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전제왕권의 확립 (1) 제29대 태종무열왕(654~661) ① 진골출신으로 비담의 반란 제압, 알천을 누르고 실력으로 왕위에 오름 ② 대고구려‧백제전의 과정에서 전제정치 감행 ③ 이후 직계자손이 왕위에 올라 왕권의 전제화 진행 ④ 갈문왕 제도 폐지, 불교식 왕명을 버리고 중국식 시호를 취함 (2) 제31대 신문왕(681~692) ① 김흠돌의 난을 진압한 계기로 많은 귀족들을 숙청, 전제왕권 확립에 성공 ② 통치기구와 군제 정비 ㉠ 종래의 5부를 중국의 6전제도와 비슷하게 개혁 ㉡ 통일전의 6정 폐지, 9서당(중앙군) 10정(지방군)으로 확대 개편 ㉢ 국학 설치(682)→유교교육 강화 ㉣ 9주‧5소경의 지방제도 조직(685) ③ 경제개혁-관료들에게 관료전 지급(687), 녹읍 폐지(689) ④ 만파식적“… 왕께서는 대나무로 피리를 만들어 불면 천하가 화평해질 것입니다. 지금 왕의 아버님께서는 바닷속의 큰 용이 되셨고, 김유신은 다시 천신이 되셔서 두 성인이 마음을 같이 하여 이 같은 값으로 칠 수없는 큰 보물을 저에게 주시어 왕께 바치게 한 것입니다.” 왕은 몸시 놀라고 기뻐하여 오색 비단과 금과 옥을 용에게 주고,, 사자를 시켜 대나무를 베어 바다에서 나왔다. 그때 산과 용은 문득 없어지고 보이지 않았다. …왕은 돌아와서 그 대나무로 피리를 만들어 월성의 천존고에 간직해두었다. 이 피리를 불면 적병이 물러가고 질병이 낫고, 가물 때는 비가 오고, 비올 때는 비가 개고 바람이 가라앉고, 물결은 평온해지므로, 이 피리를 만파식적이라 부르고 국보로 삼았다. (3) 제33대 성덕왕(702~737) ① 유교정치의 강화-국학에 공자와 10철, 공자의 72제자 화상을 당에서 가져와 안치 ② 백성들에게 정전 지급(722) (4) 제35대 경덕왕(742~756) ① 부왕인 성덕왕의 위업을 기리기 위해 성덕대왕신종을 주조→강력한 왕권 반영
1) 신석기인의 등장 (1) 간석기 ① 돌을 가는 기술 터득, 도구의 형태와 쓰임새가 다양해짐 ② 날카로운 칼과 창, 화살촉 등을 만들었음 (2) 신석기 토기 ① 발전 단계 ㉠ 이른민무늬 토기[원시무문토기]: 바닥이 둥글고 무늬가 없음 ㉡ 덧무늬 토기[융기문토기]: 밑이 평평하고 몸체에 울퉁불퉁한 덧띠를 붙임 ㉢ 눌러찍기문 토기[압인문토기]: 몸체에 무늬를 눌러 찍음 →주로 바닷가 지역에서 발견(부산 동삼동, 웅기 굴포리 서포항, 의주 미송리, 만포진, 양양 오산리, 제주도 한경 고산리, 경남 고성 문암리 등) ② 빗살무늬토기[즐문토기](기원전 4천년경) ㉠ 한국 신석기시대를 대표하는 토기 ㉡ 팽이처럼 밑이 뾰족하거나 둥글고, 표면에 빗살처럼 생긴 무늬가 새겨져 있음 ㉢ 곡식을 담는데 많이 이용됨 ㉣ 출토지역: 서울 암사동과 미사리, 봉산 지탑리, 웅기 굴포리, 대동강 유역의 청호리 등 ③ 채색토기(기원전 2천년경) ㉠ 중국 하남성 묘저구 계통의 신석기문화의 영향을 받음 ㉡ 그릇 밑이 평평하고, 몸체에 물결무늬, 번개무늬, 타래무늬 등 동적 무늬를 그림 ㉢ 출토 지역: 청진 농포리, 평남 온천 궁산리, 부천 시도, 봉산 지탑리, 춘천 교동 등 2) 신석기인의 생활 (1) 의식주 ① 의 ㉠ 방추를 이용하여 베나 옷감을 짜서 입음 ㉡ 구슬이나 조개껍질로 장신구를 만들어 달기도 함 ② 식 ㉠ 농경의 시작 ⓐ 조, 피, 수수 등을 재배→봉산 지탑리와 평양 남경 유적에서 탄화된 좁쌀 발견 ⓑ 갈돌을 이용하여 곡식이나 열매 등을 갈아서 먹음 ㉡ 고기잡이에 그물을 쓰고 낚시를 만들어서 씀 ㉢ 돼지와 개 등 가축을 기름 ③ 주: 움집(집단적 정착 생활) ㉠ 땅을 파고 그 위에 둥글거나 네모난 집을 짓고 풀로 지붕을 덮음
제4장 고려전기Ⅰ. 고려의 건국과 집권화정책1. 고려의 건국 1) 왕건의 득세 (1) 왕건은 송악(지금 개성)지방의 호족, 본래 혈구진(지금 강화도)을 비롯한 해상세력과 밀접한 관계를 가짐 (2) 궁예 휘하에 들어가 후백제 지역의 서남해 방면 공략-진도․나주의 점령 →궁예의 신임을 얻어 광평성시중에까지 오름 2) 궁예의 몰락 (1) 광평성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관제 마련, 스스로 미륵불이라 부름 (2) 지나친 미신적 불교와 참위사상에 빠져 민심을 잃음 (3) 궁예의 취약점은 호족으로서의 토착기반이 없었다는 것 3) 고려의 건국(918)과 후삼국의 통일(936) (1) 국호를 고려, 국도를 개경(송악)으로 삼음 (2) 신라가 고려에 귀부(935) ① 왕건의 친 신라정책의 성과 ② 신라의 전통과 권위를 계승→정통왕조로서의 지위를 획득 (3) 후백제 정복 ① 934년(태조 17) 운주(지금 홍성)에서 고려에 패배, 웅진 이북의 30여성을 빼앗김 ② 내부 분열-견훤이 아들 신검에 의하여 금산사(김제)에 유패됨 ③ 태조 왕건은 신검군을 선산에서 대파하여 항복을 받음→후삼국의 통일2. 태조의 호족통제 1) 건국 초기의 정치 불안정 (1) 지방에는 여전히 호족들이 분립 →호족에게 관계 수여, 토성 분정, 공신 책정 (2) 마군장군 이흔함의 모역 2) 호족 세력의 회유 정책 (1) 중폐비사 ① ‘예물을 두터이 하고 말을 정중히 한다’는 뜻 ② 여러 도의 호족에게 사절을 보내 친화의 뜻을 표하고 귀부 호족에게 특별 대우를 함 (2) 혼인정책 ① 전국 20여 호족들과 정략 결혼 ② 29왕비-정주 류씨, 평산 박씨, 충주 유씨 등 (3) 사성정책 ① 호족에게 왕씨성 사여 ② 명주 장군 김순식에게 왕씨 사성 ③ 유력 호족과 의제가족적 관계를 맺음으로써 유대 강화
4세기 고구려의 낙랑?대방지역 경영-안악3호분?덕흥리고분의 흑서명 검토를 중심으로-임기환(1995)고구려가 낙랑?대방지역을 지배해 가는 과정을 이해하는 것은 4?5세기 고구려사를 이해하는 데에 중요하다. 고구려가 낙랑?대방군을 축출한 이후 그 토착 호족세력의 독자적 세력 기반이 상당 기간 유지되었기 때문에, 4세기 말까지도 이곳의 고구려 세력의 침투가 용이하지 않다고 이해하고 있다. 안악3호분의 묵서명에 보이는 冬壽와 덕흥리고분의 흑서명에 보이는 유주자사 鎭, 이들과 고구려정권의 관련성을 통해 이 시기 고구려의 낙랑?대방지역 지배방식을 살펴보도록 하겠다.안악3호분은 봉토석실분이며, 피장자 동수는 요동군 평곽현 출신으로 전한 모용씨의 휘하에서 고위 관직을 역임하다가 내분에 의하여 336년에 고구려로 망명하였고, 375년에 사망한 인물이다. 동수의 망명 이후 342년에 전연은 고구려를 침입하여 국내성을 함락시키고, 미천왕의 시신과 왕모 주씨 등을 인질로 잡아갔다. 고국원왕은 이듬해 왕제를 전연에 보내어 미천왕의 시신은 돌려받았으나 왕모는 귀환시키지 못해서 그 뒤 전연과의 관계 개선에 애를 쓰고 있었는데, 이 때 전연 출신인 동수 등을 중개자로 활용하였을 가능성이 높다.고구려는 낙랑?대방지역을 차지한 후 적극적으로 이 지역의 지배에 관심을 기울였다. 특히 장수산성은 산성의 형태와 축조방식이 전형적인 고구려식 산성이며 그 규모 또한 거대하기 때문에, 이 산성을 축조하기 위해서는 주변 일대 주민들에 대한 대규모의 노동력 징발과 통제가 전제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또한 4세기 중엽 이후에 고구려는 백제와 본격적으로 충돌하기 시작하는데, 이때부터 서북 지역에 대한 통제력 역시 강화되어 갔을 것이다.고구려는 낙랑?대방지역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는 과정에서 일정기간 특수한 형태의 지배방식을 취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그 곳은 중국세력의 군현지배를 수백 년동안 받아온 곳이기 때문에 고구려의 기존 지배 방식으로는 어려운 점이 많았을 것이며, 당대의 중원문화를 시차 없이 수용해왔던 광범위한 한화된 지배층의 존재를 고려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또한 중국의 군현체제를 경험하고 우수한 중원문화를 습득한 이 지역의 지배층들에 대한 장차 대중국관계에서 이들의 활동이 기대되었기 때문에 단순히 피정복자로 취급할 대상은 아니었다.이와 간은 낙랑?대방지역의 특수성을 고려해본다면, 당시 고구려 중앙정권은 기존의 군현지배체제를 해체하기 보다는 그 형식적 외연을 그대로 두면서, 통치력을 서서히 강화해 가는 정책을 취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아마도 이때 정치적?문화적 충격을 줄이기 위해서 중국계 망명인들을 등용하여 이 지역의 지배자로 임명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동수를 비로샇여, 장무이, 동리 등이 그 대표적인 예가 될 것이다. 특히 이들 중국계 망명인들이 현실적으로 이 지역에서 아무런 자기 기반이 없다는 점도 고구려정권으로서는 매력적인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각 지역의 토착 호족세력을 누르고 동수를 낙랑?대방지역의 대표자로 내세우는 과정에서, 고구려의 이 지역에 대한 지배권도 더욱 강화되었을 것이다. 예컨대 동수의 使持節都督諸軍事라는 관직은 고구려가 동수를 이 지역의 대표자로 내세우면서 중국의 도독제를 차용하여 수용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왜냐하면 낙랑?지방 세력을 고구려의 기존 정치조직으로 직접 편제하기가 곤란하였기 때문이다.고국원왕대에는 동수 등 중국인 망명인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면서 낙랑?대방지역에 대한 고구려의 지배력이 강화되고 있었고, 이러한 정책은 광개토왕대에 더욱 진전되는데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덕흥리고분의 흑서명이다. 피장자 진은 후연에서 建威將軍 遼東太守를 역임하다가 고구려에 망명한 후 左將軍과 使持節 東夷校尉 幽州刺史란 관직을 받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와 같은 진의 관직으로 볼 때, 진은 고구려의 중앙정권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는 낙랑?대방지역의 대표자로서 성격이 드러남을 알 수 있다.고국원왕대에는 동수 등 중국인 망명인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면서 낙랑?대방지역에 대한 고구려의 지배력이 강화되고 있었다. 이러한 정책은 광개토대왕대에 더욱 진전 되는데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덕흥리고분의 흑서명이다. 피장자 鎭은 중국망명인으로서 망명 이전에 建威將軍을 역임하다가, 고구려로 망명한 후로 고구려로부터 小大兄?左將軍의 직을 받고, 다시 후연으로부터 龍讓將軍을 받았다. 동수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고구려왕권이 진을 낙랑?대방지역이나 혹은 요동지역까지 포괄한 지역의 대표자로 내세우는 과정에서 관직을 수여하였다. 묵서명에 나오는 幽州는 낙랑?대방지역 주민이나 고구려인의 관념에 의해 독자적으로 구성된 유주이다.鎭은 고구려 중앙정권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는 낙랑?대방지역의 대표자였다.한편, 덕흥리고분의 묵서명에서 보이는 막부 관료명이 유의된다. 광개토대왕은 鎭으로 하여금 막부조직을 관장하게 하였다. 幽州刺史 鎭 휘하의 막부 관료는 그 주 대상이 낙랑?대방 지역 일대의 토착호족세력과 중국계 망명집단 이었다. 즉 유주자사 鎭을 필두로 덕흥리고분에 나타난 각 관료들은 낙랑?대방지역일대의 토착호족 세력과 중국계 망명집단을 편제하는 기능을 하였다. 이러한 막부제는 낙랑?대방지역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해 가는 고구려 왕권의 특수한 지배 방식이었다.한반도 서북지역에 대한 경영은 고국원왕대에 추진되기 시작하여, 소수림왕대의 국가체제의 재편에 따라 한층 가속화되고, 백제와의 쟁패가 치열해지면서부터 남진의 전진의 기지로 적극 활용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광개토왕대의 적극적인 평양경영상은 이러한 연장선에서 이해된다.광개토왕 2년에 평양에 9개의 불교 사찰을 창건한 사실에서 이미 고구려 중앙권력이 이 지역의 지배에 성공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 광개토대왕 18년에 이루어진 평양성 민호의 국동 6성으로의 이주는, 곧 이 지역 토착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한 정책이라는 의미와 함께 이 지역 주민 구성의 전반적인 개편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리고 광개토왕비에 보이는 영락 6년의 백제정벌시에 동원되는 수군은 곧 낙랑?대방지역의 군사력이었는데, 이는 이 지역의 군사력을 동원할 정도로 그 지배력이 강화되어 있음을 방증한다. 평양성에서 守墓人烟戶가 차출되었던 사실에서 이 지역에 성을 단위로 한 직접적인 지방지배가 시행되고 있음도 알 수 있다. 이러한 동향은 사실상 평양천도를 위한 정지작업이라고 할 수 있으며, 장수왕 15년의 평양천도는 이러한 광개토왕대의 평양 경영을 전제로 가능하였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