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서론고구려의 건국신화는 흔히 라고 일컬어진다. 하지만 그 내면을 들여다보면 속에서는 해모수와 해부루의 이야기, 금와의 이야기, 그리고 유화와 유리태자의 이야기가 복합되어 있다. 이들의 이야기는 주몽의 탄생과 그의 성장, 그리고 고구려의 건국까지의 과정을 살피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따라서 역사적 자료에 등장한 이들 각각의 모습과 역할을 살피는 일이 필요하다고 할 수 있겠다.한편 고구려의 건국신화는 여러 가지 이본들이 존재하는 데 그 이본들 마다 의미하는 바가 조금씩 다르다. 모든 이본을 고찰할 수는 없기 때문에 대표적인 사료 몇 가지만 가지고 그 서사구조와 각각의 사료 사이의 공통점과 차이점, 그리고 그 의미차이에 대해 언급하고자 한다. 그리고 고구려 건국신화 속에서는 여러 가지 상징체계들이 등장하는데, 우리나라의 건국신화에서 자주 등장하는 천부지모(天夫地母)의 모습이 고구려 건국신화에서 천신과 수신의 결합으로 어떻게 등장하는 지 살펴보도록 하겠다. 그리고 우리나라 건국신화에서 공통적으로 보이는 난생의 의미를 알아보고 아울러 부여계 신화와 공통적으로 보이는 ‘동명’이라는 명칭에 대해 알아보겠다.마지막으로 중국 측 문헌에 기록된 부여 시조 동명에 관한 기록은 고구려의 건국신화와 거의 같은 내용을 담고 있어서 부여의 동명신화도 고구려의 건국신화와 무관하다고 볼 수 없다. 고구려 건국신화와 동명신화의 연관성을 살펴봄으로써, 그 사이의 관계를 규명해보고자 한다.Ⅱ. 본론1. 기본 서사구조의 파악 및 이본의 고찰고구려의 건국신화는 광개토대왕 비문을 비롯하여 『삼국유사』, 『삼국사기』 등 한국의 문헌, 그리고 중국의 역사서에 두루 전하고 있다. 그 내용도 아주 간략한 것과 자세한 것, 유사하거나 동일한 것이 있는가 하면 상반되거나 복잡하게 얽혀 있기도 하는 등 다양하다.따라서 기본적으로 이들 자료의 존재 양상에 대하여 검토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이 신화를 전하는 자료에 어떤 것들이 있으며 그 각각의 자료 간의 연관성에 대해서도 살피도록 하겠다.1) 국내의 있다.다음으로 국내의 문헌기록을 살펴보면 『삼국유사』에서는 『삼국사기』의 내용을 거의 그대로 옮겨 온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고, 『세종실록지리지』에서는 「동명왕편」의 주석부분을 거의 그대로 옮겨온 것이다. 아울러 우리나라의 옛 문헌 가운데 고구려 건국신화 자료는 간략하게 되어 있는 『삼국사기』계통과 상세하게 되어 있는 「동명왕편」계통의 두 가지로 구분되면서도, 줄거리를 위시하여 인명, 지명, 연대에 이르기까지 아무런 차이도 발견되지 않는 점 등을 고려해 볼 때, 금석문을 제외한 이들 국내 문헌 기록은 모두 『구삼국사』를 원전으로 하여 파생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주몽은 하늘의 신인 해모수(解慕漱)를 아버지로, 강물의 신인 하백(河伯)의 딸 유화(柳花)를 어머니로 하여 알로 태어난다. 그 어머니가 몸을 의지하고 있던 부여왕조의 금와왕은 그 큰 알을 버리게 하였지만, 짐승과 새들이 알을 보호하였다. 왕이 직접 그것을 깨뜨리려 하였으나 깨지지 않으므로 할 수 없이 그 어머니에게 돌려주었다. 어머니가 그 알을 싸서 따뜻한 곳에 두었는데 알 속에서 한 아기가 태어났다. 그 아기는 매우 출중하고, 특히 활을 잘 쏘았으므로 사람들이 그를 활 잘 쏘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주몽’이라고 불렀다. 금와왕의 일곱 왕자들은 주몽을 시기하여 없애려고 하였다. 주몽의 어머니는 계략을 써서 주몽이 기르고 있던 왕실의 말들 가운데에서 가장 좋은 것을 차지하게 하고, 주몽에게 몸을 피하여 큰일을 도모하게 하였다. 주몽이 도망하여 엄수(淹水 : 혹은 개사수)에 도달하였으나 왕자들의 추격이 급박하였다. 주몽은 물을 향해서 “내가 천제(天帝)의 아들이고 강의 신의 손주(외손)인데 이제 이 추격을 어찌하리오.” 하고 말하자 고기 떼와 자라들이 다리를 놓아 추격을 면하게 되었다. 주몽은 남쪽으로 달아나서 졸본(卒本)에 도착하여 작은 집을 엮어 나라의 기틀로 삼고 나라 이름을 고구려라고 하였다. 비류국(沸流國) 바로 이웃에 나라를 세웠으므로, 비류국의 송양왕과 주종 관계를 결정짓다.『위서』의 자료는 6세기 중엽의 기록으로 지금까지 남아 있는 고구려 건국신화 자료 중에서 가장 오래된 문헌기록으로서 후대의 국내에서 기록된 자료와 별다른 차이가 없는 완벽한 자료이다. 여기서는 주몽이 하백녀가 일광을 받아 아로 태어났다고 되어있고, 해모수는 등장하지 않는다. 또한 유화가 수난을 당한다는 내용이나 주몽에게 활을 만들어 주고 준마를 가려주거나 오곡의 종자를 전해주는 활약이 전혀 없다. 동부여에서 낳은 주모의 아들 이름이 유리가 아닌 여해, 또는 여달로 나타나는 점도 주목할 점이다. 따라서 이 자료는 해모수 신화와 유화 신화가 생략된 주몽 중심의 신화임을 알 수 있고, 이러한 자료를 통해서 볼 때, 해모수 신화는 후대에 고구려신화로 편입되었을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다.2. 고구려 건국신화 속에 나타나는 의미와 상징체계1) 천신과 수신의 상관관계(천부지모)한국의 신화가 공통적으로 지향하는 신성성은 시조의 출자를 통해 파악된다. 즉 그 부계와 모계를 검토하여 보면 그 신화를 신화로 전승했던 집단이 무엇을 신성시 했는지 파악된다. 고구려 건국신화의 경우 주몽의 부계는 천제의 아들인 해모수로 설정되어 있어 하늘로부터 하강한 존재가 왕이 되고, 모계의 경우 하백의 딸인 유화가 어머니로 설정되어 있어 물과 친연성을 보이고 있다. 따라서 고구려 건국신화는 부계의 혈통으로 하늘을, 모계의 혈통으로 물을 성정하였음을 알 수 있고, 이러한 설정은 바로 우리 민족이 고대로부터 천신과 수신이라는 두 갈래의 신성성을 지향하고 있음을 보여준다.)본격적으로 주몽의 출자를 살펴보겠다. 「동명왕편」의 내용을 중심으로 하여 살펴보면, 하늘에서 오룡거를 타고 오우관을 쓰고 용광검을 차고 나타나는 해모수의 모습은 바로 태양신의 모습으로서 고구려 고분 벽화에서 볼 수 있는 것이다. 아침에 정사(政事)를 보고 저녁에 하늘로 올라간다는 것은 곧 아침에 해가 뜨고 저녁에 해가 지는 것을 의미하여, 해모수로 표현된 천신은 곧 태양을 의미함을 분명히 알 수 있다. 한편 주몽의 모계는 청하 하을 받아 위기를 극복하고, 비류국에 도착해서 송양과의 대결에서는 마지막에 백록(白鹿)을 잡아 거꾸로 매달고 주술로 비를 내리게 하여 송양에게 항복을 이끌어 낸다는 점이다. 이를 통해 천신의 자손인 주몽이 수신의 힘 또한 자유자제로 사용하게 됨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이제 또 하나 의미하는 바를 찾을 수 있다. 주몽은 부여를 떠나며 유화로부터 오곡의 종자를 받아 떠나는 데, 이는 주몽이 농경을 주산업으로 하는 집단의 수장이 됨과 동시에 농경 집단의 생산신으로 정립됨을 말해준다. 주몽이 태양신의 손자라는 부계혈통과 수신의 외손자라는 모계혈통을 아울러 강조한 것은 바로 그가 농경사회의 왕이었기 때문이다. 농경에는 일조시간과 강우량이 풍흉을 결정하는 주요 요건이 된다. 따라서 이 두 가지를 모두 조절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왕은 천신과 수신의 피를 모두 이어받아 태어난 주몽으로 그가 태양신의 손자라는 부계혈통과 수신의 외손자라는 모계혈통을 아울러 강조한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2) 난생고구려의 시조 주몽은 그 태생이 난생으로 기록되어 있다. 고구려 건국신화 이외에도 난생의 모습을 보이는 신화는 인도네시아 등의 동남아시아 여러 섬들과 대만, 중국 북동부와 우리나라 등에 주로 분포되어 있으며, 그 외의 지역에는 극히 드물다.) 그러면 고구려 건국신화에 나타나는 난생과 아울러 우리나라 신화에 등장하는 난생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다.난생신화는 시조신들이 모두 알에서 태어나지만 그 원천은 하늘에 두고 있다. 다만, 알의 탄생이 인간에 의한 것이냐 하늘로부터 스스로 내려온 것이냐에 따라, 그 모티프를 자연 천생란적(自然天生卵的)인 것과 인위 인생란적(人爲人生卵的)인 난생 모티프로 나눌 수 있다.자연 천생란적인 난생 모티프는 박혁거세신화와 김수로왕신화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하늘에서 내려온 알 속에서 영아로 태어나게 된다. 이와 같이 생산력을 가지고 아이를 탄생시키는 알이 성스러운 빛과 더불어 하늘에서 내려온다는 것은, 곧 이들이 보통 아이가 아니고 천신(天神)의 아들이거나 또는 알은 신성시되고 재수용되게 된다.정리해보면 고구려를 포함한 우리나라 건국 신화에 나타나는 난생신화는 상징성이 태양과 유사한 ‘알’을 신화에 첨가하고 있다. 여러 짐승들에게 보호되던 알은 사람에 의해 집안으로 들어오는데, 항상 태양의 빛이 비춰주고 보호해 준다. 이러한 것을 보여줌으로써 태양신의 보호를 받는 자손임을 강조하고, 아울러 경외의 대상인 태양의 정기를 받은 알에서 태어난 사람은 곧 태양의 아들로서 주변의 모든 것을 지배할 당위성을 갖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했다.3) ‘동명’의 의미‘동명’이라는 어휘는 고구려 건국신화와 부여 건국신화에 동일하게 건국시조의 명칭으로서 그 모습을 보인다. ‘동명’은 부여의 건국시조의 이름으로 쓰이는 것이 일반적인데, 주몽을 묘사할 때 쓰이는 이유는 무엇일까?사실 고구려 건국신화에는 동명이라는 명칭이 등장하지 않는다. 반드시 주몽 또는 그 계열의 어휘인 추모 등으로 표기하고 있다. 동명이라는 명칭은 주몽의 사후에 붙여진 일종의 시호로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시호 또한 후대에 붙여진 것이다. 광개토대왕릉비에 보면 주몽의 시호를 추모왕(鄒牟王)이라 칭하고 있다. 비문을 세우던 장수와 당시까지만 해도 고구려에서는 그 시조 주몽을 ‘추모왕’이라 불렀음을 알 수 있다. 즉 주몽의 시호는 주몽의 활 잘 쏘는 능력에 주목하여 본명을 그대로 반영하여 본명과 같은 ‘추모왕’이라 불렀던 것으로 추정된다.그런데 『구삼국사』에 와서 주몽에게 동명왕(東明王)이라는 호칭이 나타난다. 그 이유를 살펴보면 동명왕의 ‘동명(東明)’은 ‘??’이라는 뜻이다. ‘?’는 동쪽, ‘?’은 광명, 태양을 가리킨다.) 알타이 계 각국의 왕 이름과 국가 이름이 모두 이 말에서 유래하고 있는데, 결국 ‘동명왕’이라는 시호는 찬양의 뜻이 내포되어 있는 것이라 볼 수 있다.한편 또 다른 견해를 살펴보면 시조명 동명은 5세기에서 『신집』이 편찬되는 600년 사이에 등장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부여를 받아들인 고구려는 일정 기간 동안 부여왕의 선왕제사를 허용하였는데, 그.
한국문학사의 시대구분론의 요약 및 정리- 조동일의 견해를 중심으로Ⅰ. 서론한국문학사의 시대구분의 문제는 문학사를 처음 쓸 때부터 문제시 되었다. 최초의 문학사인 안확의 『조선문학사』(1922)는 그 시대구분을 상고시대·중고시대·근고시대·근세시대·현대로 나누었다. 이름은 시간의 원근에 의한 구분을 표방하고 있으나, 실제로는 왕조 교체에 의한 구분이다. 따라서 안확의 뒤를 이은 문학사의 저자는 누구든지 시대 구분 때문에 고심을 하면서 최선의 방안을 찾으려고 하였다.초기에는 문학사의 시대구분의 기준을 왕조교체로 삼았다. 하지만 왕조교체가 문학사의 흐름과 완전히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여러 문제가 발생하였고, 그 결과 민족정신의 전개에 따라 시대구분을 한 경우도 있고, 사회경제사에 의거한 시대구분도 등장하였다.)그렇다면, 왜 이러한 국문학사의 시대구분이 문제시 되는 것일까. 국문학사의 시대구분에 대한 관심은 국문학연구의 의의와 과제를 자각할 때 당연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지난날의 전통적인 문학과 근래의 신문학이 어떤 기본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는가를 알아서 과거가 현재에 어떻게 작용하는가를 문제 삼자면 시대구분론에서 논의의 단서를 얻어야 한다. 문학이 우리 문화 전체에서 어떤 위치와 구실을 구현했던가를 역사적인 맥락에서 살피는 데 있어서도 시대구분은 핵심적인 의의를 지닌다.)이런 관점에서 조동일은 우리 문학사의 시대구분을 문학의 갈래나 향유층을 중점적으로 고려하여야 한다는 점을 밝히고 있다. 즉 개별적인 문학 작품만을 논의의 대상으로 할 것이 아니라, 문학 갈래의 변천을 살펴서 문학 자체의 현상을 포괄적으로 다룰 수 있으며, 갈래 체계를 선택하는 문학 담당층에 대한 논의로도 확대할 수 있다. 따라서 한국 문학사의 시대구분을 조동일의 주장을 기본으로 하여 살펴보고자 한다.Ⅱ. 본론한국문학사의 시대구분의 기준은 처음에는 주로 왕조사의 변천에 따라 이루어졌다. 하지만, 앞서 언급했듯이 왕조사의 흐름과 문학의 흐름이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다른 기준이 필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까지는 구비문학만 있었고, 중세에는 한문학과 국문문학이 공존하다가, 근대에는 한문학을 버리고 민족어문학이라야 민족문학이라 하게 되었다. 중세전기에는 향찰을 이용해 향가를 창작하기만 하다가, 중세후기에는 훈민정음을 창조해 국문시가문학을 크게 발전시키고, 중세에서 근대로의 이행기에는 국문소설을 풍성하게 마련한 것이 당연한 변화이다.문학담당층을 살펴보면, 고대에는 군사적인 귀족이, 중세전기에는 상위의 군사적인 귀족과 하위의 문신귀족이, 중세후기에는 문신귀족인 사대부가, 중세에서 근대로의 이행기에는 사대부ㆍ시민ㆍ민중이, 근대에는 시민과 민중이 문학담당층으로서 주도적인 구실을 했다.그리고 두드러지는 구실을 하는 문학 갈래가 시대에 따라 달라져, 원시시대에는 문학 갈래의 정립이 확인되지 않았고, 고대는 서사시의 시대이고, 중세전기는 서정시의 시대이고, 중세후기는 서정시와 교술시가 공존하는 시대이며, 중세에서 근대로의 이행기는 시가와 산문 양면에서 서정ㆍ서사ㆍ희곡이 공존하는 시대이다.각 시대의 구분은 고대ㆍ중세ㆍ근대의 거시적인 구조로 우선 나눌 수 있지만, 조동일의 견해를 바탕으로 한국문학사의 시대구분을 해보면, ‘원시, 고대, 중세전기, 중세후기, 중세에서 근대로의 이행기, 근대’라는 기준으로 각 시대를 나누어 볼 수 있겠다. 중세와 근대 사이에는 중세에서 근대로의 이행기가 있듯이, 고대에서 중세로의 이행기가 존재할 것이고, 조동일의 『한국문학통사1』4판에서 그 구분을 하였으나, 사실상 그 자료의 내용이 다른 시대와 비교했을 때 미비하므로, 자료가 좀 더 보충되기 전에는 그 구분이 무의미할 것 같아, 그 시기는 별도로 다루지 않는다.1. 원시시대원시시대는 구석기 시대와 신석기 시대로 나눌 수 있다. 구석기 시대에는 문학의 자료는 남아있지 않지만, 그 흔적을 추정해 볼 수는 있다. 구석기 시대에는 조형예술이 동작예술이나 언어예술과 얽혀 이른바 원시종합예술의 형태로 존재하였을 것이라 짐작해 볼 수 있다. 이 시기에 신화나 서사시가 등장했는지는 의문이나, 이 시기의 사고형태가 넘어가 남성 지배자가 권력을 장악했음을 알 수 있다. 이 시기에 서사시가 등장하였는데 이 서사사시는 특별한 자격을 가진 사람, 즉 무당이 맡아서 가창, 전승하였다.이 시기는 구비문학만이 존재하였고, 민요도 가창되었으나, 서사시가 존재하여 특별한 자격을 가진 무당이 이를 가창하였다.2. 고대고대문학이 시작된 명백한 증거는 우선 건국신화의 등장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시기에 고대국가들이 건국되면서 각각의 건국신화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고대에는 영웅서사시 또는 건국서사시가 커다란 구실을 했으며, 그 내용의 일부가 건국신화로 기록되어 있고, 그 구전형태는 서사무가에서 발견된다. 많은 어려움을 이겨내고 자기네 집단이 마침내 승리를 거두었다고 자랑하는 우월감이 고대자기중심주의라고 말할 수 있다.고대 시대에 이루어진 일로 한자의 전래도 들 수 있다. 국가 형성기에 지배자로 등장한 세력이 건국 신화를 창조하고 건국서사시를 전승하면서 자기네의 우월감을 나타내 질서의 근본으로 삼았다. 한문은 처음 전래되어 건국신화와 관련된 내용의 역사를 기록하는 데 쓰였다. 그러다가 건국신화 또는 건국서사시가 불신되었을 때 본격적인 한문학이 성립되고 한시가 중요한 몫을 하게 된다.국중대회가 거행되었으나 그 방식은 원시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 초점이 생산 증대보다 주민 단합에 맞춰져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제사장과 통치자가 분리되어 제정과 제사가 분리되어 시행되었다.따라서 고대에는 군사적인 귀족이 자기중심주의의 사고방식을 가진 서사시를 창조하여 문학 이상의 기능을 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이 시대 역시 원시와 마찬가지로 아직 구비문학의 단계에서 머물러 있는 시대로 신화나 서사시 이외에도 전설이나 짧은 노래가 등장하여 전승되는데, 이는 구비문학이 그 영역을 이전 시대에 비해 비교적 넓힌 시대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서서히 동아시아 공동문어인 한문이 유입되면서 중세로의 변화가 이루어지게 된다.3. 중세전기중세전기는 삼국시대부터 남북국시대까지로 구체적으로 광개토대왕능기만 하였다. 한시는 한자를 빌려 우리말 노래를 적는 향가와 공존하였는데, 향가는 6세기말에 첫 작품인 혜성가가 이루어지고 신라 말까지 번성하다가, 10세기 균여가 크게 이용한 다음 차차 쇠퇴하게 된다.한문학이 등장하면서 서사시를 대신해 서정시가 주도적인 구실을 하게 되었다. 향가는 민요에 근거를 둔 율격을 한시와는 다른 방향으로 가다듬어 심오한 사상을 함축한 서정시로 발전하였다.기록문학이 시작된 중세 전기 시대에도 구비문학은 여전히 활기를 띠고 있었다. 그러나 그 양상은 많이 달라져 건국서사시는 이미 지난 시대의 것이 되었고, 민요 가운데 향가로, 다시 사뇌가로 상승할 수 있는 서정민요가 각광을 받았고 설화에서는 불교설화가 나타나는 한편, 상층과 하층의 관계를 다룬 것이 또한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다.이 시기의 문학의 주된 담당층인 육두품 귀족은 실용적인 문학을 통해서 자기 구실을 찾는 한편, 사물보다는 마음이 소중하다는 생각 또는 주관적 관념론이라고 할 수 있는 이념을 나타내기 위해 한시와 함께 사뇌가를 서정시로 가다듬는데 특히 힘썼으며, 그러한 전통은 그런 문학 담당층이 최고 신분으로 상승한 중세 전기 후기 시대에 들어와서도 바뀌지 않았다.중세전기에는 상위의 군사적인 귀족과 하위의 문신귀족이 문학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는데, 특히 신라의 경우 육두품이라고 일컬은 하위의 문신귀족이 한문학과 향가를 주도하면서 중세 보편주의의 사고방식을 가지고, 심(心)의 이상주의를 구현하였다. 심(心)의 이상주의를 구현하는 문신귀족이 사회를 지배한 고려전기에는 과거제를 실시해 신라 때에 설정한 모표를 충분하기 이룩하는 문학을 해서 그 수준을 크게 향상되게 하면서 형식화와 고착화의 폐단을 나타냈다.4. 중세후기중세후기의 가장 특징적인 사건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은 바로 훈민정음의 창제로, 이는 국문시가문학의 영역을 크게 발전시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훈민정음 창제로 인해 중세에서 근대로의 이행기, 그리고 근대의 국문시가 발전의 기초를 다질 수 있었다. 또한 중세 후기에는 술시가 서정시와 대등할 수 있게 되었다.그리고 불교의 이상주의를 비판하고 심(心)과 물(物)의 관계를 새롭게 문제 삼은 이기(理氣)의 철학이 시조와 가사가 공존하는 갈래체계와 함께 등장했다. 즉, 중세 후기의 시조는 세계를 자아화해서 심(心)의 이상을 추구하는 범위를 일상생활의 영역 안으로 한정했다. 그래서 자아를 세계화해서 물(物)의 실상을 탐구하는 가사와 상보적이면서 경쟁적인 관계를 가졌다.이 시대의 문학의 주된 담당층은 원래 지방향리였다가 무신란을 계기로 해서 중앙정계에 등장하기 시작해서는 마침내 조선왕조 건국의 주역으로까지 성장한 이른바 신흥사대부이다. 전대 귀족이 주관적 관념론자라면, 사대부는 사물과 마음이 함께 소중하다는 객관적 관념론자라고 할 수 있다. 사대부는 지방에서 농민과 가까운 위치에서 살아가면서 사람은 처사접물(處事接物)을 통해 살아간다는 사고방식을 이룩해, 중세보편주의를 독자적으로 구현하고, 서정시와 교술시를 공존시키는 문학을 했다. 그리하여 경기체가는 물론 악장 ? 가사와 같은 교술시로써 자아를 세계화해서 표현하는 한편, 시조에서는 세계를 자아화해서 이와 균형을 맞추었다.5. 중세에서 근대로의 이행기이 시기의 시작을 알려주는 가장 뚜렷한 징표는 바로 소설의 등장이다. 17세기 허균이 활동하고 『홍길동전』에서 국문소설이 이루어지자 중세에서 근대로의 이행기가 시작되었다. 이 시기에는 시가와 산문 양면에서 서정ㆍ교술ㆍ서사ㆍ희곡이 공존하는 시대로, 소설이 일어나서 기록문학 영역에서는 서정ㆍ교술ㆍ서사가 공존하고, 민속극이 발달해 구비문학까지 포함하면 서정ㆍ교술ㆍ서사ㆍ희곡이 공존했다.중세에서 근대로의 이행기에는 앞 시대의 훈민정음 창제와 그에 따른 국문시가의 창작을 바탕으로 하여 국문소설을 풍성하게 마련하게 되고, 또한 이 시기에는 민요시 또는 악부시(樂府詩), 야담, 한문소설을 만들어내 한문학이 민족어문학에 근접했다.국문소설은 중국을 무대로 이상적인 사고방식을, 한문소설은 국내를 무대로 현실적인 사고방식을 나타낸 데서 중세에서 근대로의 이행기문
인상파1. 인상파의 주제, 기법, 특징인상파는 19세기 후반 1860-90년대에 걸쳐 프랑스를 중심으로 일어난 미술 사조로서 서양미술사에서 그 성과는 하나의 혁명과도 같았다. 대상을 있는 그대로 표현해내기 위해 수 많은 시간을 보내야만 했던 화가들에게 인상파는 대상을 실재와 닮게 표현해내기 보다는 켄버스라는 제한된 세계에서 화가의 나름대로의 표현은 그 자체가 하나의 법칙으로 통용되게 되었다. 인상파는 그 이전의 미술의 흐름과는 여러 가지 점에 있어서 획기적일 수 밖에 없었다. 주제에 있어는 과거의 신화, 종교적 주제, 초상화 등에서 벗어나 보다 더 현실에 가까워진 일상의 풍경들이 주제로 선택되어지게 됐으며 원근법의 배제, 아뜨리에 보다는 캔버스를 들고 야외로 나가는 경우가 더 많아졌다. 그래서 자연의 대상들을 색채현상으로 파악 순간순간 변화하는 색의 미묘한 변화를 표현하고자 했다.19세기는 카메라가 발명되어 사진술이 발달하게 되었다. 사진술의 발달은 화가들에게 위협을 가하기 시작했다. 카메라 이전에 인물의 모습을 영구 보존하기 위해서는 화가들의 역할이 절대적이었다 그러나 사진술은 화가들에게서 그러한 절대적인 능력을 빼앗고 말았다. 셔터를 누르기만 하면 얼마든지 똑 같은 모습을 찍어내는 사진기의 발명은 화가들에게 있는 그대로가 아닌 다른 기법을 찾아내도록 하는 결과를 낳게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화가들은 점차 사진술이 쫓아 올 수 없는 영역을 탐구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사실 이러한 사진술 발명의 충격이 없었다면 현대 미술은 거의 지금과 같이 되지는 않았다.또한 당시 파리에는 '차이나의 문'이라는 동양상품 수입 판매장이 있었다. 일본에서의 수입품은 대부분 리본도(칼)와 도자기였다. 두 상품모두 깨지거나 다치지 않게 주위에 신문지로 잘 채워넣어야 했다. 이때 일본의 우끼에요 , 대부분 목판화였다. 포장지들은 곧 버리게 되었으므로 가난한 화가들이 쉽게 우끼에요 판화를 구할 수 있었다. 물론 족자에 표구된 좋은 그림들도 들어왔다. 인상파 화가들은 이들로부터 대담한 원색, 대담한구도(일부가 전체를 대변한다), 평면적인 표현 등을 배웠다. 사실 이때부터 서양미술에 있어서 동양적인 정신은 매우 중요한 것이 되었다.인상주의는 모네와 마네를 선두로 르노와르, 드가, 시슬리, 로트렉, 피사로, 세잔느 등 수 많은 화가들이 있다.1) 주제2) 기법3) 특징사물의 고유색을 부정하고, 광선의 중요성을 인식하여 빛에 의해 변하는 순간적인 사물 의 색채의 변화를 표현하였다. 인상주의 화가들은 실내에서 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야외로 나가 자연을 벗삼아 자연을 호흡하면서 빛에 의해 변하는 순간적인 자연의 색채의 변화를 모색하여 그림을 그려 외광파라고도 하였고, 그 결과 화면이 밝아지고 터치가 뚜렷해짐1) 해바라기고흐가 고갱과 함께 아를리에를 해바라기의 그림으로만 장식하려고 그린 그림이라고 한다. 고흐는 해바라기를 좋아한 작가로 유명하다.고흐는 네덜란드에서 파리로, 또 파리에서 아를르로 조금이라도 더 태양에 접근하려고 따라간 셈이다. 그의 이러한 태양에 향하는 집념은 어쩌면 해바라기를 꼭 닮아 있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인지 그는 아를르 지방에서도 여러 점의 해바라기를 그린 작품을 남기고 있고, 그 결과 해바라기는 곧 고흐의 대명사처럼 되었다. 해바라기의 형상이나 색채, 그리고 해를 향하는 성질은 고호의 내면적 원형이라고 할 수 있고, 또한 해바라기는 고호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게 되어 버린 것이다. 미묘한 톤의 파랑색을 배경으로, 강렬한 변화의 노랑으로 모습을 드러낸 그것은 바로 고호 자신이 그의 동생에게 설명했듯, 오래 바라보고 있으면 풍부한 변화상을 나타내는 태양에의, 또 생명에의 찬가를 부르고 있는 듯하다. 그 자신의 강렬한 생명력을 그는 해바라기를 통하여 본 것이다.고흐의 해바라기는 태양을 바라보는 해바라기와 슬픔에 젖어있는 듯한 고개숙인 해바라기가 공존한다. 이것은 해바라기를 보며 항상 태양을 바라보며 살 듯 강한 집념을 가지고 살아가면서도 항상 슬픔과 함께 하는 고흐 자신의 모습을 찾은건 아닌가 한다.나 역시 이런 해바라기가 좋다. 무언가 목적을 가지고 포기하지 않고 계속 그것을 향해가는 모습을 본 받고싶다.고흐는 슬픈 삶을 살았다. 다른 예술가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이상을 향해 달려나가는 사람이었다. 고흐의 삶은 슬픔과 함께 했다고 한다. 이 고흐의 삶에서 그리고 해바라기라는 작품에서 우리는 많은 것을 배워야 겠다.2)수련그의 "수련"은 1899년에서 1926년 그가 작고할 때까지 추구하던 최후의 연작이다. 그 중에서도 1911년 후처 아리스를 잃고, 실의에 차서 3년간이나 화필(畵筆)을 던져버리고 있었다가 그의 친우인 정치가 죠르쥬?끌레망(Georges Clemenceau 1841~1929)의 격려로 겨우 다시 화필을 들기 시작하였다. 그것이 바로 파리의 뛸르리궁의 오랑쥬리미술관에 있는 "수련"의 대벽화이다. 1890년, 노년의 모네는 지베르니에 머물면서 노년기의 예술혼을 불태운다. 이때부터 사망하기 전까지 30여 년 동안 모네가 그렸던 주제는 연못 위에 피어 있는?수련'이었다.
1. 비평의 형태1) 비평의 대상에 따라(1) 원론비평(theoretical criticism)문학의 본질, 목적, 기능, 방법 등의 원론적 비평이며, 시?소설?희곡 등 장르적인 연구도 포함.--어떤 보편적 원칙에 의거하여 문학에 대한 논의의 체계와 방법과 그것들을 설명할 일정한 용어들을 수립하려는 노력.--문학이란 무엇이며 그것의 기능은 무엇인가. 무엇이 좋은 문학인가 등이 주 탐구 대상.예) 호라티우스 ?시의 기술?, 포우 ?단편소설론?, 사르트르 ?문학이란 무엇인가? 등.(2) 실제비평(practical criticism)작품 또는 작가에 대한 비평으로, 작품을 향수하고 이해하며 작가에 대한 연구를 하는 것.--비평의 본령원리적인 연구에 의해 확립된 비평관에 의해 작품의 평가를 해야 하는 비평의 가장 주된 활동.실제비평의 본격적인 활동은 근대 이후에 전개됨.예) 리처즈 ?실제비평?, 시몬 ?고발된 인간?, 김동인 ?춘원 연구? 등. 월평, 단평, 작품론.(3) 비평에 대한 비평(criticism for criticism)비평에 대한 평가. 비평에 의해 재구조된 작품의 세계나 이론적 고찰에 대한 재평가.원리적 비평에 대한 타당성 여부를 규명하며 작품과 작가에 대한 비평의 공명 내지는 정확성을 밝히는 것.근대 이후에 비평에 대한 관심의 성장에 의해서 대두됨.예) 흄 ?사색록?, 엘리어트와 머리의 논쟁, 1920년대 ?개벽?과 ?조선문단? 논쟁, 민족문학논쟁, 순수-참여 논쟁 등.2) 비평의 기술방식에 따라어떠한 방식으로 기술할 것인가? G. Watson의 구분.(1) 입법비평(legislative criticism)비평가가 ‘매개자’나 ‘중간독자’의 입장에서 작품을 분석하고 해명하는 것이 아니라,이미 세워진 비평기준을 적용하여 작품을 평가하고 작가에게 명령하는 비평 형태.--작가의 상상력이나 독창적인 면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 아니고,이미 만들어진 기준에 작품을 재단하는 비평.예) 고전비평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을 기준으로 한 것.테느가 종족?시대?환경의 세 품에 대한 비평작업을 등한히 하거나 지연시키는 수가 많다.(2)작품에 대한 지식은 자기 충족적이기 때문에 지식의 축적에만 힘을 쓰고,작품 자체에 대해서는 막연한 인상비평에 그쳤다.(전기적 사실은 잡담에 떨어지고 문학의 원천과 배경에 대한 연구는 천박한 역사나 철학으로 전락하는 것이 보통이다.)(3)의도론적 발생론적 오류 : 작가의 의도와 작품의 실제가 반드시 일치하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라는 의도론적 오류(intentional fallacy)와, 작품의 기원 및 가치평가를 혼동하는 ‘발생론적 오류(the genetic fallacy'를 범해왔다.3. 최인훈의 광장을 역사비평의 하부갈래 중 한 방법으로 고찰4. 러시아형식주의의 기법2. 기본 개념들문학성과 시적 언어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이 무엇보다 관심을 가진 것은 이다. 다시 말해, 무엇이 문학적인가, 문학과 비문학의 차이는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이와 같이 작품보다 작품으로 만드는 것을 주목한 것은 영미 신비평과 전혀 다른 태도로서, 소쉬르가 언어에서 빠롤보다 랑그를 주목한 것과 마찬가지 태도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의 주장이 프랑스 구조주의로 이어지게 만드는 원인이 된다.그들이 문학성을 구명하기 위해 초기에 주로 주목한 것은 시적 어법이다. 산문의 어법은 일상적 어법과 그리 차이가 나지 않지만, 시적 어법은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그들의 연구가 대부분 시와 시어의 문제에 집중되어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야콥슨은 시적 담화는 정보 전달을 목적으로 하는 인식적 형태의 담화(the cognitive mode of discourse)보다 감정적 발언(affective utterance)으로서 정서적 형태에 가깝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감정적 발언은 인식적 담화보다 가 더욱 유기적이고 본질적이며, 또 적절한 소리의 결합을 통해 정감을 전달하려고 노력하기 때문에 음성학적 결(texture)을 면밀히 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 그로부터 시사 받은 것으로 보이는 토마체프스키 역시 시적 언어에서 '의사 소통 기능은 뒷전으로것이 목적이라면서 와 를 구분한다.그리고 그는 또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가 시의 운율도 실상 무미건조한 생활 언어의 억양을 일그러뜨려 습관화된 청각을 자극하는 수단이라면서, 시를 비롯한 모든 예술은 대상을 '새로운 인식의 영역'으로 이동시키는 '의미론적 전환(semantic shift)'이 근본적인 목적이며 존재 이유라는 견해를 편다. 그의 이런 관점은, 예술은 우리가 모르거나 친숙하지 않은 사실을 알기 쉽게 해준다는 고전주의나 낭만주의, 또는 낯선 정신 세계를 단번에 도달하게 만들기 위한 것이라는 정신의 경제적 전략임을 전면으로 거부하는 것으로서, '낯익음', '친숙성'은 '자동화(automatization)'으로 이어져 탈언어화(脫言語化) 다시 말해 기호화(記號化)된다는 생각에서 비롯된다.예술의 목적은 사물들이 알려진 그대로가 아니라 지각되는 그대로 그 감각을 부여하는 것이다. 예술의 테크닉은 사물을 '낯설게'하고, 형태를 어렵게 하며, 지각을 어렵게 하고, 지각하는 데 소요되는 시간을 증대시킨다. 지각 과정이야말로 그 자체로서 하나의 심미적 목적이며, 따라서 되도록 연장시켜야 한다. 예술이란 한 대상이 예술적임을 의식적으로 경험하기 위한 방법이다. 이런 의미에서 대상 자체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슈클로프스키는 이 기법이 실험적인 작가들의 유희가 아니라 문학 어디에서나 발견할 수 있는 원칙임을 입증하기 위해 사실주의 소설가인 톨스토이를 예로 든다. 그는 {전쟁과 평화}에서 오페라 장면을 묘사하는 대목에서, 무대장치를 '페인트칠한 마분지 조각들'로 묘사하고, {부활}의 미사 장면에서 성병(聖餠)을 '조그만 빵 조각'이라고 일상적인 용어로 표현한 걸 지적한다. 그리고, ≪홀스토머≫(Xolstomer, 말이 화자인 일인칭 화법으로 씌어진 톨스토이의 단편소설)에서 말의 주인과 그 친구들의 변덕과 위선을 말(馬)의 시각에서 보고 이야기함으로서, 인간의 위선성을 새롭게 들어내고 있다고 설명한다.그러나 바흐친은 '톨스토이는 낯설게 된 사물에 넋을 잃지 않았다'면서, ' 한결 긴장이 높아지고, 또한 이야기의 내용도 달라진다. 다시 말해, 진술의 형식에 따라 내용이 달라진다.또 악한소설(惡漢小說)의 경우, 독자들은 주인공인 일상 생활에서와는 달리 악한을 이해하고 동정한다. 그것은 악한의 행동이 정당하기 때문이 아니다. 작가가 악한에 초점을 맞추고, 거리를 좁힌 데 원인이 있다. 그러므로, 문학 작품에서의 선악은 내용 그 자체가 아니라, 작가와 작중 인물의 거리와 태도, 그리고 서술의 빈도에 의하여 결정된다고 볼 수 있다.또 아이헨바움은 고골리의 [외투]를 연구하면서, 이 소설에 나타나는 기법으로 ①음성적 효과, 다시 말해 음성적 유사성과 단어들의 어원적 유희, 초이성적 단어들의 사용, 예컨대 'k'라는 문자의 빈번한 사용, ②감상적이고 멜로드라마적이며 과장된 종합문의 구사, ③허술하고, 순진한 객설, ④주된 이야기에서 벗어나 다른 일화의 삽입 등을 지적하면서, 이런 삽입은 그로테스크한 효과를 가져온다고 지적한다.이와 같이 내용과 형식을 이분법에서 벗어나 재료와 기법으로 보면 '미학 이전의 것(the pre-esthetic)'과 '미학적인 것'을 연속된 것으로 보도록 하여 문학 작품의 유기적 통일성(the organic unity)을 유지해주는 장점이 있다. 형식주의적 어법으로는, 는 의 중개 작용을 통해서만이 미학적 효능을 획득하고 문학 작품에 참여할 자격을 얻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플롯의 전개형식주의자들은 음보론(音步論)에서 문체론(文體論)으로 옮아갔듯, 어법(dictions) 문제는 시에서 산문 이론 영역인 구성(composition)의 문제로 옮아간다. 하지만, 오포야즈 후기단계까지 체계적 연구에 도달하지 못한다.플롯(plot)은 웰렉(R. Wellek)에 의해 널리 알려진 개념이지만 와 을 엄격히 구분한 사람은 형식주의자들이다. 토마셰프스키(B. Toma evkij)의 설명에 따르면, '이야기'는 ①작품 속에서 어떻게 배열되던 발생한 순서와 인과율에 의해 전달되며, ②사건 자체는 현실의 시간 속에서 발생하는 것으로서 얼다. 그리고 문체를 아이러니, 긴장 같은 단일한 요소의 구성 결과로 보지 않고, 그 작품에 동원된 장치의 통합이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그들이 예술 작품을 다층적 구조로 파악한 데 원인이 있다.이와 같은 관점을 지닌 그들은 문체는 화제, 청자, 담화의 상황, 화자의 태도에 따라 생긴다는 입장에서 논의한다. 이와 같은 화법 문제를 개척한 사람은 [전달되는 말(Repotted Speech)]이라는 논문을 쓴 볼로쉬노프(V.N.Volosinov)로서, 은 의 쪽에서 보면 자기 말이 아니라 남의 말이며, 전달자의 문맥에서 동떨어진 것으로서, 어느 정도 독립성을 지니지만, 문체적 규칙에 의하여 수정을 받지 않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이와 같은 기준으로 보면, ①과 을 엄격히 구분하는 어법 ②전달하는 말이 전달되는 말 속에 어느 정도 침투된 어법, ③전달되는 말의 독자성을 해체하는 어법으로 나눌 수 있다. 이와 같은 화법은 작가의 개성과 문예 사조에 따라 달라진다.전달되는 말과 자기 말의 구분(직선적 비개인적, 웅장한 맛이 있는 객관적 문체-고전주의)-직접화법- 권위주의적, 합리주의적, 도그마티즘예)그는 자기가 제일이라고 말했다.-전달되는 말에 적극적 개입(이상주의 내지, 낭만주의)-회화적(pictorial) 어법-사실주의적 비판적예)그는 자기가 제일이라고 아니꼽게 굴었다.저자 자신의 문맥으로 해체(현대 사실주의) -상대주의적 개인주의바흐찐(Mixail Baxtin)은 문체의 대화적 성격을 중시한 이론가로서, 전달되는 말과 전달하는 말 속에는 서로 다른 두 개의 초점이 형성되며, 이들 사이에 대화가 조성된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남의 말을 흉내내는 패로디(parody)는 한 테두리 안에 뭉쳐 있지만, 두개의 목소리가 동시에 발성하고 그들끼리 대화를 주고 받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저자의 목소리는 저자의 의도에 찬성 또는 반대에 대응하는 억양이 들어 있으며, 따라서 독백은 있을 수 없고 모두 대화라고 주장한다.그리고 그는 모든 문체는 정도와 성격의 차이만 있을 뿐 청자를 의식
프레이리 교사론을 읽고이 책은 교사란 무엇인지 일러주는 책이었다. 굳이 표현을 하자면 교사들을 위한, 교사가 되려는 사람들을 위한 지침서라고 할 수 있을까? 평소 깊이 생각해보지 않았던 교사의 역할과 중요성에 대해 새삼 느끼게 한 책이다.이 책은 교사가 되려는 이들에게 보내는 편지형식의 글을 통해서 가르침과 배움이 무엇인지, 교사에게 필요한 자질은 무엇이고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 또 교육현장에서 교사가 학생들과 어떻게 관계를 맺을 것인지를 구체적인 예를 들어 설명하고 교육자의 철학은 어떠해야 하고 어떻게 현실화할 것인지를 편지 형식의 짧은 글로 담고 있었다. 첫 번째 편지부터 아홉 번째 편지까지 이 책은 각각의 편지마다 그 나름대로의 중요한 내용들을 담고 있었다.편지들은 3개의 부분으로 나뉘어져 제1부는 가르침과 배움은 무엇이며 교사에게 필요한 자질은 어떤 것인지를 적고 있으며, 제2부는 교사가 교육현장에서 어떻게 학생들과 관계를 맺을 것인지를 구체적인 예를 들어 설명한다. 제3부는 교육자의 철학과 이를 현실화하는 방안에 대해서 서술한다.우선 제1부에서는 ‘교육자로 산다는 것’이라는 제목으로 가장 기초적이지만 가장 중요한 읽기와 쓰기, 책뿐만 아니라 세계를 읽는 것까지 언급하고 있었다. 또 교육자가 가르치는 자라는 생각을 버리고 배우는 자라는 것을 인식하여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었다. 사실 교사라는 것은 가르치는 사람이라는 인식이 강한데, 가르침도 하나의 배움이라고 역설하였다. 이 생각은 아직 생각이 짧은 내가 봤을 때에도 매우 타당한 것 같다. 누구나 가르치며 배우게 되는 것 같다. 간단한 것을 가르친다고 할지라도 그 가르침의 과정을 통해 나름대로의 배움이 생기게 되고 다음에 같은 경우가 생길 경우 그 배움을 바탕으로 더욱 알찬 가르침을 하게 되는 것 같다.공부한다는 것에 대한 생각도 다시하게 되었다. 물론 교사는 끊임없이 자기발전을 하여 학생들로 하여금 양질의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 의무이다. 하지만 이 책에선 그걸 넘어 가르치면서 배우고 공부한다는 것이 고달프고 힘든 일이기는 하지만 그 속에서 즐거움을 찾아 공부하는 것을 즐기고 창조적인 교사가 될 것을 당부하고 있었다. 또 이제까지 내가 이해도 중요하지만 암기 없이는 공부가 안될 것이라는 생각을 뒤엎고 암기는 해결책이 아님을 말하고 있었다. 또한 흔히 말하는 책이 어려워서 볼 수 없다는 인식을 고쳐주었다. 나도 가끔 레포트나 자료를 찾으러 책을 보다보면 도무지 이해하기 힘든 책들이 많았었다. 그래서 책을 어렵게 써서 알아보기 힘든 것이라고 생각하곤 했는데 나의 이러한 생각들이 잘못되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또한 두려움을 극복하여 효과적으로 공부하는 능력을 향상시키길 이 책은 기대하고 있었다. 두려움은 누구나 갖게 되지만 이 두려움을 공포의 감정으로 전환시킬 것이 아니라 즐거움의 감정으로 전환시켜 받아들일 것을 말하고 있었고, 또한 공감할 수 있었다.프레이리는 교사란 결코 소일거리나, 아무 생각 없이 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매우 강조하고 있었다. 사실 나도 처음부터 사범대학에 들어오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었다. 수능을 보고 점수에 맞는 학과를 선택하다보니 두개의 학과가 눈에 들어왔고, 두 학교 모두 합격을 했지만 이런저런 사정으로 인해 사범대학에 오게 된 것이다. 그리고 들어와서 많이 변하긴 했지만, 처음에는 공무원이나 교사나 별다를 것이 없다고까지 생각했었다. 하지만 책을 읽고 난 뒤 내가 정말 잘못 생각했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교사라는 직업이 매우 중요한 직업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있기는 했지만, 내가 생각했던 것 보다 교사의 위치는 매우 중요했고, 무책임하게 할 일도 아니란 것을 다시금 되새기게 되었다.그리고 이 책은 교사는 능동적이어야 할 것을 강조하는 듯 하다. 물론 여기서 주로 예를 들고 있는 브라질의 교육현실과 우리의 교육현실은 매우 다르긴 하겠지만, 지배층이 이끄는 대로 따라가는 교사가 되어서는 안된다고 역설한다. 평소 파업이라든지, 데모에 꽤 비판적이던 나에게는 조금 납득이 안되는 점 중에 하나였다. 물론 비판적 사고를 가지는 것은 좋지만, 그 표출형태가 파업이 되어서는 안되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이 책에서 들고 있는 현실상황이라면 그러한 일도 불사해야한다고 본다. 교사의 투쟁은 결국 교육의 질 향상을 가져오도록 하기에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교사의 권리를 회복할 줄 아는 교사가 결국 진정한 교육자로서의 자질을 보이게 된다고 생각한다.제2부에서는 교육현장에서 교사가 해야 할 일들을 당부하고 있었다. 처음 초임교사들에 대한 당부에서부터 배우는 자와 가르치는 자와의 관계, 그리고 학습자와의 커뮤니케이션을 주로 다루고 있었다. 여기서도 두려움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그리고 그 두려움을 교육하고 맞서고 극복해야한다고 말하고 있다. 또한 그 두려움을 숨길 것이 아니라 두려움을 이야기 하고 겸손하게 그 두려움을 받아들일 것을 요구했다. 내가 가장 공감을 얻은 것이 바로 이 부분이었다. 사람은 두려움을 피하려고 한다. 나도 두려움이 싫다. 하지만 이 책을 읽다보니 두려움은 하나의 발전가능성임을 알게 되었고 두려움을 이용할 필요도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