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터 라우센부쉬의 윤리사상과목명:제출일:학 번:이 름:Ⅰ. 서 론1. 문제의 제기오늘날의 한국교회는 양적으로 눈에 보일 만큼 엄청난 성과를 나타내었다. 그러나 그에 비해서 우리는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서의 교회의 사명을 다하고 있는가에 대한 물음에 명확하고 확실한 대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많은 사람들은 교회의 윤리에 대해서 깊은 신뢰를 하지 않고 있다. 여기에 한국교회의 커다란 장애요인이 존재한다. 그 커다란 장애요인은 교회의 사회 윤리적인 측면에 있다고 생각한다. 교회는 제도적으로 경직화된 교단에 귀속되어 개교회주의를 지향하면서, 사회 참여에 무관심하거나 소극적인 자세를 보이면서 사회의 시대적 요청을 외면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특히 개인구원을 강조하는 보수교단이나 복음주의 적인 교회에서는 사회구원에 대해 더욱더 무관심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그러나 그리스도를 자기의 구세주로 받아들인 사실은 개인적인 일이나 개인적 구원은 공동의 관계 속에서 표시되어야만 한다. 즉 교회는 “사회에 대하여 연대적 책임을 져야하며. 사회적 불안은 기독교에 있어서 남의 일이 아니다.”라고 정진경 목사님께서는 말씀 한 것처럼 우리는 행동해야 한다. 월터 라우센부쉬의 사회적 복음 운동은 바로 이 점에서 상당한 의의가 있다고 생각한다. 19세기 말에서부터 20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산업화의 기로에 들어선 미국의 상황 속에서 라우센부쉬는 교회가 대처해야 할 방향에 대해 새로운 비젼과 방향을 제시해 주었다. 그는 개인과 가족생활 중심에 있던 교회의 윤리적 가르침이 사회적 문제에로 지향되도록 확대시키는 역할에 이바지 하였다. 라우쉔부쉬는 철저하게 경건 주의적 전통을 고수하면서 또 철저하게 사회개혁가로서의 실천력을 보여준 그 시대의 예언자였다. 그는 자본주의 모순과 사회주의의 약점을 비판, 보완하여 사회질서의 기독교화를 위해 구체적 대안을 제시한 사회 복음주의의 지도자였다. 따라서 그가 어떤 윤리사상을 가지고 구체적인 사회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는지, 그리고 사회적 상황 속에사람들은 경제활동의 자율성을 침해받아서는 안 된다고 확신했다. 따라서 연방정부나 주정부의 간섭을 배제하고 자유경쟁주의에 의해 사회문제를 해결할 수 있어야 한다고 보았다.한편 이 급격한 미국의 산업화는 농촌의 인구가 대거 도시와 공장지대로 이주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부족한 노동력의 확보는 이 시기에 유럽대륙을 중심으로 세계 도처에서 이민이 몰려들게 했고, 이것은 그들의 사회의 부적응과 극심한 빈곤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극심한 노동분쟁 등으로 많은 사회적 문제를 야기 시켰고, 노동자들의 생활은 비인간화되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교회는 사회구조 악에 대해 무관심 하였다.이러한 상황에서 워싱턴 글래든(Washington Gladden), 리만 아보트(Lyman Abbott), 조지 헤론(George Heron)등 소수의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은 이같은 인간의 존엄과 삶의 파괴가 산업자본주의와 과도한 인구밀집에 따른 도시화 등에 있다고 보고 악한 권세와 상위층의 경제적 부패와 하위층의 가혹한 가난과 싸워야 한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완만한 제도적 개선을 통해서 인간은 형제애와 상호봉사에 의한 민주적 질서를 창조할 수 있고, 여기서 공동의 노동력으로 인간의 존엄과 아름다움이 회복되며, 이로써 하나님 나라가 하늘에서와 같이 이 땅에서도 실현될 수 있어야 한다고 그들은 믿었다. 이러한 초기 사회복음주의자들의 하나님 나라 사상은 라우쉔부쉬에게 심대한 영향을 주었다.라우쉔부쉬의 신학적 활동에 대한 지대한 영향을 미친 사회 복음주의 운동은 또한 그 신학적 배경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비저트 후프트는 「미국의 사회 복음주의 배경」이란 책 속에서 몇 가지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첫째, 청교도주의의 영향을 들 수 있다. 사회 복음주의 운동은 청교도주의의 기독교에 대한 개인주의적 해석과 내세주의, 비관주의, 그리고 후기 미국 청교도주의의 특성인 하나님의 초월성에 대한 강조에 비판적인 입장을 취한다. 대신에 초기 청교도주의의 두 가지 특성이 사회 복음주의 운동에 재출현된다고 할 수 있다. 그 님 나라의 개념과 관련하여 그의 사회 복음주의 신학을 발전시켜 나가고 있다. 우리가 사회복음주의라 부르는 사상의 체계는 유행이나 일시적 이해의 산물은 결코 아니다. 그것은 생소한 수입품이거나 진기한 발명품도 아니다. 그것은 가장 오래고 본래적인 복음의 갱신이며, 너무 오랫동안 발전되지 못한 채 있었던 기독교교리의 본질적 요소에 대한 과학적 재발견이라 할 것이다. 사회복음의 수립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운명적인 문제이며, 그 사상의 요지는 신학의 여러 부분들에 요점적이고 건설적인 영향을 주는 입장에서 검토하는 것이다.Ⅲ. 사회 복음주의1. 사회 복음주의의 태동19세기는 혁명의 시대였다. 초기 자본주의 제도에서 오는 여러 가지 경제적 폐단과 사회악에 대한 반동의 시대였다. 유럽아 영국에서는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와 기독교 사회주의 운동이 맹렬한 활동의 결과로 사회문제에 관한 법률도 이미 제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칼빈주의적 청교도 사상의 영향과 경건주의의 영향을 받은 미국 사람들과 교회들은 자유주의 경제체제에 만족하고 있었다. 당시의 미국은 남북전쟁 후 산업화가 급속히 진행되고 있었으며 이른바 ‘자유방임 주의적 자본주의’가 형성되어 가고 있었다. 교회의 지도자들은 민주주의와 자유방임 주의적 자본주의가 모든 정치적 경제적 문제를 해결해 줄 것으로 믿고 또한 기대를 걸고 있었다.그러나 당시 개신 교회들은 실질적으로는 개인주의적인 기독교의 풍토 가운데서 사회적 공헌을 거의 하지 못하였다. 사회악에 있어서도 그것은 개인들이 아직도 다 구원을 받지 못한 까닭이라 보았다. 노동자들의 비참한 생활은 그들이 게으르고 저축성이 없고 부정직하기 때문이며, 기독교의 덕은 부지런하고 검소하고 정직한 생활을 함으로써 세속적인 성공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이라 보았다. 그들은 현존하는 사회제도를 그대로 옳은 것이라고 믿고 교회는 사회 불균등의 문제에 대해서 개인적인 자선 사업만을 함으로써 무마하고자 하였으며, 사회구조를 변혁하려는 시도는 거의 행해지지 않았다. 그러나 1877년 속되어 사회적으로 관련되어 있다. 따라서 인간의 모든 선함은 사회적 선함이어야 한다. 즉 인간 안에서 창조되기를 원하는 선함은 항상 주의 사람들과 바로 살고 참된 사회생활을 이룩해 갈 수 있도록 하는 선함이다. 그러므로 한 사람을 위한 선함이란 있을 수 없다. 곧 라우쉔부쉬는 선함이란 곧 사회적 선함이라고 말한다.라우쉔부쉬에 의하면 예수의 윤리에 있어서 기본적인 덕목은 사랑이며, 이 사랑은 사회를 형성하는 특질이다. 사랑은 인간과 인간을 하나로 묶어두고 서로에게 각자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으로 만들어주는 사회적 본능이다. 가족은 그 예로 사랑과 우애의 육체적 표현은 하나로 묶고 하나가 되는 욕망이다. 그리고 사랑은 교제를 창조한다. 강제됨이 없이 사회적 조직을 만드는 것이 있다면 바로 사랑이다. 사랑의 법은 다른 여타의 법을 초월한다. 그 점에서 예수의 언행은 매우 사회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최고 유형의 선함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인간의 존재와 행위가 공동체의 봉사에 자유롭게 기여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와 반대로 최고의 악함은 공동체의 부와 행복과 덕을 자신만의 쾌락추구에 소모하는 것이다. 여기에 종교윤리의 가장 중요한 과업은 사회 안에서 최고 유형의 선을 추구하면서 계속되는 세대 간의 결속성의 의미를 펼쳐 나가야 한다. 그리고 종교와 윤리는 다음 세대의 사람들을 위하고, 또 지금 근본적인 실제적 조건으로 준비하고 있는 사람들을 위한 책임의 의미를 펼쳐나가야 한다.(2) 인간의 사회악라우쉔부쉬는 인간의 타락과 원죄에 대한 전통적인 견해를 두 가지 동기로 설명하고 있다. 첫째는 철학적 동기로 우주와 현재 속에 이해하기 힘든 선과 악의 혼합에 대해서 통일된 설명을 하고자 하는 시도이다. 다른 하나는 종교적 동기로서 은혜와 구원의 필요성을 인식하기 위하여 죄와 정죄의 확신을 가지게 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인간의 타락과 죄를 이해함에 있어서 전통적인 신학보다는 성서 속의 예수가 가졌던 죄에 대한 이해로 돌아가 파악하고자 한다. 예수는개념이며 사회복음의 궁극적 희망”이라고 한다. 그의 저서 어디에도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강조하지 않은 곳이 없다. 사회복음 신학도 하나님 나라에 대한 신학적, 사회 윤리적인 이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곧 하나님의 나라 교리 자체가 사회복음이다. 그는 교회사가의 시야로써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신학이 신약성서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고 하지만 교회 역사 가운데 하나님의 나라 사상은 소홀하게 취급되어 왔음을 지적한다. 예수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나라는 그의 전부였다는 것이다.1. 예수의 하나님 나라 이해라우쉔부쉬는 예수의 하나님 나라가 당시의 유대인들의 하나님 나라와는 몇 가지 점에서 다름을 지적한다. 첫째는 하나님 나라의 개념은 보편성의 방향에서 발전되었다. 유대 에언자들은 처음에는 국가적 차원의 구원을 강조했으나 차츰 메시야 신정의 소망이 확대되어 보편화되면서 여호와만이 지상의 왕이라고 하게 되었다. 따라서 그것은 국가의 경계에 묶인 한정된 개념이 아니었다. 이점에 있어 유대인의 사상과 유사한 점이 있지만 그러나 예수의 하나님 나라 개념은 한 민족과 국가를 넘어서는 보편적 인간성을 전제로 하였다. 하나님 나라는 모든 사람의 나라로서 그의 통치는 다양한 세계 민족들을 하나로 묶으면서 일치성을 보인다.둘째, 하나님 나라의 개념은 영성의 방향에서 발전하였다. 라우쉔부쉬에 의하면 초기 유대 예언자들은 주로 국가의 독립과 우위성과 현세적 번창을 역설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그들의 외적인 건설이나 법의 복종이 하나님 나라를 건설 할 수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영적으로 새로워짐이 외적인 축복을 받는 기반이 된다는 것을 알았다. 이 점은 예수님도 유사하다. 그러나 예수의 말씀에는 더 깊은 의미가 있다. 하나님 나라를 지상에 시작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 시민은 자연적으로 내려오는 육적이고 외적인 응결이 아니고 오히려 영적인 관계이며 교제이다.셋째, 하나님 나라 개념 형성에는 진리와 사랑과 영적인 힘에 의존하는 방향에서 발전하였다. 예수는 하나님 나라칭한다.
신약성경과 선교를 읽고서-역사적 해석학적 관점들-과목명:제출일:학 번:이 름:1. 들어가는 말신약성경은 선교에 대한 어떤 관점을 지니고 있는가? 성경의 관점으로 선교를 바라보는 작업은 어떻게 보면 성서신학과 선교학 사이의 다리를 놓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학문이 외골수처럼 자신만의 학문만이 옳다고 주장할 수 없다. 성서신학과 선교학도 서로에게 부족한 부분을 찾아 채워 나가는 작업이 필요하다.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과거의 본문과 지금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사이의 경험적 소통이 필요하다. 이것은 당시 본문이 과거에만 국한 되는 것이 아니라 지금도 우리의 삶의 역사하는 살아있는 복음을 말하는 것이다. 신약성경이 말하는 의미가 어떻게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전해져 우리의 삶의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있을까? 바로 그 의미를 우리는 선교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성경의 핵심은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다. 그리스도의 탄생과 사역 그리고 죽음과 부활을 믿음으로서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서 변화하는 삶을 사는 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말하는 성경대로 사는 삶이다. 이런 삶이 가장 급진적으로 이러나는 현장이 바로 선교의 현장이다. 선교의 현장에서는 그리스도의 공동체가 세워져 나가고 하나님의 나라가 선포되어야 한다. 그런 이유에서 선교는 복음의 최전방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복음의 최전방, 선교현장에서 가장 중요한 무기는 바로 성경이다. 이 성경의 진리는 가장 큰 검이요 가장 큰 방패이다. 성경의 진리를 통해 우리는 선교의 의미를 회복하고 선교의 진리를 배워 나가는 것이다. 우리는 신약성경을 통해서 더 깊은 선교의 의미를 배우며 선교의 본질과 방법들을 알아가 보도록 하자2. 본론선교는 보내지는 것이다. 선교는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는 것이다. 선교는 구원과 해방의 행위이다. 선교는 복음증거이다. 선교에 대한 정의는 성경을 어떤 관심으로 바라보고 이해하고 있는지에 따라서 정의는 얼마든지 변화가 가능해 진다. 이방인 선교인가? 유대인을 향한 선교인가? 사회개혁적인 선교인것은 우리가 반드시 해야 할 반드시 나아가야 할 방향이기 때문이다. 이 구절에서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부분이 있다. 바로 제자를 삼아라 라는 부분이다. 지키고 행하게 하여 결국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제자를 삼으라는 것이다. 가서 제자를 삼으라는 것이다. 이것은 굉장히 선교적인 마인드로 이해 할 수 있다. 예수님의 공생애의 핵심은 바로 제자를 삼는 것이었다. 제자는 다음세대를 준비하는 가장 가치있는 일이다. 우리는 선교적 관점에서 제자를 삼아야 한다. 마태복음에서 또 하나의 주체를 말하고 있는데 바로 모든 민족이다. One nation 이 아닌 All nations이라는 사실이다. 선교의 주체는 전 세계열방이고 그들을 제자를 삼는 것이 우리가 나아갈 방향이자 선교의 목적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제자를 삼는 것이 목적이 된다면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도 우리는 선교사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꼭 선교의 현장이 외국으로 가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다. 우리가 제자 삼는 것이 중요하다면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제자를 삼는 사명을 행하는 자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마가복음에서는 예수그리스도의 메시지의 역동성과 그 파워가 강력하여 당시의 지리적 흐름속에서 어떻게 작용했는가를 이야기하고 있다. 갈릴리라는 작은 동네에서 예수그리스도는 가르침은 전 세계적인 가르침으로 그 경계가 확장된다. 그것은 우리의 삶 가운데서도 이루어져야 한다. 우리 삶 가운데 주님의 진리와 자유가 아무런 생동감 없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서 움직여야 한다. 그것이 삶으로 행동으로 나타날 때 진정한 의미의 선교요 하나님의 진리를 선포하고 계시하며 나타내는 것이다. 예수님의 선포는 한정된 선포가 아니라 미래적이며 초공간적인 선포라는 사실에서 우리의 선교의 모델이 되신다. 그리고 선포는 모든 정치 사회 문화 넘어서 가르침이라는 점에서 우리의 선교가 나아갈 방향과도 일치한다. 선교가 정치와 사회 문화의 공간에 제한되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것을 넘어서 가르침이 되어야 함을 우리에게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부고 있다. 그것은 가난한 자들이 소수이며 약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분명히 새로운 개념의 희년을 선포하신다. 희년은 곧 치유요 회복이다. 당시의 가난한 자들과 사회소수자들에게 예수님의 가르침은 경제적 개념으로 이해되어졌지만 오늘날 Minority는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고 있고 그 가르침 또한 다양하게 이해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이 시대에도 새로운 형태의 희년이 선포되어 진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 시대의 희년은 성령의 회복으로 이루어진다고 생각한다. 희년은 뜻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사상에서 시작된다. 오늘날 우리도 우리의 삶이 나의 것이라는 생각을 버리고 나의 모든 삶이 아버지 하나님의 것이라는 성령의 회복,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이 필요한 것이다. 성령은 공간과 시간을 초월하시며 이시대의 모든 것을 회복시키신다. 성령의 회복은 사회와 환경을 뛰어 넘는 회복이라는 점에서 우리가 나아갈 곳 선교지에서도 동일하게 역사하신다. 성령은 오순절에만 임한 한 순간적 사건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에게 공간과 시간을 초월하게 임하셔서 우리의 삶을 변화 시키고 우리의 형상 회복시키는 희년의 능력을 나타내는 것이다.요한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되심으로 시작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하나님이 우리를 향한 최고의 선교라고 생각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우리에게 보내신 최고의 선교사이시다 라는 사실로부터 요한복음은 시작한다. 어떻게 보면 선교의 최고의 모델이 되시는 분은 성육신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는 이 세상 가운데 오셨지만 그의 본래의 모습은 인간이 아닌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그의 선교의 목적은 이 땅 가운데 하나님의 온전하신 사랑을 선포하기 위해서 이다. 그는 제자들을 통해 온전하신 아카페의 사랑을 선포하시며 가르치셨다. 사랑을 통해 온전한 제자도를 가르치셨다. 온전한 사랑이신 그는 빛으로 문으로 길로 양으로 생수로 떡으로 다양하게 표현 되셨다. 그는 각각의 관점에서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형태로 예수의 사역을 설명하셨고 그렇게 행동 하셨다. 뽑는 다면 거의 대부분이 사람들이 사도바울을 뽑을 것이다.(예수님은 인간이자 신이시기에 제외시킨다) 바울의 사역은 선교사역의 모델이자 다양한 선교 형태를 보여줌으로 선교의 위대한 영향력을 끼쳤다. 바울의 선교에서의 가장 큰 핵심은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였다. 그는 이 십자가의 복음을 원심적인 선교, 보편적인 선교로 확대 시켰다. 십자가의 복음은 희생이요 완전한 구원의 상징이었다. 오직 십자가를 통해서만이 우리가 진정한 구원의 길로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십자가를 수치스럽게 생각했지만 그 십자가만이 우리의 삶의 있어서 온전한 자유와 진리를 허락하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이런 십자가를 통하여 인간과 의사소통 하시기를 원하셨던 것이다. 그는 다양한 선교적 방법을 통해 선교를 하고 있었다. 당시에는 3가지 형태의 선교의 방법이 있었다. 첫째 방량설교자의 형태였다. 둘째 유대교식으로 선교하는 방법이었다. 마지막으로 이방인들 가운데 새로운 교회를 세우기 위해 선교사를 파송하는 방법이었다. 처음의 바울은 방량설교자와 유대교식으로 선교하는 방법을 통해 하는 방법을 기점으로 이방인들의 도시를 변화 시키는 사역을 하였다. 특히 사역을 하기 위해서 도시의 중심지역을 택하여 그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거점선교를 사용한 것이다. 당시의 문화 경제 정치의 중심지에서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전한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이런 방법이 과연 얼마나 선교지에서 사용 될지에 대해서는 의문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가 했던 자비량 선교 또는 팀 사역은 얼마든지 오늘날에도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되어 진다. 그리고 사도바울을 통해 복음이 구심적 선교에서 원심적 선교로 변화 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요즘 사회에서는 구심적, 원심적 선교가 동시 다발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예를 들면 우리나라에 있는 외국인 노동자, 유학생들은 구심적 선교의 대상이라고 볼 수 있고 우리가 앞으로 선교해야 할 나라나 민족에 대해서는 원심적 선교가 이루어져 한다. 그리고 우리가 구심적 선교서는 온전하게 흘려가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히브리서는 분명한 선교적 관점을 가지고 있다. 바로 보편적인 기독론과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중요한 선교적 관점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책에서는 히브리서의 관하여서 예수그리스도의 기독론적인 부분을 다루지 않고 있다. 사실 히브리서에서의 대 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오늘날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을 자세히 다루어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히브리서에서 나타난 그리스도의 진리와 믿음이 선교의 어떤 영향을 주는가를 알아보는 것은 선교적 관점에서 중요한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본질은 위대한 대 제사장이시며 우리에게 영원한 승리를 가져다 주실 분이시다. (히 2:17, 히 4:14, 히 7:27) 우리는 복음의 진리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를 믿으며 복음을 부끄러워 하지 않고 당당히 전해야 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위대함과 그의 영광 가운데의 승리를 선포하는 선교적 사명이요 우리가 믿고 의지해야 독생자의 우월성이기 때문이다.마지막장은 문화에 관한 주제를 가지고 있다. 선교에 있어서 문화는 굉장히 중요한 요소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피조물이기 때문에 인간 문화는 대단히 아름답고 선하지만 인간의 타락 때문에 그것들은 모두 죄로 물들었고 어떤 것들은 하나님의 뜻과는 반대되는 세상을 상징하는 문화가 되기도 하였다. 과거에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문화에 대하여 아주 부정적인 자세를 취해 왔다. 그러나 우리는 문화를 인간의 존엄성과 문화적 업적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바라보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왜냐하면 문화 안에는 다양한 인간의 창의성과 창조주의 창의성이 반영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축복이요 우리가 세상 가운데 완전한 승리를 외치기 위한 무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문화를 다음과 같이 정의 할 수 있다. 첫째 문화는 하나님이나 실재 혹은 궁극적 의미에 대한 믿음이다. 둘째 문화는 무엇이 옳고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아름다우며 무엇이 규범적인 것인가에 대한 가다
21세기 세계선교전략을 읽고서과목명:제출일:학 번:이 름:1. 들어가는 말하나님의 구원은 전 인류를 향해 속해 있다. 한 민족 한 나라가 아닌 전 민족 전 나라를 향한 구원의 역사하심을 나타나시기를 바라고 계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원래 모습을 회복하시기를 원하시며 거룩하고 순종하는 예배자가 되기를 원하신다. 그러므로 선교는 인류의 타락과 깊은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인류의 타락 이후 그리스도의 죄 사함을 통해서만이 우리가 구원을 얻게 된 이후 교회는 전 세계의 놀라운 소식인 복음을 전하는 것을 대사명으로 여기고 오늘도 그 사명을 성취하기 위해 전진해 나가고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전 세계의 퍼져 있는 선교사님들은 예수님의 명령의 따라 복음을 전하는 아름다운 소명에 순종하고 계신다. 선교는 예수님의 지상명령이후 다양한 방법과 형태로 이루어지고 있으며 오늘날에도 각 민족의 상황과 성격의 따라서 다양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면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에는 어떤 선교의 전략을 가지고 우리는 사명을 감당해야 하는지 알아봄으로서 하나님의 나라 확장을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들의 생각해보고 선교의 대한 열정을 가져 보도록 하자2. 본론선교는 그 방향성과 시대적 흐름의 따라서 여러 가지 형태로 발전 되어져 왔다. 바울시대부터 오늘 21세기 시대까지 각각 시대적 상황은 그리고 민족적 특성은 선교가 한 가지 방향을 가지고 나아가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선교의 목적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열방에 전하고 그들의 삶을 예수 그리스도께로 돌아오게 한다는 핵심적인 진리만은 변화하지 않았다. 이 진리를 가지고 들어가기 위해서는 각각 민족의 특성과 시대적 상황에 맞는 선교적 전략이 필요하였다. 중세에는 기독교의 선교가 이루어진 것은 전쟁과 그리고 그로 인한 단체적이고 집단적인 개종이 일어났다. 신대륙을 발견한 스페인과 포르투갈에 의해서 중남미는 자연스럽게 집단개종을 하게 되었고 아직도 중남미는 가톨릭 문화권 안에 들어가 있다. 이처럼 집단적인 개종은 당시의 선교방법이었지시작하였다. 그리고 그는 문서를 통한 선교를 하였으며 굉장히 문화적으로 언어적으로 중국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있었다. 이것은 현대의 많은 선교사들이 본 받아할 점이다. 특히 문화적인 측면에서 당시 유럽은 중국에 비해 문화적으로 많이 앞서 있었다. 그러나 중국은 우물 안에 개구리였기 때문에 중국이 당시 세계의 중심이라고 생각하였다. 이런 상황 속에서 중국선교를 하기 위해서는 먼저 문화적 선진국의 우월감을 나타내기 보다는 그들의 문화적 상황을 인정하고 그들의 문화 속에서 자연스럽게 융화되는 것이 필요했다. 사실 문화라는 것은 굉장히 상대적인 것이다. 각 나라마다 고유의 문화와 전통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부분에서 민감한 부분이 있다. 바로 그들의 문화를 어디까지 우리가 인정해야 하는가? 이다. 무조건 적인 수용은 기독교의 중심을 잃게 만들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도 이런 부분을 지적하고 있다. 이것은 분명히 타당성이 있다. 너무 많은 색을 한 도화지에 사용한다면 중심적인 색체를 잃어버리게 되고 그 그림은 좋은 그림이 될 수 없다. 즉 선교가 문화적 혼합주의로 이어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선교의 목적이 분명하나 선교가 문화적으로 혼합주의로 이어지게 된다면 이것은 선교의 상황의 심각한 문제를 야기 시킬 것이다. 우리는 어떻게 이런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첫째 선교사가 분명한 문화의 대한 기준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즉 문화를 어디까지 인정하고 받아 들려야 하는가에 대한 선교사 자신의 명확한 기준점을 제시하고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문화 혼합주의로부터 선교사가 분명한 인식을 지니고 있어야 함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확실한 기준을 통해 잘못되고 왜곡된 문화가 기독교의 본질을 희석시키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해야만 할 것이다.둘째 신자들에게 스스로 기독교적 문화관을 세울 수 있도록 교육시켜야 한다. 선교사는 사실상 이방인이다. 그러나 이런 문화적 문제의 당면하는 자들은 신자이다. 그들은 자신의 문화가 어떤 점에서 왜곡되고 잘못된 문화인지 인식하고저 복음의 진수를 지키고 전하는 일에 힘써야 할 것이다. 복음의 진리가 바르게 선포 된다면 그 외의 환경적인 부분들은 선교현장의 상황과 여건의 알맞게 변경 되는 것은 좋은 선교전략이라고 생각한다.2장에서는 우찌무라 간조의 사회개혁을 통한 선교적 의미를 찾고 있다. 우찌무라 간조는 20세기 초반일본의 사회사상과 기독교를 통한 변혁을 이루려고 노력하였다. 일본의 종교는 다신론이다. 모든 사물이나 자연의 신이 존재한다고 믿는다. 대표적인 예로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애니메이션 작품들을 보면 우리는 일본인들의 종교적 사상에 대해서 잘 알 수 있다. 그의 작품 속에는 수많은 신들과 정령들이 등장한다. 정말 세밀하고 작은 부분에서도 신을 느끼고 묘사하고 있다. 바로 이것이 일본인들이 생각하는 신의 개념이다. 그런 일본의 사상에는 다신론과 함께 제국주의적 사상이 강하게 지배하고 있었다. 당시 일본은 러일전쟁, 청일전쟁이 중이었다. 전쟁을 통해 일본은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국가의 안정을 이루려고 했다. 사실 이것은 정치세력들이 자신의 정치기반의 안정을 위해서 전쟁을 택한 것이다. 대부분의 전쟁은 정치세력의 안정화와 깊은 관련이 있다. 전쟁이라는 커다란 이슈를 창출함으로서 자신의 약한 정치적 세력을 안정시키는 시간을 얻는 효과를 가지게 된다. 그리고 전쟁은 강한 지도자를 필요로 하게 된다. 약한 정치적 세력을 가진 지도자는 전쟁이라는 흐름 속에서 강한 지도자로 이미지메이킹 될 수 도 있다. 전쟁은 일본에게 사회적 개혁이라는 흐름을 가지고 오게 하였고 그로 인해 많은 사람들은 고통과 고난을 받게 되었다. 이런 상황 가운데 우찌무라 간조 목사님은 사회개혁적인 복음을 전하였다. 우리는 사회개혁을 사회구원이라는 선교적 관점으로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성경은 개인구원만이 아닌 사회구원도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다. 약자들을 보호하고 그들의 권리와 인권을 존중해 주어야 한다. 그리고 성경은 전쟁을 보다는 평화를 말하고 있다. 구약에 나오는 전쟁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알리기 위한 전쟁이지만 오다. 사회의 굴복해서 그들의 생각을 따라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각을 믿고 의지하고 전파하는 것이 정말 참 그리스도인의 길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의미에서 우찌무라 간조의 사회개혁은 의미는 선교의 패러다임을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우리는 과연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 세상과 타협하며 살아가고 있는가 아니면 우찌무라 간조처럼 당시의 문화나 사회적 관점을 멀리하고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를 외치는 자리에 서 있는가를 생각해 보았으면 한다.3장에서는 가장 중요한 선교 대회중에 하나인 에딘버러 선교대회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있다. 에딘버러 선교대회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바로 하나님께서 가장 원하시는 것이 바로 선교 특히 세계선교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이다. 세계의 복음 전도는 하나님의 기획과 의도로 이루어져 있으며 하나님의 성령은 이것을 성취하시는 위대한 선교사라고 이야기 하고 있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우리가 선교해야 하며 전 세계 특히 비기독교 국가를 선교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그들은 토착교회의 제도적 발전과 바른 조직을 세우는 것을 어떻게 이루어 나가야 하는가에 대한 논의와 기독교인 양육과 제자화, 현지 지도자 양성의 대한 논의를 하였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후 기독교선교는 제한된 국가 제한된 민족이 아닌 전 나라 전 민족이 고민하는 하나님의 전 인류를 향한 명령의 인식으로 변화되었기 때문이다. 사실 선교의 중심이 유럽이나 북미만의 사명이 아닌 전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관심이요 명령이라는 사실을 입증한 것이다. 즉 선교가 외국인들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 내국인을 통해 이루어져함을 말하고 있다. 선교사와 현지 지도자들이 한 마음이 되어서 주님의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주님의 진리를 선포하고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것을 가장 중요시 하게 된 것이다. 오늘날 우리나라도 많은 국가에 선교사를 보내는 나라이다. 100년 전에는 선교사를 받아 들었던 나라였다면 이제 전 세계의 선교사를 보내는 나라가 되었다.이 시점에 우리가 다시 한 번 님의 나라를 확장해 나아가는 일에 전심을 다해야 할 것이다. 개인적으로 필리핀에서 일 년 정도 단기선교를 한 경험이 있다. 선교사님은 3개정도의 교회를 치리하고 계셨다. 하지만 선교사님은 혼자서만 그 교회들을 치리하시지 않았다. 먼저 현지 사역자를 세우는 일에 가장 큰 사역의 중점을 두셨다. 그들이 스스로 자립하는 것이 현지선교에서 가장 중요한 사역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들의 스스로 교회를 운영해 나가고 그들이 다시 교회를 세울 수 있도록 돕는 사역이 가장 핵심적인 사역이라고 하셨다. 이 선교사님의 사역이 바로 에딘버러에서 말하는 선교의 의미라고 생각한다. 선교는 나 혼자 하는 것이 아니다. 서로 협력해서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을 이루어 나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과연 이 시대의 여러 나라 중에 선교의 중심적 역할을 하게 되는 나라는 어디인가? 개인적으로 우리나라도 미국도 아니요 중국이라고 생각한다. 13억 이상의 인구가 밀집해 살고 있는 땅 그 땅은 아직도 공산주의 틀 안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된다면 그 영향력은 우리의 상상 이상이 될 것이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전해야 하는가? 사실 종교적으로 아직도 많은 탄압이 있는 그 땅 가운데 하나님의 진리를 선교하는 일은 쉽지 않다. 개인적으로 아는 선교사님도 작년에 중국에서 추방 당하셨다. 더 이상 중국에 들어갈 수 없다면서 중국의 많은 선교사님은 공안의 관심대상이며 중국은 선교사님들을 감시하고 있다고 말씀 하셨다. 선교동원세미나에서 박영환교수님은 삼자교회를 통한 선교방법을 말씀하셨다. 그러나 삼자교회가 진정한 의미의 신앙을 지니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 의문을 지니고 있다. 그들이 과연 진정한 의미의 예수 그리스도의 공동체인가 아니면 겉으로는 기독교공동체이지만 속으로 애국종교 사회조직인가는 확신 할 수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아직 많은 부분에서 중국의 기독교가 비성숙하다는 점이다. 아직 많은 부분에서 올바른 지도자가 없이 스스로 교회를 이끌어가고한다.
요한계시록에 나타난 선교사상과목명:제출일:학 번:이 름:◎ 목 차 ◎Ⅰ. 서 론Ⅱ. 본 론1. 요한계시록의 선교 사상_학자들의 견해1) 요한네스 니센의 ‘희망의 선교’로서의 계시록2) 도날드 시니어의 ‘예언자적 증언’으로서의 계시록3) 조지 W. 피터스의 ‘선교에 대한 충분한 환상’으로서 계시록2. 요한계시록의 선교학적 접근1) 공동체의 위기와 박해2) 구속적 예수 그리스도와 공동체3) 하나님 나라4) 우주적 그리스도Ⅲ. 결 론Ⅰ. 서 론성서는 우리에게 많은 것들을 이야기 하고 있다. 역사와 사회, 종교와 문화, 윤리와 법 그리고 그 안에는 다양한 메시지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바로 선교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성서 안에서는 인간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들을 발견 할 수 있다. 창세기에서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성서는 위대한 하나님의 구원계획으로 잘 이어져 오고 있다. 성서는 선교를 지향하고 있으며 성서의 마지막 부분인 요한 계시록에서도 우리는 선교사상을 발견할 수 있다. 요한계시록은 묵시적 상황 속에서도 교회와 그리스도들을 향한 희망을 전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나라와 공동체를 말하고 있다. 박해와 고난 가운데서 인내와 연단을 외치며 희망을 선포하는 요한 계시록에 선교사상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다.Ⅱ. 본 론1. 요한계시록의 선교 사상_학자들의 견해학자들이 견해들을 통하여 요한 계시록의 나타난 선교 사상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1) 요한네스 니센의 ‘희망의 선교’로서의 계시록요한 계시록은 기독교적 희망이 교회의 선교에 있어서 필수적인 요소임을 설명하고 있다. 당시의 그리스도인 집단과 공동체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어떤 방식으로 경험하고, 해석하고, 다른 문화에 전달할 수 있는지 생각해야만 했었다. 이런 전도방법 가운데 하나가 바로 희망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희망의 선포는 첫째 가난한 자들을 위한 것이며 둘째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 공동체들을 위한 것이며 셋째 당시의 희망을 필요로 하는 자들을 위한 것이었다. 희망의 선교는 선포와 교제를 이루기 위해서에 대한 그의 훈계를 예언의 말씀, 즉 교회에 도전하는 영감으로 쓰여진 환상으로 이해하며, 공동체에게 비인간화시키고 하나님에 적대적인 로마제국을 향해 예언자적 자세를 취하라고 훈계한다. 즉 제국의 절대적인 주장에 도전한 도발적인 예언자적 자세로 복음을 선포하도록 요구받는다. 시니어는 ‘우주적 기독론은 요한계시록의 메시지에서 근본적인 것이다’라고 말한다. 일으킴을 받은 그리스도가 온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의 도구가 되기 때문에 그의 주권은 비길 데가 아무것도 없다. 그는 "땅의 임금들의 머리“이며(계 1:5), 심판을 위한 그의 도래는 ”각 사람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것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로 말미암아 애곡하게“되는 원인이 될 것이다.(계 1:7) 요한의 신학적 상황은 로마와 깊은 연관이 있다. 로마는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했으며 스스로 황제숭배를 통해 하나님께 대항하였다. 요한계시록의 19장 이후부터 결론을 내는 장까지 연장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를 묘사한다. 결국 로마는 패배하고 사탄은 쫓겨나며, 죄와 불의와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운 새로운 세상이 창조 되는 것이다. 최후의 구속(계 20:4)에 대한 요한의 비전은 철저하게 창조 중심적이다. 비록 묵시적 언어가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해서 말하고 ‘현재 시대’의 철저한 변형을 상상할지라도(계 21:1)저자는 구속적인 드라마를 이 세상에 ‘내려오는 것’으로 이해된다. 요한의 우주적 기독론과 세상의 구속에 대한 관심은 그를 타협하지 않는 증언신학으로 이끈다. 이것은 성도들의 내한 인내의 증언의 요청(계 14:12)으로 이루어진다. 그들은 박해 가운데서 인내와 순교를 견디어 냄을 요구받는다. 증언에 대한 이 강조는 공동체의 선교의 표현이다. 증언의 요청은 하나님의 보편적인 구원의지에 관한 공동체의 확신들로부터, 그리고 일으킴을 받은 그리스도의 사역 때문에 모든 백성들에 대한 공동체의 책임감으로부터 흘러나온다.3) 조지 W. 피터스의 ‘선교에 대한 충분한 환상’으로서 계시록조지 W. 지 않는다. 요한은 마지막 장면에서 모든 세상에서 어린 양의 승리하는 모습과 의인들이 포함되어 있는 것을 바라본다. 새 하늘과 새 땅이 나타나고 어린 양이 아버지의 영광과 경배에 참여하시고 모든 열국들이 어린양의 충만한 보좌에서 흘러내리는 축복을 누리고 있다. 이것은 바로 요한이 가진 선교의 환상이며 대표적으로 계시록에서 나타난다. 요한계시록의 환상은 선교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과 복음이 전파되고 그 사역의 핵심에 예루살렘과 시온의 공동체 아닌 아시아와 이방의 공동체가 사용된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하나님은 안에서는 차별이나 특수주의가 존재하지 않음을 이야기 하고 있다. 요한계시록의 환상은 하나님의 구속적인 선교적의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2. 요한계시록의 선교학적 접근1) 공동체의 위기와 박해초대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갔다.(행 2:44-47) 그들의 선교 또한 공동체를 통해 이루어져 갔다. 당시의 선교는 초기 그리스도 공동체 신앙이 전제 되어 있다. 하나님은 공동체를 통하여 하나님의 선교를 실현해 오셨다.(안디옥공동체, 예루살렘공동체) 요한계시록에서 나타난 선교 또한 공동체를 기반으로 삼고 있다. 요한 계시록에서 나타난 공동체로서는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를 들 수 있다. 교회들은 당시의 황제로부터 황제숭배를 거부함으로서 고난과 박해를 받고 있는 상황이었으며 그 가운데서 하나님을 향한 인내와 온전한 순교를 요구 받고 있다. 이런 현실 속에서 그들은 공동체를 통해 더 하나가 될 수 있었으며 공동체를 통하여 고난과 박해를 이길 수 있는 능력을 가질 수 있었다. 이들은 매일 같은 소외, 괴로움, 고난을 경험하고 있었다. 그들이 겪는 매일의 경험은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경험을 의심케 했으며 하나님의 나라 도래의 대한 희망까지 사라지게 할 정도로 강력했다. 이런 상황 속에 요한의 묵시는 환상을 통하여 고난과 박해 가운데 인내와 하나님 나라의 비전을 제시함으로서 그리스도인들을 격려하고 훈계하고자 하였다.2) 구속적 예수 그리스도와 공동체요한계시운데 온전하게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이다.이것은 그리스도의 승리의 상징이 되는 십자가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십자가를 통하여 예수의 완전한 승리는 시작되었고 이것은 예수그리스도가 역사의 시작이며 근원됨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이 십자가의 사건 승리에 대해서는 요한계시록 5장 9-10절에서 잘 나타내어지고 있으며 십자가를 통해 구속적인 예수는 완성 되었으며 구원의 진리는 특수한 것이 아닌 보편적인 진리가 되었으며 십자가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승리가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요한 계시록의 집필자는 십자가를 통하여 모든 죄와 어둠가운데서 승리하신 만왕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통하여 그들의 삶 가운데서 언제나 선한 승리를 외치며 살아가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다.3) 하나님 나라‘하나님 나라’ 라는 개념은 성경의 모든 메시지에 스며있고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 속에서 크게 부각한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말씀(창 12:1-3, 창 22:18, 창 26:4, 창 28:14)에서 시작하여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계 21:2)” 라는 약속의 말씀에 이르기까지 ‘하나님 나라’ 개념은 일관되게 흐르고 있다. 구약의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 그들은 순종과 불순종을 거듭해 오지만 하나님께서는 역사의 중심에서 그들의 삶을 간섭하셔서 그들을 회복시키시고 그들을 친히 통치하시겠다는 약속과 희망을 주셨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사실과 그 분이 직접 선포하심으로 ‘하나님 나라’ 가 확연히 드러난다. 하나님 나라 완성을 향한 궁극적이고 최종적인 메시지인 요한 계시록은 마지막 시대에 교회의 선교적 임무를 다시 한 번 더 우리에게 확인시켜준다.심판의 때에 오시는 주님의 모습 속에서 선교적 메시지를 찾을 수 있다. 그 분은 ‘땅의 임금들의 머리(계 1:5)’이시고, 그 분이 재림하실 때 모든 족속이 보게 된다(계 1:7). 각 족속 방언 나라 백성 가운데서 온 교회의 통치자가 되신다. 아시아의 일곱 교회는 통시대적인 교회의 모습이며말씀 구절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열방을 향한 구속적 계획이 필연적으로 성취됨을 선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나라, 족속, 방언, 백성’의 포괄 요소의 계속되는 반복은 형식적으로 되는 것 없이도 오로지 종족적, 인종적, 정치적, 언어적 보편주의를 나타낸다. 이것은 항상 하나님의 선교 계획이었다. 요한 계시록은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의 완전한 최종 승리를 선포하는 것이다. 이것은 복음의 완전한 승리와 그리스도의 완벽한 통치가 실현됨을 말한다.이것은 이 땅을 향하신 하나님 뜻이자 우리가 이 땅 가운데 이루어 나아가야 할 하나님 나라의 도래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하나님 나라의 도래는 이 땅 가운데 완전한 승리 외치며 하나님의 구원을 온 열방 가운데 선포하는 것이다. 이것은 선교가 지향하며 우리가 해야 할 최우선 적인 사명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 나라의 도래는 요한 계시록이 집필되었던 당시에도 초대 그리스도인만이 갈망했던 것이 아니라 우리 또한 하루하루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바라보며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하심과 구속사역의 위대하심을 알리며 나아가는 복음의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4) 우주적 그리스도그리스도는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의 편지를 보내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집필자가 단지 미래적인 종말에만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닌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에도 많은 관심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하는 공동체의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역사는 주인 되시며 동시에 공동체의 종말을 바라보는 공동체를 이끄시며 그들의 희망이 되신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모습이 전통적인 그리스도론과도 질적으로 구분되지 않으며 우리를 죄 가운데서 구원하실 어린양으로의 임무(계 5장)를 성취하신 분으로 이해 할 수 있다. 집필자는 어린양이 수난을 당하여 죽으시지만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지금은 하늘 보좌 가운데 계심을 말하고 있다. 천상 가운데 계신 분은 하나님으로부터 두루마리를 받았을 때 하늘에서 24장로의 찬송(계 5:9-10)과 천사들의다.
“요한계시록에 나타난 선교사상”과목명:제출일:학 번:이 름:I. 들어가는 말알파와 오메가가 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일은 예수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이라고 볼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로 올라가실 때에 우리에게 땅 끝까지 이르러 주님의 제자가 되고 그들을 가르치고 지키게 하라고 말씀하였다. 이는 예수그리스도의 지상명령이자 하나님의 위대한 사명이라고 할 수 있다. 성경에서 창조주 하나님이 그분의 나라의 완전한 도래를 위해서 그분의 자녀를 찾는 모습은 창세기 처음에서 시작되어 요한계시록의 끝부분까지 이어진다. 분명히 성경전체가 선교 중심적, 지향적이라면 창세기에서 발단이 되어 마지막 책인 요한계시록에서는 그 정점을 이룬다고 볼 수 있다. 성경전체가 선교 지향적이며 마지막 책에서 그 절정을 이룬다면 요한계시록을 당연히 선교학적인 관점에서 연구될 가치가 있다. 이러한 견지에서 요한계시록의 선교학적 고찰의 의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며 다양한 학자들이 말하는 요한계시록의 선교적 관점과 우리가 바라보고 나아가야 할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요한계시록의 관점으로 살펴 보고자 한다.II. 학자들의 견해1. 조지 W. 피터스의 ‘선교에 대한 충분한 환상’으로서 계시록조지 W. 피터스는 선교에 대한 충분한 환상이 계시록에 나타나 있다고 한다. 거기서 하나님은 우주의 하나님으로 제시되어 있으며 하나님은 온 땅의 하나님으로, 모든 열국의 하나님으로, 그리고 어떤 영역도 하나님으로부터 제외된 곳은 없는 것으로 나타나 있다고 말한다. 그의 엄숙하게 빛나는 보좌는 모든 것 위에 높이 들려져 있으며, 거기로부터 하나님의 통치가 전 지역으로 미치고 있다. 모든 백성들의 심판 때에 반드시 그 앞에 서야 한다. 세상의 어떤 신도 그의 권세와 권위에 필적할 것이 없다. 그는 홀로 우주의 하나님, 열국의 하나님, 구원과 피난처이신 하나님이시며, 그는 모든 인간에게 유일하신 주권적인 의로우신 재판장이시다. 그의 권세와 권위는 확장될 것이며, 그의 정의와 악행에 대한 표준은 의로운 것으로 는데 “교회와 선교과제는 종말론적으로 보아야 하며, 교회는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 사이에 존재한다. 교회는 이 두 사건을 결합시키는 역할을 하며, 나타내야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하나의 잠정적인 현상이며, 이 중간시기에 있어서 특징적 활동은 선교이다.” 허버트 케인은 신약성서는 교회와 선교의 종국적 목표를 두 가지로 말하고 있다. 하나는 시간의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공간의 문제이다. 전자는 역사의 문제이며, 세대의 끝을 향해 달린다. 후자는 지리학상의 문제이며, 땅의 끝으로 확장된다. 승천하시기 전에 주님은 두 가지 중요한 개념을 말씀하셨다. 즉 세대의 끝과 땅의 끝이다. “이 천국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 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마24:14). 2000년 동안 교회는 말씀의 의미를 충분히 알지 못했고 단지 “당신의 나라가 임 하시옵소서”라고 기도해 왔다. 특히 박해시대에서는 자주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죄와 궁핍과 슬픔으로 가득한 이 세상으로부터 자신들이 구원받는 사건으로서 재림을 기대해 왔다. 세대의 끝은 복음이 땅 끝까지 전파되어야만 도래할 것이다. 이 두 개의 개념 사이에는 어떤 필연적인 연관이 있는 것 같다. 즉 종말은 선교가 완수될 때에야 비로소 실현될 것이다. 계22:17은 여기에 관련된 말씀이다.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 도다. 듣는 자도 오라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허버트 케인은 타종교의 성전과 기독교의 성서를 구분 짓는 중요한 요소에는 인간적인 요소, 역사적인 요소, 예언자적인 요소, 메시야적인 요소, 역동적인 요소, 종말론적인 요소가 있다고 한다. 종말론 적인 요소로, 하나님은 태초로부터 역사의 종말을 알고 계시며, 모든 것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신다. 역사는 무한히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가 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다시 오심으로써 종말을 맞게 된다. 성서는 우리에게 그 일의 개괄적인 모습을 제시해 주고 있다쫓겨나며, 죄와 불의와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운 새로운 세상이 창조된다. 최후의 구속(계20:4)에 대한 요한의 비전이 철저하게 창조 중심적이다. 비록 묵시적 언어가 ‘새 하늘과 새땅’에 대해서 말하고 ‘현재 시대’의 철저한 변형을 상상할지라도(21:1)저자는 구속적인 드라마를 이 세상에 ‘내려오는 것’으로 이해한다.요한의 우주적 기독론과 세상의 구속에 대한 관심은 그를 타협하지 않는 증언신학으로 이끈다. 증언에 대한 이 강조는 공동체의 선교의 표현이다. 증언의 요청은 하나님의 보편적인 구원의지에 관한 공동체의 확신들로부터, 그리고 일으킴을 받은 그리스도의 사역 때문에 모든 백성들에 대한 공동체의 책임감으로부터 흘러나온다.III. 요한계시록의 선교학적 접근요한계시록은 하나님의 어린양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최후의 승리로 끝을 맺는다. 바로 이러한 사실은 요한계시록이 갖고 있는 선교적 메시지와 상통한다. 선교의 종국은 온전한 그리스도의 나라가 도래함으로써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그리스도의 최후의 승리와 그 나라가 완성된다는 선교적 메시지가 요한계시록의 여러 곳에 표현되어 있다.그리스도가 최후의 승리(계 5:9,10)를 했다는 것은 세상나라에 그리스도의 나라가 임하는 것이다. 그 나라가 임하고 그리스도는 그 곳에서 왕 노릇 하시는 것이다(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하늘에 큰 음성들이 나서 가로되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시리로다, 계 11:15). 요한계시록 12장에도 이러한 그리스도 통치의 개념이 표현된다(여자가 아들을 낳으리니 이는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남자라..., 계 12:5). 선교란 결국, 그리스도가 아직 선포되지 않은 곳에 먼저 그리스도가 선포되고 선교지의 거민들에게 그리스도가 영접이 되면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통치가 이루어진다고 말할 수 있다. 곧 바로 이어지는 12장 10절이 이 사실을 더욱 확실하게 입증하고 있다(...이제 우리 하나님의 구원과 능력과 나라와 또 그의 그리스도의 권세가 이루시다. 이 지상에서의 예수 그리스도가 보여준 모든 증거와 그분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그의 영원한 통치라는 사실을 근거해 볼 때 하나님께서는 이미 그분의 나라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역사 속으로 끌어들였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땅의 임금들의 머리’이며(계 1:5), 또한 ‘나라’이다(계 1:9).둘째, 믿는 자들이 그의 나라이다. “그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계 1:6).” 믿는 자들은 제사장 나라의 역할을 이룩하는 자들로 택함 받았다. 제사장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후 시작되었다. 계 5:10절에 다시 유사한 표현이 사용된다. “저희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을 삼으셨으니 저희가 땅에서 왕 노릇하리로다.”끝으로, 하나님 나라는 ‘새 하늘과 새 땅’ 이다.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계 21:3).” 이것은 구속사의 전 과정 속에서 하나님이 그의 백성과 맺은 중심 내용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친히 함께 계신다는 것은 아브라함, 모세, 다윗에게 준 언약의 중심 사상이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이 미래의 나라에서 맺기로 약속하신 새 언약의 중심사상이다. 이 약속이 장차 올 새 땅에서 완전히 성취되는 것이다. 이에 대해 피터스(George W. Peters)는 요한계시록 21-22장에서 “새 하늘과 새 땅”의 개념을 우주적인 구원의 완성으로써 모든 피조물의 화해를 포함하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구원은 삼위 하나님의 역사로서 죄에 대한 심판과 인간을 구원하는 것을 포함한다 고 말한다.땅의 임금들의 머리인 예수가 장차 재림할 때까지 즉 새 하늘과 새 땅이 완성될 때 까지 믿는 자들이 그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를 향해서 나아가는 것이다. 이제 그러한 하나님 나라의 증인으로서 그 나라가 완 땅에 거하는 자들 곧 여러 나라와 족속과 방언과 백성에게 전할 영원한 복음을 가졌더라(계 14:6).”하나님 나라 완성을 향한 궁극적이고 최종적인 메시지인 요한 계시록은 마지막 시대에 교회의 선교적 임무를 다시 한 번 확인시켜준다. 심판의 때에 오시는 주님의 모습 속에서 선교적 메시지를 찾을 수 있다. 그 분은 ‘땅의 임금들의 머리(계 1:5)’이시고, 그 분이 재림하실 때 모든 족속이 보게 된다(계 1:7). 각 족속 방언 나라 백성 가운데서 온 교회의 통치자가 되신다. 아시아의 일곱 교회는 통시대적인 교회의 모습이며 동시에 오늘날의 교회의 다양한 모습을 보여준다(계 2:1-3:22). 그 교회들에게 주시는 주님의 메시지는 깨어있어 회개하고 믿음을 지켜 승리하라는 것이다. 각 일곱 교회에 주시는 말씀에서 공통적으로 반드시 언급하신 ‘이긴다’라는 표현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궁극적 승리와 축복의 암시를 찾을 수 있다. 이것은 이 땅의 교회들이 감당해야하는 선교의 최후이다. 특별히 두아디라 교회에게 주시는 편지에서 이러한 선교적 명령의 색체가 강하게 드러난다.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기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계 2:26).”선교적 메시지가 담겨진 표현들은 위에서 인용한 부분에서 끝나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피 흘려 성취하신 구속사역의 효력이 비단 유대인 뿐 아니라 온 세상의 모든 사람에게 미치는 것임을 시사하는 구절들이 곳곳에 표현되어 있다. 이십사 장로들의 노래는 만국으로부터 대속 받은 주의 백성들의 구원을 기뻐하며 하나님의 경륜을 찬양한다.2) 그리고 이와 유사한 메시지는 계 7:9, 계 11:9, 계 13:7, 계 14:6 등에서 계속해서 발견된다.이러한 말씀 구절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열방을 향한 구속적 계획이 필연적으로 성취됨을 선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나라, 족속, 방언, 백성’의 포괄 요소의 계속되는 반복은 형식적으로 되는 것 없이도 오로지 종족적, 인종적, 정치적, 언어적 보편주의를 나타낸다. 이것은 항상 하나님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