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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금과 문명 을 읽고
    소금과 문명Ⅰ. 서론이 책은 선사시대부터 근대까지 소금의 사회사를 연대순으로 추적하여, 그 당시 소금의 역할과 가치와 그에 따른 사회적 파장에 대해 서술한 책이다. 나는 여기서 시대별 소금에 대해 서술하고, 중국 한나라의 소금과 문명에 대해 자세히 논하고자 한다.Ⅱ. 본론원시시대의 유럽 소금 산지에 거주지가 생성되곤 했다. 이 시대 생산에서는 세 가지 두드러진 것이 있다. 첫째, 소금은 꽤 여러 지역에서 생산되었다는 점과 이런 지역들의 대부분이 생산 규모는 작고 기껏해야 지역적인 중요성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소금 생산에 동원된 독특한 생산 방식이었다. 일반적으로 소금 생산지의 사금파리 가루나 재를 이용해 소금물을 인위적으로 증발시켰으나, 때로 이 과정에서 도기 안에 소금기가 있는 흙이나 모래 또는 재를 넣고 장작으로 데워 강화시키기도 했다. 이 기술은 독특한 브리크타주를 낳았다.이 시대 주요 생산지에서 생산된 소금의 양은 그리 많지 않았기에 다른 지역의 시장에 공급할 만큼 충분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분배가 절대로 일어나지 않았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분배는 크게 두 개의 주요 교역망을 타라 이루어졌다. 첫째는 할레, 할슈타트, 할라인, 슈바벤 할을 한 종점으로 하고 모르비앙을 다른 종점으로 하는 동서 교역망과 콜체스터를 한 종점으로 하고 비크, 몽켄비크, 마르샬을 또 다른 종점으로 하는 남북 교역망이다. 이러한 교역망을 통하여 소금은 각 유럽으로 퍼져나갔다.소금의 소비는 당연히 활발하였을 것이다. 인간의 몸을 구성하는데 꼭 필요한 소금이 소비물품에서 빠지지 않는 품목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 당시 소금은 그저 생리적인 것을 충당하기 위해 소비한 것은 아니었다. 소금은 귀족들에게 하나의 사치품이었다.고대시대의 사람들은 새로운 기술에 의해서가 아니라 옛것을 더 잘 관리함으로써 원시인들보다 더 나은 수준의 생활을 즐겼다. 아테네의 현자들은 기술보다 더 나은 것을 약속했고, 이들은 무관의 제왕이었다.새로운 고전 세계는 사회 안에서의 소금의 역할을 바꾸어 놓았다. 생활수준이 높아짐에 따라 소금의 생산과 분배, 소비가 커졌다. 생산면에서 기술은 그다지 발전한 것은 없었지만, 서기 500년경 문명화된 시민들의 소금 소비가 커짐에 따라 바다 개발이 늘어났다는 점이다. 분배면에서 수로는 육로보다 비중이 커졌지만 이로 인한 경제적 효과는 사회적 효과에 묻혀 버렸고, 자본주의적인 요소도 별반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나 소비면에서 보면 소금은 더 이상 사치품이 아니었다. 소금은 이제 문명화된 삶의 척도였다. 문명화된 삶 자체는 특권이었고, 소금은 주로 이러한 삶을 영위하는 사람들이 먹는 요리인 생선과 관련되었다.이슬람 지역의 소금은 풍부하긴 했으나, 질적으로 낮았다. 사막이 많았고 수분이 빨리 증발되었으므로 소금은 천연 염호, 암염돔, 암염, 염전, 초원에서 두루 공급되었다. 이란에서는 소금을 사람이 생산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자연적인 현상으로 여겨 달가워하지 않았다. 아랍 사람들의 생각도 마찬가지였다. 이라크는 소규모의 생산지 여러 곳에서 소금을 공급받았는데 대개는 생산 방법이 조악했다.또한 소금은 은총의 표징이기도 했다.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마가복음 9: 50),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고루게 함같이 하라."(골로새서 4:6) 기독교 공동체 자체가 소금에 비유되기도 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마태복음 5:13) 이렇게 소금은 평범하면서도 성스러움이라는 완전한 이미지를 동시에 갖고 있었다.인도에서는 많은 양의 소금이 생산되었을 것이다. 옛 기록에는 "인도의 오로메누스처럼 소금산들이 있다. 이곳 채염장에서는 돌덩이를 떼어내듯 소금을 떼어내는데 아무리 떼어내도 소금이 다시 돋아난다. 토호에게는 소금이 금이나 진주보다 더 큰 수입원이다."라고 서술하고 있다. 많은 소금이 생산되는 곳이었다 해도, 인도는 채식주의를 고수한 나라로 소금 소비를 제한되었다. 소금 소비가 제한된 또 다른 이유가 조미료였다. 인도인들은 콜럼버스 이전 시대의 아메리카인들 보다 먼저 뜨거운 음식을 즐겨먹었고, 꿀의 대체 음식인 설탕을 이용했다. 따라서 고대 인도의 소금 소비 수준은 중동이나 지중해보다 낮았다.한나라의 전성기인 기원전 100년부터 기원후 100년까지 중국에서 소금은 네 지역에서 생산되었다. 제나라가 있었던 지금의 산동 지방과 현재 하북성에 해당하는 발해 만 연안, 옛날 춘추전국 시대에 오나라가 있었던 양자강 하류의 강소성, 산서성에 있는 안읍현 염호를 비롯한 북서 지방의 염호들, 삼국시대에 촉나라가 있었던 사천성 서부의 염정 등이다.소금 생산방식으로 여러 가지를 사용하였지만 그 중에서도 염정 지역에서 먼저 우물을 파서 끌어올린 후 소금물을 철판 위에서 끊이는데 때로는 연료로 천연 가스를 사용하기도 했다. 중국의 소금 산업은 철기나 우물, 천연 가스를 이용하지 못했던 서양의 소금 산업보다 기술적으로 훨씬 혁신적이었다.정치적으로도 소금은 아주 유용하게 쓰였다. 소금산업은 나라제정을 부국하게 할 수 있었다. 혼란의 시대에 소금생산지역을 끼고 있는 나라는 소금이라는 재화를 통하여 전쟁 물자를 조달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보면 소금은 한낱 음식에 들어가는 조미료로만이 아니라 정치와 경제의 한 중간에 있었음은 과언이 아니다.4세기 동안의 분열의 시기를 접고 당나라에 의해 통일되고 많은 변화를 가져 왔다. 소금에 있어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 당시 중국에서 이룩한 가장 중요한 발전은 다단계 천일 제염법이다. 이는 집수, 농축, 압축과 결정화를 위한 여러 개의 염지를 이용해 소금을 만드는 방식이다. 이 염지들은 지세, 사용하는 소금물의 농도, 날씨와 원하는 소금의 순도에 따라 수와 길이가 다양했다. 이 기술에는 자본을 많이 투자해야했고, 과학적 지식도 필요했다. 그러나 이 방법을 이용하면 순도가 높은 소금을 얻을 수 있었으며, 결정이 고운 소금을 얻을 수 있었다.당 시대에 건설된 대운하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육로를 통하여 많은 양의 소금을 운송하였다.이 시기 소금의 소비가 증대되었는데, 한나라와 당나라를 거치면서 중국 농업에 혁명이 일어났다는 점이다. 가축의 규모가 두 배로 늘어났고, 이에 고기의 구입 범위가 크게 늘어났다. 고기의 소비가 늘어나자 후추, 산초의 소비가 함께 늘어났으며, 소금도 함께 늘어났다. 소금 소비의 증대의 한 목을 한 것이 불교의 영향이다. 불교는 채식주의를 들어 소금의 소비를 금했다. 그러나 당나라 시대의 불교는 부유한 자들의 종교였고, 그 영적인 권위는 사치와 소비로 이어졌다. 채식주의가 세련되어지면서 절인 야채 사용이 늘어낫고, 절임 재료로 소금과 식초가 주로 사용되었다.서유럽에 암흑시대에 으르면 소금은 장거기로 운송되기 시작했다. 인접한 곳의 여러 지역에서 소금을 공급받았으며, 바이킹들이 지중해 제국들이 등한시했던 유럽 주변의 바다를 최초로 개척하면서 소금은 여러 해로를 통해 운반된다. 암흑시대의 서유럽은 정적인 사회는 아니었다. 소금의 소비와 분배가 활발하게 이루어졌고, 로마, 랑그도크, 루아르 강 어귀에서 생산된 소금은 자국에서 소비되거나 외부 세계와 거래되었고, 다단계 천일 제염법을 도입함으로써 혜택을 보았다.중세 시대는 소금의 역사에서 무척이나 중요한 시기였다. 1000년부터 1500년까지 세계의 소금 교역은 두가지 형태도 정의할 수 있는데 이 특징은 산업주의 시대가 도래 할 때 까지 지속된다.첫째로 유라시아 대륙의 양쪽 끝단인 중국과 서유럽과 인도, 이슬람, 비잔틴 제국 사이에 차이가 나타난다. 중국과 서유럽이 주도권을 잡아 생산 기술, 분재 제도, 판로에서 큰 발전을 이룩한다. 반면 인도, 이슬람, 비잔틴 제국인 침체기를 벗어나지 못한다. 인도는 북쪽의 무슬림 사회와 남쪽의 힌두 사회로 불열하여 만신창이가 된다. 이슬람은 목재가 부족해 연료 공급에 애를 먹었고, 몽골 제국의 침입과 흑사병의 창궐로 초기에 개발한 많은 염전을 잃는다. 비잔틴 제국은 무기력한 도시 국가로 전락하고 공급지로 흑해와 에게 해를 넘볼 여력도 없었다.둘째로 중국의 통일 관료 제국과 종교와 상업을 겸한 서유럽의 다원적인 공화국 사이에의 차이점을 낳았다, 이 양쪽 세계는 규모, 기술, 제도, 수요면에서 모두 역동성이 있었다. 그러나 두 역동성에는 차이가 존재하였다. 중국의 경우 제도적인 것으로, 국가와 사적 분배가 분권적으로 결합한 제도가 정교화 된다. 서유럽의 경우 제도적인 것과 기술적인 것을 포괄한다. 강력한 도시 분배망은 찬층 정교하게 정비되고, 중세의 에너지 혁명과 더불어 다단계 천일 제염법이 채택된다. 뒤이어 태양 에너지를 이용하게 되자 서유럽은 지역적으로 특화되었다. 이 둘의 차이는 근본적인 환경이 말해준다. 유럽에서는 영주와 도시 국가의 주된 관심사엿던 소금이 사회의 일부로 기술과 경제를 자극했다. 중국에서는 기술자와 사업가들의 관심사였던 소금이 국가의 일부로 문화와 정치를 자극했던 것이다.다른 것들과 마찬가지로 소금도 1500년부터 1800년까지 전통으로의 회귀와 근대로의 진행이라는 두 가지 방향을 취하게 되었다. 이는 공존의 시대가 열렸음을 의미한다. 한편으로 전근대 시대에는 전체적인 생태 환경이 발전되어 고대보다 정교해지고 세련되어졌으며, 성숙한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바야흐로 마지막 절정에 도달한 것이다. 또 한편으로는 다른 종류의 열매를 수확할 수 있도록 해 줄 새로운 생태 환경의 싹이 나타났다. 생산면에서는 통제된 천일 제염법이 이제는 고대 제국으로 확대되었고 신생 국가들도 석탄과 천연 가스를 이용하여 소금을 생산하게 되었다. 분배면에서는 여전히 주도권을 쥐고 있는 상선이 새로운 항해 기술을 개발했다. 소금을 실은 상선들은 이제 바다, 겅, 운하는 말할 것도 없고 대양도 정기적으로 운항했다. 소비면에서는 여전히 입맛이 가장 중요한 요소이기 했어도 식사 양식이 변했고, 이제 막 눈을 뜨기 시작한 공업화학으로 인해 새 시장이 문을 열게 되었다.
    독후감/창작| 2008.10.14| 4페이지| 1,000원| 조회(3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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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상의 '날개'와 '12월 12일'
    - 이상의 『날개』-1. 작가소개이상은 한국 근대문학사가 낳은 위대한 시인이자 작가이다. 그는 스스로를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라 불렀거니와, '폭풍이 눈앞에 온 경우에도 얼굴빛이 변해지지 않는 그런 얼굴'을 지닌 사람만이 사는 세계의 주민이 되고자 문을 두드린 최초의 한국인이었다. 문학을 통해서 인간 고통의 근원을 끊임없이 발견하려 했던 이상한 천재 작가, 그가 바로 이상이었다.)그는 190년 강릉 김씨 깅영창과 박세창 사이의 장남으로 음력 8월 20일에 출생한다. 본명은 김해경이고 호적에 적혀 있는 출생지는 경성부 북부 순화방 반정동이다. 부친은 구한국 궁내부 활판소에서 일하던 중 손가락을 세 개가 잘린 후, 이발소 등을 경영했으며, 모친은 고아 출신이다.이상이 2살이 되던해에 그의 백부 김연필의 집으로 양자로 들어가게 된다. 백부는 구한말 기사였으며 총독부에서 기술자로 근무하기도 했는데, 이는 이상이 경성고공으로 진학하거나 총독부 기사로 일하게 되는 데에 큰 영향을 준 듯하다. 그가 4살이 되던 1914년 백부가 중국에서 김영숙이라는 아이 딸린 새 백모를 데리고 와 원래의 백모가 가출한다.1926년 경성고등공업학교 건축과에 입학한다. 그는 건축과에 들어가는데 유일한 한국인 학생으로 3년 동안 석차 1위를 놓치지 않았다고 한다. 학교를 졸업하고 1929년 4월부터 조선총독부 내무국 건축과 기수로 근무하기 시작한다. 총독부 건축과 기관지인『소선과 건축』표지 도안 현상모집에 1등과 3등으로 당선된다. 1930년 처녀작인 장편「12월 12일」을 연재하고, 1931년「이상한 가역반응」이라는 시로 문단에 데뷔한다. 그해「휴업과 사전」,「3차각 설계도」등을 함께 발표한다. 1933년부터 폐가 악화되기 시작했고, 1934년에는 김기림, 정지용, 박태원 등과 교유하면서, 에 그 유명한 시「오감도」를 연재하다가, 빗발치는 독자들의 항의로 중단하기도 한다. 1936년「지주회시」,「날개」 발표하고, 변동림이란 여인과 결혼 한다. 건강 악화와 사업 실패로 은둔생활을 하던 이상은장 예각적이고 실험적으로 드러낸 작가에 속한다. 그의 문학이 기본적으로 그로테스크한 왜곡의 상태와 불안 의식, 세계 파국의 공포, 의식 체계와 형태의 파괴, 숫자의 뒤틀림과 유희, 그리고 자기 분열과 자의식의 과잉 등의 비합리적 세계로 일관되고 있는 것은 그런 까닭인 지도 모른다. 그것은 기존 문학 형태를 파괴하고 해체시킨 뒤에 전혀 새로운 의식과 언어, 스타일로 구축된, 그야말로 '이상한 가역반응'의 세계라고 말할 수 있겠다. 이상 문학은 한국 문학에서 새로운 세계 인식과 해석을 확인시켜 줌과 동시에 새로운 문학의 가능성을 보여준 대표적 사례다.2. 줄거리지식 청년인 그는 놀거나 밤낮없이 잠을 자면서 아내에게 사육(飼育)된다. 그는 몸이 건강하지 못하고 자의식이 강하며 현실 감각이 없다. 오직 한번 아내를 차지해 본 이외에는 단 한번도 아내의 남편이었던 적이 없다.아내가 외출하고 난 뒤에 아내의 방에 가서 화장품 냄새를 맡거나 돋보기로 화장지를 태우면서 아내에 대한 욕구를 대신한다. 그의 아내에게는 내객이 온다. 아내의 방에서 내객과 무슨 이야기가 오가는지 알지는 못하지만 내각이 돌아가면서 아내에게 돈을 준다는 것을 알고, 그 이유를 알지 못했기에 그에 대해 연구를 한다. 그리고 아내는 내객을 보내고 그에게도 돈 몇 푼을 준다. 돈을 쓸 일이 없던 그는 돈을 모은다. 아내는 그것을 보고 저금통을 사준다. 그저 모으기만 한 돈이 꽤 되었다. 그에겐 쓸모도 없는 그 돈들을 누군가에게 주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정말 오랜만의 외출을 감행하고 돌아온 후 심한 감기가 들고, 아내는 자신의 매춘 행위에 거추장스러운 그를 볕 안 드는 방에서 나오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는지는 알지 못하지만 최면제를 먹인다. 그 약이 감기약 아스피린인 줄 알고 지내던 그는 어느 날 그것이 최면제 '아달린'이라는 것을 알고 산으로 올라가 아내를 연구한다.어쩌면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갔을지도 모를 최면제를 한꺼번에 여섯 알이나 먹고 일주야를 자고 깨어나서, 아내를 의심한 것에 대해 미안한 감정등장한다.먼저 주인공 그에 대해 말하자면, 그는 무기력하게 살아가는 인물이다. 하는 일 없이 집에서 아내가 해주는 밥이나 먹고 낮잠을 자고, 아내가 외출하면 아내의 방에 건너가 그의 화장품이나 물건들을 몰래 만지는 것이 다이다. 정말 무기력하고 나태한 사람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그가 하는 일 없이 집에만 머무르게 된 이유 중 이면 어딘가에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점이 들었다. 이야기를 전개하는 그의 말들은 영어나 어려운 한자어들이 혼용되어 쓰이고 있다. 그리고 못 배운 사람이라 하기엔 그의 어투와 어휘는 사뭇 교양적이고 학문적 지식이 높아 보인다. 이것은 능력이 없기 때문에 일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란 말이다.이 소설의 서두에 이렇게 적고 있다.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를 아시오?”에서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가 곧 주인공 그를 말하는 것이 아닐까한다. 표본실에 개구리나 나비처럼 삐쩍 말라 표본이 되어 움직일 수도 없게 고정되어 먼지만 쌓이는 그런 존재가 된 것이다. 내면에 무언가가 봉인되어 허물만 남아버린 모습과 같다. 이 박제된 천재는 그를 말하기도 하지만 이상 자신을 가리키기도 하는 것일 수 도 있다. 일제 통치시기에 그의 짧은 여생을 보냈고, 집필하였다. 이상은 살던 그 시절에는 학교교육을 받는 다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이었다. 학교를 다닌다는 것은 아주 엘리트계층만이 꿈꿀 수 있던 것들이었다. 이상은 경성고등공업학교를 나오는데 이는 지금의 대학교와 같은 것으로 이상 또한 엘리트층이라 말할 수 있다. 그런 그가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라면 일제 식민지로 전락한 대한제국에서 생각이 있는 지식인들은 일제의 부당한 통치에 반발하면서도 살아남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일제의 양이 되어 그들의 양심을 팔았다. 이 당시 친일을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살기위해서 그저 먹고 살기위해 관직에 나가는 것 자체가 친일행각이 되었다. 일본의 손이 뻗지 않는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꿋꿋이 지조를 지키고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은둔하는 지식인들과 해방아내가 몸을 팔 수 밖에 없었던 가정형편과 그의 무능함에 대한 죄의식이지 않았을까?다음으로 그의 아내에 대해 말하자면 그녀는 매춘을 하여 가정을 꾸려나가는 여성이다. 자신의 몸을 다른 남정네들에게 주지만 그녀의 마음만은 그들에게 주지 않은 듯 하다. 일을 하지 못하는 남편을 위해 자신의 몸을 남이 범하는 치욕을 느끼면서까지 생활을 연명해나가는 강인한 여인인 것이다. 그녀는 남편에게 이런 매춘행위를 보여주지 않는다. 한 남자의 여인이라면 이런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왜 그녀는 굳이 이런 일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일까? 우리 선조들의 어머니 상을 보면 삯바느질에 빨래와 같은 부업을 통해 어려운 살림을 꾸려나갔다. 그러나 아내는 매춘을 하여 쉽게 돈을 번다. 소설「감자」의 주인공 복녀도 또한 왕서방에게 몸을 팔아 쉽게 돈을 모은다. 점점 매춘에 대한 죄의식이 사라지고 이젠 성행위에 대해 쾌락을 느끼며, 즐기게 된다. 복녀는 왕서방에게 살해되어 비극적 결말을 맺게 된다.어떻게 보면 아내도 결국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한 것일 수 있다. 그녀의 비밀을 결국 남편이 알게 되고 그는 집을 나가버린다. 정확한 결말을 맺고 있지는 않지만 다시 예전으론 돌아가기 힘들 것이다.하지만 우리는 여기에도 다른 방향으로 생각해 볼만하다. 근본적으로 그녀가 매춘을 하게 된 원인은 어디에 있겠는가. 무능력한 남편을 둔 탓이고, 남편이 일을 할 수 없게 만든 나라의 탓이다. 이러한 것들이 그녀를 이렇게 비참하게 몰고 갔던 것이다.이러한 두 인물은 남편과 아내의 관계가 보통의 남녀 관게와는 다른 역전인 형태로 그려지고 있다. 즉 그는 내성적인 반면 아내는 외향적인 모습을 보인다. 그의 거처는 햇빛이 들지 않는 어두운 방이고, 아내의 거처는 밝은 방이다. 또한 그는 생활력 없는 무능한 가장으로 한 가정의 주변인에 불과하지만, 아내는 생활력이 있으며 한 가정의 중심이 되고 있다. 이러한 인물의 배치는 보통의 남 ? 여 특성을 역전시킨 것인데 이 소설의 비정상적 느낌과 그에게 주어서 그는 고향으로 가게 된다. 다시 고향에 내려온 주인공은 오랜 친구인 M과 함께 병원을 차리고 자신의 이익 중 일부를 아우 T(그다지 사이가 좋지 않은)의 아내에게 꾸준히 전해주지만 훗날, 그 돈이 자신의 조카인 업에게 전해지고 있었고, 또한 그것이 그의 방탕한 생활에 쓰여 졌음을 알고 분노한! 다. C간호부와 업이 연인사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업과 주인공의 갈등은 계속되고, X가 해수욕 용품을 불태우는 사건이 있은 지 얼마 후 업은 병을 얻어 죽는다. 업의 아버지인 T는 아들을 잃은 분노로 주인공의 병원에 불을 지르고 갈등과 비관에 빠진 주인공은 결국 자살을 한다.2.『12월12일』작품의 인물분석 및 감상먼저 X는 소설을 전반적으로 이끌어 가는 주인공이다. 가난과 일상에서 탈출하고자 여러 가지 시도를 하지만, 결국 주변 인물들과 화합하지 못하고 좌절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이는 결국 이상의 내면적 모습을 X를 통하여 표출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T는 X 의 동생으로, 빈곤한 가정에서 아내와 그리고 아들 업이와 함께 살아간다. 아들인 업이를 굉장히 위하는 인물이다. T는 무능한 가장으로 실제 이상의 친부를 표현한 모습이라 할 수 있다.업은 T의 아들로써 천재적인 재능을 지녔으나, 가난으로 인해 좌절하는 인물이다. 이는 이상의 외면적 모습을 들어 낸 듯하다. 실제 이상의 가계를 보면 친부와 친모가 있지만 백부의 양자로 보내진다. 업이도 동일한 상황에 쳐해지는데 이는 곳 이상 자신의 인생을 그린 작품이라 할 수 있겠다.M은 X의 친구로 부유층의 의사였으나, 훗날 파산의 상황에 이르게 된다. 업의 재정적 지원자였으나, 파산으로 인하여 지원이 끊어짐으로 인해 업, T와 대립하게 된다. M은 이상의 백부의 이미지가 투영된 인물이다.다음으로 주변인물에 대해 말하자면, C 간호부는 XX의 동생으로 X가 경성에 돌아와 M과 차린 병원에서 간호부로 일한다. 업에게 모성애적 사랑을 베푸는 인물로 나중에 아이를 넘겨주고 떠난다. 여관주인은X와 절친한 친구 사이한다.
    독후감/창작| 2008.10.14| 7페이지| 2,000원| 조회(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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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삼대를 읽고
    삼대를 읽은후 감상우리가 이 작품에서 생각해보아야 할 점은 ‘갈등’과 ‘돈’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이 작품을 세대간의 갈등과 충돌로 기억한다. 동시에 조의관, 조상훈, 조덕기 모두 ‘돈’에 빠져있다고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렇게 이야기할 것이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 말은 모순에 빠진다. 세 인물이 갈등을 빚고 있다고 하면서 동시에 똑같은 인간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우리는 좀 더 면밀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생각해보면 자본주의의 상징 ‘돈’ 아래, 실제 그들에게는 충돌이 없다. 작품을 끝까지 정확히 읽어보면 세 사람은 결국 하나의 인간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세 세대의 갈등과 충돌로 이 작품을 규정 짖기에는 무리일 것이다. 또한 이 작품에서도 제사, 축첩, 족보의 상징 조의관의 기존 봉건적 가치와 근대적 요소와의 갈등을 주제로 이끌어내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이는 그들 삼대의 캐릭터와 우리 소설의 특징인 ‘독살’로써 정리하는 데에서도 알 수 있다. 실로 이 작품에 있어서의 ‘독살’은 작품을 이끌어가는 서사의 중요한 축이 된다. 이에 대한 이야기는 그들의 이념적 갈등을 먼저 정리하고 정리하기로 하겠다.우리가 흔히 삼대의 갈등으로 기억하는 이 작품은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작품 처음부터 그런 냄새를 물씬 풍기고 있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삼대』는 제목에서 말하는 대로 삼대 - 할아버지 조의관, 그의 아들 조상훈, 손자 조덕기 에 이르는 할아버, 아버지, 손자 삼대의 삶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이렇게 세 세대의 모습을 그리는 것은 구식 인습에 완전히 젖어있는 조부 조의관의 봉건 사회에서 근대 자본주의 사회로 이행하는 과정을 그려주기 위함이다. 이들 세대는 각기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조의관은 많은 돈을 조상의 제사에 드릴만큼, 돈으로 양반을 살만큼 명예와 체면을 중시하는 인물로 구한 말 꽤 많은 돈을 벌었고 그만큼의 권력을 쥘 줄 아는 사람이다. 그의 봉건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으면서 돈을 상징하는 모습에서 근대가 시작되었으나 인식자체에는 아직 봉건적 질서가 남아 있음을 보여준다. 이는 시기적으로 보았을 때도 1910년대에서 1930년대 시기 한국을 보자면 식민지 사회이면서 동시에 자본주의로도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그 당시 우리나라의 시대상을 한 집안 이야기로 축소해서 잘 반영하고 있기 때문에 『삼대』가 그만큼의 권위를 쥐고 있는 게 아닌가 한다.조상훈은 신교육까지 받은 계몽주의적 지식인으로 그려지면서 사회를 변화시키고자 했고, 그는 신실한 기독교 신자로 교회를 통해 사회를 변화시키고자 했으며 교육에의 뜻도 품어 집안의 재산을 쏟아 붓는 열정도 보여준다. 하지만 동시에 그의 구린 뒷모습은 그를 위선자로 보이게 한다. 술과 노름, 게다가 명예로서 보살펴주던 운동가의 딸과 관계도 가져 아이까지 낳고도 무책임하게 있는 그의 모습은 더욱 위선자로 보이게끔 한다. 이렇게 보이는 그의 부패한 모습은 그의 신사상, 신지식과 그 시대와의 갈등의 결과가 아닌가 한다. 마지막에 가서도 조상훈은 아버지 조의관과 완전한 대립을 보이다가도 자신의 한계를 느꼈을 때 결국 황폐해진 모습과 재산에의 집착으로 끝나지 않았는가.조덕기는 조부 조의관의 신임 받는 손자이다. 조상훈은 교회 사업에만 골몰해 집안 돈을 교회 사업에만 투자하고 제사를 부정하는 등 이미 조의관의 눈 밖에 났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조의관은 아들보다도 손자인 덕기에서 더 큰 믿음을 가진다. 재산 관리도 덕기에게 일임하리라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실로 덕기는 두 세대를 모두 부정한다. 조부의 가치관도 아버지의 가치관도 동의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의 단점은 우유부단한 성격에 있다. 그는 마지막 세대로 새로운 사회에 대한 동경이 있지만 아버지만큼도 강하게 부정하지 못한다. 오히려 때때로 그의 조부의 사상에 동정하기도 한다. 이러한 이념과 현실 사이에서 갈등하고 동요하고 있다. 그는 어떤 주체적인 입장을 갖지 못한다.작품의 첫 구도에서 보면 분명 할아버지, 아버지, 손자의 삼대에 있어 그들의 의식은 갈등을 보인다. 조부 조의관의 봉건적 가치에 조상훈은 강하게 대립하고 있다. 조의관의 제사와 양반에의 집착을 조상훈은 절대 이해하지 못한다. 조덕기는 그의 아버지만큼 강하게 대항하지는 않으나 이념적으로 갈등을 보이는 인물이다. 그들 삼대는 이데올로기 자체에 있어서 다른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갈등은 어떤 결론을 이끌어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조상훈은 조의관에게 강하게 대립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다른 이념을 내세우지만 같은 핏줄임을 증명이라도 해주듯 축첩에서 무너졌다. 일흔의 나이에 수원댁을 들여온 조의관이나 홍경애, 김의경과 깨끗하지 못한 조상훈은 같은 인물이다.이번에는 조덕기의 경우를 보자. 덕기의 어머니가 덕기에게 너도 네 아버지와 똑같은 놈이라고 하는 말에서 알 수 있다. 그들은 실상 삼대가 흐를 동안 바뀐 것은 하나도 없다. 필순이를 제 2의 홍경애로 만들려고하는 데서도 변화를 기대하기 어렵다. 그들에게는 실상 갈등이 있어야함에도 갈등이 없다는 것이다. 자식의 입장에서 보건데 아버지가 어떠한 생활을 살아가건 무관한 입장을 보인다. 윗 세대가 어떻든 상관없는 것이다. 이것은 ‘돈’때문으로 귀결하게 된다. 할아버지의 문제는 그대로 손자 세대까지 세습되어 간 것이다. 그들이 보이던 갈등을 완전히 깨어 버리고 다음 사회로 발전되어 나가는 모습을 보여주어야함에도 그렇지 못하고 작품은 흐지부지 정리하고 만다. 문제에 정면으로 부딪혀 그 문제를 파헤치고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독살’로써 작품은 귀결한다. 이는 봉건시대의 잔재는 그대로 근대시대로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이렇게 소설 삼대는 그 당대의 현실을 그려내고 있다고 할 때 주목할 점은 ‘돈’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도래만큼 자본주의적 가치를 ‘돈’으로 표상하고 있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보건데 「서화」의 돌쇠에서 보여주는 모습만큼이나 ‘돈’은 인간의 추악함을 드러내게 된다. 조의관의 임종 뒤의 조씨 가문은 아주 난리도 아니다. 조부의 많은 재산을 둘러싸고 유산으로 인한 암투가 벌어진다. 조의관은 늙은 나이에 아들을 얻기 위해 결혼한 30을 갓 넘은 수원집으로부터 죽임을 당하게 된다. 그야 물론 그들의 목적은 조의관의 유산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아주 타락한 모습을 그대로 드러낸다. 헌데 여기서 더 추악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그의 아들 조상훈이다. 조상훈은 아버지 조의관의 죽음에 대한 음모를 풀어내기 위해 부검을 주장하나 집안의 반대에 부딪혀 범인 찾기도 흐지부지되고 만다. 그러나 손자 덕기가 나타나 수원집 일당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재산이 덕기의 수중에 들어오게 되자 유서와 토지문서가 든 금고를 훔쳐 달아나다 경찰에 붙잡힌다. 이 작품에서 ‘돈’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독후감/창작| 2008.10.14| 3페이지| 1,500원| 조회(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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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열하일기
    ―열하일기―박지원은 《열하일기》,《허생전》,《연암집》등을 서술한 조선후기의 실학자이다. 그는 이용후생의 실학을 강조하였으며, 자유롭고 기발한 문체로 여러 편의 한문소설을 발표하였다.1780년(정조 4년) 박지원의 종형인 금성위 박명원을 따라 청나라 고종의 칠순연에 가는 도중 열하의 문인들과 사귀고, 연경의 명사들을 보며 그곳의 문물제도를 기록하였다. 압록강을 시작하여 베이징까지 약 2개월 동안 겪은 일을 날짜순으로 서술하고 있다. 열하일기는 총 26권 10책으로 규장각도서로 보관되고 있다. 내가 읽은 이 책에서는 압록강에서 랴오양까지 15일간의 기행을 적은 〈도강록〉과 십리하에서 소흑산까지 5일간을 기록한 〈성경잡지〉,신광녕에서 산해관까지 9일간의 기행을 기록한 〈일신수필〉이 연재되어있다.6월24일 보슬비가 내리는 가운데 기나긴 여행길이 시작된다. 박지원을 포함한 사신일행은 압록강을 건너 책문에 도착한다. 책문은 중국의 동쪽 변두리 지역임에도 시골티는 나지 않고 번화하니, 앞으로 더욱 번화가로 갈 것을 생각하자 갑자기 한풀 꺾이어 여기서 그만 포기하고 되돌아갈까 하는 생각에 온몸이 화끈해짐을 느낀다. 아무리 박지원이 진보된 생각을 가지고 청나라의 문물제도를 배우고 싶어 여행한다 하더라도, 조선에서 그래도 잘 나가는 집안의 자재로 태어나 양반으로써의 권위와 오랑캐나라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조선을 얼마 벗어나지 않아 중국이 이렇게 번성하게 된 것을 보고 자신의 식견이 좁았었음을 알게 된다.여행은 계속되고 여러 마을을 지나면서 중국의 주택이나 풍경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준다. 특히 중국의 집짓는 법을 서술한 후 조선의 기와집과 비교하며 기와집의 단점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중국은 똑같은 크기의 벽돌을 가마에 구워 그 벽돌을 가지고 집을 짓는다. 벽돌집은 견고하고 튼튼하여, 기와집처럼 진흙이 마르면서 벽이 갈라진다거나, 바닥 사이에 금이 가, 불을 때면 연기가 방안으로 들어오거나 바람이 세는 경우가 거의 없어 중국의 벽돌집을 본 닫아 조선의 백성들의 노고를 덜어주고 싶어 한다.쭉 책을 읽어 내려가다 보니 우리에게 친숙한 이름과 책이름이 나온다. 박지원은 김부식의 『삼국사기』의 잘못된 역사서술을 지적한다. 고대 고조선과 고구려시대에 요동지역은 우리땅 이였으나, 후세의 옹졸한 선비들이 한갓 중국의 사전(史傳)만을 믿어 조선의 강토를 싸우지도 않고 내준 것이라고 말한다. 지금도 우리는 중국과 영토싸움을 하고 있다. “동북변강역사여현상계열연구공정”이란 이름으로 고구려를 중국의 소수민족이 세운 지방정권이라고 보아 고구려사를 중국사의 일부라고 주장하고 있다. 중국은 고구려 뿐만 아니라 고조선과 발해까지 한국사의 영역에서 제외시키고 있다. 이렇게 된다면 한국사는 시간적으로는 2,000년, 공간적으로 한강 이남에 국한되게 되어 한국사의 근간은 크게 흔들리게 된다. 중국은 오래 전부터 이러한 계획을 세우고 차츰차츰 준비하고 있을 때 우리는 넉 놓고 있었다. 발등에 불이 떨어지고 난후에야 매스컴에서 이슈화하고, 동북공정을 막아야한다고 난리들이다. 중국의 동북공정은 몇 년 사이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90년대 이 전 부터 말이 되어지던 일이였다. 그러나 우리들의 무관심 속에서 동북공정은 거의 완성단계이다. 2006년 이슈가 된 일이 18C에 이미 박지원은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가 역사에 있어서도 많은 생각을 가지고 있는 뛰어난 역사비평가로써의 면모를 볼 수 있었다.〈성경잡지〉 중에서 상루에서의 필담이란 부분은 박지원의 소년 같은 순수한 모습을 보았다. 성경에서 만난 사람들과 술자리를 가지고 이야기를 나누기위해 사신 행렬이 묵는 관에서 벗어나 기위해 눈치를 살피는 지원의 모습은 틈만 나면 말썽만 피우려는 어린아이 같아 웃음이 나왔다. 마흔이 넘는 어른이 하기엔 철없는 행동이지만, 장난꾸러기 같은 모습이 인간미 넘치는 어른이었다.이 곳에서 사귄 친구들과 대화를 나눈다. 동야는 중국이 상업을 천대하는 것을 비판한다. 놀고먹고 남에게 해만 끼치는 명분만 남은 선비들 보다는 자신처럼 노력으로 삶을 꾸려나가는 장사치들이 더욱 천대하는 시대를 비관한다. 이 또한 조선도 같은 실정이었다. 농사를 장려하고 상업은 제일 천한 직업이라 생각했다. 이 장면에서 박지원은 다른 소제로 말을 돌려버린다. 왜 박지원은 그에 대해 논하길 꺼려했을까? 그 또한 양반의 신분으로써 신분평등의 개념까지는 가지 못했다. 실학자들의 한계점이라 할 수 있다. 아직까지는 신분차별이 뿌리깊이 박혀있어, 더욱 진보된 생각을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조선후기 천주교의 유입으로 평등이라는 개념이 들어오긴 했지만, 심한 박해로 평등사회는 멀기만 했다. 이런 실정에서 동야의 말은 걸리는 점이 많았던 것이다.〈역마를 달리며 적은 수필〉에서는 박지원의 구체적인 사상이 드러난다. 보잘 것 없어 보이는 깨진 기왓장, 똥 과 같은 정말 하찮은 것도 후에 유용하게 쓰이며, 그 쓰임이 다 존재한다고 말한다. 먼 곳을 견문하고 온 사람에게 사람들이 “무엇이 장관이외다.”라고 물으면 그는 “저 기왓조각이나 똥무더기가 모두 장관이지, 꼭 성지? 대궐? 누대? 시포(市脯)? 사관(寺官)? 목축이라든지, 공막한 들판이라든지, 변환하는 연수라든지, 그런 것들만이 장관이 아니다.”이라고 말해주고 싶다고 한다. 곁에 있는 것이 더욱 소중하고 필요한 것일 수 있는데 무조건 멀리 있고, 큰 것만이 좋은 것이라 생각하는 옹졸한 선비들을 비판하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독후감/창작| 2008.10.14| 2페이지| 1,000원| 조회(1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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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사가 그린 근대의 풍경
    『역사가 그린 근대의 풍경』우리는 물질?문명이 발달한 현대에 살고 있다. 현대는 홀로 존재하는 개념이 아니라 앞 시대가 존재함으로 인하여 생겨난다. 원숭이에서 인간으로 진화하여 고대에서 중세?근대를 거쳐 현대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근대가 없었다면 현대도 없는 것이다. 우리 현재를 알기위해선 앞의 과거를 알아야 한다. 역사를 배우는 것이 모두 우리 현재를 알고 미래를 예측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한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사건들의 원인은 과거를 통해서 역사를 통해서 유추해볼 수 있다. 이러한 사고에서『역사가 그린 근대의 풍경』은 근대화되어가는 과정을 살핌으로써 다시 현재를 볼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이 책은 제목에서 보이듯이 근대라는 주제를 가지고 이야기 하고 있다. 더 자세히 말하자면 18?19세기 영국에 나타난 근대적 움직임을 말하고 있다. 1부에서는 주로 사회라는 큰 집단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에 초점을 맞추고, 2부에서는 근대적 제도와 체제에 대해 다루고 있다. 강의시간에 사회제도와 체제에 대한 설명은 교수님께서 충분히 해주시기에, 이 시기의 민중들의 삶 중심으로 써내려 가려한다.영국은 작은 섬나라에 지나지 않지만 실제로는 잉글랜드?스코틀랜드? 웨일즈?북아일랜드 등 네 지역으로 나눌 수 있다. 특히 잉글랜드는 게르만 이주민, 즉 앵글로-색슨 계통의 주민들이 대부분이다. 우리는 이들 지역을 'England'로 부른다. 명칭에서부터 보이듯이 잉글랜드가 중심이 됨을 알 수 있다. 영국내부에서 스코틀랜드가 계속적으로 독립하려 하는 이유를 이전 역사를 통해서 알 수 있다.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지리적 경계는 서기 1세기에 로마제국의 하드리아누스 황제 때 켈트인을 북쪽으로 몰아내고 이들을 방어하기 위해 성을 쌓았는데, 이것이 그 후 두 지역의 경계로 굳어졌다. 그 후 잉글랜드가 7왕국 시대를 거쳐 통합왕국으로 발전하던 9세기에 스코틀랜드도 스콧인과 픽크인을 통합한 왕국으로 발전한다. 중세 초기에 잉글랜드와 다른 독자적인 왕실 전통을 유지하던 스코틀랜드는 점차 고, 두 나라 사이의 독립을 둘러싼 갈등은 계속된다. 1296년 마침내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1세가 스코틀랜드를 직접 통치하기 위해 공격을 감행하고, 이후 수십 년간 스코틀랜드는 잉글랜드의 침입에 대항하여 싸웠다. 스코틀랜드인들의 민족주의는 14세기 전반 잉글랜드의 침입에 저항하면서 강화되었다.15세기 이후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군사적 충돌은 거의 없었지만, 그럼에도 두 지역의 관계는 개선되지 못한다. 스코틀랜드의 국왕들은 잉글랜드와 경쟁하는 프랑스 왕실과 가깝게 지냈다. 잉글랜드 왕실에 대한 스코틀랜드 사람들의 적대감은 1603년 엘리자베스여왕에 이어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6세가 잉글랜드 왕위를 계승하면서 점차 완화되었다. 그 후 100여년간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는 스튜어트 왕가 출신을 공동의 국왕으로 옹립하면서도 서로 독자적인 나라로 남아있었다. 18세기 중엽에 이르러서 비로소 두 나라의 통합이 실질적으로 이루어진다.17세기 영국의 스튜어트 왕조는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공동의 왕위를 가졌지만, 국왕이 주로 런던에 머물렀기 때문에 스코틀랜드는 중심 권위가 사라지게 되었다. 이 시기에 스코틀랜드 사람들을 새롭게 결집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프로테스탄티즘이었다. 종교개혁기에 스코틀랜드 교회는 순수한 칼뱅주의를 받아들여 잉글랜드 교회와 다른 독자성을 유지하였다. 스코틀랜드 종교개역 지도자들은 교회 자체의 개혁에서 더 나아가 젊은이들에 대한 새로운 교육을 통하여 스코틀랜드 사람들이 영적갱신과 함께 새로운 지식과 도덕을 고양하길 바랐다. 이에 대학 교육을 혁신하여, 새로운 학문을 열망하는 젊은이들이 스코틀랜드 국내 또는 유럽 대륙에서 지식을 쌓는데 전념한다. 18세기에 에든버러나 글래스고우의 대학의 명성은 전 유럽에까지 널리 퍼졌으며, 대륙의 많은 젊은이들이 이곳에서 교육을 원했다. 18?19세기 스코틀랜드 지식인들은 영국이 전통적 사회에서 산업사회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문화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들 지식인들의 활동을 흔히 ‘스코틀랜드 계몽운동’이라고 부른넘어 새로운 학문적 지평을 열었다고 평가받는다. 이들의 문화적 성취는 타자로서의 잉글랜드를 의식한 결과이다.19세기 스코틀랜드나 잉글랜드의 구분을 넘어선 대브리튼 국민의식이 자리 잡게 된다. 그 이유로 우선 프랑스와의 전쟁을 생각할 수 있다. 프랑스라는 타자와의 끊임없는 전쟁이 영국인의 정체성 형성에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영국과 프랑스는 9년전쟁, 에스파냐 왕위계승전쟁,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 7년전쟁, 미국 독립전쟁, 나폴레옹 전쟁 등 여러 전쟁에서 맞붙어 싸웠다. 두 나라의 싸움은 자본주의 세계체제 중심부의 패권을 둘러싼 경쟁에서 비롯되었으나, 그것은 정치적인 것 못지않게 종교적인 것이었다. 가톨릭 프랑스에 대한 프로테트탄트 영국의 항전은 잉글랜드 뿐만 아니라 장로파가 주류를 이루는 스코틀랜드 사람들에게도 중요한 의미를 가졌기 때문이다.둘째, 스코틀랜드의 문화중심중의가 국민의식 형성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스코틀랜드 지식인들의 문화중심중의는 처음에는 정치적 열등의식에서 벗어나기 위한 의도에서 비롯되었지만, 그들의 성취가 영국인들의 공유하는 문화의 주류로 받아들여짐에 따라 스코틀랜드의 독자적 자의식을 고양하기보다는 오히려 대브리튼의 정체성을 신장시켰기 때문이다.셋째, 영제국 또한 스코틀랜드 사람들의 정체성 형성에 영향을 주었다. 제국의 광대한 식민지는 스코틀랜드 사람들에게는 인생을 새로운 기회였다. 해외식민지와 관련된 일자리로 진출함에 따라 상승욕구를 충족하였다.이러한 여러 요소들로 인하여 영국의 국민정체성은 뚜렷하게 되었고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어느 지역에나 대부리튼 국민이라는 의식은 확고해진다.근래에 다시 스코틀랜드를 분리하자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이는 대브리튼의 국민정체성이 약화되고 있음을 의미할 것이다. 스코틀랜드가 계속 독립하려 드는 이유는 과거의 역사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처음부터 영국은 여러 지역을 통합하면서 생성된 국가이기에 정치적으로 통합되었음에도 그들의 의식구조에는 서로 다른 정체성이 병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다음으로 가속화 되고 있었다. 무역상인도 지역과 상품에 따라 전문화되었고, 무역 거래와 관련된 다양한 금융 업종이 새롭게 나타났다. 무역상인과 직접거래하는 도매상도 상품별로 특화하는 모습을 보인다.1660년대에는 영국은 ‘대역병’이나 ‘대화재’와 같은 일련의 사회적 재앙을 겪으면서도 경제적 번영의 길로 나아갔다. 이러한 경제적 활력은 무엇보다 크롬웰시대에 항해법이 제정된 이후 네덜란드와의 경쟁에서 승리를 거둔 영국이 해외무역을 주도권을 차지한 데서 비롯한 것이었다.18세기 초 영국은 세계에서 가장 넓은 시장을 가진 경제권을 이룩하였고 가장 규모가 큰 상선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해외에서는 값싸면서도 다양한 소비재가 영국으로 흘러들었다. 해외무역이 성장과 더불어 런던도 번영을 누린다. 또한 국내의 상업이 런던에 집중되면서 더욱 번성해진다.18세기 영국 경제사에서 두드러진 현상은 화폐자산을 운용하는 새로운 제도와 방식들이 도입되고 그와 함께 ‘금전적 이해관계’가 중요해졌다는 점이다. 역사가들은 이들 새로운 제도의 정착을 ‘금융혁명’이라 부른다. 이 혁명은 주로 1694년 잉글랜드 은행의 설립과 ‘국채’발행으로 요약된다. 금융혁명은 런던 상인 사회의 변화를 반영하면서 그와 함께 그 변화를 가속시켰다. 상인 세계의 뚜렷한 변화 가운데 하나는 상품을 직접 취급하지 않으면서도 무역 활동에 기여하는 새로운 업종들이 분화해 나갔다는 사실이다. 신용제도가 발전하면서 국채와 공채를 다루는 사람, 주식 거래 및 중매인, 사설 은행업자들이 생겨났다. 무역 및 상업 활동에서 자본 축적의 규모는 이전보다 더 확대되고 있었고, 그와 함께 금융활동을 통해 화폐이윤의 증식 또한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이 시기 상인 및 화폐자산가들은 길드의 전통을 이어받아 제규회사를 조직하였다. 상인은 이 회사의 조합원으로 가입할 때 입회료를 납부하고, 그 후에는 독자적으로 영업 활동에 종사하면서 자신의 무역 거래액 가운데 일정한 몫을 떼어 회사의 운영 자금을 지원하였다. 상인들은 회사의 이름으로 무역활동에 종사하지만,무역의 발전과 더불어 점차 특정 지역의 무역을 독점하는 형태로 자리잡아갔다는 점이다.한편, 정부의 국채 발행과 관련하여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것이 주식회사였다. 주식회사는 이미 17세기 초에 나타났으며, 동인도회사도 이러한 조직에 해당한다. 금융혁명기에 정부는 주식회사를 통해 단기 부채를 장기 채권으로 전환하고자 했다.마지막으로 산업화에 따른 노동계급의 생활에 대해 보려고 한다. 산업혁명기 노동자들은 노동과 생활 측면에서 하나로 묶을 수 없는 다양한 집단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예를 들어 수공업 분야의 숙련 장인, 선대제 아래에서 일하는 도시와 농촌의 가내수공업자, 농업?건축?수송 분야의 일용노동자, 공장노동자 등이 있었다. 이들의 사회적 지위와 성격 또한 매우 달랐다. 그럼에도 그들 대다수는 산업혁기에 공통의 경험을 겪었다. 우선 이들은 자본주의적 고용 및 시장 관계에 전면적으로 편입되었다. 자본주의 노동시장이 출현하면서 곧바로 주기적인 경기 변동에 시달려야만 했다. 과잉생산공황과 불황이 호황기에 뒤이어 주기적으로 나타나면서 노동자들은 경기 변동의 순환을 생활 속에서 구체적으로 체감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아울러 부분적으로 보급된 기계도 노동자들에게 끊임없는 두려움을 안겨 주었다.노동자들의 생활수준이 향상되었는지의 여부는 논쟁이 분분하다. 이 시기 노동자의 생활수준을 계량경제사적 사관으로 접근한다면 산업혁명 초기에 생활수준은 악화되고, 1820년대 이후에는 상승을 보여준다. 18세기 중엽 이래 생활수준은 점진적으로 낮아졌으며, 이 추세는 나폴레옹 전쟁기를 거쳐서 1812-3년에 최저점에 이르렀다가 전후의 불황기로 이어진다. 생활수준의 이 같은 하향 추세는 1820년 이래 뚜렷하게 반전된다. 런던 수공업 노동자들은 이 시기에 소득 수준이 지속적으로 높아졌으며, 1820~50년 사이에 전체 노동계급의 실질임금이 2배 이상 증가한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이러한 계량경제사적 해석은 문제점이 있다. 우선 통계에 노동계급 임금의 지역적 다양성을 은폐하였으며, 경기 변동다.
    독후감/창작| 2008.10.14| 4페이지| 1,500원| 조회(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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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인의 가치관 중에서 정신적 가치관을 이루는 것들을 문화적 문법으로 정리하고, 현대한국사회에서 일어나는 사건과 사고를 비교하여 자신의 의견으로 기술하세요
- 작별인사 독후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