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서 듣기우리는 자신 속에서 정서를 듣는 것이지 자신 속에서 그것을 느끼는 것이 아니다. 이런 소리를 들었을 때 누구나 가질 수 있는 의문은 음악이 어떻게 정서를 소유 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어떻게 음악적 소리들이 행보하거나 화날 수 있겠는가? 많은 사람들이 음악이 어떻게 정서를 지각 가능한 성질로 소유할 수 있는지를 설명하려고 시도해 왔다. 그를 위해서 우리는 음악이 어떤 정서를 지각 가능한 성질로서 소유할 수 있는지. 그리고 가능하다면 왜 다른 정서가 아닌 그 정서를 소유할 수 있는지 알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뮤직 언론이 모든 정서적 성질을 소유할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음악은 일반 정서(General emotion)는 소유할 수 있지만 특정 정서(Specific emotion) 는 소유할 수 없다. 하지만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음악이 어떤 정서를 표현할 수 있을 때 그 정서의 일반적인 형식에서만 그럴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일반적인 형식에서 음악이 표현할 수 있는 정서란 무엇인가?이것에 답을 구하기 위해선 잠시 ‘대상 없는’ 정서를 생각해 봐야 한다. 음악을 들을 때 우리는 다양한 일상 정서와 일반적으로 연관될 수 있는 확인 가능한 행동적, 언어적 틀과 동작이 존재하며, 우리는 모호한 패턴을 살아 있는 대상으로 읽으려는 진화적인 경향 때문에 음악을 가능하면 살아 있는 것, 즉 정서적으로 ‘읽으려’ 한다. 만약 이 설명이 옳다면, 음악이 표현할 수 있는 것이라고 보통 이야기 되는 다양한 일상 정서는 우리가 그 음악에 있다고 기대하는 종류의 것임이 분명하다. 물론 다양한 일상 정서를 표현할 수많은 ‘지성과 관련된’ 방법이 존재 하지 않는다는 말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다양한 일상 정서는 표준적인 행동 반응 또한 가진다는 점이다. 여기서 제기될 법한 세 가지 반례를 고려해 보자.(1) 음악은 자랑스러울 수는 없어도 확실히 거만할 수는 있다.(2) 말러의 교향곡의 악구들은 제목이나 텍스트적 연상 없이도 ‘신경증’ 을 표현한 다는 주장이 제기된다. 그러나 음악이 신경증의 표현일 수 있다면, 이때 또한 비통하다면 신경증적으로 비통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3) 엘가의 의 개시부는 위풍당당하다. 그리고 엘가가 그것을 작곡할 당시의 배경을 알게 된다면, 당시은 위엄과 품위에 찬 이 부분에서 권력의 절 정에 달해 있는 황제 가문의 자부심 표현을 듣게 된다. 하지만 자부심이라는 것은 플라톤적 태도의 전형이며, 음악이 표현할 수 없는 정서로 간주된 것이 다.위의 반례를 토대로 뮤직 언론이 표현할 수 있는 것과 작곡가나 그의 시대에서 단지 징후적으로 드러낼 수 있는 것 사이의 구별은 중요한 것으로, 실제로 그 구별이 어렵더라도 원칙상 유지되어야 한다. 따라서 위에서 살펴본 반례들에도 불구하고 모라브시크의 구분은 음악이 표현할 수 있는 정서와 그렇지 못한 정서를 대략적이긴 하지만 만족스럽게 구별해 준다. 이는 에서 내가 시도한, 음악이 어떻게 다양한 일상 정서를 표현하게 되는지에 대한 동작적, 언어적 설명도 어느 정도 뒷받침해 준다. 우리는 음악이 어떤 정서를 표현할 수 있는지 알고 있다. 그것은 플라톤적 태도가 아니라 구체적이지 않은 형태로서의 다양한 일상 정서이다. 이제 우리는 이와 같은 정서가 순수 음악적 경험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 살펴보자.인지론자에게 던져진 도전, 음악에서 경험 표현적 속성의 역할을 설명하라는 요구는 그것이 아무역할도 하지 않는다는 대답으로 해결될 수 없다. 왜냐하면 때로는 그렇지 않지만, 때로는 표현적 속성이 매우 두드러지고 우리의 주목을 끌어서 거기에 대한 설명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음악 작품이 존재한다난 것이 음악적 경험에 비추어 볼 때 명백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표현적 속성이 중요하게 드러나는 음악 작품에서 인지론자들은 그것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한스리크는 표현적 속성이 음악에서 전혀 필수적인 역할을 하지 않으며 음악은 전혀 다양한 일상 정서들을 표현할 수 없다는 견해로 유명하다. 이를 감안한다면 우리는 음악적 해부를 맹장처럼 잉여적인 것으로 여기게 되는 셈이다. 하지만 순수기악 음악 작품에서 표현적 속성의 기능은 그러한 작품의 다른 음악적 속성의 기능과 다르지 않다. 표현적 속성은 음악적 속성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기능은 나머지 다른 음악적 성질들과 함께 음악적으로 활용되고 음악적으로 전개 되며 음악적으로 수행되고 구축되는 것이다.저자는 정서적으로 충만한 부분을 순수 음악적 용어로, 혹은 정서적 술어를 배제한 현상적 용어로 기술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완고한 ‘순수론자’ 들은 음악을 기술함에 있어 이처럼 여러 대안적인 방식이 존재하므로 그것을 정서적으로 기술할 이유가 전혀 없다고 반대할지도 모른다. 사실 그렇게 해야 할 무슨 그거라도 있는 것일까? 저자는 그렇게 할 필요를 전혀 느끼지 못했다고 했다. 그러나 푸가의 경우 음악 이론적인 용어에 의한 기술이 음악적으로 중요한 특징들을 남김없이 드러내지만 브람스의 교향곡에서는 그렇지 않다. 물론 어떤 것에 대한 두 가지 기술이 가능하다고 해서 곧장 그중 하나는 과잉임에 분명하다는 결론이 내려지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정서적인 기술이 브람스 곡에 대한 완전한 설명으로서 잉여적이지 않다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간단히 말해, 표현적 속성이 너무 두르러진 특성이므로 그것을 무시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브람스는 표현적 속성 주의에 네온사인과 종을 달아놓아, 마치 달마시안 개의 얼룩점처럼 보인다. 만약 이 작품의 해석을 이론적인 용어로만 제시하거나 정서적인 술어를 배제한 이론적, 현상적 설명만 제세한다면 청자가 당혹스러워 할 것은 당연하다. 이 부분은 왜 강렬하게 우울하며 저 부분은 왜 밝고 행복한가? 왜 그토록 강렬하게 표현적 속성이 드러나는가? 이는 우연일 리가 없다.여기서 우리는 순수론자의 반대편인 과격한 정서론자 역시 환영받지 못하는 제안을 들고 이 소동에 뛰어들 것이다. 물론 이 교향곡의 표현적 속성은 반드시 인지되고 설명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설명이 어떤 식이어야 하는지도 분명하다. 이러한 속성은 우리를 감동시키기 위해, 혹은 우리에게 무언가를 이야기해 주기 위해 거기에 존재한다.우리가 음악 작품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을 순전히 음악 이론적 용어로 설명할 때는 설명의 어떤 부분을 위해 음악 바깥으로 나갈 필요가 없다. 용어는 전문 기술적이고 단지 음악에만 적용되며 순수한 음악 구조의 작동을 이해하기 쉽도록 도와준다. 하지만 음악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을 기술하기 위해 정서적 용어가 필요해지면, 이는 동시에 음악 외적 설명을 요구한다. 우리는 발전부에서 재현부로 가는 동안 왜 이러이러한 화성 진행이 되는지 설명하기 위해 ‘삶’에 호소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아주 즐거운 부분에서 다른 부분으로 가는 동안 왜 이러이러한 심각하게 우울한 진행이 선택되었는지 설명하기 위해서는 삶에 호소할 필요가 있다. 왜 우울한가? 확실히 순전히 음악적인 설명은 불가능하다. 우리는 주로 인간의 의식적인 상태에 대해 이름을 붙이고 있으므로, 인간 존재의 삶과 정서를 들여오는 설명이 필요하다. 기쁨에서 슬픔, 다시 기쁨으로 가는 과정은 우리에게 인가의 기쁨과 슬픔에 관한 무언가를 말해 주기 위해 의도된 것임이 분명하다. 아니면 아마 정서적 ‘사건’을 재현하거나 정서적 이야기를 말 해주는 것이다. 어떤 경우든 이는 이런저런 식으로 그것이 서술하고 있는 정서에 ‘관한’ 것이다.
‘대중 문학론’으로 본 그람시의 사상얼마 전 했었던 드라마 ‘발리에서 생긴 일’에서 그람시의 책을 배우가 들고 나와 그 작가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는 장면을 우연히 보았다. 그 때 까지만 해도 그람시라는 사람에 대해서는 전혀 몰랐기 때문에 그 이후로 그람시가 어떤 사람이고 무엇을 했는가에 대해서 자연스럽게 호기심이 갔다. 여러 매체나 책에서 그에 대해서 알아가던 와중에 그람시의 책이 과제에 포함되어 있는 것을 보고 주저 없이 그의 책을 들고 읽어 나갔다. 이 책은 제목 그대로 그람시의 모국인 이탈리아의 1910~1920년 당시의 대중 문학에 관한 고찰을 담고 있지만 책을 읽기 전과 심지어 읽는 있는 동안에도 그람시의 철학과 사상에 대한 나의 지적 호기심은 더욱 커져 갔다. 자연스럽게 그의 책 ‘대중 문학론’을 통하여 그람시의 전반적인 사상과 그의 인물됨 등으로 이 글을 전개하게 되었다.처음 책을 접하게 되었을 때 여러 분야에서 정치?철학 저술가, 혁명가로 익히 알려져 있는 그람시의 문학론은 조금 생소 했다. 그렇지만 그 생소함은 내가 그람시를 한 면으로만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람시의 ‘대중 문학론’에서 보여준 그의 이론은 그람시의 정치사상과, 철학과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따라서 문학과 문화에 대한 그람시의 생각을 모르면 그의 철학에 대해서도 제대로 알지 못한다고 말할 수 있다. 즉, ‘대중 문학론’의 책 전체적인 주제가 “이탈리아의 대중이 왜 자국의 문학을 읽지 않는가?” “그들을 위해 이탈리아의 문학이 나아가야 할 방향은 무엇인가? “를 담고 있는 바에서 알 수 있듯이 그람시의 철학과 사상은 그가 문학론에서 다루고 있는 대중을 위하는 바른 지식인의 마음 그 자체를 보여 준다고 할 수 있다. 흔히 책에는 당연히 작가의 사상과 철학이 녹아 있다고 말하지만 그의 경우에는 오히려 이 책이 그의 사상과 철학에 있어서 초석을 다지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의 사상에 초석이 된 대중 문학론에 대하여 살펴보자.대중 문학론이란 무엇인가? 그람시의 국민 대중 문학에 대한 논의는 이탈리아의 이른바 대중 작가들이 왜 그리고 어떻게 읽히느냐 하는 데에서 출발 한다. 그는 문학성이나 미학성이라는 이론적 범주에서 작품을 평가하기보다는, 어쨌든 대중에게 읽히는 작품에 주목한 것이다. 한마디로 요즈음 몇몇 비평가들처럼 선험적인 기준을 토대로 문학성이 어떻고, 작품성이 어떻고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 대중이 먼저 이고 텍스트가 먼저가 아니라 독자가 우선이라 생각한 것이다. 그람시의 관심은 구체적인 대중 독자의 정서와, 욕구가 텍스트에 어떻게 작용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때문에 이런 관심이 대중 문학에 대한 그의 입장을 명백하게 세우게 만든 것이었다. 나는 이런 그람시의 근본적인 생각이 내가 평소에 가지고 있던 생각과 완벽하게 일치하고 있음에 희열을 느끼기 시작했다. 나는 글이라는 것은 그것이 자신의 신념과 가치관을 표현하는 것이라 하더라도 어디까지나 대중이나 독자에게 공감을 얻지 못하면 생명력 잃는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것이라 말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개인적인 내 생각으론 오늘날 수많은 신문이나 책들이 독자의 쌍방향 커뮤니케이션을 유도한다고 할지라도 그런 글들을 접하는 우리에겐 앞에 언급한 독자가 중심이 되는 글을 찾아보기엔 역부족처럼 보인다. 예를 들면 앞서 판단이 내려져 나오는 수많은 신문들과, ‘맨땅에 헤딩하기’ ‘브레인 파워’ 등등의 제목을 가지고 나오는, 마치 작가의 생각이나 방법이 대단하다는 듯이 독자를 설득하는 이런 책들과, 온갖 추상적인 미사여구로 자신의 지식을 뽐내기에 바쁜 글들이 나에겐 그러하다는 것이다. 그람시는 대중 문학이란 대중을 매혹하는, 대중이 선택하는 글이라고 간단히 정의 내렸다. 그람시가 대중문학에 주목하고 이렇게 정의 내린 이유는 가히 심오하다. 그는 무엇보다 대중이 사회의 중추를 이룬다는 20세기 초 당시로는 대단히 진보적이고 선구자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생각대로 대중이 사회의 중추임에도 불구하고 이탈리아 역사에서는 대중이 헤게모니를 쥔 적이 한번도 없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따라서 그는 대중이 선택하는 것만이 대중 문학이라 강조 하고 싶었던 것이다. 책에서 보면 그는 이탈리아 대표 작가로 손꼽히지만 지식인의 지배 의식이 엿보이는 만초니를 대중성 없는 글의 표본이라 하며 비판하는데 이것은 매우 의미심장한 것이다.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두드러지게 본 두 가지 중에 첫 번째 점은 그람시는 그의 대중 문학이론이 철저하게 밑으로부터의 문학 이론으로 자리 잡기를 바랐다는 점이다. 그람시가 본 이탈리아 대중 문학의 가장 큰 문제점은 바로 위로부터의 대중 문학에 머무르고 있다는 점이었다. 1900년 이전에 봉건 사회가 해체 되었다 하더라도 유럽의 대부분의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이탈리아는 지배-피지배의 개념이 남아있었다. 따라서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가 만연해 있는 상황에 지식인들은 사회 흐름에 반하는 작업이 문화의 본질적인 개혁으로 이어져 지도 집단의 정치적 지배권의 뿌리를 근본적으로 흔들고 그로 인해 자신에게 다가올 불이익이나 부당한 처벌을 우려했다. 그렇기 때문에 대중에게 다가가기 보다는 오히려 대중과 근본적으로 분리되는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때문에 그람시는 이를 바로잡는 것이 대중 문학을 바로잡는 기본적인 해결 방법이라 생각한 것이다. 이 점은 지금의 우리 상황과도 맞아 떨어진다. 지금의 우리는 비록 계급 사회에 살고 있지는 않지만 자본에 따른 보이지 않는 권력은 엄연히 존재 하고 있다. 자본주의에 대해 비판하려는 것은 아니다. 난 오히려 자본주의를 어느 정도 인정해야 하는 입장이다. 하지만 정경유착에 따른 권력구조에서 온 인위적인 기업 이미지 높이기 같은 글과 광고들은 과거의 상황과 많은 부분 공통적이지 않을까? 그의 글에서 두드러진 것 중 두 번째 점은 그가 말하는 이론들이 협소하게 사회학이나 문학에 국한되어 주창한 것이 아니라 여러 방대한 분야에 걸쳐서 대중 문학론을 거론했다는 사실이다. 그람시가 철학자이고 정치가이고 사상가 인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바이기 때문에 그람시를 웬만큼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가 대중 문학 이론에서 사회, 역사, 정치의 많은 부분들과 연관시켜 고찰 할 것이라는 건 누구나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놀라운 점은 그의 대중 문학 이론은 그 차원을 넘어 음악분야까지도 아우른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그람시는 다른 나라에서는 예술적 표현이 대중 소설의 몫으로 주어진 반면 이탈리아 대중 문화에서는 그 몫을 음악이 어느 정도 대체 했다는 것과 음악적 재능이 작가에게 부족한 대중성을 어느 정도 대체해 주었다는 것을 지적했다. 더 나아가 그는 오페라나 이탈리아의 명성있는 음악거장들이 끼친 영향들을 대중들이 문학을 읽는 경향과 연관지어 대중 문학이론은 만들었다. 그람시가 이런 많은 분야에 걸쳐 만든 대중 문학이론을 읽고 있자면 어디선가 들어본 ‘모든 학문은 서로 통한다’ 라는 말이 자연스레 이해되어 고개를 끄덕이게 만든다. 한편 그람시의 유명한 말 중에 이런 것이 있다. “모든 권력은 지식과 도덕성에서 나온다.” 옥중에서 오랜 시간을 보낸 그람시이기 때문에 당시 권력에 대한 반감으로 이러한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는 몰라도 이 말은 그의 인물됨을 알 수 있는 가장 대표적인 명언이라 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 생각하기에도 난 사람이라면 누구나 어떤 형태로든 도덕적 가치를 중요시해야 한다고 생각 한다. 더구나 그것이 지식인일 경우엔 더더욱 그렇다. 그람시는 문학의 미적 가치를 말할 때 항상 도덕적 가치와 결부시켰고, 그의 사상의 전반적인 부분에는 항상 약자를 생각하고 도덕적 가치를 고려하는 휴머니즘이 보인다. 따라서 그가 대중 문학이론에서 보여준 학문적 성과도 대단하다고 여겨지지만 그것을 주창하기까지 바탕이 된 그가 가진 기본적인 인물됨 또한 대단하다고 여겨진다.
뇌종양의 오늘과 내일Research for Encephaloma뇌종양 이란?두개(頭蓋) 안에 생기는 종양. 뇌실질(腦實質)에서 생기는 종양 이외에도 뇌막, 뇌하수체(腦下垂體) 등의 내분비선, 뇌신경에 발생하는 종양 등을 모두 포함한다. 두개 내 종양(頭蓋內腫瘍)은 원발성(原發性)인 것과 전이성(轉移性)인 것으로 나뉜다.뇌 종양의 증세뇌종양의 증세는 두개내압고진증(頭蓋內壓高進症)과 침해된 뇌 부분에 상당하는 신경탈락증세 또는 자극증세를 나타낸다. 두개내압고진증이란 두통 ·구토 ·울혈유두(鬱血乳頭) 등으로, 옛날부터 두개내종양의 세 가지 주요한 증세로 알려져 있다. 그 밖에 경련발작 ·의식장애 ·정신장애를 수반하는 일이 많다.뇌종양의 종류와 비율(5%)7. 기타(20%) 악성6. 전이성 뇌종양(7%) 비교적 양성5. 선천성 종양(8%) 양성4. 신경초종(10%) 양성3. 뇌하수체 선종(15%) 양성2. 수막종(35%) 악성 (20%) 비교적 양성 (20%) 악성 (40%) 악성 (20%)1. 신경교종 1.1 성상세포종 1.2 악성성상세포종 1.3 교모세포종 1.4 기타뇌종양의 예후뇌종양 전체의 5년 생존율은 65%를 상회하며, 양성 뇌종양인 수막종은 95%, 뇌하수체 선종은 97%, 신경초종은 94%이다. 한편, 신경교종 전체는 38%, 가장 악성도가 높은 교모세포종은 7%, 그 다음으로 악성도가 높은 악성성상세포종은 24%, 성상세포종이 61%정도입니다. 또한 비교적 흔한 전이성 뇌종양 역시 6%에 지나지 않아 악성 뇌종양의 치료는 앞으로 풀어야할 중요한 과제이다.뇌종양 발병의 세계적 보고통계 분석과 그 원인 추론 ( 1 )그래프에 따르면 세계적 뇌종양 보고는 1945년 까지는 보고 되지 않았고 1945년 이후에 점차 보고되기 시작했다. 1945~1960년 까지 그 수가 점차 증가하기 시작하여 1950년 후반에는 그 수가 만명에 육박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시작에 불과 하였다. 1970년에 접어 들면서 그 수는 4만으로 훌쩍뛰어 5년 주기로 매번 2만명씩 증가하는 추세를 보이기 시작했다.통계 분석과 그 원인 추론 ( 2 )그 원인으로는 3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 세계적으로 뇌종양에 대한 정의가 확립되지 않아 발병을 했으나 그 발병 여부를 판단 할 수 없어 그 수를 통계하지 못했던 부분을 간과하였다. 또한 뇌종양이 학술화 되었으나 그것이 전 세계적으로 지금처럼 널리 알려져 있지 않아 보고되지 않았기 때문을 그 이유로 들 수 있다.통계분석과 그 원인 분석 ( 3 )두번째로 인구 고령화를 들 수 있다. 고령화 사회에 접어들면서 인구가 많아지게 되면 그에 따라 질병 발병률이 높아지는 – 특히 노령화 인구에서 더 많다 - 경향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세치료법의 발달로 암 환자의 평균 수명이 길 어 지면서 두개강으로 암이 전이되는 경우가 전체 암 환자의 20~30%로 급증 하고 있는 추세다. 다른 장기에서 생긴 암세포가 뇌까지 퍼진 전이성 뇌 종양은 환자 상태에 따라 수술이 어려운 경우가 많다. 더구나 여러 개의 전이가 다발적으로 있을 경우 수술적 치료는 더 어려워진다.뇌종양의 진단과 치료진단은 신경학적 진단이 중요하며, 보조진단으로는 두개(頭蓋) ·뇌혈관(腦血管) ·기뇌(氣腦)를 X선 촬영하는 것 외에 뇌파나 초음파 검사, 동위원소를 써서 검사하는 뇌스캐닝 등을 적절히 사용함으로써 정확한 진단을 할 수 있다 치료는 수술요법을 원칙으로 하지만, 신경교종 등의 악성종양은 수술에 의한 치유는 어렵고, 그 밖에 전체 척출(剔出)이 곤란한 송과선종은 방사선요법을 겸하여 쓰는 경우가 많다. 또한 화학요법도 있다.앞으로의 예상과 해결 방법그래프는 1970년 부터 기하 급수 적으로 그 수가 증가하고 있다. 이러한 발병 추세는 우리의 식생활, 환경의 오염, 과도한 스트레스, 생활의 여유 부족 등의 여러 이유가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발발하는 경우도 많다고 알려져 있다. 앞으로의 사회는 더욱 고도화 될 것이며 인구도 증가할 것이다. 따라서 발병율을 더욱 높아질 것으로 예상된다.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 의학기술이 이 수를 줄이는데 한 몫 할지 모르나 이러한 질병의 근본적인 예방방안은 우리환경과 생활 습관을 바꾸는데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nameOfApplication=Show}
‘육식의 종말’ 마침 어디선가 들어본 제목 이었다. 주저없이 집어 들어 읽기 시작한 나는 표지와 목차를 보고 약간은 실망감이 들기 시작했다. 왠지 제목을 떠올리면 육식에 대한 철학적인 고찰이나 아니면 육식이라는 폭넓은 주제를 사회학적으로 다루었을 것 같은 기대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육식 이라기보다는 집중적으로 ‘소’ 에 대한 역사와 의미를 다루고 있는 이 책은 성급한 결론을 내린 것 빼고는 결과적으로 나에게 만족감을 주기에 충분했다. 개인적으로 난 생명이란 매우 소중한 가치이며 생명의 희생에 대한 연민을 품는 것이 인간으로서 당연한 일이라고 확신한다. 우리는 소고기가 우리의 식탁에 오르는 것은 단지 어디선가 소를 잡아 정육점에 들여오고, 그것을 돈을 내고 사오는 것이라는 것 이외에 별다른 생각을 하지 않는다. 가끔 불쌍하다고 생각하지만 그 생각은 고기가 우리의 입속에 들어와 미각을 자극하는 사이에 언제 그랬냐는 듯 가볍게 사라진다. 나 또한 그래왔으니까... 이 책의 저자 제레미 리프킨 (Jeremy rifkin)은 소가 도살되는 공정을 자세하고 적나라하게 보여줌으로써 우리가 고기를 먹기 위해 하는 일들이 얼마나 잔인하며 상업성에 치우쳐 있는지를 객관적으로 보여준다. 그것은 생명의 가치를 이야기 하는 것 자체가 무안해질 만큼 기계적이고 일률적인 작업이었다. 고기를 얻기 위해 우리가 얼마나 인간성을 상실해 가는가를 알려면 그 전에 우리가 고기를 얻기 위해 어떤 짓을 하고 있는 가를 알아야 한다. 우리는 고기를 얻기 위해 과연 무엇을 하고 있는가? 그것이 얼마나 비인간적인 것인가?역사적으로 볼 때 아주 오래 전부터 소는 인류의 생존을 담당하는데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그 역할은 우리의 생존에 직결되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생명의 외경과 존중으로 연결 되었다. 이 현상은 전 세계에서 고루 나타난 현상으로 페니키아, 헤브라이, 수메르, 그리스, 로마, 이탈리아, 인도 등 에서는 소가 그 나라 국민들에게 신과 같은 의미로 생각되었다고 한다. 이것은 이탈리아의 어원이 ‘소의 땅’ 이라는 점을 보아도 알 수 있다. 고대의 한 성가(聖歌)에서는 소에게 이런 경의를 표했다. “옥수수를 심고 농토를 풍요롭게 하면서 신성한 초원을 터벅터벅 걸어가는 위대하고 숭고한 소여” 더 나아가 소의대한 외경은 종교적인 역할까지 담당하게 되었다. 기도교가 생겨날 당시 기도교에 가장 위협적인 종교는 다름 아닌 소를 숭배하는 미트라(Mithra)였다. 미트라는 원래 고대 아리아에서 빛의 신이었는데 당시에 대중적인 소 숭배의식과 혼합 되었다. 이 미트라교는 2세기 말 로마의 공식 종교로 선포되었을 정도였다. 기도교에서 악마를 소를 연상시키는 모습으로 묘사함으로써 기도교와 미트라교는 기도교의 승리로 끝났지만 기도교가 이 미트라교에 위협을 느꼈다는 이 사실은 소 숭배의식이 과거에서부터 얼마나 사람들에게 뿌리 깊게 박혀있었는지를 보여준다. 과거에 별다른 음식꺼리가 없는 사람들에게는 이렇게 인간의 ‘식’을 담당하는 소가 숭배되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런 외경 의식은 인간의 삶이 조금씩 나아지면서 점차 변하기 시작했다. 원래 전 세계에 퍼져있던 소를 이용하던 민족은 생명을 다루는 사제와 사냥을 담당하던 전사로 구성되어 있었다. 신분 계급상 사제는 전사의 사냥을 기원해 주는 더 높은 위치에 자리 잡고 있었는데 그런 신분의 구조는 잉여 생산물들이 생기면서 자연스럽게 사냥을 담당하는 사냥꾼들에게 더 강한 힘을 실어 주었다. 잉여 생산물이 생기면서 더 이상 고기에 대한 소중함은 사라졌고 과거부터 자리 잡고 있던 외경의식 또한 쇠퇴하게 되었다. 이제부터는 어떤 집단이 혹은 누가 소를 많이 차치하여 잉여생산물을 남기는 지가 더 큰 문제로 떠오른 것이다.시간이 흐를수록 소를 차지한다는 의미는 점차 부를 소유한다는 의미와 일치해 가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쇠고기 소비량이 가장 많은 중세 영국에서는 상류층이라면 누구나 쇠고기를 쌓아놓고 먹는 것이 자신들의 부유한 삶을 보여주는 관습처럼 되었고 쇠고기를 좋아하는 민족적 특징이 영국이라는 나라를 좀 더 부유하게 보여주는 징표와 같이 생각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상류층에 속하고 싶어서인지 아니면 원래 그들이 고기를 좋아하는 민족이라 그런지, 이런 흐름은 초기에는 상류층에만 국한된 모습이었으나 곧 평민들도 이런 상류층의 무절제하고 사치성 짙은 고기 소비를 따라하기 시작했다. 영국의 눈부신 산업 발달이 평민계층에게도 그런 소비 생활을 가능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고기는 부를 상징하는 가장 큰 의미였다. 자본을 뜻하는 ‘capital'의 어원이 ’cattle'과 동일하다는 것은 이 점을 잘 보여주는 한 예 이다. 따라서 고기소비와 경제 성장은 서로 밀접한 관계였다. 영국의 국가 경제력이 강해지면서 고기 소비의 욕구는 증가하였지만 이미 영국 내에서는 소를 방목할 토지가 바닥난 상태였다. 이것을 해소하기 위해 영국은 식민지를 개척하고 좀 더 넓은 방목지에 자신들의 소를 방목하는 등 고기를 얻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하였고 많은 양의 고기를 확보한다는 것은 또 다른 자본력을 낳아 더 많은 고기를 소비하게 되는 악순환을 낳게 했다. 나에게 이런 시대적 흐름은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다. 난 단순히 공장과 회사가 설립되면서 자본력이 커지며 그로인해 산업이 발달하면서 세계 경제가 발달해 왔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 점이 큰 역할을 했던 건 사실이었지만 부를 상징하는 소와 자본과의 유착이 세계경제를 좌지우지 했다는 것은 전혀 몰랐던 사실 이었기 때문이다. 너무 빠른 성장과 발전은 항상 문제를 낳기 마련이다. 책을 읽으면서도 걱정이 되었지만 아니나 다를까, 더 많은 소를 확보하기 위한 인간의 욕심과 세계 기업간의 산업적 경쟁은 소의 생명뿐만 아니라 인간의 생명까지도 무자비하게 다루는 행태를 낳게 되었다.사실 과거에는 소를 도살하는 행위가 인간의 심리에 적잖은 영향을 끼쳤으므로 애초에 소와 인간의 유대감을 없애 도살할 때의 죄책감을 감소시키기 위해 키울 때부터 눈에서 안 보이는 장벽을 쳐 기르거나 , 도살하고 난 뒤 그 칼을 처벌함으로 책임을 회피하는 방법으로 감정을 극복해왔다. 그러나 현재는 그런 감정을 언급하기에는 부를 채우려는 욕심이 너무 커져 있다. 현재의 인간은 소는 곧 고기라 생각한다. 때문에 ‘어떻게 하면 더 많은 고기를 얻을 수 있을까’ 를 생각한 끝에 소의 건강보다는 최대한 살찌울 수 있는 방법을 먼저 생각하게 된다. 이 시점부터 생명의 가치는 무자비하게 다뤄지기 시작한다. 고지방 고기를 얻기 위해 최대한 좁은 지역에서 대량생산된 고지방이 옥수수 사료를 주입한다. 때로는 지방의 비율을 더욱 높이기 위해 인공적으로 합성한 유기화학물질을 사료에 섞기도 한다. 사료비용을 줄이기 위해 쓰레기를 섞기도 하며 ‘소를 위한 주사’ 는 양분을 모두 지방으로 바꾸는 역할을 훌륭하게 해낸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전 세계에서 재배되는 곡물의 70%는 소를 비대하게 만들기 위해 사료로 먹여진다는 사실이다. 이 양을 인간이 먹는다면 10억 명의 사람이 배불리 먹을 수 있는 양이 된다. 아프리카와 개발도상국에선 지금도 살기위해 쓰레기를 뒤지는 사람들이 넘치는 반면 인류의 복지를 외치는 소위 강대국 이라하는 나라에서 주도적으로 고지방 고기를 얻기 위해 사료에 혈안이 되어있는 상황은 무척 아이러니 한 상황이 아닌가? 현대의 소가 도살되는 공정은 놀라움을 넘어 우리를 매우 당혹케 한다. 10만 에이커가 넘는 공장에 일단 소가 들어가게 되면 인간이라곤 기계를 조작하는 한 두명 밖에 없는 큰 벨트에 들어가게 된다. 일괄적으로 소들의 머리와 꼬리는 긴 칼날에 절단된다. 소의 육질을 위해 빨대와 같은 긴 쇠꼬챙이로 심장을 관통하고 그렇게 하여 피가 다 빠져나간 소는 거대한 톱날에 의해 등뼈가 갈라진다. 주위에 인간이라곤 아무도 없으므로 잔인하거나 연민을 느껴줄 생물체는 아무도 없다. 죽기를 기다리는 또 다른 소만이 멀뚱히 쳐다볼 뿐. 그렇게 해체된 일명 ‘최상의 육질은’ 똑같은 규격에 맞추어 상자에 담김으로 모든 공정이 끝이 난다. 한 가지 언급하자면 15초에 한 마리씩 모든 부위가 해체되어 규격에 담긴다고 하니 이 얼마나 빠르고 능률적인 작업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