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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메르, 최초의 학교
    ☆ 수메르-최초의 학교수메르의 학교는 인류문명에 대한 공헌인 쐐기문자체계의 발명과 발전의 직접적인 결과였다. 그것에 다한 최초의 기록은 우르크라는 이름의 수메르 도시에서 발견되었다. 그 기록은 1000점에 이르는 작은 상형문자 점토판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중 공부와 실습에 관한 약간의 단어들이 포함되어있다. 그것은 기원전 3000년까지 올라가는 시점이고, 당시의 몇몇 필경사들은 벌써 가르침과 배움의 의미를 생각하고 있었다. 기원전 2500년경에 이르면 수메르 전역에 걸친 상당수의 학교에서 문자가 공식적으로 교육되고 있었다. 수메르인 ‘노아’의 고향인 고대 슈루파크에서는 1902~1903년에 걸쳐 상당한 분량의 학교 교과서들이 발굴되었고, 그것들의 연대는 기원전 2500년경부터 출발한다. 그러나 수메르의 학교체계가 성숙되고 번창한 것은 기원전 2000년대의 후반기에 접어들면서부터였다.수메르 학교의 원래 목적은 ‘전문적인 직업인’을 양산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그 나라의 경제적?행정적 필요, 각별히 신전과 왕궁의 그러한 면들을 충족시키는 필경사들을 훈련시키기 위해 처음 설립되었다. 그러나 그 성장과 발전의 과정에서, 특히 교과과정이 계속 늘어난 결과로 학교는 수메르에서 문화와 학문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 건물 안에서 고대의 인문학자이자 과학자들은 신학, 식물학, 광물학, 지리학, 수학, 문법, 언어 등 모든 지식을 연구하고 성과를 더해나갔다. 더하여 오늘날의 학문기관과는 좀 다르게 수메르 학교는 창작의 중심지 역할도 했다. 즉, 과거의 문학창작물에 대한 연구와 사본작업이 이루어졌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창작들도 지어졌다.수메르학교 졸업생들의 대부분은 신전과 왕궁에 봉사하는 필경사들이 되었지만, 그 나라의 부유하고 힘있는 자들 가운데 일부는 그들의 삶을 배우고 가르치는 데 바쳤다. 오늘날의 대학교수와 마찬가지로 이 고대 학자들의 많은 수는 그들의 교수비로 먹고 살았고, 그 외의 남는 시간에 연구와 저술을 했다. 처음에는 신전의 부속기관으로 출발했을 수메르 학교는 세월이 흐르면서 세속적인 기관이 되었으며, 그것의 교과과정 역시 대개 세속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다. 그리고 선생님들은 학생들로부터 수업료를 받았다.그 시대에는 교육이 보편적이거나 의무적이지 않았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부유한 가정 출신이었으며, 가난한 자들은 장기적인 교육이 요구하는 시간과 금전을 감당할 수 없었다. 그리고 수메르 학교의 학생들은 오직 남자들뿐이었다.수메르 학교의 장은 ‘전문가’, ‘교수’를 뜻하는 ‘움미아’였고, ‘학교 아버지’라고도 불렸다. 이에 반해 학생은 ‘학교 아들’이라고 불렸다. 조교수는 ‘큰 형제’라고 불렸으며, 그의 임무들 가운데는 학생들의 베낄 새 점토판을 새기고, 그들이 공부한 내용을 암송하는 것을 듣는 것이 포함되어 있었다. 학교에서 일하는 다른 직원들 중에는 ‘그림 그리는 사람’과 ‘수메르어 책임자’가 있었다. 거기에는 또한 출석을 확인하는 반장과 규율을 책임진 것으로 짐작되는 ‘채찍을 가진 사람’이 있었다.수메르 학교의 교과과정은 두 개로 구성되어있다. 하나는 다소 과학적이고 학술적인 과정이라고 묘사될 수 있고, 다른 하나는 문학적이고 창조적인 것이었다.첫 번째는 필경사에게 과연 수메르어를 어떻게 효율적으로 가르칠 것인가라는 주요한 학교의 목표를 위하여 성장하고 발전했다. 이것을 위해 학생들은 관련된 단어와 구절들로 분류된 수메르어를 익숙해질 때까지 암기하고 베꼈다. 기원전 2000년대에 이 교과서들은 더 완벽해졌고, 점진적으로 수메르의 모든 학교에서 이용되는 정형이 되어갔다. 거기에서 우리는 나무와 풀들, 곤충과 새가 포함된 동물들, 도시와 국가 그리고 마을들, 돌과 광물들의 수많은 이름들을 발견할 수 있다. 이는 식물학적?동물학적?지리학적?광물학적으로 무시할 수 없는 지식들을 드러낸다. 수메르의 학자들은 또한 다양한 산술 제표들을 만들고, 많은 구체적인 수학적 문제들을 그 들의 해결책과 함께 남겼다.더욱이 기원전 2000년 말기에는 셈 족인 아카드 인들이 점진적으로 수메르를 정복한 결과로 수메르인 교수들에 의한, 인류에게 알려진 가장 오래 된 사전이 편찬되었다. 셈 족 정복자들은 수메르 문자를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수메르의 문학작품들도 아주 소중히 여겼다. 그래서 수메르어가 구두언어로서 사멸한 지 오랜 뒤에도 그들은 그것을 공부하고 모방했다. 따라서 수메르의 단어와 어구를 아카드어로 번역한 사전에 대한 교육적인 필요성이 있었던 것이다.
    인문/어학| 2007.02.27| 2페이지| 1,000원| 조회(2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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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학]전통지리사상과 풍수지리
    1. 지리사상(지리관)이란 무엇인가자연관이라는 것은 자연을 어떻게 보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다. 이때 보다 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 보다, 바라보다 라는 뜻이 아니고 ‘몸으로서 파악한다.’ 는 의미이다. ‘몸으로써’라는 것은 우선 신체를 사용한다는 뜻이지만 깊이 들어가면 ‘살아있는 것은 것을 통해서’라는 의미이다. 그런데 ‘보다’라는 말속에도 단순히 ‘보이다’라는 말과 구별되는 주체적 활동이 덧붙여져 있는 이상 신체적 행위적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결국 자연을 살아 있는 것을 통하여 몸으로 이해한다는 입장이 자연관인 것이다.우리는 공간 속에 살면서 세계와 마주하고 서서 이를 파악한다. 그리고 그것에 대해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다. 여기서 인간의 주체적 파악으로써 세계관이 성립된다. 이때 자연관과의 관계는 어떠한가? 그것은 세계와 자연과의 관계의 문제이다. 일반적으로 자연은 세계의 일환으로써 세계 속에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세계에는 자연 외에도 인간적 문화적 세계가 있다. 그러나 어떠한 경우에는 자연은 세계와 동일하게 간주되고 있다. 따라서 자연관이 세계관 속에 포함되는 경우와 세계관이 곧 자연관이 되는 경우를 생각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 대략 말해보면 후자의 경우는 동양사회와 그리스에서 볼 수 있고 전자의 경우는 중세 및 근대에서 볼 수 있다.자연이란 무엇인가? 자연의 의미에 대해서는 우리들은 자연이 무엇인가를 막연하게 알고 있으나 이성적으로 이해하고 있지는 못하다. 그런데 문제는 자연 그 자체가 아니라 우리들에게 있어서의 자연이라는 점이다. 우리들은 자연을 찾을 때에 우리들과 관계없이 저편에 서있는 그것이 무엇일까라는 식으로 자연을 찾는 것이 아니다. 이미 우리들과 관계가 있는 자연에 대해 물음으로써 한층 더 그 모습을 분명히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우리들이 살아있는 것을 통하여 자연을 이해해 갈 때 자연은 다양한 모습으로 우리들 앞에 나타나는 것이다. 비록 자연이 세계와 동일하고 모든 것을 포괄하는 전체적 세계라고 해도 그것은 우리와 서로 호응하는 으로 사용된다. 그리고 그것은 장소에서의 지인일체의 세계관적 개념이 사용되는데 이는 서양에서 기원한 문화란 용어의 동양적 표현이라 해도 큰 차이는 없을 것이다.도가사상의 무위자연에서 비롯된 동양에서의 자연은 영어의 Nature와 의미가 다르다. 서구철학에서 말하는 자연이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과학적 대상으로서의 자연을 가리키는 말로 이에 해당하는 한자어는 天地이다. 노장사상에서 억지로 하지 않는 것이 무위사상이라면 스스로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인간 본질의 노출이 바로 자연이다.2. 우리나라의 전통 지리사상1). 천하도에서 나타난 우주관세계지도로서의 천하총도는 우리나라 지도책에서만 발견되는, 한국인이 만든 추상적이면서 독특한 세계지도로 널리 알려져 있다. 천하도의 기원과 제작연대에 대해서는 여러 학자들의 언급이 있었으나 아직도 미해결의 문제로 남아 있다. 제작연대는 현존하는 것으로 보면 17세기 이후의 것이 대부분이다.지도의 구성을 보면 천하의 중앙에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중심 대륙이 있고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비해, 그 외곽에 환대륙, 영해와 외대륙이 둘러싸고 있고, 각 대륙과 바다에는 각종 지명들이 기재되어 있다. 이들 지명에는 국명이 98, 산명이 39개, 하천명이 5, 소택명이 5, 수목명이 3, 기타 3으로 모두 153개가 나타나고 있다. 국명의 분포를 보면 중심 대륙에 15개국, 내해에 45개국, 환대륙에 29개국, 외대륙에 9개국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이들 중 실제로 존재하는 국명은 중심 대륙과 내해에 위치한 중국, 조선, 일본국, 유구국 4 개국뿐이다. 그 외의 국명은 산해경에 나타나는 실존한다고 믿기 어려운 삼신국, 삼수국, 불사국, 여인국 등의 기이하고 가상적인 국명이 대부분이다. 山名의 분포를 보면 중심 대륙에 8,내해에 11, 환대륙에 18, 환해상에 2개가 나타나나, 실재하는 것은 중심 대륙이 있는 것뿐이다. 하천명은 전부 중심 대륙에 있으며 5개를 기록하고 있다. 일반지도에서 기입할 대상이 아닌 수목이 3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부상,뻗어 내리지 않고 훨씬 남쪽인 함흥 북동쪽에서 시작하여 지리산 일대까지 이어진다. 더욱 주목되는 점은 등뼈가 되는 산줄기에서 갈라져 나온 산맥들이다. 서쪽을 향한 줄기는 크게 4개 정도의 지맥이 보이는데 조선 후기와 비교할 때 그 수가 매우 적다. 가장 북쪽에 그려진 산맥이 지금의 적유령 산맥으로 보이는 줄기이나 연속되어 있지 않고 중간에 끊어져 있다. 두 번째 산줄기는 가장 큰 산맥으로 안변 석왕사 일대에서 갈라져 나와 서남쪽으로 달려 고려의 수도였던 개성으로 뻗는 줄기이나 연속되어 있지 않고 중간에 끊어져 있다. 두 번째 산줄기는 가장 큰 산맥으로 안변 석왕사 일대에서 갈라져 나와 서남쪽으로 달려 고려의 수도였던 개성으로 뻗는 줄기이다. 세 번째는 이보다 작은 산줄기로 한양의 훨씬 동쪽 가평 일대에서 멈추었으며, 네 번째는 전라도 나주 쪽으로 뻗은 지금의 소백 산맥과 노령 산맥 산줄기이다. 이 가운데 후기의 지도와 다른 점은 개성으로 뻗은 산줄기가 매우 강조된 반면 조선이 수도인 한양까지 산줄기가 뻗어 있지 않은 점이다. 이는 이 지도에서 그려진 산천 체계가 개성 중심의 자연 인식을 나타내는 것으로 아직 고려 시대의 산천 인식 체계에서 벗어나지 못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매우 주목된다.이에 비해 16세기 중엽에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혼일역대국도강리지도」는 아직 조선의 윤곽이 정확하지 않으나 백두산이 그려져 강조되어 있고 한양으로 뻗은 산줄기가 뚜렷하게 표시되어 있어 이제 백두산과 한양이 조선 산천 체계의 중심으로 확고하게 자리 잡았음을 보여준다.이렇게 백두산은 우리 국토의 뿌리로 보는 사고와 그리고 수도인 한양을 중심으로 확고하게 자리 잡았음을 보여준다. 이렇게 백두산을 우리 국토의 뿌리로 보는 사고와 수도인 한양을 중심으로 보는 이원적 사고 체계는 16세기 이래 전형적으로 보이는 국토의 산천 인식 체계이며 이러한 내용은 지리지, 지도 등에 보편적으로 반영되어 있다.한편 수도를 중심으로 국토를 파악하는 사고는 전통 사회에서 일반적인 현상이다. 국왕이 거주의 『산수고』는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하나의 근본에서 만 갈래로 나뉘어 지는 것은 山이요, 만 가지 다른 것이 모여서 하나로 합하는 것은 물이다. 우리 나라 山水는 열둘로 나타낼 수 있으니, (산은) 백두산으로부터 12산으로 나누어지며, 12산은 나뉘어 八路(팔도)가 된다. 팔로의 여러 물은 합하여 12水가 되고 12水는 합하여 바다가 된다. 흐름과 솟음의 형세가 나뉘어 지고 합함과 묘함을 여기에 가히 볼 수 있다.…이 서문에는 나라의 근간이 되는 산과 강을 분합의 원리로 파악하여 대칭적이면서도 조화를 이루는 음양의 구조로 이해하였음이 분명하게 표현되어 있다. 조선의 주요 산과 하천을 각각 12개로 파악한 점도 매우 주목할 만한 점이다. 이것은 당시 사람들이 지니고 있던 자연관과 우주관을 반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자연의 운행을 보면 1년은 12달로 완결되며, 우주 만물에는 양과 음이 있다. 우리 나라의 산천도 일반 자연 법칙과 동일한 구조로 되어 있어 12개의 산줄기와 물줄기로 되어 있으며 산수의 흩어짐과 합함, 우뚝 솟아 서 있음과 아래로 흘러내림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이러한 사고는 자신이 살고 있는 국토를 소우주로 이해하여 완결적인 존재로 파악하던 당시 사람들의 전통적인 자연관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라 볼 수 있다.산수고의 12산 : 삼각산, 백두산, 원산, 낭림산, 두류산, 분수령, 금강산, 오대산, 태백산,속리산, 육십령, 지리산산수고의 12천 : 한강, 예성강, 대진강, 금강, 사호, 섬(蟾)강, 낙동강, 용흥강, 두만강,대동강, 청천강, 압록강이후 산을 중심으로 하는 지리서와 하천을 중심으로 하는 지리서가 독립적으로 편찬되어 자연 인식의 체계화가 한층 심화된다. 산을 중심으로 산줄기의 체계를 정리한 책이 산경표이다.산경표에는 백두산에서 시작하여 1개의 대간과 1개의 정간, 13개의 정맥으로 조선의 산줄기가 분류되어 있다. 산경표에 나타난 산맥 체계의 특징으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1) 산줄기의 맥락과 명칭을 생기에 의뢰하여 생활에 영향을 미치는 운명을 양호하게 만들려는 일종의 토속적인 운명신앙이라 할 수 있다.풍수란 글자 그대로 바람과 물을 말한다. 인간이 생활하는데 물과 바람이 필요불가결한 것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바람이란 기상, 또는 기후로 대체시켜도 무방하며 생물의 생명은 물과 태양열과 온도에 의존한다. 즉 인간의 생활유지에 직결되는 물과 기상조건은 토지를 선정하는데 필수조건이었을 것이며 이에 따라 길흉화복을 점쳐 물어 내면적인 인생의 행운을 향유하고자 하는 것이 풍수사상이다.1). 풍수사상의 형성과 전개풍수론은 음양팔괘와 5행 생기의 관념을 토대로 하여 일종의 사상, 신앙으로까지 발달한 것으로 그 기원을 찾자면 중국 상고시대까지 소급하여야 한다. 한국에서는 당에서 풍수설이 도입되기 전에 이미 풍수설이 존재하였다. 기록에 의하면 우리 나라에서는 이미 삼국 초기에 땅의 물질적 소여뿐만 아니라 본질적 지기에 대한 이해가 있었음을 알게 해주는 대목들이 나온다. 통설로 하면 중국의 풍수 사상은 전국시대부터 주대에 걸친 시기에 형성된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원형을 따지자면 이미 주대로부터 소박한 형태로나마 도읍, 성시, 동리 등의 영조 때에 상지, 상택을 했음을 여러 기록에서 찾아볼 수 있다.풍수의 전단계로서의 상지에 관해서는 고구려의 동명왕 주몽이 불유산상에 국도를 정했다는 기록, 백제 시조 온조가 한강의 북한산에 올라 국도를 정했다는 여러 기록 등이 이를 뒷받침해주고 있다. 이와 같은 풍수설과 유사한 신앙이 상고시대에 신봉되었는데 신라말엽에 당으로부터 비교적 체계적인 풍수설이 도입되면서 신라에는 이 사상이 급속도로 유행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을 널리 국민에게 인식시키고 사상 체계를 갖추게 된 것은 신라 말 도선국사에 의해서라고 믿어진다. 당시 대표적 선승이자 풍수가인 그는 이 방면에서 상당히 조예가 깊었던 인물로 보여 진다. 그는 중국의 구조화된 풍수지리를 이론적으로 받아들여 그것을 체계적으로 한반도에 투영시킨 인물이다. 그는 신라 하대에 새로 도입되어 당시있다.
    인문/어학| 2007.02.27| 7페이지| 1,000원| 조회(3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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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학]규장각의 조직에 관한 연구(논문요약)
    「규장각의 조직에 관한 연구」Ⅰ. 결언-규장각 설립(1776)부터 정조 9(1785) 『대전통편』간행까지의 기간에 한정하여 규장각의 조직에 대해 고찰-규장각 조직에 대한 다양한 견해의 양상과 원인, 『규장각지』에 기술된 조직, 『대전통편』에 규정된 직제의 종합, 조직이란 개념에 따라 규장각의 조직을 재구성Ⅱ. 규장각의 설치-규장각 : 정조 때인 1776년에 설립되어 왕립도서관과 학술연구기관으로 활동한 핵심기관-당쟁의 난관을 통해 왕위에 오른 정조는 규장각을 통해 학술활동 및 여러 정책을 펼침-규장각은 당대의 어제, 어필을 수장하여 왕실도서관으로 발전-서적의 수장이라는 기본 기능 외에, 후에 지식, 학술, 문화와 인쇄기술을 발전시킨 조선 후기의 문예부흥에 공헌(1) 정조 동궁시기-영조 35(1759) 세손으로 책봉되어 즉위할 때까지 경희궁에 거처-흥정당(興政堂) 동남쪽의 2층 건물에 위층은 주합루(宙合樓), 아래층은 존현각(尊賢閣)이라 하여 강학의 중심지로 삼음-정색당(貞?堂)이란 서재를 만들어 각종 도서 보관, 비서관(秘書館)을 두어 관리-> 규장각의 축소된 형태로 규장각의 시원(2) 정조 즉위후-시정기치 : 崇儒重道 繼志述事-왕권강화, 왕조부흥이라는 목표 달성 위해 규장각 설립-송, 명의 내각제도 모방해 즉위(1776)년 9월에 설립-표면상 목적 : 역대 임금의 御製와 御筆을 봉안-실질적 목적 : 권신의 발호를 막고 새로운 기풍을 진작시키기 위해 사대부의 명절과 문학을 다시 일으키기 위해 규장각 설립친위세력 육성, 자신의 정치적 개혁 뒷받침할 학문의 진흥-기존의 청요직 못지 않은 권한 부여하고 각별한 관심을 보임으로써 단기간에 강력한 기구로 육성-경주김씨와 홍인한 세력의 위험 속에서 기존의 정치기구로 혁신정치 불가능-규장각은 학문적 기능 뿐 아니라 정치적 기능도 함께 수행-초기 목적 : 홍국영의 영도하에 정적을 소탕하는 최고기관으로서의 역할 수행홍국영을 규장각제학으로 삼아 절대권력 부여-정조 3년(1779) 홍국영 축출하고 정세가 안정되자 규장각은 점차 학술기관으로서의 체제 정비-정조 5년(1781) 각종 직제와 법규 완비, 규장각이 본격적 학술기관으로서의 면모를 갖추도록 지원-홍문관을 비롯한 관각의 기능을 규장각에 통합시킴, 관각제도 일원화-정조 2년(1778) 규장각 제학이 교서관 제주, 직제학이 부제주, 직각은 교리, 대교는 품계에 따라 전사, 저작, 정자 겸임하게 하여 서적간행에 관한 사무 전담-정조 4년(1780) 송대 전각학사의 예에 따라 홍문간과 예문관의 대제학과 제학이 주관하던 시관의 임무에 규장각 제학도 동참하게 함-정조 5년(1781) 춘추관 당상의 예에 따라 규장각 직제학도 유생의 과시에 참여하게 함규장각 직제학 이하도 홍문관의 예에 따라 내지제교를 겸하여 대선을 맡게 함양사의 예에 의거해 언관으로서의 역할도 수행하게 함종부시와 춘추관의 역할 수행언관이 아님에도 조정 진신의 파직을 청하고 계청하지 않고도 백성을 처벌할 수 있는 권한초계문신제도를 통해 독서당의 인재양성 기능 포괄-승정원, 홍문관의 신하들 보다 왕과 더 밀접한 관계-정조 6년(1782) 강화부에 규장외각 건립,-정조 7년(1783) 대전의 정일, 정조, 동지, 경례시의 문안 및 낙원의 입시에도 참여-규장각을 중추적인 정치기구로 삼음-규장법규 : 『규장각지』정조 5년에 시작해 정조 8년에 완성정조의 비호아래 국가의 문약기능을 총괄하게 된 규장각의 법제를 발전적으로 규정Ⅲ. 규장각 조직에 관한 旣存論-종래의 규장각에 대한 연구는 주로 정치, 학문, 문화, 도서관과 학술연구기관으로 초점이 맞추어짐-규장각의 직원에 대한 문제를 고려한 조직으로서의 연구는 이루어지지 않았음-규장각 연구의 기본 서적은『규장각지』-강화부에 있던 규장각에 대한 견해의 차이-대개 강화부의 규장외각은 내각의 하부기관이 아닌 외각의 하부기관으로 생각함-외각으로서 교서관의 하급직원에 대한 이해도 부족함-규장각의 조직은 왕의 저작을 수장하는 장소가 아닌 직원이라는 문제와 결부시켜 연구하는 것이 합당Ⅳ. 규장각지에 나타난 조직과 직제1. 조직1) 내각-강화도에 설치된 규장외각은 내각에 첨부-내각에서 관장하는 7서고 : 규장각, 봉모당, 열고관, 개유와, 이안각, 서고, 규장외각-규장각 : 창덕궁 금원 북쪽상루하간의 6간 서고서고로서의 명칭은 규장각, 건물명칭은 주합루-봉모각 : 열성조의 어제, 어필, 어화, 고명, 유고, 밀교, 선보, 세보, 보감, 지장 봉안-열고관, 개유와 : 중국본 수장-이안각, 서고 : 조선본 수장-규장외각 : 강화 행궁에 위치, 어제, 어필, 고명, 책보와 고금의 서적 봉안2) 직원- 이문원, 각 신들의 집무청사3) 외각-교서관, 경적을 인반하고 향사와 인상을 담당4) 표규장각┏ 내각 ┏규장각(주합루)┃봉모당┃열고관┃개유와┡이안각┡서 고┖규장외각┡ 직원 : 이문원┖ 외각 : 교서관2. 직제1) 직제-내각 : 제학 2-홍문관 대제학 및 홍문관 또는 예문관의 제학 후보자로 천망된 인물 중 택함, 직제학 2-홍문관 부제학으로 천망된 인물 중 택함-외각 : 제주 2명-내각 제학이 겸직, 부제주 2명-내각 직제학이 겸직2) 선발규정-자신의 의중에 부합하는 신하들을 임명하기 위해 선발규정을 다른 관서와 다르게 정함-제학: 홍문관과 예문관의 대제학과 제학, 직제학은 홍문관 부제학에 추천된 자를 이조에서여러 명 추천하여 권점을 통해 선발-직각, 대교 : 홍문관 관원을 거친자와 유림, 주서와 설서의 추천인을 규장각 자체의 회권을 통해 임명-규장각 내부 천거에 의해 바로 각직에 임명-임금과 각신들의 의도가 직접적으로 반영될 수 있음-관직이 일정한 품계에 고정되지 않아 그 대상의 폭이 넓음
    인문/어학| 2007.02.27| 4페이지| 1,000원| 조회(3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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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19 , 혁명인가?
    4?19, 혁명인가?4.19 혁명에 관한 논쟁의 초점이 되는 것 중 하나는 그것이 혁명이냐 아니냐의 물음이다. 이에 대한 정확한 해답을 갖는 작업은 4.19혁명의 역사적 의의를 명백히 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4.19는 의거의 차원 또는 운동의 차원을 뛰어넘는 혁명이었다. 완성을 보지는 못했으나 적어도 혁명적 성격을 강하게 지니고 있었음은 누구도 부인하기 어려울 것이다. 엄밀한 의미에서의 혁명이란 근본적인 정치적?사회적?경제적 변동이 일어났을 때만 쓰이는 개념이다. 즉, 혁명은 통치조직 자체의 변경을 포함한 정치체제의 근본적인 변혁과 이동을 가져올 뿐만 아니라 파급적으로 사회적?경제적?심리적 측면 등 여러 분야에서의 변화를 수반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의미에서의 혁명은 기존 지배세력 사이에서 권력 탈취를 위한 투쟁의 형태가 아니라 피지배계층인 민중이 갖는 반항의 형태를 취하며, 또 피지배계층의 광범한 지지를 필요로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이상에서 4.19가 과연 혁명이었느냐 하는 회의를 가질 수 있다. 특히 4.19의 결과를 중시할 때 그러한 회의는 정당화된다고 하겠다. 4.19에 의해 근본적인 사회적?경제적 변화가 나타나지도 않았다. 정치지배층의 성격에 있어서도 커다란 변화가 뒤따르지 않았다. 자유당이라는 한 보수적 정치집단으로부터 민주당이라는 또 하나의 보수적 정치집단으로 정부가 교체되었을 뿐이다. 혁명 주도세력이 존재하지도 않았다.하지만 4.19는 이승만의 권위주의 체제를 붕괴시키는 결정적 역할을 수행했다. 혁명이란 그 이전의 사회규범으로부터 일탈된 수단에 의해 국가의 정책과 지배자 및 기구를 변경시키려는 기도로서 그 성격은 전쟁적이고, 기존의 제도적 유형의 심각한 붕괴를 수반한다. 4.19는 바로 이 정의에 합당한 것이라고 본다. 그리고 4.19가 주도세력이 없었으므로 혁명이라고 보기 어렵다고 하지만, 비록 조직화는 되지 않았으나 지식인 계급이 4.19를 혁명을 선도했다고 할 수 있다. 대학생과 교수 및 언론인으로 대표되는 지식인들은 자유민주주의 신념을 강하게 지니고 있었고 그들의 눈에 제도화된 권력구조의 비민주성과 비민중성을 너무나 명백했다.4.19는 여러 가지 중요한 역사적 의의를 가진다. 그중 가장 중요한 의의는 4.19가 이 당에서 최초로 성공한 시민?민주혁명이라는 데 있다. 4.19의 혁명성이 부인되기도 하지만, 4.19가 타도한 자유당 정권의 역사적 성격을 생각하면 그것은 틀림없는 시민 민주혁명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흔히들 자유당 통치는 독재정치라고 말해지고 있으나. 자유당 치하에서도 언론의 자유가 제법 누려졌고 야당의 정치활동도 어느 정도 보장되고 있었다. 4.19는 언론기관과 야당의 꾸준한 뒷받침이 커다란 힘이 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이렇게 보면 자유당 통치는 독재 정치라기보다는 부패한 전제정치 내지는 신절대주의 정치였다고 하겠다. 전제정치 내지 절대주의를 타도한 4.19를 바로 시민?민주혁명이라고 규정하지 않을 수 없다.4.19 민주항쟁은 자유와 민주주의 민권을 쟁취하려는 민주주의 운동의 시초라고 할 수 있다.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다른 나라의 운명을 대신 개척해 줄 수 없으며 우리의 운명은 우리 스스로가 개척해야 한다는 민족주체의식이 발현되었으며 결의를 다진 반독재 민중의 대열은 독재의 어떠한 혹독한 탄압, 학살, 처형도 물리치고 궁극적 승리를 달성할 수 있다는 것도 깨닫게 되었다. 비록 4.19는 학생이 중심이 되어 이룩한 시민혁명의 성격을 띠기는 하였지만 학생만의 것은 아니었다. 4.19에 이르기까지의 언론투쟁도 있었고, 지식인, 근로자, 농민, 야당 등 광범위한 민주적 역량의 결속에 의해 달성된 것이다. 따라서 민주세력의 광범위한 결속의 가능성을 보여 주었다. 4.19를 미완성의 혁명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그것은 아직도 끝나지 않고 진행된다는 뜻에 있다. 이 점에서 4.19는 60년대의 학생 시대로 발전되어서 해마다 4.19가 올 때 마다 4.19혁명의 기념으로서의 사건이 이어져오고 있다.
    인문/어학| 2007.02.27| 2페이지| 1,000원| 조회(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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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리나라 교육의 문제점
    - 교육사회 REPORT -우리 나라 교육의 문제점▷ 우리나라 교육의 문제점 BEST 5 ◁1위. 올바른 교육 의식의 부재2위. 입시 위주의 대입제도 개선3위. 공교육 정상화와 사교육비 경감4위. 참 스승을 길러내기 위한 사범대의 목적성 상실5위. 낡은 교육 환경 개선처음 레포트 주제를 받고 과연 우리 나라 교육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가 무엇일까에 대해 많이 고민해 보았다. 흔히들 현재 우리 나라 교육의 가장 큰 문제로 공교육의 붕괴, 사교육비 문제, 입시 위주의 대입 제도 등을 꼽는다. 나도 우리 나라 교육의 문제점이라고 했을 때, 이러한 것들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그리고 이 문제점들의 해결 방안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만약 공교육이 정상화 된다면... 사교육비 문제가 해결이 될까? 내가 생각한 답으로는 아니오였다. 아무리 학교 교육이 내실화 되고 공교육이 정상화 된다고 하더라도 사교육은 여전히 극성을 부릴 것이다. 학교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져도 학부모들은 여전히 뭔가 부족함을 느낄 것이고, 자연히 그 자리를 사교육으로 채우게 된다. 공교육이 정상화 된다 하더라도 여전히 학생들 사이의 학습 성취도는 차이가 날 것이고, 학부모들은 그 차이를 메우기 위해 또 다시 사교육에 의존하게 된다.나에게는 중학생 동생이 있다. 내가 장래에 교사를 희망하다보니 자연히 학교에서 어떻게 교육을 받고 있는 지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살펴 본 결과, 학교 수업은 충분히 정상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선생님들의 수업 방식도 대체로 무난하며, 교과 내용도 아이들에게 충분히 전달되고 있다. 그리고 학원의 수업 내용을 살펴 보면, 오히려 학교 교육보다 못한 점이 많다는 것을 느꼈다. 실제로 물어봐도 시험을 칠 때 학교에서 배운 내용으로 공부하지, 학원에서 배운 내용은 하나도 기억나는 것이 없고 도움도 되지 않는다고 한다. 현실 사정이 이런데 학부모들은 왜 기어코 자녀들을 학원에 보내는 것일까? 그것은 막연한 불안감 때문이다. 실제로 내 주위를 보면 자녀를 학원에 보낼 때 뭔가를 더 배우고 오라는 생각 보다는 다른 사람들이 다 보내니까, 나만 안 보내면 뒤쳐질 것 같아서 학원이 소용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보내는 경우가 많이 있다.대입 제도의 문제도 마찬가지이다. 만약 현재의 입시 위주의 대입 제도 대신 학생들의 흥미와 적성이 고려되고, 또 창의력과 꾸준한 학습 과정을 평가하는 식으로 바뀐다면 우리 나라 교육은 정상화 될까? 그렇지 않다. 만약 대입 제도가 바뀐다 하더라도 대학 간에는 엄연히 서열이 존재한다. 이 서열을 없앨 수는 없다. 어느 선진국을 보더라도 대학 간의 서열이 없는 나라는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부모들은 내 자녀를 좀 더 좋은 대학에 보내고자 할 것이고 자연히 현재의 문제점들이 다시 재발하게 된다. 입시 위주의 강압적인 교육이 그 형태만 바뀌어 다시 재개 되는 것이다.이처럼 현재 우리 나라의 교육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보다 근본적인 대책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런 생각으로 문제점들을 하나 하나 거슬러 올라 갔을 때 결국은 사람들의 의식 구조에서 모든 문제가 비롯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즉, 교육에 대해서 근본적으로 인식이 바뀌지 않는 한 현재 산재되어 있는 교육 문제를 해결 할 수 없다는 것이다.우리 사회는 예로부터 교육을 국가적 차원에서나 개인적 차원에서나 중시했다. 이는 유교의 이념이 도입되면서부터 이다. 유교는 개인의 입신 양명을 최고의 가치로 여긴다. 즉, 공부를 열심히 해서 과거에 합격해 관료로 출세하는 것이 부모에 대해서도 가장 큰 효도이고, 개인적으로 봤을 때도 최고의 영광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유교 이념이 몇 백 년이 넘는 세월을 지배하면서 사람들의 사고 방식은 자연히 학업 중심적으로 흐르게 되었다. 아무리 가난해서 먹을 것이 없어도 자식의 교육 만큼은 절대 포기하지 않는 우리 나라 사람들의 전통적인 태도가 형성된 것이다. 이러한 태도는 근대에 와서도 지속되었다. 우리 나라가 근대화 되고 산업화 되면서 사람들의 관심은 자연히 어떻게 하면 잘 먹고 잘 살 수 있을 지에 모아졌다. 하지만, 자원이 없던 우리 나라에서는 오로지 사람들을 수준 높게 교육시켜 기술력을 발전 시키는 것만이 잘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래서 국가 차원에서 교육을 중요시 여기게 되었다. 또한 각 가정에서도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자식을 훌륭하게 교육시켜 출세를 하게 하는 방법 뿐이었다. 이와 같은 사회적, 역사적 배경 아래에서 우리나라의 높은 교육열이 나타난 것이다. 이는 학력 주의, 학벌 주의 사회 구조와도 무관하지 않다.이처럼, 잘못된 교육 의식을 개혁하는 것이야 말로 우리 나라 교육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방법이 될 것이다. 우선, 학벌?학력 우선 주의의 의식을 바꿔야 한다. 좋은 학교를 나오면 다 잘 될꺼라는, 좋은 학교를 나온 사람은 뭔가 특별할 것이라는 의식을 타파하고 개인의 현재 능력을 중시하는 사회 의식이 형성되어야 한다.그리고 공교육을 불신하는 풍조도 바뀌어야 한다. 학교 교육만으로는 뭔가 부족하다는 의식, 사교육을 시켜야지만 안심이 된다는 생각을 버리고, 학교에서 아이들의 능력에 맞는 충분한 교육이 이루어지면 학교와 교사를 믿고 모든 것을 맡기는 믿음이 싹터야 한다. 또한, 부모들은 주위의 상황에 흔들리지 말고 나름대로의 교육관을 확고하게 세워 거기에 맞도록 자녀들을 교육하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또한 지식 위주의 입시 위주의 공부를 중요시 하는 생각도 바뀌어야 한다. 지식 교육에 앞서 먼저 인성 교육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아이들에게 올바른 인성과 가치관을 심어 주는 교육을 가장 먼저, 또 가장 중요하게 실시해야 한다. 그리고 아이들의 능력과 흥미, 적성에 맞지 않는 일방적 교육을 지양하고 자녀들의 특기와 적성, 관심, 그리고 아이의 능력에 맞는 교육을 지향해야 한다.
    교육학| 2007.02.27| 3페이지| 1,000원| 조회(3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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