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bliographical Entry『가르침과 배움의 영성』To Know As We Are Known저자: 파커팔머. 역자: 이종태. IVP. p.264.Author Information저자 : 파커 팔머“미국 고등 교육계에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교사의 교사” 등으로 불리면서 저술과 강연, 교사 프로그램들을 통해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교육자이며 저술가인 교육 활동가다. 교육과 영성을 비롯한 여러 영역에서 다양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그는 Union Theological Seminary(NY)와 U.C. Berkeley에서 사회학을 공부했다(Ph.D.). 여러 곳에서 워크숍, 강좌, 수련회를 이끌고 있으며 이러한 그의 활동은 The New York Times와 CBS-TV 뉴스 등 각종 매체에서 크게 다루었다. 미 고등교육학회의 임원과 페처 연구소의 수석 고문으로 있으며, 저서로는 『삶이 내게 말을 걸어올 때Let (Your Life Speak)』『가르칠 수 있는 용기(The Courage to Teach)』등이 있다.역자 : 이종태한국 외국어대학교 영어과, 장로회 신학대학원을 졸업했다. 현재 미국 버클리의 GTU에서 영성학을 공부하고 있다. 역서로는 『다윗:현실에 뿌리박은 영성』『현실, 하나님의 세계』등이 있다.Introduction‘진정한 앎’이란 과연 무엇인가?파커 팔머에게 있어서는 소위 ‘잘 가르치기’ 위해서, 그리고 ‘잘 배우기’ 위해서는 먼저 ‘앎’의 정체를 캐내는 것이 중요했던 것 같다. 저자는 ‘지성이 만들어 온 세계는 결함이 있고 위험하며 치명적이다. 우리에게는 지성과 마음이 하나가 되어 세계를 보는 온전한 시각이 필요하다’며 책 서문에서부터 비유적이며 사뭇 공격적이다.‘온전한 시각이란 두 눈이 하나가 되어 바라보는 것’이란 서론의 재미있는 비유가 벌써 나의 호기심과 공감대를점령해 간다. 우리는 지금까지 지성(mind)이라는 하나의 눈, 즉 교사 관점이나 학습자 관점이라는 하나의 눈을 가지고 교육에 임해 왔었는데, 이제는 마음(he지는 눈으로도 세계를 보는 공동체적 시각이 필요하다는 것이다.요즘 같은 고학력 사회에 물질주의와 폭력이 만연한 현실을 두고 저자는 지혜 없는 지식, 영성이 배제된 지식의 결과라며 직격탄을 날리는 것 같다. 파커 팔머의 자신감 넘치는 일침이 풀어도 풀어도 그 실마리가 보이지 않는 현대 교육 상황을 제대로 풀어갈 수 있을 지 기대하면서 책을 계속 읽어 나갔다.저자는 일반 교육학자와는 달리 단순한 지식보다는 궁극적인 진리 문제에 관심을 두고, 또한 살아있는 교육 해법의 새로운 인식방법으로 영성에 무게 중심을 두고 있다. 객관적 인식이론과 관습적 교실에서 파생된 지식과 교육을 기독교적 영성으로 성찰한다는 시도가 일단 대단히 탁월하다. 이런 점에서 본서는 접근 방법이나 형식은 다르다 할지라도 다루는 내용이나 깊이에 있어 기존의 지식서와는 달리 생명력이 넘친다. 그래서인지 본래 책의 원 제목이 ‘To Know As We Are Known'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아는 것)이라는 다소 형이상학적 제목이었으나, ‘가르침과 배움의 영성’이라는 역자의 절묘한 번역으로 인해 오히려 책 전체를 이해하기가 훨씬 용이했다.Content Summary1장. 안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것이다‘안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것이다.’ 1장의 소제목에서부터 뭔가 모를 뜨거운 감동이 몰려온다.우리의 지식은 대체 어디로부터 오는가? 그것의 궁극적 원천은 무엇인가? 저자는 앎의 동기, 즉 역사적 지식의 두 가지 주된 원천으로 호기심과 지배욕을 들었다. 우리는 모두 고등교육을 받은 이들로서, 세계를 분석과 조작의 대상으로 다루는 앎의 방식, 그리고 세계에 대한 지배를 목적으로 삼는 앎의 방식만을 학교에서 교육받았다는 것이다. 저자는 여기에서 현대 지식의 실패 이유를 들었다. 현대 지식의 실패는 윤리의 실패, 즉 아는 것을 적용하는 문제에서 실패한 것이 아니라 지식의 좀 더 깊은 원천과 열정을 인정하지 못하고, 지식이 창조하는 관계에 사랑이 거하지 못하도록 한 앎 자체의 실패라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어떤 것것이며, 이것이 곧 사랑에서 발원하는 제3의 지식이라는 것이다.그래서 우리는 기도를 통해 내가 앎의 주체이고 누군가의 앎의 대상인 것을 깨달음과 동시에, 기독교 영성교육을 통해 세계와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서로 반응하는 유기체로서 창조성과 자비가 있는 살아있는 공동체로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앎과 가르침과 배움에 영적 기반을 회복함이 필요하다고 저자는 역설하고 있다.사실에 입각한 정규교육 때문에 이따금씩만 가치관 교육이 시행되는 현행 교육체제 아래 있는 사람들, 특히 골리앗 같은 거대한 교육관습과 제도 아래 기독교적 교육 양심을 가슴속에만 간직한 채 꺼내 보지도 못한 사람들에게 꼭 선포하고 싶고, 가슴에 새겨 놓고 싶은 강렬한 논지였다. 아무튼 1장은 현대 지식이 우리를 어디로 이끌어 가고 있는 지에 대한 질문과 함께 교육의 영성적 토대를 놓아 준 장이었다.2장. 영적 형성으로서의 교육2장에서는 관습적 교수방법의 결과는 사랑이 아니라 호기심과 지배욕, 나아가서는 하나님의 힘을 소유하려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해 사실, 이론, 실재, 객관 등 객관주의적 인식 이론에 의해서 학생들이 객관주의적 세계관을 갖게 되고, 교육이 왜곡되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객관성을 향한 추구는 한편으로는 자기 중심성이라는 죄에 대해 쐐기 역할을 해줄 수 있고 기술이 낳은 업적을 가능케 해준다. 그러나 교육이 전달해야하는 메시지는 사실, 이론, 실재 등 객관적이 아니라, (어원적으로)언약을 지키겠다는 서로에 대한 책임성, 즉 진리와 관계 있다는 것이다. 저자의 말처럼 이제는 개관주의의 눈이 아니라 진리의 눈으로 교육을 바라볼 때인 것 같다.3장. 가르침 배후의 가르침파커 팔머의 외침은 광야에서 외치는 세례 요한의 모습과도 흡사하다. 3장에서 저자는 또 한번현대 교육에 대한 비판의 그 수위를 드높이고 있다.기존의 객관주의적 관습적 교실은 교실과 공동체를 파괴하고 있다고 일침을 가한다. 앎은 일종의 스포츠 관람이며, 학습자들은 실재를 탐구해본 권위자인 교사가 와서 들려주는 보 외부에 있다고 성토한다. 너무나도 직설적인 표현이다. 또한 저자는 관습적 교실은 인식 주체로서의 자아를 고립시키는 장이며, 객관성으로 인해 학생들의 내적 실재를 무시하고 또한 학생들의 열정을 제거하고 있다고 말한다. 이에 저자는 다시 한 번 인식 주체와 인식 대상간의 서로 인격적인 관계를 요구함과 동시에, 학생들을 멀찍이 바라봄이 아닌 세계와의 상호 작용을 통해서 초청해야 한다고 촉구하고 있다.저자는 이어 삶 대신 말을 요구하는 이들에게 말 대신 침묵의 방법을 사용한 사막교부 아바 펠릭스의 예화를 들며, 가르치고 배우는 또 다른 한 방법을 제시해 주고 있다. 주로 말하는 것에 주안점을 두고 있는 객관주의적 교육에 대조되는 파커 팔머의 적절한 예화라 할 수 있다.4장. 진리란 무엇인가?파커 팔머의 가르침과 배움의 영성(To Know As We Are Known)에서 가장 보석 같은 장이다. 이 4장에서는 진리에 대한 인격적 공동체적 개념을 명확하게 밝히고 있다. 아니 선포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진리(truth)는 ‘나는 언약을 지킬 것을 당신에게 맹세합니다’라는 언약(troth)과 동일한 어근을 가지고 있으며, 진리 안에서 무언가를 안다는 것은 인식 대상과의 언약 관계에 들어가는 것이며 새로운 앎을 통해 재결합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다시 말해 무엇을 안다는 것은 무엇의 삶 속으로 들어가고 그것이 우리 삶 속으로 들어왔음을 뜻하는 것으로써, 모든 지식은 인식대상에 대한 인식 주체의 인격적, 열정적 참여를 수반한다. 따라서 사랑의 논리는 대상을 알기를 추구할 때 그 대상도 또한 나를 알기를 추구한다는 것이다.파커 팔머는 참여와 책임성의 인식론으로서 진리는 인식주체와 인식대상 사이의 개방적이고 신실하며 모험적이고 쌍방적인 상호침투를 의미하는 Two-Way Communication이며, 또한 기독교의 인격적 진리는 앎에 대한 접근법이 아니라 삶에 대한 접근법이라고 힘주어 역설하고 있다.결국 파커 팔머는 진리는 인격적, 공동체적, 상호적이므로 진리를 인격적으로했다.여기에서 ‘가르침’과 ‘배움’은 곧 살아 있는 유기체의 살아 있는 행위임을 느낀다. ‘가르치는’ 행위와 ‘배우는’ 행위에 대한, 그리고 교육에 대한 파커 팔머의 정신과 살아있는 영성을 감히 엿볼 수 있는 보석 같은 4장이다.5장. 가르침이란 공간을 창조하는 일이다5장에서 파커 팔머는 ‘가르침이란 진리에 대한 순종이 실천되는 공간을 창조하는 일’임을 제안한다. 이어서 순종과 자유의 진리로 이끌어 주는 현실적인 교수?학습방법으로써 개방성, 경계, 환대의 필요성을 주장한다. 또한 개방성, 경계, 환대의 특징을 가진 배움의 공간을 창조하는 방법으로 원형배치를 통한 물리적 공간, 독서 및 강의를 통한 개념적 공간, 드라마를 통한 극적 공간, 침묵과 말, 감정을 위한 공간을 창출할 것을 강조한다.그러나 이 부분에서는 너무나 감동적인 인격적 진리 이론을 실제 교수법에 적용시키기 위한 장으로써의 구체적인 대안이 미약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독서과제를 활용한다는 차원에서는 ‘거룩한 독서’라 불리는 렉시오 디비나(Lectio Divina)를 접목시키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어쨌든 아쉽지만 이 실제적 적용 부분은 각자 처한 환경과 문화, 상황에 맞게 인식 주체와 인식 대상간에 함께 풀어가야 할 과제인 듯 하다.6장. 진리에 대한 순종이 실천되는 공간공간에서 어떻게 진리에 대한 순종을 실천하는가? 결코 쉽지 않은 명제를 걸고 저자는 이 6장에서 교실과 세계(과거, 현재, 미래)의 벽이 허물어지는 공간, 즉 배움과 삶의 골을 메우는 공간에 대해서 얘기를 풀어 나가고 있다.관습적 교육에서는 교실에서 일어나는 실재를 경시하며 또한 실천의 장소로 여기지 않는다. 그래서 저자는 교실을 집약적이고 반성적인 진리의 공동체의 일부로 인식하고, 교실 안에서도 인식 주체와 인식 대상 사이의 언약이 실천되어지는 공간으로 거듭나기를 원했다. 또한 순종과 공동체 사이에 존재하는 진리로서의 규칙이 수반되어야 하며, 더불어 교사가 학생들과의 언약 관계 속에 들어갈 때 비로소 그 관설했다.
Bibliographical Entry『진리와 평화를 위한 교회의 투쟁』저자: 볼프강 후버. 역자: 채수일. 한국신학연구소 1991년, p. 153.Author Information볼프강 후버 교수는 울리히 두흐로(Ulrich Duchrow), 도로테 죌레(Dorohte Solle) 등과 함께 독일의 진보적 에큐메니칼 신학자 중의 한 사람이다. 하이델베르그 대학의 원로 교수 퇴트(H.Todt/ 그리스도교 사회윤리)의 후임으로 1984년에 취임한 후버는 한국의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사회참여에 대한 그의 관심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신학계에 그리 알려져 있지 않다. 1960-66년까지 하이델베르크, 괴팅겐, 튀빙겐에서 신학을 수업, 1966년 튀빙겐에서 학위를 마친 후, Reutlingen-Betzingen에서 목회를 하기도 하였다. 후버는 그의 학문적 업적 때문만이 아니라 세계 교회의 에큐메니칼 운동에의 적극적 참여로 인해 알려져 있다. 그의 이름이 신학의 테두리를 넘어서서 널리 알려지고 그의 신학적 입장이 제3세계 안에서도 비판적 대화를 위해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은 그가 1985년 뒤셀도르프에서 개최된 독일 개신교 교회의 날 의 위원장으로 피선된 것으로도 어느 정도 확인되었다고 하겠다.Content Summary1. 오이쿠메네의 지평에서 본 오늘의 교회오늘날 오이쿠메네를 말하는 사람은 갈등을 말하고 있는 셈이다. 그는 갈등을 말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갈등에 참여하고 있다. 서로 진리를 위해 노력한다는 상호 기대야말로 우리가 대화를 할 때 따라야 할 기초규범이다. 오이쿠메네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도록 격려해준 중요하고도 포기할 수 없는 원천이었다. 교회의 일치는 획일화를 의미하지 않는다. 교회는 예배의 공통성을 통해 스스로 완전히 책임적인 공동체 가 된다. 교회 공동체란 조직을 마음대로 운영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들이 서로 방문하고, 파송 받은 사람들을 통하여 실제적인 교제를 나눔으로써 실현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교회는 공동체이며, 따라서 교회들의 공동체 향한 용기를 가져야 한다는 인식이다.교회의 일치를 경험할 수 잇게 하는 과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에 수반되는 이차적인 것이 아니라 이 고백자체의 필수적인 요소이다. 이 일치는 이미 하나의 현실이다. 교회의 일치는 그 근거를 한 분이신 하나님의 아버지 됨, 한 분이신 성령 안에 계신 한 분이신 주님의 현존 안에 두고 있다. 하나인 진리를 위해서는 그런 모든 경향성들이 모든 교파 안에서 극복되어야 한다. 오늘의 에큐메니칼 운동은 분열된 교회들로 하여금 그들의 죄를 고백하도록 돕는 하나의 회개운동이다. 이 회개운동은 교회가 모든 경계선을 넘어서 공동체 의식을 경험할 수 있게 하는 하나의 운동이다. 현장에서의 오이쿠메네, 즉 삶의 조건과 교파적 전통에 의해 분열된 사람들이 예배를 통하여 공동체 의식을 함께 나누는 것이 오이쿠메네의 기본적인 형태라고 하겠다. 교회의 일치는 인류의 일치를 위한 표징이 될 수 있다. 이것은 경제적·군사적 예속성의 구조에 대항하는 투쟁에의 참여를 의미한다.에큐메니칼 신학의 잘못이 하나님의 나라 - 그 도래가 오직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는 - 와 인간적 행동의 산물로서의 세계 공동체 사이의 정체성 혼동에 있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우리의 역사적 희망은 인류의 고난과 폭력적인 죽음의 감소, 인류의 상호 예속과 차별의 극복, 평화와 정의의 확대를 지향한다.세계교회협의회의 정치적 행동에 관한 논쟁은 - 특히 서독교회의 지도층에 의해서 이루어진 논쟁은 - 마치 세계교회협의회가 인종주의 철폐를 위한 투쟁 계획 을 통해 이미 정치적인 색채를 띠게 됨으로써 교회의 일치를 위협하였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오늘날 에큐메니칼 운동의 중요한 과제 이론 중의 하나는, 교회의 분열을 정당화시키는 궁색한 일들로부터 교회를 해방시키는 데 있다. 우리 시대의 정치적 과정에서 교회가 겪는 혼란에 관하여 말한다면, 이것은 교회와 부수적으로나 피상적으로 관련이 잇는 주제가 아니라 교회의 실존의 핵심과 관계되는 주제이다. 교회는 역사적 희망의 대리자이자 개척자이다.은 바로 자연과의 책임적인 공존, 평화의 유지와 실현, 인간 사이의 자유로운 의사소통, 정의로운 공생에 대한 희망을 의미한다.2. 만남 가운데 있는 신학에큐메니칼 운동이 하나의 목적단체로서 파악될 것이 아니라 교회의 한 형태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교회의 일치에 대한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교회적인 연맹으로서 에큐메니칼 운동은 교회의 기본적인 한 형태를 가진다. 교회의 한 기본 형태로서의 에큐메니칼 운동은 자기 이해, 즉 하나의 신학을 필요로 한다.제3세계의 신학들은 민중의 신학으로서의 신학이 되고자 하는 지향적이고도 실천 위주의 시도이다. 민중의 신학을 발전시킨다는 것은 인간의 구체적인 경험을 중시하는 것을 의미한다. 민중의 고난과 억압과 질고를 주목하여, 마침내 하나님을 통한 인간의 해방과 화해의 소식을 선포함으로써 이 선포가 해방과 화해의 행동에 미친 결과들을 밝히고자 하는 것을 의미한다. 진정한 에큐메니칼 신학은 에큐메니칼한 차원을 현대 신학의 기본적인 차원을 현대 신학의 기본적인 차원으로 간주한다. 에큐메니칼 신학이 어떤 신학의 하나의 부록이 아니라 신학 바로 그 자체라는 것이다. 역사적 현실이 제시하는 다양한 도전에 대한 응전으로서 주님이신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과 하나님에 대한 진술을 제시한다.에큐메니칼 신학 즉 신학은 그 부수적인 의미에서만이 아니라 전적으로 에큐메니칼하다는 것이다. 실제적인 의미에서 오이쿠메네는 그리스도인들이 살고 잇는 지구를 의미한다. 유일하게 민족교회적인 틀을 넘어서는 로마 가톨릭 교회는 조직된 오이쿠메네에 직접 포함되지 않는다. 오이쿠메네는 민족간의 오이쿠메네로 이해되었다. 민족교회주의는 많은 사람들이 성급하게 생각하는 것처럼 일종의 세속적인 메시아사상이 아니라 에큐메니칼 운동의 기초인 것이다. 교회의 일치가, 기대되는 하나님의 나라와 동일시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그리스도교 신앙, 즉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을 분열시키는 벽을 무너뜨렸다는 신앙이 어떤 역사적 현실 속에서 해석되어야 하겠는가에 있는파간의 오이쿠메네, 민족간의, 문화간의 그리고 세계 권력 진영들간의 오이쿠메네는 대화 없이 존립할 수 없다.흑인 신학의 역사적 경험은 인종주의이다. 인종주의는 정치적·경제적 억압의 이념이나 도구만이 아니라 동시에 문화적 정체성의 파손을 의미한다. 흑인 신학은 라틴 아메리카 해방신학보다 훨씬 더 강력하게 문화적 오이쿠메네를 요청한다. 그리고 서로 대화해야 할 필요성이 있는 양극화 된 신학들의 명칭은 흑인신학 과 백인신학 이다. 두 신학이 전개되었던 내적인 환경요인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상징들이 하나의 정치적인 종교의 요소로 사용될 수 있는 사회 속에서 발견될 수 있을 것이다. 신학은 인간해방의 실천을 위하여 그리스도교적 상징들을 재해석해야 한다. 신학은 정치적·경제적 세력의 구조로부터 비판적인 거리를 유지할 것을 요청 받고 있다.민중개념이 발전한 역사적 상황의 차이와 의미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여진다. 민중의 개념은 오히려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성서적 개념이다. 신학적으로 민중 개념은 상당히 다른 지평에서 이해된다. 약한 자들의 공동체와 약한 자들과의 공동체, 고난받는 자들의 공동체와 고난받는 자들과 함께 하는 공동체로 이해되오 있다. 민중적 교회는 보통 그리스도인의 일상적인 신앙 을 전적으로 진지하게 받아들이려고 노력하는 측면도 가지고 있다. 우리가 만약 인간의 삶을 새롭게 해주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실생활에서 응답하지 않는다면 그러한 은혜는 값싼 은혜 가 될 것이다.오늘의 그리스도교가 오이쿠메네 시대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먼저 상세한, 그러나 제한된 의미에서 바로 이런 형이상학화 된 그리스도교로부터 떠나는 것이 필요하다. 신학 역시, 많은 경우 무의식적으로, 이런 타당성에 대한 요구를 받아들이고 있을 뿐만 아니라 교회간의 에큐메니칼한 관계 속에서 그것을 실천하기도 한다. 에큐메니칼한 대화는 어떤 신학에 대한 과대평가를 경고할 수 있다. 유럽신학이든 제3세계의 신학이든 그 신학을 과대 평가 할 경우 거기에는 각기 다른 위험성이 도사리고 있다. 제3세계의 에큐메니칼한 대화가 필요한데, 그 이유는 그런 신학의 과대 평가를 극복하기 위해서이다. 해방의 신학이 출현한 역사적 상황은 단순히 신학적 해석을 위한 준거점이 아니라, 무엇이 성서 전통 가운데서 특히 중요하게 취급되어야 하는지를 선택하게 하는 기준으로서 작용한다.3. 군사적 폭력과 그리스도교 신앙세계교회협의회는 한편으로는 혁명적 해방투쟁의 틀 안에서 제기되는 폭력의 사용에 대하여 관용적인 것처럼 보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군사적 폭력 사용의 잠재성의 증가에 대하여 비판적인 태도를 취한다. 폭력문제에 대한 그들의 상이한 입장의 동기를 분명하게 밝히고 여기에 대해 같이 숙고하지 않기 때문에 더욱 애매해 보인다.폭력의 독점은 개개의 시민들이 범죄행위를 방지하고 부당한 피해에 대하여 보상을 요구하기 위하여 폭력적인 자기 방어행위를 취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한다는 부정적인 의미를 가진다. 지나친 국가적 폭력은 저항 폭력을 야기 시키며, 그렇게 함으로써 국가의 폭력독점은 붕괴되기 시작한다. 국가의 폭력은 기존의 법질서를 유지하고 강화시키는 데 한하여 사용되어야 한다. 군사적 폭력이 지속적으로 제어하고 평화가 정치적으로 보장되기 위해서는 국제적인 폭력의 독점이 필요하다.폭력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기본적인 표현은 산상수훈에서 보여진다. 폭력문제에 대한 태도 변화는 무엇보다도 그리스도교 역사의 전환, 특히 콘스탄틴 황제와 그의 후계자들에 의한 그리스도교의 국가 종교로서의 승인에 수반하는 정치적 책임문제에서 비롯된 것이다. 교회는 기존의 정치적 지배체제를 정당화해주며, 미래의 구원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권력에 희생당한 사람들을 위로해 준다. 교회가 정치적 권력의 실천에 공동책임을 가지게 된 이후, 이중적 기능 즉 순응과 해방, 안정화와 갱신이라는 이중적 기능을 수행했었다는 사실이다. 교회는 예배와 상호봉사, 그리고 실천적인 행위 속에서 적대감에 대한 항의가 먼저 교회 안에서 신빙성 있게 형성 될 때에만 오늘의 군비경쟁과 군사주의에 대항하는 그리스도인의 항의 역시 그 신실성을 얻게
Bibliographical Entry저자:마리아 해리스. 역자:고용수. 한국장로교출판사 1999년4월20일 2판발행 p. 293Author Information이 책의 저자인 마리아 해리스는 콜롬비아 대학교 교육대학원 학생시절부터 계속해서 커리큘럼의 문제에 대해서 공부해왔으며, 예술과 커리큘럼이라는 이 두 가지의 관심이 이 책에 자세히 소개되고 있다. 마리아해리스의 회중형성과 변형을 위한 교육목회 커리큘럼 라는, 이 책의 원제목(역자)에 합당하게 웨스트민스트와 존 낙스 출판사가 함께 출판한 기독교 교육에 관련된 교회의 포괄적인 실제의 다양한 차원들에 관하여 다루고 있는 책이다.Content Summary1부 정황( The Context)제1장: 교회-목회적 소명을 지닌 하나님의 백성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교회 즉, 여러 개인들의 공동체인 하나의 백성이 된다는 것은, 사실 우리 모두가 한 육체와 한 피이고, 인간됨에 귀속되는 모든 것의 높이와 깊이를 물려받는 상속자가 됨을 의미한다. 그것은 성육신 교리를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아울러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 (요1:1)는 진리를 우리 마음속으로 받아들이므로 그 말씀이 계속해서 우리 안에 한 하나님의 백성의 이미지를 완성하게 한다. 이것은 곧 우리가 목회적 소명을 지닌 하나의 백성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며, 아울러 우리가 수동적인 교회 구성원으로서 교회 사역의 전체적인 책임이 목회자들과 안수 받은 지도자들의 것인 양, 교회의 사역을 그들에게 맡기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복음에 의해 부름을 받은 백성이고, 세상 속에서 구별된 존재로 부름을 받았기에 이렇게 구별된 존재로 살려는 적극적인 노력이 목회적 소명의 핵심이다.목회적 소명은 특별한 삶의 방식에로의 부름이요, 특별한 삶의 방식에 대한 요구로서 사람들에 대한 보살핌과 관계성을 함축하고, 아울러 기독교적인 사역 활동에 적극적이고 실천적으로 참여함으로 하나님을 세상에 계시 되도록 섬기는 활동, 종의 사역이다. 이러한 사역들의 근원은 개신교와 카톨릭 전통 속에서 이의 긴장, 그리고 교역자와 평신도 사이의 긴장들이 무엇보다도 분명하게 나타난다.제2장 교회-교육적 소명을 지닌 하나님의 백성교회교육은 평생교육이다. 평생교육으로서의 교회교육은, 목회적소명이 평생의 소명이기 때문에 우리의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 때문에 교육의 의미를 학교에서 행해지는 어린이와 관계된 활동으로 제한시키는 것은 반대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다른 배경과 다양한 방식으로 배운 모든 세대의 백성들이기 때문에, 우리가 소명을 실현시키는데 도움 을 줄 수 있는 여러 형태들(forms)을 사용하는 것이 요구되며, 또한 이런 형태들에 주의를 기울이는 교육의 의미는 예술적 활동으로 넓고 광범위하게 이해되어져야 한다. 그래서 교육은 다른 모든 예술적 노력과 같이 교육은 형태를 제공, 부여하는 활동으로서 경험에 의미를 부여하기 위하여 경험을 재조직하고, 재창조하는 것으로서의 교육, 목적을 가지고 끝없이 지속적으로 교회의 삶의 형태를 재형성하는 것으로서의 교육, 그리고 참여자로서의 교육이 되어야 한다.그리고 이러한 교회의 교육사역은 디다케, 코이노니아, 케리그마, 케리그마와 같은 교회 생활의 모든 국면들을 교육적인 것으로 보는 고전적 형태들 안에서, 구현되어 존속되어 왔으며, 이런 형태들 중 어느 하나라도 생략 또는 평가 절하 될 수 없으며, 이 형태들 모두 필요하다. 이것은 곧 커리큘럼의 기초로서 상호 관련성아래 함께 존재할 때에만 이들은 완전할 수 있다.제3장: 커리큘럼-교회 생활의 과정현재 어떠한 커리큘럼에 관한 정의도 존재하지는 않고 있는데, 대신에 그런 만큼 커리큘럼이 다양한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어떤 경우에는 그 의미들이 서로 갈등하고 있다는 점을 나타내 준다. 그러나 그 중심 개념들을 모아 본다면 학자들의 관점에 따라 경험 , 과정 , 환경 ...등의 의미로 강조하는데, 이러한 모든 의미들에 공통적인 것은 커리큘럼은 학교라는 맥락에서 발전한다는 과정이다. 그리고 최근 몇 십년 동안에 커리큘럼에 대한 변화가 분명하게 나타났는데, 그것은 새로운 것이라기 보다큘럼의 의미를 새롭게 이해하는데 도전적인 영향을 준 다섯 가지 요인으로 지난 30년 동안에 1은 우리의 교육개념을 학교에서 행해지는 구조적인 활동에만 제한해왔던 억압을 깨뜨리는 시도, 2학생들은 학교교육에 의해 매년 30시간 이상의 시간을 공동체에 봉사하는데 사용해야 한다는 시도, 3공동교육 개발 위원회의 이라는 커리큘럼의 개발과 4제2바티칸 회의와 이의 후속조치로 일어난 미국 카톨릭 교리문답 교수법의 관점의 변화 5현재의 커리큘럼 이해의 한계를 인식한 종교교육가들로부터의 도전을 통한 커리큘럼의 새로운 이해는 *커리큘럼의 의미가 유동적이라는 것 *교회교육의 커리큘럼은 언제나 학교 교육보다는 더 넓은 것 *위의 두 요소를 고려해 볼 때 보다 완전하고 광범위한 커리큘럼이 교육, 예배, 공동체 생활, 복음선포, 봉사(섬김)이라는 교회생활에 이미 나타나고 있다.커리큘럼 설계를 위한 다섯 가지 원칙들로는 1교육의 커리큘럼-섬김, 공동생활, 복음선포, 예배, 가르침의 상호작용 속에서 일어나는 교육-과 학교교육 커리큘럼-많은 가치 있는 형태중 하나(가르침)-을 구별해야 한다. 2교육사역의 커리큘럼은 다양하다. 3교과내용(주제)은 다양한 층을 가지고 있다. 4커리큘럼은 제사장적이고 예언자적이며 정치적이어야 한다. 5커리큘럼은 명시적, 내재적, 영적 커리큘럼의 세 가지 형태를 모두 고려해야 한다.2부 소명(The Vocation)제4장: 코이노니아-공동체의 커리큘럼코이노니아를 가지고 먼저 시작하는 이유는, 오직 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모이는 생활로부터 만이 나머지의 교육적인 사역들도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여러 가지의 다른 방식으로 교회 공동체를 이룰지라도, 결국은 다른 사람들과의 일치와 통일을 향한 움직임으로서, 코이노니아 사역의 핵심인 사랑으로 나아가는 것이 기독교 공동체의 과제이다. 그리고 한 하나님의 백성을 창조하는 방식은 우리에게 공동체의 다스리는 실재로서, 죄를 깨닫게 하는 실재로서, 그리고 아직 실현되지 않은 불완전한 실재로서의 공동체의 양상을 부여함으로써. 그리고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체에 대한 우리의 의식을 심화시키는데 도움을 준다.제5장: 레이투르기아-기도의 커리큘럼이 두 번째 큰 형태의 종교적 생활은 레이투르기아인데 그것은 전통으로부터 물려받는다. 즉, 레이투르기아는 예배라고 기도하는 목회적 소명에 따른 교회 생활로서 의례적 삶(의례적 축제)과 매일의 삶을 함께 포함하는...한 백성의 활동들 을 말하는 것으로 이 장에서는 교육적인 사역의 커리큘럼의 하나의 구성요소로서의 기도에 초청을 맞추어 전개하고 있다.모든 공동체는 더불어 함께 존재하는 자신의 고유한 모임의 방식 속에서 일정한 양식과 리듬들을 형태적으로 확립하게 되는데, 어떤 공동체가 기독교 공동체라면 그 공동체가 개발하는 중심적인 형태와 규칙가운데 하나는 공동체의 기도 생활이다. 교회내에서의 기도의 형태들에는 일반적으로 개인적인 기도와 공동의 기도의 두 가지의 주된 범주로 나누어진다. 개인적이고 공동적인 기도를 통하여 교육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네 가지의 과제들이 오늘날 교회에 대단히 중요한데, 영성의 추구와, 기도의 정의를 위한 행위를 분리하는 것을 거부하고, 다양하고 복합적인 역할과 참여를 고무시키는 예배 행위를 설계해야 하며, 커리큘럼의 자원들을 위한 센터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도는 능력을 예리하게 하며, 그 어느 곳이나 우리에게 전해지는 말씀들을 위해 우리를 준비시킬 수 있는 교육사역에 중심적인 것이고, 일반적인 출발점이다.제6장: 디다케-가르침의 커리큘럼디다케는 사도들의 가르침 가르침과 교훈 토라의 한 형태로서 길(진리)에 관한 지시, 교훈, 정보 안내이다. 라는 개념과 아울러 이것이 포괄하는 광범위한 의미 때문에, 디다케를 가르침의 커리큘럼을 나타내기 위한 전체를 포괄하는 용어로 또 학교 교육의 커리큘럼과 연관된 활동들을 포함하는 용어로 사용된다.이 가르침의 커리큘럼은 가르쳐질 지식과 행위체계가 존재할 뿐만 아니라 이러한 체계는 그것을 통해 전달되는 과정체계가 함께 존재하기에, 이 두 가지는 필수적으로 커리큘럼을 적인 형태들과 질문, 분석, 해방을 강조하는 현대적 이해들이 있다. 가르침의 커리큘럼에서 가장 밀접하게 요구되는 과제들로는 1가르침이 일어나는 광범위한 환경을 강조해야 할 필요, 2가르침이 형태들의 목록들을 개발할 필요 3주제라는 표현아래 소주제의 폭 넓은 범위에서 토픽들을 접근해 들어갈 필요 4전통을 넘어서기 등이다.제7장: 케리그마-말씀선포의 커리큘럼본래의 케리그마란 그리스도의 수난, 죽음, 그리고 부활에 대한 설교를 의미하나 오늘날 케리그마가 지니고 있는 공간적이고, 지역적이고, 시간적인 성격을 고려해 볼 때, 케리그마는 본질적으로 우리로 하여금 정의의 커리큘럼을 지향하도록 고무시키는 정의의 말씀이다. 그리고 성서 안에서 이 정의는 우리의 관계들의 요구와 진리에 대한 신실성으로서 구체적으로 열정적인 보살핌으로부터 일어나고, 하나님이 주신 이 좋은 지구의 온갖 선물들을 인간뿐만 아니라, 모든 자연만물과 함께 나누려는 바람으로부터 생겨난다. 그 결과로 우리는 모두 신실한 자들이 될 수 있으며 말씀선포의 커리큘럼의 토대가 되는 성서, 신학, 그리고 설교의 위대한 언어적인 형태들이 포함된다.이 신앙은, 교회전통의 유산 안에 존재하는데 이런 것들 가운데는 복음의 선포를 받아들인 공동체에 요구된, 본질상 교육적인 과제는 케리그마가 말, 발언, 목소리이기 때문에, 그리고 케리그마가 사역의 모든 요소들과 마찬가지로 제사장적이고, 정치적이기 때문에, 제사장적인 경청, 예언적인 연설, 그리고 정치적인 변호의 삼중적 활동이다. 케리그마는 실제적인 경청이며, 경청의 과정에서 생겨나는 교육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어떠한 태도로 사회속에 존재되어야 하는지를 가르쳐 준다.제8장: 디아코니아-봉사의 커리큘럼디아코니아는 공동체의 모든 범위의 섬김과 봉사활동의 의미로 또는 다른 사람들에 대한 봉사와 섬김으로 사용되어진다. 사랑의 봉사는 전 기독교 공동체의 본질적인 커리큘럼의 한 부분이며, 동시에 목회적 소명을 지닌 모든 사역의 활동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우리가 봉사를 직접적으로는 개인적이.
종교개혁은 서구 역사에서 중세에서 근세로의 새로운 시대를 열었던 일련의 과정을 말한다. 이 말은 여러 가지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우선 종교개혁이란, 말 그대로 종교 개혁의 차원에 국한된 것이 아나라 전사회적 변혁으로서의 성격을 지닌 역사적 사건이라는 것을 말한다.또한 종교개혁은 중세적 옛 질서의 잘못된 일부를 시정하려는 일면적 개혁운동이 아니라 옛 질서 자체를 근본적으로 부정하고 새로운 질서를 수립하려는 운동으로서의 성격을 지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물론 종교개혁은 로마교황청의 부패와 그에 따른 잘못된 관행을 시정하려는 데서 직접적으로 표출되었지만, 그 표면적 현상만으로 설명될 수 없는 의의를 지닌다는 것이다. 그 까닭은 중세적 질서의 중심이 교회였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다시 말하면 중세생활의 모든 것이 교회로부터 출발하고 교회와 관계되어 있었기 때문이다.중세의 교회란 오늘날의 교회와는 전혀 다른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중세의 교회란 기본적으로 세속의 봉건적 질서의 정점에 위치하여 있었다. 따라서 그것은 단순히 세속권력의 일부가 아니라 곧바로 세속권력 그 자체를 대변하고 있었다. 게다가 그것은 신적 질서의 표현으로 간주되었다.그러니까 중세의 교회란 세속권력의 정점임과 동시에 세속권력을 신적 영역으로 편입시켜 거룩한 질서로 정당화해준 기제로서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것의 구체적 표현이 교황의 세계지배였다. 때때로 교황권과 황제권, 혹은 교권과 세속권력 사이에 갈등이 일어나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 신성의 영역과 세속의 영역을 동일시하는 질서가 지속된 것이 중세기였다.그러기에 우리는 중세기의 서구 세계를 그리스도교왕국 또는 그리스도교제국 (Christendom)이라 말한다. 바로 중세사회의 이러한 성격 때문에 종교개혁은 전사회의 근본적 변혁운동으로서의 성격을 지고 있는 것이다.그러나 오늘의 현실은 종말론적 희망 자체가 사라진 현실이다. 왜곡된 종말론 운동은 횡행하나 진정한 종말론 운동이 사라지는 듯이 보인다. 그저 즉물적인 생활양식과 신앙양식이 판을 피고 있다. 근본을 상실한 세태이다. 종교개혁의 의미를 되새기며, 무엇이 정말 옳은 길인지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만나는 것인지 근본에서 다시 묻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종교는 인류의 출현과 동시에 그에 발맞추어 나타났고, 세상의 발전에 따라 그 역시 발전해 왔다. 본디 날카로운 이빨도, 손톱도 가지지 못한 우리 인간은 손으로 도구를 만들어 그 생명을 유지해 왔고 항상 타 동물보다 우위에 서 있을 수 있었다.그러나 인간은 정신적으로도 약한 생물이었다. 그들은 어려운 일이 닥치면 자신을 기댈 그 무언가 를 찾기 시작했고, 그 결과로 원시 샤머니즘적 종교가 생겨났다. 그 토속신앙들은 세월이 흐르면서 변형되고 발전하여 오늘날의 뚜렷한 교리와 질서를 가진 종교가 탄생되었다. 그 종교들은 인간의 약한 쪽을 기대어 받쳐주며 그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왔다.그러나 인간에 의해 창조되고 존속되어 온 종교 역시 일부 개인의 더러운 욕망에 의해 그 의미가 퇴색되고 더럽혀진 적이 있었다.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이 교황청의 타락과 면죄부 판매일 것이다.이 일련의 부패들은 많은 사람들을 분노케 했고, 마르틴 루터, 칼뱅, 츠빙글리 등의 개혁을 부르짖는 자들의 출현하게 되었다.그 당시의 세계는 암울함이 드리워진 세계였다. 새로운 이념이 일어서 그것이 다시 타락하고, 다시 이념이 일어서 타락하고... 그 과정이 순환되는 한 줄기의 말단부분.. 그것이 중세 기독교 사회의 결말이었다. 그리고 루터는 그 썩어가는 줄기를 잘라내 싱싱한 가지를 그 위에 접목시켰다. 간단한 일 같지만, 그 누구도 쉽게 할 수 없는 일을 그는. 마르틴 루터는 해낸 것이다.지금의 기독교는 세계에서 손꼽는 세력을 자랑한다. 그러나 지금의 기독교는 너무나도 비대해져있다. 과연 과거의 악몽이 재현되지 않으리라는 법이 있을까? 기독교뿐만의 문제가 아니다. 세상 그 어떠한 종교도, 세상 어떠한 단체도 그런 악행을 저지르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 이렇듯 혼탁해진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가 과연 어찌해야하는지, 루터의 더없이 맑고 순수했던 그 신심에 비추어 우리자신을 비춰 보아야 하겠다.모든 역사에는 본질이 있다. 본래적 의미에 대한 진지한 탐구 노력이 없는 역사유용은 역사의 질을 낮출 위험이 있다. 이것은 연대기적인 역사 서술과 그 해석이 함께 병행해야 하는 학문적 이유다.그렇지만 종교개혁은 단순한 역사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정체에 대한 심층적 분석이요, 교회의 사명에 대한 성서적 해석이며, 기독교의 본질에 관한 명확한 정의이다.이런 의미에서 『종교개혁과 반종교개혁』의 저자인 칼-하인츠 츠어 뮐렌 교수는 『신학사전』(TRE)에 루터 신학 을 집필했고, 최근에 출판되고 있는 『종교사전』(RGG 4판)에 루터 신학의 영향사 를 저술할 정도로 독일 루터 신학 연구의 주요 인물이기도 하다. 그의 루터 신학에 대한 관심과 열정은 이미 작고하신 그의 스승 게르하르트 에벨링 문하에서 튀빙겐과 취리히를 동행하며 바이마르판 루터 총서(WA) 편찬 작업에 참여할 때부터 시작되었다.
기독교 영성의 본질과 특징1. 기독교 영성과 성서기독교 영성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로부터 비롯되는 성서의 열매(산물)라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기독교 영성의 모든 주제와 내용이 성서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 영성의 핵심 주제는 하나님과 우리 인간과의 바른 관계성 회복(형성)과 증진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성서의 모든 말씀(책)들이 바로 이 주제에 관해서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성서는 바로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어떠한 분이며, 하나님의 창조인 인간과 세계, 즉 우주 만물의 기원과 존재 이유와 의미는 무엇이며, 또한 하나님과 우리 인간 및 피조물과의 관계는 어떤 것이며, 성령의 내주적 활동과 역사는 어떤 것인가에 관해서 말해주고 있다. 우리 인간의 하나님께 대한 바른 응답과 태도는 무엇이며, 우리가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나님 앞에서 가장 옳고 합당한 삶인가에 대해서 말해 주고 있다.기독교 영성은 성서의 진리들을 우리의 깊은 영적 체험과 영적 조명(각성 또는 성숙)을 통해서 깨닫게 하고 실천할 수 있게 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2. 기독교 영성의 원천기독교 영성의 원천과 근거가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기 때문에, 기독교 영성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의 은총과 함께 그리스도 자신의 삶과 지혜, 그리고 그의 깊은 영적 체험과 인식(앎)에 기초한다.그러므로 기독교 영성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시작해서 다시 그분에게로 돌아가는 운동이며,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는 기독교 영성의 출발점이며, 길이고, 표준이며, 또한 목표라고 말 할 수 있겠다.3. 영성과 하나님 체험기독교 영성의 핵심은 올바르고 깊은 ‘하나님 체험’(experiencing God)에 있다. 기독교 영성은 단순히 성령 체험이나 어떤 은사 체험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도움으로 그리스도와 하나님을 올바로 알고 체험하여, 그분의 뜻대로 살게 하는 데 목적이 있다.우리 기독교 신앙과 영성의 핵심은 다름 아닌 바로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체험하고 보여준 그러한 하나님을 올바로 알고 체험하며 만 한다. 그 성령의 도움을 통하여 우리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체험하고 알려주신 그 사랑의 하나님, 아바 아버지 하나님을 우리의 영혼 깊은 곳에서, 그리고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구체적으로 체험하고 알게 되는 것이다.하나님을 가장 구체적으로, 가장 깊이, 가장 올바르게 체험하며 인식하는 일이 바로 우리 기독교 영성의 본질이라 하겠다.4. 하나님 형상과 영성우리 인간의 하나님 체험이나 영적 생활의 가능성은 우리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image of God)대로 지음 받은 영성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즉, 기독교 영성의 가능성과 특성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인 ‘영성’을 소유한 존재라는 성서적 인간관에 근거하고 있다. 특히 바울의 서신들에 의하면, 인간은 육과 영이 결합된 존재로, 때로는 육과 혼과 영(flesh, soul, spirit)의 통합적 존재로 묘사되고 있다.인간이 육체를 소유한 존재이긴 하지만, 근본에 있어서는 영적인 존재, 즉 영성적 존재임을 나타낸다. 인간은 영성을 소유한 영적 존재이기 때문에 영적 실재인 하나님과의 동화가 가능하며, 감각적이고 물질적인 이 세계 속에서의 영성적 삶이 가능한 것이다.“신령한 것은 신령한 것으로만 알려진다.”(고전2:13)고 말한 사도 바울의 표현은 그분의 창조 세계인 만물의 존재 의미와 목적과 뜻을 바로 알 수 있게 된다는 진리를 말하려는 것이다.오리겐은 하나님의 형상을 ‘지성’과 ‘영성’과‘사랑’의 세 요소로 보았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의 형성이 회복된 영성적 존재가 된다는 것은 순수한 ‘영성’과 함께 밝은 ‘지성’과 강한 ‘사랑’의 존재가 되어야 함을 의미하며, 이런 점에서 기독교 영성은 높은 지성, 즉 순수한 지성과 강한 사랑을 동반하는 영성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5. 내면 세계로의 여행기독교 영성은 우리 인간으로 하여금 잃어버린 영적인 세계를 다시 찾고 다시 발견하게 한다.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내면의 세계, 영혼의 세계, 즉 영적인 세계는 시간-공간의 제한이 없는 무한의 세계이고, 아무런 속박과 구속간의 세계에서 영원의 세계로의 여행이며, 따라서 시간의 세계 속에서 영원을 경험하고 맛보는 행위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내면 세계로의 여행은 영원을 사모하는 행위이며, 하나님의 영적 세계, 진리의 세계, 참 존재의 세계, 즉 실재의 세계(the world of reality)로의 여행이라고 말할 수 있다.이러한 깊은 내면 세계로의 여행을 위해서 먼저 우리 자신을 속박하고 있는 자기 우상화와 온갖 집착과 사념들을 떨쳐 버리는 자기포기의 훈련이 있어야 하며, 깊은 자기성찰을 위한 ‘홀로 있음’과 ‘침묵’의 훈련이 요구된다.따라서 기독교 영성은 자신(영혼)의 깊은 내면 세계로의 여행과 진정한 하나님 체험을 위한 철저한 ‘자기 포기’와 ‘초탈’, ‘홀로 있음’과 ‘침묵’의 훈련 및 수도를 포함하고 있다.6. 영성과 창조의 신비기독교 영성은 하나님 체험이나 우리의 내면 세계로의 여행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 세계인 만물 하나하나의 존재 의미와 가치와 목적, 즉 그들의 참된 실상을 파악하려 한다.우리는 지금까지 자연은 우리 인간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으로 생각해 왔다. 그래서 우리 인류는 자연을 인간의 문명을 위한 도구로만 생각해 왔었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 영성가들은 자연을 인간을 위한 도구로 보지 아니하고, 오히려 피조물 그들 자체로서 의미가 있으며, 만물 하나하나에 대한 창조주 하나님의 사랑이 깃들어 있음을 발견하였다. 그리고 또한 만물은 바로 그들의 창조주 하나님을 표현하고 드러내는 수단들이며 언어들임을 간파하였다.기독교 영성은 깊은 하나님 체험으로 얻은 영적 통찰력으로 하나님이 창조한 자연의 세계, 우주의 신비, 만물 하나하나에 담긴 의미와 가치를 식별하며, 또한 그들을 통하여 창조주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와 은총의 깊이를 깨달으며, 그리하여 창조주 하나님과 더 가까이 접근하게 된다.7. 영성과 기도기독교 영성은 기도와 긴밀한 관계가 있다. 그 이유는 기독교 영성의 원천이며 궁극적 모법인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 기도의 삶이었기 때문이다.기도 된다. 또한 기도는 우리의 영혼과 하나님과의 산 관계를 맺게 하는 생명의 줄로서, 기도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과의 생명 관계를 유지한다.가. 구송기도(vocal prayer)이 기도는 말과 소리로 드리는 기도로서, 오늘날 교회에서나 가정에서 신도들이 드리는 일반적인 기도이다. 특징은 어떠한 구체적인 내용을 하나님께 아뢰는 기도이다. 때로는 소리 없이 글이나 마음으로 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것을 묵고 또는 고요한 기도라고 부른다. 형태로는 청원기도, 감사기도, 회개기도, 중보기도 등 이 있다.나. 마음의 기도(meditation)이 마음의 기도는 침묵의 기도로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하나님께 집중하고, 하나님을 향해서 우리의 마음을 열어 우리의 영혼을 드리는 기도이다. 흔히, ‘명상기도’혹은 ‘묵상기도’라고 하는데, 하나님의 뜻과 음성을 듣고 알아차리며 깨닫는 기도이다. 침묵의 기도, 즉 명상적 기도는 인간측에서의 능동적인 기도가 아니라, 우리의 심령 속에서 하나님의 영이 활동하시는 수동적인 기도라고 말 할 수 있다.다. 관상기도(contemplation)이 관상의 기도는 가장 심오한 영적 단계의 기도로서 우리의 영혼이 이 세상의 모든 욕심과 얽매임에서 완전히 초탈되어 맑게 정화되고 우리의 심령이 신적 광채로 밝게 조명되었을 때, 우리의 영으로 하나님의 실재를 직접 볼 수 있는 최고의 영적 경지에 진입하는 기도를 말한다.라. 합일의 기도(prayer of union)합일의 기도는 하나님의 영과 하나가 되는 기도를 말한다. 이러한 기도를 성 테레사는 하나님과의 ‘영적 결혼’이라고 말하였으며, 클레르보의 성버나드는 그리스도의 입에 입맞춤하는 것으로 비유하였다.마. 기도와 노동아주 넓은 의미로 기도가 하나님과의 대화, 만남, 또는 영적 교류라고 볼 때, 그리스도인의 삶 전체가 하나이 기도라고도 말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고대나 중세의 수도원에서는 노동도 중요한 기도로 간주되었다.모든 기도는 하나님의 은총을 전제로 한다. 그리스도인의 모든 기도는 성령의 도움을 야 한다.8. 영적 성장의 단계그리스도인의 삶은 지속적인 영적 성장을 목적한다. 고대 교회의 그리스도인들과 수도자들 및 기독교 영성가들은 이 목표의 달성과 실현을 위해서 부단한 노력과 정진을 계속하였다.우리 기독교 영성을 심화시키고 빛내준 여러 영성가들의 삶과 교훈을 종합해 보면, 그리스도인의 영적 성장의 과정과 단계를 다음 네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가. 회심 체험(experience of conversion)회심의 체험은 자기 중심적 자아가 어떤 중요한 종교 체험(중생 체험)을 통하여 깨지고 새로운 자아로 눈뜨게 되며(awakening of the self), 자기 자신 밖의 넓은 세계, 즉 하나님과 타인을 위한 새로운 삶으로 전환되는 현상을 말한다. 이러한 강한 종교 체험이나 회심 체험은 개인의 생의 방향을 전환시켜 주는 원동력이 될 뿐 아니라, 그 사람의 영적 성장의 새로운 전기를 제공하는 것으로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나. 정화와 초탈(purification and detachment)우리 인간은 어떤 큰 종교 체험(신비체험)이나 회심 체험을 했다 해서 하루 아침에 완전해질 수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영접한 후에도, 회심과 중생 체험을 하고 나서도, 우리 속에는 아직까지 탐욕과 위선, 미움과 교만과 자기 중심 등, 죄의 씨앗과 뿌리가 여전히 남아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영혼과 존재가 참으로 외로워지고 성결해지기 위해서 우리의 영혼을 맑게 정화하는 정화의 과정이 필요한 것이다.이 과정은 우리의 영혼을 맑은 물처럼 깨끗하게 닦는 일이며, 우리의 자아가 세상적이고 인간적이며 감각적인 속박에서 벗어나 참으로 자유로운 존재가 되기 위한 ‘초탈’의 훈련과 실행을 말한다.우리 기독교 영성가들은 이 자아 혹은 영혼의 정화 및 초탈의 최상의 방법은 철저한 ‘자기포기’(apatheia)와 ‘자기부정’(self-negation)이라고 보았다.다. 영혼의 조명(illumination of the soul)철저한 자기 포기와 초탈에 의한 영혼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