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차 ♣Ⅰ. 들어가는 말Ⅱ. 이슬람 문화가 비잔티움과 유럽에 미친 영향1. 경제의 영향2. 아랍어 영향3. 문학의 영향4. 철학의 영향5. 의학적 영향6. 과학의 영향Ⅲ. 나오는 말Ⅰ. 들어가는 말3대륙에 걸친 광대한 이슬람세계는 아바스왕조 이후 여러 칼리프국가로 나누어지게 되었으나, 주민의 대다수가 이슬람교를 받아들이고, 이에 따라 아라비아어는 이슬람세계의 공용어가 되어 종교 내지 문화면에서는 통일세계를 이룩하였다. 역대의 칼리프가 문화 활동을 장려하고 인종의 차별 없이 학자를 등용하고 우대하였기 때문에 9세기로부터 10세기에 걸쳐 이슬람문화는 절정기에 도달하였다. 이슬람이 지배한 지역은 헬레니즘문화와 페르시아문화의 전통이 깊이 뿌리를 박고 있던 곳이고, 동으로 인도와 쉽게 접촉할 수가 있었고, 중앙아시아를 거쳐서는 중국과도 연락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이슬람세계는 헬레니즘문화와 페르시아 문화를 기반으로 삼으면서 주변문화를 섭취하고 이슬람교와 아랍적인 독창성을 첨가하여 고도로 발달한 찬란한 문화를 발전시킨 것이다.) 이렇게 발달한 이슬람의 문화는 주변의 비잔티움과 유럽에 여러 면에서 영향을 주었다.Ⅱ. 이슬람 문화가 비잔티움과 유럽에 미친 영향이슬람 문명은 모든 개별적인 공헌들을 제쳐 두고서라도, 서유럽의 강력한 경쟁자였다는 점, 그리고 상상력의 자극제 역할을 했다는 점만으로도 서유럽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비잔틴 문명은 기독교적 서유럽과 너무 긴밀하게 연관되었을 뿐 아니라 너무나 허약해서 이러한 기능을 할 수 없었다. 옳건 그르건 간에 서유럽인들은 비잔틴의 그리스인은 경멸했지만, 반대로 무슬림에 대해서는 존경과 두려움을 표하곤 했다. 절정기의 이슬람 문명은 분명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문명들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비록 느슨하긴 했지만 이슬람 문명은 거대한 종교와 공동의 제도를 통해 아랍인, 페르시아인, 투르크인, 여러 아프리카 부족들, 그리고 인도인 등 다양한 민족들을 통합시켰던 것이다. 다양성 속의 통합이야말로 이슬람의 특징이었다. 또 그러한서 이슬람 문명은 12세기에 이르기까지 기독교의 서유럽을 너무나 크게 압도했으므로, 두 문명은 서로 비교조차 할 수 없다. 나중에 서유럽이 발전을 보일 수 있었던 것도, 부분적으로는 서유럽이 이슬람으로부터 배운 덕택이었다. 경제 분야에서 서유럽인들은 관개 기술, 새로운 작물 재배, 제지법, 알콜 증류 등 수많은 이슬람 기술을 도입함으로써 이익을 보았다. 서유럽이 이슬람 경제로부터 얼마만큼 신세를 졌는가 하는 것은, 아랍어나 페르시아어를 어원으로 한 수많은 영어 단어들을 보면 쉽사리 알 수 있다. 교통traffic, 관세tariff, 창고magazine, 알콜alcohol, 모슬린muslin, 오렌지orange, 레몬lemon, 사향musk 등이 여기에 속한다.)2. 아랍어의 영향셈어중 가장 막내 언어인 아랍어가 21세기 현재 셈어를 대표하는 언어로 남게 된 것은 이슬람 문명의 영향이 절대적으로 작용했다. 고대 유럽인들에게 아라비아반도의 미개한 사막 유목민의 언어로 간주되던 아랍어는 이슬람시대 이전까지만 해도 유럽인들의 생각처럼 미숙하고 불충분한 언어임이 분명했다. 그러나 이슬람으로 무장한 아랍인들이 세계사의 전면에 부상하면서 아랍인들의 모어인 아랍어는 문명 세계의 위대한 언어로 발전했고, 고대 인류 문명의 보고를 간직하고 있는 언어가 되었다.아랍ㆍ이슬람 문명이 정점에 달해 있던 9-15세기에는 국제어로서 다른 언어와 견줄 수 없는 높은 위상을 차지하고 있었다. 아랍어는 아랍인들의 언어일 뿐만 아니라, 이슬람 신앙과 함께 모든 이슬람 국가의 공통어였다.이슬람 시대 이후 아랍어는 페르시아어, 터키어, 우르드어, 인도어, 스페인어, 포트투칼어, 말타어, 말레이 인도네시아어, 하우사어 스와힐리어 등 동서양의 많은 언어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끼쳤다.인도 유럽어에 속하는 페르시아어는 어족에 있어 아랍어와 계통을 달리 하지만, 여전히 아랍어 문자를 차용하여 표기를 하고 있고 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 등의 무슬림 국가에서도 아랍어 문자 체계를 이용하고 있다. 따라서 아랍어 문자지는 과정에서 많은 아랍어 단어들이 유럽어에 영향을 끼쳤고 스페인어와 포르투칼어에서 수 많은 아랍어 어휘가 발견된다는 점에서도 아랍어의 유럽어에 대한 영향은 입증된다.그러나 아랍ㆍ이슬람 문명의 서구 문명에 대한 영향력은 단순한 아랍어 차용어의 어휘 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랍인들이 발달시킨 학문이 서구 과학 문명의 발달에 실질적인 기여를 했다는 점이다. 서구의 문예 부흥이 아랍인들과 이슬람 문명에 커다란 빚을 지고 있는 것은 알려진 사실이며, 유럽인들이 아랍인들로부터 과학, 기술, 철학과 문화를 배워갔고 이를 발전시켜 근대에 서구인들이 앞을 다투어 주도한 식민주의시대를 열었다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라 할 수 있다.3. 문학의 영향아라비아반다고 이슬람 시대(A.D. 622년 이후)에 접어들면서 아랍 사회에서는 산문 문학이 빠른 속도로 발전하였다. 특히, 이슬람교의 경전인 꾸란이 산문체로 기록되고, 꾸란의 성문화와 함께 기록문화가 일반화되고, 외국문학 작품이 번역되어 아랍에 소개되면서 아랍 산문은 급속도로 발전했다. 이는 아랍 산문의 발달에 주변국의 문학적 성과와 외국 작품들에 대한 아랍어 번역이 커다란 공헌을 했음을 의미한다.역사적으로 중세 아랍 번역가들의 번역 활동은 고대 서구 문명의 보존이라는 측면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비잔틴 제국의 몰락이후 암흑기에 접어들던 중세 유럽인들은 자신의 조상들의 학문, 사상, 철학, 문학적인 성과를 보존, 발전시키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랍인들이 이를 아랍어로 번역하여 보존하고 있다가 근세 유럽 사회에 다시 되돌려 주었다는 것은 인류 문화의 발전에 공헌한 아랍인들의 기여이며, 서구 중심의 역사관에 젖어있던 서구인들에 대한 역사적인 깨우침이다.이슬람 시대가 시작된 이후 사도(使徒) 무함마드의 이슬람 포교와 그의 사후 정통 칼리파시대(A.D.632-660년)에 시작된 권역별 문화 접촉은 이슬람이전시대보다 더욱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특히, 우마이야왕조 이후부터 외래문학 작품의 광범위한 번역이 이루어졌고, 이는 특정 국가에 국n)하는 것에 그친 것이 아니라, 이를 다시 주변국에 전파시켰다는 점에서 그 중요성이 강조된다. 설화를 포함하여 아랍인들에 의해 각색된 인도와 페르시아 문학은 유럽으로 건너가 유럽인들에 의해 또 다시 유럽적인 설화로 개작되었다. 예를 들어, 인도와 페르시아, 아랍의 기담을 모아 높은 아랍의 대표적인 설화 문학인 『천일야화(One Thousand and One Night)』는 많은 서구어로 번역되었고, 서구의 소설 쓰기에 새로운 요소들을 제공했다.서구 소설의 대표적인 작품중 세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의 『오델로』와 『베니스의 상인』은 아랍적인 특성이 분명하게 나타나고, 세르반테스(Miguel de Cervantes)의 『돈키호테』역시 아랍의 영향을 받은 작품이다.또한 인도의 부처 설화는 마니어와 시리아어를 거쳐 아랍어에서 『부처와 빌루와르 이야기』로 소개되었다. 이 작품은 이후 라틴어와 그리스어 등으로 번역되어 서구 세계로 전해져 『바를람과 조사팥』이라는 기독교 성인 설화로 각색되어 소개되었다.이러한 작품들은 아랍의 산문 문학은 상당 부분이 인도의 설화 문학의 변형이거나 번역이다. 그러나 아랍인들의 문학적 기여는 외래 문학의 단순한 번역에 그친 것이 아니라, 이를 아랍인의 사고 속에서 재창조하여 발전, 승화시켰다는 것이다. 이렇게 재창조된 문학작품은 라틴어로 번역되어 중세 유럽으로 전해졌고, 이 번역된 작품들은 서구의 산문 발달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4. 철학의 영향이슬람 문명에서 철학은 주로 그리스 철학과 헬레니즘 철학의 영향을 받았고, 압바시야왕조시대에 이라크 북쪽의 하란(Haran)이 그리스 철학과 헬레니즘 철학 번역의 중심지였다.이슬람 문명 초기부터 이슬람 학자들은 새로 정복한 비이슬람 지역의 지적 유산을 깊이 이해하고 연구하는데 엄청난 열정을 보였다. 서양 기독교 철학과 신학 또한 아랍 사상가와 철학가로부터 양향을 받은 증거가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5. 의학적 영향이슬람의 의학적 업적 또한 탁월한 것이었다.질병임을 발견했고, 늑막염과 여러 종류의 신경성 질환에 대해 설명했으며, 질병이 물과 흙의 오염에 의해 확산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 밖에 다른 이슬람 의사들은 뜸과 지혈제의 효능을 발견했고, 위암을 진단했으며, 독극물 중독에 대한 해독제를 처방했고, 눈병의 치료에서 현저한 진보를 이룩했다. 끝으로 무슬림들은 병원을 조직하고 의료 업무를 통제하는 데에도 중세의 어느 시기, 어느 곳보다 뛰어났다.) 이러한 의학적 발달은 유럽의 의학의 발달에 큰 영향을 주었다.6. 과학의 영향이슬람 문명의 성취 중 가장 두드러진 분야는 수학, 천문학, 의학들을 포함한 과학 분야다. 물론 이슬람 문명의 과학은 아랍 무슬림들이 자체적으로 발전시켰다기보다는 그리스의 전통을 계승한 측면이 강하다. 그러나 그리스의 과학적 성취를 아랍인들이 단순히 모방한 것이 아니라, 과학과 학문의 발전에 열정을 가졌던 이슬람 왕조의 칼리파들이 그리스의 과학적 전통을 크게 발전시켰다. 이슬람 제국의 칼리파들은 쇠퇴해가던 그리스의 지적인 전통을 억누른 것이 아니라, 고대 그리스 문헌을 추적, 발굴하여 아랍어로 옮겨 놓았고 이를 더욱 발전시켰다. 여기에 페르시아와 이집트, 인도 문명의 성취가 더해져 이슬람 과학으로 구체화되었다.(1) 수학이슬람 문명의 수학은 아랍인 자체의 발명품이 아니라 이전의 고대 문명의 학문적 전통을 계승, 발전시킨 것으로 정의할 수 있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피라미드를 건설하며 십진법과 방정식을 사용하였으며, 수메르인들은 상세한 계산 체계를 알고 있었다. 메소포타미아인들은 기하학을 알고 있었고, 바빌로니아인들은 자릿값을 사용했다.따라서 계산법을 포함한 수학은 이슬람이 출현하기 이전에 이미 국제적 계산 수단으로 활용되고 있었으며, 이를 체계화시킨 것은 그리스인들의 공헌이다. 그러나 비잔틴 제국의 쇠퇴와 함께 그리스의 학문적 전통되 쇠퇴해 갔고, 이후 수학의 계속적인 발전은 아랍인들의 몫이었다.일찍부터 이슬람 지역에는 그리스의 기하학과 인도의 산수론 및 대수학이 들어왔는데, 그리스 학문은 된다.
다양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나탈리 제이먼 데이비스의 충고 -Ⅰ. 들어가는 말표지에는 아홉 명의 현대 역사학자들의 사진이 박혀있고 두께도 만만치 않은 책이었다. ‘언제 읽고 인물에 대해 조사하나’ 과제에 대한 부담감으로 첫 장을 넘겼다. 하지만 대화식으로 구성되어있고 현재 열심히 활동 중인 역사학자들의 이야기여서 부담 없이 『탐史』와 함께 할 수 있었다.『탐史』는 현대 역사학의 거장이라고 평가받는 아홉 명의 역사학자들을 인터뷰한 글이다. 브라질의 역사가인 마리아 루시아라는 저자가 아홉 명의 인물을 소개하고 그들과 역사관과 책 그리고 인생에 관하여 대화식으로 서술하였다.사실 현대 역사학자에 대해 아는 것이 참 없었다. 아니 관심 자체가 적었던 것 같다. 한국사, 서양사, 동양사 시간과 공간을 뛰어 넘어 많은 역사를 공부해왔지만 정작 그 역사를 연구하고 역사서를 만들어 내는 역사가들에 대한 관심은 부족했다. 더구나 현대 역사학자들은 이름조차 낯선 사람이 많다. 『탐史』에 나오는 인물은 대부분이 낯설었다. 다행스럽게도 그들의 저서들 중에는 이름을 들어보거나 영화로 만들어진 것들이 있었다.그 중 가장 가슴에 와 닿는 이야기를 해 준 사람이 나탈리 제이먼 데이비스였다. 그녀는 『마르탱 게르의 귀향』으로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사람이었으며 『탐史』에 등장하는 역사가들 중에 유일하게 여성이었다. 같은 여성으로서 역사를 연구하는 나탈리 데이비스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그리고 그녀가 말하는 ‘다양한 목소리들 간의 대화인 역사’에 대해 알고 싶었다.Ⅱ. 『탐史』- 나탈리 제이먼 데이비스『탐史』에서 나탈리 제이먼 데이비스에 관한 글은 다른 역사학자들보다 훨씬 많은 양을 차지하고 있다. 그녀에 관한 인터뷰는 『탐史』 138쪽부터 211쪽까지 실려 있으며 그녀의 역사관과 저서, 삶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루고 있다. 나탈리 데이비스에 관한 부분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나탈리 데이비스는 1929년 디트로이트의 부유한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고 대학을 다니던 시기에 사회적·정치적 양심대하여 버스를 탈 때면 언제나 의도적으로 흑인 옆자리에 앉아 관습에 대항하는 행동을 꺼리지 않았다. “아이들을 갖는다는 것이 내가 역사가가 되는데 도움을 주었어요. 그것이 나를 인간적으로 만들었으니까요···.”라고 말하는 그녀는 과거에 대한 연구란 다름 아닌 희망을 배우는 것이라는 점을 강조한다.그녀가 과거의 연구에 인생을 바치게 된 것은 중등학교를 다닐 때, 그리스사, 유럽사, 계몽주의, 프랑스혁명, 미국혁명 등에 대해 알게 되면서 ‘내가 이 먼 과거 사건들에 연루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은’ 이후였다고 한다. 대학에 간 이후 지금까지, 정치적 이유로 인해 역사에 대해 알아야 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하며, 역사는 정치에 대한 자신의 깊은 관심에 호응하는 면이 있었다고 말한다. ‘역사를 쓰고 있는 것은 참여 행위를 위해서인가?’라는 질문에 ‘참여 지식인이 되고 싶어 한다는 점은 확실하다···. 하지만 역사가로서의 작업이 정치에 봉사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을 덧붙이고 싶다···. 나는 결코 교조주의자는 아니다.’라고 대답했다.나탈리 데이비스는 16세기 프랑스 연구의 확고한 권위자이며, 또한 근대 초 사회사와 문화사 분야에서뿐 아니라 여성사 분야에서도 오늘날 가장 저명하고 존경받는 역사가 중 하나이다. 캐나다에 여성사 과정이 처음 설치된 때는 1971년이었는데, 나탈리 데이비스와 동료 질 커 콘웨이가 바로 이를 조직한 장본인이었다.그러나 1960년대에 나탈리 데이비스가 명성을 얻게 된 것은 16세기 리옹의 역사에 관한 전문가로서였다. 자신도 인정하듯이 당시 그녀는 기본적으로 노동계급에 관심이 있었다. 그래서 리옹의 노동자 폭동은 그녀가 매료되어 있던 주요한 문제들, 즉 계급, 계급투쟁, 종교적 변화, 사회적 세계와 지적 세계 간의 관계 등을 언급할 수 있는 이상적인 소재로 보였다. 그녀는 역사가로서의 경력 초기 마르크스주의에 크게 경도되어 있었지만, 이후 인류학을 공부하면서 자신의 참조 틀을 넓힐 수 있었고, 현실에 담긴 상징적 차원과 그것에 내재된 관계들의 동명의 영화에 컨설턴트로 참가함으로써 국제적으로 더 잘 알려지게 되었다. 여기서 그녀는 다시 한 번 지방사를 일반적 의문 제기에 이용하는 탁월한 기술을 보여주었다. 즉, 한 프랑스 마을의 가짜 신원 사건을 다룬 미시사가 정체성의 형성과 계급 관계에 관한 의문들을 논의하는 데 이용되고 있는 것이다.나탈리 데이비스의 말 중에 몇 가지 마음에 와 닿은 것이 있다. 그녀는 ‘역사가란 항상 중립적이고 불편부당해야 하나?’는 질문에 ‘내 목소리가 아니라 그들 자신의 목소리를 통해 이해하려 하는 것이야말로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하게 보인다. 하지만 작가가 지향하는 가치들이 언제든지 그 혹은 그녀가 쓰고 있는 것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충분히 알고 있다.’고 하였다. 역사는 중립적이어야 할까? 역사를 가르칠 때 객관성을 유지해야 하나? 항상 고민해왔던 것이다. 역사 연구는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검증을 토대로 이루어져야 한다. 과거를 자의적으로 왜곡하거나 특정의 가치관만을 주입해서도 안 된다. 하지만 실제로 역사를 가르칠 때는 문제가 간단하지 않다. 아이들에게 역사를 가르칠 때 과거의 사실을 있는 그대로 잘 전달할 필요가 있지만 가르치는 사람도 사람이기 때문에 가치관이 들어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옛날에 우리 학회에서 ‘전태일 분신 사건’에 관한 재판극을 할 때가 있었다. 전태일의 유죄와 무죄를 따지는 재판에서 전태일의 최후 변론이 문제가 되었다. 마지막 장면에서 전태일이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최후 변론을 하게 되면, 아이들에게 결국 전태일은 무죄라는 사실을 암묵적으로 강요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전태일의 최후 변론을 멋지게 연출했다. 객관성을 살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엇이 더 중요한가’를 아이들에게 가르칠 필요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탈리 데이비스는 역사가가 자신을 의식하여 매 순간 글 속에 개입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역사 연구에서 역사가가 지향하는 가치들이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 또한 부정하지는 않았다.그녀는 여성사, 지방사와 같은 미시사를 는 이야기 하나를 찾아내서 그것을 써내려가면 된다는 식으로 생각하지만, 좋은 미시사를 쓰기 위해서는 세세한 측면들과 증거, 전체사의 조망이 동시에 요구된다고 말한다. 20세기 후반에 들어와 역사학에서도 새로운 움직임들이 나타났는데, 대표적인 것으로 포스트모던 역사학을 꼽을 수 있다. 중심의 해체, 시간의 연속성과 계기성, 객관성을 부정하고 문화·일상·미시사를 강조하는 역사학의 흐름이다. 나탈리 데이비스는 이러한 포스트모던적 역사 서술의 전통에 속한다는 찬사를 받아왔다. 그녀는 분명 여성사, 지방사에 큰 관심을 두고 있다. 자신의 저서 《마르탱 게르의 귀향》이 일반화를 거부하기 때문에 포스트모던적이라는 주장을 받는데, 그럼에도 개별적 사례를 넘어서는 과정들에 어떤 통찰력 같은 것들을 던져줄 수 있었으면 하는 희망을 담고 있다고 말한다. 그녀는 자신을 미시사가라는 범주에 넣는 것에 개의치 않지만, 민속지적·인류학적 관심 속에서도 다양한 형태의 이야기가 존재한다는 점을 놓치지 않는다. 즉, 미시사라고 하지만 그 속에 담겨져 있는 다양한 형태의 이야기를 담아낼 수 있어야 하고 또 전체적인 흐름 속에서 미시사를 연구하는 점도 빠뜨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또한 그녀는 문학적 상상력이 뛰어나고 역사 글쓰기에 관심이 많다. 그리고 아주 옛날부터 영화를 만들기를 바랐다. 영화는 행위를 보여주는 능력 덕분에 미시사의 몇몇 이점들을 가지고 있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영화는 단지 글로 쓰기만 할 때에는 잘 생각하지 못할 수도 있는 어떤 행위가 어떻게 일어났는지 그 면면들을 상상할 수 있게 해준다고 그녀는 말했다.나탈리 데이비스를 통해 문학을 통한 역사 이해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었다. 문학 작품은 역사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접근법이 된다. 딱딱하고 외울 것 많은 역사가 이야기로 순화되면서 재미있게 다가오는 것이다. 영화도 역사를 공부하는 데 흥미와 관심을 불러일으킨다. 아이들에게 프랑스 혁명의 원인이 된 왕과 귀족의 사치스런 생활에 따른 재정 적자를 설명할 때, 영화를 보여주면 장점이 있다. 나탈리 데이비스는 이렇게 인류사와 지방사·민속사에 관심이 많은 편이지만 심리학 혹은 정신분석학적 접근은 거부하였다. 그녀에게 그것은 환원주의적으로 비치기 때문이었다.“현재가 아무리 침체하고 절망스럽게 보일지라도, 과거는 우리에게 변화가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것이다.” 역사에 대한 그녀의 생각을 아주 잘 보여주는 글이다.)Ⅲ. 나탈리 제이먼 데이비스에 관하여나탈리 데이비스에 관한 자료를 수집하던 중 한국프랑스학회에서 발표한 논문을 발견하였다. 조한욱 선생님이 한국프랑스학회 2004년도 춘계학술발표회에서 ‘문화로 본 프랑스 역사’를 발표했는데 그 논문에 나탈리 데이비스에 관한 글이 실려 있었다. ‘문화로 본 프랑스 역사’는 나탈리 데이비스와 로버트 단턴의 주요 저서에 관해 설명하고 있는데, 이 논문을 통해 나탈리 데이비스의 저서와 일생에 대해 간단하게 살펴보도록 하겠다.『마르탱 게르의 귀향』이라는 영화와 같은 제목의 책이 번역 출판됨으로써 우리에게 알려진 나탈리 데이비스는 유럽 근대사라는 방대한 영역을 대표하는 미국의 역사가이다. 오늘날 우리가 유럽 근대와 관련하여 ‘문화사’, ‘여성사’, ‘인류학적 역사’ 등등의 개념을 어느 정도 친숙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까닭은 이미 오래 전부터 그녀가 닦아 놓은 길이 열려있기 때문이다.나탈리 데이비스는 1959년 박사 학위 논문 “신교와 리용의 인쇄공들”을 완성시켰다. 이 논문은 몇 가지 점에서 근대 초 종교 개혁의 연구에 신기원을 이룩하였다.종교개혁의 사회적 차원을 고려할 때는 경제적 계급뿐 아니라 평신도와 성직자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영적 계급 사이의 투쟁도 그 배경으로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마르크스의 경제적 결정론이라는 단선적인 축에서 벗어나 다양한 개념의 틀을 사회사 연구에 도입시킨 선례로서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빈민 구제, 휴머니즘과 이단”과 “16세기 프랑스의 한 노동조합”은 나탈리 데이비스가 학자로서 초기의 단계에 추구하던 사회사의 모습을 보여주는 논문이다. 이렇듯다.
古朝鮮 [王儉朝鮮]고조선 [왕검조선]魏書云. 乃往二千載有壇君王儉. 立都阿斯達.[經云無葉山. 亦云白岳. 在白州地. 或云在開城東. 今白岳宮是.] 開國號朝鮮. 與高同時.위서운. 내왕이천재유단군왕검. 립도아사달.[경운무엽산. 역운백악. 재백주지. 혹운재개성동. 금백악궁시.] 개국호조선. 여고동시.《위서》에 이른다. "지금으로부터 2,000년 전에 단군 왕검이 있었다. 그는 아사달[경에는 무엽산이라 하고 또는 백악이라고도 하는데 백주에 있었다. 혹은 또 개성 동쪽에 있다고도 한다. 이는 바로 지금의 백악궁이다]에 도읍을 정하고 새로 나라를 세워 국호를 조선이라고 불렀다. 고(高)와 같은 시기였다."古記云. 昔有桓因[謂帝釋也]庶子桓雄. 數意天下. 貪求人世. 父知子意. 下視三危太伯可以弘益人間. 乃授天符印三箇. 遣往理之.고기운. 석유환인[위제석야]서자환웅. 삭의천하. 탐구인세. 부지자의. 하시삼위태백가이홍익인간. 내수천부인삼개. 견왕리지.또 《고기》에는 이렇게 말했다. "옛날에 환인[제석을 이른다]의 서자 환웅이 있었다. 자주 천하에 뜻을 두어 사람이 사는 세상을 탐냈다. 그 아버지가 아들의 뜻을 알고 삼위태백산을 내려다보니 인간들을 널리 이롭게 해 줄 만했다. 이에 환인은 천부인 세 개를 주어, 가서 그것을 다스리도록 하였다.雄率徒三千, 降於太伯山頂[卽太伯今妙香山.]神壇樹下. 謂之神市. 是謂桓雄天王也. 將風伯雨師雲師. 而主穀主命主病主刑主善惡. 凡主人間三百六十餘事. 在世理化.웅솔도삼천, 강어태백산정[즉태백금묘향산.]신단수하. 위지신시. 시위환웅천왕야. 장풍백우사운사. 이주곡주명주병주형주선악. 범주인간삼백륙십여사. 재세리화.환웅은 무리 삼천을 거느리고 태백산 마루[곧 태백산은 지금의 묘향산]에 있는 신단수 밑에 내려왔다. 이곳을 신시라 하고, 이 분을 환웅천왕이라고 이른다. 그는 풍백 · 우사 · 운사를 거느리고 곡식 · 수명 · 질병 · 형벌 · 선악 등을 주관하고, 모든 인간의 360여 가지 일을 주관하여 세상을 다스리고 교화하였다.時有一熊一虎, 同穴而居. 常祈于神雄. 願化爲人. 時神遺靈艾一炷, 蒜二十枚曰. 爾輩食之. 不見日光百日 便得人形.시유일웅일호, 동혈이거. 상기우신웅. 원화위인. 시신유령애일주, 산이십매왈. 이배식지. 불견일광백일 변득인형.이 때 범 한 마리와 곰 한 마리가 같은 굴 속에서 살고 있었다. 항상 신웅에게 빌어 사람이 되기를 원하였다. 이때 신웅이 신령스러운 쑥 한 줌과 마늘 20개를 주면서 말하였다. '너희들이 이것을 먹고 백일동안 햇빛을 보지 않으면 곧 사람이 될 것이다.'熊虎得而食之忌三七日. 熊得女身. 虎不能忌. 而不得人身. 熊女者無與爲婚. 故每於壇樹下. 呪願有孕. 雄乃假化而婚之. 孕生子. 號曰壇君王儉.웅호득이식지기삼칠일. 웅득녀신. 호불능기. 이부득인신. 웅녀자무여위혼. 고매어단수하. 주원유잉. 웅내가화이혼지. 잉생자. 호왈단군왕검.곰과 범이 이것을 받아서 먹고 삼칠일을 조심했다. 곰은 여자의 몸으로 변했으나, 범은 조심을 못해서 사람의 몸으로 변하지 못했다. 웅녀는 혼인해서 같이 살 사람이 없으므로, 날마다 단수 밑에서 아이 갖기를 축원했다. 환웅이 이에 임시로 변하여 그와 혼인하였다.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니 단군 왕검이라 불렀다.以唐高卽位五十年庚寅.[唐高卽位元年戊辰. 則五十年丁巳. 非庚寅也. 疑其未實.] 都平壤城.[今西京.] 始稱朝鮮. 又移都於白岳山阿斯達. 又名弓[一作方]忽山. 又今彌達. 御國一千五百年.이당고즉위오십년경인.[당고즉위원년무신. 즉오십년정사. 비경인야. 의기미실.] 도평양성.[금서경.] 시칭조선. 우이도어백악산아사달. 우명궁[일작방]홀산. 우금미달. 어국일천오백년.당고가 즉위한 지 50년인 경인년[당고가 즉위한 원년은 무진년이니 50년은 정사요, 경인이 아니다. 이것이 사실이 아닌지 의심스럽다]에 평양성[지금의 서경]에 도읍하여 비로소 조선이라고 불렀다. 또 도읍을 백악산 아사달로 옮기더니 궁홀산[일명 방홀산]이라고도 하고 금미달이라고도 한다. 1,500년 동안 여기에서 나라를 다스렸다.周虎王卽位己卯. 封箕子於朝鮮. 壇君乃移於藏唐京. 後還隱於阿斯達爲山神. 壽一千九百八歲.주호왕즉위기묘. 봉기자어조선. 단군내이어장당경. 후환은어아사달위산신. 수일천구백팔세.주나라 호왕이 즉위한 기묘년에 기자를 조선에 봉했다. 단군은 장당경으로 옮겼다가, 후에 아사달에 돌아와 숨어 산신이 되니, 나이는 1,908세였다."唐裵矩傳云. 高麗本孤竹國.[今海州] 周以封箕子爲朝鮮. 漢分置三郡. 謂玄?, 樂浪, 帶方.[北帶方.]당배구전운. 고려본고죽국.[금해주] 주이봉기자위조선. 한분치삼군. 위현도, 낙랑, 대방.[북대방.]당나라《배구전》에 이르기를, "고려는 원래 고죽국[지금의 해주]이었다. 주나라에서 기자를 봉하면서 조선이라 했다. 한나라에서는 세 군으로 나누어 설치하였으니 이것은 곧 현도 · 낙랑 · 대방[북대방]이다."通典亦同此說.[漢書則眞臨樂玄四郡. 今云三郡, 名又不同. 何耶.]통전역동차설.[한서즉진림락현사군. 금운삼군, 명우부동. 하야.]《통전》에도 역시 이 말과 같다. [《한서》에는 진번 · 임둔 · 낙랑 · 현토의 네 군으로 되어 있다. 여기서는 세 군을 이르고, 이름 또한 같지 않으니 어찌된 것인가?]위만조선(魏(衛)滿朝鮮)의 조선전(朝鮮傳)에는 이렇게 씌어져 있다. "맨 처음 연(燕)나라 때부터 진번(眞蕃)·조선(朝鮮; 안사고顔師古는 말하기를, 전국戰國 시대에 연燕나라가 처음으로 이 땅을 침략해서 차지했다고 한다)을 침략해서 이를 차지하고, 관리들을 두어 변방(邊方)의 요새(要塞)를 쌓았다. 그 뒤에 진(秦)이 연(燕)을 멸망시키자 이 땅을 요동군(遼東郡) 변방에 소속시켰다. 한(漢)나라가 일어나자 이 땅이 너무 멀어 지킬 수 없다 하여 다시 요동의 옛날 요새(要塞)를 수리해서 쌓고 패수(浿水)로 경계를 삼아(안사고顔師古는 말하기를, 패수浿水는 낙랑군樂浪郡에 있다고 했다) 연(燕)나라에 소속시켰다.연(燕)나라 왕 노관(盧관)이 한(漢)나라를 배반하고 흉노(匈奴)에게로 들어가니, 연(燕)나라 사람 위만(衛滿)은 망명(亡命)해서 무리 1,000여 명을 모아 요동(遼東)의 요새지를 넘어 도망하여 패수(浿水)를 건넜다. 여기에서 진(秦)나라의 옛 빈 터전인 상하(上下)의 변방에 자리를 잡고 살았다. 차츰 진번(眞蕃)·조선(朝鮮)의 오랑캐들과 또 옛날에 연(燕)과 제(齊)에서 망명(亡命)해 온 자들을 자기에게 소속시켜 왕이 되어 왕검(王儉; 이기李寄는 땅이름이라 했고, 신찬臣瓚은 말하기를 왕검성王儉城은 낙랑군樂浪郡의 패수浿水 동쪽에 있다고 했다)에 도읍했다. 위만(衛滿)은 군사의 위력(威力)으로 그 이웃의 조그만 읍(邑)들을 침략하여 항복시켰다. 이에 진번(眞蕃)과 임둔(臨屯)이 모두 복종해 와서 그에게 예속되니 사방이 수천 리나 되었다. 위만은 아들에게 왕위를 전하고 손자 우거(右渠; 안사고顔師古는 말하기를, 위만의 손자 이름이 우거右渠라고 했다)에게 이르렀다.진번과 진국(辰國)이 한나라에 글을 올려 천자(天子)를 뵙고자 했으나 우거(右渠)는 길을 가로막고 지나지 못하게 했다(안사고顔師古는 말하기를, 진국辰國은 진한辰韓이라고 했다). 원봉(元封) 2년에 한나라에서는 섭하(涉何)를 보내어 우거를 타일렀지만 우거는 끝내 명령을 듣지 않았다. 섭하(涉何)는 그곳을 떠나 국경에 이르러 패수에 당도하자 말을 모으는 구종(驅從)을 시켜서 자기를 호송(護送)하러 온 조선의 비왕(裨王) 장(長; 안사고顔師古는 말하기를, 장長은 섭하涉何를 호송護送하는 자의 이름이라고 했다)을 찔러 죽였다. 그리고는 곧 패수를 건너 달려서 변경 요새를 넘어 자기 나라에 돌아가 이 사실을 보고했다.한나라 천자는 섭하를 임명하여 요동의 동부(東部) 도위(都尉)를 삼았다. 조선은 섭하를 원망하여 불의에 그를 쳐 죽였다. 천자는 누선장군(樓船將軍) 양복(楊僕)을 보내서 제(齊)에서 배를 타고 발해(渤海)로 건너가 조선을 치게 하니 병력은 5만이었다. 좌장군(左將軍) 순체(荀체)는 요동으로 나와서 우거(右渠)를 쳤다. 우거는 지세가 험한 곳에 군사를 내어 그를 막았다. 누선장군(樓船將軍)은 제(齊)의 군사 7,000명을 거느리고 먼저 왕검성(王儉城)에 이르렀다. 이때 우거는 성을 지키고 있었는데 누선(樓船)의 군사가 얼마 되지 않는 것을 정탐해서 알고 곧 나가서 누선을 공격하니 누선이 패해 달아났다. 누선장군(樓船將軍) 양복은 군사들을 잃고 산 속으로 도망해서 죽음을 면했다. 좌장군(左將軍) 순체(荀체)도 조선의 패수 서쪽을 쳤지만 깨뜨리지 못했다.
지역과 문화의 벽을 넘어한국으로 건너오는 이주 여성들- 사회지리학적 연구 주제로서 결혼 이주 여성의 문제Ⅰ. 들어가는 말 - 이주 여성을 쉽게 볼 수 있는 우리 사회Ⅱ. 지역과 문화의 벽을 넘어 한국으로 건너오는 이주여성Ⅲ. 결혼 이주여성의 삶과 현실Ⅳ. 결혼 이주여성 적응 지원 방안Ⅴ. 나오는 말Ⅰ. 들어가는 말 - 이주 여성을 쉽게 볼 수 있는 우리 사회언제부턴가 우리는 삶의 여러 부분에서 다양한 국적과 언어, 종교를 가진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다. 대학에서 강의를 들을 때도 외국인 학생들을 종종 볼 수 있고, 회사나 거리에서 외국인 노동자들을 만날 수 있다. 텔레비전에서는 외국 여성들이 나와 자기 나라와 우리 나라의 문화에 대해 토크쇼를 벌이기도 하고, 베트남 아가씨와의 국제 결혼을 다룬 드라마도 몇 번 방영되었다.사실 나는 외국인 노동자와 이주 여성, 다문화 가정 등에 대해 별 관심이 없었다. 국제 결혼이 해마다 크게 증가하고 있는 추세이지만, 주위에서 국제 결혼 가정을 본 적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학에 와서 외국인 노동자 센터와 연대하는 주막 축제를 하게 되면서 한국에 살고 있는 외국인, 특히 여성과 노동자의 삶을 생각해보게 되었다.사회지리학은 사회적인 문제와 요소들의 지리학적 관점에 관심을 갖는 학문이다. 사회지리학적으로 연구되고 있는 주요 주제들에는,(1) 산업화·도시화와 지역사회의 재구성(2) 다양한 도시 내부 문제들 : 빈민생활, 주거문제, 교육, 의료보건문제, 문화시설 부족(3) 문화경관에 관한 사회지리학적 연구(4) 새로운 사회문제들 : 성, 신체, 공동체(5) 환경문제의 사회지리학적 연구등이 있다. 그래서 사회지리학의 연구주제들을 보완하면서 우리 사회의 문제들을 고찰할 수 있는 문제가 무엇인지 고민하다가 ‘이주여성 문제’ 특히 ‘결혼 이주여성의 문제’에 관해 논문을 읽고 요약·정리해보기로 했다. 결혼 이주여성의 문제는 사회지리학의 연구에서 매우 확장된 형태라고 생각한다. 여기에서는 특히 아시아에서 건너오는 이주여성들의 특징을 살은 세 개의 유형으로 구분가능하다.① 이주여성노동자 ② 성산업에서의 이주여성 ③ 국제결혼이주여성(여성결혼이민자)아시아 지역의 여성 이주 자료를 토대로 접근해 볼 때, 아시아 지역 여성 이주의 특징은 크게 3가지로 간추릴 수 있다.첫 번째, 이주 여성의 국적이 다양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주 여성 노동력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면서, 각 유입 국가들은 노동력 유입 범위를 확대하고 있다. 대만의 경우는 베트남과 태국 여성이 증가하고, 말레이시아의 경우 캄보디아 여성이, 한국의 경우는 몽골, 러시아, 우즈베키스탄의 여성 이주가 증가하였다.두 번째 특징은 이주 여성의 거주 및 취업 기간이 길어지는 점이다. 예를 들어, 2002년 대만 정부는 이주 노동자가 최고 6년까지 재입국할 수 있도록 허가하였다. 또한 이주 여성의 입국 비자의 종류와 형태가 다양화되면서, 무기한으로 입국이 허가된 이주 여성의 수도 증가하였다. 특히, 일본과 한국의 경우는 결혼 배우자의 자격으로 입국하는 수가 늘어, 이주자의 내국민화가 나타나고 있다.세 번째 특징은, 증가하는 이주에 상응하는 각 국가의 대처능력 미비가 시민사회 및 민간 분야의 활동을 활성화시킨다는 점이다. 즉, 이주의 양적 질적 확대는 이들의 활동 영역을 더욱 확장시켰고, 각 이주의 특수성을 감안한 전략적 대안과 전문적 조언을 가능하게 하였다. 이와 함께, 이주 여성 자신도 인종, 국적, 언어, 종교, 지역 등을 기반으로 한 네트워크 형성을 통해 그들만의 지반 구조를 형성하고 있다.)2. 한국 사회의 국제 결혼 증가2006년 3월 말 발표된 통계청 자료에 의하면 2005년 한 해 동안 한국인의 혼인 316,375건 중 43,121(약 14%)이 외국인과의 혼인이다. 그 중 한국인 남성과 외국인 여성의 혼인은 총 31,180건으로 중국(66.2%), 베트남(18.7%), 일본(4.0%) 순으로 나타나며, 그 중 베트남이 2004년에 비해 136.5%의 높은 증가율을 보인다. 베트남의 갑작스런 증가는 최근 성업 중인 국제결혼 알선업체의 역보면, 20대가 24.5%, 30대 초반과 30대 후반이 각각 29.6%와 25.7%를 차지하였고, 40대 이상은 20.2%를 차지하였다(평균연령은 34세). 그런데 이주여성의 국내 거주기간이 평균 6.1년이라는 사실을 고려하면 결혼 당시 평균 연령은 28.2세로 추정할 수 있다. 다른 한편, 국제결혼 이주여성의 학력은 높은 편인데, 고등학교 학력을 가진 여성이 42.8%를 차지하였고, 전문대와 대학 이상의 학력을 갖고 있는 여성 또한 각각 19.1%와 17.6%를 차지하였다.그리고 국제결혼 이주여성의 한국 입국 당시 한국어 이해 수준을 살펴보면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즉 한국어를 어느 정도 이해한 이주여성은 1/4 수준에 불과한 반면, 이해가 부족한 이주여성이 46.3%로 다수를 차지하였고, 나머지 28.5%는 중간수준이었다.국제결혼 이주여성의 출신국 분포를 살펴보면, 조선족, 필리핀, 일본 국적의 이주 여성이 각각 34.9%, 31.2%, 24.2%로 다수를 차지하였다. 그 밖에 베트남 출신 여성이 5.3%를, 그리고 기타가 4.3%를 차지하였다.)Ⅲ. 결혼 이주여성의 삶과 현실1. 결혼 이주여성의 고통2005년 어울림)상담 통계에 따르면, 취업, 육아, 부부갈등, 고부갈등, 출국 등을 포함한 기타 생활 상담이 78건(38.9%)으로 가장 높았고, 단일상담으로는 이혼 32건(15.8%), 가정폭력, 국적, 비자 등의 순으로 나타났다. 이혼, 국적, 비자상담이 높은 것은 한국 내에서 결혼이주민의 취약성을 대변한다. 즉 결혼 후 2년이 경과한 후 귀화신청 자격이 주어지므로 그 기간 동안 가정 내에서 폭력이나 부당한 대우를 받는다 해도 문제제기가 어렵다. 이 기간 동안 이주여성에 대한 다양한 인권유린이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대다수의 내담자는 국제결혼알선업체, 특정 종교 혹은 지인의 소개로 만난 한국인 배우자와 평균연령차 15세 이상이며, 한국에 입국한지 2년 이내의 이주여성들이다.알선을 통한 결혼은 금품수수로 인한 매매형식을 띨 가능성도 배제할 수 05년 봄 국제결혼알선업체를 통해 입국한 필리핀 린(26세,가명)은 한국인 김씨(42세,무직)와 더 이상 살 수 없었다. 그는 필리핀에서 백화점에서 일하면서 나름대로 독립된 생활을 하였고 한국에서 보다 나은 삶을 꿈꾸며 결혼하였다. 한국에 와서 보니 남편은 아무런 일을 하지 않고 부모님께 얹혀 살았다. 용돈을 타서 써야함을 물론이거니와 부모님은 이미 성인인 남편과 자신을 어린아이 취급했다. 또한 부모님은 이들 부부의 성생활까지 일일이 참견하여 심한 모멸감을 느꼈다고 했다. 린은 7월에 가출하여 공장에서 일하다가 출입국에 단속되어 강제출국 당했다.사례 두울. ‘미등록 신부에서 미등록 노동자로’조선족 동포 정씨는 2002년에 한국인 남성과 결혼하여 입국하였지만 남편은 지능이 떨어지고 모든 집안일은 시아주버니의 관섭과 주관으로 이루어졌다. 심지어 도주를 우려해 외국인 등록증을 만들어 주지 않아 1년 7개월 동안 미등록으로 살아야했다. 그러나 시아주버니의 구타와 심한 간섭으로 결국 집을 뛰쳐나와 부산의 모 공장에서 일하다 지난 8월 출입국에 단속되었다. 정씨는 너무 억울해 출입국에서 두 차례 자살을 기도하였고 출입국관리 사무소는 인권모임에 이 사건을 의뢰하여 일시보호해제를 받아 이혼 및 위자료소송을 진행하였고 현재 귀화심사 중이다. 그의 요구가 받아들여지면 그는 한국인이 되어 살게 될 것이다.사례 세엣. ‘엄마 노릇도 못하고’)한 이주여성이 아기를 임신하고 아들을 출산하였다. 남편이 늦장가 들어서 낳은 아기라 온 집안 식구들이 기뻐하였다. 한달, 두달 지나고 어느덧 아기는 옹아리를 하기 시작하였다. 엄마는 자신의 모국어로 아기와 의사소통하며 행복해 했다. 어느날··· 시어머니가 아기와 모국어로 옹알이를 받아 주는 것을 못하게 하였다. 아기가 한국어를 잘 못하면 어떻게 하느냐라는 것이다. 남편도 동조하고 시누이를 비롯한 온 가족이 이주여성에게 협박(?)하여 모국어를 사용하지 못하게 하였다. 이주여성은 기가 막히고 슬펐다.2. 한국인 배우자와 그 가족의 고민한편, 이주여 이어지다국제결혼 부부의 이혼은 매우 큰 폭으로 증가하고 있다. 아래 표에 의하면, 2004년 3,400건으로 전년 대비 57.1%가 증가하다 2005년 25.8%로 다소 낮아졌지만 2006년 6,280건으로 전년 대비 46.8%로 증가하였다. 이처럼 국제결혼 부부의 이혼이 큰 폭으로 증가한 것은 한국여성과 외국남성보다 한국남성과 외국여성의 이혼이 큰 폭으로 증가한데 따른 것이다. 한국남성과 외국 여성의 이혼은 매년 큰 폭으로 증가하고 있는데, 최근 3년 동안 평균 증가율이 거의 200%에 이르고 있다. 이와 같은 국제결혼 이주여성의 이혼이 매우 가파르게 상승하고 있어 그에 대한 대책이 요구되는 시점이다.한국남성과 외국여성 부부의 이혼에서 발견되는 특성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지역별 이혼 구성비를 살펴보면, 2006년에 전남이 4.6%로 가장 높고, 충북과 전북이 동일하게 4.3%, 경북이 4.1% 순으로 높게 나타났다. 반면에 광역시의 경우 2.6%~3.2% 수준으로 낮았다(통계청, 2007). 이러한 결과는 한국남성과 외국여성 부부의 이혼이 대도시보다 농촌지역에서 상대적으로 높게 나타나고 있음을 암시해 주고 있다.)Ⅳ. 결혼 이주여성 적응 지원 방안1. 정부와 지방 자치 단체의 역할국제결혼 이주여성을 위한 정부의 첫 번째 지원은 국적법의 개정이다. 즉 1997년 국적법이 외국인 여성의 위장결혼을 방지할 목적으로 개정되었는데 그 개정요인이 궁극적으로 국제결혼 이주여성의 인권유린과 불안정 생활을 조장하는 요인이 되고 있음을 고려하여 보완될 필요가 있다.국제결혼 이주여성을 종합적이고 체계적으로 지원할 수 있는 이주여성종합센터를 설립할 필요가 있다. 정부와 지방자치단체는 국제결혼 이주여성의 정착과정을 지원하는데 있어 역할을 분담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지방자치단체는 국제결혼 이주여성이 성공적으로 정착할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적응훈련과 함께 홍보활동을 전개할 필요가 있다.끝으로 정부는 국제결혼 이주여성의 성공적인 정착에 관한 사례를 수집하여 발간하며, 그 자
한국사 - 조선 - 사화·붕당정치·탕평책·세도정치Ⅰ. 士禍 (훈구vs사림)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士林: 조선 왕조 개창에 반대하던 사람들은 주로 영남 지방의 향촌에 은거.성리학적 사회 질서 확립을 위해 노력.: 중앙집권적 통치 < 향촌자치 / 패도 정치 < 왕도 정치: 훈·척신의 특권적 비리행위를 비판하는 가운데 정치세력으로 성장: 성종 초 김종직을 비롯한 영남 출신의 사류들이 중앙 정계 진출, 정치세력화: 유향소, 향사례, 향음주례, 삼사의 언론 문필 기관: 서원 +향약: 이에 대한 훈척계열의 정치적 보복이 사화무오사화(1498.연산군4) : 김종직 갑자사화(연산군10) : 폐비윤씨사건기묘사화(중종14) : 조광조을사사화(명종즉위) : 대윤 / 소윤선조대에 결국 정계의 주류로서 위치를 차지함.Ⅱ. 朋黨정치 (사림vs사림)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사림은 선조대에 정계의 주류로 정착 but 훈척계의 요소는 여전히 잔존.훈척정치의 척결을 둘러싸고 이견이 분열, 이것이 붕당으로 발전.1. 동인과 서인의 분열? 1575 선조8. 사림 내부의 기성관료 vs 신진관료? ‘신의겸이 척신인가 아닌가’ + 이조전랑직 문제? 신의겸 등 기성관료 서인 vs 김효원 등 신진관료 동인? 이이가 스스로 서인으로 자청하는 것을 계기로 학연성 띔? 동인은 초기부터 이황·조식의 문인들이 많아서 학연성을 가지고 있음2. 동인 안에서 남인과 북인의 분열? 서인에 대한 태도에 있어 온건파 남인 (이황) vs 강경파 북인 (조식)? 특히 서인 정철의 건저의 문제에 대한 처벌 둘러싸고 북인은 중벌 주장, 남인 반대※ 특별히 북인에 대해 !! ; 북인 내에 남아 있는 훈척계 요소에 대한 입장 차이에서 비롯- 淸議를 지키려는 측이 독립하여 소북, 나중에 -柳黨(濁소북)-南黨(淸소북)- 대북은 다시 - 골북- 육북- 북인은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퇴위하면서 함께 몰락3. 서인 vs 남인 ☆예송논쟁☆? 인조반정 후 서인이 우세한 가운데 남인 참여 (현종대까지 약 60여년 동안)? but 남인도 꾸준히 정국 진출, 서인과 두 차례의 예송 논쟁※ 1차 예송- 효종 죽음, 인조의 계비 조대비의 상복 기간이 쟁점- 송시열 등 서인 기년설(1년) vs 윤휴 등 남인 이년설(2년)※ 2차 예송- 현종 말년 효종비 사망, 다시 조대비의 복제 문제- 서인의 대공설(9개월) vs 남인의 기년설(1년)? 예송 결과 남인이 우세4. 붕당의 변질 (환국기 ; 숙종)? 남인 안에서 온건론의 탁남이 우세하여, 서인 일부 정권에 남음1680 숙종 6 경신환국 : 남인이 역모 받아 실각1689 숙종 15 기사환국 : 남인계 희빈 장씨의 아들이 세자 책봉됨1694 숙종 20 갑술환국 : 서인계 폐비 민씨 복위? 이후 서인!!5. 서인 안에서 노론 vs 소론? 남인에 대한 청분 놓고, 강경론의 송시열 노론 vs 온건론의 윤증 소장파 소론? 소론이 지지한 경종이 즉위, 신임사화(1721~1722)? but 경종이 병사, 노론이 지지한 영조가 즉위Ⅲ. 탕평책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숙종대 박세체가 제기한 적 있음- 왕권의 절대성 회복1. 영조의 탕평책- 무신난 후 영조 탕평책 실시 / ‘無偏無黨 王道蕩蕩 無黨無偏 王道平平’- 당파 초월 인재 등용, 유생들의 당론에 관한 상소 금지, 탕평비 세움- 완론 탕평(왕실·외척의 특권 세력 존재 용인)- but 벽파와 시파로 분열2. 정조의 탕평책- 노론·소론·서얼도 등용, 규장각 및 초계문신 제도- 채제공 같은 남인·소론계 일부 등 중용- 준론 탕평(특권 정치 세력 배척/ 의리·공론·청요직·실력)Ⅳ. 勢道정치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정조가 갑자기 훙거하여 어린 순조가 즉위- 정순왕후의 경주 김씨계는 신유옥사를 일으킴 + 화성의 장용영 혁파- 19세기 세도 정치는 종래의 일당 전제마저 거부하고, 특정 가문이 권력을 독점하는 정치형태. 정권의 사회적 기반 결여. 붕당 정치의 파탄 의미.- 세도 정권은 비판 세력 없음 / 백성에 대한 수탈- 김조순 : 순조의 장인, 벽파를 압도하여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 실현- 조인영 : 헌종의 외척, 풍양 조씨 세도 정치- 김문근 : 철종 시기, 안동 김씨About 성리학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1. 성리학 (=정주학·주자학·송학)성리학은 宋의 주자가 완성한 것. 종래 漢唐류의 훈고학적 유학에 대하여 우주의 근본원리와 인간의 심성문제를 철학적으로 해명하려는 신유학. 송이 멸망한 후 원에서 성행. 다시 고려에 전래됨. 고려 충렬왕 때 안향이 처음 소개하였으며, 고려 말에는 이색·이종인·정몽주·길재·권근·정도전 등이 이를 발전시킴.2. 주리론주자견해 수용. 이기이원론. ‘이>기’. 이가 기를 움직이는 본원 /이언적· 이황· 유성룡· 김성일· 정구 / 영남학파 / 일본 유학에도 영향3. 주기론서경덕이 처음으로 주자 학설을 비판하고 이기일원론 주장. 이이에 의해서 대성.‘우주만물의 근원을 기에 두고 모든 현상들이 기의 변화·운동으로 보는 입장. 여기서 이는기를 움직이는 법칙에 불과.’ / ‘본연之성 < 기질之성’ / 성혼· 송익필· 김장생· 정엽 /기호학파 / 현실인식 적극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