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논변체 산문1) 논변체 산문의 정의논변체 산문은 사리를 분석하고 시비를 변별하는 것을 위주로 하면서 일정한 문학성을 지닌 문장이다. 의론문(議論文) 혹은 논설문(論說文)이라고도 한다. 논변체 산문의 기원은 이미 논변의 요소들이 갖추고 있는『상서』의 「반경(盤庚)」과 「무일(無逸」등 이라 볼 수 있다.2) 논변체 산문의 종류)① 논(論)논(論)은 이른바 정면 논술의 문장으로서, 유협은 “성인의 불변의 교훈을 경이라고 하고 경을 조술하여 철학적 이치를 해명하는 것을 논이라고 한다”라 하여, 의(議)?설(說)?전(傳)?주(注)?찬(贊)?평(評)?서(序)?인(引)의 8종 문체들을 모두 ‘논’에 귀속시켰다. 이는 모두 설명과 의론을 주된 표현수법으로 하면서 내용이 고도로 개괄적이고 논리성이 강하며 조리가 뚜렷하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에 유협은 논의 특징을 ‘하나의 이치만을 정밀하게 궁구하는 것이’라고 하기도 하였다.② 변(辨)변(辨)은 일종의 논박(論駁) 문장으로서, 언행의 시비진위를 판별한다는 뜻이 있으며 맹자와 양?주와의 변, 공손룡의 견백이동(堅白異同)의 변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한나라 이전에는 진정한 의미의 반박 문장이 없었으며 당나라때 변(辨)이 독립된 논변체계로 정해졌다. 한유의 「휘변(諱辨)」, 유종원의 「변논어(辨論語)」?「변열자(辨列子)」「동엽봉제변(棟葉封弟辨)」이 있다.③ 원(原)원(原) 은 사리의 본원을 추론한다는 뜻으로서 한유의 ‘오원(五原)’ 즉 「원도(原道)」?「원성(原性)」?「원훼(原毁)」?「원인(原人)」?「원귀(原鬼)」에서 기원을 찾을 수 있다. 한유의 ‘원’은 곡절과 억양이 있게 작문을 하여 사실상 ‘논’과 구별되어 생각할 수 없는 관계를 이루고 있다.④ 해(解)와 석(釋)해(解)는 사물에 대하여 해설을 하여 그로서 특정한 이치를 천명하는 것으로서 한유의 「획린해(獲麟解)」, 「진학해(進學解)」, 왕안석의 「복수해(復讐解)」가 있다. 『문체정변』「서설」에서 석(釋)도 해(解)임을 알려주고 있다. )⑤ 설(說)『문체정변』「서설량을 말한다. 이러한 역량을 문장이 가지고 있어야만 사람마음을 두렵게 하고 굴복시키는 예술적 매력을 있게 한다는 것이다. 이 기세를 논변문이 지니게 된 것은 문장의 기세는 ‘이(理)’ 에 관건이 있어, 이치가 곧아야 기세가 장하나 논변문은 이러한 이치를 논설하는 것이므로 진리가 손 안에 있어야 기세가 대나무를 쪼개듯해서, 지향하는 바가 흔들리지 않기 때문이다. 이렇듯 한 편의 논변문은, 이치의 논설이 투명하고 심각할 뿐 아니라 감정적 색채가 강렬할 때에 필연적으로 문장의 감화력이 크게 증가된다고 볼 수 있겠다.② 예술적 기교논변의 예술적 기교를 강구하는 것은, 중국 고대의 논변체 산문이 지켜 내려온 우수한 전통이라 할 수 있다. 논변문은 『상서』에서 제자諸子에 이르고 다시 당송팔대가에 이르도록, 줄곧 실용성을 대단히 중시하였다. 논변문의 제작은 모두 자신의 이상이나 포부 혹은 정치적?학술적 관점을 제시하기 위한 것이었다. 따라서 제작하는 중에 반복해서 갈고 닦아내야 하였다.⑴ 입의(立意) - 시를 지을 때에도 이렇게 입의가 요구되지만, 논변문을 지을 때에는 더욱 입의가 요구된다. 논변문은 직접 설리를 하기 때문에 입의의 높이가 설리의 효과와 직접 관계가 있다. 이를테면 북송의 저명한 산문가인 소순蘇洵 부자는 모두 「육국론六國論」을 지었는데, 그 글들은 모두 역사를 논한 문장이었다. 이 때 소순의 「육국론」은 별도로 신의를 내고 현실과 결합시켜 논함으로서 명쾌한 논술로서 남겨지게 되었다.⑵ 파리(破理) - 유협의 『문심조룡』은 “논論은 장작을 패는 것과 같아, 파리破理할 줄 아는 것을 높이친다”고 하였다. 즉 좋은 논변문을 작성하는 관건은 ‘파리’에 있다는 말이다. 이때의 ‘파리’란 도끼로 장작을 팰 때 결을 맞춰 패야 하는 것과 같다는 뜻이다. 즉, 논변문은 시비를 변별하여 바로잡는 목적에 도달하여야 하므로 반드시 깊이에까지 탐색하여, 구체에서부터 추상에로 전면적인 분석을 하고, 그 속의 관건을 파악해서 돌파하여, ‘겸건구통鉗堅求通’(딱딱한 바위에 구멍을 내어언어의 형상성을 중시해서 고사?우언을 인용하여 도리를 설명한다. 그 가운데 통상적으로 채용되는 것이 비유의 운용이다.⑸ 주밀周密 - 고인들은 논변문을 지을 때에 구성을 신중히 하고 안배에 유념하도록 강조하였다. 즉 논변문은 반드시 “정미精微하고 창랑暢朗하여야 한다.” 또 유협의 『문심조룡』에서 말하였듯이 전후 ‘원통圓通’하여야 한다. ‘통通’이란 수미가 일치됨이고 ‘원圓’은 글 전체가 유기적이고 구성이 엄밀하여야 함을 말한다.◎ 호민론 : 조선 중기에 허균(許筠)이 지은 글, 그의 문집 ≪성소부부고 惺所覆螺藁≫에 실려 있다.1. 작자소개허균 [許筠, 1569~1618]허균은 선조에서 광해군대에 걸쳐 활약한 문장가, 사상가, 개혁가이다.자는 단보(端甫), 호는 교산(蛟山)·성소(惺所)·백월거사(白月居士)이며 1594년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1597년 문과중시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관직생활을 시작했으나 기생을 끌어들이거나 불교를 믿는 등 당대로서는 파격적인 행동을 일삼아 파직과 복직을 거듭하였다. 광해군 때에는 집권세력에 적극 참여해 자신의 정치적 위치를 강하게 만들어 호조참의, 형조참의를 거쳐 좌참찬에까지 오르고, 외교사절로 두 차례나 명나라에 다녀오면서 외교력과 문장력을 떨치기도 한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집권층의 권력자로 만족하지 않고 당대 정권의 문제점을 지적하여 서얼 차별을 없애고 신분계급을 타파하는 혁명을 계획하였으나 그의 사상은 불온한 것으로 취급되었고 마침내 광해군 10년(1618) 역적혐의를 받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는 당대부터 총명하고 영리하며 시를 아는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았으나, 인격이 경박하다거나 인륜 도덕을 어지럽히고 이단을 좋아한다는 등 부정적인평가도 받았다. 즉, 그는 극적인 삶을 살아가며 사회의 안정을 해치는 인물이라 할 수 있으며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한 당대의 자료는 모두 허균에 대해 비판적일만큼 그는 개성이 강하고 과격하며 독단적인 성향의 인물로서 위험스럽게 간주되었다. 아래의 실록의 평가는 그가 기피인물이었음을 보여주는 조선사회에는 정착된 성리학이 사림사회에 깊은 영향력을 미치며 모든 사회생활을 지배하였던 때로서 이 성리학 이론을 사회에 적응시키려는 노력이 성리학에 대한 철저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던 시기이다. 이러한 논쟁은 긍정적인 요인을 넘어, 지나치게 실사보다 공담을 위주로 논쟁하는 풍토를 조성함으로서 사회문제 해결에는 미흡함을 보이게 되었다. 이때의 허균은 당시 대부분의 학자들과 달리 성리학 뿐 아니라 불교, 도교, 서학(천주교)에 두루 관심을 보이게 된다.) 이렇듯 허균이 성리학의 철학논쟁에 빠져들지 않고 다양한 사상을 접한 까닭은 모순된 사회현실을 극복하기 위한 방안으로 여러 학문과 사상에 동등한 관심을 기울이고자 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그의 학문과 사상에 대한 개방성은 당시 드러나고 있던 사회모순을 과감하게 지적할 수 있게 하였다.3. 작품 해설천하에 두려워할 대상은 오직 백성뿐이다. 백성은 홍수나 화재 또는 호랑이나 표범보다도 더 두려워해야 한다. 그런데도 윗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백성들을 업신여기면서 가혹하게 부려먹는데 어째서 그러한가?이미 이루어진 것을 여럿이 함께 즐거워하고, 늘 보아 오던 것에 익숙하여 그냥 순순하게 법을 받들면서 윗사람에게 부림을 당하는 사람들은 항민(恒民)이다. 이러한 항민은 두려워할 것이 없다. 모질게 착취당하여 살가죽이 벗겨지고 뼈가 부서지면서도, 집안의 수입과 땅에서 산출되는 것을 다 바쳐서 한없는 요구에 이바지하느라, 혀를 차고 탄식하면서 윗사람을 미워하는 사람들은 원민(怨民)이다. 이러한 원민도 굳이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자신의 자취를 푸줏간 속에 숨기고 몰래 딴 마음을 품고서, 세상을 흘겨보다가 혹시 그 때에 어떤 큰일이라도 일어나면 자기의 소원을 실행해 보려는 사람들은 호민(豪民)이다. 이 호민은 몹시 두려워해야 할 존재이다. 호민이 나라의 허술한 틈을 엿보고 일의 형편을 이용할 만한 때를 노리다가 팔을 떨치며 밭두렁 위에서 한번 소리를 지르게 되면, 원민은 소리만 듣고도 모여들어 모의하지 않고서도 소리를 지르고, 항민도 또한침내 백성과 나라를 망하게 한 뒤에야 그쳤다. 이러한 일들은 모두 백성들에게 모질게 굴면서 저만 잘 살려고 한 죄의 대가이며, 호민들이 그러한 틈을 잘 이용한 것이다. 하늘이 임금을 세운 것은 백성을 돌보게 하기 위해서였지 한 사람이 위에서 방자하게 눈을 부릅뜨고서 계곡같이 커다란 욕심을 부리라고 한 것은 아니었다. 진나라, 한나라 이후의 화란은 당연한 결과였지, 불행했던 것은 아니다.여기서 허균은 학정으로 인한 망국의 실례를 들고, 임금을 위해 백성이 있는 것이 아니라, 백성을 위해 임금이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하여 이 사명을 잊게 되면 나라가 망하는 것도 당연하다고 경고하고 있다. 절대자에게 절대적인 충성만 강요하던 당시 사회에서 백성의 존재와 힘을 지배층에게 부각시키려는 의도를 보이고 있다.조선은 중국과는 다르다. 땅이 비좁고 험하여 사람도 적고, 백성 또한 나약하고 게으르며 잘아서, 뛰어난 절개나 넓고 큰 기상이 없다. 그런 까닭에 평상시에 위대한 인물이나 뛰어난 재주를 가진 사람이 나와서 세상에 쓰여지는 일도 없었지만, 난리를 당해도 또한 호민이나 사나운 병졸들이 반란을 일으켜 앞장서서 나라의 걱정거리가 되었던 적도 없었으니 그 또한 다행이었다. 비록 그렇긴 하지만 지금의 시대는 고려 때와는 같지 않다. 고려 때에는 백성들에게 조세를 부과함에 한계가 있었고, 산림(山林)과 천택(川澤)에서 나오는 이익도 백성들과 함께 했었다. 장사할 사람에게 그 길을 열어 주고, 물건을 만드는 기술자에게 혜택이 돌아가게 하였다. 또 수입을 잘 헤아려 지출을 하였기 여분의 저축이 있어 갑작스럽게 커다란 병화나 상사(喪事)가 있어도 조세를 추가로 징수하지는 않았다. 그러고도 그 말기에 이르러서는 오히려 삼공할 정도였다.우리 조정은 그렇지 아니하여 구구한 백성이면서도 신을 섬기고 윗사람을 받드는 범절을 중국과 대등하게 하고 있었는데, 백성들이 내는 조세가 다섯 푼이라면 조정에 돌아오는 이익은 겨우 몇 푼이고 그 나머지는 간사한 자들에게 어지럽게 흩어져 버린다. 또 관청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