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만식 소설의 특징 (해학성 및 풍속의 묘사)◎ 채만식의 생애채만식은 소설가 홍석영(前 원광대교수)의 말처럼 「작가 채만식의 길지 않은 생애는 가 난과 질병과 싸우면서 온몸으로 문학과 대결해온 고독한 생활」이었다.생애를 살펴보자. 그는 1902년 군산시 임피면 취산리에서 부친 채규섭(蔡奎燮)과 모친 조 우섭 사이의 5남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 서당에서 천자문과 동몽선습 소학 사서삼경 등을 깨우쳤으며 9세가 되어서야 임피 보통학교에 입학, 신학문을 접하게 된다. 1918년 서울로 유학, 중앙고보(中央高普)를 거쳐 일본 와세다대학 부속 제일 와세다 고등학원 문과에 입학한다. 그러나 관동대지진과 가정의 어려움으로 1년6개월만에 학업을 단념하고 1923년 동아일보 학예부 기자로 취직하게 된다. 이때 조선 문단에 단편「세길로」를 발표, 문단에 데뷔한다. 1926년에는 조선일보로, 이후 개벽사(開闢社)로 자리를 옮긴다.이에 앞서 그는 중앙고보 2학년인 18세 때 집안의 강권으로 한살위인 함라면 은선흥(殷善興)과 결혼, 3남매를 두었으나 인연을 끊다시피 하고 숙명여고 출신인 둘째부인 김씨영(金氏榮)과 재혼한다. 이러한 초혼의 실패로 인해 가정생활 역시 불우했다. 그러면서도 불패의 자유분방한 기질을 지니고 있어 중학시절 축구선수였으며 대학에서는 학교대표선수를 맡기도 했다.그는 꽃을 지극히 사랑한 반면 심한 결벽증이 있었고 그의 완벽증은 작품에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작품마다 신경질적일 만큼 세심한 솜씨를 보여 부호 하나라도 허술히 하지 않았으며 문장 서술에 있어서도 철저히 냉정함을 유지하였다. 또 그의 직설적인 태도는 문단생활에도 그대로 드러나 교제가 깊은 문인들이 많지 않았다. 백철(白鐵), 이무영(李無影), 최정희(崔貞熙) 정도와 친하게 지냈으며 제자 역시 최태응(崔泰應) 한사람에 그쳤다.그는 한때 동반작가(同伴作家)의 위치에 있었으나 문학가동맹이 좌익단체 임을 알고 곧장 관계를 끊었다. 어떤 조직이나 이데올로기에 묶이는 걸 한사코 싫어했다. 그는 기회 . 그는 소설 뿐 아니라 희곡분야에 까지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그러나 정작 무대에 올려진 희곡은 1편 뿐 이었다.일반적으로 그에 대해서는 풍자작가로 알려져 있다. 그는 김유정(金裕貞) 이상(李箱) 등과 함께 풍자적 방법으로 문학사상 특별한 경지를 개척함으로써 높이 평가받고 있다.그의 문학을 이해하는데 있어 대표할만한 장편소설로 「탁류」「태평천하」「금의 정열」을 들 수 있고, 단편으로는 「레디메이드 인생」「소망(小妄)」「치숙(痴淑)」 등을 꼽을 수 있다.주제면 에서는 시대의 변화에 따른 세태를 사실적으로 그린 것과 지식인의 암담한 생활을 시니컬하게 표현한 내용으로 나눌 수 있다.채만식은 ?자작안내?라는 글에서 “문학을 고려자기나 사군자와 같이 치는 사람이라면 몰라도 문학이 작으나마 인류 역사를 밀고 나가는 한 개의 힘일진대, 한인(閑人)의 소장(消長)거리나 아녀자의 완롱물에 그칠 수는 없는 것이라고 나는 목이 부러져도 주장을 하는 자”라고 했는데, 이 말을 그의 문학이해의 출발 자료로 삼아야 한다. 과연 그는 문학을 ‘역사를 밀고 나가는 힘’으로 보며, 일관되게 민족과 역사, 사회를 그의 제재로 삼아왔다. 한마디로 우리 민족의 삶의 현재와 장래가 제재였다. 현재의 민족 삶에 대해 그는 극히 부정적이지만, 장래에 대해서는 낙관적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개별 작품 대부분은 현재의 무엇이 어떻게 썩었는가를 보여주는 것, 다시 말해 현재를 부정하는 데 모아지고 있다. 그래서 그의 대부분의 작품은 ‘아니다’, ‘나쁘다’의 문맥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그가 기원하는 것은 그가 그린 것의 반대 상황이다. 그는 ?자작안내?에서 “부정면을 통하여 기실 긍정면을 주장하기 위해서”라고 했지만, 사실이다. 그와 동시대의 작가 가운데 그 만큼 현실을(현실의 일부가 아닌 현실 그 자체를) 증오하고 격렬히 부정한 사람은 없다. 그는 타협적, 개량주의적이지도 않았거니와, 프로작가들처럼 현실의 어느 구체적인 부분과 싸우려 한 것도 아니었다.그의 작품에는 현재를 없애기 위해 어떻게 해야 된 관심사였던 현실비판의식의 문학화 역시 본격화된다. 그러나 이 시기는 아직 작가적 성숙성이 약하다고 하겠는데, 문제인식이 단면, 단편적이며 표현 역시 직설적이며 소박한 수준이다. 이것은 이 시기 작품들의 길이가 짧다는 특징에서 우선 잘 드러난다. 이때 짧은 희곡과 대화소설 및 촌극이 20편, 짧은 단편이 10여편, 그리고 장편이 1편 발표된다. 거의 단면, 단편적 스케치 형태가 되는데, 부정의 대상이 되는 것은 ?농민의 회계보고???부촌?류처럼 농촌?농민의 현실, ?두부?류처럼 인텔리의 궁핍상, ?감독의 안해?처럼 노동자의 갈등, ?간도행?처럼 유이민 현상 등이다. 장편 ?인형의 집을 나와서?에서는 가정적 관습, 여성해방문제, 계급문제, 노동문제 등을 다루고 있다.작품을 토대로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면 1930년의 「농촌 스케치」에서는 지주, 교원, 면서기, 금융조합 직원, 순사 등 농촌의 상류층과 농업 경영자라 할 수 있는 일부 소작인들이 부정의 대상이 되는데 이런 인물들이 농업노동자 혹은 빈한한 소작인들의 처지를 비웃으면서 기생 놀음을 하거나 농민 운동을 억압하는 장면이 이 작품 속에 부각되고 있다.「간도행」은 빚을 지고 간도로 떠나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을 대하는 구세군, 일본인, 젊은 조선 사람, 순사, 신사 등의 잘못된 행동을 부각시켰으며, 「조고마한 기업가」는 악덕 브로커라고 할 수 있는, 농토의 중간 경영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웠다. 「부촌」은 풍작이면서도 아무 것도 남을 것이 없게 된 농민들이 타작을 하지 않고 미루어 둔 낟가리를 보고 부촌이라는 탄사를 연발하는 관리를 부각시켰다. 「농민의 회계 보고」는 소작지를 빼앗기고 외지로 쫓겨 가는 농민의 참담한 회계보고서이다. 농민을 지배하는 농촌의 제반 문제를 총괄적으로 부정하기 위한 작품이다. 「두부」와 「창백한 얼골들」은 룸펜·인텔리겐챠의 궁상스러운 모습을 그리고 있다. 지식인과 관련된 사회 문제를 부정하고자 한 것이다. 「감독의 안해」는 공장 노동자와 관련된 문제를 부정하기 위한 작품으로서, 노동쟁의'억지의 형식 논리에 기울어진, 그래서 대체가 모두 옹색스럽고 공극 투성이'라고 생각했다. 결국 그는 자신에 대한 '검사의 논고가 옳고, 변호사의 주장은 아무 소용도 없다'고 주장한다. 다만 그는 과오를 범할 수밖에 없었던 개인적 상황을 약간 첨가함으로써 일말의 동정을 기대하고 있는 듯하다. 그는 이광수나 최남선처럼 구명을 위한 궤변을 늘어놓지는 않았다.그러나 채만식은 자신의 잘못을 자인하면서도 여전히 현실에 대해서는 불만이 많았다. 그 불만이라 개인과 관계되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민족의 장래와 관계되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그에게 , 즉 사군자나 고려청자와 같은 소설을 쓰기를 권유했다. 따지고 보면 해방 이후 아픈 곳을 지니지 않은 문인은 드물었다. 따라서 대부분의 문인들은 몸을 도사려 작품만 쓰는 것이 곧 자신을 보호하는 길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채만식은 단호하게 그것을 거부했다. 그로서는 현실의 증언대에 오르는 것이 곧 속죄의 길이었다.이 시대의 그는 문단의 좌우익 어느 단체에도 관여하지 않고, 이데올로기적 편향 없이 진보적 중간파의 입장에서, 주로 풍자적 기법에 기대면서 ?미스터방? ?도야지? ?맹순사? ?낙조? 등을 통해 당대의 온갖 ‘도깨비’들을 공박했다. 또 우리 근대역사에 대한 관심을 고조시켜 ?늙은 극동선수? ?아시아의 운명? 같은 강사(講史)적 작품도 썼다. ?소년은 자란다?가 그의 마지막 작품인데, 해방전후의 우리 민중의 수난사를 그리면서 새로운 시대에 대한 간곡한 염원을 표했다. ?낙조?에서는 남?북침에 의한 동족상잔 가능성을 경계한 바 있는데, 그 중요성은 당대에 거의 주목받지 못했던 것 같다.이들 작품에서 채만식은 부정적 상황을 구상화하려 했으며, 풍자수법을 통하여 자신의 의지를 적극적으로 표출하려 했다. 이때 채만식은 한편으로는 현실의 부정적 측면을 정밀하게 파헤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보다 시야를 넓혀 현실을 역사적 시각에서 파악하고, 민족의 장래를 전망해 보려고 하였다.◎ 풍자문학1930년대 초반 채만식이 몸담은 바 있는 개이라는 점에서 ‘역사소설’은 적극적인 의미에서의 풍자 정신의 해소에 해당한다고 규정할 수 있다.◎ 문체의 특질문체는 작가 개성의 반로다. 그러므로 언어에 대한 배려 뒤에는 문장을 쓴 사람의 개별적인 성격, 의도, 정신 등이 내재하기 마련이다. 문학의 형식은 내용이 요구하듯이 문체 역시 작가의 의도 및 작품의 주제에 상응해야 한다. 문체론은 문학적 태도로 접근할 때 이해가 가능하다. 문체론적 입장의 연구는 반드시 그 주제와 관련시켜 고찰되어야 한다. 문체는 단순히 작가의 체취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그 주제의 표현 의도에 따라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반어 - 역설 - 풍유채만식 소설은 그 스토리 구성상 원개념과 모순 개념이 서로 대립?갈등하고 있다. ‘무지’와 ‘지’와의 2원적 구조가 그 예로 볼 수 있는데 가정과 사회와 시대에 있어서, 보수적이고 인습적인 ‘무지’의 개념과 진취적이고 비판적인 ‘지성’의 개념은 서로 상반된다. 그의 소설에서 그것들은 팽팽한 대립관계를 유지한다. 지성이 원 개념이면 무지는 모순개념이다. 그러나 채만식은 그 지성을 원 개념으로 주목하는데 그치지 않는다. 원 개념을 드러내고자 할 때 오히려 모순 개념을 사용한다. 그의 소설에서 무지가 판을 치는 것은 바로 그 모순 개념을 언어의 표면에 드러냈기 때문이다. 그것이 채만식 소설의 겉 구조다. 겉 구조를 통해 속뜻을 표현하려는 이른바 반어법의 사용은 채만식의 탁월한 발견이다.여기서 반어법이란 사물의 이면적 서술로 진의를 표시하는 일종의 독설이요 야유이다. 단편 「치숙」에 나타난 반어법은 화자를 통해 잘 드러나 있다. 이 소설에서의 작자의 의도는 지식인의 사상과 행동이 사회적 조건과 서로 불화하는 데서 오는 감정을 진실이라 표출하고자 하는데 있다. 그러나 그러한 내용을 들려주는 화자는 오히려 무식하고 비루한 인물이다.본문에서 살펴보면 1930년대 지식인이 겪는 무위의 생활상을 그린 부분이 있다. 지식인 아저씨가 해야 할 신세타령과 답답함을 무식한 조카가 대신 비아냥거리고 있다.“뭐, 말슷하다.
◎동반작가동반작가란 러시아 혁명 후 소련에서 사용하기 시작하여 1920∼1930년대 프롤레타리아 문학이 왕성하였을 때 사용된 용어이다. 사전적 의미로는 러시아 공산주의 혁명 당시 공산주의 운동에는 직접 참가하지 않으면서 혁명운동에 동조하던 자유주의적 성향을 띤 작가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 작가들은 조직적인 프로 문학 운동에 원칙적으로 찬동하기는 한다.우리나라의 동반자 작가 활동은 계급주의 문학운동이 왕성하게 일어난 1920년대 말부터 계급주의 문학이 일제로부터 탄압을 받으며 해체되기 시작하는 30년대 초반까지 이루어졌다. 한국문학에서 이러한 동반작가의 의미는 1920년대 말에서 1930년대 초기의 수년 동안만 가능했을 뿐이다. 프로 문학이 객관적 정세악화에 부딪친 1931년 이후부터 동반작가의 의미는 거의 상실되기 시작하였다. 프로 작가조차도 전향하기에 이르렀으며, 1934년 박영희(朴英熙)의 전향선언인 《최근 문예이론의 신전개와 경향》에서 그 절정을 이루었다. 그 후 동반자 작가들은 각자 새로운 문학경향으로 변화하였다.우리나라의 주요 작가로는 한국에서는 유진오(兪鎭午) ·이효석(李孝石) ·이무영(李無影) ·채만식(蔡萬植)·조벽암(趙碧巖) ·유치진(柳致眞) ·엄흥섭(嚴興燮) ·홍효민(洪曉民) ·박화성(朴花城) ·안덕근(安德根) 등을 들 수 있다. 이 중에서 작품상 뚜렷한 동반문학의 성격을 드러낸 작가 및 작품으로는, 카프에 의해 동반자 작가로 인정된 작가인 이효석의 《노령근해》, 유진오의 《여직공》 《오월의 구직자》 등이 있다. 이들은 카프의 맹원은 아니었으나, 초기의 작품 경향은 카프의 주장과 일치하고 있다.이 중 이효석은 동반작가 중에서 전향하여 가장 선명하게 순수문학에 귀한 하였다. 1933년 그는 자연묘사와인간의 성을 주제로 한 《돈》을 발표하였고 뒤이어 《화분》이라는 장편을 썼다.1917년의 10월 혁명은 지식인들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는데, 일부 지식인은 혁명의 선두에 나서는가 하면 일부는 반혁명의 대열에 서기도 하였다. 한편 중간에서 방황하던 지식문학은 문학을 정치성에 결부시켜 문학작품을 선전 도구화함으로써 스스로 설 자리를 잃고 마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이른바 동반 작가의 출현은 10년 동안이나 한국 문단의 주도권을 잡았다. 프로문학의 세력과 그 여파, 즉 그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이해된다. 동반 작가란 카프의 정식 멤버는 아니었지만, 프로문학에 대한 동지적인 이해에서 경향적인 이론과 작품을 발표한 사람들을 두고 이르는 말이다.'동반자'라는 말은 본디 러시아 문학에서 온 것으로 1971년 러시아 혁명 이후 새로운 문학이 시작되면서부터 네프(NEF) 시대가 끝날 때까지 러시아 문단에서 큰 세력을 이루었던 우익 문학에 주어진 명칭이다. 그들은 공산주의 혁명에 가담하지 않고, 다만 호의를 보이면서 그저 따라가는 사람들이었다. 흔히 지식 계급층에 이런 동반자가 많았다.우리 나라에서 동반 작가라고 하면 1925년대 전후의 신경향파 작가였던 최서해·주요섭·이익상과 을 쓴 최독견 등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정식으로 문제가 된 것은 1929년 이후 30년대 초부터인 것이다.카프에서 동반 작가로 인정한 작가로서는 유진오, 이효석 등이다.이 두 작가는 카프의 정식 맹원은 아니었지만, 완전히 카프의 작가와 일치했고 그 방침에 동조했었다. 그런데 이와 같은 평범한 규정은 섹트 의식을 갖게 하였고, 결국 1933년 채만식과 이갑기의 동반자 작가에 대한 논쟁이 『중앙일보』를 통해 일어났고, 아를 계기로 하여 백철·임화·안함광·신고송 등의 논쟁을 거쳐, 일종의 종파적인 잘못은 저지른 것으로 귀결되어 그 범위가 넓어졌다.유진오는 1927년부터 「조선지광」 등에 작품을 발표함으로써 문단에 등장했다. 그는 동반 작가로서 (1927), (1929), (1931), (1931), (1931) 등 경향적인 작품을 썼다. 특히 이 무렵의 유진오의 작품은 관념적이며 추상적인 이효석의 작품에 견주어 보아 훨씬 구체적이어서 주목을 끌었다. 에서 그 한 예를 들어보자.「옥순이가 공장 문을 나섰을 때에는 긴 여름 해도 다 가고 왼 세상은 어둑어둑 등은 1930년대를 전후해서 이러한 경향을 나타낸 작가들이다. 엄흥섭은 초기의 (1925)에서 동반자적인 입장을 취했고, 그의 대표작인 (1935)를 발표하여 평판을 얻었다. 장편 소설 로 1931년에 문단에 등장한 한인택도 경향적인 작품을 썼다.채만식도 1933년까지는 등 동반자적·풍자적인 작품을 발표했다. 박화성은 카프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으나 1925년 「조선문단」지에 를 발표할 때부터 프로문학 전성시기까지의 작품은 대체로 그러한 경향의 것이었다. 1934년에 김기진이 이라는 글에서 열거한 동반 작가는 이상에 든 작가 이외에 장혁주(張赫宙)·이무영(李無影)·조벽암(趙碧岩)·유치진·안덕근(安德根)·홍효민(洪曉民)·최정희(崔貞熙)·김해강(金海剛)·이흡(李洽)·조용만(趙容萬) 등에 이른다. 그러나 이는 카프 측에서 공식적으로 표명한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김기진 스스로의 의견에서 나온 것이다. 다만 이로 미루어 보아 이 시기의 작가들이 대부분 그러한 경향의 작품을 다소간은 시도해 보았다는 점을 보여 주는 것이다.◎ 이효석● 생애호는 가산(可山)으로 강원도 평창군 봉평면 출생이다.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를 거쳐 경성제 국대학 법문학부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하고 숭실 전문학교, 대동공업전문학교 교수로 재임 하였다.1928년 「도시와 유령」을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였으며, 「노령근 해」,「상륙」,「행진곡」,「기우(奇遇)」, 등을 발표하면서 동반자 작가로 활동하였다. 그 후 모더니즘 문학단체인 《구인회》에 참여하였고 「돈(豚)」,「산」,「들」, 등을 발표하면서 자연과의 교감을 시적인 문체로 유려하게 묘사한 작품들을 발표하였다. 1936년에는 한국 단편문학의 백미라고 평가되는 「모밀꽃 필 무렵」을 발표하였으며, 심미 주의적 세계관을 나타낸 「장미 병들다」,『화분』 등을 계속 발표하여 인간의 성(性) 본능을 탐구하는 새로운 작품경향으로 주목받았다.작품집으로는 『노령근해』(1931년), 『성화』(1939년), 『해바라기』(1939년), 『이효석 단편선』(1어린 아들을 봉평에서 약 40킬로미터쯤 떨어진 평창까지 보내 보통 학교를 다니게 했다는 것이 이나미의 주장이다. 보통학교를 졸업하던 1920년에 이효석은 서울로 유학을 떠났으며, 그의 타향살이는 1942년에 평양에서 그가 세상을 버릴 때 까지 계속되었다. 그는 22년간 고향을 떠나 살면서도 고향으로 내려간 적이 거의 없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사실은 그의 친지들의 증언뿐만 아니라 이효석 자신의 글을 통해서도 확인이 된다. 이와 같은 고향상실증은 그의 창작 경향과도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 「메밀꽃 필 무렵」에서는 봉평에서 대화에 이르는 지역을 소상히 알 뿐만 아니라 그 지역에 대한 애정까지 사람이 아니고서는 쓸 수 없는 작품이 분명하다.그에게는 태어나면서 생긴 고향과는 다른 어떤 후천적이며 인위적인 고향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즉 그에게는 반생 동안 독서를 통해 조성된 서구라는 이국적 세계에 대한 깊은 동경이 늘 있었으며 이 동경이 그렇지 않아도 박약했던 그의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더욱 박약하게 만든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문학세계○습작기에서 동반작가 시절까지이효석은 어려서 신소설 『추월색』을 읽으면서 문학의 향기를 알게 되었으나 보통학교를 다니는 동안에는 특별한 문학수업을 하지는 않았다. 그는 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 문학에 대한 열정을 가져 러시아 소설을 열심히 읽었으며, 특히 체홉의 소설에 심취하여 리얼리즘을 배웠다. 또 그는 쉘리, 예이츠 등의 시와 싱그의 희곡을 탐독하며 문학의 기초를 마련하였고 신문에 시와 꽁트를 발표하기도 하였다.대학시절에 그는 시와 꽁트를 발표하였고 1927년 최초의 본격적인 소설이라 할 수 있는 「주리면… -어떤 생활의 단편」을 발표하면서 본격적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그가 습작기에 발표한 시들은 서구의 시풍을 닮아 있어 세련된 감각은 있으나 그 내용과 정서가 뛰어난 작품들은 아니었으며, 여러 편 발표한 꽁트들도 형식의 완결성이나 내용의 풍부함이 부족한 작품들이었다.이효석은 단편 「도시와 유령」을 발표하면서 때문이다.대표적 작품으로 「도시와 유령」- 현실에 대한 독자의 각성을 촉구하는 선전 선동성이 잘 나타난 작품이다. 이념의 구호가 작품의 가치를 크게 앞지르는 단편소설로 본다.「프레류드-여기에도 한 서곡이 있다」는 프롤레타리아 이념을 마음에 두고 쓴 마지막 작품이며 이데올로기 선전에만 치중하던 모습에서 벗어나 인물 행동의 동기를 객관적으로 제시하려는 작가의 노력이 두드러진 작품이다. 이처럼 「프렐류드」에서 이효석은 절제되지 않은 감정의 발로를 통한 이데올로기의 생경한 선양을 피하고 주인공이 행동의 동기를 얻어 변신하는 모습을 보이려고 애쓰고 있다. 이는 근간 구호 외치기로 일관해 오던 그의 ‘경향적’ 작품들에 비할 때 상당한 기법상의 발전을 보여준다.그러나 이효석은 「프렐류드」를 끝으로 좌경 사상이 본격적으로 실린 작품의 창작을 사실상 마감했다고 할 수 있다. 그렇게 된 데에는 작가 나름의 내적 동기도 없지 않았겠지만 그것보다는 외면적 압력이 더 크게 작용하고 있었다. 1931년 6월에는 카프 맹원들에 대한 제 1차 검거 사태가 있었고 이를 기화로 좌익 문학은 퇴조하기 시작했다. 박영희가 1932년 1월 초에 ≪동아일보≫에 연재한 논설문에서 프롤레타리아 문학으로 인해 “예술은 무공의 전사를 할 뻔하였다. 다만 얻은 것은 이데올로기며 상실한 것은 예술 자체이었다.”고 지적한데서 잘 나타나고 있듯이 작가들로 하여금 무분별한 이념에의 탐닉에서 한번쯤 자기반성을 해보도록 요구하고 있었다. 원래 뚜렷한 내적 동기가 없이 ‘경향적’소설을 쓰기 시작했던 이효석은 이런 분위기를 타고 누구보다 민감하게 반응을 보였던 것이다.이효석으로 하여금 프롤레타리아 문학의 동반자적 자세를 버리게 한 동기는 그 자신의 처신에서도 찾을 수 있다. 그는 1931년에 총독부의 검열관으로 잠시 취직했다가 어떤 카프 맹원으로부터 크게 모욕을 당한 적이 있거니와, 유진오의 말대로, 이 사건을 계기로 이효석이 “종래의 ‘동반자’적 태도에서 순수문학의 방향으로 발길을 돌린 것”이라고 단언하기는 어려울지 (
보나파르트 나폴레옹목차⊙ 나폴레옹의 업적 ○ 나폴레옹의 성장 ○ 나폴레옹의 몰락 ⊙ 나폴레옹의 역사적 평가 ○ 여러 역사적 인물들과의 비교 ○ 역사적 평가 ⊙ 나폴레옹 일화 ○ 명언 ⊙ 마치면서나폴레옹의 성장지중해 코르시카섬에서 지주의 아들로 태어남 1789년 프랑스 혁명이 일어났을 당시만 해도 코르시카만을 위해 국민병으로 나가서 싸우게 됨 1796년 3월,이탈리아 원정군 사령관에 임명 1789년 7월 프랑스 혁명 일어남 1798년 5월 나폴레옹, 이집트 원정출발 1802년 1월 나폴레옹,이탈리아 공화국 대통령이 되다 8월 나폴레옹, 종신 집정이 되다나폴레옹의 성장1805년 3월 나폴레옹, 이탈리아왕이 되다 8월 제3대 프랑스대동맹 11월 베를린 칙령, 대륙봉쇄개시 1812년 6월 러시아원정 3월 파리 입성 4월 나폴레옹 퇴위 5월 나폴레옹, 엘바섬으로 유배당함, 프랑스 제 1왕정 복고 10월 나폴레옹, 세인트 헬레나섬으로 유배나폴레옹 시대의 유럽나폴레옹의 업적1798년 카이로에 입성해 피라미드와 상형문자를 연구 1년 후 제1통령이 된후 학교를 설립 혼란한 국정정비와 세계 3대법전으로 꼽히는 '나폴레옹 법전'을 만듬 나폴레옹은 국립은행의 설립, 상업의 장려, 국민 교육의 보급 사회적 약자의 인간해방 인류평등의 구현과 이성적 세계의 근대성의 출현나폴레옹의 몰락귀족 제도가 되살아나고 자신의 형제자매들을 주변 영토의 군주로 만들어 가문의 고귀함을 유지하려고 노력 - 가족체계를 형성시킨 것이다 일찍이 자식이 없는 나폴레옹의 후계자가 불투명하자 그의 형제들은 능력 하나 없이 나폴레옹의 후광으로 자리를 차지하려고 평생 버둥거렸다. 나폴레옹이 원하던 대로 보나파르트 가문은 황제를 3명이나 배출해 황제 가문이 되었으나 그 영광은 자신을 시기하고 미워하던 형제자매와 그들의 자식들이 차지했다. 어떻게 하면 나폴레옹을 이용해 자신이 출세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던 사람들 뿐이었다.나폴레옹과 히틀러의 정치적 공통점군사독제 정치를 하였다 장악한 유럽지역에 자신을 따르는 정권을 세웠다 나폴레옹 : 라인연방 히틀러 : 프랑스 비시정부 둘다 비천한 출신이었으나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 거물급 인사가 됨 민중학살 둘다 안티기독교적인 이념을 가지고 있었음 둘다 정치 말년의 행보가 불투명(의문사)경제적 공통점전후를 계기로해서 유태인 제벌 세력이 강화 나폴레옹전쟁 : 로스차일드(훗날 JP 모건의 전신) 2차세계대전 : 록펠러제벌(훗날석유, 군수, 금융제벌이됨) 두 지도자 모두가 피폐했던 국가 경제를 일으킴전쟁적 측면에서의 공통점영국을 점령하지 못함 러시아전선에서 추위와 원활치 못한 보급으로 인한 폐배 아프리카원정나폴레옹과 히틀러의 정치적 차이점1.지향하는 정치이념 나폴레옹 : 민주주의의 프랑스 혁명정신 히틀러 : 나찌즘(극우주의) 2.정권잡을 당시의 국가혼란요소 나폴레옹 : 반 프랑스 혁명세력과 외국군대의 혁명간섭 히틀러 : 공산주의 준동과 군소정당의 난립 3.언행일치가 안되는 정치행보 나폴레옹 : 왕정을 뒤엎은 프랑스 혁명을 지지했으나 나중에는 스스로 황제가 됨 히틀러 : 독일인우월주의자 였으나 나중에는 덴마크, 노르웨이, 심지어는 동유럽의 사람들까지순수 독일인이 들어갈 수 있는 SS친위대에 입대시킴 소련전선에서 소수민족의 지지를 얻기위한 귀화정책실시 4.이후에 유럽정치의 변화 나폴레옹 : 왕정복귀를 시도하는빈체제에 반대하는 민주시민혁명이 전유럽에서 발발 히틀러 : 사후에 미국 소련간의 냉전체제 형성경제적 차이나폴레옹 : 영국을 고립시키기위한 대륙봉쇄 정책실시 히틀러 : 독일이 경제적으로 부강해 지기위해 곡창지대이자 석유지대인 소련을 직접 장악하려함전쟁적 측면에서의 차이1.점령국의 차이 나폴레옹 : 노르웨이, 덴마크 미점령 히틀러 : 스위스, 에스파냐 미점령 2.지도자의 이미지 나폴레옹 : 전쟁현장에서 직접 앞장을 서고 군대를 지휘하는 야전사령관 히틀러 : 벙커안에서 군사작전 지휘를 하는 지휘관나폴레옹과 광개토대왕의 공통점주변 국가의 정복으로 대제국 건설과 뛰어난 전술나폴레옹과 광개토 대왕의 차이점광개토 대왕의 영토확장은 국익적인 측면이 강하기도 하지만 또한 감정적인 측면도 매우 강함 고국원제 사망이후 고구려는 백제에 대한 복수를 노렸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지만 비로소 광개토대왕이 즉위할 무렵에서야 복수를 할 수 있게 됨 나폴레옹은 불안정안 민심을 외부로 돌리기 위한 측면이 강하게 작용탄생적인 측면탄생적인 측면에서 바라보면 광개토대왕은 순수하게 왕족출신으로서 왕위에 오름 나폴레옹은 코르시카의 작은 섬에서 태어나 본인의 판단력과 능력으로 왕위에 오르게 됨정치/경제적 측면광개토 대왕이 정복전쟁을 수월하게 할수 있었던 이유는 소수림, 고국양왕 대 부터 쌓아온 부를 비로서야 사용할 수 있던 입장 그는 선조때부터 쌓여온 국력으로 주변국을 정복할 수 있었고 또한 제위말년에는 그동안 전쟁에 시달려온 민중들의 삶을 진작시키기 위해 노력하다 생을 마침 나폴레옹은 시민혁명으로 피폐해진 국가를 수습하여 정복전쟁을 펼치다가 결국 몇 번의 전투에서 패배함으로써 그의 지지도는 급격히 떨어지고 결국에는 포로로잡혀 외로이 생을 마감사회/문화적 측면광개토 대왕의 정복활동은 피정복자들에게 비교적 온건한 자세를 취함. 백제 아신왕의 항복 요구를 받아들이기도 하고 거란이 변방을 약탈하여 백성 1만명을 잡아가서 병력을 파견하자 거란족이 사죄하며 백성을 돌려주자 굳이 전쟁을 하지 않고서 그들의 사죄를 받아줌. 얼핏 광개토 대왕을 정복자라고 알고 있는 사람이 많지만 광개토 대왕은 필요없는 피를 부르지 않는 우리민족의 위대한 정복자라 할 수 있다. 광개토 대왕의 전쟁 중 방어전도 많았습니다. 그가 후연을 정벌하고 있던 중 백제와 왜가 신라를 침공하자 그는 신라의 요청을 받아들여 기병 5만을 파견함. 백제의 아신왕이 항복을 하였고 신하로서 공물을 바치겠다고 서약하였지만 그것을 어김으로써 발생한 전쟁. 그러나 역시 고구려 기병5만을 보고 왜는 기겁하여 물러남. 또한 광개토대왕은 정복활동에서 다른국가를 이용하지 않음. 나폴레옹은 무자비한 정복활동으로 피정복국의 상당수에서 자유주의 이념이 싹트기 시작 그는 한편 영국을 고립시키기위해 대륙봉쇄령도 내림. 정복활동중에서 외교활동이 상당히 활발역사적 평가정치적으로도 승리를 이끈 뛰어난 전술에 뒤지지 않았다. 자신이 하고자 하는 바를 끝까지 실행해 나가는 단호함이 있었고 옳다고 생각하면 굽히지 않았다. 카리스마 있는 정치를 해나갔을 뿐만 아니라 정복한 나라에 대한 문화를 아끼고 존중할 줄도 아는 혁명을 전파해나갔다. 그는 한 나라의 황제이기 이전에 가정의 가장이기도 했다. 또 조세핀과의 열정적인 사랑 앞에서 권력자, 지도자로서의 그의 모습은 볼 수 없었다. 한 여자에게 마음을 빼앗긴 남자로써 끊임없이 사랑을 갈망하고 외로움을 느꼈다. 피도 눈물도 없는 잔인한 장군으로써의 나폴레옹이 아니라 뜨거운 피를 가진 힘차게 뛰는 가슴을 가진 나폴레옹은 영웅이었다.나폴레옹의 일화그를 존경하던 베토벤이 '영웅교향곡'을 작곡하다 펜을 던지며 속물이라고 비난한 일화 네잎클로버 부인, 보시오. 누가 더 살이 쪘소? 이만하면 그대의 질문에 훌륭한 답이 되었으리라 믿네. 저를 기억하시겠습니까?나폴레옹의 명언나의 사전에는 불가능이란 단어가 없다. 펜은 칼보다 강하다. 죽음은 아무것도 아니다.그러나 패배자로서 영광없이 사는 것,그것은 매일 죽는 것이나 다름없다. 1퍼센트의 가능성, 그것이 나의 길이다.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자는 이미 패배한 자이다. 숙고할 시간을 가져라. 그러나 일단 행동할 시간이 되면 생각을 멈추고 돌진하라.마치면서☆오늘날 프랑스에는 보나파르트 가문 사람은 절대 대통령이 되지 못하게 법으로 정하고 있다다고 한다. 그 이유는 나폴레옹 1세와 그의 조카 나폴레옹 3세가 선거로 대통령이 된 후 황제가 된 똑같은 전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황제로써 모든 걸 다 가진 듯 했지만 고독했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가문으로써의 긍지와 존귀함을 유지하려고 노력했던 나폴레옹이 죽은 뒤에 오늘날 프랑스가 금지하고 있는 법을 보면서 왠지 씁쓸해 짐을 감출 수 없다.{nameOfApplication=Sho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