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몽양 여운형(내용요약)영국군의 거문도 점령과 흥선 대원군의 귀국으로 나라가 어수선했던 1885년 다음해, 몽양은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신원리 묘꼴에서 출생했다. 그의 모친이 임신중 꿈에서 해를 보았다 하여 그의 호는 이 때 조부에 의해 몽양(夢陽)이라 지어졌다. 몽양이 태어났을 때 조부는 몽양을 보자마자 왕재(王材)라 하여 크게 탄복했다한다. 몽양의 부친은 성격이 급하고 매사에 엄격했으며, 모친은 통이 크고 대범하였다. 몽양은 모친의 성격을 많이 빼닮아 무슨일이 생기면 부친보다는 모친과 의논하곤 하였다. 어려서부터 심성이 착하고 유순했던 몽양은 집안 내 양반과 노비의 주종관계를 보며 이때부터 봉건적 계급에 대한 문제의식을 키웠다.1900년 14살의 나이로 배재학당에 입학한 몽양은 홍화학교, 관립우체학교에서 학업을 계속하던 중, 1년 간격으로 양친이 별세하면서 학업을 중단하고 고향에 돌아와 학교를 설립한다. 양친의 3년상이 끝나고 그는 상투를 자르고 노비문서를 불태움으로써 유교적 폐습의 타파와 함께 자유와 해방에 대한 의식을 확고히 한다. 1907년 기독교를 접하게 되는 몽양은 기독교를 통한 애국계몽운동을 알게 되고, 뜻있는 이들을 많이 만나게 됨으로써 독립에 대한 열정을 다진다. 한일합방 후, 국내에서의 독립운동이 현실적으로 힘들다는 것을 느끼고, 1913년 기독교를 통해 알게된 신간회 인사들이 설립한 신흥무관학교를 둘러봄을 시작으로 해외 독립운동의 첫발을 내딛는다.상해에 자리를 잡은 몽양은 1918년 신한청년당을 조직하여 체계적 독립운동을 시작한다. 교민단체 조직, 독립에 관한 인쇄물 발간, 외부인사 접촉 등으로 활발한 활동을 펼치던 몽양은 3?1운동이 일어난 1919년 파리강화회의에 김규식을 파견해 조선독립의 정당성을 알리는 한편, 그 해 4월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게 된다. 몽양은 임정 수립 당시 임정이 전통적 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파쟁만을 일삼자, 입각을 하지 않고 상해거류민단장 명의로 독립운동을 계속한다. 또, 1919년에는 몽양을 대때문이다. 그러나 몽양은 일본의 각종 회유에 굴하지 않고 떳떳하게 한국의 자주독립정신을 일본 전역에 각인시킨다.그 후 몽양은 중국의 손문, 장개석, 소련의 레닌 등과 면담을 통해 조선독립의 정당성을 역설하고, 이러한 이들과의 만남에서 그는 중국의 공산당과 국민당 모두에 당원으로 가입하게 된다. 그는 1920년대, 모스크바에서 열린 원동민족근로자대회 연설, 고려공산당 가입, 마르크스의 「공산당선언」을 번역하는 등 사회주의 노선에서 활발한 활동을 보인다. 반면 중국국민당의 남방혁명군을 돕고, 광동국민당 대표자대회에서 연설을 하는 등 우파 노선에서의 활동도 펼치게 된다. 몽양은 조국의 독립운동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노병회를 조직, 병력양성과 군비조달에 힘쓰고, 안창호, 김구 등과 함께 한국독립촉진회를 조직하였다. 또한 조봉암을 비롯한 뜻있는 인사의 해외 밀입국을 돕고, 임정의 자금을 모으는 등의 활동도 펼친다. 당시 중국 복단대학의 교수로 있었던 몽양은 남양원정축구단을 발기하여 동남아 순방길에 오른다. 여기서 몽양은 영?미 식민주의를 신랄히 비판하여 외신기자들의 주목을 받는다. 순방을 마치고 돌아온 직후인 1929년 7월, 몽양은 결국 상해운동장에서 일경에 의해 체포되고 만다.16년만에 압송의 형식으로 고국에 돌아온 몽양은 3년형을 언도받고, 1932년 7월 출옥한다. 다음해에 조선중앙일보 사장으로 취임하고, 그 다음해에 조선체육회장에 취임함으로써 몽양은 국내에서의 독립활동에 불을 지피게 된다. 그러나 손기정의 베를린올림픽 금메달과 관련한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조선중앙일보는 폐간된다. 다음해 노구교사건을 계기로 중?일 전쟁이 발발하자 몽양은 일본의 패망을 예견하고 조국광복에의 구상에 들어간다.1940년대, 일본은 창씨개명을 들고 나오며 조선민족의 황국신민화에 총력을 기울이게 된다. 인도차이나반도의 공격으로 제2차세계대전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일본은 조선의 지도자들을 동원하여 안정적 내치를 꾀한다. 그 과정에서 대중성 있고 세계정세 파악에 능한 몽양과의 계속적인 접촉을 15일, 일본의 항복으로 조선은 해방된다. 해방 전부터 일본의 패망을 예견하고 치안대와 건국동맹을 지하조직으로 갖추고 있던 몽양은 해방 직후 건국준비위원회를 구성한다. 건준은 미소군정 전까지 조선의 실질적인 임시 행정부의 역할을 하게 된다. 건준을 조직하고 치안, 식량, 교통의 문제에 총력을 쏟던 몽양은 고하 송진우와 같은 우익계 인사들과의 접촉을 시도 했으나 실패하였다. 해방후 미소군정이 들어서면서 조선의 정치세력들은 좌익과 우익으로 급격히 나누어지기 시작했고, 여기에 편승하여 건준 또한 내분이 일었다. 미국이 한반도에 진주하기 바로 전 일부 공산세력들에 의해 조선인민공화국이 수립된다. 몽양은 여기에 반대의 의사를 밝혔으나 다수의 의견으로 건준은 해체되고, 몽양의 주도로 전국인민대표자대회 후 조선인민공화국이 정식으로 수립된다. 민족의 지도자들을 통합하는 조직을 꾀하고자 했던 조선인민공화국은 임정을 지지하는 우익계 인사들의 반대로 결국 반쪽의 정부가 되었다. 여기에 미군정까지 인공을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게 되었고, 귀국한 이승만은 독자적으로 우익인사들을 망라하여 독립촉성중앙협의회를 구성하게 된다. 이에 몽양은 반대의사를 표하며 11월 극우?극좌를 제외한 인사들을 총망라하여 인민당을 창건한다. 그 해 12월,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신탁통치안이 가결되고 몽양측은 다수의 반탁운동에 맞서 찬탁에 대한 의견을 표함으로써 그의 입지는 좁아진다. 1946년 2월 미군정의 자문기관으로 민주의원이 구성되고 몽양은 최고정무위원 28명중 한명으로 추대되었으나, 구성원 대부분이 우익계 인사들이라는 이유로 결성식조차 참석하지 않는다. 3일 후 중도 좌파를 아우르는 민주주의 민족전선이 조직되고 몽양은 여기의 5인 의장단에 선출된다. 6월 이승만의 정읍발언으로 단독정부의 분위기가 무르익어가자, 몽양은 김규식과 좌우합작위원회를 구성하고 9월 평양을 방문했으나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한다. 그 사이 인민당, 신민당, 공산당의 3당 합당과정에서 몽양은 사회노동당을 따로 조직하고, 후에 노동인교적 위기를 맞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국내의 정치가들은 보수와 진보로 나뉘어 연일 논쟁을 벌이고 있고, 그 논쟁은 친북좌파, 친일우익의 논란으로 이어져 대한민국의 정통성의 문제에까지 다다른다. 결국 지금 이러한 논란의 뿌리는 해방 후의 정부수립과 분단에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이러한 역사적 맥락에 비추어 볼 때, 몽양의 해방후 행적을 재조명 하는 일은 매우 의미있는 일이다.그전에 먼저 몽양의 독립운동을 살펴보면, 몽양은 뛰어난 정치가로서 국제정세를 보는 눈이 정확하고, 대중들의 마음을 움직일 줄 알며, 독립운동의 나아가야할 바를 직시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책에는 몽양의 상해 망명시절 일본, 중국, 러시아를 비롯한 각국의 지도자들과의 접촉이 방대하게 서술되어 있는데, 이것을 보면 몽양의 정치적 능력과 국제무대에서의 활약상을 알 수 있다. 몽양은 각계각층의 다양한 인사들과의 친분을 유지했다. 적국 일본은 몽양을 함부로 대하지 못했고, 자국으로 불러들여 그에게 국제정세에 관한 의견을 자주 들었다. 몽양은 독립운동 시절부터 뛰어난 웅변가였다. 큰 체구와 목소리, 논리적이며 역동적인 그의 연설은 대중의 마음을 움직일 줄 아는 정치가로서의 면모를 잘 보여준다. 또한 그는 독립운동에 있어서 모든 활동의 중심에 조국의 독립을 두었다. 지금도 논란이 되고 있는 몽양의 회색주의(비판하는 자들의 표현에 따르면)는 몽양에게는 문제가 아니었다. 좌파든 우파든 간에 민족독립에 도움만 된다면 몽양은 주저없이 일에 가담을 했다. 이것은 결코 기회주의가 아니다. 이념이라는 것은 민족의 하위개념이다. 민족이 있고 나서야 그 민족이 지향할만한 이념적 시각이 성립되는 것이다. 당시 조국독립이 최우선이었던 몽양에게 그러한 이념적 잣대는 부질없었을 것이다.몽양은 해방 후에 두드러진 활동을 펼치는데, 이 시기의 몽양을 살펴봄으로써 그의 정치적 신념을 이해함은 물론 현재 분단된 한국문제의 시사점까지 얻을 수 있다. 해방 후 건국준비위원회로 시작되는 그의 행보는 굳이 평가하자면 중도좌파적 한 우파세력들은 독립운동에 대한 기여가 미미했고, 또한 친일파들도 적지않아 정부를 구성하기에 적합지 않다고 판단해 독립운동의 주도 세력인 좌파와 손을 잡고, 우파를 끌어안으려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몽양이 공산주의자는 결코 아니다. 몽양은 마르크스의 사상을 충분히 이해하고 공감했으나, 레닌과의 면담에서도 밝혔듯이 한국은 사회주의보다는 우선 민주주의를 정착시키는 것이 중요하고 마르크스식 사회주의에는 반대한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몽양은 결코 이념을 내면화하지 않았다. 공산주의를 민족의 독립과 정부수립을 위해 필요한 도구로 인식했을 뿐 그의 내면에는 항상 통합된 민족의 단일정부수립만이 존재했다.그러면 이러한 몽양의 노선은 그 당시 왜 관철되지 못했으며 현재까지 올바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는것일까. 그것은 미소 양국의 한반도 정책을 살펴보면 알 수 있다. 해방을 전후하여 시작된 소련의 한반도 진출에 당황한 미국은 한반도에 38선을 긋자고 소련에 제안하고 소련은 이를 받아들인다. 그리고 개최된 3상회의에서 양국은 5년간의 신탁통치 후 한반도에 단일한 정부를 세울 것을 결의한다. 이에 대다수의 국민들은 반탁운동을 전개하게 되는데 후에 공산주의 계열은 찬탁으로 돌아서게 되고 몽양 역시 찬탁의 입장을 표명한다. 몽양은 이미 3상회의에서 미소가 임시정부를 구성하는 것을 약속하였는데, 굳이 혼란스러운 해방정국에서 그들의 역할을 배제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는 김구와 이승만으로 대표되는 우파진영의 비난을 받으며 그의 정치적 입지가 좁아지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그러면 이승만과 김구는 왜 반탁운동을 전개하였는가. 이승만의 경우 신탁통치가 이루어져 남북 통합정부가 수립되면 자신의 정치적 위치와 권력이 유지되기 힘들다는 판단 아래 반탁운동을 하였으며, 미국 또한 이러한 반탁운동을 묵인하였다. 신탁통치가 결정되고 그것이 국내에 보도될 당시 동아일보는 소련이 신탁통치를 주장했고, 미국은 즉각적인 독립을 주장했다고 보도했다. 이것은 반탁운동의 성격이 반소?반공적 성격을 띄는 계다.
사회학입문 보고서.hwpⅠ. 서론현대사회의 특징은 모든 생활경험들이 조직과의 관련속에서 이루어진다는 점에 있다. 사람들은 일생의 대부분을 자신이 조직 구성원으로 활동하거나 조직활동의 산물들을 접촉하면서 생활을 영위해 가고 있다. 이러한 조직생활은 개인과 사회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가장 효율적이고 효과적인 수단이다. 조직은 특정한 목표를 위해 인위적으로 규정된 규칙과 절차가 있고, 목표 달성을 위해 항상 재구성 되어진다는 점에서 집단과 차이가 있다.인간이 공동체적 삶을 영위해 온 이래 크고 작은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 공적 또는 사적 영역에서 다양한 조직들이 생성, 발전되어 왔다. 농경사회에서는 비교적 단순한 조직들이 사회의 중추적 기능을 담당하였으나, 근대 이후 산업화의 진전과 함께 규모도 크고 복합한 성격을 띤 조직, 이른바 관료제가 사회의 근간을 이루게 되었다. 이념형 관료제의 창시자인 베버에 따르면 이러한 관료제 등장의 배경은 이집트와 중국시대의 통치기구에서 찾아볼 수 있다. 즉, 베버는 화폐경제의 발달 및 행정사무의 양과 질의 확대가 현대 관료제 생성의 전제조건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관료제 발달의 사회경제적 배경으로는 19세기 산업혁명 이 후의 급격한 생산성의 증대를 들 수 있다. 당시 사회에서는 능률과 효과성에 대한 인식이 고조되고 있었다. 그리고 정치적 배경으로는 절대군주제에서의 관료제가 입헌군주정치체제에서 공식적, 대표적 성격을 갖춘 합법적 관료제로 변모하게 되었다는 것을 들 수 있다. 절대군주제 하에서의 일인의 '자의'에 의거하던 관료제는 '법에 의한 지배'로 그 성격 자체가 변했다. 이것이 점차 민주주의 정치사상과 결합되면서 '국민을 위한 봉사자'로서의 관료제 개념을 형성하게 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살펴보면, '국민의 이익을 대표하는 관료제'라는 인식은 자유민주주의 정치사상의 발전과 그 맥을 같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지적 배경과 사회구조의 변화에 의해 과거와는 다른 사회조직원리가 요청되었다. 즉 사회조직의 기본원리가 또한 급증하였다. 공장에 투입되는 인력들은 분업화 되었다. 대규모의 자본제적 사회조직들은 효율적인 체계를 필요로 하게 되었는데, 관료제는 일부 최악의 권력남용을 없애고 어느 개인 혼자서는 이해하기 힘든 복잡한 과제를 관리할 합리적인 방법을 제시해줌으로써 위계제도의 효율성을 높여주었다.) 분업을 조직화하고 명령과 일련의 규정을 제시하여 여러 종류의 전문가들이 공동의 목적을 위해 함께 일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관료제는 조직이 달성할 수 있는 성과의 깊이와 폭을 확대해 주었다. 당초 정부 활동을 조직하는 제도로 시작되었던 관료제는 그 동안 대기업과 모든 종류의 대규모 조직들에게 보급되었다. 행정조직 역시 관료제가 성립될 수밖에 없었던 배경이 있었다. 산업사회 발달의 근저에 있는 자본주의의 발달은 관료제를 발전시키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자본주의의 발전은 안정되고 엄격하며 치밀하고도 계산적 행정의 필요성을 대두시켰다. 관료제와 자본주의가 서로 다른 역사적 근거를 갖고 있기는 하지만 자본주의는 관료제의 발전을 조장하였다. 자본주의는 관료행정의 가장 합리적인 경제적 기초가 되었으며, 그것을 가장 합리적인 것으로 만드는데 기여했다. 왜냐하면 관료제는 자본주의 사회가 필요로 하는 자본과 자원을 효과적. 능률적으로 조달 관리해 주는 기술적 수단이었기 때문이다.?2) 관료제의 순기능(1) 위계적 명령사슬관료제의 위계적 명령사슬은 다단계로 계층화된 조직구조에서 명령을 내려 보내는 강력한 수단이다. 피라미드형의 조직구조에서 조직의 장(長)이 조직의 전체 과제를 배분하여 하위과제의 책임을 하위 지도자들에게 맡기면, 하위 지도자들은 다시 이 책임을 세분화하여 순차적으로 각 종업원에게 전달하는 일종의 명령사슬(chain of command)을 구성하게 된다. 이 명령사슬은 업무별로 명백한 책임과 권한, 그리고 임무를 부여해줌으로써 분쟁 가능성을 해소한다. 명령사슬에 속한 상사들은 과제 또는 기능별로 독점적 권한을 부여받고, 그 대신 이에 상응하는 책임을 진다. 이 때문에 조직의 장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인간 본연의 자주적이고 창조적이며, 나아가 영웅적인 요소들은 몰인격적이고 일상화된 관료적 과정에 의해 도태될 수밖에 없다.)(5) 구질서의 답습관료제는 일을 수행하는 사람이 바뀌어도 일 전체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또한 조직이 우선인 관료 조직은 개개인의 자아를 말살하고 자신이 처한 역할에 따라 사고하고 행동하는 조직인을 만들어 내어 각 조직원들의 창의성이 발휘되기 힘들다. 이렇게 조직 우선적이고 개인의 창의성이 발휘되기 어려운 관료제 체제 아래서 사람들은 더 이상 그들의 상황을 더 나은 방면으로 발전시키려는 의지를 보이지 않는다. 별 다른 도전 없이 그저 현재의 상태를 유지하려고만 하는 구질서의 답습으로 인해 조직 내에 보수성과 무사 안일주의가 팽배하게 되면서 그들은 변화와 노력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발전을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물론 관료제는 그 기능들로 우리가 효율성을 달성할 수 있게 해주었지만 지나치게 그 체제 자체에 집착하고 얽매이게 되면서 그 역기능들이 많이 나타나게 되었다. 특히 문서화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체제나 절차를 지나치게 중시하는 것은 관료제의 기능인 효율성을 오히려 저해하는 결과를 가지고 온다. 관료제는 초기 산업혁명시기에서부터 시작된 단순하고 반복적인 작업에는 효과가 있었지만 지금 우리 사회는 관료제가 만들어 낸 기계 같은 조직보다는 생동력 있는 조직을 필요로 한다. 급변하는 지식 사회에서 경직성을 띄고 있는 관료제는 더 이상 효율적이지 않은 것이다. 이러한 사회 상황에 맞물려서 위에서 살펴본 관료제의 역기능들은 현재 사회에서 획일적인 관료주의가 위기를 맞게 된 이유이다. 팀제관료제의 위기와 맞물려 조직들은 급변하는 환경속에서 생존을 위해 변화를 꾀하고 있다. 대대적인 조직체계의 개편에 있어서 현대사회의 주류적 개념으로 떠오른 것이 팀제이다.1. 팀제의 의미'팀'하면 우리는 스포츠 팀을 생각한다. 5명으로 구성된 농구팀에서 농구선수들을 보면 각자의 경기 위치가 모두 정해져 있고 그 위치지점에서 권한 상실을 기득권 상실로 받아들여 사기의 저하가 일어날 수 있다. 또한 간부들의 권한 상실로 조직내 위계질서나 기강의 해이가 일어날 우려도 배제할 수 없다.조직구조는 단기적으로 보면 업무와 명령계통의 과정이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구성원의 경력경로가 된다. 조직의 계층의 수를 줄인다거나 조직의 크기를 간소화한다는 것은 곧 구성원들의 경력경로를 심각하게 변화시킨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러한 변화가 구성원들에게 상당한 실망감과 위기감을 가져올 수 있는 것이다. 조직의 계층의 수를 줄이는 것은 경력이동에 있어서 수직이동의 가능성을 줄이는 것으로 이제까지 가장 중요한 경력이동이 '승진'이었던 관료조직의 문화에 큰 타격을 주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경력의 수평이동을 강조하는 새로운 의식전환이 필요하다. 즉 수직이동의 여지가 크게 줄게 되는 장래의 조직구조에서는 수평이동이 승진 못지않은 메리트와 비전으로서 구성원들에게 올바로 이해되고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안 된다.팀제의 도입과정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구성원들이 새로운 조직과 그 안에서 자신들에게 기대되는 역할을 분명히 이해하는 일이다. 이를 위해서는 인사부서나 기획실에서 팀제 실시에 따른 실무적인 지원 노력이 경주되어야 한다. 이처럼 팀제 실시에 대한 기술적인 지원없이 팀제의 장기방향은 팀장과 담당간의 자율적인 대화에 의해서 일하는 조직이라는 점만을 강조하면서 문제가 발생하면 '당신들 책임이요'라는 식의 강요만이 있다면 팀제의 정착은 요원한 일이 될 것이다.한편, 팀제의 도입이 아래로부터의 요구에 의해 이뤄지지 않고 상명하달 식으로 추진될 때에는 각 부문의 특수성을 고려하지 못하고 획일적인 팀제로 되는 경향이 농후할 것이다. 구성원들은 그들대로 자신의 기대나 특기가 반영되지 못한 채 엉뚱한 일을 맡아서 해야 되는 경우도 있어서 기대 상실감이나 자아개발 기회에 대한 무력감을 인지할 위험도 도사리게 된다.팀제를 받아들일 수 있는 자질이나 태세가 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강요되는 팀제는 조직성원들에게 단지 '인원감축형', 의 문제점팀제는 민주적인 의사결정을 바탕으로 효율적인 의사전달과 평등한 관계속에서의 업무를 장점으로 능동적인 조직운영을 할 수 있다는 장점을 지니고 있지만, 이번 행자부의 조직개편에서는 정부기관 특유의 문제점이 우려된다. 무분별한 경쟁 시스템의 도입으로 경쟁 격화로 인한 직무 스트레스와 심리적 탈진, 또 그로인한 공직의 ‘삶의 질 저하’ 문제가 나타날 것이다. 그리고 경쟁으로 인해 팀 간 의사소통이 이루어지지 않고 조직 전체의 목적 달성에 어려움에 봉착할 수도 있다. 기존에 나타날 수 있는 하위부서 이데올로기가 나타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행자부의 팀제에서 나타날 수 있는 문제점으로 하향식, 획일적 정부혁신의 폐해가 그것이다. 개혁과정에서 ‘부분적’으로 도입할 경우 생산성을 기할 수 있는 제도들을 제대로 실험하지 않고 ‘전면적’으로 적용하는 바람에 시간과 노력, 비용만 낭비하고 제도가 사장된 사례가 있다. 조직마다 고유한 문화와 역사가 있기 때문에 팀제를 포함해 각 조직에 가장 적합한 수단을 찾아 생산성 제고라는 목적을 달성해야 하지만 이번 행자부의 조직개편에서는 이 부분에 간과한 점이 없지 않다.2. KBS 조직개편1) 조직개편의 배경KBS는 관료주의적 조직의 특징인 유연성 부족, 의사결정 지연, 조직의 비대화 등 필연적 문제점을 지니고 있었다. 또한 연공서열 위주의 인사정책으로 인해 상대적으로 관리자가 늘어나는 반면에 실무진은 부족한 현상이 상존해 있었다. 조직구성원의 관심이 업무수행 자체가 아니기 때문에 양질의 프로그램이 나오기도 힘들며, 비효율성으로 인해 필요 이상의 비용과 시간이 지출되고 있었다. 또한 권위주의로 대표되는 조직의 특성으로 인해 공영방송으로서의 사회적 책무 수행과 국민의 향상된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다. 때문에 KBS는 2004년 8월 조직의 합리성을 제고하기 위한 혁신사항이자 국민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직제 개편과 팀제를 전면적으로 도입하였다.2) 기존 KBS의 관료제와 관련한 조직 내부의 문제점(1) 방만한 경영KBS는 공다.
패러디-3조.hwpⅠ. 서론지금 우리 사회는 온통 패러디 열풍이다. 정치, 뉴스, CF, 영화, 드라마 등 현실에서 이슈가 되는 것들은 모두 패러디 되고, 이것이 또 하나의 작품으로 세상에 얼굴을 내비치는 경우도 있다. 수많은 패러디가 생겨나고 유행이 되고 또 사라지고 있다. 흉내 내기, 뒤집기, 비틀기, 비꼬기, 꼬집기로 무장한 패러디는 대중들의 답답했던 가슴을 조금이나마 시원하게 해주는 청량제 역할을 하기도 한다.먼저 패러디라는 말은 다른 사람의 작품 특징이나 문체 또는 운율 등을 모방하여 우스꽝스러운 것으로 바꾸어 놓은 것으로 문학용어에서 출발하였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시인 김춘수의「꽃」을 패러디한 장정일의「라디오같이 사랑을 끄고 켤 수 있다면」이라는 시는 우리나라의 패러디 문학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볼 수 있다. 이렇게 문학에서 주로 쓰이던 것이 90년대로 들어서면서 음악, 영화, 드라마 등 문화 전반에 걸쳐 빈번하게 사용되어 왔고, 패러디의 의미는 이제 문학적 의미에서 벗어나 최초의 본질에 대한 독특한 재현이라는 광범위한 뜻을 가지게 되었다. 패러디의 범위가 이만큼 넓어진 데에는 현 사회의 패러다임의 변화와 인터넷이라는 도구의 기술적 발전과 연관이 있다.2004년 대통령 탄핵이라는 초유의 사태를 겪으면서 소수의 사람들만이 공유하던 패러디 문화가 급속히 전파되기 시작했다. 평소에 정치에 관심이 없던 사람들도 패러디물을 접하면서 관심도를 높이게 되었고 정치에 대한 의견을 개진할 수 있는 창구가 늘어나면서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데 좀 더 적극적으로 변모했다. 일반 대중들에게 정치가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대상으로 인식되기 시작한 것이다.본 논의는 이러한 패러디의 이론적 접근과 현대사회의 주류 패러디물에 대하여 알아보고, 최근 이슈화 되고 있는 정치 패러디의 논쟁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Ⅱ. 본론1. 패러디 이론1) 패러디의 기원패러디의 기원은 BC8-7세기 그리스로 소급된다. 당시 어떤 무명시인이 호머(Homer)의 유명한 서사시체를 흉내내어 만든 다양하다. 몇 가지 특성에 대해 알아보면,(1)아이러니(irony)아이러니에 대한 다양한 개념들은 ‘다르게 말하기’로 수렴된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며, 이것이기도 하고 저것이기도 한 아이러니의 이중성은, 두 텍스트 사이를 부유 하며 원텍스트를 비판하면서도 계승하는 패러디가 가진 이중성과 일맥상통한다고 말할 수 있다.(2)낯설게 하기(defamiliarization)패러디는 평범하지 않은 모순어법으로 친숙성을 거부하는 하나의 낯선 표현으로 나타 난다. 낯설게 하기는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에 의해 발전되 개념으로 쉬클로프스키는 규범화된 예술형식을 새롭게 시험하고 확인하는 소원과 같은 시적 장치가 패러디에 가 장 잘 적용된다고 보았다. 즉 원텍스트에 대한 친숙성을 거부하고 차이를 강조한 패러 디는 규범화된 예술형식을 새롭게 시험하는 낯설게 하기의 문학적 장치라고 보았다(3)대화성(dialogoism)바흐친(M.Bakhtin)은 대화성과 관련하여 두 측면에서 문학 성격이나 본질을 새롭게 정의하였다. 첫째로 문학작품은 종결된 상태가 아니라는 것이고 둘째로 작가는 작품의 구성을 통해서만 자신의 의도를 표현한다는 것이다. 이런 논의를 바탕으로 그는 패러 디는 이전에 태어난 과거의 의미들을 대화의 과정에서 새롭게 변형시키는 열려있는 문학형식이라고 보았다.(4)상호텍스트성(intertexuality)상호텍스트성이란 한 텍스트가 다른 텍스트와 맺고 있는 상호관련성이란 뜻으로 하나 의 텍스트는 독자적이고 독립적인 것이 아니라 이전에 존재했던 수많은 텍스트들과의 상호관계 위에서 이루어진다는 인식을 기반으로 한다. 패러디는 이미 존재하는 원텍스 트의 세계에 하나의 담론을 넣음으로써 차이를 통해 세계관을 드리낸다는 특징을 가지 는 것이다.4) 현대 패러디의 양상이전시대에는 전문적인 작가들이나 식자층에 의해 패러디가 주로 이루어졌으며 대상도 주로 사회현상이나 유명인사에 대한 풍자나 조소보다는 문학적 작품들에 한에서 이루어져왔다. 하지만 인터넷이 발달하고 각종 이미지나 미디어 관련 우선 인터넷에는 차별이 존재하지 않는다. 현실공간에서의 의사표현은 사회적 권력과 지위와 같은 계급적 측면의 한계를 지닌다. 자신의 위치가 낮으면 의사 개진의 영향력이 떨어지는 것이 사실이다. 지하철의 노숙자가 정부정책에 대한 의사를 표현한다 한들 그것이 어떠한 영향력이 있을 것인가. 그러나 가상공간의 커뮤니케이션은 다르다. 익명성을 전제로 한 인터넷상의 의사표현은 사회적 위치의 고하가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모두가 똑같은 출발선에 서있는 것이다. 때문에 누구의 주장이든 설득력 있는 주장은 영향력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수많은 의견과 주장들 속에서 자신의 생각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서는 자신만의 특별한 화법이 필요했고, 대중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 풍자라는 방법이 널리 쓰이게 된다. 두 번째는 이미지 조작 기술의 발달을 들 수 있다. 그림은 글의 논리력과 타당성을 따라갈 수 없지만, 정보의 전달력이 강하고 사람들의 뇌리에 강력하게 저장되는 특성이 있다.) 때문에 첫 번째 이유에서 패러디물을 창작하게 된 이들은, 각종 이미지 조작 기술을 동원해 그림 이미지를 차용하게 된다. 이것은 논리적으로 글을 쓰지 못하는 사람일지라도 자신의 생각을 쉽게 표현할 수 있고, 효과적 전달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현재 패러디물의 주류적 방식이 되었다.3) 사이버 공간의 패러디 양상사이버 공간의 패러디는 크게 두 측면으로 나뉜다. 단순히 유희를 목적으로 하는 패러디와 비판과 풍자의 패러디가 그것이다.먼저 유희를 목적으로 하는 패러디는 자기만족의 측면이 강하다. 단순히 기존에 있던 영화나 광고 이미지의 조작을 통해 즐거움을 느낀다. 이것은 오락의 한 방법으로 정보사회의 특성이라 할 수 있다. 옆의 패러디물과 같이 자신의 얼굴을 기존의 것에 합성함으로써 폭소를 자아내고 그것을 대중들에게 보여주고 함께 오락을 공유하는 것은 인터넷 공간을 공유하는 자들의 ‘노는’ 방식이다. 이러한 패러디물은 특별한 메시지가 없는 것이 특징이다. 비판과 풍자의 대상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므로 기존의 패디가 등장하는 실정이다. YTN의 ‘돌발영상’, ‘말과 말씀’이 인기를 끌고 있고, 현재 포털사이트 ‘다음’에 패러디 관련 카페만 900개가 넘고, 합성관련 카페는 400여개에 달한다. 하루 5만의 조회수를 기록하는 ‘풀빵닷컴’과 함께 ‘미디어몹’, ‘라이브이즈’ 등으로 대표되는 패러디 사이트에서는 한국의 오늘이 분초 단위로 살아 움직인다.) 소수에서 다수로, 음란성 풍자에서 정치적 풍자로의 확장을 거듭한 패러디문화는 계속해서 그 영역을 넓히고 있다.3. 정치패러디?1) 정치패러디의 시작정치패러디가 사회적으로 행하여 질 수 있었던 이유를 보면 먼저 의견 표출의 간결성과 의견의 자유로운 수용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위에서도 말 한 바와 같이 이러한 패러디는 인터넷이라는 매개체의 등장으로 인하여 나왔다고 볼 수 있다. 즉 의견 표출의 장이 만들어지면서 가능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더군다나 이러한 의견 표출의 장에서 그 사람의 현실에서의 권위에 의거하지 않은 단순한 인터넷 게시물에 의한 판단만이 일어난다는 점도 있다. 현실에서는 한 사람이 한 표현에 대한 가치의 판단을 그 사람이 현실에서 가지는 권위에 의해 판단하게 되지만 인터넷에서의 익명성으로 인하여 그 사람이 가진 의견은 단지 공감에 의해서 생기게 된다는 것이다.또한 시대적인 점도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군부독재시대에서는 이러한 정치적 견해를 표출하는 것과 정치인을 희화화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다. 하지만 김영삼의 문민정부이후 짧은 글 형식으로 그 동안의 정치에 관한 패러디를 하는 도서가 출판 되었으며, 그 이후 인터넷을 통한 여러 패러디가 나오고 있다. 이런 시대적 상황이 없었다면 패러디의 활성화가 이루어지기는 힘들었을 것이다.2) 정치패러디의 소통구조(1) 기존 패러디의 소통 구조원작패러디물패러디의 완성패러디스트독자의미부여모방인용해석의미의 수용기존 패러디의 소통구조는 먼저 원작이 있어야 가능했다. 그 원작의 의미를 패러디스트는 찾아야 했고 원작에서의 의미를 부여한 후 원작을 모방 인용하여 패러디 물을 만들제, 정치패러디의 인권침해 문제 등이 있다.먼저 정치패러디의 파급효과는 크다고 볼 수 있다. 인터넷 상에서단지 한 번의 클릭으로 인하여 불특정 다수 모두에게 패러디 물을 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게 된다. 이렇듯 사회적으로 영향력 있는 의견 표출 도구이기 때문에 정치패러디에 관한 관심이 모아지고 문제시 되고 있는 것이다.이와는 다르게 정치패러디가 문재가 되고 있는 이유가 있다. 첫 번째로 정치패러디가 올바른 풍자와 비판을 하지 못하는 경우이다. 패러디의 기본에는 이 두 가지 정신이 있지만 이러한 기본 정신을 상실하고 단지 정치인의 인격을 모독하고 비판이 아닌 비방에만 심혈을 기울인 정치패러디는 문제가 있다. 또한 실재로도 상당히 저급한 패러디 물이 인터넷에 많이 있다는 점도 이러한 문제가 재기된 이유이다. 단순한 인물에 관한 희화화는 배재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이러한 저급한 패러디 물을 정치용으로 악용하는 경우에 더 큰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얼마 전 문제가 되었던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의 패러디 물은 그 질적인 측면에서 이슈가 될 수 없었지만 청와대 홈페이지 전면에 배치되어 있어서 이슈가 되었다. 이처럼 각 정당의 정치적 목적에서 패러디를 악용하기 때문에 문제가 되고 있다.이와 관련하여 가장 쟁점이 되고 있는 표현의 자유와 인격권에 관하여 세부주제로 설정하고 좀 더 심화하여 살펴보기로 한다.5) 표현의 자유와 인격권의 대립표현의 자유와 인격권은 대립 할 수밖에 없다. 특히 정치패러디에서의 표현은 그 대상에 대한 비판과 풍자를 하게 때문에 대상의 인격권에 대한 문제의 소지는 언제나 있다고 할 수 있겠다. 또한 헌법에서 두 가지 모두와 관련하여 조항이 있다. 헌법 제 21조 에서는 언론, 출판, 등의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고, 하지만 동조 4항에서 타인의 명예나 권리 등을 침해하지 못하게 규정하였다. 그렇다면 표현의 자유와 인격권에 대한 입장을 살펴보도록 하자.(1) 표현의 자유 측 입장표현의 자유란 민주주의의 필수적 요건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먼저 민주주의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