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 리 말유토피아. 우리는 흔히 “유토피아를 향하여..”,“유토피아를 찾아서!”라는 말을 사용한다. 그렇기에 내가 평소 생각했던 유토피아는 우리가 꿈꾸며 바라던, ‘노력하면 이룰 수 있는’ 이상향이었다. 그러나 유토피아는 ‘어디에도 없는 곳’,‘현실에는 결코 존재하지 않는 이상적인 사회’라고 한다. 어디에도 없고 결코 닿을 수 없다니. 그렇다면 유토피아를 바라는 것 자체가 조금은 아이러니한 것 같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잃는 것 처럼 모든 것에는 일장일단이 있다. 때문에 모든 것을 만족스러운 수준으로 갖추어져 있는 유토피아에 도달한다는 것은 절대 불가능한 것이다.현실적으로는 그럴지언정, 역자(易者)는 이론적인 가능성에 대해 관심을 두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 이론적인 실현가능성이 유토피아가 갖는 진실성이며 현실 비판의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말대로 토마스 모어는 이러한 유토피아에 빗대어 당시의 영국 사회를 비판하려는 의도로 이 책을 저술했다. 「유토피아」는 영국의 산업혁명 초기를 시대적 배경으로 했다. 이 당시 영국사회에는 실업자가 속출하는 등 사회적 혼란이 일고 있었다. 「유토피아」의 1부에서는 영국의 사회 현실을 예리하게 비판하고 있다. 그리고 2부에서는 유토피아라는 완전한 사회의 즐겁고 교훈적인 내용과 함께 조심스러운 풍자를 담고 있으며, 진지하고 성실한 내용이 실려 있다.모든 동물중에서 인간만이 유일하게 사고와 상상이 가능하다. 이러한 상상력을 바탕으로 르네상스도, 과학혁명도, 산업혁명 등등이 촉발되었으며 지금까지도 눈부신 과학적·기술적 발전을 이루어 오고 있지 않은가. (비록 지나친 면이 있어 없었으면 하는 것도 생겨나고 발전에 따른 부작용도 만만치 않긴 하지만 말이다.) 즉, 인간은 이러한 상상력에 의해서 발전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비록 절대로 존재할 수 없는 곳일지라도 그 곳을 염원하고 상상하는 일은 우리의 발전과 생활태도의 개선을 위해서 꼭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그는 영국에서 모어의 스승이었던 존 몰턴경의 집에서 머물다 만난 영국인 변호사와 했던 절도범의 사형을 주제로 한 찬반 토론에 대해 들려준다. 왜 절도범들을 모두 사형시켜도 계속 절도범들이 생겨나는지 묻는 변호사에게 그는 단순히 적발되는 절도범들을 사형하여 절도가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이 아니라 절도로밖에 살아갈 수 없는 사람들에게 살아갈 길을 마련해 주어 절도를 방지하고 사형을 집행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한다.그리고 라파엘은 사람들을 도둑질로 내모는 영국만의 독특한 요인이 있음을 지적한다. 바로 ‘양떼들’이라는 것이다. 최상의 양모로 얻는 수익은 지방의 귀족뿐 아니라 성직자들까지도 단순한 농업으로 얻는 수익에 불만을 갖게 해주었다. 그것은 결국 소유지뿐 아니라 가옥까지도 모두 목장으로 바꿔 수천 에이커를 울타리 하나로 막아버리게 만들었고 수백명의 농민이 쫒겨나는 결과를 낳았다. 그리고 꼬임에 빠지거나 반강제적으로 땅을 팔아버린 그들은 먹고 살기위해 훔치는 일을 저질렀다. 일을 하고 싶어도 한명의 양치기나 목동이 수많은 사람이 일했던 그 땅에서 그들을 대신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과점상태의 양모 시장을 또 다른 예로 든다. 2~3명이 독점한 결과, 필요한 자들로부터 원하는 값을 받을 때까지 절대 팔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또 다른 가축의 가격을 인상시키며 특히, 농장의 파괴로 말미암은 여러 가축의 부족과 농업의 일반적 쇠퇴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더욱 그렇다고 지적한다.또한 이 비참한 빈곤을 무색케 하는 부조리한 사치풍조는 이러한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 귀족들 뿐아니라 하인이나 직공, 심지어 농업 노동까지도 옷과 음식에 지나친 낭비를 하고 노름을 일삼는다는 것이다. 그는 이러한 병적인 행위를 근절할 것을 주장하며 몇가지 방안을 제시한다. 바로 독과점을 금지하고, 농업과 모직 공업을 부흥시켜 일자리를 창출하여 공짜로 먹여살리는 게으름뱅이의 수효를 줄이는 방법이다.그는 도둑들이 어릴 때부터 가장 나쁜 환경에서 성장하며 타락하기 쉽도록 버려졌기에 그들이 범죄를 위해를 끼친다는 이유로 반대한다. 그러나 존 몰턴경은 시행하기 전까지는 모른다고 라파엘을 옹호한다. 이어서 좌중들의 풍자와 익살이 이어졌으나 탁발승의 물음에 한 익살꾼이 독하게 응하여 분위기는 수습이 불가하게 되고 이야기가 끝이 난다. 모어는 라파엘의 이야기를 듣고 철학자로서 왕의 조언자 역할을 할 것을 다시금 권한다. 그러나 역시, 왕은 자신의 이야기를 듣지 않을 것을 확신하며 아코리이라는 나라에서의 일을 예로 든다. 그리고 왕에게 다른 신하들이나 국민들이 원하는 것을 그리고 옳은 길을 권유했을 때 왕이 과연 그것을 받아들일 수가 있는가를 모어에게 다시 묻는다. 모어 역시 수긍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는 인민들이 왕을 세운 이유는, 왕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 자신을 위해서라는 논리를 펼친다. 그러므로 왕의 사명은 자신이 아닌 백성을 행복하게 해 주는 양치기 같은 존재이며 인민들로부터 미움과 멸시를 받는다면 물러나는 것이 현명하다고 주장한다. 또한 왕은 건전한 통치로 범죄의 예방에 힘써야 하지 범죄의 발생 후 처벌은 불허임을 말한다.그리고 그는 다시 마카렌세스라는 나라의 제도에 대해 말한다. 그곳은 왕이 되면 결코 자신의 금고에 1000파운드 이상을 보관해서는 안된다는 서약을 해야한다. 이러한 제도는 국민이 빈곤할 정도로 왕의 재산이 증대되는 것을 막고 일정금액을 정함으로서 외국의 침략을 격퇴할 충분한 금액을 확보하는 목적도 있지만, 교환이라는 통상의 목적을 위해 화폐의 충분한 유통을 가능케하고 왕이 불합리 하게 화폐를 인상할 수 없게끔 할 목적이 더 크기에 실시된 것이다. 그리고 다시금 모어에게 자신의 의견에 반대하기로 굳게 결심한 사람들(왕&신하)에게 조언한들 그들이 어떤 태도를 취할것이라고 생각하는지를 묻는다. 모어는 현실을 고려하지 않은 학문들은 들어갈 여지가 없다는 것이 확실하지만, 라파엘이 실용적인 철학을 행사해야함을 권한다. 비록 원하는 만큼의 효과는 못내더라도 노력을 해야한다고 말이다.그러나 라파엘은 그러다가 자신은 미쳐버릴 것이라고 말한다.54개의 같은 문화를 가진, 같은 계획에 따라 세워진 도시가 존재한 다. 토지의 분배는 각 도시의 판도가 최저 사방 20마일이며 확장도 바라지 않는다. 토지 는 재산이 아니라 그들이 경작해야 할 땅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도시 주민들은 교대 로 한집에 머물며 농사를 짓는다. 수확기 직전에는 시청에 그들이 요구하는 노동력을 알 리며 지정된 날 정확히 필요한 만큼의 수확 작업인원이 와 일을 해준다.②도시들, 특히 아마우로툼 - 유토피아의 이상적인 외관을 갖춘 도시이다.③공무원 제도 - 시민은 30세대가 한 그룹이며 10명의 시포그란투스라는 공무원을 선출한 다. 그리고 그들이 대표하는 세대에 대해 트라니보루스(또는 프로토필라르쿠스)라 불리우 는 공무원이 있다. 각 도시에는 200명의 시포그란투스가 있으며 그들은 시장을 선출할 책임이 있다. 시장은 독재를 하려는 혐의가 없는 한 종신제이다. 트라니보루스는 해마다 선출되지만 보통 바뀌지 않고, 기타 공무원의 임기는 1년이다. 트라니보루스는 시장과 화 합해 공동문제를 토의하며 2명의 시포그란투스를 회의에 초대한다. 그리고 이 안건은 다 른 장소에서 토의하면 사형이다. 그리고 안건은 처음 제출날에는 토의가 불가능하다. 그 렇지 않으면 순간적인 견해를 말하거나 최선의 것을 결정하려고 노력하는 대신 발언을 합 리화하려 하기 때문이다.④노동조건 - 농사는 성별에 관계없이 누구나 한다. 심지어 어린이 교육의 필수과목이다. 그리고 각자 특수한 기술을 배운다. 누구나 같은 옷을 입기에 양복점이나 양장점은 없으 며 모두 가정에서 만든다. 어린이는 양친의 기술을 배워야 하며 다른 기술을 좋아하면 그 집안의 양자로 들어가야 한다. 2가지 기술에 대한 전문가가 되면 본인이 원하는 어떠한 기술에나 종사할 수 있다. 시포그란투스는 누구나 자신의 직업에 열중토록 감독한다. 유 토피아에서는 하루에 6시간 일을 한다. 사람들은 나머지 시간에 강좌를 들을수 있지만 학 문을 본직에 이용하는 것은 금한다. 비록 6시간밖에 일을 하지는 않지만 유토피아에서취급을 받기도 한다.⑧도덕적 철학 - 그들은 부자라는 이유로 부자를 존경하는 행동은 어리석다고 생각한다. 모 든 교육을 자신들의 언어로 가르치며 표준어를 사용한다. 부분부분 정의를 내리거나 규칙 을 찾아내지는 못했지만 각 분야에서 대체로 현재 영국의 학문과 일치를 이룬다. 그들은 영혼의 불멸과 사후세계를 믿는 종교관을 가졌다. 그리고 인간행복을 위한 쾌락을 추구한 다. 모든 쾌락에 행복이 있는 것은 아니나 행복이 최고선이며 인간의 자연적 충동에 따르 는 것이 그것이다. 단, 인위적인 향락은 절대 쾌락이 아니다. 그들은 쾌락을 정신적,육체 적 두 종류로 나눈다. 진리를 추구함으로써 정신적 쾌락을 느끼고 생리적인 행동과 건강 을 통해서 육체적인 쾌락을 즐기는데, 유토피아 인들은 특히 정신적인 쾌락을 좋아한다. 라 파엘은 유토피아 인들이 위와같은 과학적인 방법으로, 황무지에 가까운 국토에서 기적 을 이룩하였다고 말한다.⑨배움과 쾌락 - 라파엘은 그들에게 그리스 문학과 철학을 가르쳤고 타고난 학자적 기질 때문에 금방 습득했다고 이야기한다. 유토피아 인들은 무엇이든 가르쳐 주면 금방 배우는 재능을 지녔다.⑩노예제도-유토피아의 노예들은 죄수이거나 외국의 사형수들이다. 그들은 외국인 보다 더 욱 나쁜 대우를 받는다. 그러나 자처한 노예들도 존재하는데 유토피아를 떠나길 원한다면 자유롭게 떠날 수 있으며 보수도 받을 수 있다.⑪환자의 간호와 죽음 - 극진히 보살펴 주지만 불치의 병에 걸린 경우 안락사를 권한다. 조 금은 잔인한 처우인 듯 싶다. 그러나 어쨌든 자유의지기에 살기를 원하면 다시 극진히 보 살펴준다. 공인된 안락사는 명예로운 죽음이나 허가없는 자살은 장례도 치러주지 않는다.⑫결혼 풍속 - 여자는 18세에, 남자는 22세에 결혼이 가능하며 혼전 성교는 엄격하게 금한 다. 그들은 결혼 전 나체를 서로 관찰하는 관습이 존재한다. 일부일처제를 엄수하지만 합 의 이혼이 존재한다.⑬법률 문제 - 법률상 고정적인 처벌규정은 없고 의회가 수시로 적당한 처벌을 결정한다. 범죄가 무.
1. 머리말르네상스와 함께 근대의 서곡으로 표현되고 있으며 오늘날 프로테스탄트라는 교파를 탄생시킨 종교개혁은 저 역사 발전에 있어서 하나의 결정적인 단계를 획한다. 종교 개혁가들은 그들 자신의 사상을 통하여 유럽 사람들의 노력과 희망과 열망들을 반증하고 있었다. 조지 모스는 이 책을 통해 종교개혁의 배경에 대해서 중점적으로 이야기 하고자 했다. 배경이 적절히 이해되지 않으면 그 시대의 사회적, 정치적 및 경제적 제 요인들이 설명될 수 없기 때문일것이다. 종교개혁의 기간 동안 사상의 해명은 그 시대의 생활을 이해하기 위해 가장 중요하다. 조지 모스는자신의 저서를 통해 종교개혁의 어떤 면을 분석코자 한 것일까. 지금부터 알아보려고 한다.2. 본 문제 1 장. 종교개혁은 왜 일어났는가 ?16세기 초에 일어난 종교적 대 변동이 중세의 기독교 왕국을 종결시키고 가속도적으로 근대를 인도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 사실 중세를 통해 여러 개혁이 시도되었지만 대부분이 실패한것에 비해 16세기의 개혁은 성공하였다. 하지만 여러 세기에 걸쳐 종교개혁의 성공은 절정에 이르렀으나 사람들은 정치적인 힘과 경제적인 힘 사이, 또한 기독교가 공언한 목적과 교회의 가시적 현실사이의 변화하는 관계에 대응하지 못했다. 이러한 관계의 변화를 분석하는 일은 곧 종교개혁 자체의 근본적 원인을 밝히는 일이 되는 것이다.종교개혁의 원인으로 첫째, 대두하는 정치세력에 있어서의 변화는 보편주의에서 벗어나 영토적으로 한정된 정치적 단위를 이루려는 시도에서 비롯했다.즉, 중세후반에는 국민국가나 제후국가, 자유도시등이 정치적 세력의 주요 근거지로 등장했지만 이와 반대로교황은 여전히 이노센트3세 이래로 제국주의적 요구를 강력히 주장한 것이다. 이는 변화하는 유럽의 사태와는 너무나 동떨어져 있는 듯이 보였다. 두번째 요인은 교회의 경제정책에서 나타났다. 그리스도가 가난과 청빈을 설교하였다면 교회가 그토록 부유하게 되어야 한 이유는 무엇인가. 과세와 헌납은 기도교 교리와 실제의 상황의 괴리를 나타냈고 청빈을 강조했다. 종교적 조직의 용어로서나 개별주의는 처음부터 전체 구조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 아닐 수 없었다. 종교개혁의 전야에는 이러한 개별주의가 이탈리아로부터 전해진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통해서 지식인들에게 침투되었으며 일반 민중들에게는 신비주의가 성직제도로부터 해방시키는 비슷한 구실을 다하였다.당시, 기존 교회의 성직제도에 도전한 개인주의는 정신적 자유를 추구하였다. 즉 하나님과 인간을 중개하는 데 있어서 성직자는 필요치 않았으며 신앙심이 돈독한 많은 사람들과의 접촉을 잃어버리고 그들 마음 속에 참다운 기독교에서 멀어져 가고 있다고 생각된 교회조직을 무시하려고 하였다.농업시대에서 상업시대로 옮겨짐에 따라 경제적 과정의 합리화를 추구하는 사회에서의 생활은 전보다 복잡하고 혼란해졌지만 이러한 급격한 변도으이 시대에서 교회는 갈피를 못잡고 당황하였다.이러한 기본적인 요인들이 루터의 사명수행에 도움이 되었고 앞선 개혁자들의 실패를 성공으로 바꾸는데 일조 했다. 사실 종교개혁은 그 시초에서는 결코 갑작스러운 혁명이 아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종교개혁은 실제면에서나 사상면에서 중세 기독교왕국을 파괴시킨 대 변동을 초래했다는 점에서 근대적 사건이었지만 어디까지나 기독교 공화국을 구축한다는 이름하에 진행 되었다.제2장. 마르틴 루터일반적인 중세인과 같이 이들 개혁자들도 생활의 개선이 아닌 구원이라는 장기적 목표에 관심을 두었다. 아마 이러한 관점에서 루터의 영혼구제와 존 칼빈의 의로움에 대한 의미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기독교를 파괴하려고 한 것이 아닌 개혁하려고 노력하였다. 자신들을 보수주의자로 간주하고 초대 교회의순수성을 회복시키고자 했다. 마르틴 루터가 수도원을 떠나 공개토론의 무대에 등장했을 때 이미 교황권은 몇 차례 위기를 겪었다. 황제권과의 대립은 중세에 걸쳐 일어났으며 이제 새로운 민족단위의 왕국들이 가담하며 교황권에 대한 승리를 이끌어냈다. 특히 프랑스 왕국의 아비뇽에 교황은 유폐되어 있었으며 뒤이어 교황은 로마와 아비뇽에 두명이 생겨나게 되었다.교 개혁은 교황청의 재정문제에 있어서 특히 절박했는데, 면죄부판매는 성직매매와 함께 교황청의 중요 수입원이었다. 면죄부를 통해 죄를 쉽게 사면한다는 사실은 도덕과 신앙의 판매를 합법화 하고 결과적으로 르네상스 시대를 특징짓던 공사생활에 있어서의 비도덕성에 대해 문호를 개방하는 것이 되었다.재정 다음으로 개혁의 필요성은 교역자의 규율과 관습면에 있어서 대단히 긴급하였다.민중적 경건성이 발효하는 충격 속에서 평신도와 성직자들은 그들 스스로를 또 이러한 문제들은 개혁하려고 노력하였으며 이는 민중이종교개혁을 지지할 토대를 마련했다.마틴 루터는 아우구스티누스 교단의 한 사람이었으며 그의 정신적 지도자가 된 사람은 그가 들어간 수도원의 주교대리였던 폰 스타우피츠였다. 그의 온건한 신비주의는 루터를 매혹시켰지만 그는 신비주의자가 되지 않았다. 그의 영혼을 창조주에게 침잠시켜 영혼을 편케 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이후 그는 사제(司祭)가 되고, 오컴주의 신학교육을 받아 수도회와 대학에서 중책을 맡게 되었다. 1511년 비텐베르크대학교로 옮겨 신학박사가 되었고 2년 후 성서학 강의를 시작하였다.그는 이때, 하느님은 인간에게 행위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인간에게 접근하고 은혜를 베풀어 구원하는 신임을 재발견하였다. 이 결과가 당시 교회의 관습이 되어 있던 면죄부(免罪符) 판매에 대한 비판으로 1517년 ‘95개조 논제’가 나왔는데, 이것이 큰 파문을 일으켜 마침내 종교개혁의 발단이 되었다. 그는 교황으로부터 파문칙령을 받았으나 불태워 버렸다.1521년에는 신성로마제국 의회에 환문되어 그의 주장을 취소할 것을 강요당했으나 이를 거부, 제국에서 추방되는 처분을 받았다. 그로부터 9개월 동안 작센 선제후의 비호 아래 바르트부르크성에서 숨어 지내면서 신약성서의 독일어 번역을 완성하였다. 이것이 독일어 통일에 크게 공헌하였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비텐베르크로 돌아와서는 새로운 교회 형성에 힘썼는데, 처음에는 멸시의 뜻으로 불리던 호칭이 마침내 통칭이 되어 ‘루터강조했으며 그의 사상은 교회징계에 대한 부분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부쩌 또한 루터의 영향을 받아 종교 개혁을 일으켰다. 제세례파의 신념과는 반대로 하나님의 구원이나 버림이 이미 예정되었다고 강조했다. 부쩌는 후에 칼빈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칼빈은 루터와 달리 프랑스 최고의 휴머니스트적 교육의 산물이었다.1528년 아버지의 뜻에 따라 칼빈은 오를레앙의 법과대학에 입학해서 일 년간 머무르다가 부르주로 옮겨서 국제 법학자 알키아트의 강의를 들었다. 이 과정에서 칼빈은 오를레앙에서 인문주의를 그리고 부르주에서는 개신교주의를 접하게 되었다. 그때까지 그 자신은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곳에서 칼빈은 12세된 소년으로서 장차 칼빈과 같이 일하게 될 베자를 사귀었다. 이후 아버지의 사망과 더불어서 칼빈은 다시금 파리로 돌아와서 포르테 대학에 들어 갔는데 이곳에서 부데, 콥등과 더불어서 인문주의의 모임에 가담하였다. 이후 23세의 나이에 자신의 최초의 저서인 루키우스 안나이우스 세네카의 "관용에 관하여"라는 주석집을 발간하였다.이 무렵 칼빈은 이미 파리의 개신교 모임에 가담하고 있었는데, 그의 첫 저서가 출판됨과 동시에 왕 프랑세스 1세는 프랑스의 개신교 신도들을 일컫는 위그노들에게 박해를 가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1533년 칼빈은 친구인 콥이 성바르브 대학의 교수이자 학장에 취임하는 계기를 맞이해서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라는 주제로서 그의 취임 연설문을 작성해 주었다. 문제는 그 연설문에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의 이념을 일부 추가했다는 것이다. 소르본 대학에서는 이 연설을 국회에 이단자의 설교로 제소 하였으며, 국회는 이에 동의했다. 이와 더불어서 1534년 10월 18일 밤에 열광주의적인 개신교도들이 《혐오스럽고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교황청 미사의 악덕에 관하여 》라는 로마 가톨릭을 비난하는 현수막을 파리 전역과 심지어는 왕실의 정문에 부착함으로 박해가 가해지기 시작하였다.칼빈은 1533년 부터 1534년 사이에 나바라차례 쫓겨나는 일을 겪으면서, 제네바에서의 목회를 성실히 하였다. 그는 1536년으로 부터 3년간 의욕에 찬 목회를 감행하다가 프랑스의 스트라스부르로 다시 쫒겨나는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다가 1541년 제네바에 다시 부임해서 처음 14년동안은 반대자들로부터 어려움을 겪으면서 목회를 했다. 그러다가 1555년부터 죽을때까지 최후적으로 9년동안 소신 있는 목회를 하였다.1559년 칼빈이 피력한 정치이론은 스코틀랜드에 전파되었다. 군주정에 대한 반대투쟁은 입헌정치의 올바른 인식에 이바지했다. 이후 1560년 최초의 칼빈교회가 스코틀랜드에서 창립되었다. 이들 교회의 결합체는 장로회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고 칼빈 사망후 영국에 기반을 잡았다. 루터와 마찬가지로 선교사업은 인쇄술의 재빠른 이용에 힘입어 여러 성서주해서들이 간행되었다.칼빈은 프로테스탄티즘 속에 동적 요소를 불어 넣었으며 그의 신앙과 카톨릭 신앙사이의 대 충돌은 그의 사망후 거의 1세기 동안 유럽역사를 지배했다.제 4장. 중도 노선의 종교개혁영국의 종교개혁은 카톨릭과 프로테스탄티즘 사이의 명백한 중도 노선을 취했고 루터교 또한 많은 영향을 주지는 못했다. 사실 그 당시 영국 종교단체들의 실태는 많은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헨리 8세의 비서였던 토마스 크롬웰의 조사는 그들의 비종교적인 생활을 고발하는 내용이었기 때문이다.사실 영국은 위클리프 때부터 로마 교황의 세력권으로부터 독립하려는 운동이 있었는데, 헨리 8세의 이혼문제를 계기로 완전히 가톨릭 교회로부터 이탈하여 독자적인 길을 걷게 되었다. 이 이혼문제에는 국왕의 개인적 사정뿐만 아니라 내외의 정치적 ·종교적 정세가 복잡하게 엉켜 있었다.그리하여 1534년의 ‘수장령(首長令)’에 따라 영국은 국왕을 최고관리자로 하는 독립된 교회가 되었는데, 그 교의 내용은 여전히 가톨릭적이었다. 다음의 에드워드6세 시대에 들어서자 개혁정책이 단행되어 교회는 현저하게 칼빈주의 경향을 띠게 되었다. 그러나 메리의 치하에는 다시 가톨릭교회에 대한 복귀정책이 취해져 많은 목사와 .
미국 경제공황의 종식200400425 사학과 장은영세계대공황의 전개1920년대에 각 공업국의 생산력은 크게 성장한다. 최신 기계를 설비하여 능률을 증대함으로써 점차 종업원 수를 줄이고 더욱 많은 생산품을 만들었지만, 소비자의 구매력은 조금밖에 증가하지 않았다. 즉, 공급에 비해 수요는 감소했던 것이다. 때문에 1929년 10월 뉴욕의 주식 시장에서는 주가가 폭락하는 현상이 발생하고 그 여파는 전 세계로 파급되었다. 이후 잇따라 경제공황이 심각해지자 미국은 외국에 투자하고 있던 미국자본을 본국으로 회수하기 시작하였다. 마침내 독일, 오스트리아 및 중남미 여러 나라에 금융 공황이 일어났고, 미국의 금융기관은 심각한 타격을 받게 되었다. 1929년에서 1932년 사이에 세계 무역은 70.8%나 감소하였고, 미국의 실업자는 3,000만명에서 5,000만명에 달하였으며 국민 소득은 또한 40% 이상이나 감소되었다. 때문에 이러한 대공황의 종식을 위해 미국정부는 후버 프로그램, 뉴딜 정책등의 대책을 강구하기에 이르렀다.뉴딜 정책루스벨트는 대통령 선거 당시 대공황이 미국 경제의 구조적 취약점에서 비롯되었으며 이 취약점은 1920년대 전 대통령인 하버트 후버의 공화당이 추진해온 정책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후버는 대공황을 타계할 방침으로 ‘후버 프로그램’을 실행했으나 거의 모든 면에서 실패해 신뢰를 잃고 있었다. 후버는 주로 자연적인 과정을 통해 공황을 극복하려고 했던 반면에, 루스벨트는 연방정부의 개입으로 과감한 개혁을 할 것을 주장했다. 선거는 루스벨트의 압도적인 승리로 끝났고 미국이 바야흐로 정치적 ? 경제적으로 새로운 시대로 진입하게 되었다.(1) 금융 ? 경제루스벨트는 취임하자마자, 의회가 은행 개혁 입법을 다루기 위해 특별 회의를 소집하기 전에 모든 미국 은행이 4일 동안 휴업할 것을 지시했다. 3일 후, 루스벨트는 의회에 긴급 은행법을 제출했다. 전반적으로 보수적인 이 법안은, 주로 대규모 은행들이 허약한 소규모 은행들 때문에 힘든 것을 막기 위해 제정되었다. 은음 날 아침, 루스벨트는 경제법을 의회에 제출했다. 이 법은 정부 고용인들의 봉급을 삭감하고, 퇴역 군인 연금을 15%정도 줄여 연방 예산의 균형을 맞출 것을 요구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또한 연방 예금 보험 공사를 설립해 저축 예금을 최고 5,000달러까지 보장해 주어 은행이 파산하더라도 소액 예금자들이 돈을 찾을 수 있게 해주었다. 증권 시장에서의 신용 회복을 위해서는 증권 진실법을 통과시켜, 새로이 증권을 발행하는 기업들이 대중에게 자신들의 기업에 대해 충분하고도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라고 했다. 1934년 6월에 또 다른 법은 증권 거래 위원회를 만들어 주식 시장을 감시했다.(2) 농업의 조정종합적인 대책의 첫 번째는 의회가 1933년 5월에 통과시킨 농업 조정법이었다. 정부는 농업 조정청을 통해 개별 농민에게 생산할 양을 정해주고, 유휴 경작지에 대해 보조금을 지불했다. 식품 가공에 부과하는 세금을 신설해 보조금의 자금원을 확보하고 농산물 가격은 평형점을 한도로 보조해 주도록 했다. 이러한 노력으로 농업 경제는 전반적으로 이전 몇 년간보다 이 시기에 더욱 번영했으나 농업 조정청의 지원혜택은 소농보다 대규모 농장주들에게 우선적으로 돌아갔다. 농지에서 직접 일하는 이들이 아니라 토지 소유자들에게 보조금을 지불했고, 정부는 농장주들이 그들의 임차인과 소작인을 쫓아내고 일꾼을 해고하면서 경장 면적을 줄여 가는 것을 거의 막지 못했다. 1936년 1월 대법원은 정부가 농민에게 생산을 축소하도록 요구할 아무런 헌법적 권한도 없다며, 농업 조정법의 중요한 조항들을 파기했다. 그러나 몇 주 내에, 행정부는 토양 보존과 국내 할당법이라는 새로운 법을 통과시켰다. 이는 농민이 토양을 보존하고 토양의 부식을 방지하며, 다른 부차적 목적도 성취할 수 있게끔 생산을 축소하도록 정부가 농민에게 보조금을 지불한다는 내용의 법이었다. 행정부는 1937년 농총 안정청을 설립해 토질이 거의 다 소진된 토지를 경작하는 농민이 좀 더 나은 토지로 이주하여 재정착 하도록 대부금을 제공하게 직자를 위한 첫 번째 정책은 ‘민간인 보호 부대’라는 형태로 나타났다. 이 프로그램은 18세에서 25세 사이의 청년들을 돕기 위해 의회 의결을 거쳐서 확정한 것이었다. 이 모임은 직업이 없는 청년들을 모아 한 달에 약 30달러씩 지급하며 다양한 종류의 자원 보존 작업을 했다. 국유림을 관리하거나 토양의 지력을 회복시키거나 나무를 심는 작업, 하천의 오염을 제거하는 작업, 물고기와 조류를 포함한 야생동물 보호구역을 만드는 작업, 그리고 석탄과 석유, 혈암, 가스, 나트륨, 헬륨 광산등의 자원을 보존했다. 노동 구제 사업도 등장했다. “필요하지도 않은 쓸데없는 일”이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지만 하수도를 청소하는 작업에서부터 고속도로를 정비하는 작업등 다양한 일거리로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마련했다. 1933년 11월에 처음 등장한 이 노동 구제 사업은 1934년 봄까지 진행되었다. 하지만 그 이후에도 루스벨트와 핵심 참모들은 복지 사업보다는 실업 구제 정책들을 지속적으로 펼치며 실직자들을 도왔다.(4)산업 ? 지역 계획1933년 국가산업부흥법과 함께 설립된 국가 부흥위원회는, 더 많은 일거리를 창출함으로써 궁극적으로 구매력을 높이기 위해, 공정한 경쟁을 보장함으로써 서로에게 득이 되지 않는 비효율적인 경쟁체제를 없애고자 노력했다. 국가부흥위원회는 초기에는 환영을 받았지만, 경기회복이 가시화되자 기업들로부터 통제와 간섭이 심하다는 불평을 받기 시작했다. 이 부흥위원회는 1935년 위헌 판결을 받았다. 이 시기에는 이미 다른 정책들의 집행 결과 경기회복이 힘을 받았고, 또 정부에서도 몇몇 분야에서의 가격 통제는 오히려 국부의 해외 유출을 유발하며 동시에 경기 회복에 장애가 된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국가산업부흥법은 노동자의 단체 교섭권을 인정하는 등 노동자의 권리의식을 한층 더 높였다. 노동자 조직에서의 이 커다란 진전으로 인해서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공통된 이해관계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노동자의 힘은 산업 현장에서뿐만 아니라 정치 무대에서도 더욱 관계가 계획과정을 지배하기를 원하는 뉴딜주의자들의 신조를 반영하고 있었다. 그러나 다른 개혁가들은 정부가 경제의 가장 중심적 기구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뉴딜의 가장 두드러진 성공은 지역 계획에서 전례가 없었던 실험인 테네시 계곡 계발 공사의 성립이었다. 혁신주의 개혁가들은 수년간 값싼 전력의 원천으로 국가 수자원의 공공 개발을 주창했다. 그들은 특히 1차 세계 대전 중에 시작된 댐 건설이었지만 전쟁이 끝날 때 까지 완성되지 않고 남아 있었던 앨라배마 주 테네시 강가의 머슬 쇼올 댐 건설의 완성을 촉구했다. 그러나 전력 회사들의 거센 반대를 이겨 내지 못하고 중단 되던 중 대통령은 테네시 계곡 개발 공사의 개발을 추진했다. 이것은 머슬 쇼올 댐 뿐 아니라 이 지역에 또 다른 댐을 건설하려 했을 뿐 아니라, 전력을 생산하고 대중에게 적절한 가격에 판매하도록 했다. 그리고 지역 기업들의 성장을 추진하고 홍수 재해를 막기 위한 재삼림화를 관리하며, 농민들의 생산력을 증진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댐건설은 결과적으로 해상교통을 향상시켰고, 실제적으로 이 지역을 홍수로부터 구했다. 또한 전력공급의 대상을 늘렸으며 이로 인해 사기업의 전기료 또한 인하되었다. 그러나 이와같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테네시 계곡은 전반적으로 빈곤한 지역이었다.제2차 뉴딜정책뉴딜 정책을 통해 처음 몇 년 동안 수많은 사업들이 펼쳐졌고 그 결과 생산량이나 가격 측면에서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하지만 대공황을 종식시키지는 못했다. 그리고 급박하던 위기가 사라지자 새로운 요구들이 나타났다. 기업가들은 자유방임주의가 사라져버린 걸 아쉬워하며 국가산업부흥법의 지나친 통제를 불편해했다. 목소리를 높인 노골적인 비판이 정치권의 좌파와 우파의 입에서 동시에 튀어나왔다. 좌우의 이런 압력에 직면한 루스벨트 대통령은 일련의 경제적 ? 사회적 조치들을 내놓았다. 이 가운데 유명한 것으로는 빈곤 퇴치를 위한 사업, 실업자에게 일자리를 제공하는 사업 그리고 사회보장 체제를 마련하는 사업을 들 수 있다. 이 시기의 주요전통에 어긋난다고 불평했지만, 실제로 그 체계는 오히려 상대적으로 보수적이었다. 사회보장을 위한 재원은 많은 부분 노동자들의 수입에 세금을 매김으로써 충당했는데 일률적인 비율로 이루어졌다. 사회보장체계는 처음에 소박한 규모로 시작되었지만, 지금은 미국 행정부가 집행하는 가장 큰 사업 분야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뉴딜의 결과공황이 시작되었던 1929년보다 1937년 여름에는 경제성장이 눈에 띄게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듬해인 1938년 5월 경제는 다시 어려워지고 실업자 또한 증가했다. 이런 ‘루스벨트 경기 후퇴’가 일어난 원인은 여러 가지였다. 그러나 많은 이들은 직접적 원인을 행정부가 지출을 삭감하려던 것으로 꼽았다. 그리하여 대통령은 공공사업과 구호 프로그램에 50억 달러를 투자했고 몇 달내 일시적 회복이 진행되는 듯 했다. 그 후 1938년에 행정부는 노동 입법 중 가장 야심찬 공정 노동 기준법을 지지하고 이를 성립시켰다. 이것은 미국 최초로 전국적 최저 임금과 주당 40시간 노동을 제정하고 아동 노동에 엄격한 제한을 가한 법이다. 그러나 이러한 성과에도 불구하고 1938년 말에 이르러 뉴딜은 본질적으로 거의 종식 상태에 이르렀다. 의회의 반대로 대통령은 어떤 중요한 새로운 프로그램도 입법하기 어렵게 되었다. 대개 역사가들은 뉴딜 정책이 복지국가의 기초를 닦았다는 사실을 일반적으로 모두 인정한다. 뉴딜 정책을 비판하던 몇몇 사람들은 정부 기능을 무한하게 확대하다가는 결국 국민의 자유가 제한될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루스벨트 대통령은 경제적인 측면에서의 복지가 향상될수록 자유와 민주주의도 한층 성숙해 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비록 뉴딜정책이 대공황의 종식을 가져오지 못했다고 할지라도 그 정책의 몇몇은 적어도 악화를 방지하고 미래의 좀더 효과적 경제 정책으로 나아가는 길을 제시했다. 뉴딜정책이 남긴 가장 중요한 유산은 아마도 많은 미국인들 사이에 가능성이 있다는 인식을 만들어 내고, 개인들의 운명을 우연이나 규제되지 않은 시장의 작동에 완전히 맡겨놓을 필요가 없다고었다.
1. 머리말벤저민 프랭클린. 왜 200년도 더 된 인물에 대해 아직도 사람들은 칭송을 멈추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그에 대해 내가 알고 있는 사실은 미국 독립을 위해 힘쓴 정치인이라던가 피뢰침을 만든 과학자정도로만 알고 있었기에 프랭클린에 대해 더욱 자세히 알고 싶은 마음에 자서전을 선택하게 되었다. 책을 모두 읽고 나니 어째서 그가 자수성가의 표본인지, 세계전 컨설팅 회사의 CEO가 시간 관리에 대해 벤저민 프랭클린의 자기관리 수첩을 모델로 했는지에 대한 이유가 설명되는 듯 했다.프랭클린은 매우 특별한 인물인 듯 하다. 18세기 미국에서 가장 커다란 업적을 남겼지만 정규교육이라곤 불과 2년밖에 받지 못했다. 그러나 정치, 외교, 출판, 인쇄, 과학, 교육 등 각 분야에서 최고의 자리에 올랐지 않은가. 그가 성공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부유하지도, 그렇다고 교육도 많이 받지 못한 프랭클린은 20대에 이르러 도덕적 완성에 이르겠다는 당찬 계획을 세우게 된다. 그리고 인생에서 가장 우선 순위에 있는 일들을 생각해보고, 많은 사람들이 예찬해 마지않는 ‘절제, 침묵, 질서, 결단, 검약, 근면, 진실함, 정의, 온건함, 청결함, 침착함, 순결, 겸손’이라는 13가지 항목의 가치관을 수립했다. 어려운 환경에서 자라난 프랭클린이 이 수많은 일들을 해낼 수 있기까지 그의 평생을 이끌어준 삶의 철학은 바로 오늘날 미국 정신의 근간이 된 이 13가지 인생지침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초테크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현대인들에게도 여전히 성공적인 사회 생활의 모델로 제시되고 있는 벤저민 프랭클린. 그의 삶은 담은 이 책이 성공 지침서의 고전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바로 주어진 환경이 아무리 열악하다 해도 철저한 자기 관리와 시간관리를 한다면 누구나 인생을 성공적으로 이끌 수 있음을 확실하게 보여주기 때문일 것이다.2. 본 문1)제 1부. 뉴저지 주지사 윌리엄 프랭클린에게본문은 특이하게도, 아들에게 편지를 쓰는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딱딱한 여타의 책들보다 조금은 읽을 보냈다. 하지만 누군가 다시 똑같은 삶을 살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어떻게 하겠냐는 질문에 주저 없이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할 정도로 자신의 삶에 후회가 없고 힘든 시간들을 두려워 하지 않는 강인함이 엿보였다.아버지인 조사이어와 둘째 부인인 어바이어 사이에서 막내 아들로 태어난 그는 형들은 각기 다른 기술의 견습공 생활을 했지만 8살 때 라틴어 학교에 보내졌다. 부모님과 친지들 사이에서 그는 장차 목사가 될 인물이었다. 그러나 학교를 채 1년도 다니지 못하였다. 가난때문이었다. 그 후 쓰기와 셈학교로 보내졌지만 결국 10살이 되어서는 학교를 그만두고 양초와 비누를 만드는 아버지의 일을 도왔다.그는 어린시절 늘 바다를 동경했다고 한다. 뱃놀이를 하거나 다른 놀이를 할 때에는 항상 대장 노릇을 했고 이는 어려서부터 공적인 일에 관심이 많은 그의 성격을 보여주는 듯했다.또한 책을 읽는 것을 매우 좋아해서 틈날때마다 책을 사 읽었고 ,,과 같은 책들을 어린시절에 벌써 섭렵했다. 그리고 그 책들은 나중에 일어난 몇몇 중대한 사건들에 크게 영향을 끼쳤다. 이런 기질을 간파한 그의 아버지는 그를 인쇄소에 견습공으로 모냈다. 그의 형인 제임스가 하는 인쇄소 였는데 그곳에서 일하면서 시를 쓰고 그것을 팔기 시작했다. 그는 그것이 자신에게 큰 도움이 되었고 출세하는데 한 몫 단단히 했다고 말한다. 또한 형이 신문을 발행하기 시작하자 익명으로 투고를 했고 그것이 신문에 실리고 인정받는등 글쓰기에 두각을 나타냈다. 그러나 형과의 불화로 결국 17살의 어린 나이에 필라델피아로 떠나야 했다.그는 이때쯤 바다에 대한 동경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때 욕망을 채우기 위해 바다로 떠났을것이라고. 필라델피아로 향하는 배안에서도 풍랑을 만나는 등 그의 고생은 계속되었다. 그렇게 힘들고 초라하게 필라델피아로의 여정을 시작했지만 그 이후의 일은 그가 얼마나 큰일을 이루어 냈는지 알게 했다. 그는 노를 저었기 때문에 배삯은 필요 없다고 하는 사공들의 말을 뿌리치고 자신도 돈래의 장인인 리드의 소개로 한 인쇄소에서 일을 하게 되었고 점차 인정을 받고 동네사람들에게 또 그 지방의 지사로부터까지 인기를 얻는 인물이 되어갔다. 후에 다시 보스톤에 돌아갔지만 형과는 여전히 화해하지 않았다. 그러자 아버지는 그에게 여러 가지 충고를 해주며 돌아갈 것을 허락해 주었다.필라델피아에 완전히 정착한 그는 지사의 허세에 빠져 새로운 인쇄소를 시작하기로 하고 지사의 추천서와 돈을 빌릴 신용장이 확실치 않은 상태에서 영국으로의 출장여행을 떠났다.결국 사업은 실패로 끝났지만 대신 영국에서 인쇄소 일자리를 얻었다. 그는 18개월간의 런던생활에서 똑똑한 친구들을 여럿 사귀었고 그들과의 대화가 큰 도움이 되었다고 회고했다.그는 1726년 필라델피아로 돌아왔다. 프랭클린은 돌아오는 여행에서의 일기중에서 ‘계획서’를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꼽았는데, 배안에서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를 정리해 놓은 부분으로 자서전을 쓸 시기까지 충실히 지켜온 부분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다.어쨌든 필라델피아로 돌아와 오랫동안 알던 지인인 키머의 인쇄소를 맡아 경영하고 미국에서 최초로 선보이는 동판틀을 짜내는등 능력을 발휘하며 자신의 인쇄소도 차리게 되었다.사업 시작을 할 무렵 그는 그때 자신이 품었던 생각들은 그 후의 삶에 매우 큰 영향을 끼쳤다. 그는 행복한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진실함, 성실함, 완전함으로 맺어진 인간 관계에 있다는 것을 점점 더 확신하게 되었으며 그에 대한 결심을 적어놓고 평생 실천키로 마음먹었다. 그는 전토 클럽을 결성해 회원들과 열띤 토론을 나누었고 열심히 일했다. 그는 인쇄소 바닥에서 좋은 평판과 신용을 얻는등 첫 번째 성공의 조짐을 보였다. 그는 메레디스라는 친구와 동업하여 신문을 발행하기도 했다. 그 신문은 당시 화제가 되었던 정치문제에 대해 논하는 글을 실어 유명인사들을 시작해 일반인들도 그 뒤를 이어 구독자가 되었고 신문 발행부수도 계속 늘어났다. 이후로도 돈을 모으고 빚을 갚기 시작했지만 상인으로서의 신용과 평판을 생각해 여전히 부지런하고 검소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후에 이 회사는 법인 단체가 되었고 북미에서 흔한 회원제 도서관의 모체가 되었다. 이는 미국인들의 지식수준이 높아지고 자신들의 권리를 부르짖게 되었던 밑거름이 되었다.2) 제 2부. 내 인생 이야기의 계속그가 세운 도서관 덕택에 북미 사람들은 다른 나라의 비슷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보다 훨씬 아는 것이 많고 지적이라는 평가를 받게 되었다. 그리고 도서관은 프랭클린 책을 매일 한두시간씩 읽으며 자신의 발전을 꾀할 수 있었다. 또한 인쇄소도 꾸준히 경영하며 검소한 생활을 유지했다.그는 원래 장로교 출신이었으나 회의를 느끼고 교회예배에 나가는 것을 중단했다. 그리고 이후 도덕적으로 완벽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우선 그는 먼저 책에서 접했던 수많은 덕목들을 열거 했다. 지금까지도 여러 사람들에게 실천사항으로 내려오는 ‘13가지 덕목’이다. “절제,침묵,질서,결단,검약,근면,진실함,정의,온건함,청결함,침착함,순결,겸손”의 순서로 덕목을 정해놓고 그것을 자연스러운 습관으로 만들고자 노력했다. 그는 일주일에 한 덕목씩 실천하기로 마음먹었다. 일년에 네 번밖에 실행할 수 는 없었지만 밭의 잡초를 뽑을때 한 번에 몽땅 제거하려고 덤빌것이 아니라 자기 능력껏 한 뙈기를 끝내고 다음으로 넘어가는 것처럼 천천히 실천했다. 그는 이 덕들을 강조하며 79세까지 행복하게 살아온 이유가 하느님의 은총과 이것을 잘 실천했기 때문이라고 회고했다. 그리고 후손들도 잘 지킬것을 권장했다.그는 ‘절제’덕으로 일생을 건강하게 살았으며,‘근면’과 ‘절약’덕으로 젊은 시절의 어려운 환경을 쉽게 이겨냈고 재산을 모았다. 또한 ‘진실함’과 ‘정의’ 덕으로 나라의 신뢰를 얻어 명예로운 직책을 맡았다고 했다. 이것들은 그가 덕목들의 일치된 힘으로 항상 침착할 수 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그의 말에 귀 기울여주는 원동력이 되어 준 듯했다.원래 그의 덕목은 12가지 뿐이었는데 퀘이커 교도인 친구가 그가 좀 오만하다고 한적이 있었다. 그래서 그는 목록에 겸손함을 추가했다. 우리 인간이 가진 감정중에 ‘자 있다고 했다. 완전히 극복했다고 하는 것은 자신이 겸손하다고 하는 자만이라고 하면서 말이다.3)제3부. 1788년 8월, 이제 집에서 계속 쓰려고 한다.제3부는 그가 공직생활을 시작하면서 행한 주요 업적들에 대한 내용이 주를 이루었다.그는 1736년 주의회 서기로 선출되며 공직에 첫 발을 내디뎠다. 재선시 신참 후보와 경쟁하게 되었는데 결국 승리하기는 했지만 그의 방해가 달가울리 없었다. 그가 큰 재목임을 알아봤지만 마음에 없는 아첨보다는 책을 빌리며 감사하다고 먼저 공손히 인사를 했다. 그러자 상대방도 마음을 열었고 우정을 쌓아 죽을 때 까지 친하게 지냈다. 적대적인 관계를 되씹고 보복하고, 그런 관계를 지속시키기 보다는 신중하게 접근해서 풀어나가는 것이 이롭다는 것을 몸소 보여주었다.이후 그는 조금씩 공무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펜실베니아의 효율적인 경비를 제안하고, 협력체제를 갖춘 소방대를 조직했다. 또한 방위 제도를 확립하고 젊은이들을 위한 대학을 설립했다. 이러한 그의 활동들이 지사와 의원들의 눈에 들어 신임을 얻고 재차 선거에서 승리했다.이후로도 프랭클린은 치안판사로, 시의회 의원으로, 또 시참사 의원으로 주의회 의원으로 정치의 탄탄대로를 걸었다. 그는 한 사람의 눈에 흙먼지가 들어가는 문제조차 해결하려고 했을 정도로 세심한 것에 신경을 썼다. 그런 것을 비난하는 사람들에게 그는 세상을 살아가는데 행복은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커다란 횡재가 아닌 하루하루를 살아가면서 겪는 작은 일들에서 느낄 수 있는 것임을 강조했다. 면도를 못하는 사람이 면도를 배우면 이발소에서 한없이 기다리는 것에 짜증을 내지 않고 자기 편한 시간에 면도를 하며 기쁨을 맛 볼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기에 그는 자서전에도 길 포장 얘기나 가로등 얘기를 대충 넘어가지 않고 장황하게 기록해 놓았다.이후 그는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장군의 위치에서 전쟁을 지휘하기도 했다. 전쟁의 모든 전반적인 부분을 담당했다. 식사와 일상생활에 필요한 물품까지 말이다. 이후 과학자로서의 능력을 발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