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월형석도 시원과 사용분포수업제목Ⅰ. 반월형석도의 개념 Ⅱ. 선행연구사 및 기원 Ⅲ. 제형식 Ⅳ. 지역별 출토양상 Ⅴ. 단계별 변화양상 Ⅵ. 재질선별과 제작방법 Ⅶ. 사용방법 Ⅷ. 반월형석도를 통해 본 청동기시대의 농경목 차논문 및 연구계획서 작성 특강1. 개념 : 협의의 개념(등이나 날이 굽은 형태의 石刀) 광의의 개념(모든 摘穗用石刀)Ⅰ. 개념 및 용도논문 및 연구계획서 작성 특강2.용도 : 摘穗具 이외의 다른용도로 사용되었을 가능성? ☞ 안승모 : 서확철 이외에는 刀의 용도로 사용 ☞ 박호석, 안승모 : 삼의 껍질을 벗기는 삼칼로서의 사용 ☞ 최정필 : 토기제작에 사용(장방형, 즐형)1. 중국학자 ☞ 安志敏 : 중국 동북지방 출토 석도 연구 장방형(앙소문화단계 : 황화 중상류, 강남지역) →반월형석도(용산문화단계 : 황화 하류, 동북지방) →한반도와 일본으로 전파Ⅱ. 선행연구사 및 기원논문 및 연구계획서 작성 특강☞ 瑜琼 : 중국 동북지방 반월형석도 연구 B.C3,500년에 등장 기원전후 소멸 시기적 변천 : 구멍위치 背部→刃部 이동2. 일본학자 ☞ 石毛直道 : 일본석도 기원(중국 양자강 하류) 양자강 : 長方形→半月形直線刃→半月形外彎刃 변화 半月形外彎刃石刀 : 稻作栽培技術과 함께 한반도 남부와 구주지역 전래Ⅱ. 선행연구사 및 기원논문 및 연구계획서 작성 특강☞ 下條信行 : 반면 반월형외만인석도 계보 한반도 남부 근거 : 한반도 남부에 집중 분포, 제작상 유사 즉, 석도의 배부호도와 찰절기법 연구를 통하여 요동반도→한반도→일본으로의 계보설정3. 한국학자 ☞ 崔淑卿 : 단인류, 양인류 분류 단인류 : 남만주 석도 영향→한반도 전역 분포 양인류 : 중국 북부지역 석도 영향→두만강유역 분포Ⅱ. 선행연구사 및 기원논문 및 연구계획서 작성 특강☞ 金元龍 : 발전관계 설정, 구체적인 실연대 제시 시기적 변천 : 즐형→어형→단주형→장주형,삼각형 변화 발전 장방형석도 : 변화없이 지속적으로 사용 존속기간 : B.C.1000~기원전후 B.C.300년 전후 : 도작재배와의 관련 가능성 제시☞ 安承模 : 종합적 연구 시도 전파과정(2 루트) : 요동반도→한반도 서북지방 요동반도→만주지방→한반도 동북지방 형식별 변천(2 흐름) : 長方形→短舟形 변화 魚形→櫛形, 長舟形→短舟形→三角形1. 三角形石刀의 발생견해 ▶崔淑卿 : 表裏面 모두 사용하기 위한 개량과정에서 直線刃 발생 ▶ 金元龍 : 제작상의 간략화 ▶ 全榮來 : 작업대상물 차이 의한 석도 사용방법 변화 ▶ 金相冕, 崔仁善 : 先學연구 수용, 동시에 배경에 稻作農耕의 成熟 이 있었음을 지적 ☞ 즉 주로 기능적인 측면에서 삼각형석도의 발생을 설명 ▶ 崔夢龍 : 長舟形石刀 파손품 재가공 과정에서 발생(특수한 목적에 의하여 고안된 것이 아님을 주장)→무리가 있다고 보여짐Ⅱ. 선행연구사 및 기원논문 및 연구계획서 작성 특강Ⅲ. 반월형석도의 제형식(孫晙鎬, 2001)논문 및 연구계획서 작성 특강刃部의 外形石刀의 外觀基本形態模式圖直刃類長方形直背直刃櫛形曲背直刃梯形直背直刃逆梯形直背直刃 (3개의 刃部)偏舟形直背直刃 (2개 이상의 刃部)三角形直背直刃 (2개 刃部가 交刃)曲刃類魚形曲背曲刃舟形直背曲刃再加工品不定形Ⅳ. 지역별 출토양상논문 및 연구계획서 작성 특강1. 두만강 : 長方形, 直刃類, 1孔 주류 2. 압록강 : 梯形, 直刃類, 1孔 주류 3. 청천·대동강 : 팽이형토기문화권 중심지, 출토량 증가, 舟形·魚形 대다수, 2孔으로 고정화 경향 4. 동한만 : 舟形, 1孔 주류 5. 한강 : 舟形·魚形, 2孔으로 통일 6. 영동 : 舟形·魚形 한정, 2孔 주류 ☞ 청천·대동강 확립된 양상→동한만, 한강, 영동지방 영향 7. 금강 : 三角形·舟形·偏舟形, 2孔 주류 송국리이전단계:魚形·舟形 송국리단계:偏舟形·三角形 8. 영산·섬진강 : 三角形·舟形, 2孔 주류 舟形石刀 : 송·이, 송단계 출토 9. 낙동강 : 三角形·舟形 주류, 1孔 다수-지역적 특색Ⅴ. 단계별 변화양상논문 및 연구계획서 작성 특강Ⅰ단계 : 長方形, 櫛形, 魚形石刀만 출토 Ⅱ단계 : 三角形石刀 출토 Ⅰ·Ⅱ단계 : 梯形, 逆梯形, 偏舟形, 舟形石刀 출토 ☞ Ⅱ단계 유적인 휴암리, 송국리, 대곡리 유적 : 舟形石刀, 三角形石刀 공반출토 따라서 양 형식간의 변화과정을 상정할 수 있음즉, Ⅰ단계 : 長方形, 櫛形, 魚形, 梯形, 舟形石刀가 사용되며, 魚形과 舟形이 주류, 이 중 舟形石刀의 刃部 직선화→逆梯形, 偏舟形 변화·발전, 逆梯形 오랫동안 지속되는 반면 偏舟形은 Ⅱ단계의 이른시기에 소멸 Ⅱ단계 : 長方形, 櫛形, 魚形은 소멸, 舟形의 小形化와 동시에 刃部의 直線化로 三角形石刀 발생·이용Ⅵ. 재질선별과 제작방법논문 및 연구계획서 작성 특강1. 재질 片巖, 粘板巖, 沙巖, 頁巖, 泥巖, 巖脈, 片麻巖, 凝灰巖, 流紋巖, 硅巖, 실트스톤, 혼펠스, 쳐트 등 다양→이 중 片巖, 粘板巖, 沙巖, 頁巖 주류 2. 선별목적 ▶제작, 재가공의 편리성 : 편암, 점판암, 혈암 ▶강한 경도의 내구성 : 사암 ▶취득의 용이성 : 지구고고학(Geoarchaeology) 분야의 산지추정 분석에 대한 연구 자료가 축적되어야 해결Ⅵ. 재질선별과 제작방법논문 및 연구계획서 작성 특강제작공정 打擊→弱磨→透孔→精磨→完成品 순서가 일치하지 않는 경우 존재(透孔, 精磨段階-도면) ☞ 반월형석도의 제작은 반드시 일정한 순서로 이루어진다고 볼 수 없음 일부연구자 : 투공단계에서 제작에 실패할 확률이 높다는 이유로 마연하기 전에 투공단계를 거친다고 파악Ⅶ. 사용방법(사용흔 분석)논문 및 연구계획서 작성 특강A면 : 刃部가 형성된 면 B면 : 그 반대면 ①번유물(보령 관산리 출토품) ▶ 舟形石刀 B면:좌측 광택면 ☞ B면이 위쪽으로 향한 상태로 이삭을 땀 ☞ 오른손잡이 사용 ▶ 투공면 상단 약한 광택면 ☞ 구멍에 연결한 끈 흔적 관련A면 : 刃部가 형성된 면 B면 : 그 반대면 ②번유물(하남 미사리 출토품) ▶ 魚形石刀 B면:중앙좌측 광택면 ☞ ①번유물과 동일한 방법으로 사용 ▶ A면 양 투공면 사이 광택면 ☞ 종합 : A면 양쪽 구멍을 가로질러 통과한 끈이 B면으로 이어져 背部방향으로 올려져 작업자의 오른손 중지에 연결된 형태Ⅷ. 농경논문 및 연구계획서 작성 특강1. Ⅰ단계(비송국리유형)유적 ▶ 두만강, 압록강유역 ① 長方形, 櫛形, 梯形 주류(直刃類) ② 直刃이 曲刃보다 제작상 용이 ③ 농경에 불리한 자연환경 ④ 초보적 농경방식-화전농경 ☞ 빈번하지 사용하지 않는 도구에 대한 기능적인 장점을 채택하기 보다는 제작상의 편리함을 선택한 당시인의 사고방식 작용 ▶ 기타지역 ① 舟形, 魚形의 비약적 증가(曲刃類) ② 농경에 유리한 자연환경 ③ 밭농사, 논농사 모두 가능 ☞ 제작상이 어려움을 극복 曲刃을 채택하여 刃部의 사용면적 極大化 -기능적인 장점을 먼저 고려한 당시인의 사고방식 반영 ☞ 대표유적 : 진주 대평리, 울산 옥현유적 등2. Ⅱ단계 ① 도작농경 성행 ② 삼각형석도 발생·성행 ☞ 直刃인 동시에 양쪽의 刃部를 번갈아 사용할 수 있어 제작의 용이성과 사용면적의 극대화라는 양자 모두 택함 ☞ 대표유적 : 논산 마전리 유적 등Ⅷ. 농경논문 및 연구계획서 작성 특강1. 선사시대 농기구 ▶ 掘地具 ① 돌괭이 ▷신석기시대 전기부터 출현 ▷ 자루부착 땅 일구거나 낟알을 심는데 이용 ▷ 어깨 좁고 수평날(날이 도구의 최대폭) ▷ 자루부착 방향에 따라 삽이나 따비로 사용 ▷ 서포항, 궁산, 오산리, 암사동 유적 등 출토② 돌보습 ▷ 신석기시대 중기 이후 등장 ▷ 흙을 뒤덮는 갈이농사에 사용 ▷ 굴지구 중 가장 대형(25~65㎝) ▷ 위 좁고, 중앙 넓어지다가 아래 좁아듬(중앙이 최대폭)③ 곰배괭이 ▷ 신석기시대 후기의 표지유물 ▷ 한반도 동북지방 출토 ▷ 땅을 파거나 골을 켤때, 덩어리진 흙 부수거나 땅을 판판하게 고를 때, 잡초제거할 때 등 다용도의 농사도구 ▷ 이전 단계의 신발모양 괭이보다 발달된 형태Ⅷ. 농경논문 및 연구계획서 작성 특강1. 선사시대 농기구 ▶ 收穫具 및 製粉具 ① 돌낫 ▷ 곡식이나 잡초를 베든지 이삭을 자르는데 사용 ▷ 돌, 멧돼지 이빨, 짐승의 뼈, 조개껍질로 만든 것 ▷ 편인보다는 양인이 대부분 ▷ 지탑리유적 : 탄화조와 공반출토② 갈돌과 갈판 ▷ 열매, 곡물 껍질을 벗기거나 가루를 만드는데 사용 ▷ 이 외에 토기 태토비짐의 첨가물인 패류나 돌 등을 가는데 사용 ▷ 갈돌형태 갈판보다 폭이 좁아 아랫면이 직선인 것(강릉 지경동) 갈판보다 폭이 넓어 아랫면 양쪽이 오목한 것(청원 쌍청리, 안산 신길) 한 쪽 끝을 손잡이로 쓸 수 있는 것(진주 상촌리) ▷ 시기가 내려오면서 점차 소형화, 내륙보다 해안가유적의 출토품 소형③ 돌공이 ▷ 신석기시대에 출현, 청동기시대에 주로 사용 ▷ 곡식이나 채집한 식물을 찧는데 사용 ▷ 공이 아랫면에 찍힌면 일정하게 형성崔淑卿, 1960, 「韓國摘穗石刀의 硏究」『歷史學報』第13輯, 歷史學會 金元龍, 1972, 「韓國 半月形石刀의 發生과 展開」『史學誌』6, 檀國大學校史學會 安承模, 1985, 『韓國半月形石刀의 硏究』, 서울大學校大學院 碩士學位論 崔仁善, 1985, 「韓國交刃石刀에 對한 考察」『全南文化』3, 全南大學校 全南文化硏究會 孫晙鎬, 2001, 『韓半島 出土 半月形石刀의 諸分析』, 高麗大學校大學院 碩士學位論文 國立光州博物館, 1994, 『先·原史人의 道具와 技術』 慶尙南道·東亞大學校博物館, 1999, 『南江流域文化遺蹟發掘圖錄』 국립진주박물관, 2002, 『청동기시대의 大坪·大坪人』 국립대구박물관, 2005, 『머나먼 진화의 여정 사람과 돌』 복천박물관, 2005, 『선사·고대의 요리』참고문헌논문 및 연구계획서 작성 특강{nameOfApplication=Show}
國營吉野ケ里歷史公園 -외국사례분석-수업제목Ⅰ. 환경박물관학연습1. 주변환경 일본 구주 사가현 위치 동-타데가와천(북→ 남) 북-세부리산지 서,남-평야지대2. 교통 동-국도385호선 남-JR나가사키선 국도 34호선☞ 1925년 : 마쯔오테이사쿠(松尾禎作)-처음으로 학술잡지에 게재. ☞ 1952년 : 옹관 및 중국동경, 철제무기 등이 출토되어 중요성 인식. ☞ 1971년 : 하시구찌다쯔야(橋口達也)-야요이시대 유적 개관. ☞ 1980년대 : 교육위원회에 의해 구제발굴 성격으로 본격적인 발굴조사(옹관묘군, 환호터, 굴립주건물터 등 야요이시대 중기-후기 유적) ☞ 1990년대 : 분구묘, 환호취락, 제단, 수혈건물터, 굴립주건물터 등이 확인 ☞ 2000년대 : 외곽지역에로의 연차적인 학술발굴 진행Ⅱ. 발굴개보박물관학연습☞ 1973년 : 농업고등학교 이전후보지로 부상-발굴조사비 문제로 백지화 ☞ 1982년 : 공업단지유력후보지(80ha)로 결정되어 매장문화재 확인조사 실시-매장문화재분포지역이 63ha로 확인 ☞ 1989년 : 발굴성과를 매스컴에서 대대적으로 보도(사가현 지사가 사적지정을 국가에 요청), 방문인원-100만명 ☞ 1990년 : 史蹟으로 지정, 방문인원-300만명 ☞ 1991년 : 特別史蹟으로 지정(구주지방지사회, 구주국회의원회 등에서 국영요시노가리역사공원 추진), 방문인원-500만명 ☞ 1992년 : 국영 요시노가리역사공원 설치-각료회의에서 결정(國營公園54ha, 縣營公園 63ha, 총 117ha) ☞ 1993~4년 : 국영 요시노가리역사공원 기본계획 책정 ☞ 1995~6년 : 기공식 및 기본계획 보고서 마무리, 방문인원 1,000만명 ☞ 2001년 : 제1기 개원Ⅲ. 보존경과박물관학연습1. 목적 - 요시노가리유적의 보존과 활용을 도모하기 위한 도시공원 - 일본 초기 문화재로서의 기능과 공원으로서의 기능을 겸비한 역사공원 총면적 117ha 國營公園 54ha(入口 존 4ha, 特別史蹟 指定地 22ha, 史蹟 指定地 28ha) 縣營公園 63haⅥ. 국영 요시노가리역사공원 추진박물관학연습2. 추진계획 목표 공원정비 기본테마 : '야요이인의 목소리가 들려오다' 결정, 유구 적절한 복원과 피부에 와 닿는 전시를 통해 야요이시대를 느낄 수 있는 역사공원Ⅵ. 국영 요시노가리역사공원 추진박물관학연습1) 환호취락 존 : 공원중심(환호 및 수혈주거 복원) 2) 고대의 숲 존 : 북쪽 세부리산지 일대-연수체험지, 고대식물원 등 재현, 학습, 생활체험 공간) 3) 고대 벌판의 존 : 서쪽 평야지대(야요이시대 논, 초목지 등 구현, 구애없는 쉼공간) 4) 입구 존 : 동쪽 국도 385호선( 각종 서비스센터, 정보센터, 주차장 등 구현, 센터 기능)박물관학연습Ⅵ. 국영 요시노가리역사공원 추진1) 환호취락 존 - 북내곽(왕의 궁전) - 북분구묘(집단옹관) - 남내곽(대형수혈주거) - 고상건물군(창고)박물관학연습Ⅵ. 국영 요시노가리역사공원 추진1) 환호취락 존 - 북내곽(왕의 궁전) - 북분구묘(집단옹관) - 남내곽(대형수혈주거) - 고상건물군(창고)박물관학연습Ⅵ. 국영 요시노가리역사공원 추진1) 환호취락 존 - 북내곽(왕의 궁전) - 북분구묘(집단옹관) - 남내곽(대형수혈주거) - 고상건물군(창고)박물관학연습Ⅵ. 국영 요시노가리역사공원 추진1) 환호취락 존 - 북내곽(왕의 궁전) - 북분구묘(집단옹관) - 남내곽(대형수혈주거) - 고상건물군(창고)박물관학연습Ⅵ. 국영 요시노가리역사공원 추진2) 고대의 숲 존 - 북쪽 세부리산지 일대-연수체험지, 고대식물원 등을 재현해서 피리제작, 발화체험, 숙박체험, 토기제작 등의 생활체험 공간)박물관학연습Ⅵ. 국영 요시노가리역사공원 추진3) 고대의 벌판 존 - 서쪽 평야지대(야요이시대 논, 초목지 등 구현)박물관학연습Ⅵ. 국영 요시노가리역사공원 추진4) 입구 존 - 동쪽 국도 385호선( 각종 서비스센터, 정보센터, 박물관, 종압안내소, 주차장 등 구현)박물관학연습Ⅵ. 국영 요시노가리역사공원 추진기타) 고대의 숲 존과 환호취락 사이 공간 - 2열의 옹관묘열을 발굴당시의 모습대로 재현박물관학연습Ⅴ . 국영 요시노가리역사공원 진척상황☞ 1992년에 사업이 착수된 이래, 지금까지 각종 조사 ․ 설계 등이 실시. ☞ 1995년 11월에는, 國 ․ 縣共同으로 요시노가리역사공원 기공식을 행해 遺構保存 ․ 整地 ․ 造成作業에 착수. ☞ 취락을 둘러싸고 있는 거대한 外環壕와 城柵, 南內郭 內環壕의 城柵 일부도 복원 정비가 진행됨. ☞ 1999년 10월에는 북내곽 정비착수 기념행사를 개최. ☞ 2001년 第1期開園때 주요한 복원 대상인 북내곽의 복원이 이루어짐. ☞ 현재 고대의 숲 존, 들판 존, 입구 존 지역은 연차적인 발굴조사를 기초로 복원, 정비가 이루어지고 있음. ☞ 國營公園 : 建設省이 관할하는 공원으로 일본에 총17개소 있음 ☞ 특히 口號公園이라고 불리는 것은 「국가적 기념사업 혹은 일본고유의 뛰어난 문화적 자산의 보존과 활용을 도모하기 위해 각료회의의 결정을 거쳐 설치되는 공원」으로, 일본 전국에 4개소밖에 지정되지 않은 공원박물관학연습Ⅵ. 이용안내1. 개원시간 6월 1일 ~ 8월 31일 : 09:00~18:00 9월 1일 ~ 다음해 5월 31일 : 09:00~17:002. 이용요금 대인(15세 이상) 일반:400円, 단체:280円, 연간passport:4,000円 소인(초중학생) 일반:80円, 단체:40円, 연간passport:800円 연간passport는 구입일로부터 1년간 유효 초등학생 이하 무료 단체조건 : 20인 이상3. 주차요금 대형차 : 1,000円, 소형차 : 300円, 이륜차 : 100円{nameOfApplication=Show}
日本 佐賀縣 吉野ケ里遺蹟-日本 最大 環壕聚落址Ⅰ. 요시노가리의 발자취사가현간자끼군(佐賀縣 神埼郡) 간자끼쵸(神埼町)?미타가와쵸(三田川町)?히가시세부리손(東脊振村)에 걸쳐져 있는 요시노가리유적은 벼농사가 개시된 이래, 일본열도사회에 고대국가성립의 전제가 되는 원시적인 국가가 형성되어진 과정과 그 공간적인 확대를 유적의 변천으로부터 완전하게 알 수 있는 학술적 가치가 매우 높은 야요이시대의 유적이다 1989년에 전모가 거의 밝혀진 웅장한 규모의 후기 환호취락과 長徑 40m인 중기의 墳丘墓는 前例가 없는 거대한 것이다. 또 망루터나 高床倉庫로 생각되는 掘立柱建物터들, 그리고 겹겹이 돌려진 크고 작은 환호터, 밀집된 竪穴住居址群 등 『魏志倭人傳』에 기록되어 있는 세계를 방불케하는 유적이기도 하고, 일본의 초기농경사회에 있어서 지역의 정치, 경제, 종교의 중심이 되는 야요이도시의 출현을 알리고 있다.이러한 요시노가리유적이 가진 중요성 때문에, 1990년 5월에는 이례없이 신속하게 史蹟으로 지정되고, 다음해인 1991년 5월에는 特別史蹟으로 격상되었다. 그 후 1992년 10월, 각료회의에서는 특별사적을 중심으로 한 54ha를 國營歷史公園으로 지정하였다. 주위의 縣營歷史公園 약 63ha를 합친 약 117ha의 광대한 역사공원은 2001년 第1期開園을 목표로 정비공사가 진행되고 있다. 사가현에서는 1989년 가을부터 假整備를 해서 공개하고 있는데, 1989년 2월 전국적으로 화제가 된 이후, 1999년 10월까지 국내외 견학자가 1,250만명을 넘었다.1987년부터 3년간 실시된 神埼工業團地開發에 따른 30ha의 발굴조사가 계속되어, 유적전체의 규모나 미발굴지역의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1989년부터 광범한 지역을 대상으로 많은 시굴조사를 계속하고 있다. 이 조사에 위해 환호취락의 범위가 약 40ha가 넘는 거대한 규모임이 판명되었고, 또 취락내부에서는 銅劍 8자루가 출토된 분구묘를 훨씬 능가하는 분구묘같은 인공의 盛土遺構(가칭 南墳丘墓)와 환호취락 중앙의 內壕로 둘러싸인가현과 후쿠오카의 연구자들에 의해 주목되어 학술잡지 등에 게재되었다.1952년, 구릉북부에 위치하는 히가시세부리손 미쯔나가타(三津永田)유적의 밀감밭조성에 따라, 옹관안에서 미생인골과 함께 中國製銅鏡(連弧文昭明鏡 ? ?龍文鏡), 조개팔찌 등이 출토되었고, 다음해에는 태풍에 의해 붕괴된 하천제방의 복구시, 채토지로 채택되어 일본고고학회의 쯔보이교타리(坪井淸足) ? 카나자키히로시(金關恕) 등에 의해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새롭게 중국경(流雲文緣獸帶鏡)과 철제칼 등이 출토되어, 「대륙문화유입의 교통로에 해당하는 현해탄쪽의 지방뿐 아니라, 이 지방에서도 관련된 물건이 받아들여져 있다」는 것이 강하게 인식되었다.1970년대 후반과 80년대 전반, 요시노가리유적 주변에도 포장정비사업과 공장 ? 택지건설에 따라 발굴조사가 실시되게 되었다. 1980년도 간자끼쵸 교육위원회의 조사에서, 현재의 가복원 고상창고군의 서쪽 논부분에서 야요이시대 후기의 고상창고로 생각되는 대형 굴립주건물터 여러 채와, 구릉위에서는 두 줄로 질서있게 매장되어 있던 옹관이 발굴되었다. 1981년과 1982년도의 마타가와쵸 교육위원회의 조사에서, 구릉남서끝의 논지역에서 야요이시대 중기부터 후기에 걸친 굴립주건물터군과 유구 등이 발굴되어, 다량의 탄화미와 절구공이 등의 목제품이 출토되었다.1982년 6월에는, 요시노가리유적일대가 공업단지 최유력후보지로 선정되어, 동년 7월부터 11월에 걸쳐서 요시노가리유적조사회에 의해 단지예정전지역에 대해서 확인조사가 실시되었다. 그 후 논지역의 확인조사도 행해져, 단지계획지 약 68ha 중 문화재보존녹지 6ha를 제외한 약 30ha에 대한 기록보존을 위해 발굴조사를 행하게 되었다.1985년과 1986년, 縣敎育委員會의 佐賀東部導水路建設에 따른 조사시 구릉위(현재의 요시노가리유적 전시실 부근)에서 옹관묘군과 후기의 유적 등이 발굴되었다.이상의 경과를 거쳐, 1986년 5월 하순부터 縣敎育委員會에 위한 본격적인 발굴조사가 시작되었다.【조사경과 연표】□ 1925년 : 마쯔오테이노가리유적조사회에 의해 공업단지예정지(논 부분)의 문화재확인조사를 실시, 5월에는 縣교육위원회에 의해 간자끼공업단지 조성에 따른 요시노가리유적 30ha의 발굴조사가 시작되고, 북부구릉위에서 두 줄로 매장된 야요이시대 중기의 옹관묘군 다수, 그 西斜面에서 나라시대의 굴립주건물터와 우물터, 중부에서 야요이시대 후기의 대규모 환호터의 일부를 발굴.□ 1987년 : 구릉의 서사면에서 나라시대의 굴립주건물터와 우물터 등이 새로이 발굴되었고, 또 췅되었던 驛路터도 확인되는 등 일대에 나라시대의 神埼郡 官衙와 神埼驛家의 존재를 시사.□ 1988년 : 외환호의 대부분을 확인해, 내부에서 새로이 환호에 의해 둘러싸인 공간(후에 南內郭으로 호칭)을 발견, 남내곽 서쪽의 외환호터에서 국내최초의 巴形銅器의 鑄型 등이 출토됨, 남내곽의 내환호 안쪽에서 망루로 추정되는 건물터를 발굴.□ 1989년 : 대규모 환호취락의 거의 전체를 발굴. 2월 23일부터 신문, TV에서 대대적인 보도가 계속되어, 전국각지에서 견학자가 밀려듬, 3월, 분구묘 발굴조사가 시작되어, 옹관7기가 발굴되었고, 동검 4자루와 유리옥이 다량으로 출토됨, 4월부터 유적 전체를 밝히기 위한 확인조사가 시작되어, 유적 남부에서 야요이시대 중기의 청동기주조유구가 발굴되었고, 남단에서는 분구묘 형태의 인공으로 盛土된 유구를 확인해 南墳丘墓로 가칭(북부의 분구묘는 이후 北墳丘墓로 가칭).□ 1990년 : 1989년부터의 확인조사 결과, 요시노가리유적 야요이시대 후기 환호취락의 규모느니 40ha로 추정됨.□ 1992년 : 분구묘 남쪽에서, 2중 환호로 둘러싸여진 공간(北內郭) 확인, 그 안팎에서 망루 등의 굴립주건물터 등을 발굴, 북분구묘의 재발굴을 실시해, 새로이 옹관묘 7기가 발굴되었고, 동검 등이 출토.□ 1993년 : 북내곽 내부에서 사방 12.5m의 거대한 굴립주건물터를 발굴, 祭殿의 重層建物로 추정됨, 북내곽터의 해자에서 銅戈 출토.□ 1996년 : 유적남부의 낮은 곳에서 외환호의 연장부분을 확인하였고, 다량의 목제다리고 있을 뿐인 상황인데, 유적ㅂ존에 대한 찬성론, 반대론, 신중론이 난무하여 전국의 이목이 모아졌지만, 무엇보다도 유적이 지니고 있는 높은 학술적가치와 『魏志倭人傳』에 기록되어 있는 邪馬台國을 방불케하는 커다란 매력에서, 최종적으로 동년 6월, 주요한 유구가 집중되어 있는 구역을 중심으로 한 약 22ha를 보존하기로 정식으로 결정되었다.보존 결정 후, 요시노가리유적은 그 학술적가치가 높아, 1990년에는 國家史蹟으로, 다음해인 1991년에는 전례없이 신속히 特別史蹟으로 지정되어, 명실공히 일본을 대표하는 야요이시대의 超一級유적으로 인정받게 되었다.이러한 중에, 國營公園이라는 제도가 있어, 이 유적이 가진 학술적 ? 역사적 ? 문화적가치의 중요성으로 따진다면 충분히 국영공원으로서 정비될 가능성이 있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국영공원이라는 것은 建設省이 관할하는 공원으로, 특히 口號公園이라고 불리는 것은 「구각적 기념사업 혹은 일본고유의 뛰어난 문화적 자산의 보존과 활용을 도모하기 위한 각료회의의 결정을 거쳐 설치되는 공원」이라는 위치를 차지하는 것으로, 일본 전국에도 4개소밖에 지정되지 않은 공원이다. 이 구호국영공원으로서 인정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국가적인 차원에서 가치가 인정되어야 하는데, 요시노가리유적은 「야요이시대에 있어서 일본의 성립을 나타내는 유일한 유적」으로서 학술적으로 극히 높은 평가를 얻고 있어서, 이러한 이유에서 1992년 10월, 당시의 미야자와(宮澤)內閣에 의해, 일본의 다섯 번째 구호국영공원(역사공원으로서는 아스카(飛鳥)에 이은 두 번째)으로서 정비될 것이 각료회의에서 결정되었다.國家(建設省)와 縣(土木部 ? 敎育廳)이 공동으로 추진하는 일본 최초의 본격적인 역사공원으로서 주목을 모으고 있다.【보존경과 연표】□ 1973년 : 요시노가리유적 남부의 구릉이 縣立神埼農業高等學校의 移轉후보지로서 부상되지만, 매장문화재의 밀집분포와 발굴조사비 문제로 백지화.□ 1981년 : 6월, 佐賀縣東部地區工業團地로의 적합성여부에 대한 검토 착수.□ 1982물군을 假復元하여 공개 시작.□ 1990년 : 3월 견학자 누계 200만명, 4월 保利 文部大臣 시찰, 5월 史蹟으로 지정, 9월 견학자 누계 300만명.□ 1991년 : 4월 견학자 누계 400만명, 5월 特別史蹟으로 지정, 6월 九州地方知事會議에서 「요시노가리유적 주변의 국영공원화 실현에 대하여」특별결의, 8월 井本勇 佐賀縣知事 「국영 요시노가리역사공원 실현추진본부」를 설치, 九州國會議員會, 九州地方知事會, 九州?山口經濟聯合會 합동에 위한 「국영공원화 실현에 대하여」결의 ? 정부에 요청, 10월 九州地區 市町村 문화재보존정비협의회 「국영 요시노가리역사공원의 실현에 대하여」요청, 견학자 누계 500만명, 11월 일본고고학협회 총회에서 「국영 요시노가리역사공원 실현에 대하여」결의.□ 1992년 : 5월 天皇皇后兩陛下 시찰, 6월 견학자 누계 600만명, 10월 「국영 요시노가리역사공원 실현에 대하여」설치가 각료회의에서 결정, 역사공원의 규모는 國營公園 54ha(特別史蹟 22ha+縣史蹟 28ha+入口部分 4ha)와 縣營公園 63ha를 합친 117ha.□ 1993년 : 3월 「국영 요시노가리역사공원 기본계획」책정, 4월 견학자 누계 700만명.□ 1994년 : 2월 「국영 요시노가리역사공원 기본계획」책정, 6월 견학자 누계 800만명.□ 1995년 : 9월 견학자 누계 900만명, 11월 국영 요시노가리역사공원 기공식□ 1996년 : 3월 「국영 요시노가리역사공원 건물 등 복원 검토 조사 보고서」마무리, 7월 皇太子夫妻 시찰, 秋篠宮夫妻 시찰, 10월 견학자 누계 1,000만명.□ 1997년 : 「국영 요시노가리역사공원 건물 등 복원기본 설계」책정, 4월 견학자 누계 1,100만명□ 1998년 : 3월 견학자 누계 1,200만명, 10월 요시노가리유적 북내곽 정비 착수 기념식(기둥세우기, 야요이 체험 등 이벤트 실시) 개최.□ 2001년 : 봄 제1기 개원Ⅱ. 야요이시대와 야마타이코꾸시대의 요시노가리吉野ケ里 聚落은 繩文時代 晩期後半(BC 4)부터 彌生時代終末期(A.
新石器時代 土器의 時?空間的 位置- 韓半島 中西部地域과 中東部地域을 中心으로 -【목 차】Ⅰ. 머리말Ⅱ. 新石器時代 土器의 發生Ⅲ. 中西部地域 土器Ⅳ. 中東部地域 土器Ⅴ. 맺음말Ⅰ. 머리말토기는 변형이 자유로운 점토를 재료로 하는 점에서 제작자가 의도한 대로 형태나 문양의 표현이 가능하다. 유연하고 점차로 양을 더하면서 원하는 형태를 만들어낸다는 점은 다른 재료(석기, 뼈, 뿔, 나무 등)들과는 차별화되는 점토의 고유한 특징이기도 하다. 토기의 이러한 특징 때문에 토기에는 제작 당시 해당 집단의 기호나 유행이 토기의 기형과 문양 등에 민감하게 반영된다. 그리고 토기는 쉽게 깨어지므로 짧은 기간내에 대량으로 제작되고 소비된다. 따라서 시간의 추이에 따른 형태 변화과정이 석기 등 다른 유물에 비해 보다 자세히 나타난다. 따라서 토기의 변화를 통해 문화의 흐름을 읽을 수 있고, 지역마다 존재하는 집단의 차이를 추구할 수 있는 것이다.따라서 신석기문화의 내용을 자세히 알기 위해서는 우선 토기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며, 그것을 위해서는 토기형식을 최대한 세분해서 순서를 정해 배열해야 한다. 이 배열은 신석기시대의 문물, 사회적 ? 문화적 사건에 보다 정확한 시간적 위치를 부여하기 위한 것이다. 즉, 토기는 신석기시대의 문화 ? 사회의 동태로부터 나아가서는 신석기시대인의 세계관으로 접근할 수 있는 발판이 된다.토기연구는 속성에 대한 세밀한 분석과 형식분류, 공반관계 검토, 층위에 의한 검증, 문양분석, 수량적 비교를 통한 Seriation, 교차편년 등의 연구방법 중에서 한 가지 또는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해 결혼에 이르게 된다.그림 . 신석기시대 영역구분 및 토기분포도한반도 신석기시대 유적의 조사는 한강 ? 대동강을 중심으로 한 지역과 남해안지역, 그리고 두만강 하구지역을 중심으로 먼저 시작되었다. 그런데 각 지역에서는 형태와 문양이 전혀 다른 토기들이 출토되어 그 지역차에 대한 인지가 토기연구의 기저에 자리잡게 되었다.자료가 증가하면서 1980년대에는 토기를 기준으로 중서구상의 어느 한 곳에서 우연한 행운에 힘입어 이루어진 후 세계 각지로 퍼져나간 것이라기 보다, 환경조건이 다른 몇 개 지역에서 각각 독립적으로 종래의 기술요소(용기기념, 점토의 화학적 변화)를 조합하여 토기 만들기를 성공시켰다고 가설을 세울 수 있다.서아시아지역에서의 토기탄생의 필요성은 식료와 종자의 보존에 있었다. 토기 탄생 이전에는 굽지 않은 저장용 대형용기나, 건물 마루에 저장구멍을 파고 안쪽에 점토를 바른 시설에 식료 등을 저장해 왔는데, 이것이 나중에 토기탄생의 발단이 되었다.아무튼 토기는 긴 빙하기가 끝나고 기후가 온난화해지면서, 주변에 있는 식물 ? 동물도 변화해가는 상황하에서 인간이 환경에 적응해가기 위해 발명한 도구의 하나이며, 구석기적 생활양식에서 신석기적 생활양식으로의 변화를 이끈 큰 힘이 되었다.토기가 가져다준 가장 큰 이점은 자비요리의 보급에 의해 식료로서 이용할 수 있는 종류가 증가하고, 그 중에서도 특히 植物質 식료자원의 개발이 진전된 것이다. 그 가장 좋은 예가 도토리로, 그대로는 떫어서 먹을 수 없지만, 가루를 내서 물에 개어 가열해 떫은 맛을 우려내면 귀중한 식료가 된다. 우리나라에서도 서울 암사동, 창녕 비봉리, 울산 세죽유적 등에서 도토리가 출토되었는데, 이러한 사실은 도토리가 신석기시대의 주요한 식량이었음을 증명해주는 자료이다. 이러한 식물질 식료의 증가에 따라 육상동물에 의존하고 있었던 칼로리원이, 보다 용이하고 안전하게 획득할 수 있는 식물질 식료로 대체됨으로써 식생활을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토기사용과 정착생활은 어느 것이 먼저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유기적인 관련을 맺으면서 발생했지만, 토기의 사용이 정착생활을 보다 안정적으로 지지해주는 도구였다는 점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정착생활은 나아가 식량생산과 가축사육도 촉진시켰다. 이렇듯 토기의 발명은 주방혁명에서 비롯하여 그 연장선상에서 생활양식의 변화를 가져온 인류역사상에 있어 획기적인 일이었다. 이러한 점에서 토기출현을 학문상의 시대구분의 한 지표로 삼기도 전제하에 구분문계에서 동일문계로, 전면시문에서 시문범위 축소로, 단치시문에서 다치시문으로, 정연한 시문에서 조잡 ? 퇴화한 문양으로 변천한다는 논리가 중서부지역 토기편년의 기본구조가 되었던 것이다.이후 몇몇 연구자들에 위해 중서부지역에 대한 토기편년이 이루어졌지만 위 두 연구자 편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범위여서 그 영향이 얼마나 지대한 것이었는지 알 수 있다.그러나 1980년대 말부터 점증한 서해안지역 패총발굴의 성과를 바탕으로 1990년대 말 이후 중서부지역 신석기시대 편년에 대한 재검토가 이루어지고, 방사성탄소연대에 의한 새로운 자료들이 누적되면서 중서부지역 토기연구는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게 된다. 구체적으로 문제가 된 점은 서해안 각종 패총의 방사성탄소연대결과가 기원전 3,000년보다 이르게 상향조정됨으로써 후기로 대표한다고 여겨지던 서해안식토기가 중기단계까지 소급되기 시작하고, 암사동식 구분계문양이 서해안식 전면횡주어골문과 공반하는 사례가 증가한 점에 대해 기존 편년은 논리적으로 설명하지 못하는 한계를 드러내기 시작하게 되었다.그 한계를 극복하려는 노력은 기존의 연구성과에 새로운 자료를 추가하여 토기편년을 보다 세분화하려는 경향과 각기 다른 형식을 시기차가 아닌 지역차로 보고 세분된 편년을 다시 통합하려는 경향으로 크게 나뉘어 있다.한영희는 이후 다시 구연부, 동체부, 저부에 서로 다른 문양이 시문된 전형적인 3부위구분계토기를 암사동Ⅰ식, 단사선문계의 구연부문양 밑에 波狀點列文 ? 重弧文 ? 格子文 ? 鋸齒文 ? 三角文 등 종속문이 추가되고 동부에 점열타래문이 시문되는 등 문양이 복잡해지는 토기를 암사동Ⅱ식이라고 하고 Ⅰ식과 Ⅱ식을 전기전반과 전기후반에 위치지웠다. 중기에는 암사동Ⅱ식이 계속되면서 후반기에 금탄리Ⅰ식, 저부를 제외한 전면에 어골문이 거칠게 시문된 시도식 등 지역마다 새로운 양식의 토기가 성립된다고 보았다. 후기는 전면횡주어골문토기인 금탄리Ⅱ식, 시도식, 구연부 문양만 남은 암사동Ⅲ식으로 대표된다. 한편 암사동Ⅰ식 토기가 완성되기 있는 구연한정단사선문, 대상단사선문, 구획반복문, 전면횡주어골문 중 일부가 포함된다. 이 중에서 중심을 이루는 것은 다치횡주어골문과 구연한정단사선문이며, 연대는 기원전 4,000~3,000년으로 암사동, 미사리, 시도Ⅱ지구, 가도, 노래섬, 는들유적 등이 중기에 해당된다.후기가 되면 금탄리Ⅱ식토기와 서해안식 횡주어골문토기가 중심이 되며, 연대는 기원전 3,000~1,300년까지로 서해안의 패총들과 관창리유적등이 해당된다.그런데 토기문양이 시간차를 반영한다는 전제하에 이루어진 기존 편년안에 대하여 전면적으로 비판하면서 중서부지역의 편년을 크게 1기와 2기로 설정한 주장도 제기되었다. 이 연구에 의하면, 기존 연구가 토기문양의 지역성을 고려하지 않고 문양구분의 파괴, 단치에서 다치로의 변화를 중서부의 전지역에 모두 적용하였다는 점과 북한 고고학의 연구성과를 무비판적으로 답습하고 있다는 점을 비판하였다. 그리고는 서해안의 패총들은 한정행위장소로서 동시기에 여러 집단에 의해 점유되었다는 점을 검증한 후, 방사성탄소연대를 적극적으로 이용하여 패총출토 토기군의 구성이 시간성보다는 지역성을 반영한다는 점을 주장하였다. 구체적으로 서해안지역 패총유적은 덕적군도를 중심으로 이북은 단치시문의 비율이 높고 이남은 다치구에 의한 시문이 상대적으로 높은 비율을 차지하는데, 이는 패총유적을 이용한 집단과의 지리적 위치와 관계가 있다는 것이다.따라서 단순히 문양의 가설적 시간 배열에 의거하여 중서부 신석기시대를 전기 ? 중기 ? 후기로 삼분하는 것에 반대하면서, 기원전 3,500~3,000년을 기점으로 그 이전은 암사동에서 지탑리와 유사한 문양이 존재했던 시기인 중서부 1기로, 암사동에서의 구분계 다치횡주어골문의 등장, 패총의 점유시작 및 동일계 단/다치어골문의 시작 및 공존을 중서부 2기로 설정하였다(김장석 2003).이처럼 중서부지역의 토기편년과 관련해서는 구분계토기의 상한과 하한을 둘러싼 암사동유적의 지속기간, 한강유역 후기신석기시대의 실재여부, 구분계의 종주어골문, 단치횡주어골문막 부식토층, 4. 안면도 고남리 패총, 5. 청원 쌍청리 주거지, 6. 대전 둔산 수혈, 7. 대전 송촌동 ?, 8. 옥천 대천리 주거지, 9. 서산 대죽리 황갈색사질층, 10. 군산 내흥동 수혈, 11. 군산 노래섬 패총, 12. 진안 갈머리 주거지, 13. 진안 용평리 운암 ?, 14. 진안 안좌동 ?, 15. 영동 금정리 지표, 16. 김천 송죽리 주거지, 17. 임실 운정리 지표, 18. 강릉 초당동 주거지/노지, 19. 양양 지경리 주거지금강식토기의 기원 또는 계보에 대해서는 이미 중부지방발생설, 아무르편목문 관련설, 극동평저토기문화와 관련 하에 동해안 능형문계토기 관련설, 중서부지방에서 남부지역으로 내려간 문화가 남부지역화하여 이러한 남부지역토기의 북진현상으로 금강식토기라는 한 지역양식이 성립되었다는 설, 압인문계의 조우문이 변형된 것이라는 설, 봉계리식토기가 금강수계로 가면서 금강식토기로 변화한 것으로 보는 설 등 다양하게 의견이 개진되고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연구자들이 금강식토기 또는 능격문토기가 기본적으로 남부지역의 지역적 전통 속에서 발생한 것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공감하고 있다.능격문토기는 중남부 내륙을 중심으로 중부지역 서해안과 동해안 등 주로 중부지역에 분포하고 있으며, 존속연대는 4,500~3,900B.P.이고 보정연대를 감안하면 기원전 4,000년기 후엽부터 3,000년기 중엽까지로 볼 수 있다. 이 중에서 단사선식과 다단식 능격문은 조우문과 더불어 남부지역 중기 후반부터 사용되기 시작한 문양이고, 광폭압인식과 방점식 능격문은 남부지역 후기의 봉계리식 단계에 해당하는 문양으로 보인다.그림 . 금강식(능격문)토기, 진안 갈머리그림 . 금강식(능격문)토기, 양양 지경리그림 . 금강식(능격문)토기, 청원 쌍청리그림 . 금강식(능격문)토기, 소연평도Ⅳ. 中東部地域 土器1. 硏究史 및 編年案중동부지역의 신석기시대 편년은 1981년 양양 오산리유적이 발굴조사 된 이후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오산리유적에서는 신석기시대 조기부터 후기에 이르는 문다.
半月形石刀의 始原과 使用分布차 례Ⅰ. 반월형석도의 개념Ⅱ. 선행연구사 및 기원Ⅲ. 제형식Ⅳ. 지역별 출토양상Ⅴ. 단계별 변화양상Ⅵ. 재질선별과 제작방법Ⅶ. 사용방법Ⅷ. 반월형석도를 통해 본 청동기시대의 농경Ⅰ. 반월형석도의 개념1. 반월형석도의 개념 : 半月形石刀는 狹義의 槪念으로는 등이나 날이 굽은 형태의 石刀를 의미하며 廣義의 槪念으로는 모든 摘穗用石刀를 포함. 광의의 개념 사용.2. 반월형석도의 용도 : 摘穗具 이외의 다른용도로 사용되었을 가능성?1) 수확철 이외에는 刀의 용도로 사용(安承模, 1985, 『韓國半月形石刀의 硏究』, 서울大學校大學院 碩士學位論文.2) 삼의 껍질을 베는 삼칼로서의 이용(박호석?안승모, 2001, 『한국의 농기구』, (株)語文閣3) 장방형과 즐형석도는 지역에 따라 토기의 제작에 이용(崔楨苾, 2000, 「農耕道具를 통해 본 韓國 先史農耕의 起源」『김포반도 고대 쌀문화의 위치』, 김포문화원?한국선사고고학회)安志敏崔淑卿石毛直道金元龍安承模崔仁善金相冕西谷正橫山成己兩側缺口形兩側打製缺口部形長方形直刃直背長方形長方形長方形直刃類半月形外彎刃凸形紡錘形魚形魚形杏仁形曲刃Ⅱb外彎刃直背半月形外彎刃長舟形長舟形外彎刃半月形曲刃Ⅰ短舟形短舟形曲刃Ⅱa直刃凸背半月形直線刃櫛形櫛形直線刃半月形直刃類二斜邊刃直背三角形三角形半月形三角形交刃Ⅰ交刃Ⅱ交刃Ⅲ半圓形Ⅳ式直弧形Ⅲ式三角形Ⅰ?Ⅱ式Ⅴ式變異形其他不定形多邊刃類도면 1. 반월형석도 형식분류 비교표Ⅱ. 선행연구사 및 기원1. 先行硏究史 : 반월형석도에 대한 연구 가운데 가장 활발하게 전개된 분야는 변천과 지역상에 관한 연구이다. 이 연구를 토대로 석도의 발생과 전개, 나아가 농경의 기원과 전파문제 등의 해결을 시도하고 있다.1) 중국학자○ 安志敏 : 한반도 반월형석도의 기원으로 생각되는 중국 동북지방 출토 석도 연구. 중국에서 출토된 석도의 변천은 兩側帶缺口石刀→長方形石刀→半月形石刀의 순으로 파악. 시기적으로는 장방형은 仰韶文化段階, 반월형은 龍山文化段階로 설정. 지역적인 분포양상은 양측대결구석도와 장방형석도는 黃河 중?상류, 江南지역한반도→일본으로의 계보관계를 증명.○ 寺澤薰 : 下條信行과 동일한 견해. 또한 二元的 농경전파루트를 제시. 즉, 稻作栽培는 한반도 남부지역을 통하여 九州지역으로 전래되었으며, 雜穀栽培는 보다 이른 시기에 중국의 동북지방을 통하여 일본 동북지역으로 파급되었다고 파악.3) 한국학자○ 崔淑卿 : 한반도 출토 반월형석도를 單刃類와 兩刃類로 구분하고 단인류가 南滿洲 석도의 영향을 받아 함북 이외의 한반도 전역에 분포하는 반해, 양인류는 중국 북부지역 석도의 특징을 가지며 두만강유역에서만 확인되는 것으로 파악.○ 金元龍 : 반월형석도 각 형식간의 발전관계를 설정하고 구체적인 실연대 제시. 시기적 변천에 따라 櫛形→魚形→短舟形→長舟形 ? 三角形의 순으로 변화 ? 발전하고, 장방형석도의 경우는 큰 형태 변화없이 지속적으로 사용되었다고 봄. 석도의 존속시기는 B.C.1,000년 전후에 나타나기 시작하여 기원 초기까지 사용된 것으로 파악. 그리고 B.C.300년을 전후하여 반월형석도가 稻作栽培와 본격적으로 관련되었을 가능성을 제시.○ 安承模 : 한반도에서 출토된 반월형석도의 가장 종합적인 연구. 그의 연구에 의하면 한반도 반월형석도의 전파과정은 遼東半島를 통하여 한반도 서북지방으로 들어온 것과 滿洲地方을 가로질러 한반도 동북지방으로 전래된 2가지 루트를 상정. 형식별 변천은 長方形→短舟形으로의 변화와 魚形→櫛形 ? 長舟形→短舟形→三角形으로의 2가지 흐름을 지적하면서 각 형식은 시기적 차이도 있으나 지역적 차이가 더 큼을 언급함.2. 삼각형석도의 발생견해○ 崔淑卿 : 表裏面을 모두 사용하기 위한 改良의 과정에서 直線刃이 발생○ 金元龍 : 제작상의 간략화○ 安承模 : 날의 사용면적을 최대한 넓히기 위한 시도○ 全榮來 : 작업대상물의 차이에 의한 석도 사용방법의 변화○ 金相冕 ? 崔仁善 : 기능적인 효율성을 바탕으로 삼각형석도가 발생하였다는 선학들의 연구를 수용하면서 그 배경에 稻作農耕의 成熟이 있었음을 지적.등 주로 기능적인 측면에서 삼각형석도의 발생을 설명하고 있음.그러나 崔夢龍가 주류를 이룬다.2. 압록강유역 : 형태상 梯形이 주류를 이루며, 單刃의 直刃類와 1孔의 반월형석도가 주류를 이룬다.이러한 형태상의 차이는 한반도 북단에 위치한 두 지역의 농경방식이 다른 지역과 차이가 있었을 가능성이 제기.3. 청천?대동강유역 : 팽이형토기문화의 중심지로 반월형석도의 출토량이 비약적으로 증가한다. 형태상 舟形과 魚形이 대다수를 차지하며, 刃部의 형태는 單刃, 2孔으로 고정화되는 경향이 확인된다.4. 동한만일대 : 형태상 舟形, 刃部의 형태는 單刃, 1孔이 주류를 이룬다. 이는 청천?대동강유역과 두만강유역의 영향으로 판단된다.5. 한강유역 : 형태상 舟形과 魚形이 대다수를 차지하며, 刃部의 형태가 單刃, 2孔으로 통일성을 보이는 양상은 청천?대동강유역의 영향으로 판단된다.6. 영동지역 : 형태상 舟形과 魚形으로 한정되며, 刃部의 형태가 單刃, 2孔으로 청천?대동강유역에서 확립된 양상이 동한만일대, 한강유역, 영동지방에까지 영향을 미친 것으로 판단된다.7. 금강유역 : 형태상 三角形, 舟形, 偏舟形이 주류를 이루며, 刃部는 單刃, 구멍의 수는 2孔이다. 단계별로는 Ⅰ단계에는 魚形과 舟形이 주로 사용되며, Ⅱ단계유적에서는 偏舟形과 三角形으로 대체된다. 특히 舟形石刀의 길이가 짧아지는 경향을 보이며, 偏舟形은 모두 Ⅱ단계유적에서 출토된다.8. 영산?섬진강유역 : 형태상 三角形과 舟形이 주류를 이루며, 刃部는 單刃, 구멍의 수는 2孔이다. Ⅰ?Ⅱ단계유적에서 모두 舟形의 석도가 출토되는데, 금강유역에서 보이는 것과 같이 舟形石刀의 길이가 더 짧아지는 경향이 있다.9. 낙동강유역 : 형태상 三角形과 舟形이 주류를 이루며, 모두 單刃이다. 남한의 다른 지역에 비하여 1孔이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는 지역적 특색을 가지고 있다.地域形式別 出土樣相刃部形態孔의 數長方形櫛形梯形逆梯形偏舟形三角形魚形舟形再加工品單刃兩刃1孔2孔3孔4孔두만강유역41115252압록강유역13631187771창찬?대동강유역1*************1동한만일대124752한강유역1328131282 해당하는 유적이 거의 조사되지 않은 반면, 낙동강유역에서는 Ⅰ단계와 Ⅱ단계에 해당하는 유적이 다수 조사되고 있어 지역간의 차이를 보인다.Ⅴ. 段階別 變化樣相形式段階長方形櫛形魚形梯形舟形逆梯形偏舟形三角形合計Ⅰ段階(非松菊里型文化)654298434153Ⅱ段階(松菊里型文化)15174256도면 6. 반월형석도 각 형식의 단계별 개체수1. 段階別 變化樣相Ⅰ단계 : 長方形, 櫛形, 魚形石刀 출토Ⅱ단계 : 三角形石刀 출토Ⅰ?Ⅱ단계 : 梯形, 逆梯形, 偏舟形, 舟形石刀 출토Ⅱ단계에 해당하는 유적인 휴암리, 송국리, 대곡리 유적에서 舟形石刀와 三角形石刀가 공반출토(따라서 형식간의 변화과정을 상정할 수 있음)도면 7. 반월형석도 단계별 변천 모식도非松菊里型文化段階인 Ⅰ段階에서는 長方形, 櫛形, 魚形, 梯形, 舟形의 석도가 사용되었으며, 魚形과 舟形이 수확구로서 가장 많이 이용되었다. 이 가운데 舟形은 刃部가 직선화되면서 逆梯形과 偏舟形으로 변화?발전하였으며, 逆梯形이 비교적 오랜 기간 지속된 데 반하여, 偏舟形은 Ⅱ단계의 비교적 이른 시기까지만 이용되고 소멸된다.松菊里型文化段階인 Ⅱ段階에 이르면 長方形, 櫛型, 魚形은 모두 사용되지 않게 되며, 舟形이 소형화되면서 동시에 刃部가 직선화된 三角形石刀가 발생하여 이용된다.Ⅵ. 材質選別과 製作過程1. 반월형석도의 재질 : 片巖, 粘板巖, 砂巖, 頁巖, 泥巖, 巖脈, 片麻巖, 凝灰巖, 流紋巖, 硅巖, 실트스톤, 혼펠스, 쳐트 등이 있다. 이 중 片巖, 粘板巖, 砂巖, 頁巖이 대부분을 차지한다.따라서 한반도 출토 반월형석도는 크게 두 가지의 다른 목적에 의해 석재의 선택이 이루어졌다. 층리상으로 쪼개지는 성질이 강한 片巖, 粘板巖, 頁巖은 석도의 제작과 재가공의 편리함을 위하여 석재로서 이용되었으며, 경도가 강한 砂巖은 석도의 耐久性을 위하여 선택된 석재이다. 두 번째는 취득의 용이성에 위한 석재의 선택이다. 이는 현재 시작단계이며, 地球考古學(Geoarchaeology) 분야의 산지추정분석에 대한 연구가 지속적으로 축적되어야 해결될 수 광택면이 확인되고 있어 B면이 위쪽으로 향한 상태로 이삭을 따는 작업이 이루어진 것으로 판단, 또한 B면의 인부쪽에서 왼편으로 약간 치우쳐 强의 광택면이 확인되고 있어 오른손을 주로 사용하는 사람이 의하여 이용된 것으로 보여진다. 한편, 구멍의 윗부분에 弱의 광택면이 관찰되는데, 이는 구멍에 연결한 끈이 사용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2번유물(하남 미사리 출토품) : 魚形石刀 1번유물과 동일한 방법으로 이용되었으며, 주목되는 점은 A면의 양쪽 구멍 사이에서 확인된 弱의 광택면이다.도면 9. 반월형석도의 사용흔 분석도면 10. 반월형석도의 사용방법 상정따라서 두 유적에서 출토된 유물의 사용흔 분석을 통하여 볼 때 A면에서 양쪽의 구멍을 가로질러 통과한 끈이 B면으로 이어져 背部 방향으로 올려져 작업자의 오른손 中指에 연결되는 형태임을 상정할 수 있다.Ⅷ. 半月形石刀를 通해 본 靑銅器時代의 農耕1. Ⅰ단계유적두만강유역과 압록강유역의 반월형석도는 直刃類에 속하는 長方形, 櫛形, 梯形의 석도가 주류를 이룸. 농경에 불리한 자연지리적 조건을 가짐. 초보적 농경방식인 화전농사가 행하여졌을 가능성 높음. 直刃이 曲刃보다 쉽게 만들 수 있음. 한반도 북단지역에서는 제작상의 효율성을 고려하여 直刃類가 주로 사용되었으며, 이와 같은 반월형석도의 이용에는 빈번하게 사용하지 않는 도구에 대해서 기능적인 장점을 채택하기보다는 제작상 편리함을 선택한 당시인의 효율적인 사고방식이 작용.상기지역을 제외한 한반도 전역에는 曲刃類인 舟形과 魚形의 사용이 비약적으로 증가. 농경에 유리한 조건을 가지며, 밭농사와 논농사가 모두 가능. 刃部의 형태가 曲刃이 선택되었음. 제작상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曲刃이 만들어진 것은 刃部의 사용면적을 極大化시켜 빈번한 사용에 이용함. 북단지역과는 달리 상대적으로 기능적인 장점을 먼저 고려해야만 하는 당시의 필요성이 반영됨.밭농사와 관련된 대표적인 유적 : 진주 대평리, 울산 옥현유적 등비송국리형단계의 논농사는 완벽한 수리시설을 갖춘 형태가 아닌 것으로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