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주의자 王莽은 왜 실패했을까?目 次Ⅰ. 들어가며 - 왜 왕망의 신왕조일까?Ⅱ. 왕망 정권의 출현배경1. 전한 말의 사회위기2. 왕망 집단의 형성Ⅲ. 왕망의 개혁과 문제점1. 대내정책(1) 관제와 지명의 변경(2) 화폐제도의 개혁(3) 토지 ? 노비제도의 개혁(4) 五均과 六管 制度2. 대외정책Ⅳ. 왕망의 개혁평가Ⅴ. 나오며Ⅰ. 들어가며 - 왜 왕망의 신왕조일까?이 글은 불과 15년 동안 존속한 단명 왕조임에도 불구하고 중국 역사상 최초로 禪讓에 의한 ‘왕조찬탈’과 復古정치를 표방하여 관제와 지명의 변경, 화폐제도, 토지와 노비제도 등 다방면에 걸친 무수히 많은 개혁을 단행함으로써 중국 역사에서 오래도록 그 이름이 기억되고 있는 王莽의 新왕조에 관한 내용이다.그 중에서도 왕망의 개혁에 관한 것으로 기존에는 개혁의 목적이 전한의 사회경제의 문제점을 해결하는데 있었던 것이 아니라 왕망 개인의 정치야욕 ? 이익을 달성하는데 있었고, 지나치게 개혁의 특수성을 강조한 나머지 시대를 초월하는 복고적, 이상주의적 시대였다는 부정적인 평가들이 있었지만 본고에서는 위와 같은 기존의 평가들과는 달리 왕망의 개혁이 전한사회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시도였다는 점에 관심을 두어 첫째, 왕망의 개혁이 당시 사회에 반드시 필요했을 정도로 사회모순이 심각했는가 하는 측면에서 왕망 개혁의 시의성을 규명하고자 한다. 개혁이 시행되었을 때는 반드시 그 대상이 존재했기 때문에 그러한 관점에서 왕망이 개혁대상으로 삼은 전한말의 여러 가지 난제들이 과연 심각했었는지 또한 그 개혁이 시의성을 가지고 있었는데도 실패했다면 그 이유는 어디에 있었는가를 규명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둘째, 周公으로 자임한 왕망이 추진한 정책은 이상적 사회였다는 주대로의 회귀를 꾀했다는 평가를 많이 들어왔는데 과연 그 같은 평가가 적당한 것인지 하는 점들을 주요 고찰대상으로 삼고자 한다.Ⅱ. 왕망정권의 출현 배경1. 전한말의 사회위기전한 말기는 멀게는 무제의 대원정, 가깝게는 황실의 사치, 대토지 소유와 가혹한 국가부담 등에王氏)의 사치는 극도에 달했는데, 왕봉(王鳳)의 아우로서 봉후된 오후(五侯)의 경쟁적인 사치는 황제에 견줄 만 했다고 한다. 이 같은 성제 및 외척의 무절제 이외에도, 농민의 몰락을 가속화시키는 가혹한 조세, 관리의 가렴주구가 가중되었다. 특히 삼보(三輔)지역의 부렴은 정도를 지나쳤고 혹리(酷吏)는 간행(奸行)을 일삼고 있었다. 이로 인해 농민들은 노비가 되어 호족 대지주에 예속하든가, 타향으로 도망하든가 하는 방법으로 조세의 부담에서 도피할 수 없었다. 한편 원제(元帝) 이후부터 유학을 배워 관료계로 진출한 관료들의 대토지 소유도 이어졌다. 원제로부터 애제(哀帝)시기까지 40여 년 간에 귀족과 관료, 부상(富商)들의 토지겸병은 심각해져 호족의 광폭함은 멸망한 진대(秦代)보다도 가혹했다고 한다.이 같은 대토지 소유는 사회문제로 대두되어 애제 때 대사마 사단이 토지소유 제한의 한전법을 주장한 것도 이와 같은 분위기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하지만 이 한전법은 제후왕과 열후 및 관리의 반대로 실패하였고 사회적 불안은 더욱 고조 되었다.사회경제적 위기와 아울러 정치적 측면으로는 황실 관료 계통이 국정을 장악하여 내조가 외조의 권력을 뛰어넘음으로써 궁정 내의 정무 혼란과 국정 혼란, 제실재정과 국가재정의 혼동이 일어났다. 사상의 측면에서 동중서(董仲舒)이래로 한제국의 통치를 위협하는 재이설(災異說)과 선양사상(禪讓思想)이 대두하였다. 전한후기에는 만세일계(萬世一系)를 부정하는 선양사상이 크게 유행하여 왕망의 찬탈을 가능하게 할 수 있는 사회적ㆍ학문적 분위기가 이미 형성되어 있었다. 원제(元帝)의 천자칠묘제(天子七廟制)의 도입과 성제(成帝)의 교제(郊祭) 도입을 계기로 정치현실과 경학(經學)의 이념이 통하게 되었다. 이건은 외면적으로 경학이 현실정치에 승리를 거두고, 정치를 자신의 색으로 도색 한 것이지만, 경학은 이후 활력을 잃고 현실에 대한 비판력을 상실했다. 그리고 애제(哀帝)시기부터 참위사상(讖緯思想)이 나타나기 시작했을 때 경학은 그것을 규제할 수가 없었다. 한으로 활용되었다. 곽광은 장군의 칭호와 지위를 부여받음으로써, 병력장악과 막부(幕府) 개설이라는 장군 본래의 기능과 특권을 보정의 유지와 발전을 위해 이용할 수 있었으며 곽씨에 이은 왕씨 외척정권도 마찬가지였다. 곽광과 왕봉(王鳳)은 보정이 필요했던 시대 적 이유로 인해 그에 주어진 보정대신(輔政大臣)으로서의 권한이 막중했을 것이다. 그들 은 그 권한을 충분히 이용하여 전례 없는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고 왕망의 경우 찬위(簒 位)까지 할 수 있었다.(2) 왕망집단의 형성왕망이 정치가로서 부상했던 시대는 왕씨의 외척정치가 성했던 성제(成帝)기이다. 왕씨정권 내에서 초기 왕망의 정치적 위치는 주목받지 못했지만 왕망은 탁월한 정치적 수완 으로 유력한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왕근(王根)의 뒤를 이어 보정직에 올랐다. 이때부터 시작된 왕망의 집권은 단순히 왕씨외척정권의 계승이라는 차원을 벗어나 새로운 왕조의 개창이라고 하는 격변의 시대를 예고하는 것이었다. "왕망의 정치적 성장은 그의 개인적 성향이나 역량에 기인한 것이지만, 그 과정에는 그를 지지하고 정치적 행동을 같이 했던 이른바 왕망의 ‘정치집단’이 있었다." 이들은 왕망의 집권과정을 통하여 꾸준히 결집 되었 으며, 왕망은 이들을 적절히 이용하여 찬위에 성공할 수 있었다. 왕망은 풍(諷)이라는 정 치적 술수를 사용하여 자신을 표면에 드러내지 않고 자신의 의사를 심복들로 하여금 이 루 도록 하였는데, 왕망의 심복들은 개개인이 상당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고 위 관료 직에 위치한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왕망의 사상이 실현될 수 있도록 태황태후를 설득하거나 위협했고, 때로는 반(反) 왕망파 관료들을 들추어내어 파면하는 일도 있었다. 이들은 왕망의 찬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왕망의 집권기간 동안 이루어졌던 정치적 개혁에도 일익을 담당하는 등 혁명적 세력으로서의 성격을 보인다. 이러한 왕망집단의 형성은 바로 정치적 조직력을 소유할 수 있었던 왕망 자신의 정치적 성장에 의한 것이었고, 그 계기는 왕망의 보정 직 계승에. “즉 건국된 지 얼마 안 되어 정권의 기초가 불안정한 상태에서 일방적으로 앞서 언급한 정책들을 추진 한데다가 또다시 많은 관직을 설치하거나 구 지명을 새로운 지명으로 교체하는 것은 많은 문제점이 있었다.”둘째, 화폐제도의 개혁이다. 왕망의 개혁 가운데 가장 일찍 착수했고 또한 가장 실패했다는 평가를 듣는 것이 화폐개혁이다. 그는 아직 정식의 황제로 즉위하기 이전에 제 1차 화폐개혁에 착수한 뒤로 5차례에 걸쳐 대대적인 화폐개혁을 단행했다. 왕망의 화폐개혁은 매회 약간씩 목적은 다르지만 일관된 경향이 있는데, 그것은 고액의 명목화폐 발행에 의한 화폐 팽창책을 통해 재정확보를 시도한 것이다. 1차 개혁은 왕망의 주제(周制) 구현의지와 함께 전한말의 재정악화와 오수전(五銖錢)의 도주(盜鑄)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다. 2차 개혁은 왕망이 찬위한 원년에 단행되었는데, 오수전 등을 폐지하고 별도로 소전(小錢)을 주조해 이전의 대전(大錢)과 함께 통용시켰다. 이것은 화폐개혁을 통해 신(新)왕조의 성립을 천하에 알리고 화폐에서 유한왕조(劉漢王朝)의 흔적을 없애려는 의례적 조치에 불과한 것으로, 민중의 오수전 선호, 잦은 화폐개혁에 대한 불신 등으로 실패했다. 3차 개혁은 흉노(匈奴)와의 전쟁에 필요한 막대한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단행된 것으로 발행한 화폐의 종류가 많고, 화폐의 교환비율이 복잡하여 화폐유통에서 혼란을 초래했다. 4ㆍ5차 개혁은 과거의 화폐개혁이 잘못되었다는 것과 오수전의 위력을 인식했기 때문에 형태상으로 과거의 오수전으로 회귀한 것에 불과한 것이다.왕망의 화폐 정책이 실패한 원인은 첫째, 고액화폐를 발행함으로써 화폐 유통질서를 악화시키고 인플레와 화폐신용절하를 조장했고, 둘째, 화폐개혁은 중농억상 정책의 명목 하에 진행된 것으로, 상인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침해받았기 때문에 이에 저항했고 그들은 화폐개혁으로 받은 피해를 보상받기 위해서라도 도주(盜鑄)를 감행했다. 셋째는 빈번한 화폐개혁과 신구화폐의 교체 시 구폐를 폐기하여 사용하지 않음으로써 구화폐의 매매를 불허했다. 노비매매 금지의 목적은 노비로 전락하는 상당수가 가난한 농민이었기 때문에 현재의 노비를 대상으로 한다기보다는 장차 노비로 전락할 가능성이 있는 빈농(貧農)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 노비의 매매가 계속된다면, 왕전을 지급받은 농민들이 파산해 재차 노비로 전락하고 대토지소유가 번질 가능성이 있으므로 왕전제와 사속제는 밀접한 관련을 갖는 것이다. 그러나 사속제에는 노비의 자손에 대한 신분규정이 없기 때문에 그들이 해방될 수 없었고, 사실상 노비제의 합법성을 인정한 것이다. 노비제가 불법이 아닌 상황 하에서, 파산농민이 노비로 전락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으므로 노비정책은 시행 3년 만에 폐지되었다.넷째 오균(五均)과 육관(六管)제도이다. 오균 제도는 중요도시에 오균사시사(五均司市師)라는 기구를 설치한 다음, 상공업을 국가기관이 철저히 관리하는 제도로, 대상인과 중소상인ㆍ농민들에게 고리로 자금을 빌려주고 착취하는 고리 대업자를 억압하여 농민 및 중소상공업자를 보호하고자 한 것이다. 이 제도는 무제(武帝)가 실시한 평준법(平準法)을 발전시킨 것이다. 육관제도는 정부가 소금, 철, 술, 화폐 주조등을 국가가 전담함으로서 국유독점체제를 완성하는 제도를 말하는 것으로 이 조치는 왕망이 직접 창출한 제도가 아니라, 과거의 방법과 경험을 흡수하여 발전시킨 것이다. 이제도는 대상인의 폭리를 금지하고 빈약한 백성들의 파산을 막기 위한 목적을 갖고 있었으므로 소농민ㆍ소상인의 보호를 의도하고 있다는 점에서 왕전제와 동일한 지향성을 지녔다고 할 수 있다.오균과 육관제도는 왕전ㆍ사속제 보다 저항이 적었기 때문에 10여 년 동안 시행되어 부상(富商)ㆍ지주들의 농단을 막음과 동시에 물가안정ㆍ재정획득의 효과를 얻었다. 그러나 이러한 제도도 폐단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오균ㆍ육관을 감독하기 위해 낙양(洛陽)ㆍ임치(臨淄)등의 부상을 군마다 명사로 임명했는데, 이들이 오히려 폐단을 야기했다. 또 육관령 재추진시의 도적(盜賊)출현은 이 제도가 왕망정권 후기에 농민반란의 원인이었음을었다.
통일 교육론독일의 통일과 이에 대한 시사점Ⅰ. 서론Ⅱ. 독일의 분단과정과 통일과정1. 독일의 분단과정2. 독일의 통일과정Ⅲ. 독일의 통일에 대한 평가Ⅳ. 독일 통일이 주는 시사점Ⅴ. 결론Ⅰ. 서론분명 분단되었던 독일과 동 ? 서독을 둘러싼 국가들 간의 상황은 지금의 분단된 한국 및 이를 둘러싼 국가들 간의 상황과는 너무도 다르다.그러나 “한국과 독일은 2차 대전과 적대적인 양 진영의 반목의 결과 분단되고, 분단이 고착화되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는 로타 드 메지에르 전 동독총리의 말처럼 독일의 통일은 같이 동서 냉전의 결전장으로 이용되었고, 분단의 아픔을 오늘날까지 간직한 채 살아가는 대한민국의 통일을 이루기 위한 과정과 비교하여 우리가 비판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부분에 대한 통찰을 해볼 수 있다. 또한 현재 통일된 국가 안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갑작스런 통일로 인해 독일 내에서 나타나고 있는 문제점들도 살펴봄으로써 우리 통일 이후의 문제점들에 대처하는 방안도 고려해 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에 독일의 통일이 우리에게 주는 시사점은 중요할 것이다.따라서 이 글이 전 세계적으로 유일한 분단국으로 남게 된 우리가 독일의 통일작업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를 다시금 생각하는 기회가 되었으면 한다.Ⅱ. 독일의 분단과정과 통일과정1. 독일의 분단과정1945년 5월, 국가사회주의자(Nationalsozialist, 이른바 나치)들이 연합군에게 항복을 함으로써 독일은 제2차 세계대전의 패전국이 되었다. 제 2차 세계대전 중 ‘반 히틀러 연합’을 구축했던 미국, 영국, 소련은 전쟁이 끝나기 전부터 전후에 독일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에 관해 다각도로 협의하였다. 새로운 유럽의 미래를 계획해야 하는 상황에서 독일의 미래를 구상하는 문제가 전쟁의 종식만큼이나 중요한 과제였고, 이러한 논의의 주된 관심은 ‘독일문제’를 완전하게 해결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배경아래 1943년에 열린 테헤란 회담에서 3국은 독일을 분할하여 공동으로 관리하는 방안을 논의하였고, 1945년 2월 얄타년부터 1957년 기간 동안의 아데나워 정책의 중점은 서독민족의 주권을 회복하는데 주어졌다.이 시대의 동방정책은 독일이 패전국이며, 피 점령국이었기 때문에, 전승국의 대 독일정책에 의해 좌우되었다. 특히, 초대 연방수상이었던 아데나워는 독자국가 혹은 중립화 방안에서 벗어나 서구결속방안과 친 서방 결속을 통해 재 통일정책을 선택하였다. 그리하여 1954년 10월 23일 서방 9개국과 파리협정을 체결하여 주권을 회복하였고, 이어 1955년에는 유럽공동체(EC)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가입할 수 있었다.반면 동독에 대해서는 동독을 승인하는 국가(소련 제외)와는 외교관계를 수립하지 않는다는 ‘할슈타인 원칙’을 철저히 고수하였다. 즉 서독만이 국제법상 존재하는 유일한 독일 국가이며, 따라서 전 독일 민족을 대표하고 그 이름 아래 행동할 수 있는 유일한 주체라는 ‘유일권 대표주장’에 의해 동독에 대해 적대적인 입장을 유지하였다. 이는 서독과 이미 국교관계에 있는 제3국이 만약 동독과 외교관계를 수립하는 것이 바로 독일의 분단 상태 고착화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할슈타인 원칙은 1963년 에르하르트가 수상에 취임하면서 그 성격의 변모를 보이기 시작하다가 1966년 12월 기민당과 사민당의 대연정이 시작되어 쿠르트 게오르크 키징거(Kurt Georg Kiesinger) 수상과 빌리 브란트 외상의 콤비가 등장하면서 대폭 수정 ? 완화의 길을 걷게 되었다.다음은 동독의 정책이다. 1957년 ~ 1958년 발터 울브리히트 서기장은 통일 이전 단계에서 같은 수의 동 ? 서독 의원들로 구성되는 ‘전 독일의회’를 구성하자는 이른바 국가연합 통일방안을 제기했다. 이러한 제안들의 이면에는 서독과 나란히 국제적으로 인정을 받고 사회주의적 사회체제를 강화시키고 안정시키려는 동독의 저의가 깔려 있는 것으로 간주되었다.2) 1969년 ~ 1982년먼저 서독의 통일정책을 살펴보면 미국과 소련의 갈등에 의해 발발된 냉전의 국제질서와 국제정세가 1960년대 후반에 접어들며 긴장완화 거두었다.1975년에는 민간기업체가 동독 정부와 경제 ? 기술협력 사업에 관해 협의하였고, 1982년 11월에는 함부르크의 베를린 고속도로가 개통되고, 1984년 8월 8일에는 서독의회대표단이 동 베를린을 방문하여 양국 의회간의 첫 공식 접촉이 이루어졌다.동독의 정책을 보면 동독정부는 서독정부가 외교관계에 있어서 동독을 동등하게 대하고 국제관계에서 더 많은 재량을 부여하는 경우에만 동 ? 서독간의 관계를 더욱 발전시키려 하였다. 달리 표현하자면 동독정부는 서독정부가 동 ? 서독 간 국경을 인정하는 경우에만 그 국경을 제한적으로 개방하려는 의도였다. 또한 1972년 기본조약을 협상할 때 동독 측은 가능한 한 빨라 그들의 대외관계 수립의 장애를 제거하고, 유엔에 가입하여 서방 제국들과 외교관계를 수립하기를 희망했다.3) 1982년 ~ 1990년서독의 정책은 1982년 9월 사민당의 헬무트 슈미트(Helmut Schmidt) 내각에 대한 건설적 불신임투표(Konstrukrives Misstreuensvotum)는 의회에서 가결되어 중도우파 연립내각의 총리로 헬무트 콜(Helmut Kohl)이 취임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콜 수상은 취임 직후 동독과의 협력관계를 지속시킬 것을 선언하고, ‘계속 유효한 협정들에 근거하여 주민들의 편의를 위한 포괄적이고 장기적인 해결책 마련’에 관심이 있음을 표명했다. 동독정부에 대해서는 새로운 서독정부가 인계 받은 모든 의무의 이행에 노력하며 ‘이미 체결된 동 ? 서독 간 조약들을 적극적인 평화정책을 추진하는데 활용할 것’임을 천명했다.신 동방정책을 통해 전 분야로 확대된 양독 관계는 콜 정부 출범 이후 더욱 실질적인 관계로 발전했다. 콜 수상은 기본법에 의거하여 자유가 최고의 가치임을 강조했고, 동 ? 서독 간 인도적 차원의 인적 교류를 최우선시 했다. 콜 수상은 동독과의 계약을 통해 협력을 강화하고자 하였는데 1983~1984년 서독은 우호적인 양독 관계 조성을 위해 동독에 20억 마르크의 차관을 제공하였다. 1984년 동독은 차관의가리, 폴란드에 주재하는 서독 대사관에 몰려와 서독으로 보내주기를 요구하였다. 이들 나라 중 헝가리와 폴란드는 고르바초프의 개혁요구에 힘입어 동구권 국가 중에서는 최초로 정치개혁을 추진한 바 있다.헝가리에서는 동독인들이 헝가리로 계속 모여들자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동독, 서독, 헝가리 정부는 많은 접촉 회담을 가졌다. 결국, 서독과 헝가리의 비밀 회담에서, 헝가리는 동독 탈출민들의 서독이주를 허용하는 대신, 서독은 헝가리에 10억 마르크의 차관을 제공하기로 약속했다. 1969년의 헝가리-동독 간 여행 협정을 폐지하여 헝가리에 체류하는 동독인들의 탈출을 허용하였다. 이에 대해 동독 정부는 강력히 항의하였으나, 헝가리의 네메드 수상은 인간애에 기초하여 동독인의 출국을 허용한 것이라면서 동독정부의 비난을 일축하였다. 이 같은 조치로 1989년 9월말까지 약 25000명의 동독인들이 오스트리아를 거쳐 서독으로 넘어갔다.한편 동독 내에서도 1989년 10월 1일 라이프치히에서는 2만 명이 넘는 시민들이 니콜라이 교회의 평화기도모임에 참석한 후, 동독의 개혁을 외치면서 시위를 벌였고 10월 7일에 동독 건국 40주년기념식이 개최되었는데 이 자리에서 호네커는 40년 사회주의는 성공적이었다고 평가하면서 사회주의의 승리를 주장하였다. 이는 동독인들은 물론, 이 행사에 참석한 고르바초프를 실망시켰다. 고르바초프는 동독이 파산직전에 있다고 경고하면서 호네커에게 개혁과 개방을 촉구하였고, ‘늦게 오는 자는 벌을 받게 된다.’는 말만 남기고 베를린을 떠났다.10월 15일에는 동독 공산당 기관지 지와 동독 tv에서조차 비판 의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하였고, 10월 18일에 호네커는 당서기장 직에서 물러나고, 에곤 크렌츠가 취임하였다. 11월 1일에 크렌츠는 정치적 변화를 선언하고, 고르바초프를 만나 동독의 개혁을 약속하였지만 11월 4일에는 동베를린에서, 100만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자유선거, 통일사회당정권 독점 폐지, 내각 총사퇴 등을 요구 하면서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크렌츠는 기반이 마련된 것이기 때문이다. 1990년 구 동독지역 주 의회 선거를 통해 선출된 의원 509명 가운데 구 동독의회 출신은 5명만 당선되어 구 동독출신 정치인 청산 또한 자연스레 이뤄진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그러나 구동독지역에서 정치경험이 없던 새 인물이 대다수 등장한 가운데 동독과는 다른 서독의 의회체제에 대한 이해와 경험의 부족으로 일부 문제가 발생되기도 하였지만 이러한 문제는 민주주의 정치에 대한 이해와 정당정치의 경험이 축적되면서 개선되고 있다. 체제 구축의 측면에서 통일 후 구동독지역 정당체제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며 성공적으로 완료된 것으로 평가될 수 있다. 체제 측면에서의 정당통합 과제가 성공적으로 마무리 된 가운데 독일은 구 동독지역에서의 민주주의 정치문화 신장이라는 과제에 직면하였다. 동독 유권자의 미흡한 민주주의 의식과 낮은 정치참여 수준을 향상시키는 것이 중요한 과제였다. 통일 초기 동독인들은 새로운 민주주의 체제에 대해 높은 관심과 지지도를 나타냈지만 수년 내에 서독수준의 경제적 풍요를 누릴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충족되지 않으면서 정치에 대한 실망감이 급격히 늘어났고 이로 인해 동독지역에서 선거 등의 정치 참여율이 급격히 떨어졌다. 이러한 경향에는 개인의 정치적 의사를 수렴하는 정치조직 및 경험이 동독지역에서 아직 부족한데도 원인이 있었다. 그렇지만 무엇보다 새로운 정치체제가 필요로 하는 민주적 정치문화가 부재하였기 때문이라는 평가가 내려지고 있다. 이러한 구동독지역의 상황은 정치제제 이식은 빠른 시간 내에 이뤄질 수 있으나 그에 적합한 인식의 변화는 장기간에 걸쳐 완성될 수 있는 과제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구 동독지역에 민주적 정치문화를 만드는 것은 중 ? 장기적으로 추진되어야 할 매우 중요한 과제인 것이다.두 번째는 행정통합에 대한 평가이다. 통일 후 구동독 행정통합의 문제는 담당자들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시간이 걸리는 어려운 과제였다. 단순히 제도를 바꾸는 것을 넘어 중앙 중심적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던 동독 행정인력의”
서양 중세사수도원과 중세문화《목 차》Ⅰ. 왜?Ⅱ. 수도원의 시작Ⅲ. 주요 수도원1. 베네딕트 수도원2. 클뤼니 수도원3. 프란체스코 수도원4. 도미니크 수도원Ⅳ. 수도원의 역할과 수도사들의 활동1. 수도원의 역할2. 수도사들의 활동Ⅴ. 나오며Ⅰ. 왜?우리는 흔히 수도원이라고 하면 흔히 세상과 단절된 공간을 떠올리기 쉽고, 중세라 하면 암흑시대를 떠올리기 쉽다. 그러나 수도원이 인간의 현실과 유리된 공간이 아니라 인간의 삶 전반과 긴밀한 관련을 맺고 있는 공간이었다. 즉 하느님을 섬기는 공간임과 동시에 인간 노동의 흔적과 인간의 숨결이 담긴 공간이었던 것이다.따라서 이 글에서는 수도원을 통해 서양 중세문화를 다른 시각 즉, 문화의 단절을 의미하는 암흑시대가 아닌 문화의 연속성을 가능케 했던 시대로 보고자 한다.Ⅱ. 수도원의 시작수도원(Monastery)은 ‘홀로’라는 헬라어 ‘모노스’에서 유래되었고, 의미는 ‘세상과 떨어져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의 삶을 사는 행위’로 이해된다. 수도원 운동은 초대교회 때 핍박을 피해 은둔한 것과 4세기 이후 세속화된 교회로부터 구별된 삶을 추구하는 공동체에서 찾을 수 있다.최초의 수도원은 이집트의 성 안토니우스(?~356)와 성 파코미우스(290?~346)로부터 유래한다. 4세기 초, 안토니우스는 극도의 금욕생활을 하여 큰 명성을 얻었고, 추종자들이 그의 주위에 모여들어 사막에 자리를 잡았다. 성 안토니우스는 monk의 원래 뜻대로 로서 황야에서 오랜 고행의 생활을 계속하였는데, 그 금욕적 모습은 알렉산드리아의 주교 아타나시오의 필적에 의한 『성 안토니우스전』(356)에 의해서 서방의 갈리아의 구석까지 전해졌다. 그의 제자 힐라리오(Hilarion, 291~371)는 그것을 팔레스타인에, 다른 제자 마카리오스(Makarios, 300년경~371)는 나일강의 델타지대로까지 확대시켰는데 동방교회에 지금도 뿌리 깊은 은수사적 경향은 이 때 시작된다.그리고 파코미우스는 수도승을 위한 공동체 수도원 생활을 창시한 인물이다. 그는 이집트의 없었으나, 매우 소박하고 검소하였으며, 게으름을 방지하기 위해 1일 6~7시간의 육체노동을 하도록 되어 있었으나, 대부분의 힘든 밭일은 예농에게 맡겨져 있었다. 또한 공적기도, 독서와 명상, 사회봉사 등을 규정한 ‘베네딕투스 계율’ (성스러운 계율)을 준수하며, 정해진 일과에 따라 하루하루를 보내야 했다. 수도사들이 선출하는 종신직 수도원장은 절대적 권리를 가졌으며 부원장, 집사(의식주 담당자), 수련수사 담당자 등을 임명했다.Ⅲ. 주요 수도원1. 베네딕투스 수도원베네딕투스 수도원은 수도생활에 있어서 영속성과 순종, ‘베네딕투스 계율’(성스러운 계율)에 대한 순종 이 두 가지 요소를 가장 중요시 여겼다. 전자는 수도사들이 자기들 마음대로 수도원을 옮길 수 없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각 수도사들은 다른 곳에서의 이전 명령을 받지 않는 한 처음 가입한 수도원에서 종신을 해야 했다. 후자는 어떤 명령이 떨어지면 지체 없이 행하여야 했고, 이는 마음속으로 우러나와 순종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수도원장은 독재할 수 없으며 스스로도 하느님의 말씀과 ‘베네딕투스 계율’(성스러운 계율)을 지켜야만 했다.‘베네딕투스 계율’(성스러운 계율)에 따르면 수도사가 되기 위해서는 2개월 동안 시험 기간을 거친 다음 다시 6개월 동안 수행한 뒤 순종, 청빈, 순결 등을 서약하는 증서를 제출해야 했다. 수도원은 자급자족 공동체였으므로 수사들은 기도와 명상 외에 노동도 해야 했다. 물론 연령이나 체력에 따라 그리고 질병이라든가 혹은 특별한 재능 등의 예외적 경우들을 제외하고 모든 사람들은 순번제로 노동에 참여 했지만 대체로 농사, 원예, 건축, 필사 등의 일을 했다.또한 수도생활의 핵심을 기도라고 생각하여 개인들의 기도를 위한 시간들이 배정되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기도는 예배당에서 이루어졌다. 매일 수도사들은 낮에 일곱 번, 밤에 한 번 예배를 보았다. 이러나 집회의 대부분 시간은 시편의 낭송과 성경 강독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므로 대부분의 수도사들은 시편전체와 성부분이 이 계율에 대해 알게 되었다. 교황청의 지원 아래 베네딕트의 계율들은 서방 전체에 전파되었다.2. 클뤼니 수도원베네딕투스 수도원은 베네딕투스가 타계한 뒤 더욱 번성해서 수천 개의 베네딕투스계 수도원이 등장하였다. 베네딕투스계 수도원을 포함하는 중세 수도원은 수사들에게 기도와 명상 생활 말고도 청빈과 순결 등의 계율을 지키도록 했지만, 시간이 흐르고 규모가 커지면서 오류와 변화가 발생했다. 이때 신앙 강화 내지 정화 운동의 하나로 등장한 것이 프랑스의 클뤼니 수도원이다.종교적 열정이 전반적으로 낮은 수준에 떨어져 있었지만, 몇몇 성직자들은 끊임없이 당시의 악폐를 직시하고 그것을 제거하기 위해 몸을 받쳤다. 이들 중 한 무리가 910년 아퀴텐公 윌리엄 1세를 설득하여 클뤼니 수도원을 세우게 되었다. 이 수도원이 유명한 것은 ‘클뤼니의 개혁’으로 불리는 수도원 개혁운동의 중심이 되었기 때문이다. 본래 이 수도원은 개혁을 위해 세워진 것은 아니었으나 초대 수도원장 베르노 이하 역대 훌륭한 수도원장이 있어서 수도원 개혁(클뤼니 개혁)에 공전의 성공을 거두었다. 당초부터의 빈민구제와 제2대 원장 오도(Odo, 878년경~942)에서 시작되는 전례의 중시는 불안한 시대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농민만이 아니라 로마교황이나 봉건제후의 신뢰를 얻어 옛 수도원의 개혁에 성공하여, 그 정신에 근간을 두고 각지에 수도원이 세워지면서, 그 개혁운동으로 확대되었다. 이 개혁의 중심이 되어 있는 것은 봉건제후 등 세속권(世俗權)으로부터의 간섭을 물리친 수도회칙 보칙(補則:콘스에투디네스)에 토대를 둔 수도원을 세우는 것이었으며, 그와 관련하여 성직매매 ·대처(帶妻) 수도사 등에 대하여 당시의 제후들이 추진하는 개혁을 지지하였다.클뤼니 수도원의 설립강령에는 클뤼니 수도원이 다른 수도원들처럼 타락하지 않고 전반적인 수도원 개혁의 선두자로서 나설 수 있도록 여러 단서조항이 붙어있었다. 클뤼니 수도원은 봉건적 봉사의 대가로 토지를 보유하지 않았다. 기부에는 기부자를 위한 미사는데, 클뤼니 수도회에 속하지 않는 곳이라도 그 수도 관습을 채용하는 곳이 많았기 때문에, 교회생활에서의 그 영향력은 발군적이었다.그러나 학문적 연구 등을 통해 신앙심을 강화하는 데 부정적이었기 때문에 학문 발전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기도 했다. 그리고 기도와 예배를 너무 강조한 나머지 화려한 종교 의식을 중시하여 형식적인 면에 치우치게 되었다. 또, 봉건적 토지 소유는 금지하였으나 수도원에 기증한 토지는 거부하지 않았으므로 클뤼니 수도원은 점점 대토지를 많이 소유하게 되면서 13세기에 이르면 클뤼니 수도원 역시 개혁 정신을 잃게 된다.3. 프란체스코 수도원중부 이탈리아의 아시시 출신 성 프란체스코가 1209년에 설립한 프란체스코 수도원의 계율은 수도원의 통상적인 계율과는 근본적으로 다르게 절대적인 청빈을 강조하고 있다. 탁발수도사들은 속세를 떠나 수도원에 은둔하는 것이 아니라, 떠돌아다니며 가난한 자들을 돕고 설교를 하면서 중생 속에서 살아가도록 되어있었다.이렇게 계속해서 팽창이 되자 그는 교황청은 프란체스코회를 인가하였다. 성 프란체스코가 죽은 이후, 1230년 교황은 칙령을 내려 프란체스코회와 수도승들도 필요한 경우 후원자로부터 땅과 돈을 기증 받을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수도승들은 대학에서도 공부할 수 있게 되었다. 1254년에 교황 알렉산더 4세는 그들에게 주교의 허락 없이 설교를 할 수 있고 고해를 받을 수 있는 특권도 부여하였다. 이러한 변화들은 대부분 프란체스코회 수도승들이 자청한 것이었다. 이는 곧 정통파 수도승들의 격렬한 비판을 받게 되었다.4. 도미니쿠스 수도원1215년에 스페인의 성 도미니쿠스가 설립한 도미니크 수도원은 아우구스티누스의 계율을 채택하였고, 이들의 주된 임무는 설교를 통한 이단과 유대인 그리고 무슬림의 개종이었다. 이를 위해 수도사들은 충분한 교육을 받아야했고, 여러 등급의 학교가 생겼을 뿐 아니라 도미니쿠스 수도원은 그때 막 개교하기 시작한 대학 주변에 많이 설립되었고, 수도사들은 교양학부 2년, 자연학부 3년을 공부해야 최긴밀한 관계를 가지게 되었다. 고위성직자는 대부분 대제후의 봉신이 되어 통상적인 봉건적 봉사의 의무를 지게 되었고 반대로 고위성직자들의 주군인 대제후들은 어느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마음대로 주교와 수도원장을 임명하였다.이 되었고, 경제적으로는 영주로써의 역할 형식상으로는 봉건사회의 제 1계층이나 고위성직자는 여타 대영주나 영주와 비슷한 역할을 했다. 즉 고위성직자는 대토지 소유주로 그 휘하의 영민들을 지배했다., 사회적으로는 빈민 구제 대상은 주로 노인, 장애인, 아동, 노숙자 등 노동력이 없는 빈민으로 기독교적 교리와 관행, 자선 시혜의 형태로 이루어졌다.·병원의 역할을 했으며, 종교적으로는 신자들에게 신앙전파를 하는 종교 활동도 했다.그리고 또 하나의 중요한 활동은 도서관을 통해 고대문화의 일부를 보전했다는 점이다. 도서관은 로마제국이 붕괴됨에 따라 많은 도서관이 없어지고 도서를 수집하고자 하는 사람도 거의 자취를 감추었다. 이때 교회가 여러 분야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던 흐름과 일치한다. 고대사회에서는 지식을 구하기 위하여 교육을 받고 도서를 수집하기 시작했지만 중세 봉건사회에서는 종교상의 교의를 가르치기 위해 시작되었다. 이처럼 중세의 교육 문화의 주도권을 장악한 것은 기독교이지만 수도원에서 사본 사업이 행하여지기 시작하여 점차 도서관의 발생을 보게 되었던 것이다.이 도서관으로 수도원은 중세사회에 있어 교육 및 학문연구와 같은 문화적 역할을 수행함과 동시에 사회적으로는 자선을 베풀고 새로운 농경 법을 가르치고 육체노동의 귀중함을 알려주는 사회사업을 할 수 있었다.2. 수도사들의 활동유럽의 그리스도교의 세계는 수도사들의 업적이었다. 외적으로 이들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이교도들에게 Mission을 가는 것이었다. 일찍이 이집트에서 출발한 수도원운동은 이탈리아를 통해 갈리아로 전파되었고 그리고 다시 앵글로 색슨의 잉글랜드와 켈트의 땅인 아일랜드로 건너갔다. 6세기와 7세기에 걸쳐 이 두 섬에서는 믿을 수 없을 만큼의 전도활동과 수도원 운동이 전개었다.
서양 고대사목 차Ⅰ. 왜 로마건축인가?Ⅱ. 로마건축의 시대구분1. 제 1기 : 에트루스칸 건축시대 : 왕정시대2. 제 2기 : 전기 로마 건축시대 : 공화정시대3. 제 3기 : 후기 로마 건축시대 : 제정시대Ⅲ. 로마건축의 특징Ⅳ. 맺음말로마 건축Ⅰ. 왜 로마건축인가?로마, 서양에 관한 책과 인터넷을 찾아보면 대부분 이 한마디로 로마와 서양의 관계를 정의한다. 그것은 “로마는 서양의 밑거름이 되는 존재이다.”라는 것인데 이것은 어떤 자료를 찾아보나 비슷한 문장으로 같은 뜻을 말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거의 모든 자료에서 말하고 있듯이 로마가 서양, 서구의 바탕이 되었다고 하는 것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다. 로마는 고대 지중해 세계의 보편적인 문화를 이루어 후일 로마의 법, 건축, 정치와 문화 등이 서양 문화 정립의 영향을 주었고 이 같은 로마의 패권주의는 현대의 미국의 패권주의와 일관하여 생각하기도 한다.따라서 우리가 서양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뿌리인 로마를 먼저 이해하여야 한다. 건축도 서양의 건축을 이해하려고 할 때 로마건축의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실제로 로마는 서양건축사에서도 가장 많은 양의 건축유산을 남겼고, 내용에서도 서양건축의 바탕을 이룰만한 것들을 많이 남겼다. 또한 문명까지 포함한 양식사조로 보면 서양에는 현대에도 로마건축에서 디자인 모티브를 가져오는 건축가들이 일정한 집단을 형성하고 있다.따라서 이 발표는 로마건축을 알아보는데 중점을 두고 내용을 살펴볼 것이다.Ⅱ. 로마건축의 시대구분1. 제 1기 : 에트루스칸 건축시대 : 왕정시대에트루리아인은 이탈리아반도에 최초로 문명을 일군 민족으로 기록되어 있고, 로마 공화정이 시작되는 BC 509년까지 이어졌다. 이들은 특히 구조면에서 로마인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었으며 아치와 볼트를 사용했다는데 그 특징이 있고, 사이클로피안 방식의 석조방법을 사용했다. 이와 같은 선진기술은 로마 건축의 견인차 역할을 했기 때문에 이 시기를 에트루스칸 건축 시대로 구분한다.한편 로마는 에트루리아인의 왕정을 타도하면서누스 신전’과 ‘주노 소스피토 신전’ 등이 있다. 이 시기 대부분의 신전은 목구조로 지어졌지만 이후 석구조로 바뀌었으며 그리스 신전과 다른 독특한 특징을 보였을 것으로 추측된다.세 번째 성벽은 현재 에트루스칸 시대의 성벽은 남아 있는 것이 없어 한참 후지만 BC 2세기에 만들어진 ‘페루자의 도시성벽의 축조술’이 에트루스칸 때의 기술이 남아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마지막으로 암거에는 BC 6세기경에 만들어진 ‘클로아카 맥시마 대암거’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로마 제정 시대 초기의 것으로 추정되고 있지만 이 역시나 추정으로 이와 관련한 정확한 연구가 필요하다.가 있다. 대표적인 볼트 건축물로 앞서 나왔던 사이클로피안 석조 방식으로 만들어졌다.2. 제 2기 : 전기 로마 건축시대 : 공화정시대공화정 기는 로마 문명 전체로 볼 때 세 가지 의미를 갖는다. 첫째는 이민족 왕을 몰아내고 로마만의 독립적 문명을 일구기 시작했다. 둘째는 공화정이라는 집단 지배체제를 구축했다. 셋째는 주변민족을 정복하고 지배하는 팽창주의가 자리 잡았다. 이런 내용들은 건축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면서 로마 공화정 건축의 특징을 결정짓는 주요요소로 작용했다. 특히 집단주의와 팽창주의는 공화정을 대표하는 두 가지의 건축적 정체성이었다. 즉 로마 건축의 집단성은 공화정이라는 정치체제에 의해 최초로 형성되었고, 이것을 형성한 가치관은 로마민족의 우수성이었다. 집단의식은 건축에도 반영되어 화려한 과시욕의 표출로 나타났다.한편 이러한 과시적 집단의식은 팽창주의와 밀접한 연관성을 갖는데 곧 집단주의는 팽창주의의 산물이었고 동시에 팽창주의는 집단주의의 산물이기도 했다. 또한 팽창주의는 이전의 건축술이 로마만의 건축을 창출해내기에 역부족이었던 상황 당시 로마는 새로운 건축술의 발명을 포함한 산업기술 체제의 실속 있는 정비가 필요했고, 건축행위를 유발시키는 동기 또한 상식적 수준을 뛰어넘는 비상한 요구가 필요했다. 을 만족시켜서 대내적으로 종합화의 개념을 통해 로마만의 건축술을 탄생시켰고, 대외적으로는 화려한 과의 발전은 아치와 볼트가 완성되어 이것을 바탕으로 로마만의 실용건축이 등장하기 시작했다는 것이 중요하다. 아치를 이용한 성문, 수로, 다리 등이 지어졌는데 포룸 홀리토리움의 성문, 아쿠아 마르시아, 수블리키우스 교 등이 대표적인 예이고 포르티쿠스 에밀리아는 볼트로 천장이 구성되었다. 이 헬레니즘 현상과 구조기술의 발달은 공화정 건축뿐 아니라 로마 건축 전체를 대표하는 특징이다. 전자는 신전으로 상징되는 고급 건축을, 후자는 토목 인프라로 상징되는 실용건축을 각각 대표하였다.BC 1세기의 공화정 말기로 오면 이미 로마는 이탈리아 반도를 넘어서 팽창을 거듭하고 있었고, 로마 제일주의에 따른 로마적 세계관이 형성되었다. 제국을 탄생시키기에 충분한 토대가 마련되었던 것이다. 또 이 과정에서 앞서 헬레니즘 현상을 수입함으로써 나타나는 문제점들 헬레니즘 건축을 모방하면서 자기만의 정체성을 확보하지 못하고 헬레니즘 건축의 아류에 머무는 면과 토목기술에 머물러 있던 로마 건축이 자신만의 정체성을 확립하였다. 즉 집단화된 양식으로서의 로마 공화정 건축은 이런 시기에 나타났다는 것인데 이 시기를 이끈 사람이 술라, 폼페이우스, 카이사르 3인방이다. 이들은 모두 독재 권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따라서 화려한 과시욕이 있었다. 이들이 과시욕은 로마의 영광이라는 집단적 가치를 추구하기도 했지만 궁극적으로는 자신의 정치적 권위를 표현하려는 개인적 욕심에서 비롯되었다. 이것을 처음 시작한 사람은 술라로 술라 시기의 로마 건축은 첫째 건물들이 대형화되고 기념비적 웅장함을 드러냈고, 둘째 헬레니즘 고전어휘를 사용했으며, 셋째 오스티아와 폼페이 등의 도시를 개발 하였다는 특징이 있다.이런 술라의 대중주의를 이어받은 사람은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였다. 이 두사람 역시 기념비적 건축을 통해 자신들의 권위를 과시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다른 한편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는 공공건축에도 관심을 기울였는데 이 공공건축은 대중적 지지를 얻기 위한 수단이었다. 그래서 폼페이우스는 자신의 이름을 딴 ‘폼페이우스 극장스투스는 강력한 보수정치를 펴며 자신이 근검절약하는 모범을 보여 사회기강을 바로잡았는데 이러한 사회의 전반적 분위기는 건축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났다. 화려한 과시 보다는 내실 있는 발전이 다져진 것이다. 아우구스투스 시대의 건축이 절제의 분위기로 흐르는 데에는 비트루비우스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비트루비우스는 보수주의자로 그리스 특히 아테네 풍의 건축을 이상적 모델로 하고 있었다. 그가 지은 『건축십서』도 그리스 건축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이라고 한다. 한편으로는 기념비 건축의 축조와 구조기술의 발전이라는 공화정 말기 경향이 계속되었고, 그리스 건축에 영향을 많이 받은 비트루비우스로 인해 로마 건축만의 역동적 창조성을 늦추는 퇴행적 결과가 있었으며, 시민정신의 정착과 같은 새로운 내용이 나타났다. 이렇게 보았을 때 제정기의 시작이 외형적 차원에서 특별히 새로운 변화를 가져온 것은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내면적으로는 중요한 차이점을 가지는데 즉 비록 아우구스투스가 기념비적인 건축을 하였더라도 그것을 통해 황제의 권위를 세우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로마 건축 전체를 보았을 때 아우구스투스의 건축은 트라야누스와 함께 공공성이 가장 강한 건축으로 평가된다. 그는 공공건축을 통해 황제의 권위를 보여주었다. 공공건축이 황제의 권위를 만들어낼 수 있었던 것은 그 뒤에 시민의 힘이 있었기 때문이다.그리고 이탈리아반도를 넘어선 속주개발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도 그였다. 특히 유럽의 곡창지대라 불리는 서유럽 남부지역에 다리와 수로를 놓아 농업을 일으켜 로마의 식량 확보를 하는데 주력하였다. 아를 지방이 대표적인 예이다. 님에는 ‘가르교’를 세워 교통망을 닦음과 동시에 상부에는 수로를 넣어 용수도 확보했다. 그리고 ‘메종카레 신전’도 세웠고, ‘폼페이우스의 극장’을 대규모로 발전시켜 원형극장도 세웠다.아우구스투스 사후 티베리우스 황제는 아우구스투스의 평화정책을 어느 정도 따랐으나 건축에서는 화려함을 과시하는 제국건축으로 나아가려고 하였다. 이러한 과시적 경향은 특히 ‘도미티아누스 황궁’이다. 이 건물은 로마를 통틀어 가장 화려하고 규모가 큰 건물 가운데 하나지만 그 속에 스타디움을 함께 지은 점에서 다른 황궁과 구별된다.이후 5현제 시대로 접어드는데 그 중에서도 트라야누스 황제와 하드리아누스 황제를 주목해야 한다. 트라야누스 황제는 철저히 공적인 인물이었다. 그가 세운 ‘트라야누스의 포럼’이나 ‘시장’은 그것을 잘 증명해준다. 반면에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예술가라고 불러도 좋을 정도로 사적 욕망도 큰 인물이었다. 일정부분 트라야누스가 했던 공공사를 이어받았지만 역시 역량을 기울인 것은 사적건축으로 ‘판테온’과 ‘하드리아누스의 빌라’를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다.5현제 이후 로마에는 혼란기가 오지만 세베루스 왕조가 193년에 시작되어 일시적으로나마 극복하려고 한다. 그러나 물줄기를 돌릴 수 없듯이 세베루스 왕조 이후 로마는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건축 활동도 위축되었다. 특히 로마 시내와 이탈리아 반도 내의 위축이 심했다. 공공성 개념의 소멸로 황제 개인 건축물에 집중되었다. 지어지는 건물의 숫자가 줄어든 반면 대형화 경향이 두드러졌는데 주로 목욕탕이 주도하였다. 세베루스 왕조부터 군정혼란기에 이르는 시기에 그나마 건축활동의 맥을 유지시킨 것은 북아프리카 속주개발이었다.군정혼란기 이후 로마는 본격적으로 몰락의 길을 걸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 때부터 시작되었는데 문제는 바로 로마의 분할에 있다는 것에 있다. 공공성이라든가 더 나아가 세계관이 변함에 따라 제국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또 장식화 경향이 이전과는 다르게 로마 몰락을 상징하는 유일한 건축경향으로 남았고, 대형화의 정도가 심해지면서 더해졌다. 모두 무의미한 현상들이었다. 이러한 현상들에는 개인적 욕심이 공공발전을 위한 원동력으로 승화되지 못하고 단순 합으로만 합쳐져 집단욕망에 머물고 있는 당시의 사회현상을 잘 말해준다. 정치적으로도 프린켑스에서 도미네 제로 바뀌었던 것은 이를 잘 반영해주는 사실이다. 이로 인해 지배계층은 탐욕과 부도덕한 통치를 했고 필연적으로 시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