과 같은 기존의 언론은 물론, 인터넷을 통해서 자신들의 활동을 알리고 성과를 공유하며 연대를 강화하고 있다. 인터넷과 같은 쌍방향의 분산된 네트워크는 특히, 역감시의 기제로 바꾸기가 쉽다. 시민들이 스스로 문제를 제기하고 부패를 고발하는 매체로 사용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모든 감시에 대해 역감시인 시놉티콘이 가능한 것은 아니다. 시민들의 역감시는 공개가 안되는 정보에 대해서는 무력하다.
‘카오스’를 읽고‘카오스’라는 명칭은 많이 들어봤기 때문에 책을 빌렸을 때 많이 낯설지는 않았다. 더군다나 읽을 부분 중 하나인 나비효과는 고등학교 언어영역 문제집에도 가끔 과학부분 지문으로 나오기 때문에 익숙하게 읽을 수 있겠다 생각했다. 그러나 내가 알고 있는 나비효과는 정말 극히 일부분이였다. 이 책은 소설처럼 쉽게 쉽게 말을 풀어서 나비효과를 설명해 준다. 로렌츠가 발견한 나비효과는 전문용어로 '초기조건에의 민감한 의존성'이라고 할 수 있다. 로렌츠는 로열 맥비 컴퓨터로 고전적인 프로그램을 운용해 결정론적인 방적식들을 사용한다. 이를 통해 초기 조건이 약간 달라지면 기후도 약간 다르게 나타날 것이라는 것을 알아낸다. 비록 달라지는 초기조건이 수치상의 작은 오차일지라도 로렌츠가 세운 특이한 방정식 계에서는 작은 오차가 대단한 변화를 초래한다는 것이 입증 된다. 로렌츠는 또한 기상 예측에 있어서 예측가능성을 순수한 임의성으로 전환시키는 나비효과를 발견하는 것으로 그친 것이 아니라 기상 모델에 잠재되어 있는 임의성으로 가장한 질서를 발견했다. 기상이 반복되지 않기 때문에 예측할 수 없다는 것, 즉 비주기성과 예측불가능성의 관계를 로렌츠는 알아낸 것이다. 나비효과는 우연한 게 아니고 필수불가결한 것이었다. 책에서는 과학도 인생에서와 마찬가지로 일련의 사건들 중에 작은 변화를 확대시키는 결정적 지점이 존재한다고 하여 과학을 인생에 비유한다. 작은 사건 하나로 인하여 인생이 변화되는 사례들은 TV, 인터넷, 라디오, 신문 등 각종 매체에서 소개되는 사람들의 사연을 통해서 많이 들어왔기 때문에 정말 한 번에 와 닿았다.나비효과 부분에서는 주로 로렌츠 얘기를 했다면, 자연의 기하학 부분에서는 주로 만델브로트 얘기를 한다. 만델브로트는 무한히 계속되는 복잡성을 머릿속에 완전히 형상화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어떤 형상에 대해서 기하학자적인 사고체계를 갖추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 구조를 점점 더 작은 규모로 반복해 나감으로 전체 세계가 열릴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방법은 일종의 유희이다. 만델브로트는 불규칙하고 조각나 있으며 들쭉날쭉한 형상에 대해 묘사하고 계산하며 생각하는 방법을 나타내는 ‘프랙탈’이라는 단어를 만들어 냈다. 프랙탈은 할리우드에서 가장 기발하게 응용 되었으며 영화의 특수효과를 위해 지구와 외계의 풍경을 사실적으로 재현하는데 응용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여러분야에 걸쳐 실용적인 연구수단으로 사용되었으며, 이 연구자들은 만델브로트의 새로운 기하학이 자연 그 자체라는 것을 확신했고, 다른 사람들을 확신시키려고 노력했다. 플랙탈 기하학에 이끌리는 과학자들은 새로운 수학적 미학과 20세기 후반에 일어난 예술의 변화사이에 정서적인 공통점이 있다는 것을 느꼈다. 만델브로트가 볼 때 수학 이외의 분야에서 유클리스적인 감각이 가장 잘 발휘된 것은 바우하우식 건축이었다. 군더더기가 없고 규칙적이며 직선적이고 단순하며 기하학적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연의 풍경에서는 아름다움을 느끼고 건축물에서는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하는데, 이는 건축물의 단순한 형상은 비인간적이기 때문이라고 만델브로트는 말한다. 조화가 잘 이뤄진 건축물을 감상하는 것과 자연을 찬미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미적 가치의 관점에서 보면, 프랙탈 기하학이라는 새로운 수학은 길들여지지 않고 비문명화된 자연에 대한 현대인의 호감과 엄격한 과학을 조화시킨 것이다.
‘이중 나선’을 읽고처음에 이중 나선이라는 책을 빌리러 도서관에 갔을 때는 뭔가 마음이 어려웠다. 문과생이 던 나로서는 이중 나선이라는 말도 처음 들어보고 과학계 서적을 빌리는 것은 생각도 하지 못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책을 빌려서 책 표지 뒤에 글을 읽어보니 과학의 세계에서의 적나라한 인간성을 밝혀낸 이색적인 인간 드라마라고 써져있어서 의외였다. 머리말에서도 또한 DNA의 구조가 발견되기까지의 경위를 개인적인 입장에서 서술한다고 되어있었다. 이 책은 그저 이중 나선에 대한 설명이나 의의 같은 과학적 지식에 대한 책 인줄만 알았는데 그것이 잘못된 생각이 였던 것이다. 다행이 표지와 머리말만 읽고도 책에 대한 나의 인식이 약간은 바뀌어서 나와 책 사이의 거리를 조금이나마 좁히고 읽을 수 있었다.이 책은 왓슨이 이중나선을 발견하기까지의 연구 과정을 서술하고 있어서 읽으면서 약간 수필같다는 생각을 했다. 책을 통해 처음 DNA에 대한 정보를 알았는데 오히려 딱딱하지 않고 말하듯이 쓰여 있어서 차근차근 읽어 갈 수 있었다. 왓슨은 유전학의 열쇠는 X선 결정학이라고 생각하여 월킨즈라는 과학자와 함께 X선 결정학에 대한 연구를 했다. 또한 DNA 구조에 대해 크릭과 함께 관심을 갖고 연구하다 3차원적인 나선 구조를 생각해 내고 여러 가지 구조를 만든다. 하지만 그 구조들을 만드는 데는 문제가 있음을 알아내고 연구 과정에서 다른 과학자들의 논문을 참고 하여 구조에 대한 모형을 만들고 연구하여 결국 이중나선 구조를 발견하게 된다. 이 책을 이렇게 간단하게 요약했지만 사실 그 과정 안에는 DNA의 사슬반경, 축에 대한 골국각도를 알아내려는 왓슨의 연구 과정이나 당-인산 뼈대에 Mg이온 이나 Ca이온 구조도 만들면서 세가닥의 사슬로 구성된 모형을 만드는 과정까지 여러 가지 왓슨이 시도들이 포함 되어있다.느낀점이 있다면 어떠한 사실을 밝혀내기 위해서 끊임없는 연구와 시도들을 하는 당시 과학자들의 열정과 노력이 정말 대단 한 것 같았다. 밥 먹을 때에도 연구에 대한 얘기를 쉬지 않으면서 멈추지 않는 부분을 읽었을 때는 정말 연구에 대한 열정이 느껴졌다. 또한 책에 등장하는 많은 과학자들은 그들 간에 연구 경쟁의식을 지닌다. 처음에 책을 읽을 때는 이러한 점들이 조금은 의아했다. ‘왜 이렇게 매번 다른 사람이 연구한 결과에 대해서 민감할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러나 계속 읽으면서 느낀 것은 한 사람이 밝혀낸 결과가 있으면 거기에 더해서 또 더 나아간 결과가 나오고 계속 이러한 과정이 반복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서로 경쟁하면서 끊임없이 발전해 나가는 것이였다. 이러한 점을 통해 명예욕이나 승부욕에 대해서 부정적이고 비판적인 사고만을 갖을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면서 나의 인식이 바뀌었다. 더 나는 연구 성과를 얻기 위해 도전하지 않았더라면 과연 유전 공학의 기틀이 되는 DNA 구조가 발견 되었을까? 아마 발견되었어도 그 년도가 1953년은 아니였을지 도 모른다.또한 연구 성과에 대한 치열한 경쟁의식과 더불어 한 가지 더 주목하고 싶은 점이 있다면, 왓슨과 크릭의 협력적인 모습과 다른 과학자들의 논문을 참고하는 참고적인 모습이다. 함께 협력하여 DNA의 구조에 대해 관심을 갖고 문제가 생겼을 때에는 다른 과학자들의 논문을 참고하면서 연구함으로써 혁신적인 연구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이제 나 혼자만 잘하면 된다는 방식의 생각을 버려야 한다. 서로 협력하고 나누면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새로운 것을 얻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도전하는 정신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