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序論한국의 역사에서 고대사회의 시대적 기준을 파악할 때, 고조선의 탄생과 남•북국 시대 이전, 즉 7C 이전의 삼국시대를 가리켜 고대사회로 파악하고 있다. 사회적으로 보면 중앙집권국가가 胎動하던 시기였으며, 무수한 주변국가들이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으로 개편되던 시기였다. 따라서 기존의 소국공동체에서 발전된 국가 체제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왕이 대내외적으로 힘을 보여주어야 하는 시기였던 것이다. 그러하기 때문에 왕권과 체제지속을 위한 정치체제의 발달과, 대외적 통치영역의 확장과 유지에 필요한 군사력이 당연히 요구될 수 밖에 없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우리는 고대국가의 발전을 연구함에 있어서 두 가지를 간과하고 넘어갈 수가 없다.이 책은 이러한 군사와 정치, 두 가지 요소를 중심으로 고대사회의 발전과정을 관련 사료의 비교 분석을 통해서 사회사적 관점에서 설명 하려 하고 있다. 크게 네 부분으로 나누어 질 수 있는데, 첫째로 田獵과 閱兵을 통한 삼국의 군사통치행위, 두 번째로 戰爭遂行에서의 機能 비교, 셋째로 巡守로 대표되는 領域統制 管理에 관한 통치행위, 마지막으로 新羅 政治體制의 분석을 통한 고대사회의 발전모습을 그리고 있다. 본론에서도 이와 같이 네 부분으로 나누어 내용을 고찰해 보고, 서로 다른 고구려•백제•신라 삼국의 체제비교를 겸해 보도록 하겠다.- 本論○1 田獵과 閱兵시작에 앞서, 우리는 田獵과 閱兵의 사전적 의미에 대해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田獵은 단순한 사냥의 의미이나, 여기서는 왕이 직접 신하들을 이끌고 사냥을 행하는 것을 말한다. 또한 閱兵은 국가 원수나 지휘관이 병력을 정렬시켜 검열하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 두 개의 행위는 삼국에서 동일하게 일어나지는 않았다는 점에서 그 차이를 갖고 있다.먼저 고구려에서는 다른 두 나라와 다르게 사료상으로는 田獵만 실시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는 먼저 고구려의 자연지리적 특수성과 관련이 깊다. 이 책에서는 기본적으로 산이 많고, 비옥한 농토가 부족했던 고구려의 특성상 초기 국가 시절 고 볼 수가 있다. 따라서 수렵경제사회 중심인 고구려에서 활 쏘는 능력은 다른 어떤 능력보다 중요하고 가치를 인정받으며, 이는 田獵이 단순한 여흥 이상의 의미가 있다는 것을 이 내용에서도 생각해 볼 수 있다.그러나 특이한 점은 田獵이 왕권의 대내적인 과시용으로서의 사냥에 그치지 않은 점이다. 단순히 최고통치자가 갖추어야 할 기본덕목 표현을 넘어서, 군사 훈련의 일환으로 사용된 점도 찾아볼 수 있다. 백제나 신라의 사료에서 볼 수 있는 閱兵이 나타나지 않는 점과 실시된 田獵의 규모 서술을 보면 단순한 수렵행위가 아니라 실질적인 군사훈련이라는 추론을 가능케 한다. 전시기에 걸쳐진 田獵은 타 국가에서 보여지는 閱兵의 훈련 효과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백제는 田獵의 비중이 고구려보다는 적지만, 매우 유사한 내용으로 진행되고 있다. 이는 백제의 건국 주체세력이 부여-고구려계인 점으로도 어느 정도 유추가 가능하다. 하지만 건국 초기의 田獵 행태는 고구려처럼 군사훈련도 병행하지만 이후로는 성격이 점점 바뀌어 갔다. 수렵사회의 고구려는 사냥 자체가 훈련이지만, 농경사회의 백제는 그렇지 않기 때문에 훈련보다는 사격술의 향상 쪽으로 방향이 맞춰졌다. 그러나 사료를 파악해 보면 열병의 기본적인 목적인 왕권 순수의 목적은 변함이 없다.이후에 지배체제가 어느 정도 확립된 이후에는 초기의 각 部의 독자적인 군사력을 하나로 수렴하기 위해 閱兵이 실시된 것도 차이점이다. 閱兵이 실시된 시기를 살펴보면 주로 농번기가 지난 농한기에 주로 실시되는 점을 볼 수 있다. 이는 농경사회에서 생산에 해가 되는 시기를 피하고, 국가적 차원의 이익 향상이라는 대의적 목적에 합당하다. 따라서, 閱兵을 통한 군사 훈련은 당연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閱兵을 통해서 군사통수권을 확립하였지만, 완전히 閱兵만 이루어 진 것이 아니라 田獵도 병행해서 군사적 기틀을 다듬어 간 것에 고구려와 차이점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볼 때, 백제의 田獵과 閱兵은 왕권의 강화와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고, 군行과 機能위에서 분석한 것과 같은 군사통치 수단으로 인한 각국의 방식을 비교해 보았는데, 이는 바로 각국의 戰爭 성향과도 관련이 있다. 정치적, 사회적 목적을 고려해서 실시된 田獵과 閱兵의 성향이 그대로 반영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저자는 전쟁의 유형과 시기, 발전단계를 분석하여 전쟁이 가지고 있는 기능에 대해 사료를 통한 고증을 시도하고 있다.고구려는 공격전쟁의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다. 半農反獵의 사회경제적 조건에서 기인하는 낮은 생산력을 보완한다는 측면과, 다른 두 나라 보다 일찍부터 국가형성이 빨랐기 때문이기도 하다. 첫째로 생산력의 보완 측면에서 본다면 농경사회인 백제와 신라의 추수물을 빼앗는 측면의 秋季와 冬季의 전쟁빈도 수가 높다. 이는 전쟁 유형을 狩獵社會型 으로 설명할 수 있다. 시기적으로 보면, 초기에는 주변국의 정벌과 중국세력의 방어에 치중했다면 국가 발전기인 신대왕 이후와 완성기인 소수림왕 이후에는 영토확장에 주력함과 동시에 대규모적인 군사 동원능력이 향상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주변국가의 복속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의 초기 전쟁 양상 이후에, 영토 확장의 성공과 정치적 능력의 향상으로 왕권의 전제화를 나타낸다 볼 수 있다.백제는 공격과 방어 전쟁이 비슷하게 보여지고 있는데, 신라에게는 매우 공격적인 모습을 보이나, 기타 다른 국가들에게는 방어 위주의 전쟁 양상이 많이 보이고 있다. 고구려와 신라의 특징인 田獵과 閱兵을 모두 행하는 만큼 초기에는 고구려와 비슷한 전쟁 양태를 보이다가 국가의 틀이 잡히고 난 뒤에는 농번기에 공격을 하지 않고 방어 위주의 모습을 보이는 것도 찾을 수 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러한 경향은 계속 지속 되었는데, 국가완성단계인 근초고왕 시절에는 고구려와 비슷하게 영토 확장을 위한 정복 전쟁의 양상도 강하게 띠었다.신라의 전쟁 수행의 유형은 역시 농경사회형, 여기서 추측할 수 있듯이 방어위주의 전쟁을 많이 하였다. 국가 형성이 다른 두 나라 보다 늦었기 때문에 주변 소국들의 병합목적인 전쟁 이외에는 기타장의 요충에 해당되는 곳이기 때문에 왕이 직접 이곳에 가서 중앙에서 수행하던 통치를 그대로 계속하였다. 또한 전략거점의 특수성으로 인하여 田獵의 실시를 통해 군사훈련은 물론 전략 요충지의 군사 통수권을 부단히 확인하는 작업이 계속되었다 . 특히 『中原高句麗碑』,『廣開土大王陵碑』의 설치 위치는 각각 남부와 서북방면의 전략거점이고, 더하여 장기간의 巡守기간은 정치적 비중을 반영하는 것이다. 또한 정복에 따른 점령지의 관리와 통제라는 원래의 목적에 더하여, 狩獵經濟에 기초한 기존의 체제에서 농경으로 전환하던 시기의 급증하는 노동력의 수요로 인한 노동력 창출을 위해서 변경지방민의 예속화는 巡守에 경제적 목적을 더해주었다.사료를 통해 고구려가 국가 완성단계에서 巡守가 많이 보였다면, 백제는 巡撫를 통해 국가 형성기에 많이 실시가 되었다. 이 당시는 자연재해 등과 같은 일을 당한 농민들의 유민화를 예방하는 위로의 성격이 강했다. 그러나 이후의 왕의 巡撫는 지속적이지 못하고 형식적으로 변질된다. 결국 고구려와 같은 광대한 영토발전을 이루지도 못했으며, 신라와 같은 방어전 이후에 철저한 인민관리도 실시하지 않았기 때문에 고구려왕과 신라왕의 통치관행이던 巡守, 巡幸이 나타날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신라는 빈번한 巡幸과 巡守를 통해서 영역관리와 통제를 지속해 나갔다. 초기부터 농업경제사회를 지향한 만큼 농업의 중요성을 깨닫고 생산력의 증대를 독려하는 측면이 강했다. 또한 농민의 이탈을 막고 전략 거점의 통제의 목적도 있었다. 방어적 목적의 전쟁을 지속한 신라는 이러한 목적이 영토 내에서 지속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이 점은 후기까지 이어져 『眞興王巡狩碑』는 인민과 토지의 획득에 목적을 두었던 통치영역의 발전에서 총화적 귀결이며, 전제왕권의 출현으로 발로된 영토의식의 기념비적 표출이었다.○4 新羅 政治體制의 분석고대사회의 시기적인 신라의 정치체계는 지증왕 이전의 上古期와 법흥왕 이후의 中古期로 나눌 수 있다. 이 같은 두 시기의 관등체계의 가장 큰 차이점이라면 귀족중심의 고대국가 체의 세력이 커지면서 자신들의 권익 보호를 위해 諸干會議의 성립이 이루어졌으며, 의장으로 이벌찬을 선두로 한 17관등제가 성립된 것이다.그러나 이러한 권력구조는 표면적으로는 왕과 귀족회의간의 이원성을 보이고 있지만, 실제에서는 귀족세력의 의사가 관철되고 있었으므로 귀족평의체제로 규정하였다. 이 체제 속에서 관등의 임명과 국정 내사는 왕 보다는 귀족 중심의 회의에서 결정되었고, 친족적인 성격을 띠면서 모든 군국정사를 총괄하는 율령적 성격이 아닌 계서적 등급의 성격이 강했다. 다시 말해, 직책을 맡고 있기 보다는 무임소 상태에서 직무를 부여 받아 국무에 종사하는 성격이었다.이에 반하여 中古期로 들어오게 되면 이와 같은 관등의 성격이 변화하기 시작한다. 대외적으로는 적극적인 정복전쟁의 결과로 영역적 기반이 확충 되었고, 귀족중심의 정치 권력이 행정관부의 단위로 분산되기 시작했다. 또한 귀족평의회의 의장인 이벌찬에게 집중되었던 권력이 군정, 국정, 재정의 권한이 분산되면서 상대적으로 왕권이 강화되는 효과를 얻게 되었다. 또한 이러한 세력 분화로 인해서 진평왕에 이르러 과거 귀족 체계로의 회귀를 원하는 구 귀족세력과 이와 반대로 새롭게 정권을 구축하고 중앙집권적 귀족관료체제의 성립을 바라던 신 귀족세력의 대립이 발생하게 된다. 이러한 신 귀족세력은 기존의 구 귀족세력의 압박과 대외적인 백제의 군사적 압박을 이겨내고 새로운 개념으로 발전된 국가체제, 즉 『중앙집권적 귀족관료체제』의 탄생을 알리게 되는 것이다.- 結論역사 속의 사실을 통해 현재를 되돌아 보고, 현 사회의 모순점을 진단하여 해결방안을 모색하며, 앞으로의 미래를 대비할 수 있는 지혜를 탐구하는 것이 역사학의 가장 큰 매력이라고 생각한다. 『韓國古代社會의 軍事와 政治』는 한국고대사회의 발전 과정을 군사적인 측면의 일련의 행동과 전쟁의 양상, 정치적인 일련의 행위를 통한 상호작용으로 중앙집권체제로 발전해 나가는 과정을 사료 분석과 추론을 통해 일관된 주장으로 펴나가고 있다.특징적인 점을 꼽자면 주제에 벗어남이 없이
2005312690 인문과학계열 이덕규을 읽고 - 우리나라와 인도의 역사 관점 비교처음 이 책을 받아든 순간, 나는 ‘세계사는 고등학교때 수없이 배웠던 것 아닌가?’ 라고 생각을 했었다. 때문에 책을 읽을때도 예전의 세계사 수업을 떠올리면서 책을 읽어나갔다. 그러나 책을 읽을수록, 처음에 책을 폈을때 들었던 생각은 어느새 ‘내가 알고 있던 세계사는 대체 무엇인가?’ 라는 의문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마지막 장을 읽었을 때, ‘내가 진리라고 믿고 있던 지식이 보는 사람의 관점에 따라서 이렇게 변할 수 있구나’ 하는 탄식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덕분에 책을 읽는 내내 흥미진진할 수 있었다.이 책의 저자인 네루는 인도의 대표적인 정치가이자, 독립운동가로서 유명한 간디를 인도의 비폭력의 상징으로 만든 실질적인 인물이다. 그는 자신의 어린 딸 인디라 간디(훗날 인도의 총리가 된다.)에게 감옥에서 역사 교육을 시키기 위해 여러 장의 편지를 보낸다. 이 편지들이 하나로 엮여져 만들어진 책이 바로 ‘세계사 편력’이다. 물론 이 책의 내용은 감옥에서의 빈약한 자료와 힘든 수감 생활때문에 다른 역사서처럼 체계적이고 완성도가 높지 않으나, 그의 독특한 역사적 시각과 민족 독립에 대한 열망은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특히 그의 역사적 관점은 매우 놀라운 몇가지 점이 있다.가장 놀라운 점은 그의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이 우리가 알고 있는 기존의 역사서와 관점이 정반대라는 것이다. 기존의 역사서가 승리자 중심의 역사, 즉 지배 계급의 초점에 맞춘 역사적 서술이라면, 네루의 역사적 서술의 관점은 이들의 서술을 단순히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의 역사를 비판하고, 그 밑바탕속에 있는 민중의 역사를 더욱 중요시 여겼다. 우리가 알고 있던 역사를 만든 정복자(또는 가진자)들이 그 자신의 역사를 만들기 위해서 치른 ‘민중의 희생’을 더욱 고귀하고 가치있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가장 말하고 싶은 핵심도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민중에 의한 역사.’ 말이다.우리와 인도는 지리학적 위치도, 사는 환경도 매우 다르지만 동시대를 걸어온 역사의 궤적은 비슷한 점이 많다. 특히 현대사에서 오랫동안 타국의 압제를 받아온 점(인도-영국, 한국-일본)이 매우 닮았다. 때문에 내겐 이 편지을 주고 받을 당시의 네루와 인도의 상황은 일본의 압제와 맞서 싸우는 독립투사의 열망과 동일시 되었다. 서구 열강에게 또는 그들의 기술을 먼저 받아들였다는 이유만으로 한 나라가 무자비하게 침략을 당해야 하는지, 네루는 모든 민족의 자주성과 평등성을 강조하면서 이러한 민족우월주의나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오히려 편지의 부분마다 동양의 문화가 유럽에게 얼마나 많은 영향을 끼쳤는지에 대해 서술하면서 자주적인 시각을 피력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어떠한가? 오히려 일제의 압제를 받았던 몇 년보다 중국이라는 거대한 나라에 모든 것이 예속된 기간은 수천년 이다. 삼국시대부터 조선왕조 말기까지 우리의 역사는 뿌리 깊은 중화사상을 벗어나지 못했고, 이러한 문화적 배경이 자주적인 시각의 역사를 탄생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일연의 삼국유사나 유득공의 발해고, 안정복의 동사강목같은 책은 자주적인 시각을 지닌 진정 우리 손으로 쓴 역사라 말할 수 있다. 이 역사책들은 중국속의 우리의 역사가 아닌, 한민족이 반만년동안 활약한 모습을 우리의 시각으로 담아내고 있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두 번째로 비교할 점은 세계사를 바라보는 시각이다. 네루는 딸에게 ‘네가 다른나라의 역사를 이해하지 못하면 어느 나라의 역사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나는 네가 한 두 나라에 국한되는 답답한 역사를 배우지 말고 전세계의 역사를 연구하라고 권하고 싶다.’ 라고 이야기 했다. 국사책에 나오는 연대기나 외우는 역사가 아닌 전세계를 포괄적으로 바라보고 전체를 꿰뚫는 사고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그 자신이 직접 서술한 역사에서 이를 보여주고 있다. 또한 세계가 다변화 되고 있고, 세계의 헤게모니 중심축인 미국이 중국, 러시아, 인도, 브라질 등의 거센 도전을 받고 있는 지금, 더 이상 편협한 서구중심 사고관으로는 살아갈 수 없다는 현재의 의의도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까지도 이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 지리적으로 반도국가이기 때문에 고립되있는 영향도 있지만, 이데올로기의 대립으로 인한 일방적인 사고방식에도 문제가 있다. 지구상 유일한 분단국가로서, 다양한 의견을 개진하기 어렵고, 미국 중심의 사고방식에서 자유롭지 못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