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4 관속식물의 진화와 다양성관속식물 파생형질상태 1. 목질화된 이차벽 2. 후벽조직 3. 물관부의 통수요소 4. 체관부의 사요소 5. 내피 6. 오랜기간 독립생활 하는 포자체 7. 뿌리관속식물의 다양성 리니아 식물문 석송식물문 진정엽식물 중원형식물 - 양치류 나도고사리삼목 송엽난목 쇠뜨기목 마라티아목 미역고사리목1. 목질화된 이차벽목질화된 이차벽 대부분 벽공이라는 구멍구조가 세포벽에 존재 벽공은 원형질연락사가 많이 집중되어 있는 일차벽지역에 쌍을 이루며 형성 벽공은 원형질연락사를 통한 세포간 교신을 가능하게 해줌2. 후벽조직3. 물관부의 통수요소 액체를 통과 시키기 위해 고도로 특화된 세포들로 구성되는 진정한 의미의 관속 조직 통수요소는 물과 무기물의 통도기능을 수행하는 특화된 세포들 유조직 및 일부 후벽조직과 연계하여 물관부라는 하나의 조직을 형성통수요소 - 천공의 존재에 따라4. 체관부의 사요소 사요소는 당을 통도하는 세포들 목질화된 이차벽이 없어 일차벽만 지니는 기다란 세포 이 일차벽에는 특수한 구멍이 존재 - 이들이 모여 사역을 이룸 사역은 다당류인 육상체로 덮여 있음 사요소는 성숙시 “ 반생존 ” 상태사요소5. 내피 내피의 각 세포에는 카스파리띠가 있는데 목질소가 내피세포의 접선면과 방사면에 침적된 것 카스파리띠는 내피벽의 세포막에 결합하여 수분투과를 억제한다6. 오랜기간 독립생활 하는 포자체 배우차세대보다 오래 지속되고 우세하며 광합성을 통해 독립생활 포자체가 자라나서 독립적으로 양분 얻으며 배우차제는 죽게된다 . 포자체의 주축 또는 줄기는 가지를 치고 포자낭을 여러 개 지닌다 . 줄기는 지지기관 - 뿌리 , 잎 , 생식기관 간의 통도기관으로 기능관속식물의 줄기7. 포자체엽과 슈트 포자체엽 - 납작한 배복성 기관으로 대개 광합성을 수행하는 일차기관 대개 잎이라고 부름 광합성에 필요한 조직의 면적을 크게 증가시킴 다양한 생태적 적응전략으로 진화 줄기와 잎의 총연합체인 슈트의 일부로서 발생 정단분열 조직8. 뿌리 식물체를 고착시키고 물과 무기물을 흡수 뿌리가 없는 식물에는 대개 한 줄로 연결된 사상의 가근 - 흡수 기능 근단분열조직 정단분열조직이 근관으로 덮여 있음 근단에서 조금 떨어진 지역에 근모라 하는 털같은 돌출구조 관속주에는 물관부와 체관부가 번갈아 배열- 관속식물의 다양성 1. 리니아식물문 최초의 육상관속식물 멸종한 화석식물만이 포함 줄기 끝에 포자낭이 달리며 차상으로 분지하는 축으로 구성 뿌리와 잎이 없음2. 석송식물문석송식물문- 부처손과 물부추과 석송과와는 달리 엽설 존재 이형포자성 소포자와 대포자 자성배우자체 포자내발생성 - 배우자체가 원 포자벽 안에서 완전히 발달3. 진정엽식물4. 중원형 식물 - 양치류 줄기의 원생물관부가 중원형 - 물관부의 결각부위에 제한 원시적 줄기 유관속계는 관상중심주 - 외사관상중심주 - 양사관상중심주 - 망상중심주5. 나도고사리삼목 잎은 포자낭이 달리는 생식부와 광합성을 담당하는 영양부로 구성 땅속의 근경으로부터 발달하는 뿌리는 갈라지지 않고 근모도 없다 고사리삼속 나도고사리삼속 - 뿌리는 분지하지 않고 근모 없음 , 배우차제는 비광합성이고 균근을 지님6. 송엽란목 포자체는 독립적이고 생활환의 대부분을 차지 진정한 뿌리가 없는데 근경의 가근이 흡수기능을 함 잎은 매우 축소되어 작은 돌기처럼 생김 포자낭은 진정 포자낭 합생포자낭7. 쇠뜨기목8. 마라티아목 권상개엽의 특징을 지님 진정포자낭 합생포자낭 다환관상중심주9. 미역고사리목 - 박벽포자낭 양치류 종다양성이 가장 높에 나타남 지상부의 줄기가 직립 -30m 를 넘기도함 잎은 양치엽 , 엽병은 양치엽병 박벽포자낭 환대 반수체성 배우자치시기를 보냄 경제적 중요성 - 원예시장 어떤 식물은 수생 - 이형 포자성{nameOfApplication=Show}
인터넷 쇼핑몰, 공예시장의 새로운 가능성과목명: 공예의 이해교수명: 김효정 교수님학번: 0510490학부: 인문(중어중문)이름: 조혜정제출일: 5월 18일?목차?Ⅰ. 서론 : p-1수공예제품의 인기Ⅱ. 본론 : p.1~9공예사이트 분석-운영사항Ⅲ. 결론 : p-10공예shop의 미래조망최근 4~5년 사이에 국내, 아니 전 세계적으로 불기 시작한 인터넷 쇼핑몰의 등장은 마치 황금알을 낳는 거위처럼 모든 사람들에게 매력적으로 비쳐졌다. 벤처기업은 물론 기존의 대기업까지 너도나도 인터넷 쇼핑몰을 오픈하고 왠지 첨단의 냄새가 나는 이 신종 황금알 낳는 거위에 빠져들었다. 컴퓨터와는 별 관련이 없는 컴맹에게도 e쇼핑이 그다지 낯설게 들리지 않는 게 시대적 상황이지만 공예라는 다소 고전적인 느낌을 주는 일과 웹진(craftabout.com)이라는 컴퓨터 공간의 일을 병행하며 인터넷 쇼핑몰, 특히 공예품을 팔기 위한 사이버 공간으로서 이 미래의 시장에 대해 많은 어려움과 동시에 희박한 가능성 또한 많다.요즘 들어 수공예 제품들이 인기를 모으는 가운데 특히 여성들의 관심이 집중되는 악세사리 제품을 수공예로 만듦으로써 수익성을 올리고 있다. 수공예는 영어로는 핸드워크(handwork), 매뉴얼 아츠(manual arts)라 번역하기도 한다. 수공기술에 의한 기물(器物) 제작은 세계 각국을 통하여, 또는 기구 기계가 없었던 원시시대부터 행하여진 것으로, 넓은 의미로 해석하면 고대의 토기 석기 나무 아각(牙角) 조개껍데기 목피 등의 제품도 수공예품이다. 그것이 인간의 지식의 진보로 점차 분업화하고 발달하여 전적으로 손으로 하는 기술과, 기구 기계를 많이 사용하여 제작하는 것으로 분류되었고, 다시 창작에 의하여 예술미를 발휘하는 공예와 전통을 바탕으로 수련에 의하여 만드는 공예로 분화되었다.세계적인 추세이긴 하지만 일반인들의 공예에 대한 인식은 참으로 천차만별이다. 어떤 이는 관광지에서 본 민예품을, 어떤 이는 옆집 아저씨네 가내 수공예품을, 어떤 이는 엄마가 취미로 만든 지점토인 아까워 친구와 이웃들에 게 선물했는데 모두들 ‘돈 주고 팔아도 될 만큼 이쁘다’ 며 좋아했고 갑자기 불끈 힘을 얻은 이고은 주부는 프 리마켓이라는 홍대 앞 벼룩시장에 자신의 머리핀을 펼 쳤는데 반응이 예상외로 너무 좋았다. 한 발짝 더 힘을 낸 그녀, 이제는 이것으로 돈을 벌수 있을까 생각한 끝 에 서적으로 독학도 하고 파우치, 필통 등은 기성 제 품을 분해하여 연구도 하고 스스로 만드는 법을 터득 한 다음 팔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본 것이 바로 인터넷 쇼핑몰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꼭 재료비는 좀 많이 들더라도 질 좋은 퀼트 원단을 사용하여 만들고 제품의 디자인 하나도 꼼꼼히 체크한다. 그래서인지 그녀의 작품을 특히 색감이 곱고 예쁜 것이 특징이다. 언제나 아기자기한 사은품과 서비스 제품을 넉넉히 준비해 두고 소자본으로 운영할수 있다는게 가장 큰 장점으로 꼽고 있을뿐 아니라 집에서 일을 하기 때문에 주부로서 집안일 해야 되는 걱정도 없다. 엄마가 어릴 때 만들어 주시던 가방과도 같은 느낌을 준다. 세상에 하나뿐인 수공예 제품들로 가방들도 화려하고 이쁘지만 고객들과 의사소통할수 있는 공간이 없어 아쉽다. 품절된 상품들도 많은데 그럴 경우엔 상품리스트에 삭제하고 새로운 물품공급이 필요할 것 같다.? 아트상품 개발과 이벤트에 주력-가나아트숍가나아트숍은 가나화랑을 모기업으로 하고 있으며, 올해로 8년차를 맞고 있는 곳이다. 따라서 비교적 체계화된 시스템으로 운영되고 있다. 숍 안에서도 분야별로 담당자가 구분 지어져 있으며 인사동, 평창동, 청담동 등 다양한 곳에 규모 있는 공간을 갖추고 있다.가나아트숍은 국내외 유명 작가들의 명작을 모티브삼아 아트상품을 기획·개발해오고 있는 점이 특징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최종태의 십자고상, 이중섭, 장욱진의 커피잔과 굽타일, 그리고 이만익, 황영석, 이응노, 오수환, 박영남의 넥타이 등 그동안 100여종의 고유상품을 만들어왔다. 이것들은 시중에 유통되고 있는 공예 상품과는 다른 영역을 구축하며 대중들에게 크게 어필해왔다. 또 판매데이터들을 활용하는 한편, 홈페이지 http://www.craft42.com내에 우리꼴 쇼핑몰을 연계, 구축함으로써 온라인을 통해 오프라인을 지원할 수 있는 체계를 만들었다. 인터넷이 보급되면서 한때, 공예품을 다루는 쇼핑몰들도 크게 늘어났었으나 지금은 대부분 사라졌다. 이는 이들 쇼핑몰이 직접 만져봐야 파악할 수 있는 공예품 선택의 까다로움을 간과했으며, 무점포 형태로 운영되어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할 수 있는 재고물량의 확보에 실패했다는 데 원인을 찾을 수 있다.우리꼴은 인수 후, 공예품 쇼핑몰의 오프라인 매장으로 전환할 계획이었으나 본격적인 런칭에 앞서 재고창고와 그 밖에 A/S 시설 등 온라인상에서 해결할 수 없는 부분들을 미리 준비하여 운영의 난맥을 극복할 수 있었다.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상호지원을 통한 효과이다. 쇼핑몰의 운영에 있어서는 4명의 머천다이저(merchandiser)를 두어 소비자들의 반응에 즉각 반응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신상품이 입고되면 쇼핑몰에 올려 일정기간 소비자들의 반응을 감지하고 그 결과를 작가에게 알려주어 소비자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수정, 다시 쇼핑몰에 올려진다. 이런 과정을 반복하여 소비자들이 호응하는 공예품을 만들어 낸다. 이는 인터넷을 통한 불특정다수의 소비자의 선호에 따라 OEM 생산방식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꼴의 판매대상은 개인고객에 대한 소매, 중간유통업체에 대한 도매, B2B가 가능한 대량 수요로 나눌 수 있다. 가장 주력하고 있는 것은 B2B사업이다.? 도자예술 대중화의 노력- 토아트토·아트는 한국의 흙으로 빚어낸 도예작품들이 들려주는 한국의 문화와 도예가들의 열정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때로는 전통적 기법에 충실하고 때로는 현대적인 실험을 하는 도예가들의 다양한 작품을 한 자리에서 만날 수 있는 문화공간이다.토·아트는 보다 새로운 도예작품의 콜렉션을 꿈꾸는 내·외국인들에게 한국의 우수한 도자 문화를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아름다운 예술의 향기를 찾는 분들에게는 보다 뛰어나고 작품성 있는 도예별로 나누어져 있어 상품을 구입하기에도 편리하다. 다른 사이트에 비해서 판매하는 공예품들도 많고 테마별로 나누어져 있어 선물하기에 고민할 필요도 없을 것같다. 예를 들어 감사/효도 선물, 외국인 선물, 돌/생일 선물, 결혼/집들이 선물의 테마로 나누어져 있다.?여성들 선호도 ‘으뜸’, 생활문화 선도 -크래프트하우스비즈공예, 퀼트, 십자수, 손뜨개, 테디베어 등 현대공예와 인테리어 소품이 주요취급 품목으로 운영하는 현대공예 프렌차이즈 업체이다. 그동안 대중에게 낯설었던 공예를 누구나 쉽게 생활속에서 익히고 응용할수 있도록 실용공예, 취미공예 등을 선보이면서 공예문화를 적립하는데 솔선수범한 대표회사라 할수 있다. 크래프트하우스는 소자본으로 창업이 가능해 여성들 선호도가 ‘으뜸’이다. 특히 토탈공예전문점으로서 다양한 단골고객을 확보하고 있으며, 매출부진의 주요인이었던 신상품과 새로운 아이템 개발이 매달 이뤄져 시즌별 매출에 상당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1 ‘테디베어’조각과 털원단을 이용한 각종인형과 인테리어소품을 제작할수 있다.테디베어공예의 가장 큰 특징인 사랑스러움과 부드러움을 가진 여 러 가지 표정의 귀여운 곰인형을 만들기도 하고 테디베어를 모티브로 한 의상, 액세서리 등도 만들 수 있다.#2 ‘비즈공예’비즈공예는 준 보석으로서 유럽 황실공예와 미국의 인디언풍의 장식품, 일본, 중국에서 그 유래를 찾아 볼 수 있다. 현재 세계적으로 선풍적 인기를 얻고 있으며, 진주나 크리스탈, 비즈 등을 한알한알 꿰어서 직 접 목걸이나 귀걸이 등을 만드는 쥬얼리 공예로서 같은 재료를 사용 해도 만드는 사람의 감각에 따라 독특한 개성을 뽐낼 수 있으며 싫증나 면 언제든지 풀어서 새로운 디자인으로 만들 수 도 있다. 크래프트하우 스에서는 비즈와 크리스탈 등 부자재를 20개 단위로 소포장 판매하고 있으며 상품 디자인별로 도안과 사진이 포함되어 있는 패키지를 구입 할 수 있다.크래프트하우스의 장점으로 타매장과 차별화된 색깔이 있는 Concept매장으로 공예와 홈인테리어에 필요한 각종도제품을 만드는 on-line market이다.각분야의 전문가와 명장의 자문을 구하여 체계적인 전통 수공예제품을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 판매하는 공예품의 종류로는 명품공예, 손자수공예품, 노리개, 궁중의상, 한복소품, 고가구, 액자공예, 생활용품공예 등 아주 다양하다.손자수공예품으로는 조각보를 판매하고 있는데 어머님들은 귀중 한 물건을 싸서 보관하던 것으로 보(보자기)를 사용하곤 하였다.특히 조각보는 쓰다남은 자투리천을 잇고 이어서 만든 것으로 어 머님들의 절약 정신과 한뜸한뜸 정성을 들여서 만든 정성을 엿볼 수 있는 물건이다.버려도 아깝지 않을 쓰다 남은 천 조각을 아무런 설계나 디자인 없이 한뜸한뜸을 바늘로 떠서 만들었지만 그 조각보의 조화나 배 열, 아름다움은 무엇에 비교 할수 없을 정도로 정교하고도 세련 되었다. 이렇듯 조각보는 우리조상들의 절약 정신과 예술성 그리고 실용성을 한눈에 볼 수있는 종합 예술품인 것이다.노리개는 패물의 하나로 겉고름과 안고름 또는 치마허리에 차서 우리 고유의 복식미를 고조시키는 대표적인 장신구이다.노리개의 종류는 만드는 재료, 색상, 문양, 의미 등에 따라 분류되며, 소재는 금, 은, 보석이 가장 많이 쓰이고 자수나 장식적 부속품 등으로도 장식되었다.옆의 그림은 열쇠패노리개로 자수 노리개의 한 종류로 가격도 10만원대로 비싸지만 보석노리개나 금속노리개에 비하면 그다지 비싼편은 아니다.이 소반은 황해도 지방의 쓰던 해주소반으로 옮기기 편하며 가볍고 작은 상으로 은행나무를 이용해 만든 것이다. 양다리에 판을 대고, 전은 통반을 깎아 제물전으로 만든 것을 특징으로 한다. 상판과 다리를 견고하게 부착하고 또 아름답게 장식하기 위한 운각(雲脚) 역시 투각으로 처리하여 시원한 조형미를 보여주고 있다. 이름은 국화 해주소반으로 가격은 320000만원 정도이다.다른 사이트보다도 가배공예야 말로 진정한 한국 고유의 공예제품을 판다는 것을 느꼈다. 아마도 다른 곳은 시대의 흐름에 맞춰 십자수와 퀼트, 펠트 등을 포함한 제품들도 판매하 있다.
황사가 유독 심했던 지난 토요일, 말로만 듣던 인사동을 방문하게 되었다. 친구들한테 인사동에 관한 것을 많이 들었던터라 기대반 설렘반으로 나서게 되었다. 가는길에 황사가 심해 집에 되돌아갈까 생각도 했지만 과제에 대한 나의 의지는 황사도 꺾지 못했다. 수업시간에 인사동은 일본에 의해 붙여진 이름이라고 들어서 기분이 썩 좋지만은 않았지만 지금은 한국을 대표하는 거리이고 또 일본의 잔재는 찾아볼수 없을만큼 뛰어나기 때문에 나름대로 자부심을 가졌다. 솔직히 공예라고 하면 지금까지 초등, 중등, 고등학교를 거쳐서 정규 교과목으로 미술(그중에서도 극히 짧은 시간만이 할애된)을 배운 것이 있을 뿐이고, 문뜩 떠오르는 단어가 도자기밖에 없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멋진 도자를 보면 감탄사를 내뱉을 정도의 감각은 있다. 물론, 그나마도 이번수업을 진행하고 나서야 겪어 보게 된 일이지만 말이다. 그러나 아직도 가격표를 볼 정도의 배짱은 생기지 못했다. 꽤나 괜찮은 작품을 보며 감탄하다가도 그 작품의 가격표를 본 순간 아름다움을 볼 때의 탄사가 아직은 저걸 위해 돈을 지불할 정도의 소양은 갖추지 못했다는 깨달음의 탄식으로 바뀌게 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도자기를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는 나이지만 도자기에 대한 관심은 있다. 이번기회에 도자기에 대한 안목을 높일수 있는 기회가 됐음 하는 바람이다.먼저 인사동을 간략히 소개해 보자면) 북쪽으로는 관훈동(寬勳洞), 동쪽으로는 낙원동(樂園洞), 남쪽으로는 종로2가, 적선동(積善洞), 서쪽으로는 공평동(公平洞)과 접해 있다. 조선 초기에 한성부 중부 관인방(寬仁坊)과 견평방(堅平坊)에 속하였다.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 당시 행정구역 개편 때는 원동(園洞), 승동(承洞), 대사동(大寺洞), 이문동(李門洞), 향정동(香井洞), 수전동(水典洞) 등이 인사동에 해당하는 지역이었다.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대사동, 이문동, 향정동, 수전동, 승동, 원동 등의 각 일부가 통합되어 인사동이 되었으며, 같은 해 9월 출장소 제도 신설로 경사동 전통문화의 마을축제'를 개최하고 있다. 종교기관으로는 일제강점기에 설립된 승동교회가 있다. 주요기업으로는 성신양회공업(주)의 본사가 있다.그렇다면 예술가들이 인사동을 많이 찾는 까닭은 무엇일까?인사동에는 매주 수요일마다 5시에서 7시 사이 인사동에 모든 화랑 갤러리들이 전시 오프닝을 동시에 하게된다. 신진작가나 중진작가등이 인사동에 있는 갤러리 및 화랑에서 전시시작을 알리는 오픈을 하는 것이다. 외국에 있는 작가들도 인사동에서 전시를 갖는 것이다. 수요일에는 인사동에 사람이 더 많이 나온다. 한국의 유명작가는 한번씩은 인사동에 있는 갤러리에서 전시를 갖고 있다. 갤러리도 많이 생겨나고 있다. 일부 경영난에 문을 닫는 갤러리도 있지만 작가들 발표의 장이 이루어지고 있는 중요한 역할을 갤러리가 하고 있다. 인사동에 있는 많은 갤러리중에 보다 갤러리는 좋은 전시를 많이 기획하고 있다. 테마별로 색깔있는 전시를 하는 여는 것에 미술의 진정한 발전 되어가는 모습의 화랑이다.인사동은 예술의 거리라고도 한다. 작품활동하는 사람이면 인사동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각종 전시가 많이 열리는 한국에서도 최고 많은 화랑 및 갤러리가 몰려있다. 인사동하면 떠올리는 것이 골동품과 옛 조상의 문화를 떠올리지만 작가들이 성장하는데 필수적인 전시장이 한국에서는 최고 많이 있다는 것이다. 갤러리중에는 대관화랑과 작품판매를 하는 두 종류의 화랑이 존재한다. 대관화랑으로는 공평아트센터, 덕원갤러리, 인사아트갤러리, 보다갤러리, 하나아트갤러리, 상갤러리 등 무수히 많다.작가들의 작품을 감상하는데는 일요일에도 대부분 문을 열기 때문에 주변 골동품점과 문화의 거리를 돌아보면서 전시를 얼마든지 감상할 수 있다.*인사동 스케치도시속 한국. 인사동을 표현하는 말이다. 이 말처럼 인사동은 도시속의 작은 한국이다. 다른곳에는 눈 씻고 찾아봐도 없는데 여기는 있는 것들. 화랑과 골동품 가게, 한지가게 등이다. 이것이 인사동의 분위기이다.종각역에서 십 여분을 걸어가면 콧대 높은 빌딩들 사이로 인사동 거리의 입래서 가장 많이 추천해준 듯 하다.쌈지길이 데이트 장소로 안성맞춤이라고 많이 들어봤다. 실제로 가보니 눈을 어디에 둘지 모를 정도로 화려하고 다른 세계에 온 것만 같은 느낌을 받았다. 탁 트인 마당과 경사진 램프를 따라 늘어선 상가들로 구성되어 있어, 일단 인사동의 흐름을 내부로 끌어들이는데 성공한 것 같다.쌈지길이 좋은 느낌을 받은이유가 지금보다 앞으로 어떻게 사용될지 기대되는 공간으로 가장 많은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는 건축물로 자리매김을 할 것이기 때문이다. 미술센터는 우리 고유의 도자기와 옹기, 한지, 등 고급스러운 느낌을 가진 작품들이 많이 전시되어 있었지만 분위기가 너무 엄숙해서 들어가기가 부담스러웠다. 앞에 문에서붙 “주의할점” 이렇게 명시되어 사진 촬영도 못하게 해서 아쉬웠다. 얼마전 성공리게 끝났던 드라마 궁 때문에 경복궁이나 안현궁이 인기 있을줄 알았는데 그다지 많은 부분을 차지하지 못했다.문3) 귀하께서는 인사동이 다른 공예전시회보다 공예시장의 중심이라고 생각하십니까?①예 66% ②아니요 34%-인사동은 작은 한국이라할만큼 전통적인공예품들이 많고 그만큼 친근하기 때문에 공예시장의 중심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지금 신세대들은 인사동 외에 박물관에 찾아가서 공예품을 볼만큼 관심이 크다고 생각되지 않는다.인사동이 미술과 디자인 사이에서, 전통과 현대 사이에서, 외국브랜드와 국내 생산품들 사이에서 공예시장이 언제까지 형성되어갈 수 있을지 의문이지만 현대적인 감각에 맞춰 재조립되고 있기 때문에 걱정은 없다. 하지만 한국의 디자인과 마찬가지로 공예상품은 공교롭게도 우리나라 국민성이라고 까지 말하기에는 부끄럽지만 외국브랜드 사대주의사상에 물든 일반대중의 브랜드병과 치열한 경쟁을 해야만 하는 운명이다.공예를 배우는 학생들이 주축이 되어 우리의 공예품을 널리 알리고 홍보해서 과거 일본에게 빼앗긴 소중한 문화유산을 두 번 다시 빼앗기지 않는 노력이 필요할 것이며 공예부분에 더 많은 연구와 노력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문4) 귀하께서는 인사동의 공하니 가슴이 뿌듯해져왔다. 인사동을 다녀오면서 많은 사람들이 우리 고유의 공예품에 대해 생각을 많이했으면 좋겠고 우선은 나부터 수업이 끝난뒤에는 전통이라면 구시대적이고 지겨울거라는 고정관념을 버리고 우리의 깊은 맛을 느낄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수염을 기르고 건물 앞에서 담배를 피우시는, 뿜어져 나오는 카리스마에 압도되어 아직은 장인들에게 말을 걸어보진 못했지만 주눅들지 않고 궁금한걸 주저하지 않고 물어볼것이다.문5) 귀하께서는 인사동의 공예시장의 작품을 사실 의향이 있습니까?①예 42% ②아니요 45% ③모르겠다. 13%-죽을 각오로 한길 가는 그의, 아니 그들의 가족들은 그들에게 격려를 보내줄까? 적어도 그들의 작품을 보고 잘했다. 수고했다. 잘하고 있다고 말하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그들의 작품중에 몇점이나 팔리는 걸까?처음엔 작품들에 붙어있는 가격표를 보고 약간은 불쾌해지기까지 했던 적이 많다. 하지만 작가 한사람 한사람 고독과 번민을 생각해본다면 왠지 내가 가졌던 생각이 철이 없었음을 느낄수 있었다. 일반 사람들은 가격만 보고 지레 겁을 먹고 작품을 사지 않는 경우를 볼수 있는데 외제라면 무조건 좋다고 보는 사람들을 보면 작품들이 그리 비싼것만은 아닌거 같다. 남의 나라 상품도 물론 뛰어나지만 한국 사람으로서 우리작품에 좀더 관심을 가진다면 좀더 공예부분이 발전하지 않을까 생각해보았다.문6) 귀하께서는 얼마나 자주 인사동 공예시장을 관람하십니까?①일주일에 1~2번 15%②한달에 1번 46%③일주일에 3~4번 7%④방학마다 1번씩 32%-탈을 쓰고 덩실덩실 춤을 추는 모습이 깜찍했다. 다음에 갔을때도 저분이 계실지 모르겠지만 초상권이 있다고 사진을 못찍게 하는 모방송 프로그램에 비교했을때 연신 카메라플래시가 터지는데도 상관 않으시고 우리문화를 알리는데 힘쓰시는 모습이 존경스러웠다. 우리뿐만 아니라 외국인까지 웃음짓게 만드셨다. 내가 인사동에 갔을땐 주말이라서 사람들이 워낙 많았다. 평일엔 사람들이 학교에 직장에 바쁘다보니 많이 오지 않을 것 같다. 동시대를 반영하는 것인데 상점마다 독특한 점은 없고 비슷비슷한 작품들이 많았다. 무엇보다도 궁금한 건 몇 백년 후의 후손들은 지금의 도자기를 보고 무엇을 말할지가 궁금했다. 그런 점에서 볼 때의 사진과 같은 가짜(?)도자기들은 나에게 실망을 안겨주기 충분했다. 가격만 떡하니 매겨놓고 있는 다면 무슨 소용이 있을지 안타까웠고 요즘 사람들의 돈에만 집착하는 물질주의가 공예시장 마저 침투한거 같아 씁쓸하였다. 값이 좀 나가는 작품들 위주로 전시되어 있고 다른 것은 옆쪽에 겹겹이 쌓여 놓았는데 어떤것도 소중한 작품이 될 수 있으므로 사람들의 시선에도 신경썼으면 좋았을 법하다.문8) 귀하께서 인사동에 가신다면 주로 하시는일은무엇입니까?①맛집 탐방45%, ②데이트장소30% ③미술품 관람16% ④가족들끼리 나들이 9%-어디든 먹는 즐거움은 빠뜨릴수 없다. 그래서 아마 인사동에도 유명한 맛집도 많고 특히 찻집이 유명한곳이 많아서 사람들이 주로 방문하는 것 같다. 찻집이나 음식점도 명동이나 강남의 까페처럼 현대식이 아니라 민속 주점처럼 전통적으로 꾸며놓았다. 골목전체가 토속적인 분위기로 인해 거기에 들어서는 상점 또한 분위기에 발맞춰 나가는 것 같다. 그리고 같이 있어도 마냥 즐거운 연인들의 좋은 데이트 장소로 안성맞춤이다. 나도 오랜만에 태권도 시합을 왔다가 시간이 맞아서 남자친구와 같이 갔었다. 혼자왔더라면 무척 쓸쓸했었을 것이나 함께와서 더욱 좋았다. 우리처럼 연인들의 모습도 많이 볼 수 있었고 가족들끼리 나들이하러 많이 나온 모습도 보였다. 갤러리에는 미술학도들의 모습도 많이 볼수 있었다. 보기에도 미술하는 학생들처럼 보여서 그렇게 생각되었다. 인사동에 가기전에 식사를해서 맛집을 탐방해보지 못한게 아쉬웠다. 또한 공연준비로 나온 사람들도 간혹 볼수 있다.문9) 귀하께서 스타벅스는 원래 영어로 표기되어있는데 인사동의 스타벅스는 한글로 표기되어있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①자랑스럽다.65% ②그저그렇다.15% ③아무생각없다.11% ④안어울린다. 9%-스타벅스는 전형적으로 .
Ⅰ.머리말새로운 것의 수용이라는 것은 언제나 큰 반향을 일으킨다. 긍정적인 평가를 받기도 하지만 때로는 비난과 좋지 않은 소리를 듣기도 한다. 요즘의 사회에서도 무언가 먼저 해보고 도전하는 그런 혁신적인 사람들은 상반된 두개의 시선을 받는다. 요즘은 이런 선구자를 혁신수용자, 혹은 그보다 좀 약하면 조기수용자라고 표현한다. 이런 혁신 수용자나 조기수용자의 예는 문화적인 측면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가장 쉬운 예는 흔히 주변에서 독특한 패션의 사람에게 스타일리스트라고하며 부러움과 조롱을 같이 보내는 것이다. 또 음악에서도 서태지와 아이들의 등장이 그러했다. 이번 과제의 주제가 되는 신여성, 모던 걸도 새로운 것을 먼저 수용했던 일종의 조기 수용자이다. 그들 또한 선망의 대상이 되기도 했으며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그 시대의 대체적인 분위기는 모던걸이나 모던보이를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시선이 많았지만 그래도 그들은 우리나라에 근대문화를 만들기 시작한 문화의 선구자들이라는 것이다. 같은 여성으로서 당연히 신여성에 관심이 가게 되었고 역사에 대해 알고 싶어서 주제로 선택하게 되었다.Ⅱ. 신여성의 등장1. ‘제2부인’ 문제와 ‘사이비 연애주의자’들- 신여성그림)신여성의 ‘新’은 ‘모던’과 ‘서양적인 것’을 동시에 의미한다. 서구 의 새로운 사상과 지식을 공부한 신여성들은 사상 면에서도 구 여성과 달랐지만 무엇보다 ‘외모’에서 그들과 뚜렷이 구분됐다. 과감히 잘라낸 머리, 하이힐, 다리를 드러낸 짧은 치마, 가슴과 허리를 강조하는 양장, 그리고 화장까지. 달라진 외모는 새로운 근대 문명의 상징이었고 사람들은 앞 다투어 “물질문명의 발달 에 따라 여성의 용모도 발달한다”로 말했다. 이제 여성들의 변화 된 외양은 서구 물질문명이 보여주는 풍요로움의 상징이 되었고, 서구 여성들의 외모에서 풍기는 활발함과 쾌활함은 조선의 신여 성들이 배워야 할 덕목으로 부각됐다.하지만 사람들이 보여준 새로운 것과 서양의 것에 대한 숭배와 모방은 상당한 거부반응을 불러 저항의 대상으로 치부되곤 했으며 그 결과 근대적 사회에 불가결한 자유와 권리의 재측면에서 여성을 소외시키는 논리로 연결되곤 했다.식민지 권력의 강제와 함께 이식된 근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한국의 대중들에게 ‘신여성'은 시대의 변화를 예고하는 매혹적인 이미지이자 경계해야할 어설픈 이방인이었다.ⅱ. 사상적 배경개화기에 접어들어 서양문물의 유입으로 개화파인들은 천부인권사상을 바탕으로 차별받는 계층의 권리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개화파에서는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근대화를 위해서는 국민의식이 중요하다 여겼고 특히 여성의 개화를 급선무로 생각했다. 그래서 인권에 관심을 갖고 새로운 여성관을 주창했다. 그리하여 불합리한 사회 관습을 개혁하여 여성의식의 근대화를 실현 더 나아가 국가적 개화 자강을 실현하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1890년 후반부터 여성 계몽운동이 언론에 주도되기 전까지 여성관이 일반 대중에까지는 미치지 못했다. 개화파에 의한 의식개화운동은 아니더라도 이미 조선시대에는 새로운 여성관이 대두되었으니 이는 진보와 새롭게 유입된 서구사상의 영향에 의해서였다.Ⅲ. 신여성의 교육및 사회진출3. 신여성과 여성교육개화기 이후 다양한 경로로 시작된 근대화 교육은 여성을 자각하게 한 가장 큰 계기 중의 하나였다. 여성교육은 우리나라가 겪은 다양한 변혁의 과정을 포함한 채 변화해 갔다.여성들이 받았던 교육은 많은 한계와 모순점을 가진다. 가장 근본적인 문제점은 교육에 대해 가지고 있었던 남성과 여성의 시각이 판이하게 달랐다는 것이다.여성을 위한 교육은 초기에는 여성들의 실력향상과 남녀불평등의 모순지적까지 끌어들여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개화이후 그 당시 사회분위기가 ‘나라가 부국자강 해지려면 교육을 통한 실력향상을 이루어야 한다'는 식으로 편승되어 교육을 인식하기 시작했다.크게 기독교 선교사들에 의한 기독교 여학교가 있었고 민간자본에 의해 운영된 사립학교와 여성교육의 전반적인 필요성을 인식하고 뒤늦게 생겨난 관립여학교가 있다. 재미있는 사실은 높은 교육율을 가지고 있던 계층이 부 그 밖의 농노 신여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당당한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려면 예나 지금이나 경제적 자립이 중요하기 때문에 여성의 사회진출이 갖는 의미는 중요한 것이다.여성이 진출한 분야는 제한되어 있었으며 그나마 현모양처 개념에 부합하는 분야로의 진출이 대부분이었다. 신여성의 주무대는 교육계였고 소아과 산부인과 의사, 간호사, 전화 교환원 ,순경 그리고 여기자 등으로 요약된다.대부분의 여성이 겪은 작업환경은 굉장히 열악했다. 아직 전문직 여성으로가 아니라 남성의 보조자적 역할을 담당하였기 때문이다.특이하게 도전하는 여성의 모습을 통해 사회적인 반향을 일으켰던 여류 비행사도 등장했다.특히 그 당시 활동했던 여기자들에게는 다방면의 능력이 요구되었다.여성들이 사회진출을 한다는 것은 경제적 개념을 인식하게 되었다는 것과 더불어 여성문제에 대해 스스로 인식하게 되었다는 긍정적인 측면을 갖는다. 민족의식이나 계층문제에 대한 의식 뿐 아니라 남녀 평등관계에서 사회운동에 이르기까지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신여성들은 근대교육과 사회진출을 통해 자아에 눈을 뜨게 되었으나 유교 가부장제와 일제치하라는 사회 현상 속에서 자아 실현할 장을 찾는데 어려움을 겪는다.신식교육을 받고 안 받고는 봉건적 가정생활에서 여성의 위치를 변화시키는데 커다란 역할을 하지 못한다. 인간이 되기 위한 교육에서 남성과 여성이 생각하는 여성의 범위는 상당한 차이를 가진다. 여자가 말하는 인간은 구 관습을 비판하면서 나온 새로운 여성상이었던데 비해 남자가 말하는 인간은 많은 제약을 내포하고 있었다. 신여성들에게는 배움 자체가 자기 정체성을 실현시키는 계기가 되었고 자신의 현 위치를 인식하고 체계적인 활동으로는 볼 수 없으나 해결하려는 시도를 하였다는 게 큰 의미를 가진다.5. 신여성의 활동신여성들은 여러 분야에서 눈부신 활약을 했다.①무용가 최승희는 서양 무용을 우리 전통문화에 맞게 고쳐 해외에 소개했고,②서양화가 나혜석은 1921년 조선 여성으로서는 처음으로 개인전을 열었다.③서양 음악을, 회생한 손녀에게 등과 함께 구여성을 주인공으로 하여 그녀들의 삶을 안타까운 심정으로 들여다보는 규원, 원한, 현숙, 어머니의 딸 등의 소설을 썼다. 동시대에 활동한 여성소설가들 중에서도 장르개념이나, 플롯에 대한 선진적인 의식 등을 우리는 볼수있다.나혜석의 인생에서 최대의 사건은 바로 1927년 6월부터 1928년 2월까지 이루어진 세계일주여행 중에 일어난다. 이 여행에서 파리에 있던 천도교 지도자 최린과 만나게 된다. 김우영이 베를린으로 떠나고 난 후 나혜석은 파리에 남아 그림공부를 하며 최린과 연인관계를 맺게 된다. 당시 조선 사회는 이제 겨우 자유연애가 이야기 되기 시작한 때였으므로, 기혼 여성의 연애란 상상하기도 어려운 것이었다. ‘정조는 단순한 취미’라며 자유연애를 주장했던 나혜석은 식민지 조선의 가부장제 사회에서 쓰라린 패배를 맛보게 된다. 그러나 나혜석은 가부장제적 통념을 해체하고 그 사회가 조장한 모성성과 여성성의 신화를 깨트리며 자아정체성을 찾기 위해 열정적으로 매진한 작가이자, 자신과 처지가 다른 구여성들까지 포용하는 문학세계를 펼쳐낸 작가로 규정될 수 있겠다.히라츠카 라이쵸)는 부친 히라쓰카 데지로의 권유로 현모양처교육의 전형이었던 오자노 미즈를 졸업하고 그후 일본여자대학교 가정과에 입학한다. 1908년 3월 21일, ‘나는 결코 사랑을 위해 죽는 것이 아니다. 내 자신을 관철하기 위해서다’라고 쓴 유서를 남기고 기혼남 모리타 소헤와 함께 눈 덮인 시오하라로 떠났다. 결국 이 자살사건은 미수로 끝났다. 1911년 라이쵸는 모친의 경제적 도움을 받아 청탑(靑?)을 창간하였다. 역사적인 창간사 ‘태초여성은 태양이었다’는 가부장 제도하의 봉건적 주종관계에 구속되어져 있던 여성측이 발언한 인권선언이었으며, 인간으로서 평등을 구가한 생명찬가였다. 당신 언론은 ‘청탑’에 모인 여성들을 신여성이라고 야유, 조소했지만 ‘나는 신여성이다’로 마이너스 이미지를 뒤엎는 강렬한논리를 전개했다.라이쵸는 서구의 여성계몽적 사상을 받아들이기 위해, 엘렌케이 의 연들 의 ‘여성들도 그동안의 노예생 활에서 벗어나 진정한 인간으로 살아가야 하며, 이를 위해 서는 무엇보다 교육을 받아야 하고, 자유연애를 통한 주 체적 결혼을 행해야한다’는 문학담론들은 주로『신여 자』와 『여자계』에 발표된다. 자신들의 논지를 펼치기 위해 이 여성적가들은 특히 근대적 결혼 제도로서 자유연 애결혼의 장점에 주목하고, 자아발전을 이룩할수 있는 토대 가 되는 ‘교육’을 강조하였다. 자신의 이상대로 낭만적인 사 랑을 실천하려면 먼저 여성들은 이성적인 남성의 영역에 적극적으로 감담할 수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여성들이 자신의 이상을 이루기 위해서는 먼저 남성들과 마찬가지로 근대적 교육을 받아, 지성을 확보한 신여성이 되어야만 했다.) 이처럼 낭만적 사랑과 연애결혼이라는 근대초기 신여성들의 근대적 사고와 실천은 철저히 남성중심 영역에서 이루어진 근대화에 편입해야만 실천가능한 것이었다.② 여성의 입으로 쾌락을 말하다- 자본주의적 가부장제 사회는 남성의 성은 본래적으로 충동적이고 자제할 수 없을 만큼 강하고, 여성은 선천적으로 성에 대한 관심이나 욕구가 없다는 성차별적 신화를 형성하고 유포시켜, 성을 생식을 위한 성과 쾌락을 위한 성으로 이원화시킨다. 하지만 근대적 사랑을 꿈구던 1920년대의 여성작가들은 그들의 입으로 자신들의 섹슈얼리티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여성 스스로 여성성을 이야기하며 시대적 한계를 뛰어넘으려던 그녀들의 목소리는 세인들의 흥밋거리로 왜곡되어 버렸지만,이들의 문학적 업적만은 분명 이후 여성적 글쓰기의 초석이 되었다. 이제 여성적 글쓰기는 섹슈얼리티를 구성하고 규제하는 틀로 기능하던 이성애 제도 자체를 비판의 대상으로 삼으면서 그 대안을 제시하기에 이른다. 재생산으로부터 성을 분리하고 여성의 능동적인 성담론을 펼치며, 여성간의 연대와 레즈비어니즘까지) 총망라한다.③ 근대적 섹슈얼리티의 규현과 왜곡- 가족제도의 모순을 타파하고 자유연애를 바탕으로 하는 새로운 사랑과 결혼제도를 정립하고자 애썼지만 순결하지 못한 여성이라는 비난의 근거로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