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대한민국에 필요한 것은 인권에 대한 존중입니다.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은 분명히 발전하고 있습니다. 불과 60년만에 세계 최빈국에서 정상급까지 올라왔으며, 이제 G21의 의장국으로, 그리고 세계의 리더로 그 위치를 다지고 있습니다. 결코 길지 않은 시간내에 이루어낸 이러한 성장은 정말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하지만 대한민국의 발전을 이야기 할 때 마다 언제나 논의하기 꺼려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논의 밖으로 여기기엔 너무나 중요하고 버릴 수 없는 것. 바로 인권입니다. 얼마전 용산참사에서 수많은 사람이 죽으면서 발전이 먼저인지 아니면 사람의 기본권인 주거권이 먼저인지를 두고 사회사건이 아닌 정치문제로, 그리고 이제는 인권문제의 영역으로 번져 논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여전히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인 인권이 아직도 개발논리에 밀려 주춤하는 한국에서, 인권문제는 가장 먼저 시급히 해결해야 할 것이 아닌가 합니다. 셰익스피어의 소설에서 햄릿은 ‘포악한 운명의 화살이 꽂혀도 죽은 듯 참는 것이 장한 일인가. 아니면 창칼을 들고 노도처럼 밀려드는 재앙과 싸워 물리치는 것이 옳은 일인가.’ 라며 고민을 했었습니다. 지금까지는 개발을 위해 소수의 침묵을 요구했던 시대였습니다. 그리고 그 소수는 죽은 듯이 모든 불편을 안고 살아가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창칼을 들고 사람다움을 주장하여야 할 때가 된 것입니다. 햄릿이 그러하였던 것처럼 삶에 대해 고민만 할 때가 아니라 이제는 분명히 하나를 선택하여야 할 때입니다. 그리고 그 답은 이미 분명한 것 같습니다.노암 촘스키와의 대화를 옮긴 책인 ‘촘스키,세상의 물음에 답하다’에서 촘스키는 진짜 인식은 세상에서 실천하고 경험함으로써 찾아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나라가 지난 2000년에 세운 국가인권위원회가 가지는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국가가 주체가 되어 공권력에 의해 무시받고 소홀해 지기 쉬운 국민의 인권을 보호하겠다고 나섰기 때문입니다. 덕분에 우리나라는 당시 인권에 대한 인식을 넓이는 동시에 인권선진국의 영역으로까지 진입을 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른 지금, 국가인권위원회는 그 규모가 더 커지기는 커녕 오히려 그 힘을 잃어가는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지난 날, 수 많은 국민이 뜻을 전하기 위해 모인 광화문 집회에서 취한 정부의 강압적인 행동은 국제엠네스티(국제사면위원회)가 인권이 훼손될 우려가 있어 우려스럽다고 했었습니다. 또한 종교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집총을 거부한 수많은 젊은이들은 아무런 대안없이 전과자가 되고 있습니다. 아직도 우리나라에는 인권에 대한 관용이 많이 부족합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도 크게 발전하지 못하고 있는 듯 합니다.
우리가 가야 할 길은 「왼쪽으로 더 왼쪽으로」지난 해 2월 우리나라는 극우파에 속하는 이명박을 대통령으로 뽑았다. 그리고 그 후 20개월, 그의 장밋빛 공약처럼 우리나라 국민들의 삶은 더욱 좋아졌다고 할 수 있는가? 아마도 그것에는 조금 무리가 있을 것이다. 물론 세계적인 금융위기로 이는 어쩔 수 없는 결과라고 치자. 그렇다면 경제를 제외한 다른 부분은 어떠한가? 아마 더하면 더하지 덜하지 만은 않을 것이다. 지난 2년동안 우리에게는 미친소고기와 FTA, 인터넷 논객인 미네르바의 구속, 전직 대통령에 대한 추모객을 시위객으로 몰아 패는 공권력의 기억이 분명히 남아 있다. 유명무실한 인권위와 정치적인 자유도 보장받지 못하는 연예인까지. 이것이 진정 제대로 나아가고 있는 우리의 대한민국이 맞는지 모르겠다.하지만 여기에 대한 우리의 고민과 반성은 부족했다.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왼쪽으로 더 왼쪽으로」 의 부제처럼 미래로 나아가지 못하는 자는 과거로 되돌아간다고 했는데 지금의 대한민국이 그런 모습이 아닌가 싶다.분명 우리의 문제이지만 우리가 알지 못하는 대한민국. 그렇기에 여기서 그가 뱉어내는 쓴말과 충고들은 가슴시리게 다가온다. 애써 우리가 부정하고, 모른척하였던 것을 그는 너무나도 또렷하고 간결하게 말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부정하려고 하였던 역사와 현재상황까지 덧붙인 그의 지식은 정말 무서울 정도이다.지금의 전세계는 약간은 극단적인 방향으로 나가고 있다. 신자유주의를 향해 나가는 선진국과 거대기업들, 그리고 이에 염증을 느끼는 세계의 국민들은 좌파정부를 선출하고 있다. 저 멀리의 유럽과 남미에서부터 최근에는 자민당을 교체한 일본까지 말이다. 하지만 우리 대한민국은 어떠한가? 오히려 보수화되어가고 있지 않은가. 이런 대한민국을 박노자씨는 세가지로 나누어 이 책에서 비판하였다.첫 번째 장에서는 한국내에 진보정당의 필요성과 개혁이 아닌 그의 8가지 혁명론을 소개하였다. 그 것으로 하여 삽질공화국인 대한민국이 다른 발전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하였다. 아직은 우리사회에 익숙하지 않은 개념인 계급사회의 정착과 이를 기반으로 한 진보정당을 활발하게 해서 그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혁명의 모습을 그려보았다.두 번째 장에서는 우리에게 무의식적으로 박혀있는 우리를 억압하는 것들을 비판하였다. 이를 크게는 자본에서의 폭력과 국가의 폭력 그리고 기독교에서 오는 개인에 대한 폭력으로 나누어 보았다.그리고 마지막으로 세 번째 장에서는 무의식적으로 당하게 되는 정신적인 거세에 대응할 수 있는 시선을 가질 수 있게 하는 장이었다. 민족의 의미를 지금에 와서 어떤 시선으로 봐야 할지, 그리고 외국의 것이라면 비판없이 받아들이는 문화적 사대주의 등을 다루었다. 이 파트에서 나는 가장 와 닿는 내용을 찾았는데 그것은 바로 대듦의 문화라는 것이었다. 세상의 지금에 당당하고 꼿꼿할수 잇는 것 한용운의 명언 “이놈들아, 나를 매장시켜봐라”라는 정신이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한다. 나의 권위를 받아들이지 말고 너희들 자신의 길을 찾아라는 것은 분명 기존의 아닌 것은 자신의 선택으로 거부하고 새로운 것을 만들고 선택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 아우슈비츠의 가스실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고도 자신은 명령에 따랐을 뿐이라는 인간성의 상실도 이런 대듦의 문화를 상실하게 한 당대 시대 모습 때문일 것이다. 배고픔의 해결으로 우리의 몸은 풍요스러워 졌지만 역설적이게도 정신은 더 빈곤해지는 현상도 이러한 의식의 부재 때문이다.
여론은 믿을만한가?아시아 전문기자로 일했던 로버트 엘레간트(Robert.S.Elegant)는 베트남전쟁에 대해 “역사상 처음으로 전쟁의 결과가 전장이 아니라 인쇄물과 텔레비전 화면에서 결정 되었으며 결국 미국은 베트남에서 패배하였다.” 라고 하였다. 과거에는 존재가 미미하여, 사회를 변동시킬 수 없는 작은 힘에 불과했지만 지금에 와서 여론이 가지는 어마어마한 힘을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말이다.이렇게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는 여론, 이제 여론은 고도로 전문화되어 있는 지금의 사회에서 단 하나의 생각이 아니라. 여러 곳에서, 여러 가지 용도로 만들어지고 사용되고 있는 여러개의 손을 가진 수단이 되고 있다. 하지만 여기에서 드는 의문 하나 여론은 과연 믿을만한 것인가?나는 일단 기본적으로 여론이라는 것을 어느 정도까지는 믿을 수 있겠지만, 전적으로 그것에 의지하는 것에는 부정적이다. 아니 그것을 그대로 믿어서는 안된다고 본다. 일단 여론은 기본적으로 조작이 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 근거로는첫 번째로 매스미디어의 기본적인 이론중 하나인 노엘-노이먼의 ‘침묵의 나선이론’을 들 수 있다. 다수의 의견과 다를 경우 소수의 의견을 가진 사람은 자신의 의견을 차라리 침묵하여 버린다. 그렇다면 그 의견은 소수의견이 아니라 없는 의견이 되어버린다. 이러한 상황에서 만들어진 여론은 그 처음부터 틀린 결과가 된다.두 번째로는 여론조작은 정부와 기업 그리고 언론에 의해 조작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정부에 의한 조작의 예로는 베트남해안 상륙작전을 들 수 있다. 특수부대가 해안에 상륙하기 전에 미리 언론기관에 이 정보를 흘려 상륙작전을 하나의 드라마처럼 보도했던 것이다. 이로 정부는 국민들이 전쟁에 대해 감상적으로 보게 하려고 했던 것이다. 너무 밝은 조명 때문에 군인들이 조명을 꺼달라고 했으니 웃긴 현실이 아닐 수 없다. 기업에 의한 여론조작은 베트남전을 통해 미국내의 여론이 어떻게 변했는지를 통해 볼 수 있다. 전쟁 개시상황에서 미국은 베트남전쟁에 대해 많이 우호적이었다. 하지만 2차세계대전과 같이 전쟁효과를 노린 기업들이 베트남전쟁이 자신의 이익추구에 있어 오히려 해가 되고 있다는 상황을 알 고 난 후 반전으로 돌아섰다. 이 때부터 미국내의 반전운동은 더 심해졌다고 한다. 전쟁에 대해 비판적인 보도내용을 내보이지 않던 뉴욕타임스등 언론의 태도가 변하였기 때문이다. 1년반이 지난 미라이학살사건이 큰 문제로 대두되기 시작한 것도 이때쯤이다. 여기서 보듯이 여론을 조성하는 언론은 기업의 손아귀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다. 언론사의 상품은 구독자이고 시장은 광고주인 상황에서 언론은 철저히 정부나 기업과 같은 존재에 의해 움직이기 때문이다.
400번의 구타400번의 구타. 내가 이 영화를 프랑스영화의 이해 레포트 대상으로 써보겠다고 생각한 것은 순전히 영화의 제목 때문이었다. 물론 이 제목은 원래 제목과는 달리 한국에서 약간은 제 멋대로 바꾼 것이라곤 하지만 영화에서의 첫인상은 누가 뭐래도 영화의 제목이다. 400번의 구타. 어쩐지 강렬한 느낌이 영화를 보기 이전에 뇌리를 강하게 때린다. 그리고 영화 수업할 때 첫 번째 조가 발표하면서 중간중간 인용하여 쓴 이 영화의 장면들은 영화에 대해 오히려 궁금증을 만들어 내었다. 도대체 얼마나 대단한 영화이기에, 새로운 영화도 몇 달만에 수명을 다해버리는 이런 세상에서 만들어진지 50년이 다 되어가는데도 잊혀지지 않고 있나 싶어서이다. 게다가 나에게 있어 프랑스 영화라면 이 수업 이전엔 아는 것도 거의 없었던지라 이왕이면 제목이라도 들어 본 것으로 해보자 싶어서 400번의 구타라는 이상한 이름의 이 영화를 선택하게 되었다.영화를 시작할 때 보면 화면을 가득 채우는 글자들이 나타난다. ‘이 영화를 앙드레 바쟁을 기억하며 바칩니다.’ 그러자 수업시간에 이야기 한 것들이 생각나기 시작했다. 바쟁은 라는 영화잡지를 만들었고 여기에서 영화에 대해 비평을 하던 사람들이 영화를 만들기 시작하였다는 것. 그리고 여기서 누벨바그라고 불리는 프랑스 영화의 새로운 장이 시작되었고 세계영화사에 지대한 영향을 주는 한 사조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트뤼포는 고다르, 샤를로와 함께 누벨바그라는 것을 구성한 사람들 중의 한명이라는 것도 말이다. 그러니 갑자기 영화를 가볍게만은 볼 수 없게 되었다. 내 눈 앞에 펼쳐지는 이 흑백의 화면이 지금에도 여전히 엄청난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니 말이다,영화의 내용은 사실 사회적으로 볼 만한 엄청난 갈등 이런 것들은 전혀 없었으며 지금까지 내가 보고 알아왔던 프랑스 영화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야기는 정말 느긋하게 진행되어나갔고 난 멀리서 지켜보기만 할 듯이 화면은 주인공인 앙뜨완느를 비추었다. 게다가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커다란 긴장감이 이 영화에 있어 크게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앙뜨완느의 기분이랄까 심리상태같은 것들이 어떠할지는 정말 자세하게 느껴졌다. 카메라가 가지는 마력에 내가 검은 화면 속을 통해서 빠져들고 있었던 것이다.줄거리를 봐도 영화의 내용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소년 앙뚜완느는 가정에서 애물단지 취급을 받는 아이였다. 영화가 초창기부터 끝날때까지 계속해서 그랬다. 게다가 그 정도가 심해서 나는 엄마가 계모는 아닐까 아니면 나중에 부모와 앙뚜완느가 언제쯤 사과하게 될까를 한참동안 기다리기도 되었다. 하지만 이게 웬걸. 내가 예상한 것과 달리 앙뚜완느는 처음부터 끝까지 엄마에게는 없는 아이보다 못한 아이로 취급을 받고 아버지도 결국 그를 포기해버리고 만다. 그리고 학교에서도 그의 처지는 그리 다를 것이 없었다. 벽에 낙서를 했다고 비인격적으로 당하고 이를 지울 것을 명령받는다. 하지만 이를 지우면 지울수록 벽은 오히려 더 더러워지게 되는 아이러니를 보인다. 선생님은 주입식만을 강요하고 교실에 이상한 조짐이 보이면 무조건 한 아이만을 의심하기만 하였다. 한 마디로 선입견으로만 아이들을 대하는 그런 선생이었다. 학교라는 곳이 아이를 소중히 여기고 아이의 능력을 길러줘야하는데 학교라는 곳은 오히려 아이의 창의성를 눌러버리고 반발력만 만들어내었다. 그리고는 결국 앙뚜완느는 학교에서도 차라리 없으면 좋을 아이로 전략해버리고 만다. 이렇게 주위환경으로부터 자신감을 박탈당한 아이는 사회가 원하는 방향과는 반대로 튀어오른다. 그리고 결국 앙뚜완느는 할머니의 돈을 훔치고 여기다 타자기를 훔친다. 그리고 이를 돌려주러 갔다가 잡혀서 경찰서를 가게된다. 아버지에 의해 그 곳까지 가게 된 아이는 결국 소년원까지 가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앙뚜완느가 그 곳에서 자기를 찾는 것은 아니었다. 또 다시 버림을 받고 결국은 그 곳에서 뛰쳐나온다. 그리고는 계속 뛴다. 자기가 오래전부터 원하던 그리고 갈망해오던 세계인 바다를 향해서 말이다. 미친 듯이 계속 달리던 앙뚜완느는 결국 바다에 도착한다. 그리고 바다를 바라보지만 앙뚜완느의 표정은 전혀 안정되지 못해 보인다.그리고 그 앙뚜완느의 얼굴위로 FIN이라는 글짜가 크게 찍힌다.조금은 이상하게 보일수도 있지만 내가 보는 앙뚜완느는 지극히 정상적으로 보였다. 사춘기의 아이들이 모두 하는 고민을 그도 하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의 부모와 교사들을 비롯한 그의 환경이었다. 부모와 교사는 앙뚜완느를 자기들의 기준만으로 봐서 불량아로 여기고 버린다. 주위의 관심이 필요한 나이에 버려진 앙뚜완느는 자기의 길을 더 헤멜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