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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느 한국인’이 말하는 우리들의 부끄러운 초상
    ‘어느 한국인’이 말하는 우리들의 부끄러운 초상-「당신들의 대한민국」을 읽고 -한양대 경영학부 3학년2003027659 노승욱박노자 씨의 글은 그가 인용된 다른 책을 통해 틈틈이 접할 수 있었지만 이렇게 그가 쓴 책을 읽어보기는 처음이었다. 사실 나는 ‘한국인보다 더 한국을 잘 아는 푸른눈의 한국인’이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그저 책을 팔아먹기 위한 상술이겠지, 어떻게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잘 알 수 있나 생각했다. 요즘에는 진보를 내세우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은 사회여서 그저 그런 사람들 중의 한 명이라고만 여겼다. 그런데「당신들의 대한민국」을 읽고 보니 정말 한국인보다 훨씬 한국을 잘 알고 있어서 깜짝 놀랐다.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사정없는 비판의식내가 그동안 진보를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안타까웠던 점은 바로 진보적 가치에 대한 일방적인 강조였다. 민주노동당이 이만큼의 대중적인 지지를 얻는 데 그토록 오랜 시간이 걸렸던 데에는 현실 사회에서 보수적인 국민들의 눈높이를 감안하지 않고 그들의 주장(그것이 옳고 그름을 떠나서)만 일방적으로 내세우는 듯한 태도 때문이 아니었나 생각한다.그런데 박노자 씨는 외국인의 눈으로 봐서 그런지 신랄하게 비판을 하면서도 현실을 잘 이해하고 있는 것 같았다. 특히 남한과 북한, 러시아와 한국, 선진국(또는 개도국)과 후진국 등을 비교할 때 그랬다. 이제는 귀화해서 한국인이 되었지만, 그가 러시아에서 태어나 수십년을 러시아에서 살았음을 감안할 때 소련에 대해 ‘옐친 등 소련의 부패 관료집단은 극단적인 신자유주의 입장에 따라 국가의 사회보장 의무를 냉소적으로 팽개쳤다(p22)’와 같은 서슴없는 비판은 돋보이는 것이었다. 또 '90년대 들어 갑자기 단군 숭배 분위기를 조장했던 북한에 대해서 ‘사회주의 진영의 몰락으로 실추된 ‘계급혁명적’ 정통성을 신화적 국수주의로 대체하려 한다(p52)’라는 분석은 상당히 날카롭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내 뒷통수를 후려치는 듯했던 매서운 지적은, 특정 종교재단이 설립한 대학의 교수와 교직원들이 그 종교를 믿어야만 자리를 보전할 수 있는 우리나라의 현실을 두고 ‘한 단체가 똑같이 움직여야 한다는 원칙은 사실 구소련이나 여기나 뭐가 다르겠소?(p87)’라는 말이었다. 이처럼 박노자 씨의 현실 비판은 러시아와 남북한이 따로 없었다.평등과 자유를 가로막는 사회에 대한 본능적 저항의식군대를 다녀 온 남학생의 ‘변화’에 주목한 박노자 씨의 지적은 마치 예비역인 나를 두고 하는 말처럼 들렸다. 그는 ‘군대에 갔다 온 남학생들이 젊은이다운 예민함을 잃어버리는 것은 일반적인 현상(p118)’이라고 했는데 이 점은 '05년부터 '07까지 2년동안 군대를 다녀 온 나도 많이 반성을 하고 있던 부분이다. 그런데 나의 반성이 개인적인 차원에서였다면 그는 사회적인 차원에서 문제에 접근하고 있다. 군대에 가기 전에는 친절하고 자상했던 남학생이 군대를 다녀 와서는 권위주의적이고 명령과 복종의 체계에 익숙해 짐으로써 사회에서 군대식 권위주의 문화가 재생산 되는 메커니즘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군대 갔다오고 나서 내가 좀 변한 것 같군, 어서 예전처럼 돌아가야지’라고만 생각해 오던 나에게는 매우 뼈아픈 지적이 아닐 수 없었다.생각해 보면 징병제 사회인 우리나라에서 나고 자란 토종(?) 한국인들에게 군대라는 곳은, 적어도 공부하는 대학생들에게는 군 입대를 면해주는 러시아에서 온 박노자 씨가 느끼는 것처럼 이질적이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서 으레 군대를 갔다오면 그렇게 변화하는 사람들을 봐도 오히려 더 남자다워졌다는 통념에 사로잡혀 문제라고 생각되지 않았다. 내가 그 피해 당사자가 된 뒤에도 말이다.선진국이냐 아니냐의 기준은 여러 가지겠지만, 평등과 자유에 대한 시민들의 의식이 얼마나 몸에 배어있는가 또한 그 중 하나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겉으로 보이는 평등과 자유에는 목소리를 높이면서도 이렇게 국가에 의해 강제적으로 주입당해 온 권위주의에 대해서는 으레 당연한 것으로 생각해 왔던 것이다. 권위주의가 ‘사람은 모두 평등하다’는 인식을 짓밟고, 군대의 국가주의적 이데올로기가 개인의 ‘사상의 자유’를 침해하는 줄도 모른 채 말이다.경제 우선주의 앞에 무너지는 상아탑우리 사회에서 대학이 차지하는 비중은 어느정도일까. 모든 학생들이 명문대에 들어가기 위해 초등학교 때부터 경쟁을 하고 사교육에 가정 경제가 잠식당하고 교수들은 정치에 뛰어들어 국가 정책을 좌우하고.. 이러한 사회의 중심에 대학이 있다는 점에서 나는 그 비중이 상당하다고 본다.그럼 그만한 책임과 역할을 대학은 수행하고 있는가. 이에 대한 나의 대답은 ‘아니오’이다. 박노자 씨의 지적대로 이제 대학생은 더 이상 지성인이라 불리우기 힘들다. 대학생들 스스로가 그 이름을 저버렸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치열한 입시경쟁에 시달렸으니 대학에 와서는 좀 놀아보자’라는 한편의 생각이 일면 납득이 가는 것이 슬픈 현실이긴 하지만, 그렇다 해도 요즘 대학생들의 배움에 대한 순수한 열의는 참담할 지경이다. 심지어는 그토록 진보적 가치를 부르짖던 운동권 학생들마저 어느 조직보다 더 권위와 규율에 얽매이고 정치권이나 기업의 보수적인 기성사회에 자청해서 녹아들어 가는 모습은 이제 새삼스럽기까지 하다.물론 학생들만의 잘못은 아니다. 매년 등록금을 더 받는 데만 혈안이 된 대학 당국, 권위주의와 패거리 주의로 똘똘 뭉쳐 조교를 제 하인 다루듯 하는 교수들(최고의 지성인이라는 그들마저!)까지.. 지성의 전당이라던 대학이 언제부턴가 경제라는 가치를 최우선으로 받들며 이렇듯 타락해 버렸다.생명의 무국적(無國的) 가치지난 '99년에 일어난 이른바 연평해전에서 우리 군이 북한 해군의 배를 2척이나 침몰시키고 3척을 크게 파손시키며 물리친 사건은 분명 국가적으로 자랑스러워 할만한 승리였다. 적어도 우리 군의 대비태세를 성공적으로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박노자 씨는 그 와중에도 북한 군인들의 생명이 스러져간 사실에 주목했다. 적을 물리치는 것과 적군의 죽음 앞에서도 숙연함을 느낄 수 있는 것은 별개의 문제라는 것이다.이는 대부분의 우리나라 국민들은 생각도 못한 문제일 것이다. 분단 이후 반세기가 넘도록 우리 안에 뿌리박힌 북한에 대한 적대의식은 북한 군인들의 죽음조차 애도하기 힘들만큼 강하기 때문이다. 나 역시 한 번도 그 죽음 앞에서 숙연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러고 보면 한국과 북한이 공식 행사 때마다 강조하는 ‘한 핏줄 한 겨레’라는 말은 얼마나 피상적이고 정치적 수사에 불과할 뿐인가. 진정 우리가 같은 민족으로서 통일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면 연평해전의 승리를 다행으로 여기되 이렇게 서로를 죽여야 하는 현실을 비참하게 느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대대적으로 기뻐하고 자랑하지 않았던가. 그러고도 우리가 서로를 같은 민족이라고 부르는 데 계속 떳떳할 수 있을까. 물론 이 점에서는 북한도 마찬가지이다. 책을 읽으며 나는 생명의 가치는 국가도 가로 막을 수 없는 것임을 새삼 깨달았다.우리들만의 한민족외국인의 입장에서 볼 때 어쩌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우리나라의 모습은 단일민족이라는 배타적 민족주의가 아닐까 싶다. 우리나라만큼 민족주의가 잘 먹히는 나라도 드물 것이다. 나도 어렸을 때는 올림픽에서 우리나라 선수가 승리하는 장면을 보기 위해 새벽까지 잠을 참아가며 우리 선수들을 응원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우리 선수가 상대 선수에게 질 때는 마치 내가 진 것처럼 분했고, 우리 선수와 경쟁한다는 이유만으로 괜히 상대 선수가 미워지는 것이었다. 이런 의식이 계속 쌓이다 보면 외국에서 온 노동자들한테 우리나라 사람들처럼 똑같이 대하기는 점점 어려워질 것이 아닌가.과연 우리의 현실이 그랬다. 몽골에서 온 바트자갈의 이야기를 읽으며 나는 너무도 부끄럽고 바트자갈에게 미안한 마음까지 들었다. 똑같이 바다건너 온 외국인들에게 우리는 피부색에 따라, 그리고 출신국가의 경제력에 따라 너무도 다른 태도를 취한다. 우리나라 사람이 미국이나 유럽에서 동양인이라고 차별받은 이야기를 들을 때면 마치 자기 일인 것처럼 화를 내면서도 같은 동양의 나라인 동남아시아나 중국, 몽골 등에서 온 외국인들에게 우리는 반말도 서슴지 않으니 과연 우리가 백인들의 유색인종 차별을 비난할 자격이 있을까. 박노자 씨는 여기에 더해 ‘만주는 원래 우리땅, 언젠가 되찾아야 할 땅’이라는 현실적으로 실현 불가능한 생각을 우리 국민들로 하여금 매력적으로 느끼게 하는 것이 ‘민족주의’.(p215)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러한 ‘바람’이 국민들에게 굳건한 믿음이 될 때 영토 전쟁으로까지 발전하게 되는 것이라며 경계할 것을 촉구했다.(p215) 참으로 맞는 말이다.나는 우리의 민족주의가 좀 더 관대해 졌으면 한다. 씨족?부족 사회의 유물인 혈통주의에 얽매이는 태도는 이제 벗어버리고 속인주의에서 속지주의로 나아가기를 바란다. 우리 속담에도 ‘가까운 이웃이 먼 친척보다 낫다’라고 하지 않았던가. 외국에서 온 사람이라도 지금 나와 같은 공간에서 생활하고 있다면 멀리 바다 건너 사는 이름 모를 한국 동포들보다 어쩌면 더 소중한 인연인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으로 살고자 귀화한 외국인이라면 더더욱 소중한 이웃이다. 그들을 따뜻하게 받아들여야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도 더 다양하게 발전할 수 있는 것이고, 우리가 외국에 가서 그 나라의 ‘외부인’이 됐을 때 우리도 그 나라 국민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리기를 기대할 자격이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를 사랑해서 찾아 온 외국인들은 출신국을 가려 박대하면서도 평생 미국에서만 살아 갈 하인즈 워드에게 국가적인 환영과 애정공세를 펼치는 코미디 같은 사회 현상은 깊이 반성해 보아야 할 것이다.
    사회과학| 2008.07.22| 4페이지| 1,000원| 조회(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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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대시에서 나타나는 초월과 종교적 상상력
    - 목 차 -1. 서론 - 다원화 되고 있는 종교적 상상력2. 본론1) 김남조의 에 나타난 기독교적 상상력과 문학적 개체성2) 윤동주의 에 나타난 기독교적 상상력과 문학적 보편성3) 이해인의 에 나타난 기독교적 상상력과 문학성에 대한 논의3. 결론 - 보편성의 지나친 결여는 더 이상 문학이 아니다.1. 서론 - 다원화 되고 있는 종교적 상상력시가 원시 신앙의 제례 의식에서 시작됐다는 이론은 시가 오랫동안 종교적인 색채를 띠어 왔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인도의 나 그리스의 등은 신화의 내용을 기반으로 쓰여진 고대 서사시이고, 성경의 또한 마찬가지이다. 철학과 문학이 종교의 시녀였던 중세 시대에 시가 종교와 얼마나 밀접한 관련이 있었는가는 말할 것도 없다. 이처럼 시는 그 함축적이고 상징적인 특성상 고대부터 종교와 결합하여 종교적인 상상력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왔다.그러나 종교가 다원화되고 종교의 자유가 널리 인정되는 현대에 와서는 시에도 르네상스 시대가 도래하였다. 인간을 노래하기 위하여 시가 종교에 작별을 고한 것이다. 여기에 단정적이고 규범적인 경향을 거부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이 등장하면서, 종교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는 시이더라도 그 목소리는 과거보다 훨씬 함축적이고 상징적으로 내재화하는 변화가 가속화되었다.이 논문은 오늘날 종교적 상상력을 기반으로 쓰여진 시들에 대하여 고찰하고, 그러한 상상력이 시의 문학적 보편성과 얼마나 자연스럽게 연결되고 있는지에 대하여 연구한 결과물이다.2. 본론1) 김남조의 에 나타난 기독교적 상상력과 문학적 개체성김남조겨울 나무와바람머리채 긴 바람들은 투명한 빨래처럼진종일 가지 끝에 걸려나무도 바람도혼자가 아닌 게 된다.혼자는 아니다.누구도 혼자는 아니다.나도 아니다.실상 하늘 아래 외톨이로 서 보는 날도하늘만은 함께 있어 주지 않던가.삶은 언제나은총(恩寵)의 돌층계의 어디쯤이다.사랑도 매양섭리(攝理)의 자갈밭의 어디쯤이다.이적진 말로써 풀던 마음말없이 삭이고얼마 더 너그러워져서 이 생명을 살자.황송한 축연이라 알고한 세상을 누리자나 너그럽게 살자고 하는 생각에는 쉽게 동의할 수 있지만, 동의하는 까닭이 시인과 같이 ‘삶은 하나님이 주신 황송한 축연’인 사람들은 기독교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아니고는 드물기 때문이다.보편적이지 않은 생각이나 감정을 노래하는 시는 문학적인 보편성 또는 문학적인 순수성이 크게 결여된다. 여기서 보면 김남조의 이 바로 그러한 예라고 볼 수 있다.그러나 문학적으로 덜 보편적이거나 덜 순수하다 하여 작품성이 훼손되는 것은 아니다. 문학의 작품성을 결정짓는 요인에는 문학적 보편성이나 순수성 외에도 작품의 플롯이나 구성, 사용된 어휘, 작가가 독자들에게 전하려는 메시지, 독자가 작품에서 얻는 효용 등 다양한 기준들이 있기 때문이다. 모방론, 표현론, 효용론, 구조론과 같이 문학 작품을 감상하는 여러 방법에 따라 문학 작품의 가치는 다르게 평가될 것이므로, 필자가 김남조의 이 문학적 보편성을 놓쳤다고 하는 지적하는 것이 곧 작품성이 낮다는 평가로 이어지는 것은 아님을 유의하기 바란다.구체적으로 시를 천천히 살펴보자. 1연은 평범한 풍경 묘사이므로 문제될 것이 없다. 그런데 2연을 보자. 2연에서 ‘하늘’이라는 시어는 기독교적인 느낌을 준다. ‘하늘’을 의인화하여 ‘하늘 아래에 서면 누구도 혼자는 아니다. 하늘이 우리와 함께 한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들린다. 여기서 ‘하늘’이 의인화되는 과정에는 ‘임마누엘(하나님이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뜻’이라는 기독교적 상상력이 작용하고 있다. 누구도 혼자가 아닌 이유를 ‘임마누엘’에서 찾는 논리의 전개는 비기독교인들에게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남의 나라 말’과 같지 않을까.기독교 신앙에 바탕을 둔 작가의 메시지는 3연과 4연에서 더 노골적으로 나타난다. 주지하다시피 ‘은총’과 ‘섭리’는 지극히 기독교적인 느낌을 주는 단어들이기 때문이다. 어느 승려가 인사말로 “신의 은총이 있기를 바란다.”라고 했다가 같은 종파의 사람들로부터 ‘왜 다른 표현 놔두고 이교도적인 표현을 썼느냐’고 항의를 들었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로, 여기서 ‘은총’간 시는 문학적으로 순수할 수 없다. 인간의 본성이나 생리 자체를 연구하고 탐미하고 노래하는 것이 순수 문학이라면 다른 인간에게 구체적인 영향력을 발휘하려하는 것은 참여 문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전제에서 김남조의 은 차라리 ‘순수시’가 아닌 ‘참여시’라고 이름하는 것이 나으리라. 종교적인 참여도 참여이다.이처럼 김남조의 이 갖는 문학적 개체성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교훈을 던져 준다. 일반화될 수 없는 근거를 통한 시적 상상력은 대부분의 경우 시의 순수성을 훼손한다는 것. 그래도 그러한 시(화자의 노골적인 청유나 주장이 있고 그 근거가 주관적인 시)를 쓰고 싶다면 ‘참여시’라는 이름을 꼭 감수해야 한다는 것 등.2) 윤동주의 에 나타난 기독교적 상상력과 문학적 보편성윤동주쫓아오던 햇빛인데지금 교회당 꼭대기십자가에 걸리었습니다.첨탑이 저렇게도 높은데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까요.종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데휘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리다가,괴로웠던 사나이,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처럼십자가가 허락된다면모가지를 드리우고꽃처럼 피어나는 피를어두워가는 하늘 밑에조용히 흘리겠습니다.-> 앞에서 이 기독교적인 시어 몇 개로 문학적 보편성을 잃었다면 윤동주의 는 본문에 나오는 시어들은 물론이고, 제목부터 100% 기독교적이지만 문학적 순수성이 조금도 훼손되지 않고 있다. 그 이유는, 결론부터 말하자면, 에서 기독교적인 시어들은 아무런 종교적 의미를 전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이 시는 “쫓아오던 햇빛이 교회당 꼭대기 십자가에 걸”린 것으로부터 시상이 전개된다. “첨탑이 저렇게도 높은데 어떻게 올라갈 수 있”었을까 우러러보고 동경하다가 화자는 자연스럽게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고통스러웠지만 기꺼이 받아들인 순교)을 연상하고, 자신도 언젠가 기회가 오면 “어두워 가는 하늘 밑” 식민지 현실에서 예수 그리스도처럼 죽음을 맞이하겠다는 각오를 담고 있다.여기서 “십자가”, “교회당”, “예수 그리스도”는 너무나 기독교적인 시어이지만, 신기할 정도로 시에 아무런 기독교적 의미를 부여하지 연결되고 있기는 하다. 이것이 시상의 전개를 자연스럽게 하고 시의 구성을 탄탄하게 하는 시적 도구로서 작용하는 부분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떠올리는 화자의 상상력은 굳이 기독교인이 아니어도 가능하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순교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희생을 떠올릴 수 있다는 것이다. 마치 불자가 아닌 사람도 산사의 불상 앞에 서면 숙연해지는 것처럼, 크리스찬이 아닌 사람도 예배당에 가면 경건해 지는 것처럼.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가 이 시에서 맡고 있는 역할은 무엇인가? 순수하게 존재론적 관점에서 말한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화자가 희생하려하는 의지의 정당성을 재확인 시켜주는 ‘희생의 모범 사례’로서의 역할이 더 크다고 하겠다. 이러한 해석은 작가주의적 관점에서, 윤동주의 다른 작품들에 나타난 그의 성격, 그리고 그에 대한 지인들의 평가를 참고해 볼 때 더 타당성을 얻는다.윤동주는 본디 천생 시인으로서, 사랑과 희생에 대한 기독교의 가르침을 받지 않았더라도 시대의 불의에 민감하게 고통스러워 할 만한 섬세한 감수성을 가진 인물이다. 그의 또 다른 시 ‘서시’에서도,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의 ‘하늘’이라는 시어 또한 기독교적 상상력이 아니고서도 충분히 성립될 수 있다. 우리나라는 기독교가 전해지지 않았던 예부터 하늘을 절대적인 존재로 인식하고 있지 않았던가.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거나 ‘지성이면 감천이다’, ‘하늘에 죄를 지으면 빌 곳이 없다(공자)’ 등등.. 의 속담이나 격언이 이를 뒷받침한다.따라서 윤동주의 시 ‘십자가’는 기독교적 상상력이 아니어도, 그가 기독교인이었다는 사실적 근거에도 불구하고 종교적이지 않을 수 있다. ‘십자가’에서 쓰인 기독교적 시어들은 단지 화자의 의도를 드러내는 데 필요한 시적 도구며 수단일 뿐, 기독교인이든지 비기독교인이든지 아무에게서도 종교적으로 감동을 주거나 위화감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우리가 이 시를 읽을 때는 기독교인으로서의 윤동주 그는 과연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다.”라고 한다면 이것은 자연법적으로도 타당한 박애 사상을 무시하는 편협한 생각이다. 이럴 때는 작가의 살다 간 발자취를 더듬어 보는 것이 가장 올바른 평가 방법이 될 것이며, 윤동주 시인의 발자취를 더듬는다면 결국 그는 천생 서정 시인이라고 볼 수밖에 없을 정도로 원래가 정이 많고 박애 사상에 가까운 사람이었다는 평가에 도달하고 말 것이다. 요컨대, 윤동주 시인의 시를 그가 단지 기독교인이었다는 사실에 근거해서 ‘종교적 색채가 짙다’라고 단정짓는 것은 무모한 일이다.우선은 기독교와 보편적 윤리 의식이 공유하는 부분은 종교적 평가에서 제외시켜야 한다. “모든 것을 사랑”하려는 사람이 꼭 기독교인이라고는 볼 수 없으므로 말이다. 윤동주의 시에서 이렇게 거품처럼 덧씌워진 기독교적 상상력을 빼고 나면 윤동주의 시는 문학적으로 훨씬 더 순수해진다. 종교적으로나 사상적으로 일부에 불과한 기독교의 굴레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곧 보편성에 한층 더 가까워지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따라서 윤동주 시인을 평가할 때 그의 시에서 쓰인 기독교적 시어와 그의 기독교적 생애만을 고려해서 기독교적 시인이라고 섣불리 단정짓지 말자. 그는 오히려 문학적인 면에서 그 어떤 시인들보다 훨씬 더 순수하고 보편적이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여기서 기독교와 보편성의 관계, 즉 기독교적 가치가 지금 이 사회에서 얼마나 보편적으로 작용하고 있는가? 라는 문제는 논외로 한다. 이것은 윤동주 시인의 시를 이해하는 데 직접적인 연관이 없다. 윤동주 시인의 시를 이해하기 위해서라면 차라리 기독교의 절대적 성향의 사상과, 윤동주 시인과 같은 천생 서정 시인의 절대적 감수성, 혹은 절대적 순결성과의 관계를 연구하는 것이 더 효과적일 것이다.3) 이해인의 에 나타난 기독교적 상상력과 문학성에 대한 논의이해인언제쯤 당신 앞에 꽃으로 피겠습니까불고 싶은대로 부시는 노을빛 바람이여.봉오리로 맺혀 있던 갑갑한 이 아픔이소리없이 터지도록 그 타는 눈길과숨결을 주십시오.기다림에 초조한 내 비밀스런
    인문/어학| 2008.07.22| 8페이지| 1,000원| 조회(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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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루이제 린저의 <삶의 한 가운데>에 나타나는 세 가지 삶의 유형 - 이상과 현실의 사이에서 평가B괜찮아요
    당신은 당신의 삶을 움켜쥐고 있는가?‘사랑’처럼 뜨거운, 삶을 향한 의지삶이란 무엇인가? 인생이란 무엇인가?이 케케묵은 인류의 물음에 그러나 분명하게 답을 하기란 어렵다. 너무 어렵다. 인간은 사상과 철학과 종교를 만들고 저마다 답을 찾아 헤맸지만, 온갖 신의 계시와 성인(聖人)들의 지혜를 탐구하여도 풀 길은 아득하기만 하다.삶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면 인간에게 주어진 100년도 채 안되는 시간을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물음으로 넘어가보자. 조금은 쉬워졌지만 여전히 어려운 문제. 많은 사상가와 이념가, 문학가들이 저마다 의견을 제시했지만 실제 삶을 살아본 사람들에 의하면 삶이란 그렇게 말과 글처럼 살아지는 것이 아니었다고 한다. 실제로 자신의 이론과는 다른 삶을 살았던 지식인들 또한 적지 않다. 아동중심교육을 주창한 ‘에밀’을 쓰고도 다섯 자녀를 고아원에 보낸 장 자크 루소, 공산주의 이념으로 국가를 다스리면서 제 일가는 방탕한 생활을 누렸던 말년의 모택동, 일제의 탄압에 굴하여(또는 자발적으로) 변절한 친일파 지식인 등등.. 역사를 보면 삶은 뚜렷한 인생의 목표와 방법론을 지닌 지성인들에게도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현대 독일의 대표적인 여성작가로서 5년 전 타계한 루이제 린저는 바로 여기에서부터 삶을 바라본 작가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삶이란 무엇이길래 의지로 불타오르던 인간을 변화시키고 인간이란 또 얼마나 나약한 존재이길래 자신의 삶의 주인으로 살지 못하고 삶에 의해 ‘살아지게’ 되는 것인가!’ 아무리 세상을 뒤바꿀만한 위대한 사상과 인격을 가졌어도 그 자신이 끝내 그것을 발휘하거나 지켜내지 못한다면 그가 이루어낸 모든 업적은 자신의 삶을 ‘움켜쥐지’ 못한 데 대하여 허울 좋은 변명에 불과한 것이다. 그가 처음 살고자 했던 삶은 이미 세월의 바람에 날려갔으니까.그렇다면 우리가 추구해야 할 이상적인 삶이란 객관적으로 위대한 삶이 아니라, 현실의 구애(拘碍)를 극복하고 자신의 의지대로 살아가는 삶이다. 자유분방한 삶을 원하는 사람에겐 집시와 같은 삶이,단어를 몰랐으리라고 생각하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다면 세 등장인물 사이에 10년씩 나이 차이를 둔 것은 결국 ‘이상’과 ‘젊음’으로 대표되는 니나와 ‘현실’과 ‘순응’으로 대표되는 마르그레트, 그리고 그 사이에서 끝까지 현실에 순응하지 못하고 이상을 바라보는 슈타인의 삶을 상징하기 위한 작가의 설정으로 보는 게 타당할 것이다. 다만, 현실에 거의 완전하게 순응해서 니나와 같은 삶에 거부감을 느끼기까지 하는 마르그레트가 슈타인의 나이에 더 어울리겠지만 자매간의 스무살 터울은 어쩌면 자매라는 설정조차 어설프게 만들 위험이 있으며, 젊은 여인에 대한 장년 남자의 구애(求愛)는 스무살 차이에도 가능하고 오히려 그런 차이를 극복하려는 노력이 더 순정적인 사랑으로 비칠 수 있다는 점에서 작가로 하여금 이러한 간격을 선택하게 했을 것으로 보인다.이와 같이 남녀간의 사랑이야기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는 등장인물들의 나이 차이와 그 느슨한 얼개에도 불구하고 사랑이란 너무도 달콤한 주제이기에 아직도 많은 독자들이 이 소설의 주제가 사랑이 아니라는 것, 제목 그대로 삶일 뿐이라는 것에 더 많은 설명을 요구하고 싶어 할 것으로 생각된다. 가 니나에 대한 슈타인의 사랑을 통해 이상에 대한 현실의 지향을 말하고자 하였다는 점을 보다 분명히 확인하기 위해 작품을 들여다보자.먼저 니나를 보자. 작품의 시간적 배경이 되는 1929년부터 1947년까지 니나는 스무살에서 서른 여덟살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소설의 등장인물들 중 가장 젊다. 그 젊음만큼 니나는 삶을 스스로 움직이는, 앞에서 살펴본 ‘이상적인’ 삶의 전형을 보여준다. 이것은 마르그레트와 슈타인의 독백을 통해 그려지는데 이를테면 다음과 같다.나의 놀라움에는 공포 같은 것이 섞여 있었다. 이런 정도의 책임감, 이러한 확고한 자신감, 객관적으로 필수불가결한 것에 대한 정확한 감각이 약간은 비인간적인 것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었다. 이런 성격을 니나는 어디에서 획득한 것일까? 대신 그녀에게 부족한 것은 무엇인가? 그러나 나는 그것을 찾을 도 동경하여 ‘니나 신드롬’ 현상을 불러일으켰다고 한다. ‘니나 신드롬’은 오늘날의 독자들에게도 여전히 유효하긴 하지만, 안타깝게도 지금 우리 사회는 린저와 프롬의 시대보다도 훨씬 더 ‘현대화’ 되어버렸다.마르그레트와 슈타인은 둘 다 현실의 삶을 선택하였다는 점에서는 같지만, 슈타인이 죽을 때까지 니나의 삶을 사랑하였던 데 반해 현실에 깊이 체념해 버린 마르그레트는 그래서 더 ‘현실적’인 인물이라고 볼 수 있다. 작가가 소설의 화자(話者)로 마르그레트를 선택한 것은 그녀의 삶이 가장 일반적인 모습이라고 여겼기 때문으로 보인다. 덕분에 독자들은 니나의 ‘튀는’ 성격에 대리만족을 느끼면서도 마르그레트가 이야기할 때 편안해진다. 독자들에게 감동을 주는 것은 니나지만, 독자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바로 마르그레트인 것이다. 그녀는 곧 그들의 대변자(代辯者)이기에.현실에 안주하는 사람의 삶은 안정적이다. 결과를 예측할 수 없는 도전은 니나와 같은 사람에게는 희열을 주지만 마르그레트와 같은 삶에는 잔잔한 항해 중 만나게 된 풍랑(風浪)이나 다름없다. 그것을 극복하였을 때 자신이 더 강해질 수 있다는 믿음은 무신론자에게 외치는 선교자의 헛된 신앙일 뿐이다. 두 자매의 다음 대화에서 이 차이는 극명하게 드러난다.나는 지난 10년 동안 한번도 아늑하다고 느낀 적이 없었어. 물론 그전에도 잘은 모르겠지만 거의 없었을 거야. 아늑한 기분을 자주 체험해 보고 싶어. 그러나 내 운수에는 그런 게 없을 거야. 언니는 하루 종일 아늑하다고 느낄 수 있어?나는 며칠 동안, 몇 주일 동안, 아니 언제까지나 그럴 수 있었다. 나는 나의 아름다운 집과 개와 자상한 남편을 떠올렸다. (중략) 나는 지난날들을 아무 일 없이 얼마나 편안하게 지냈는지 생각했다. 나의 매일은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과거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과거는 미래와 마찬가지로 평화스럽게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내가 바라는 것을 가졌고 내가 가질 수 없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러니 어찌 편안하다고 느끼지 않았겠는가. 라는 슈타인의 짜증섞인 고백을 이끌어 내며, 니나의 정치적 활동을 이유로 슈타인에게 니나를 멀리하라는 익명의 투서가 배달됐을 때도 누구일까? 누가 나를 정치적 사건에서부터 보호하고, 그러나 니나를 위험하게 하면서, 게다가 그녀를 나에게서 떼놓는 일에 관심을 갖는 걸까? 나는 한순간, 아주 짧은 순간 헬레네를 떠올렸다. (p. 344) 라는 연결을 가능케 하는 것이다.이제 이 소설의 ‘메인 나레이터’인 슈타인을 보자. 소설은 비록 마르그레트의 1인칭 시점에서 서술되고 있지만 소설의 모든 이야기가 슈타인이 18년동안 기록한 약 50여 편의 일기들을 통해 생성되고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내면적인 갈등이 가장 많이 드러나는 인물이라는 점에서 소설의 가장 중요한 인물은 단연 슈타인이라 할 수 있다. 그는 독자들의 감정 이입이 가장 적극적인 대상이기도 하다.니나를 만나기 전까지 슈타인의 삶은 마르그레트의 그것과 별반 차이가 없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설령 마르그레트보다는 어렴풋이나마 문제 의식과 삶에 대한 불만이 있었다 해도 겉으로는 드러내지 않고 삭이며 살았을 것이다. 니나를 만나고 나서야 처음 사랑의 감정을 깨달았듯이, 온전한 삶이 가져다 주는 평화가 사실은 자신의 자아를 희생해 온 대가임을 니나를 만난 이후에야 깨닫기 때문이다.얼마 후 잠에서 깨었을 때 거울 속에 늙은 잿빛의 얼굴이 있었다. 이 모습은 나에게 커다란 만족감을 주었다. 그러나 이 감정은 오래가지 않았다. 나는 곧 내가 계속 자신을 속이고 있음을 알았다. 내 인생에는 전혀 방해물이 없었다. 상처도 없었다. 지금까지 모든 일은 잘되어 왔다. 분명히. 그러나 또한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아무것도. 나는 자기 배를 항구에 매어둔 상인과 같다. 배를 내보내야 돈을 벌어올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배를 바다에 내보내는 것은 위험했으며, 나는 본래 모험에 적합한 인간이 아니었다. 결코 아니었다. 그러나 위험을 무릅쓰지 않는 남자가 무슨 가치가 있다는 말인가! (p.75)여기서 ‘남자’를 ‘인간’으로 바꾸면 모든 소. 당신의 인생과는 너무 달랐던 거요.그렇지만 당신은 나의 인생을 이해하고 인정할 수 있잖아요? 니나가 당황해서 소리쳤다.나는 말할 수 있는 것을 말하지 않았다. 너를 사랑하기 때문이야, 라고 말하지 못했다. (p. 368~369)(여기서 슈타인의 사랑이 이성적인 사랑이 아니었음은 앞에서 밝힌 바와 같다. 소설에서 니나에 대한 슈타인의 모든 사랑은 곧 ‘니나의 삶’에 대한 사랑이라고 바꿔 생각하는 것이 작가의 뜻에 부합하리라 본다. 물론 작가의 뜻과 부합해서 해석할 필요는 꼭 없지만.)한편, 린저는 스스로를 과연 몇 퍼센트의 인간이라고 생각했을까? 나치에 저항하다 투옥되어 사형 선고까지 받았던 그녀의 삶의 궤적을 더듬어 보았을 때는 소설속의 니나와 겹치는 부분이 많지만 결코 분명히 알 수는 없다. 그러나 슈타인을 비롯해 삶을 움켜쥐지 않는 사람들, 말하자면 ‘90% 이하 주어진 사람들’에 대해 니나가 분노하는 다음 장면은, 그녀가 적어도 슈타인과 니나 사이에 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나는 살려고 해요. 나는 생명을 가진 모든 것을 사랑해요. 그러나 당신은 이해할 수 없어요. 당신은 한번도 살아본 적이 없으니까요. 당신은 삶을 비켜갔어요. 한번도 모험을 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당신은 아무것도 얻지도 못했고 잃지도 않았어요.니나는 정말 흥분했다. 당신은 행복한가요? 그렇지 않아요. 행복이 무엇인지 당신은 전혀 몰라요. 그러나 나는 행복해요. 나는 당신이 나의 인생을 당신 인생처럼 만들려고 하는 것을 참을 수 없어요. 당신의 인생은 마치 일요일을 망쳐버리는 재미없고 어려운 학교 숙제 같아요. 얼마든지 나를 부박하다고 생각하세요. 아마 삶에 대한 당신의 불안이 삶을 사랑하는 내 방식보다 더 부박할지 몰라요. (p. 349)어떻게 살 것인가? - ‘삶의 한가운데’에 있는 물음사실 니나와 같은 삶을 살 것인가, 슈타인 혹은 마르그레트와 같은 삶을 살 것인가 하는 것은 소설에서 문체를 정하듯 삶을 살아가는 방식을 규정하는 매우 근본적인 선택의 문제이다. 이는 등장인물들이 자.
    인문/어학| 2008.07.22| 13페이지| 2,000원| 조회(6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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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리랑 공연의 ‘집단체조’를 통해 본 북한의 집체주의와 대중노선
    ‘집단체조’를 통해 본 북한의 집체주의와 대중노선지난 강의시간에 말로만 듣던 ‘아리랑’ 공연을 봤다. TV뉴스에서 잠깐씩 본 적은 있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감상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강의를 듣기 전에는 아리랑 공연의 웅장한 규모, 화려한 카드섹션, 일치된 동작 등 그 화려한 볼거리에 눈을 뗄 수가 없었는데, 강의를 들으며 공연이 완성되기까지에는 북한 주민들의 고통스런 강제 동원이 있음을 알게 되니 정나미가 뚝 떨어지고 징그럽게만 보였다.북한이 집단체조를 하는 이유북한은 김일성?김정일 생일(4/15, 2/16), 공화국 창건일(9/9), 당창건 기념일(10/10) 등 이른 바 ‘4대 명절’이 되면 수만명이 출연하는 집단체조를 1980년대부터 실시해왔다. 그 중 김일성 탄생 90돌을 맞아 2002년부터 선보인 ‘아리랑 공연’으로 집단체조와 카드섹션(배경대)은 더 유명해졌는데, 북한이 아리랑 공연에서 집단체조와 카드섹션을 선보이는 데에는 다양한 정치적 목적이 있다.그 중 가장 중요한 첫째 목적은 ‘체제 유지를 위한 내부 결속’이다. 이미 오래전부터 당면하고 있는 심각한 경제위기에도 불구하고 북한 지도부가 가장 역점을 두고 추진해 온 국가 목표는 ‘경제건설’이 아니라 ‘체제유지’였다. 자유를 빼앗기고 경제적으로 피폐한 생활에 고통 받아 온 북한 인민들은 이제 더 이상 김일성과 김정일에 대해 맹목적 충성을 바치려 하지 않는다. 이런 인민들에 ‘둘러싸인’ 북한 지도부에게 있어 가장 큰 위협은 국가의 경제적 파탄보다는 자신들의 정권(권력) 유지인 것이고, 이를 위해 어떻게든 북한 인민들의 충성심을 자극할 수 있는 선전선동이 필요한 것이다. 공연을 한 번 하려면 무려 10만여 명의 평양 시내 학교 학생들과 교원들이 공연하기 석 달 전부터 거의 하루 종일 동원되기에, 이들이 속한 가정과 말단 세포조직에까지 영향이 미치는 점을 감안하면 평양 시내는 온통 아리랑 공연을 준비하는 분위기에 휩싸이게 될 것이다. 드디어 아리랑 축제가 시작되면 평양 시민들과 평양 주변의 시민들은 연인원 수백만명이 돌아가면서 동원되어 생산활동도 팽개치고 아리랑 공연을 관람하게 된다. 공연 관람을 통해 북한 체제의 우월성을 ‘학습’시키고 김정일에 대한 충성심을 고양시키는 것이다. 평양 시민들을 대상으로 하여 이보다 더 확실한 선전선동이 어디 있겠는가. 북한의 수도권이라 할 수 있는 평양시와 그 주변 지역은 북한에서 그나마 ‘인간답게’ 살고 있는 사람들, 그리고 ‘실세들’이 모여 있는 곳이므로 이들의 내부 결속은 북한 체제 유지에 가장 핵심적인 부분일 것으로 생각된다.둘째로는 경제적 효과를 꼽을 수 있겠다. 아리랑 공연을 관람하는 데에는 약 150달러가 든다고 한다. 20,000여 명이 공연을 관람한다고 하면 약 300만 달러의 외화를 벌어들이게 된다. 게다가 외국인들이 평양을 방문하기 위해 써야 하는 항공료, 숙식비, 기념품 판매 수익까지 포함하면 수천만 달러의 수입을 올릴 수 있는 것이다. 아리랑 공연의 구성이 주로 평양 시내 학생들의 퍼포먼스로만 구성된다는 점에서 공연을 준비하는 데 들어가는 비용은 그리 크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저비용 고수입을 올릴 수 있는 배경에는 참가자들의 노동력 착취와 학생들의 학습권, 주민들의 생계활동권 등을 제한하는 등 북한 인민들의 고혈을 빨아먹는 악독한 강제동원과 공산독재 체제가 숨어있는 것이다.셋째는 대외적으로 체제 안정을 과시하기 위함이다. '94년에 김일성이 사망하고 '95년부터 극심한 식량난으로 인해 고난의 행군을 겪는 등 북한의 위기가 계속되자 세계는 북한 정권이 얼마 못 가 붕괴될 것으로 예상했다. 가뜩이나 외교적으로 고립을 자초했던 북한이기에 이러한 세계의 부정적, 폄하적 시각은 국제무대에서 북한의 외교적 발언권이나 협상력을 떨어뜨리는 악재로 작용했을 것이다. 내부에서는 인민들의 반체제 감정, 외부에서는 북한 정권이 자연붕괴되길 기다리는 등 20세기 말 북한 정권은 대내외적인 불신과 불안이 팽배했다. 때마침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으로 금강산 관광 사업 시작 등 김대중 정권을 통한 외화 획득이 위기를 타개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됐지만, 금강산 관광만으로 북한의 대내외 체제 선전 효과를 바라기에는 부족함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리랑 공연의 집단체조는 평양 인민들에 대한 김정일 정권의 완전한 지배와 장악을 과시할 수 있는 다목적용 통치수단이었던 것이다.북한의 집체주의그렇다면 북한 인민들이 집단체조를 하고 그것을 관람하면서 김정일 정권에 대한 충성심이 고양되는 원인은 무엇일까? 여기에는 북한 정권이 인민들에게 수십년동안 강력하게 세뇌, 주입해 온 집체주의 사상이 작용하고 있다.‘집체’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여럿이 모여 하나를 이룬 집단이나 조직’이라는 의미의 ‘북한어’라고 나온다. 그 외에도 ‘집체교양’(여러 사람에게 집단적으로 실시하는 교양), ‘집체비행’(두 대 이상의 비행기가 같은 목적을 가지고 한 지휘관의 지휘에 따라 비행함. 또는 그런 비행), ‘집체학습’(여러 사람이 한데 모여 공부함. 또는 그런 공부) 등 ‘집체’가 들어가는 북한어는 모두 여러 개체들의 통합과 통일을 강조한다. 이러한 사전적 의미들을 통해서 ‘집체주의’란 ‘여러 사람들이 한 가지 목표와 방향을 추구하는 사상, 정신’ 정도로 해석해 볼 수 있겠다. 북한의 현실에 비추어 봤을 때, 여기서 ‘여러 사람’은 ‘북한 인민들’에 해당하고 ‘한 가지 목표와 방향’은 두 말할 것도 없이 ‘김정일(옛날에는 김일성)’일 것이다.북한은 이처럼 ‘김정일’ 하나를 목표로 하는데, 이것을 추구하는 방법 또한 다양성이 인정되지 않고 오직 집단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10만여 명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집단체조와 카드섹션은 바로 이러한 사상을 더욱 강화하기 위한 북한 정권의 지도수단이라고 볼 수 있다. 어려서부터 집체주의 사상에 철저하게 길들여진 인민들은 아리랑 공연을 통해 웅장한 규모의 집단 활동을 보면서 국가에 대한 자신의 소속감을 재확인하고 심리적 안정을 얻게 될 것이다. 이는 곧 김정일과 국가에 대한 충성심으로 연결되고 체제에 대한 믿음과 안정을 북돋우는 효과로 나타난다.집체주의는 개인보다 국가의 이익을 우선시하고 국가에 대한 개인의 희생을 요구한다. ‘김정일이 곧 국가’라는 등식이 성립하는 북한이므로 결국 집체주의는 김정일 정권을 위한 인민의 희생을 요구하는 것이다.북한의 대중노선대중에게 정치교육을 시키고 대중의 정치의식을 높이는데 필요한 정책노선이 대중노선이라고 한다면, 북한의 대중노선은 당연히 김정일 정권에 대한 사상교육을 골자로 하고 있을 것이다. 더불어 당과 영도세력을 결사 보위하는 ‘총폭탄’ 사상이 포함될 것이다.지난 강의 시간에 본 아리랑 공연의 카드섹션 내용은 바로 인민들에 대한 북한 정권의 대중노선을 엑기스로 뽑아 담고 있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물론 외국인들에게도 보여지지만, 그래도 가장 많은 관람객들은 평양 시민들을 비롯한 수백만 인민들이기 때문이다. 아리랑 공연의 첫째 목적이 ‘내부 결속’이라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따라서 카드섹션에 나왔던 다음 내용들을 다시 살펴본다면 북한의 대중노선을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1) 사상도 김일성 주의, 조선도 김일성 조선, 민족도 김일성 민족2) 세계 혁명의 원로의원 3) 20세기 세계혁명의 거장4) 나는 언제나 자신을 수령님의 전사로 생각해 왔습니다. - 김정일5) 김정일 동지는 김일성 동지 6) 장군님 계시여 수령님 위업 영원하리7) 21세기는 김정일 세기 8) 김정일 우리는 당신밖에 모른다9) 김정일 당신만 있으면 우리는 이긴다 10) 충효의 최고화신 장군님11) 당신이 없으면 조국도 없다 12) 장군이 없으면 우리도 없다13) 우리의 운명, 우리의 심장, 우리의 뇌수 14) 하늘처럼 믿고 삽니다위의 문구들 외에도 많은 문구들이 있었는데 공연을 보다가 미처 다 기록하지 못했다. 그러나 김일성과 김정일에 대한 미화, 선전선동은 이것으로도 충분히 확인되고 있다.
    사회과학| 2008.07.22| 3페이지| 1,000원| 조회(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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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역발전을 위한 NGO의 역할과 문제점, 그리고 대응방향
    지역발전을 위한 NGO의 역할과 문제점, 그리고 대응방향한양대 경영학부2003027659 노승욱지방자치의 시대를 맞아 지방정부의 정책파트너로서, 또한 감시자로서 NGO의 역할은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 지방자치가 아직도 완전히 정착하지 못한 우리나라 현실에서는 특히 지방정부의 전문성과 투명성, 책임성 등을 보장할 수 있는 각종 제도(지방 언론 활성화 등)나 주민들의 인식이 부족하기 때문에 NGO는 지방정부가 주민의 뜻을 제대로 반영하여 진정한 주민자치를 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이러한 NGO의 역할에는 어떠한 것들이 있는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고 그 문제점과 대응방향에 대해 알아보자.1. NGO의 정의먼저 NGO가 무엇인지 간단하게 정의하자면 Non-Governmental Organization으로 ‘비정부기구’라고 직역할 수 있다. 즉, 정부 조직과는 무관하게 자발적인 개인들에 의한 사적인 조직체로서 비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단체이다. 자발성, 자율성, 독립성, 비영리성, 공식성 등이 그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2. 지방정부의 정책에 관한 NGO의 역할그렇다면 이제 지역발전을 위해 NGO가 어떤 역할을 하는지 알아보겠다. NGO는 지방정부가 지역에 대한 정책을 수립?시행?평가할 때 전반적, 단계적으로 참여하여 다음과 같은 역할을 수행한다.(1) 정책의제 형성단계에서의 역할첫째, NGO는 정부조직의 외부에 존재하는 집단으로서 정부 내부에서 파악하지 못하는 보다 포괄적이고 주민과 밀착된 일반적인 고충이나 문제를 제기함으로써 지방정부가 정책을 다양하고 포괄적으로 검토할 수 있도록 한다. 이는 주민들과의 스킨십이 부족한 정부관료들의 탁상공론을 예방하고 주민에게 꼭 필요한 정책들이 형성될 수 있도록 하는 역할로서, 주민들의 의사가 보다 직접적으로 반영될 수 있는 창구 역할을 한다고도 볼 수 있다.둘째, NGO는 정부에 대해 사회의 일반적인 불만상황을 구체적인 정책으로 정리, 변화시켜 정부에 요구한다. 주민들의 일상적인 생활에서 나오는 각종 불편이나 필요한 문제들을 의 노력들이 물거품이 되고 말 것이다. 따라서 NGO는 정부가 자신의 정책 제기를 받아들이도록 다양한 수단을 이용하여 압박을 가하는데 주로 매스컴을 이용하거나 주민들의 서명운동 등 직접적인 참여를 유도하여 NGO의 의제가 주민 다수가 원하는 공공의제로 간주되도록 실제적인 노력을 하는 것이다.넷째, 정부의 정책결정자가 사회문제를 보다 신중하고 투명하게, 공식적으로 고려하게 한다. 전문성과 민주성이 부족한 정부에서는 탁상공론을 거쳐 밀실행정으로 정책이 형성, 집행되기가 쉽다. 주민들이 생계 활동과 무관심의 이유로 적극적인 감시를 할 수 없기 때문이며 특히 감시와 소통의 기능을 하는 언론이 지방에서는 아직 활성화 되지 않았으므로 지방정부는 중앙정부보다 더 태만하게 업무를 수행할 여지가 있다. 이를 막기 위해 NGO는 주민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어느 정도 대표성을 확보하여 지방정부를 감시하고 비판하는 역할을 수행하여 지방정부로 하여금 제대로 업무를 수행하도록 동기를 유발한다. 지방 정부에 정책의 진행 과정을 공개할 것을 요구하고 이를 주민들에게 전달함으로써 지방 언론과 같은 감시와 소통의 기능을 일부 수행, 지방정부의 책임성과 투명성을 강화한다.다섯째, 정책의제가 결정된 다음에도 정책의제의 중요성이 계속 유지되도록 노력한다. 이미 정책의제가 결정되고도 지방정부는 시의에 따라 주민들에게 인기가 있는 정책을 우선적으로 수행하려 하거나 예산, 행정의 문제 등으로 인해 정책에 대한 관심과 추진이 약화될 수 있다. 주민들 또한 정책의제가 결정되기 전까지는 열심히 참여하거나 관심을 보이다가 결정이 된 다음에는 냄비처럼 쉽게 관심을 거두어들이기 쉽다. 지속적인 관심과 참여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관료들의 편의에 의해 얼마든지 정책 집행이 왜곡될 수 있으므로 NGO는 계속적인 참여와 노력으로 정책이 제대로 수행되도록 정부와 주민들의 관심을 유지시키려 한다.여섯째, 정책에 대한 주민들의 의식을 증진시킨다. 또한 시민들에 대한 정부의 인식도 변화시킨다. 지방자치가 시행된 지 20년도 채 안대해서도 주민들의 관심과 참여가 작지 않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탁상공론과 밀실행정에 대한 유혹을 뿌리치게 하고 주민들을 중심으로 한 행정을 하도록 동기를 유발, 전체적으로 지방자치의 수준을 높인다.(2) 정책집행단계에서의 역할정책의제가 형성된 다음에도 NGO의 역할은 계속된다. 그러나 정책결정 단계에서 NGO의 역할은 상당히 제한되는데 정책 결정에 관한 권한은 원칙적으로 공식정부기관에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NGO는 정책이 결정되기까지 주민들의 뜻을 통해 영향력을 행사할 뿐이며, 정책이 결정된 다음에도 제대로 집행되는지 지켜보는 역할에 머무른다. 그러나 이러한 NGO의 영향력이 절대로 작지 않음은, 공식정부기관의 권한과 존재의 기반이 국민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며, NGO 활동 또한 주민들의 지지를 기반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방정부와 NGO의 상호 존중과 인정, 협력이 요구되는 것이다.정책집행과정에서 NGO는 정책이 처음 의도대로 변함없이 집행되고 있는지 감시하고, 그렇지 않을 경우 정책의 집행을 정지시키기 위해 노력한다. 특히, 정책의 결정과 입법은 포괄적이기 쉬워서 행정기관의 재량권에 따라 상당한 변화가 가능하다. 그러므로 정부의 재량권이 최대한 주민들의 권익에 유리한 방향으로 행사되도록 다양한 개입과 압력을 수행한다.(3) 정책평가단계에서의 역할정책평가는 정부에 대한 주민들의 평가와 연결될 수 있다는 점에서 다음 선거와 관련해서도 상당히 중요한 문제이다.정책평가단계에서 NGO는 첫째, 정책집행과정에서 발생하는 특정 정책이나 사업 계획이 주민에 미친 영향, 그 중에서도 특히 부정적 효과를 낸 정책을 비판한다. 긍정적인 정책은 계속적인 장려와 칭찬을 하되, 부정적인 정책은 가만히 둘 경우 더 심각한 부작용을 초래하므로 비판과 수정, 폐지에 역량을 모으게 된다.둘째, 정책에 대한 주민의 태도나 의지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침으로써 정부 행위의 정당성을 결정하는 데 역할을 한다. NGO는 주민들의 뜻을 모으는 데만 만족하지 않고 주민들을 직접 설득하거나 계 주민들의 뜻이 정부에 전달되는 ‘민의의 창’ 기능과도 같은데, 막연한 주민들의 반응을 가시적인 방법으로 변환(서명운동 등)하여 정부가 주민들의 반응을 보다 분명하게 파악할 수 있도록 돕는다. 이는 정부와 주민의 소통을 원활하게 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3. 지방 NGO의 문제점지방자치가 실시됨에 따라 지역마다 NGO의 설립과 활동이 늘어나는 것은 시대적인 추세라고 본다. 그러나 인력과 재정에는 한계가 있는 법. 지방자치의 미숙한 시행 단계에서 주민들의 자발적인 참여가 충분하지 않은 상황이므로 소수 적극적인 NGO 활동가들만으로는 지역적, 미시적인 NGO를 형성, 유지, 발전시켜 나가는 데 어려움이 많다. 이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첫째, 대개의 지역 NGO들은 중앙 NGO의 지원 하에 출범하고 그 역사도 짧은 것이 현실이다. 자생적으로 생겨나지 않은 지역 NGO들은 주민들의 뜻을 반영하기 보다는 중앙 NGO들의 지령이나 프로그램에 따라 이를 모방하거나 답습하는 경우가 빈번하다. 지역과 밀착되지 않은 지역 NGO는 주민을 대표한다는 기본적인 의의 면에서 태생적인 한계를 가진다고 할 수 있다.둘째, ‘시민운동에 시민이 없다’는 사실이다. 우리나라는 지방자치의 역사가 일천하고 중앙집권적인 통치가 워낙 강력했기 때문에 NGO의 시작도 시민들의 참여보다는 소수 지식인들과 사회적인 유명인사, 상근자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이러한 문제로 인해 시민들의 관심과 참여는 항상 나중에 형성되었고 이를 위해 NGO의 직접적인 홍보가 매우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게 됐다. 홍보를 위해서는 ‘언론 플레이’를 활용해야 했고 이는 시민들과의 접촉보다 언론과의 접촉을 더 중요시하는 기형적인 구조를 낳게 됐다.셋째, 지방의 경우 중앙에 비해 전문 인력이 부족하고 상근자도 잘 없어 시민운동의 전문화와 NGO의 유지, 지속적인 발전이 쉽지 않다. 이러한 문제의 심각성은 서울과 수도권에 주요 대학과 교육, 문화, 산업 등이 극도로 밀집된 현실로 인해 더욱 증폭된다. 지방의 열악한 환경(언밖에 없게 되는데, 이런 재정적인 의존은 의존 대상의 정치적인 영향력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는 데 심각한 문제가 있다. 지방정부가 중앙정부로부터 재정적으로 예속된 상태에서 완전한 자치를 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다섯째, 이러한 재정적 어려움, 언론 플레이 의존 방식, 시민들의 자발적인 참여와 관심 부족 등으로 인해 NGO의 운동 방식이 이슈 파이팅(Issue Fighting) 중심으로 전개된다는 것이다. 다양하고 일상적인 문제들에 관심을 가질 여력이 없는 NGO는 할 수 없이 파급효과가 크거나 주민들의 관심이 지대한 소수의 이슈에 대해서만 역량을 모으게 된다. 파급효과가 큰 이슈들은 주로 권력을 가진 중앙정부에 대한 운동으로 연결되며 이러한 대규모 활동에만 매달리다 보면 지속적이고 일상적인 활동으로부터 점점 멀어지게 되며 이는 또 다시 주민들의 자연스러운 참여를 이끌어내지 못하는 악순환으로 이어지게 된다.여섯째, 지역 NGO들 간의 연대가 부족하다. 자생적으로 생겨난 지역 NGO들도 많지 않은 상황에서 각 NGO들은 주로 중앙 NGO들만 바라보며 중앙 NGO를 통해서만 활동 영역을 넓히는 경향이 있는 듯 하다. 독립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돼야 NGO들 간의 자발적이고 전략적인 연대가 용이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일곱째, 철학과 사상의 빈곤이다. 급변하는 세계 정세와 불안한 지지 기반, 언론과 기업 후원에 대한 높은 의존도, 지역 감정 등으로 인해 지역 NGO의 정체성과 활동 목표가 매우 불안정해 보인다. 이는 지금까지 지적한 지역 NGO의 독립성과 주민 기반성의 부족에서 기인하는 바가 크다고 하겠다. 또한 중앙 NGO에 대한 강한 의존성은 중앙 NGO와의 차별성을 이끌어내지 못해 지역 NGO가 갖는 본래적 의미보다는 중앙 NGO의 지부에 지나지 않는 듯한 자조를 하게 된다.4. 지역 NGO의 발전을 위한 대응방향우리나라 지역 NGO의 이러한 문제점들을 극복하기 위한 해결책은 무엇일까. 가장 근본적인 해결책으로는 당연히 지역 주민들의 자발
    사회과학| 2008.07.22| 6페이지| 1,500원| 조회(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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