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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청동기 시대의 묘제 또는 무덤에 관하여(지석묘-고인돌을 중심으로) 평가A+최고예요
    청동기 시대의 묘제-고인돌(지석묘)을 중심으로-------------- 목 차머리말Ⅰ.청동기 시대 묘제의 종류- 적석총, 석관묘, 토광묘, 옹관묘, 지석묘Ⅱ.고인돌(지석묘)의 특징1.거석문화와 고인돌2.고인돌의 개념 및 분포3.고인돌의 종류4.고인돌의 세부구조5.고인돌의 축조과정6.우리나라의 고인돌*요령지역의 고인돌(석붕石棚)과 북한의 고인돌7.고인돌 출토유물8.그 밖의 고인돌의 특징Ⅲ. 고인돌로 본 청동기 시대1.청동기의 보급과 계급 발생2.청동기 사회의 모습 추론맺음말- 앞으로의 지석묘 연구 방향머리말기원전 13세기를 전후하여 대륙으로부터 새로운 청동기문화의 기운이 싹트기 시작하면서 우리나라에서도 서북지방에서부터 고인돌과 같은 새로운 무덤이 나타나게 된다. 앞서 신석기시대에도 일부 해안지방 등지에서 간단한 매장유구가 확인된 바 있으나 이들은 구조물이라기보다는 시체를 묻은 뒤 둘레의 돌을 긁어모아 덮은 정도의 간단한 돌무지에 지나지 않았다.따라서 우리나라 선사시대에 있어서 본격적인 무덤의 조성은 바로 청동기시대부터이며 이러한 무덤의 출현은 선사시대 사회에 나타난 새로운 정신문화의 변화라고 할 수 있다.이 시대의 무덤 유적으로는 고인돌 외에도 돌무지무덤, 돌널무덤, 움무덤, 독무덤 등을 들 수 있다. 이들 무덤들은 지역이나 시기에 따라 각기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며 거기에서 출토되는 유물의 양상도 무덤의 성격에 따라 각기 독특한 갖춤새와 특성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청동기 시대의 대표적 무덤은 고인돌이라 불리우는 지석묘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지석묘를 중심으로 청동기 시대의 묘제에 관하여 알아 보고자 한다.Ⅰ.청동기 시대의 묘제의 종류1.적석총(積石塚, 돌무지 무덤)돌무지무덤은 구덩이를 파거나 구덩이 없이 시체를 놓고 그 위에 흙을 덮는 대신 돌을 쌍은 것으로 토광묘와 함께 가장 원시적이고 간단한 묘제이다. 특히 춥고 바람이 강한 시베리아 초원 지대에서 널리 보급되어 바이칼 지방에서는 신석기 시대 초기부터 나타난 것으로 우리나라 신석기 시대의 돌무지무덤이 시베구분된다. 직치 독무덤은 수직으로 세우고 돌뚜껑을 덮은 것으로, 발견된 대부분의 독무덤이 이에 해당한다. 남북과 동서를 장축으로 한 것이 지방마다 뒤섞여 있으며, 길이나 직경으로 보아 어른의 신전장이나 굴장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어른의 세골장이 아니면, 어린아이들의 관으로 생각되고 있다. 또한 부장품이 거의 없는것 보아 소아장의 용도로 쓰였을 가능성이 높다.관으로 이용되는 항아리나 독이 한 개로 되고 뚜껑을 막은 것을 단옹관(單甕棺), 항아리나 독 두 개의 구부(口部)를 맞추어서 뉘인 것을 합구옹관(合口甕棺), 그리고 세 개를 이어서 만든 것을 삼합구옹관(三合口甕棺)이라고 한다.독무덤은 집자리와 인접된 곳이나 한 묘역의 외곽에서 발견되고 있다. 한 묘역인 경우는 부여 송국리처럼 돌널무덤과 움무덤 군집에서 4m 이상 떨어진 낮은 쪽에 배치되어 있다. 독무덤은 군집을 이루기보다는 단독으로 발견된 경우가 많으나 전북 익산 석천리처럼 1m 거리를 두고 3기가 나란히 배치된 것도 있다. 성인용의 무덤과 한 묘역을 형성하고 있는 소아장의 독무덤에 대한 분석은 당시의 사회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이다.5.지석묘(支石墓, 고인돌)Ⅱ.고인돌(지석묘)의 특징1.거석문화와 고인돌인류사회의 발전과정에서 평등사회가 계층사회로 넘어가는 시기는 지역적 환경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으나, 대략 신석기 후기 또는 청동기이다. 이 시기(우리나라의 경우 BC 2000 ~ BC 800년경)를 전후하여 전세계적인 문화 현상이 일어나는데, 이는 엄청난 노동력이 투입되는 돌로만든 거대한 건축물이나 기념물의 축조이다.영국 갤런디시 스톤 유적용인 남사면 창리 선돌이를 거석문화라 하는데, 이는 인간이 어떤 목적의식을 가지고, 자연석 또는 가공한 돌로 구조물을 축조하여 숭배의 대상물이나 무덤으로 이용한 문화를 말한다. 거석이란 하나의 구조물이나 기념물 또는 그 일부로 사용된 돌을 말하며, 거석물은 인간의 행위에 의해 직접적인 대상물 즉, 돌로 만든 구조물을 뜻한다. 거석문화가 돌을 이용한 구조물을 총칭한다고 표적인 무덤인 지석묘가 북방의 청동기 문화와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에 요령지방의 석관묘에서 변화 발전하였다는 파생설이다. 이 설은 형태의 변화에서 설득력이 있는 것으로 엄밀히 말해 자생설에 포함될 수 있는 설이다. 이는 석관묘의 개석 1매석이 대형화되어 지상에 드러나면 개석식 지석묘가 되고, 다시 지하의 석실이 지상에 노출되면 탁자식 지석묘 형태가 된다. 형태상의 유사점에서 상당한 설득력이 있지만 중국 요령지방의 주변 지역과 시베리아 등 북방 지역에서 서유럽 사이에 지석묘가 분포되어 있지 않다.지석묘의 변천이나 편년에 대해서도 아직 정확한 정설은 없다. 한반도 북부에서 북방식 지석묘가 나타나 그것이 점차 남부로 퍼지고, 이로부터 개석식 지석묘가 파생되었다고 것이 가장 전통적인 견해이다. 그러나 남부에만 있는 남방식 지석묘는 말기적 형식으로 보는 설도 있다. 또한 개석식 지석묘를 원초적인 것으로 보고 이를 기반으로 하여 북부에서는 북방식 지석묘로, 남부에서는 남방식 지석묘로 발전 하였다는 하는 제 3의 설도 있다. 즉 북한에서 침촌형(황해북도 황주군 침촌리에서 따옴. 변형 지석묘)과 오덕형(황해북도 연탄군 오덕리에서 따옴. 전형 지석묘)으로 나누고 변형 지석묘(남방식/개석식)에서 전형 지석묘(북방식)로 발전해 나갔다고 보는 견해가 바로 그것이다.지석묘의 절대연대나 상대연대 또한 아직 체계적으로 수립되지 않은 실정이다. 지석묘의 축조 상한은 BC 2000년에서부터 BC 800년 사이로 추정되고 있는데, 보는 사람들에 따라서 견해차가 크다. 지석묘 축조의 하한도 BC 300년 정도까지가 일반적이나, 지역에 따라서 기원전후까지 축조된 것으로 보기까지도 하는 증 하한 문제 역시 아직 의문의 여지가 많다. 아직까지 학계의 주류는 BC 600~300년으로 보는것 같다. 하지만 이러한 지석묘의 소멸은 기본적으로 강력한 지도자의 등장과 선진문명의 수용이라는 사회적 변화에 기인한 것은 틀림없다.지석묘에 대한 연대문제는 주로 출토유물 중 돌검을 통해 연구되어 오고 있다. 종래 는 없지만, 최근 전북 진안 여의곡 고인돌 주변에서 200m에 이르는 덮개돌 이동로로 추정되는 흔적이 조사되었다. 이는 너비가 150~200cm의 간격을 두고 철도처럼 나란하게 열 지어 나타났다. 이 길의 양단에는 길이 3~4m, 깊이 10cm 내외의 흔적들이 여러 겹을 이루고 있었다. 이 형태는 고인돌의 덮개돌 운반을 추정케 한다. 먼저 직경 10cm내외의 통나무를 3~4m로 자른 후 바닥에 레일처럼 깔고 그 위에 가로지를 통나무를 여러 개 배치한 후 올려진 덮개돌을 끌어 운반하는 방법으로 추정된다. 여기에는 여러 개의 둥근 통나무를 깔고 떼어낸 덮개돌을 올려놓은 다음 끈으로 묶어 끌면서 한편으로 지렛대를 이용했을 것이다. 무게가 가볍고 가까운 거리에는 지렛대식이나 목도식, 먼거리는 끌기식이 쓰여졌을 것이다. 강을 끼고 있는 곳에서는 뗏목을 이용하고, 추운 지역에서는 얼음판을 이용해 운반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4)덮개돌을 올리기운반되어온 덮개돌은 지상이나 지하의 무덤방 또는 받침돌에 적당히 흙을 경사지게 돋우고 그 위로 덮개돌을 끌어올린 후 흙을 제거하였다고 추정된다. 흙을 경사지게 돋우고 끌어올린 흔적은 덮개돌과 받침돌 사이 또는 뚜껑돌 위에 남아있는 압착된 흙으로 증명된다.5)거족적 행사로 축조청동기 시대에는 일반적으로 어른 2명, 어린이 3명에서 5명 정도가 한 가정을 이루었다. 고인돌 축조를 위해 한 가정에서 동원 될 수 있는 노동력은 1∼2명이었다. 따라서 1000명에서 1500명 이상의 인구수를 가진 집단이어야 고인돌을 만들 수 있었다. 고인돌을 만드는 과정은 장례 의식이기도 했지만 부족의 거족적 행사이기도 했다. 거대한 덮개돌을 운반하여 고인돌을 만들기 위해서는 고인(故人)의 혈연집단 뿐 아니라 이웃 혈연이나 부족 집단의 인력까지 동원해야 했다. 이러한 사실로 볼 때 대규모의 노동력을 동원 할 수 있는 사회적 협력 체계와 강력한 지배력이 청동기 시대에 존재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이 행위는 공동체사회의 힘의 결집과 협동 단결을 이루는데, 큰 역지역의 고인돌중국의 고인돌 분포 수는 절강성에 50여기와 요령성, 길림성에 300여기이다. 중국 절강성 고인돌은 성의 남부인 서안지역에 집중되어 있는데, 대석산에 36기가 밀집분포되어 있다. 이 고인돌은 모두 구릉 정상부나 야산 능성이에 받침돌이 있는 기반식 고인돌과 개석식 고인돌이다. 기반식 고인돌만 완전히 남아있고 나머지는 파괴된 상태이다. 발굴된 무덤방은 장대판상석을 잇대어 세워진 형태로 지하나 낮은 봉토에 묻혀져 있다. 외형상 제주도 고인돌과 유사하다. 중국 동북지방은 우리나라 청동기시대 문화와 밀접한 관계를 가진 지역으로, 요령성과 길림성에서 고인돌이 발견되고 있다. 고인돌은 아직 요하 서쪽 지역에서는 발견된 바 없으며, 요동반도지역에 집중 분포되어 있다.여기의 고인돌은 탁자식 고인돌이 특징적이다. 가장 큰 고인돌은 개주의 석붕산 고인돌로 길이가 860cm, 너비가 570~510cm, 두께가 40~50cm의 넓고 얇은 판돌로 덮개돌을 하고 있고, 그 밑에는 길이 275cm, 너비 210cm, 높이 233cm의 무덤방이 지상에 드러나 있는 탁자식 고인돌이다. 이 형태와 규모는 황해 노암리나 관산리 고인돌과 비교된다. 그리고 개석식에 속한 대석개묘는 발해만 연안지역에 집중되어 발견되고 있다.고조선의 세력권이나 영역과 관련해서는 요서지역보다 요동지역이 주목된다. 그것은 요동지역의 지석묘를 비롯한 청동기문화가 한반도 청동기문화와 직결되고, 또 요서 지역과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우리 학계에서는 고조선 문화를 전기와 후기로 나누어 설명하는데, 그 가운데 전기 문화는 기원전 1,000년기 초에 나타난 초기 비파형 동검문화의 발전에 기초하여 기원전 8∼7세기경에 형성되었고 이때 초기 고조선 사회가 성립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초기 고조선 시기에는 탁자식(북방식) 고인돌이 하나의 일정한 세력권을 보여준다. 이 가운데 요동지역의 고인돌은 중국학계에서는 석붕(石棚)이라고 하는데, 모두 탁자식(북방식)으로서 한반도 서북지방의 탁자식(북방식, 오덕리형) 고인돌과 기본적으로있다.
    인문/어학| 2008.11.12| 12페이지| 3,000원| 조회(4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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