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공용화보다는 양질의 영어교육이 필요하다오늘날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있어 영어는 모국어인 한국어를 제외하고는 어디서든 가장 쉽게 접할 수 있는 언어이다. 거리의 간판이나 도로표지판에서 우리는 쉽게 영어를 발견할 수 있으며, 우리가 사용하는 생필품이나 학용품 등에서도 영어 단어 한 두 개 이상은 볼 수 있을 것이다. ‘국산품’이라는 표시도 'made in Korea'라고 표기하고 있으니 말이다. 게다가 신문에서 본 기사에 의하면 “주민들이 일상생활 속에서 영어를 습득할 수 있도록 하는” 국내 최초 ‘영어 공용 아파트’도 생길 예정이라고 한다.) 이는 그만큼 영어가 한국 내에서 큰 영향력을 미치고 있으며 세계어로서의 지위나 중요성을 인정받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이다. 수업시간에 배운 내용에 따르면, 실제로도 영어는 지금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100개 이상의 나라에서 외국어로서는 가장 널리 교육되고 있다고 한다.이러한 상황에 걸맞게, 우리학교에서도 향후 5년 안에 영어를 공용화하려는 계획을 갖고 있다고 한다. 즉, 영어가 한국어와 함께 학교 내에서 공식적으로 사용된다는 뜻이다. 지금도 물론 원어민 교수의 수업에서, 외국에서 교환학생으로 온 친구들과 대화를 나눌 때, 원서를 읽을 때 등 영어를 사용해야 하는 경우가 많지만 영어공용화가 시행되면 지금보다는 훨씬 공식적이고 넓은 범주에서 영어를 사용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러한 계획에 반대한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첫째, 우리나라의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 졸업까지의 공교육만을 받고서는 영어에 능통할 수 없다. 지금 현재 우리나라 초, 중, 고등학교에서 시행하고 있는 영어교육은 듣기나 말하기 보다는 읽기와 쓰기 중심이다. 그런 교육을 받고 우리학교에 입학한 신입생들은 당연히 의사소통이나 수업의 참여에 있어 어려움을 겪게 될 것이다. 이들은 부족한 영어 실력을 보충하기 위해 학원을 다니거나 과외 교습을 받게 될 것이고, 오히려 학과 공부에는 소홀해지기 쉽다. 이런 상황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서울대를 지망하는 고등학생들은 미리부터 영어회화를 준비하는 경향도 생겨날 것이고 그렇게 되면 학생들의 부담도 커지고 사교육비는 더욱 증가하게 된다.둘째, 비용상의 문제를 들 수 있다. ‘영어공용화’는 단순히 의사소통의 문제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공용화’라 함은 의사를 표현할 때의 언어뿐만 아니라 행정적인 문서나 학교 내의 표지판, 안내방송 등의 언어도 모두 포함한다. 그렇기 때문에 영어 공용화를 시행한다면 학교 내에 있는 표지판과 안내문 등에 모두 영어를 추가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또한 기존의 한글 문서들을 영어로 번역해야 할 것이며 안내 방송에도 영어 방송을 추가해야 한다. 이 모든 작업을 수행하려면 만만치 않은 비용이 들 것이고, 이는 학생들의 등록금 인상으로 이어질 수 있다. 또한 영어로 서비스를 원하는 사람들을 위해 학교 내 곳곳에서 일하고 계시는 많은 교직원 분들의 영어교육이 필요한데, 이는 비용뿐만 아니라 꽤 많은 시간이 요구된다.셋째, 영어와 거의 관련이 없는 전공자들에게는 오히려 부담과 시간낭비가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국사학과 학생의 경우 전공과목을 공부하면서 영어를 사용할 일이 거의 없다. 그런데 영어공용화로 인해 불가피하게 생활에서 영어를 쓸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면, 그들은 좋든 싫든 영어를 배워야만 할 것이다. 그들은 예정에 없던 영어를 배우면서 투덜거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만약 이런 시간과 비용을 전공과목 공부에 투자한다면, 보다 나은 학업 성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다.
벽에 걸린 ‘초상화’같은 그녀들:William Faulkner의 "A Rose for Emily"와 Henry James의 "Daisy Miller" 비교여기 두 명의 여자가 있다. "A Rose for Emily"의 주인공 Emily와 "Daisy Miller"의 주인공 Daisy가 바로 그들이다. 그런데 그들은 각 작품의 ‘주인공’임에도 불구하고 작품 속에서 ‘주체’로서의 이미지보다는 ‘객체’로서의 이미지로 등장한다. Emily는 이야기가 전개되는데 있어 중심이 되긴 하지만 그녀는 마을 사람들의 관찰대상으로 등장하며, 그녀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는 알기가 어렵다. Daisy 역시 소설 전체에 등장하고 있긴 하지만 그녀의 말과 행동만으로는 그녀의 속마음을 알아차릴 수가 없다. 다시 말하면, 그들은 작품 속에서 ‘대상화’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사실 직접적인 심리 상태에 대한 서술이 꼭 있어야만 등장인물의 생각을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 두 소설의 주인공들은 약간은 돌발적이고 이해하기 어려운 행동들을 보여 우리를 더욱 헷갈리게 한다. 따라서 우리는 이렇게 객체화된 주인공들이 우리로부터 멀리 떨어져있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먼저 "A Rose for Emily"를 살펴보자. Emily는 지금은 몰락한 남부 귀족 Grierson가의 마지막 사람이었다. 보수적이고 강압적인 아버지 밑에서 수십 년 간 자라온 그녀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마을 사람들에 의해 남부 귀족사회의 상징적 존재로 여겨지고 있었다. "Alive, Miss Emily had been a tradition, a duty, and a care"에서 알 수 있듯이 Emily는 마을의 살아있는 전통이자 의무였고, 보호 대상이었다. 때문에 마을 사람들은 자주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그녀의 일에 관여하는 등 많은 관심을 보인다. 마치 그들이 홀로 남겨진 Emily의 보호자라도 되는 것처럼. 그녀가 북부에서 온 노동자인 Homer Barron과 교제할 때도 마을 사람들은 'noblesseey recrossed the lawn, a window that had been dark was lighted and Miss Emily sat in it, the light behind her, and her upright torso motionless as that of an idol. (그들이 잔디를 다시 건너갈 때, 어두웠던 창문에 불이 켜졌고, Emily양 이 그 안에 앉아 있었는데, 불빛은 그녀의 뒤에서 비추었고 그녀의 똑바로 선 흉상은 마치 우상의 그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이 부분은 마치 하나의 그림을 보는 것 같다. 어둠 속에 불이 켜진 하나의 네모난 창문, 그리고 그 안에 움직이지 않고 앉아 있는 Emily의 흉상. 이것은 마치 액자 속에 그려져 있는 여자의 반신상같이 보인다. 우리는 이 부분에서 많은 사람들이 벽에 걸린 그림을 구경할 수 있듯이 Emily의 이런 모습도 구경할 수 있는 대상 같은 느낌을 받게 된다.또한 강압적인 아버지 아래에 있는 Emily의 모습 역시 마을 사람들에게 대상화 되어 있다. 다음을 보자.We had long thought of them as a tableau, Miss Emily a slender figure in white in the background, her father a spraddled silhouette in the foreground, his back to her and clutching a horsewhip, the two of them framed by the back-flung front door. (우리는 오랫동안 그들을 Emily양이 흰 옷을 입은 가냘픈 모습으로 뒤에 서 있고, 그의 아버지가 말채찍을 들고 그의 등이 그녀에게 향하게 한 채 두 다리를 벌린 실루엣으 로 앞에 서 있는 모습이 뒤로 젖혀진 앞문에 의해 액자화 된 하나의 그림으로 생각해 왔 다.)이처럼 Emily와 그녀의 아버지는 하나의 그림처럼 형상화되어 마을 사람들의 머릿속에 박혀 있다. Emily의 아버지는 그녀 주위책을 모색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렇게 뒤에서 수군대면서도 정작 Emily에게 직접 얘기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또, Emily에 대한 관심이 진심어린 마음에서 나온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그녀에 대한 호기심과 더불어 그녀는 단지 이 마을의 ‘전통’이므로 마을 사람들은 그에 대한 ‘의무’를 지키고 있는 듯 하다.한편, ‘대상화’는 "Daisy Miller"에서도 마찬가지다. 이 소설의 제목이 "Daisy Miller"임에도 불구하고 Daisy는 그저 Winterbourne의 관찰 대상으로만 등장한다. 이야기 내내 Winterbourne은 Daisy가 순진한 여자인지, 뻔뻔한 여자인지 헷갈려하고 그것에 대한 해답을 찾으려 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Daisy의 말과 행동, 외모는 전부 Winterbourne의 판단 대상이 될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다음 대목에는 Winterbourne이 Daisy의 말을 듣고 끊임없이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판단을 내리려고 애쓰는 모습이 잘 드러나 있다."I have always had," she said, "a great deal of gentlemen's society." . . . Was she simply a pretty girl from New York State - were they all like that, the pretty girls who had a good deal of gentlemen's society? Or was she also a designing, an audacious, an unscrupulous young person? . . . But this young girl was not a coquette in that sense; she was very unsophisticated; she was only a pretty American flirt. Winterbourne was almost grateful for having found the formula that applied to Mi 이고 뻔뻔스러우며 비도덕적인 젊은이일까? (중략) 그러나 이 젊은 아가씨는 그런 종류의 바람둥이는 아니었다. 그녀는 매우 순진했다. 그녀는 단지 예쁜 미국 바람둥이 아가씨에 불과했다. Winterbourne은 Daisy Miller양에게 잘 들어맞는 문구를 발견한 것이 고맙기까 지 했다.)Winterbourne은 품행이 단정치 못하다는 소리를 들을 수도 있는 말을 서슴없이 하는 Daisy를 보고 Daisy가 어떤 여자인지 판단하려고 이것저것 생각한다. 그리고는 어떤 결론에 도달하고는 스스로 만족한다. 이러한 과정은 소설 내내 끊임없이 반복된다. Winterbourne은 Daisy를 좋아하면서도 그녀의 이랬다저랬다 하는 행동에 따라 그녀가 순진한 여잔지 뻔뻔한 바람둥이인지 계속해서 판단하고 재보려 한다. 모든 서술은 Winterbourne의 입장에서 전개되며 Daisy는 하나의 객체일 뿐 그녀가 왜 이랬다저랬다 하는지는 드러나지 않는다. 이러한 Daisy의 객체화는 "A Rose for Emily"의 Emily와 유사하다.게다가 갑작스러운 Daisy의 죽음은 그녀를 더욱 우리로부터 멀게 만든다. 그녀는 Winterbourne을 사랑한 것인지, 아님 Giovanelli를 사랑한 것인지도 드러나기 전에 열병에 걸려 죽어버린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상태에서 더 이상 늙어가지 않고 죽음을 맞이함으로써 아름다운 모습만을 세상에 남긴 Daisy는 마치 ‘아름다운 Daisy’라는 하나의 그림으로 남은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여기서 우리는 앞에서 언급한 Emily의 ‘반신상 그림’을 떠올릴 수 있다. 즉, 두 주인공은 각각의 작품 속에서 벽에 걸린 초상화 같은 존재로 묘사되고 있는 것이다.하지만 둘은 여러 면에서 차이점을 가진다. 그 중 가장 확연히 드러나는 것은 그녀들이 보여주는 행동의 차이이다. Emily는 외부적 요인으로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지 못한 반면, Daisy는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Emily는 아버지의 영향력 아래에서 그녀의 욕망을 억제한 채러한 억압된 그녀의 욕망은 아버지가 죽고 난 뒤, Homer Barron과의 교제에서 비정상적인 행동으로 나타난다. Barron은 Emily에게 있어 아버지에 대한 최초의 반항이자 noblesse oblige를 생각하지 않고 그녀의 뜻대로 할 수 있는 마지막 희망이었다. 그녀를 지켜주던 아버지도 세상을 떠나고, 마을 사람들은 그녀를 진실하게 대하지 않을뿐더러 전처럼 존경하지도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Emily에겐 Barron이 더더욱 의지하고 기대고 싶은 존재였을 것이다. 그런데 Barron이 여러 가지 이유로 그녀를 떠나려 하자 Emily는 아버지처럼 Barron을 또다시 떠나보낼 수 없었고, 이러한 생각은 Barron을 죽임으로써 그와 영원히 함께하는 비정상적인 돌출행동으로 이어지게 된다.반면 Daisy는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모습을 보인다. 그녀는 유럽에서 지내면서도 유럽 여자들이 지켜야 할 것으로 생각하고 또한 지키고 있는 것들에 전혀 구애받지 않고, 주위 사람들의 시선이나 간섭에도 신경 쓰지 않는다. 이는 Emily가 남부 귀족으로서의 의무를 지키려 했던 것과는 대비되는 모습이다. 다음 대목은 그러한 것 중 한 예이다."I think you should get into the carriage."Daisy gave a violent laugh. "I never heard anything so stiff! If this is improper, Mrs. Walker," she pursued, "then I am all improper, and you must give me up. Good-bye; I hope you'll have a lovely ride!" and, with Mr. Giovanelli, who made a triumphantly obsequious salute, she turned away. (“나는 당신이 마차를 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Daisy는 격렬하게 웃었다. “난 그렇게 딱딱한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어요! 만약 이런 행동이 부)
다양한 측면의 대조(contrast)가 갖는 의미:John Keats의 Ode on a Grecian Urn 을 읽고John Keats의 Great Ode 라고 불리는 다섯 편의 Ode 중 하나인 Ode on a Grecian Urn 은 그리스의 옛 항아리 표면에 새겨진 부조를 보고 쓴 시이다. 그러나 이 시는 단순히 항아리의 부조를 묘사하는 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항아리에 새겨진 부조 속의 세계를 통해 진지하고 지속적인 삶의 성찰을 담고 있는데, 이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이루어지는 대조(contrast) 에 의해 더욱 효과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1연에서 5연에 이르기 까지 이 시의 전반에 걸쳐 나타나는 대조는 이 시에서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장치이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Ode on a Grecian Urn 에서 어떠한 측면에서의 대조가 어떤 식으로 드러나는지 살펴보고, 그것이 가지는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한다.먼저, 우리는 1연과 2연을 통해 sensual한 측면과 spiritual한 측면의 대조를 비교적 쉽게 찾아볼 수 있다. 1연에서는 욕망에 사로잡힌 남자가 여자를 쫓아가고 있고, 반면 여자는 잡히지 않으려고 도망치는 장면이 묘사된다. pipes 와 timbrels , wild ecstasy 같은 시어가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분위기는 떠들썩하고 법석대며 사람들은 음악과 술에 취한 상태이다. 이런 광경을 지켜보는 화자는 sexual한 장면을 몰래 훔쳐보는 기분이 들면서 자신도 덩달아 흥분이 고조된다. 그런데 2연으로 넘어오면서 갑자기 1연에서의 고조된 감정이 가라앉는다. 이는 2연의 1, 2행에 걸친 Heard melodies are sweet, but those unheard/Are sweeter 에서 먼저 시작된다. heard melodies , 즉 귀에 들리는 소리는 우리의 감각으로 느낄 수 있는 소리이다. 그러나 화자는 여기서 귀에 들리지 않는 소리, 즉 부조 안에 갇혔기 때문에 우리가 들을 수 없고, 상상할 수밖에 없는 소리가 더 감미롭다고 말하면서 감각적인 아름다움 보다 정신적인 아름다움을 더 강조하고 있다. 특히 2연에서는 spirit, 혹은 imagination 세계의 아름다움이 더 좋은 것임을 여러 가지 예를 통해 드러내고 있다.Bold lover, never, never canst thou kiss,Though winning near the goalㅡyet, do not grieve;She cannot fade, though thou hast not thy bliss,For ever wilt thou love, and she be fair!위의 인용 부분에서 화자는 연인은 비록 사랑하는 사람에게 입을 맞춤으로서 그의 욕망을 만족시킬 수는 없지만, (항아리의 부조 속에 갇혀 있기 때문에) 그녀의 아름다움은 영원할 것이며 그녀에 대한 그의 사랑 또한 영원할 것이므로 아름답다고 노래하고 있다. 우리는 이 같은 1, 2연의 대조를 통해 spiritual한 면이 더욱 부각됨을 볼 수 있다.두 번째로 인간 세계의 mutability와 항아리 부조 속의 세계의 fixity의 대조를 볼 수 있다. 인간은 세상에 태어나 생로병사를 겪으면서 점점 변하기 마련이고, 늙어 가기 마련이며 결국은 죽어서 흙으로 돌아간다. 아무리 아름다운 사람일지라도 인간이라면 그 아름다움은 나이가 들수록 퇴색하게 된다. 따라서 mutability는 인간 세상의 피할 수 없는 속성이다. 그러나 항아리 부조 속의 세계는 모든 것이 변하지 않으며, 고정되어 있다. 가지들은 결코 잎을 떨어뜨리지 않으며, 피리 연주자는 지칠 줄 모르고 영원히 연주를 계속한다. 또한 연인들의 사랑은 영원히 젊고, 따뜻하고, 가슴 벅차다. 이같이 인간 세상에서는 결코 경험할 수 없는 고정된 행복에 도취한 화자는 끊임없는 탄성을 내지르다가 순간 떠오른 생각에 다시 고조된 감정이 가라앉는다. 다음을 보자.All breathing human passion far above,That leaves a heart high-sorrowful and cloy'd,A burning forehead, and a parching tongue.화자는 자신이 도취해 있던 항아리 안의 행복이 우리 실제 삶과 얼마나 다른 것인가를 깨닫는다. 이 부분에서 제시되고 있는 역설적인 삶의 모습들, 즉 consummation에 대한 강한 갈증을 갖고 있다가 막상 consummation이 있고 나면 불행하게도 이전의 갈망은 잊고 cloy'd되어 버리는 것이 바로 우리 인간의 삶이다. 하지만 모든 것이 고정되어 있는 항아리 안에서의 행복은 consummation에 도달하기 직전의 상태이며 결코 도달할 수도 없다. 이런 점에서 화자는 항아리의 부조가 그것의 fixity 때문에 단지 삶의 일순간의 행복은 나타낼 수 있어도 인간의 삶 전체를 나타내지는 못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다시 말하면, 항아리 부조 속의 고정된 상태가 더 행복한 것처럼 보이지만 결코 고정된 상태로만 존재할 수는 없는 우리 인간에게는 그것이 진정한 행복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한편, 이 시에서는 temporal한 측면과 spatial한 측면의 대조도 나타난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항아리 안의 세계는 시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다. 부조에 나타난 장면 그 순간에서 모든 것이 정지되었기 때문에 그 상태는 영원히 계속된다. 그래서 여자의 아름다움도, 연인의 사랑도, 피리 연주자의 연주도 끊임없이 지속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앞에서 언급한 fixity의 속성과 연관성을 갖는다. 그러나 항아리가 시간적 측면으로부터 자유로운 반면, 공간적 측면에서는 제약을 가진다. 다음은 4연의 일부이다.Who are these coming to the sacrifice?To what green altar, O mysterious priest,Lead'st thou that heifer lowing at the skies,And all her silken flanks with garlands drest?What little town by river or sea shore,Or mountain-built with peaceful citadel,Is emptied of this folk, this pious morn?여기에서는 종교적인 의식을 드리러 가는 사람들의 묘사가 나오는데, 이것은 질문에 의해 이루어진다. 그 질문들은 희생제를 지내러 가는 이 사람들은 누구이며(Who), 지금 송아지를 끌고 어디로 가고 있으며(Whither), 이들은 어디로부터 왔는가(Whence)를 묻고 있는데, 이 질문들은 여기 이 부조만 가지고는 결코 대답할 수 없는 질문들이다. 왜냐하면 이 항아리의 부조가 보여주고 있는 장면은 굉장히 제한적이기 때문이다. 항아리 표면이라는 정해진 공간이 있기 때문에 이 부조는 송아지를 끌고 희생제를 지내러 가는 사람들의 현재의 모습만을 단편적으로 보여줄 수 있을 뿐, 이 사람들이 과거에 어디서 어떻게 살았고, 어떤 목적으로 여기에 의식을 치르러 왔는지, 그리고 송아지를 끌고 가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 하는 것들은 전혀 보여줄 수가 없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러한 공간적인 제약이 화자(혹은 시인)의 상상력에 날개를 달아 주었다고 볼 수도 있다. 이 사람들이 어디에서 왔는지 전혀 알 수가 없기 때문에 화자는 그들이 어느 작은 마을에서 왔다고 가정한 뒤, 그 마을의 위치까지 강가, 바닷가, 혹은 산 위 등 여러 가지로 상상해보고 거기에서 더 나아가 사람들이 모두 제사를 지내러 왔기 때문에 마을이 텅 비어있을 것이라는 상상까지 한다. 이 같은 공간적 제약은 시간의 무제약을 보완해 줌과 동시에 화자의 상상력이 항아리의 틀을 넘어서게끔 해주는 기회도 제공한다.마지막으로 이 시의 전체를 아우른다고 할 수도 있는 화자의 ideal한 측면과 skeptical한 측면의 대조를 들 수 있겠다. 처음에 화자는 이 항아리를 보고 시간을 초월한 예술의 이상적인 면모에 감탄을 금치 못한다. 그래서 시의 초반부에는 항아리 부조 속의 세계에 이상화된 형태로 들어있는 사랑의 불변성과 미의 영원성을 찬탄한다. 그러나 시의 중반부쯤에 와서는 idealism에 거리를 두고 회의적인 태도로 시간을 초월한 예술과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은 다른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을 품기도 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이상적인 아름다움은 단지 예술 작품 속에서만 가능한 것이고, 우리 인생의 슬픔, 고통, 병, 노년 등의 문제는 근본적으로 예술이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순간 감탄으로 흥분되었던 그의 감정은 금세 사그라진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예술 작품의 아름다움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아름다움은 아름다움대로 인정하고, 우리 현실 세계의 삶은 우리 삶대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 화자의 생각이다. 이처럼 어찌 보면 모순된 것처럼 보이는 두 가지의 생각이 대조됨과 동시에 공존하고 있다. 그래서 grecian urn 이 우리로 하여금 그의 아름다움에 빠져 tease us out of thought/As doth eternity 하게 하기도 하지만, 예술 작품으로서 우리 인간에게 위로와 기쁨을 주는 a friend to man 도 될 수가 있는 것이다. 즉, 화자가 이상주의적 태도와 회의적인 태도를 함께 갖고 있는 것처럼 grecian urn 도 긍정적인 측면과 부정적인 측면을 동시에 갖고 있다. 만약에 이 시가 한 쪽의 관점으로만 치우쳐 예술 작품의 아름다움만을 찬양했다든지, 아니면 부조 속의 세계를 비현실적인 것이라고 비판하면서 회의적인 태도만을 보였다면 아마 이 시는 지금처럼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높이 평가받지 못했을는지도 모른다. 동시에, 그만큼 contradictory한 측면에 있는 두 가지를 함께 잘 이끌어온 Keats의 시작 능력이 정말 대단하다는 것을 우리는 여기서 또 한번 느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