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사세
Bronze개인
팔로워0 팔로우
소개
등록된 소개글이 없습니다.
전문분야 등록된 전문분야가 없습니다.
판매자 정보
학교정보
입력된 정보가 없습니다.
직장정보
입력된 정보가 없습니다.
자격증
  • 입력된 정보가 없습니다.
판매지수
전체자료 18
검색어 입력폼
  • 이탈리아의 통일과정 평가A좋아요
    이탈리아 통일Ⅰ. 머리말Ⅱ. ‘리소르지멘토’에 대한 시각들Ⅲ. 19C초 이탈리아의 상황Ⅳ. 통일을 위한 노력Ⅴ. 통일의 유산Ⅵ. 맺음말Ⅰ. 머리말많은 역사 교과서들은 통상 민족주의가 19세기 초 독일에서 탄생했다고 쓰고 있다. 이 말이 옳다면, 영국과 프랑스는 민족주의 이전의 민족들인 셈이다. 이탈리아에서 민족은 1796년 그러니까 나폴레옹(Napoleon Bonaparte)의 침공이 있기 전까지는 정치적인 현실이 전혀 아니었다. 오직 나폴레옹의 지배 이후에야 민족문제는 이탈리아의 무대에 진지한 의제로 등장했다. 문화적 민족주의가 정치적인 성격을 띠면서 본격적으로 발전한 것은 독일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나폴레옹 점령기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나폴레옹 지배와 더불어 로마 제국의 붕괴 이후 내부 분열과 외국 지배에 시달린 이탈리아의 독립, 통일, 자유를 위한 문화적 민족주의와 정치적 행동주의를 가리키는 ‘민족 부흥 운동’ 곧 리소르지멘토(Risorgimento)가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현대 이탈리아의 거의 모든 쟁점들이 리소르지멘토 시기까지 소급될 수 있다. 그리고 역사 논쟁에 첨예한 이데올로기적·정치적 논쟁이 뒤얽혀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파시즘으로 변모하는 이탈리아, 또 현재까지도 남부문제를 겪고 있으며 많은 논쟁이 뒤얽혀있는 등의 사건 이상을 이탈리아의 리소르지멘토를 살펴보면서 국가의 형성과 국민의 형성이라는 이탈리아 국가 구성의 특징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Ⅱ. ‘리소르지멘토’에 대한 시각들1. 리소르지멘토의 시기에 대한 시각들리소르지멘토는 언제 시작되었는가에 대한 물음에는 다양한 답변이 가능하다. 그러나 대체로 그 시작을 1814~1815년 빈회의에 의해 구체제가 복고된 시점으로 잡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렇게 잡아야만 미래지행적인 리소르지멘토와 과거로의 회귀를 뜻하는 복고가 극적으로 대비되는 것이다. 그러나 최근의 연구들은 복고국가들이 이전 나폴레옹체제의 유산을 대체로 계승했다고 보면서 나폴레옹시대와 복고시대의 연속성을 강조하는 경향에 따라 리소르었다고 보는 것이다. 즉 파시즘의 출현은 크로체의 표현에 따른 ‘막간극’이 아니라, 그것의 현시(revelation)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람시가 이러한 견해를 내놓은 이후 사회주의적 해석은 곧 리소르지멘토를 바라보는 주요한 틀로 받아들여졌다.그러나 ‘수동적 혁명’의 패러다임은 크로체 진영에서 가장 촉망받던 역사가 로자리노 로메오(Rosario Romeo)에게 비판받았다. 그는 그람시가 프랑스의 사례에 지나치게 집착하여 “무엇이 일어나지 않았는가?”를 질문함으로써 “실제 무엇이 일어났는가?”를 외면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는, 그람시가 염두에 둔 프랑스의 발전경로는 이탈리아에서 불가능 했을 뿐 아니라 바람직하지도 않았다고 봤다. 나아가 이탈리아에서 농민혁명이 일어나지 않았던 것이 오히려 자본주의 발전에 더 유리했다고 단정했다. 로메오는 영국과 프랑스의 발전경로를 정상적인 것으로 보고 이탈리아, 독일, 러시아 등의 후발국의 발전경로를 변칙적인 것으로 보는 시각을 기본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런 점에서 이탈리아 통일을 ‘일보전진을 위한 이보 후퇴’로 보는 ‘수동적 혁명’의 시각은 이탈리아 통일과 자유주의 국가의 업적을 냉철하게 인정하지 않는 편견에 불과하다고 봤다.이 유명한 죽은 그람시와 산 로메오 사이의 논쟁은 리소르지멘토의 현실을 완벽하게 설명해주지는 못한다. 그러나 이 논쟁은 리소르지멘토의 역사서술이 철저하게 이데올로기화되고 정치화되었음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렇게 이탈리아에서 역사서술은 현재를 비판 혹은 옹호하기 위해 과거를 전유하려는 사람들 사이의 치열한 전장이었다. 그람시의 사회주의적 입장에서 볼 때 “현대 이탈리아의 결함은 과거로부터 즉, 이탈리아가 만들어질 당시부터 물려받은 것이다. 그렇다면 바람직한 이탈리아를 위해 이탈리아는 어떻게 만들어졌어야 하는가?” 이에 대한 해답을 구하고자 이웃 프랑스의 성공담을 비교대상으로 정하는 것은 좌파에게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반면에 크로체나 로메오로 대표되는 보수주의적-자유주의적 입장에서 보면, 현대 이이로써 이탈리아에는 장기간에 걸친 오스트리아의 전제적 지배가 종결되고 프랑스의 혁명사상과 제도, 나폴레옹 법전이 도입되는 등 근대화가 크게 진전되었다.이탈리아인들은 중앙집권적 행정조직과 사법제도를 도입해서 처음으로 근대적 공적 생활을 경험하게 되었고, 이른바 ‘국가감정’을 지니게 되었다. 또 훗날 인텔리겐챠가 되어 리소르지멘토에서 열정적인 소수로 자리 잡는 이들이 나폴레옹 시대에 새로 건립된 다양한 교육기관에서 고등교육을 받고 군대, 공직, 언론생활의 경험을 통해 성장했다는 것이다.나폴레옹의 이탈리아는 나폴레옹의 실각과 함께 15년의 생을 마감한다. 그리고 빈회의의 ‘정통성 원칙’에 입각하여 이탈리아는 또다시 구체제의 군주들이 돌아와 예전대로 군주국가로 분리되었다. 나폴레옹 1세 시대에 이탈리아인의 정열을 불붙여 놓은 민족해방이라는 국민적 여망은 1815년 빈체제가 성립됨으로써 무산된 것이다. 이탈리아는 정통주의의 원칙에 따라 크게 보면 7개의 부분으로 나뉘었다.) 사보이아 군주치하에 있는 사르데냐 왕국, 오스트리아에 예속된 롬바르디아-베네토 왕국, 나폴레옹 1세의 부인 합스부르크-로레나의 마리루이즈 치하에 있는 파르마 피아첸차 공국, 보르보네 왕조의 마리 루이즈 치하에 있는 루카 공국, 마리아 베아트리체 데스테 치하에 있는 마사카라 공국, 교황의 세속적 권세하에 있는 교황령, 그리고 보르보네 왕조 치하에 놓인 양 시칠리아 왕국으로 분리되어 외세의 지배를 감수해야 하였다. 이 복고국가들은 전혀 ‘이탈리아적’이지 못했고 내부의 심각한 지역문제를 안고 있었다. 철저하게 유럽 열강들과 왕조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선이 그어진 이탈리아는 오스트리아의 재상 메테르니히(Klemens von Metternich)의 말처럼 그저 ‘지리상의 표현’에 지나지 않았다.2. 복고와 리소르지멘토에 대한 시각전통적인 시각에 따르면, 복고는 리소리지멘토의 반명제이다. 부흥이 자유라면 복고는 억압이고 부흥이 진보라면 복고는 반동이라 보는 선악의 이분법이 자리잡고 있던 것이다. 확실히 복고국가Carlo Cattaneo)가 이끄는 이른바 임시정부가 수립되어 이른바 "영광의 5일"을 보냈고, 베네치아에서는 다니엘레 마닌(Daniele Manin)에 의해 베네치아 공화국이 세워졌다. 또한 피에몬테에서는 국왕 카를로 알베르토(Carlo Alberto)가 자유주의적 헌법에 서명하고 전향적 자유주의 개혁을 실시했으며 마침내 오스트리아에 선전포고를 하기에 이르렀다. 또한 1849년 1월에는 로마에서 교황이 축출되고 마치니-가리발디가 주도하는 로마 공화국이 수립되었다. 그러나 이런 일련의 혁명 시도들은 모두 외세에 의해 좌절되고 만다. 우선 밀라노와 베네치아는 얼마 지나지 않아 오스트리아의 봉쇄를 못 견디고 투항하고 말았고 피에몬테는 쿠스토자(Custoza)와 노바라(Novara)에서 전투에 패배하여 카를로 알베르토 국왕은 왕위를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Vittorio Emanuele Ⅱ)에게 넘기고 망명할 수밖에 없었다. 로마에서도 프랑스 군대가 시내에 진입하면서 공화국은 얼마 못 가 붕괴하여 전국적인 혁명은 모두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하지만 혁명은 몇 가지의 교훈을 남겼다. 첫째, 이탈리아 인들은 이 일을 계기로 이탈리아의 독립과 자유와 통일이 이탈리아 인들의 힘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즉, 타 열강의 조력이 필수적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둘째, 급진적 민주파의 전망은 더 이상 리소르지멘토의 현실적 대안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셋째, 이탈리아 역사를 끈질기게 따라다니던 교황주의의 환상도 마침내 깨어졌다. 신교황주의는 당시 빈첸초 조베르티(Vincenzo Gioberti) 등에 의해 큰 지지를 얻고 있던 경향이었는데 이들에 따르면 교황이야말로 당시 이탈리아 반도에서 유일하게 이탈리아적인 세력이며 그를 중심으로 가톨릭 정체를 만들어야만 이탈리아의 진정한 통일을 달성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교황 자신이 프랑스 세력을 끌어들이게 되면서 교황은 결코 이탈리아의 동반자가 아님이 입증되었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넷째의하기 위해 프랑스의 도움을 요청하는 위험을 감수해야만 했다. 오스트리아군을 축출하기 위해 프랑스의 도움이 불가결하다고 본 그는 1858년 나폴레옹 3세)를 극비리에 만나 도움을 플롱비에르 밀약)을 맺고 이듬해 오스트리아와 전쟁이 일어났다.카보우르의 계략에 걸린 오스트리아는 밀약을 맺은 지 1년도 안 되어 피에몬테에 선전 포고하였다. 프랑스는 2만 명의 군대를 동원했으며 오스트리아령 롬바르디아에 진격했고 마젠타와 솔페리노의 격렬한 전투 끝에 오스트리아군이 철수했다. 그러나 나폴레옹 3세는 일방적으로 오스트리아와 휴전하였다. 왜냐하면 프랑스는 피에몬테의 세력이 너무 커지는 것을 우려했던 점과 이탈리아에서 프랑스의 세력권이 커지는 것을 원치 않았던 프로이센의 군사동원을 우려했던 점, 그리고 로마가 이탈리아의 수도가 되는 경우 이는 로마 교황령에 대한 위협이며 이는 프랑스 가톨릭교도들이 나폴레옹 3세의 군사외교를 비난할 것이 예상되었기 때문이다. 실제 당시 프랑스는 오스트리아와 전쟁하는 한편, 이탈리아의 공화주의로부터 교황을 보호하기 위해 1849년 파견되어 아직도 로마에 주단하고 있는 미묘한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프랑스·오스트리아 협정은 나폴레옹 3세의 배신행위는 오히려 이탈리아의 애국자들을 피에몬테 편으로 규합시켰다. 피에몬테는 오직 롬바르디아를 얻었을 뿐)이지만 전쟁으로 오스트리아의 영향력이 소멸된 시점에서 중부의 네 국가(토스카나, 모데냐, 파르마, 로마냐)에 혁명정부가 들어섰고 이들은 피에몬테와의 국민투표를 통해 합병을 결정했다. 카보우르는 사보이와 니스를 프랑스에 양도하고 1860년 북부 및 중부 이탈리아를 통합하는 데 성공했다.피에몬테는 그나마 프랑스의 힘을 빌어 반도의 절반을 통합했지만 나머지 절반을 통합할 힘까지는 없었다. 그 힘은 다른 곳에서 나왔는데, 니스 출신 가리발디(Giuseppe Garibaldi)는 1859년의 전쟁의 성과를 남이탈리아까지 확대하기 위해 1천명으로 구성된 특공대인 ‘적의대’를 조직했다. 가리발디가 적의대를 이끌고 시칠리아 .
    인문/어학| 2008.01.03| 8페이지| 1,500원| 조회(648)
    미리보기
  • 고대인의 장례풍습
    1. 구석기 시대‘훙수아이’는 충북 청원군 가덕면 노현리 시남부락의 두루봉 동굴에서 발굴된 구석기 시대의 어린아이 화석을 말한다. 흥수아이는 어떤 장법을 사용하였을까? 발굴 당시의 모습을 살펴보면, 맨 아래에 넓고 편평한 석회암 낙반석을 깔고 그 위에 고운 흙을 뿌린 다음, 아이의 주검을 똑바로 펴 묻고 국화꽃을 뿌렸다. 그리고 다시 그 위에 고운 흙을 뿌려 살짝 덮은 다음, 넓적한 돌 판들을 이용하여 덮었다. 이 흥수아이에서 사용된 장법은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을 보여준다. 먼저 적어도 이 시대부터는 죽음과 주검을 함부로 다루지 않았으며, 상당한 경외심을 갖고 있었다는 점이다. 또 위를 보도록 반듯하게 펴 묻은 모습은 오늘날의 우리의 방법과 거의 같으며, 바닥에 판돌을 깔고 주검을 안치한 다음 다시 판석으로 덮은 것은 마치 돌널을 연상케 한다. 또한 주검을 동굴에 안장하는 동굴장이라는 장법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문제는 흥수아이의 뼈가 너무 온전히 보존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밖에 한반도 구석기 시대의 장례 관습을 보여주는 유적은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 앞으로 더 많은 유적을 발굴하고 더 깊이 연구하여 새로운 답을 찾아야 한다.인지에 눈뜬 사람들은 처음에는 주검을 바위틈에 숨기거나 풀 또는 나뭇가지로 감추었다. 어떤 곳에서는 자신들이 살던 동굴에 버려두기도 했다. 오랜 세월이 흐른 후에 사람들은 주검을 흙으로 덮어두면 보기 흉한 것도 가리고 악취도 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그리고 분명한 것은, 우리의 옛 선조들이 동굴에서 살았고 사랑하는 가족이 죽으면 바로 그 동굴에 묻기도 했다는 사실이다. 이런 동굴장의 장례 관습은 신석기 시대를 지나 고구려에서도 나타나기도 한다.2. 신석기 시대빙하기가 지나간 기원전 1만여년전에 이르면 수렵·채집의 자연경제에서 벗어나 농사와 가축 기르기 등과 같은 신석기 시대 생산경제 단계로 접어든다. 인류는 움집의 구조나 규모로 보아 네 명 내외의 사람들이 한 가족을 이루고 살았으며, 움집들이 모여 있는 것으로 보아 씨족사회에 접어든 것으로 보인다. 이렇듯 한곳에 모여 살던 사람들은 구성원의 죽음이 큰 충격으로 다가왔을 것이고, 그로 인해 원시적이나마 신앙심이 생겨나기 시작한다. 자연신앙(애니미즘)에 따라 모든 자연물에 영혼이 있고 그것은 불멸한다고 믿기 시작하였다. 사람 또한 영혼을 지니고 있어서 비록 육체는 죽더라도 영혼만은 멸하지 않고 살아 있다고 믿었다. 그러므로 죽은 사람의 시체를 매장하는 데 좀 더 특별한 주의를 기울이게 되었다. 즉 주검의 머리를 일정한 방향으로 놓고, 얼굴을 위로 향하게 하며, 몸은 꼿꼿이 펴서 뉘었다. 그리고 시체주의에 빙 둘러 돌을 놓아 보호하려 하였으며, 돌화살촉이나 토기를 부장하여 죽은 뒤의 생활에도 불편이 없도록 하였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 자손은 조상의 영혼에게 보호를 받는다고 믿은 것이다.하지만 죽은 자가 숭배만 받은 것은 아니다. 때로 죽은 자가 산 자를 해코지나 하지 않을까 두려워하며 영혼이 떠돌아다니지 못하도록 돌무지로 덮어두기도 하였다. 지금도 묘를 쓸 때면 달구질을 한다고 하여, 여러 사람이 장단에 따라 나무 막대기로 두드리며 발로 꼭꼭 다져 밟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처럼 죽은 자는 숭배를 받으면서도 한편으로 두려움의 대상으로 기피되기도 하였다.이때 오면 일정한 크기의 흙구덩이를 파고 그 안에 시신을 안치하고서 부장품을 함께 묻는 일종의 널무덤을 만든 것이 보이기도 한다. 장법은 일반적으로 신전장(주검의 팔다리를 바로 펴서 뻗치도록 하여 장사를 지내는 가장 일반적인 형식으로 현대에도 이 방법을 쓴다.) 일부에는 굴신장(주검을 굽혀서 묻는 장법으로, 죽은 자의 영혼을 억누르기 위한 것이라는 견해와 다음 생에 다시 태어나기를 기원한다는 견해가 있다.)도 있었고, 세골장도 있었다. 그리고 가족 의식의 발달에 따라 가족묘지와 부부를 한 무덤에 같이 묻는 합장, 한 무덤에 씨족이 차려로 묻히는 집장도 나타나게 되었다. 이외에도 화장, 풍장, 수장을 볼 수 있으며 특히 화장을 하고 옹관에 유골을 담아 안치하는 모습도 이때 보이기도 한다.3. 청동기기원전 1000여 년전에 이르면, 우리 조상들은 청동으로 만든 생활도구를 사용하게 된다. 이시기 장법의 가장 큰 특징은 돌을 널리 사용하였다는 것이다. 이 시기의 대표적인 무덤은 고인돌이다. 사회·경제적으로 높은 계층에 있었던 사람들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 사이의 차이가 무덤에서 나타났다.이 시기에는 새의 뼈를 넣기도 하고 묻힌 자의 신분을 상징하는 칼을 함께 매장하기도 했다. 이러한 의식은 죽은 자를 보호한다는 생각을 그대로 다고 있다. 또 부장한 유물의 칼과 거울 등은 오늘날 무당들이 사용하는 무구와 일치하는 양상을 보인다. 따라서 이 시대의 신앙적 배경은 무속(샤머니즘)이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원시 공동체 사회에서 발생한 우리나라의 무속은 삼구 시대 등 여러 시대를 거쳐 현재에 이르기까지 수천 년간 그 맥을 이어오고 있다.청동기 시대의 장례문화를 의례라는 측면에서 살펴보면, 고인돌에서는 일정한 격식을 지닌 장례의식이 행해진 것으로 보인다. 그 증거로 제시되는 것이, 일반적으로 고인돌 주변의 출토 유물이 일상용품이 많고 다량의 토기 조각이 발견되고 있다는 점인데, 이것은 고인돌에 묻힌 죽은 자의 영혼을 위하여 제사를 지낸 흔적일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따라서 무덤은 제사를 통해 죽은 자를 묻는 장소 그 이상으로 공동체의 번영을 기원하는 의례의 장소가 되기도 하였다.4. 초기국가와 삼국부여는 보통 장례 기간이 5개월에 이르렀기 때문에 귀족들은 여름에 얼음을 써서 시신의 부패를 막았다고 한다. 그리고 장례를 치를 때 여자들은 흰 수건으로 얼굴을 가린다고 하였는데, 이로 미루어 상복을 입는 풍습이 있었다고도 추측해볼 수 있다. 또 그들은 상을 치르는 기간을 되도록 오래 끄는 것을 영광으로 여겼다고 한다. 이는 당시 상황에서 지배층의 큰 무덤을 만들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이 필요했고, 긴 장례 기간 동안 시신은 임시로 빈이나 가묘에 안치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부여는 많은 물건들을 무덤에 부장하였고, 심지어 사람을 죽여 같이 묻는 순장?지 하였다. 순장은 많을 경우 수백 명에 달했다고 한다.옥저와 동예는 죽은 사람을 가매장했다가 그 뼈만 추려서 길이가 10장에 이르는 큰 나무덧널에 다시 안치하는 세골장 풍습이 있었다. 저 세상에서 먹을 양식인 쌀을 넣어 두었다는 것으로 당시의 저승관념을 알 수 있으며, 쌀이나 질그릇으로 보아 발달된 농경사회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부부합장이나 가족과의 합장 형태로 나타나는 공동장에서 부부중심의 가족관계임을 유추할 수 있고, 땅위의 이승과 땅 속 저승의 삶이 동일하다고 보는 저승관념이 엿보인다.삼한은 죽은 사람의 영혼이 하늘나라로 날아갈 수 있도록 큰 새의 깃털을 장례에 사용했는데, 하늘을 날아다니는 새가 저승과 이승을 연결해주는 동물로 생각되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외에도 중요한 교통수단이며 전쟁에 사용된 소중한 재산인 말을 장례에 희생동물로 쓰기도 한다. 이외에 무덤 속에 쌀을 넣어주는 풍습이 있었다.
    인문/어학| 2008.01.03| 3페이지| 1,000원| 조회(497)
    미리보기
  • [인문]최초의 여기자 `최은희`의 삶과 그 시대
    1. 최은희의 생애1) 출생과 학창시절최은희(崔恩喜)는 1904년 황해도 연백군에서 탐진 최 씨 장경공의 후손인 부친 최병규와 어머니 서덕경의 5남 5녀 중에서 막내딸로 출생하였다. 그의 부친 최병규는 대한 제국 말 서울에서 낙향하여 농토를 빈민에게 무상분배하고 노비 해방, 신분 타파에 앞장섰으며 학교도 3개나 새운 개화파 우국지사로 볼 수 있다. 유복한 개화 집안에서 10남매의 막내딸로 태어난 그녀는 어려서부터 부친의 혁신적인 성향에 대한 영향을 받았으며 학교에서는 배일독립사상을 키웠다.그녀는 해주 의정여학교에서 배일사상을 강화하는 교육을 받았다. 최은희의 반일감정의 배경은 어린 시절부터 자연스럽게 나왔다고 볼 수 있는데, 그녀의 항일정신은 해주 의정여학교 고등과에 진학하면서 조직적이며 분명해졌다. 당시 학감 최두현과 교무주임 노선형의 지도하에서 조선인을 노예화시키는 일본인에 대한 항일정신을 고취시키는 교육을 몰래 또, 편법적으로 받았던 것이다.서울로 상경해서 경상여자고등보통학교(현 경기여고)에 진학한 후에는 영신학교 부교장인 박희도(朴熙道)의 지도 아래 매주 일요일에 모여 비밀 서클에서 항일 사상을 키웠다. 3학년 때 3.1 운동이 일어나자 박희도의 지도로 3백여 명의 전교생의 선두에서 만세시위에 참가, 구류의 처분을 받기도 했다. 후에 풀려난 그녀는 고향으로 돌아가서 다시 만세시위를 주동하였고 징역형을 받고 후에 복권되었다. 그 후 일본유학 시절에도 그녀는 내내 요시찰인, 불령선인으로 조사받기 일쑤였으며, 그때 같은 동기유학생으로 황신덕, 박순천, 이현경 등과 친하게 지냈다.요컨대, 최은희의 학창시절은 민족의식과 반일, 배일사상의 강화의 시기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조국이 일제에 강점당하던 시기였던 만큼 한편으로는 학업에 열중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조국의 국권회복을 위하여 활동하였던 고난의 연속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2) 여기자, 개화기 신여성최은희가 한국 최초의 민간신문 여기자)로 발을 내딛은 것은 1924년의 일이었다. 당시 21살이었던 그녀는 동경 일본여자대학 사회사업학부 3년에 재학중이었다. 때마침 여름 방학을 맞이하여 귀국하고 있던 중 우연한 기회에 조선일보사에 입사하게 되었다. 그녀가 자신의 전공인 사회사업학부에 입학하여 애국적인 인물을 배양하는 데 뜻을 두었다가 신문기자를 선택하게 된 것은 춘원 이광수의 권유가 컸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실 그녀는 처음부터 신문기자를 동경하지도 않았고, 부친의 유언에 따라 교육에 힘쓰려 노력했었다. 하지만 당시 그녀 주위 환경의 복잡한 변화를 거쳐 ‘환경을 전환시키고 수양도 하고 공부도 할 겸’이라고 말하며 신문사의 길로 들어섰다. 별다른 꿈도, 의지도 없이 시작한 신문사 일이었지만 그곳에서 일했던 8년 여기자로서 그녀는 정치부, 사회부, 학예부를 두루 거쳐 학예부장까지 지낸 후 퇴사했다. 이로써 그는 전문직 여성의 기초를 다지고 이후 여기자의 사회적 위상을 정립했다.또한 그녀는 자신이 사회에 발을 내딛고 그 직무를 수행하다 보니 당시의 사회에서의 여성의 위상이 얼마나 한심한가를 절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러한 환경에서 그녀는 자연스럽게 남성중심의 사회 조직의 개혁이 필요했다고 생각했고, 부인개혁단을 조직·인솔해서 가정부인들의 사회화를 돕는 등 조선의 가정부인들의 삶의 개선을 위한 프로그램에 힘을 쏟았다.3) 근우회와 최은희최은희는 기자활동 뿐만 아니라 여성운동에도 매진하였다. 최은희를 비롯하여 친분이 있었던 황신덕, 허영숙, 유영준 등의 동경유학생은 귀국 후 친목회를 조직했으며, 1927년 신간회 조직에 곧이어 여성통합조직 근우회를 발기하는 데 적극적으로 노력했다. 근우회는 당시 조선 여성의 단결과 지위 향상을 위하여 창립되었다. 이러한 부녀 단체인 근우회의 성립과정과 활동에 있어서 최은희는 크게 활약하여 민족의 문화 계몽과 여성의 인권향상에 공헌한 바가 컸다고 할 수 있다. 근우회는 일제치하에 법률에 도전하고 사회 제도와 인습에 반발하고 자본주의와 용감히 투쟁하였던 근우회는 4년 뒤 비록 변질되어 해산을 하긴 했지만 방대한 조직으로 부녀 운동, 민족운동을 전개하였다.4) 해방 이후광복이 되자 최은희는 사회활동을 재개하였다. 대한부인회를 조직하여 5월 8일을 ‘어머니날’로 정하는 등 최은희의 사회 활동은 더욱 눈부셔 갔다. 대한여자국민당 서울시 당수, 재건국민운동 중앙위원, 한글학회 지도위원 등을 맡았는가 하면, 『씨뿌리는 여인』, 『여류명인기』, 『조국을 찾기까지』 등의 저서를 남겼고, 1969년에는 중앙대학교로부터 명예문학박사 학위를 받기도 하였다. 또, 1973년 70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1200여쪽에 이르는 『한국근대여성사』세 권을 내놓아 세상을 놀라게 하였다. 이 책은 단순한 한국여성사가 아니라, 여성의 항일운동사에 중점을 둔 점이 특징적이다. 이처럼 그녀의 저작들은 1970년대까지 한국근대여성사는 물론 사회사 연구에 좋은 기초 자료를 제공해주고 있다. 1984년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 여기자가 된 추게 최은희는 우리 언론의 역사에 가장 돋보이는 획 하나를 그어 넣고 1983년 '최은희여기자상'을 제정하였고, 이화여자대학교 언론공로상 등을 수상하였다. 그녀는 유감없이 살다가 일생을 마치기 직전에 자신의 의지가 담긴 상을 제정하여 후배 기자들을 격려하는 미쁜 모범을 보여준 그녀의 정신은 깨끗하고 큰 여성상을 창조하였다.2. 시대와 최은희일단 그녀가 지낸 시기는 일단 굉장한 격동기였다. 근현대사의 연표를 보더라도 굉장히 복잡다단한 일들이 많이 펼쳐진다. 그만큼 이전의 사회는 변화를 맞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전의 시대의 변화와 그에 따라 변화한 여성관과는 달라진 근대기의 그것이 가장 큰 변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근세부터 봉건사회의 변화가 오면서 여성관은 시대에 따라 변화했다. 하지만 서구열강이 침입해오고 여러 외래사상이 유입되면서 이제는 여성의 권리라는 개념도 생겨나게 되었고 여성을 교육시키려는 움직임도 여러 장면에서 포착된다. 이처럼 최은희의 삶의 형성 배경도 사회적 변동과 그 속에서의 교육이라는 두 가지 주제로 이야기 할 수 있을 것이다.개화파는 서양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근대화를 이루자는 주장을 하면서, 개화상소를 고종에게 올렸는데 여기에는 여성의 인격 존중과 학대·멸시의 금지 등 여권론적인 주장들이 많이 생겨난다. 또, 선교사들이 들어와 학교를 만들고 교육을 시작하면서 여성은 계몽하게 되고 스스로의 힘을 찾아가게 된다. 이처럼 새로운 시대의 기운과 교육에 대해서 잘 포착한 사람이 최은희의 부친인 최병규가 아닐까한다. 그녀의 부친은 젊어서 경무부의 판임을 지냈으며, 이후 백천으로 자리를 옮겨 큰 농장을 경영하는 한편 평안북도 운산의 금광을 경영하기도 한 당시의 재력가였다. 또, 낙향하여 농토를 빈민에게 무상분배하고 노비 해방, 신분 타파에 앞장섰으며 학교도 3개나 새운 개화파이기도 하였다. 그는 당시로서는 생각하기 힘든 남녀평등의 생각을 교육에 있어서 가지고 있었으며 최은희를 학교에 보낸 것은 그런 생각에서 나온 행동이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또, 최은희의 회고록에서 그의 부친은 평소에 여자의 경제적인 독립을 역설하였다는 사실 또한 알 수 있다. 이처럼 기존의 남성이 갖는 여성관, 자녀교육관과는 다른 선각자의 모습으로의 아버지는 최은희의 성장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이었음에 틀림이 없을 것이다. 후에 최은희는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민족의 독립과 여성의 경제적 기반을 통한 교육을 강조했다는 것을 때, 다시 한 번 확인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최은희에게 어렸을 때부터 자연스럽게 독립과 그를 위한 교육의 필요성을 싹트게 해 준 것이 바로 그녀의 아버지였다면, 이런 싹을 꽃피우고 실행에 옮기도록 방향을 제시해 준 사람들이 바로 그녀의 학교 스승이라고 볼 수 있다. 해주 의정여학교에서도,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에서도 훌륭한 교사의 밑에서 일제가 바라던 교육이 아닌, 민족적인 교육을 받으면서 그녀는 독립운동가로 성장하게 되는 것이다.
    인문/어학| 2007.06.21| 4페이지| 1,500원| 조회(602)
    미리보기
  • [교육]신교육의 이해 3장을 읽고, 교육의 목적에 대해서 평가A좋아요
    [교육철학]‘교육의 목적’에 대하여[신교육의 이해] 3장 3절 1,2을 읽고요즘은 어떤 글을 읽을 때 책에 코를 박고 읽는 습관이 든 것만 같다. 나도 모르게 그러는 것 같은데 나는 책을 읽음에 하나의 단어도 놓치고 싶지 않아서 그러는 것만 같다. 교수님이 말씀하신대로 아직은 ‘하수’,‘초보’인 나로썬 하나의 단어도 놓치고 싶지 않게 책을 꼼꼼하게 읽고 단어의 의미를 곱씹고 곱씹으면서 내 생각을 정리하는 해야만 부족한 나로 하여금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서이다. 하지만 나의 이런 책읽기에 대한 노력은 얼마가지 않아 어려움을 가져다주었다. 바로 ‘궁극적’이라는 말 때문이다. 궁극이라는 말은 무슨 의미일까. 궁극적 목적은 무엇이란 말인가. 386 세대들이 말끝마다 붙이면서 애용했다는 ‘본질적으로’와 비슷하게 그냥 멋있어 보이기 위한 말 같기도 하다. 사실 아직 교육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내 스스로의 개념을 잡지 못했다. 그런데도 교육의 목적을 이야기하는 것, 특히 궁극적 목적을 이야기하는 것은 너무 이를지도 모르겠다. 단계를 뛰어넘는 혹은 순서를 달리하는 방법은 배우는 사람의 특권이 아닐까.궁극적인 교육의 목적에 대해서 생각해보기 위해 우선 내가 받아온 교육의 목적에 대해서 생각해보았다. 내가 대학교 이전까지(사실 이 수업을 포함한 몇몇 수업을 제외하고는 대학교건 고등학교건 별 차이가 없다는 느낌도 받는다.) 받아왔던 교육의 목적은 어느 학교에나 거창하게 쓰여 있듯이 창의적인 인간 혹은 홍익인간을 만드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이전에 내가 받았던 교육은 외재적 목적을 띄고 있다. 그것도 내재적 목적은 거의 배제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 낚시에서 고기를 낚았을 때의 손맛을 가르쳐주고 낚시 자체를 사랑하게·즐기게 만드는 것이 아닌 더 큰 고기를 잡아서 많은 돈을 벌도록 하자는 것이 우리나라의 교육이 아닌가 싶다. 이런 점에서 홍익인간의 이념이 어쨌고 창의적 인간이 어쨌고 하면서 학교 외벽에 거창하게 걸어놓은 교훈이며 큰 현수막 같은 것들이 뭘 모르는 놈들이 멋있는 말만 늘어놓은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우리는 맹목적으로 외우는 데에 달려들었고 잘 외우는 사람이 좋은 대학가는 시대에 살고 있다. 좋은 대학이 뭘 말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그들이 부러워 그들과 같이 되고 싶어 더 외우도록 만드는 것이 우리 교육인 것이다. 그 어디에도 교육의 내재적 가치는 생각해볼 여지가 없으며 어떻게 보면 외재적 목적 위한 교육도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암기식의 방법을 통해서는 교육이 될 수는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나는 이전에는 교육의 목적에 있어 더 의미 있는 것에 대해 외재적 혹은 내재적 목적을 선택하라고 하면 누구보다 먼저 교육의 내재적 목적이라고 손들고 말했을 것만 같다. 하지만 지금은 조금 다르다. 그 둘을 벗어난 바로 안목의 형성이 조금 더 의미 있는 목적이 되지 않을까한다. 우리의 눈은 굉장한 카메라다. 지금 시중에 나온 1000만 화소짜리 카메라로도 느낄 수 없을 만큼의 광각을 가졌고 총 천역색의 색을 느낄 수 있는 렌즈가 두 개나 있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sight가 의미하는 우리의 감각 지각으로의 눈은 거기까지다. 즉 사물이 흡수하지 않고 반사시키는 색과 그 모양만 볼 수 있을 뿐이다. 안목 즉 insight는 뭐가 다를까. 공부하고 탐구하고 이해해서 생긴 지식은 우리의 몸에 들어와 몸의 한 부분을 형성하게 된다고 한다. 그것은 상징을 파악하게 되는 것이다. 단순히 천 조각이 아닌 태극기를 인식하게 해주는 것이다. 사실 더 거창한 예는 없을까. 단순히 천조각을 태극기로 인식한다고 해서 안목을 가졌다는 생각은 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단지 정형화된 물건을 외웠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안목이 형성되는 과정을 생각해보자. 일단 공부하고 탐구하고 이해해서 지식을 획득해야한다. 맹목적 암기는 분명 제외된다. 엄밀한 의미에서 우리는 안목을 갖고 있지 않다고 볼 수도 있는 것 같다. 안목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우리는 제대로 된 공부를 하지 않았고 나아가서 탐구하고 이해하지도 않았으며 맹목적 암기를 했기 때문일 것이다. 좀 더 예를 구체화시켜본다면 우리는 피카소의 그림을 보고 아름다움 보다는 저것을 외워서 나중에 문제 나왔을 때, 혹은 나의 교양을 보이고 싶을 때 써먹기 위해 외우고 있다. 심미적인 안목이 형성되지 않았다는 것이 아닐까. 단지 안목 있는 사람이 아름답다 했기에 우리도 덩달아 아름답다고 하는 것일 수도 있다. 더욱 웃긴 것은 내가 보기엔 영락없는 초등학생의 작품 같은 것도 추상적인 아름다움이란 안목 있는 사람의 해석에 따라 우리는 아름답다고 말하도록 훈련되어있는 것이다. 유명한 화가의 그림은 응당 멋진 것이고 학생이 그린 추상화는 성의 없다고 혼내는 교육에서 안목을 형성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다.100분 토론이라는 프로그램에서 인문학의 위기라는 주제로 토론을 펼치는 모습을 잠시나마 본 기억이 있다. 돈 안 되는 학문이 인문학이기에 학생들에게 외면을 받는 현실이라고 한다. 결국 돈이 안 되기 때문에 학생이 빠지고 있으며 그것을 위해 이공계에만 예산을 많이 하고 이공계를 살리기 위한 정책을 추진할 것이 아니라 인문학에도 관심을 가져달라는 것이 인문학의 위기를 제창하는 사람들의 의견이다. 과연 이 위기는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단지 학생들의 외면에 대한 것 때문일까. 한 토론자는 인문학은 ‘원래 배고픈 것이다’라는 식의 논리와 언변으로 다른 토론자들을 압도 아닌 압도하고 있다. 그는 인문학이란 자유교양교육은 실용적 교육이 아니며 나아가서 학문의 내재적 가치를 더욱 인정하는 이가 아닐까 한다.(이 생각은 나의 비약이 많이 들어간 것 같다. 그의 말하기는 굉장히 궤변적인 투였던 것 같기도 하다.) “인문학은 홀로 외롭게 하는 것이다. 호기심이 없으면 못한다. 인내심이 있어야 한다. 국가가 월급 준다고 할 수 있는 게 아니다.”라고 말하는 이 토론자의 말은 굉장히 공격적이고 어떻게 보면 진짜 궤변인거 같은 웃기는 말이지만 이 말에서 내가 생각하는 자유교양교육과 내재적 가치에 대한 생각을 조금은 얻을 수 있고 또 조금은 공감할 수도 있는 것 같다. 실용적 교육, 외재적 교육만을 외치며 인문학의 필요성에, 학문 자체의 탐구에 게을리 하고 있는 우리에게 현실에 대해 알려주는 말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교육학| 2006.12.05| 3페이지| 1,500원| 조회(736)
    미리보기
  • [교육철학]교육의 목적과 난점 8장을 읽고 `안목`에 대해
    [교육철학]‘안목의 형성’에 대해[교육의 목적과 난점] 8장을 읽고이 텍스트를 읽고 누구나 한번쯤은 생각해봐야 되는 단어가 ‘유용하다’라는 단어가 아닐까한다. 우리는 쓸모가 있다는 말을 유용하다는 말과 같이 사용하고 있다. 퓨즈 갈아 끼우는 생활 상식이 우리 생활에 쓸모가 있다는 데에는 이견이 없다. 지식이 유용하다는 데에는 이견이 있다. 간단한 예를 들자면 루트, 로그, 리미트, 시그마를 배워서 우리 삶 어디에 쓸 수 있다는 말인가. 물론 그것을 쓸 수는 있겠지만 생활 상식이 가지는 유용성에 비해서는 필요 없다고도 할 수 있을 정도일 것이다. 하지만 루트 같은 수학적 지식이 지니는 유용성은 생활 상식과는 성격을 달리한다는 것이 저자의 생각인 것 같다. 내 생각에는 쓸모 있는 것이 유용한 것인데 당장 내가 삶을 사는 데 ‘써먹지 않는’ 지식이 과연 유용성을 지는가에 대한 의문이 생겼다.지식의 유용성이라는 것에 엄밀한 의미에 대해서 생각해 보는 중에 책에 그것을 배우지 않고는 도저히 그 유용성을 알 수 없다는 말에 다시 한 번 깊게 생각해 보는 중에 내가 이때까지 배웠다고 ‘믿었던’ 것들이 과연 내게 유용성을 부여하고 있는가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는데 그것은 지식의 유용성을 지니게 하기 보다는 그게 과연 지식이었는가에 대한 회의를 지니게 만들었다. 입시위주의 교육이라는 것에서 자행되는 교과교육이라는 것이 지식의 유용성, 교과의 유용성을 밝히는 것은커녕 지식을 줄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이 생긴 것이다. 가까운 예로 앞서 내가 지적한 수학 기호들의 필요성에 대해서 묻는 것을 시작으로 맹목적으로 외워서 빛이 직진하고, V=IR을 외운다고 해서 우리는 지식을 얻었다고 할 수 있을까. V=IR을 재빠르게 I=V/R 등으로 교차시키는 것, 그것이 지식일까. 지식이었다고 해도 혹은 아니었다고 해도 그것은 올바르지 못한 교육을 보는 방법에 기초해서 나온 방법이기에 깊게 옳고 그름을 생각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옳지 않은 전제에서 옳은 방법이 나오리라고는 생각지 않기 때문이다. (상제의 신화는 가르치는 이의 입장에서의 전제는 옳은 것에서 출발한다고 생각한다.) 옳지 않은 전제는 교육을 사회적 지위를 획득하는 수단화해서 본 것이며 그것에서 파생된 결과는 입시위주의 교육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유용성에 대해 생각해 보면서 우선은 ‘생활에 유용하다는 것’과 ‘삶 전반에 유용한 것’으로 나눠 보았다. 텍스트의 예를 빌리자면 전자는 퓨즈를 갈아 끼우는 법이고 후자는 빛의 직진을 아는 것쯤이 된다고 했을 때 나는 두 가지의 유용성의 차이점을 생각해봤다. 결국 전자는 당장 눈앞의 것을 해결하는 데 필요한 것이고 굉장히 특수하고 협의의 유용성이라고 생각한다. 후자는 이와 달리 삶의 전반을 지배하는 광의적 개념의 유용성이 된다고 본다. 결국은 같은 유용성을 뜻하는 것은 아닌 것이다. 다시 한 번 지식의 유용성에 대해 생각해 본다면 인생 전반을 지배하는 지식, 교과의 유용성이 있을 수 있을까? 내 생각에는 분명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바로 이 텍스트에 누구나 동그라미를 치고 밑줄을 쳤을 법한 단어, ‘안목’의 존재 때문이 아닐까 한다. 안목이 있기 때문에 지식이 유용해지는 것인지 지식의 유용함을 안목이 있어야만 볼 수 있는 것인지는 솔직히 모르겠다. 저자는 지식이 우리 몸에 한 부분이 되어서 안목이 되어야만 지식이 유용한 것이 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것 같지만 무엇이 먼저인지는 굉장한 딜레마다. 안목이 형성되지 않은 상황에서는 지식의 유용함은 없다는 것과 안목이 형성 되면 없던 유용성이 생긴다는 말인가.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쪽도 맞는 것 같지만 여전히 어렵다. 반대쪽도 비슷하다. 어쨌건 안목과 지식의 유용성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라는 것은 확실한 것만 같다.우리는 안목을 형성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까. 지식의 내용이 내 몸 속으로 들어와 그것이 내 몸속에 자리 잡고 그것을 볼 수 있게 된다는 것이 어떤 과정으로 가능할까. 그냥 웅장한 음악을 음악에 대한 지식을 배우고 그것을 충분히 이해했을 때 그 음악에 대한 지식이 내 몸속으로 들어와 음악을 들을 떄 마땅히 즐거워야함을 아는 것이 안목이 형성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경지라고 말하면 적당한 것일까. 이렇듯 어렴풋이 책에서 나온 걸 풀긴하겠지만 그 형성의 과정에 대해서는 아직 부족한 나로서는 설명할 수 없을 것 같다. 다만 올바른 교육내용과 방법을 통해서 실현이 가능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는 한다. 우리의 지금 교육은 인식을 할 수 있게는 만들어 줄 수 있는지는 몰라도 교과를 통해 생겨난 안목을 통해 우리 삶 전반을 살펴보게 할 수 있지 않지 않는 점을 생각해본다면 분명 올바른 교육내용과 방법이 필요할 것이다.
    교육학| 2006.12.05| 2페이지| 1,500원| 조회(645)
    미리보기
전체보기
받은후기 8
8개 리뷰 평점
  • A+최고예요
    0
  • A좋아요
    4
  • B괜찮아요
    4
  • C아쉬워요
    0
  • D별로예요
    0
전체보기
해캠 AI 챗봇과 대화하기
챗봇으로 간편하게 상담해보세요.
2026년 05월 17일 일요일
AI 챗봇
안녕하세요. 해피캠퍼스 AI 챗봇입니다. 무엇이 궁금하신가요?
11:08 오후
문서 초안을 생성해주는 EasyAI
안녕하세요 해피캠퍼스의 20년의 운영 노하우를 이용하여 당신만의 초안을 만들어주는 EasyAI 입니다.
저는 아래와 같이 작업을 도와드립니다.
- 주제만 입력하면 AI가 방대한 정보를 재가공하여, 최적의 목차와 내용을 자동으로 만들어 드립니다.
- 장문의 콘텐츠를 쉽고 빠르게 작성해 드립니다.
- 스토어에서 무료 이용권를 계정별로 1회 발급 받을 수 있습니다. 지금 바로 체험해 보세요!
이런 주제들을 입력해 보세요.
- 유아에게 적합한 문학작품의 기준과 특성
- 한국인의 가치관 중에서 정신적 가치관을 이루는 것들을 문화적 문법으로 정리하고, 현대한국사회에서 일어나는 사건과 사고를 비교하여 자신의 의견으로 기술하세요
- 작별인사 독후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