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도 영유권 분쟁을 통해본 한?일 시민의 의식차이와 정부의 대응 비교Ⅰ. 서론2005년 일본 시네마현에서 독도의 ‘다케시마’ 표기로 인해 불거진 독도의 영유권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그 여파로 인해 연일 매스컴에서는 독도에 관한 기사거리가 넘쳐흐르고 모든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면서 매일 헤드라인을 장식하였다.어이없는 일본 측의 주장에 분개한 우리나라 시민들은 서울 시청광장을 꽉 메워 촛불집회시위를 벌이고, 전국의 네티즌들은 일본 정부의 홈페이지를 마비시켜놓는가 하면 열띤 서명운동으로 독도를 빼앗길 수 없다는 강한 집념을 다양하고 하나 된 힘으로 보여주었다.이에 반해 일본 시민들은 한국의 반응에 비해 너무나도 태연하고 조용했으며 일부는 전혀 관심조차 없다는 듯 우리와는 사뭇 다른 정반대의 모습들이 간간히 해외뉴스에 보도되었다.한국 시민들은 이러한 일본 시민의 반응과 우리 민족의 단결력에 막연한 우월감과 성취감을 느끼면서 당연히 독도가 한국땅이라는 확신을 안고 그렇게 독도의 문제는 일단락되는 것으로 마무리가 되었다.허나 일본 정부와 우익단체의 지속적인 영토 쟁탈 추진으로 인해 결국 2005년 2월 16일 ‘다케시마의 날’ 조례안의 가결과 함께 독도는 일본의 영토라는 것이 명확해지고 이제는 되돌릴 수 없는 상황까지 오고 말았다. )하지만 시민들은 이에 분개하거나 강력한 저항이나 반응 없이 그저 먼 산 바라보듯 안타까워만 했을 뿐 처음의 그토록 뜨거웠던 반응은 찾아볼 수 없었다.처음에 독도가 일본땅이라 망언한 일본 측이 이해되지 않았지만 막연히 독도가 우리땅이라고 생각하면서 아무런 타당한 논리조차 펴지 못한 채 넋놓고 앉아 눈앞에서 내 것을 빼앗긴 우둔한 한국 정부나 시민들의 모습이 도저히 내 생각으로는 납득이 되지 않았다. 앉아서 불구경하듯 빼앗기는, 어쩌면 손발이 전혀 맞지 않는 모습을 보니 어이없는 웃음만 나올 뿐이었다.독도 영유권 분쟁을 통해 일본 정부 측의 적극적이고 정돈된 사고에 논리적인 대응과 우리나라 정부의 감정적이고 안일한 태도의 근원과, 일본시 중시한다. 그래서 우리는 사람을 처음 만났을 때 어떤 성(姓)을 가졌는지, 어느 본가 소속인지를 먼저 묻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일본은 다르다. 그들은 씨(氏)가 무엇이냐를 먼저 묻는다. 일본의 사회구조를 관심있게 보고 있는 많은 사람들은 일본사회를 지연사회로 보는 견해가 적지 않다.) 그들에게는 직장이나 학교에서 형성된 동료들이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이러한 특징은 결혼 문화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데, 한국에서는 친족이 결혼식 하객의 주류인 반면(물론 학교 동료나 직장 동료도 있긴 하지만 이는 일본 문화의 영향으로 볼 수 있다) 일본에서는 현재 자신의 직장 동료나 학교 동료가 하객의 주류이다.)2) 정치체계의 기원한국과 일본의 정치형태의 가장 큰 유사점은 계파정치와 금권정치로 표현할 수 있다.한국 정치의 경우 일본정치의 영향을 많이 받은 편인데 이전까지 유행했던 동교동계, 무슨계 이런식의 정치형태는 일본의 계파정치를 그대로 모방한 형태이다. 또한 금권을 통해 소속 의원들이나 조직을 관리하고 세를 넓히는 것 또한 일본정치와 맥이 닿아 있다. 차이점은 양 국가의 기본 국가체제가 대통령제와 내각제로 갈리기 때문에 그것에서 파생되는 차이인데, 우리나라의 경우 대통령 1인의 영향력이 강한 반면일본의 경우 수상 1인의 영향력보다는 계파의 영향력이 훨씬 더 큰 편이다.2. 시민의식과 정치체계에서 나타나는 차이의 이유1) 시민의식에 나타나는 차이의 이유한국인과 일본인의 집단의식의 차이점이 나타난 이유는 선조들의 삶의 방식이 상이하다는 데에서 찾을 수 있다. 고려시대까지만 해도 우리나라는 남녀가 비교적 평등했으며 장자의 역할 역시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그러나 고려 말기 원나라로부터 성리학이 들어오면서 우리는 성리학을 인과 예의 실현을 위한 도덕적 수양의 개념으로 받아들였으며 종묘와 사직을 바로 하는 기틀로 생각하였다. 그러면서 우리는 제사를 중시하게 되었고 이 제사를 모시는 권한을 장자에게 복속시켰다.) 이는 철저한 남녀 차별의 시행과 장자 우위를 합리화 시켰고 혈한 경향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봉건적인 장원제를 병농분리(무라기리)로 변화시키면서 상공업자들을 농촌에서 떠나게 한 후 그들을 같은 직업 단위끼리 묶어 거주하게 하는 정책과 일본인의 무의식 속에 집터를 중요시하는 경향과 맞물려 상승작용을 하였다. 특히 이 시대는 장군(일본말로 쇼군; 즉 사무라이 시대를 말한다.)시대이기 때문에 소수의 지도층들은 나뉘어져 있는 촌(무라)을 합리적으로 다스리기 위해서 각 촌(무라)이 할당된 세금만 내면 자율권을 주었다. 그리하여 자신의 삶의 기반인 집터 유지는 자신들의 가업을 물려받아야 가능하게 되었고 이는 일본인들이 성(姓)보다는 씨(氏)를 중요한 요소로 생각하게 만들었다. 여기서 우리와 공통적인 점은 가업(우리에게는 가문)을 이을 수 있는 절대적인 권력이 한사람에게 집중되어 있다는 것인데 이들은 이것 또한 혈족 개념이 아닌 장자로서의 권한을 가진 이에게 그 권력이 돌아가게 하였다는 것이 우리와 다르다.)성리학 수용에서의 입장의 차이도 매우 상이한 집단의식을 낳았다. 앞에서 말했듯이 우리는 수양의 개념으로서 성리학을 받아들여 ‘수신제가(修身齊家)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라는 개념을 집안을 먼저 잘 다스려야 나라를 다스릴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는 임진왜란 중 한 장군이 부모의 제사를 모시기 위하여 모든 작전을 포기하고 돌아갔다는 이야기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그러나 일본은 성리학을 실용성을 중심으로 하여 받아들였다. 이것은 촌(무라)의 존속이 가능해야 자신들의 삶이 유지될 수 있었던 역사적인 영향과 맞물린 것이며 사무라이들이 촌(무라)를 좀 더 편리하게 다루기 위한 목적으로 성리학을 받아들인 영향 때문이기도 하다. 그 때문에 그들은 나라가 잘 다스려져야 자신들의 집안도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일본의 가미가제 자살 부대의 하와이 공격은 일본인들의 이러한 의식 구조를 시사한다.)한국인과 일본인의 또다른 집단의식의 상이성은 한국인에게는 절대적인 신념이나 도덕적인 신념이 존재하지만 일본인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개화할 당시 원인을 제공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선입견은 매우 성급한 판단이다. 일본인의 집단에서 핵심적인 개념은 바로 중공(中空)구조라고 할 수 있다. 중공(中空)구조란 한자 그대로 가운데가 비어있고 그 주변을 다양한 생각과 이념을 가진 이들이 둘러싸고 있는 구조인데 평소에는 이러한 중공구조 때문에 다양한 세력이 서로를 견제하며 균형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그 중공(中空)구조 속을 한 세력 집단이 파고들게 되면 모든 집단이 그 세력의 힘에 맹목적으로 따르고 추종하게 되는 것이다. 이 때에는 어느 누구도 그 세력에 이의를 제기할 수 없으며 저항할 수 없는 특이한 사회 분위기가 형성된다. 제국주의에 물든 일본이 광적으로 천황을 숭배하며 우리나라를 포함한 식민지에 잔혹한 행위를 하고 만행을 저지른 행위나 세계 2차 대전 당시 미국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지방에 원자폭탄을 투여한 후 일본에 들어오자 저항은 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열렬히 환영하였던 과거 역시 이것으로 설명할 수 있다. (당시 미국은 일본인들이 매우 격렬하게 저항할 것을 우려하며 일본인에 대해 많은 연구를 하였으나 결과가 예상 밖이자 매우 당황하였다고 한다.))2) 정치체계에 나타나는 차이의 이유한국과 일본 사이에는 1952년 1월부터 오늘까지 독도영유권논쟁이 전개되고 있다. 한국의 입장은 이것이 어디까지나 「논쟁」일 뿐이지 「영토분쟁」이 아니라는 확고한 입장이다. 반면에 일본정부는 이것을 논쟁보다 격상되고 실제적인 「영토분쟁」으로 끌어올리려고 노력하고 있다. 한국이 일본의 독도영유권 「주장」을 「논쟁」수준으로 처리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독도가 한국영토라는 확고한 증거문헌들이 충분히 축적되어 있고, 이것이 역사적 진실을 잘 증명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의 시네마현이 다케시마의 날을 제정하면서 더 촉발된 대한민국의 영토 ‘독도’의 문제에 대해 과거부터 현재까지의 모든 상황을 정리해보고자 한다.)한국의 안일한 태도와 일본의 밀어붙이기 식의 정책으로 당연히 우리나라는 기세에 밀리고 일본은 점점 힘을 얻고 자신들의 정치에 관심이 없다고 한다. 한국은 정치에 대해 상당수 99%가 부정적이지만 그만큼 관심이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이러한 일본과 한국의 국민들의 관심만큼이나 독도문제는 양국가간의 국민정서에 영향을 준다.영토문제의 대외적 표현과 교섭권은 정부의 고유한 권한이다. 어쩌면 민간인이 떠들어서는 분쟁지가 되지 않는다. 한국 국민이나 단체는 일본 정부에 영토에 관한 문제를 청구 할 자격이 없다. 오직 한국 정부만이 일본 정부에 영토에 관한 잘못을 수정할 요구 권능을 가진다. 때문에 국민이 할 수 있는 것은 자기 정부가 분명한 자세로 일을 처리하라는 요구를 할 수 있을 뿐이다.국민들의 주장은 결국 국가 내부의 주장에 그치고 만다. 국민이 아무리 강하게 주장해도 일본정부와 국제사회에 공식적인 책임이 미치지 않는다. 국민들의 애국적 열정과 주장을 마치 분쟁의 원인인 듯이 협박하는 것은 이미 분쟁지가 된 책임을 국민이 떠들어서 그렇게 되었다고 뒤집어씌우려는 불순한 의도로 해석된다. 이런 졸렬한 속임수로 국민의 애국심을 협박하면 매우 곤란하다. 이런 협박의 내면에는 한국 국민의 독도에 대한 관심을 차단하려는 불순한 공작의도가 감추어져 있다. )현재의 동아시아의 지리적(북한대응) 그리고 경제적 유대감을 지닌 양국가의 경제적 교류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 이는 중국과 일본이 경열정냉)하다는 데서 볼 수 있다.결국 정치가는 국민의 여론에 대한 민감한 반응을 보이고 더하여 자신의 정치적 신념을 고려할 때 마찰을 피할 수 없는 구도가 연출된다.이런 상황이 전제로 되어 여론은 강경한 대책을 채택할 수밖에 없게 된다. 특히 한국이 그 단적인 예로 만일 독도를 포기하거나 조금이라도 일본에 대한 이해를 보인다면 정치적 생명이 끝날 정도의 선택 없는 여론이라는 것이다.결국 국제정치에서 "국토의 포기는 나라의 목숨을 포기함과 같다"라는 말처럼 양국가의 이해관계갈등 구조가 전반적으로 즉, 경제, 국방, 외교 등 다방면의 영향을 미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여기서 부터 외교에 관하여 한국의 외교에서.)
{{강릉 단오제에 대하여과목학번이름담당교수제출일목 차단오의 유래 ………………………… 1강릉 단오제란? ………………………… 2강릉 단오제의 역사 ………………………… 2강릉 단오제의 성격 ………………………… 3강릉 단오제의 기능 ………………………… 31. 사회적 기능2. 상징적 기능3. 문화적 기능4. 경제적 기능단오명절의 보존적 가치 ………………………… 6국내 유일의 종합적 전통축제로서의 가치 ……… 7단오의 유래단오(端午)란 한국을 포함하여 중국, 일본에서도 지키는 명절이다.음력 5월 5일이며, 수릿날 또는 천중절(天中節)이라고도 불린다. 중국에서는 중오(重午), 중오(重五), 단양(端陽), 오월절이라고도 한다. 단오는 초오(初五)의 뜻으로 5월의 첫째 말[午]의 날을 말한다.음력으로 5월은 오월(午月)에 해당하며 기수(奇數:홀수)의 달과 날이 같은 수로 겹치는 것을 주요시한 데서 5월 5일을 명절날로 하였다.단오는 중국 한대(漢代)의 문헌에도 나타나는데, 옛날부터 5월은 비가 많이 오는 계절로 접어드는 달로 나쁜 병이 유행하기 쉽고, 여러 가지 액(厄)을 제거해야 하는 나쁜 달로 보아, 예방조치로서 여러 가지 미신적인 풍습이 생겨났다.중국의 옛 풍속을 전하는 형초세시기(荊楚歲時記) 에 따르면 단오에는 약초를 캐고, 재액을 예방하기 위하여 쑥으로 만든 인형, 호랑이를 문에 걸었으며, 창포주, 웅황주(雄黃酒)라는 약주를 마셨다.약초, 창포, 쑥 등을 이용한 것은 강한 향기와 약성 때문인 것으로 생각된다.또 전국시대 초(楚)나라 시인 굴원(屈原)이 멱라수에 빠져 죽었다는 고사에서, 그의 죽음을 슬퍼하는 뜻으로 대나무 통에 쌀을 넣고 소태 나뭇잎으로 감아 물속에 던지던 풍습이 변하여, 지금은 대나뭇잎으로 싸서 찐 떡을 먹는 풍습이 되었다고 한다.또 굴원을 작은 배로 구한다는 뜻의 놀이로서 일종의 보트레이스인 용선경도(龍船競渡)가 지금까지 전한다.한국의 경우, 고대 마한의 습속을 적은 위지(魏志) 와 한전(韓傳) 에 의하면, 파종이 끝난 5월에 군중이 모여 서로 신(은 배앓이에 좋고, 산모의 약, 상처 치료에 썼다. 또 단옷날 오시(午時)에 목욕을 하면 무병(無病)한다 하여 단오물맞이 를 하고 모래찜을 하였다.이 밖에 단오 절식으로 수리취를 넣어 둥글게 절편을 만든 수리취떡과 쑥떡, 망개떡, 약초떡, 밀가루지짐 등을 먹었고, 그네뛰기, 씨름, 탈품, 사자춤, 가면극 등을 즐겼다.강릉 단오제란?강릉의 단오제는 영동지방에서 제일가는 大神事로 오랜 전통을 갖고 강원도 강릉시 중심으로 매년 음력 4월 5일부터 5월 7일까지 1개월 동안 진행되는 축제로서, 인류구전 및 무형유산 걸작으로 신청하고자 하는 대상은 본 축제를 구성하고 있는 각종 제례의식, 무용, 노래, 놀이 등이다.강릉시는 동쪽은 바다, 서쪽은 태백산맥이 위치하고 있어 산맥에서 바다까지의 거리가 짧아 지형의 경사가 급하고 평야가 적게 발달하였다. 또한 강릉은 선사시대부터 문화가 싹텄던 곳으로 봄에는 바람이 많고 여름에는 폭우가 자주 내리고 가을과 겨울에는 바다의 파도가 높고 겨울에는 눈이 많이 내리는 등 비교적 기후조건이 나쁜 편 이었다. 강릉단오제는 이와 같이 농경과 어로의 불리한 자연환경 속에서도 종교적이 믿음과 문화적 창조성을 바탕으로 민중축제의 형태로 발전되었다.현재의 강릉은 BC 120년 부족국가였던 예국 의 수도였으며 이시기부터 문화적 요충지 역할을 수행해 왔다. 삼국시대 1300년 전에는 명주(강릉의 옛지명) 로서 독자적인 행정체제를 유지하였으며 고려시대 1000년 전에는 선종을 받아들여 독자적인 불교문화를 번성시켰다. 조선시대 500년 전에는 유교문화를 받아들여 양반문화를 형성하였다. 이러한 문화 환경은 지배계층과 피지배계층 모두에 걸치는 융합의 문화를 발전시켰다. 이러한 배경에서 농악, 농요, 가면극, 민속놀이, 무속제의 등이 번성하였고, 이들을 통합하여 강릉단오제 라는 축제로 진화해왔다.{강릉 단오제의 역사3세기 중국문헌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기록에 의하면 강릉은 부족국가인 동예(東濊) 의 옛 땅으로, 동예(東濊)에는 천신에게로 이속들이 조직하고 무속신앙을 믿는 민중들이 함께 하던 조선조 축제의 원형으로 현재 강릉단오제만이 그 본래의 모습을 온전히 보존하고 있음.{{강릉 단오제의 성격1. 제의형 신앙 축제 : 대관령 중심의 공동체 신앙을 바탕으로 한 사회 통합의 지역축제임.2. 생업형 생산 축제 : 농업과 어업의 풍요를 비는 생산축제인 동시에 활발한 물자교류를 위한 행로의 안전을 기원하는 생업형 축제임.3. 연행형 예술 축제 : 가면극과 농악 등 민속예술 기량을 발휘하는 연행축제임.4. 놀이형 신명 축제 : 씨름과 그네 등 각종 놀이와 게임을 통해 주민들이 신명풀이를 하는 오락축제임.5. 명절형 절기 축제 : 단오풍속에 따른 절기음식과 놀이를 즐기는 정기적인 명절축제임.강릉 단오제의 기능1. 사회적 기능⊙ 분권적(分權的) 기능- 강릉단오제는 조선시대에 강릉관아와 주민들이 참가한 민관합동의 축제였고, 일제강점기인 20세기에는 상인들 중심의 자발적인 협의를 통해 전승해왔음- 1967년 중요무형문화재 지정 이후 강릉단오제위원회와 강릉지역 각 민간단체들이 참여, 회의를 통하여 강릉단오제를 위한 협력이나 분권이 이루어짐. 회의에서는 단오제 행사와 관련된 예산, 행사진행, 행사내용결정, 홍보 등 전반적인 것을 다룸.⊙ 통합적 기능- 전통사회에서 강릉단오제는 신분의 차이를 초월하여 양반과 상민의 모든 계층이 함께 참여하여 즐긴 행사였음.- 현재는 강릉단오제를 통해 전통문화를 전승, 향유하면서 공동체의식을 강화하는 기능이 있음.- 강릉시민뿐만 아니라 영동지역민, 한국민이 함께 참여하는 축제의 장으로 확대됨으로써 한국민의 정체성을 확인, 통합하는 기능을 지님.⊙ 전통 신앙적 기능- 강릉단오제는 성황신제의를 통하여 지역의 자연재해를 방지하고 생업이 번창하기를 기원하며 또한 고을 주민 전체의 안녕과 번영을 기원하고 있음.- 강릉단오제는 유교, 무속, 불교, 도교 등을 조화시킴으로서 전통사회 민간신앙의 전반적 모습을 보여주는 축제임.- 남성들은 주로 유교식 제사를 통하여 지역사회 전체의 안녕과 생업의 과 향토 사랑을 드높임.- 국가의 안녕을 수호하던 김유신 장군은 대관령에서 신의 도움을 받아 살아난 연고로 하여 사후에 대관령산신으로 좌정, 외침에 대해 군사적 방어를 담당하는 신으로서 상징적 기능을 지님.- 강릉에서 태어나 선종불교의 대덕고승으로 불법을 펴다가 사후에 대관령국사성황신으로 좌정한 범일국사는, 지역수호신으로서의 상징적 기능을 담당하고 있음.- 호랑이에게 물려 죽은 뒤 신으로 좌정한 국사여성 황신의 신화는 자연의 위협 아래 당당하게 생존해온 강릉지역의 생활사를 상징적으로 반영함.⊙ 전통적 상생문화(相生文化)의 상징- 강릉단오제는 이질적(異質的)이고 개별적인 전통신앙(傳統信仰)을 융합, 상생(相生)의 관계를 통하여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축제의 장으로 오랜 역사적 전통을 지니고 있음. 역사적 유래가 분명한 유교, 불교 및 자생적 토속신앙인 무속이 상호 대립하는 존재가 아니라 서로 포용하는 상생의 관계로 통합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 축제의 장으로서 강릉단오제의 역사적 가치가 확인됨.- 의례, 연극, 음악, 춤, 노래 등을 통합한 다양한 레퍼토리들을, 관념이 아니라, 정서적으로 체험하게 함으로써 자연스럽게 다양한 문화의 상생적 양상을 이해하고 전승하여 강릉단오제의 문화적 상징성을 확인하게 함.- 신과 인간의 상생, 자연과 인간의 상생, 남성과 여성의 상생, 혼돈과 질서의 상생, 갈등과 화해의 상생이 구체적 레퍼토리를 통하여 제시됨으로써 전통적 상생문화를 상징하는 대표적 축제문화로 자리 잡고 있음.3. 문화적 기능⊙ 한국의 대표적 축제로서 기능- 강릉단오제는 생활문화, 놀이문화, 세시문화, 제의문화, 산촌문화, 농촌문화, 어촌문화, 공연문화, 조형문화 등을 아우르는 종합적 전통 축제로서 국내의 축제를 대표할 뿐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널리 알려진 축제임.- 강릉단오제가 지닌 전통축제의 상징적, 예술적, 교육적 측면 등이 현대축제의 기획과 창조에 훌륭한 전범(model)으로서 적극적으로 활용되고 있음.⊙ 예술적 기능- 세습무가 하는 무당굿은 뛰어난 타악과을 전승하는 기능이 있음.- 정기적인 축제를 계기로 관노가면극과 강릉농악, 학산 오독떼기 민요 등 강릉을 대표하는 전통예술 공연에 성인남녀는 물론 청소년이 대거 참가함으로써 전통 문화예술의 재창조로 이어지게 하는 기능을 담당함.{{ 호개등으로 단오굿을 할 때 굿당을 알리는 상징물- 어린이 및 청소년들이 강릉단오제에 참여함으로써 전통문화를 경험, 체득케 하는 교육적 기능이 있음. 또한 향토애와 연대의식, 지역문화에의 자긍심, 전통문화의 우수성 등의 의식을 고취하는 기능을 수행함.4. 경제적 기능⊙ 문화가치 창출의 기능- 강릉단오제를 통한 다양한 민속신앙과 놀이, 예술 등 풍부한 전통문화 자원들을 정기적으로 재현하고 체험함으로써 현대문화를 새롭게 창출하는 문화 창조의 기능을 발휘함.⊙ 지역문화 홍보 기능- 대관령과 동해 등 천혜의 자원을 갖춘 관광지인 동시에 전통축제와 다양한 지역문화를 전승하고 있는 문화도시로서 강릉을 알리는 기능이 있음.⊙ 관광자원적 기능- 강릉단오제는 시대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전통문화의 원형성을 전승하고 있어 산업화된 현대사회에서 중요한 문화관광의 자원으로 인정받고 있음.⊙ 문화상품적 기능- 세시 음식으로서 수리취떡, 관노가면극의 탈을 활용한 각종 장식물과 장신구 등단오문화 관련 상품을 개발, 지역경제에 기여하는 기능이 있음.- 전통문화유산을 창조적으로 계승하기 위한 문화 컨텐츠 사업의 원천 자료로서 활발하게 활용되고 있음.단오명절의 보존적 가치{- 단오는 전통사회에서 설, 추석과 더불어 3대 명절의 하나이었음. 단오는 재액의 예방, 여름철의 건강 유지와 신체의 단련, 풍요의 기원, 성황신에 대한 제사 등의 기능을 담당하는 명절로서 현재 강릉단오제는 추석문화권역이 우세한 현실가운데 단오의 문화적 전통을 유일하게 지속시키고 있는 축제임.- 강릉단오제는 전통단오명절놀이인 그네뛰기, 씨름을 비롯하여 창포물에 머리감기, 수리취떡 먹기 등의 전통을 계승한 명절축제이며 현대화의 물결 속에 점차적으로 사라지는 민속문화를 계승하는 현장임.국내 유일의 종합적함.
역사인도인도 역사와 문화에서 특이한 점은 고대부터 전국에 보편화 된 카스트제도이다. 사회 계급제도인 카스트 제도는 브라만(사제, 승려), 크샤트리아(왕족, 귀족, 무사), 바이샤(평민, 상인), 슈트라(노예) 4개로 구분되어 있다. 브라만은 카스트의 최상위 계급으로 제정일치를 이상으로 삼았던 고대 사회의 공통된 관습은 근세 이후, 이슬람교와 기독교가 전래된 후에도 지속되었다.인도의 문화는 다양한 종교의 영향을 받아 발전하였고 건축문화에서도 불교, 힌두교, 자이나교, 이슬람교들의 종교건축이 주축을 이루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인도는 아시아 남쪽에 거대한 반도를 형성한 아대륙이다. 인도는 여러 종교가 함께 공존하고 있는 곳으로 문화를 통해 그 사실을 엿 볼 수 있다..무굴제국시대무굴 왕조를 시작한 바부르(제위 1526~1530)는 수차례에 거쳐 인도의 침공을 시도한 끝에 델리와 아그라를 점령하여 무굴왕조를 시작하였다.바부르의 후계자인 후마윤(제위 1530~1556)은 쉐르칸에 의해 망명하였으며 쉐르칸은 쉐르사라고 칭하여 인도의 수르왕조를 시작하였다. 그 후 그의 아들 이슬람 샤가 왕위를 계승하였고, 그 후 악바르와 자한기르를 거쳐 5대 황제인 샤자 한의 시대가 열린다.그가 통치한 30년간의 무굴제국은 최고의 전성기를 맞이하며, 이 시대에 왕비 뭄타즈 마할을 위해 건설한 타지마할(TajMahal) 묘 건물은 무굴건축문화를 대표하는 걸작이다.아우랑제브는 (샤자 한의 아들) 부왕을 아그라성내에 유폐하고 제 6대 황제가 되었으며, 부왕은 사망할 때까지 유폐된 아그라 성의 궁정 거실에서 사랑하는 왕비의 타지마할 묘 건물을 바라보았다는 얘기가 전해진다.1659년에 즉위해 1707년까지 통치한 아우랑제브는 무굴제국의 최후의 번영을 누리게 되었으며 또한 무굴의 몰락을 결정적인 것으로 만들었다.그는 이슬람의 전통적인 신앙을 갖고 있었으며 힌두교와 시크교를 탄압하였으므로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이에 1707년 무굴제국은 몰락하기 시작했으며 그 후 분열과 혼란이 심하게 되었다.영국과 프랑스의 주도권 싸움에서 이긴 영국은 인도를 식민지로 만들었으며 식민통치시작 후 무굴제국의 황제는 강제로 폐위되고 만다.무굴제국시대에 인도문화는 다양하게 발전했으며 전통적인 힌두문화와 터키, 페르시아계 문화의 융합이 이루어졌다. 특히 이 시대에는 건축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으며 도성과 왕궁, 모스크 및 정원등을 건설하였다..샤자한 시대샤자 한 (1628~1658)에는 무굴제국이 안정되고 경제력이 많이 확대되었다. 건축문화를 애호한 샤자 한 황제로 인해 건축양식이 획기적인 발전을 하게 되었다.주로 백대리석을 많이 선호했으며 각종 문양 및 기하학적 문양을 상감장식하는 방법이 많이 사용되었다. 이 시대의 최고의 건축물인 타지마할은 샤자 한 황제가 가장 사랑하는 황후뭄타즈 마할을 위해 만든 묘 건물이다. 1632년부터 23년간 2만여명의 장인들을 동원해 만든 건물은 막대한 국가제정에 대한 손실을 가져오기도 하였다.하지만 타지마할은 뭄타즈 마할의 아름다움과 사랑스러움을 영원히 기념하기위해 만든 것으로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건축인도인도의 건축문화는 인도의 종교적인 것을 주축으로 하고 있다. 따라서 사원 등의 종교건축들이 많으며 조각, 문양, 그림에 이르기까지 종교적 의미를 가지고 상징적으로 표현된 것이 많다. 인도의 건축에서는 아치형태의 건축물을 많이 볼 수 있으며 코끼리, 사자, 소, 말, 돼지 등의 조각을 사원건축에 장식으로 사용한 것을 알 수 있다. 뿐 만 아니라 인도의 사상은 연꽃, 종, 보륜, 수병, 삼지창, 卍자 등을 장식으로 많이 사용했다.그 밖의 석굴 건축의 기법도 사용되었으며 건물 표면을 장식하는 조각을 가장 중요한 시각적 언어로 강조하여 사용했다. 사원건물의 벽면의 부조들에는 인도의 고대신화속의 여러 신과 신비들의 사랑과 애무의 장면들이 수많이 묘사되어 있어 그 만의 문화적 특색, 색깔을 보이고 있다.{.후마윤 샤 묘 건물1565년에 완성 된 후마윤의 묘 건물은 10ha이상 되는 광대한 사분정원 중앙에 서 있으며 1변 90m의 4각형기단 위에 서 있다. 중앙에는 높이 38m의 백대리석으로 만든 돔 지붕이 있으며 벽면은 적색 사암을 바탕으로 한 백 대리석을 상감해 만들었다.묘 건물 각 면의 중앙부분에는 대형 아치문 주의에 백대리석으로 4각형 윤곽을 돌린 이완형의 개구부를 만들어 페르시아 건축양식을 나타내고 있다. 이 건물의 외관은 입체저기며 조각적인 건축미를 나타내고 있다.철저한 좌우대칭의 모습을 나타내는 이 건물은 정원 역시 정방형과 직사각형의 연속적인 패턴으로 되어 있다. 정원의 관상수들과 통로의 중심을 흐르는 수로의 전체적인 조화는 건조한 인도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무굴제국 황제들이 조상의 땅인 중앙 아시아의 풍경을 묘사한 것이라고 한다. 건물의 본체높이21m, 폭48m, 중앙의 돔은 대리석 건물은 사암 기둥과 기둥사이의 창에는 이슬람 건축에서 흔히 보이는 첨상아치가 주로 사용되고 있다.전반적인 정원의 조성이나 철저한 좌우대칭 흰 대리석으로 만든 돔 등은 후대 타지마할 건축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평가된다.{.타지마할야무나 강을 배후에 두고 동서 300m, 남북 56m의 대지를 점유하고 있으며 전정, 사분정원, 묘 건물의 3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묘 건물은 사분정원 중앙에 배치하지 않고 야무나 강을 묘 건물 배후에 두면서 광대한 사분정원을 묘 건물 전면에 펼쳐 놓은 전체배치계획이 매우 새롭고 특이하다.중심 부분의 건물은 1변 95m, 높이 7m의 4각형 평면 기단위에 서 있으며 그 중앙에 솟아오른 구근형의 돔은 높이가 65m이며 그 구조는 지붕과 천장이 2중으로되어 있다.중심부분의 건물 평면은 4각형 모서리면을 접은 형태이며 내부 공간이 복잡한 평면구성으로 되어 있다. 4면 중앙에 있는 대형 아치는 이완구조로 만들어서 볼트구조의 천장이 덮여 있는 반 외부 공간을 형성하고 있다. 이와 같은 건축구성도 후마윤 묘 건물의 건축 양식을 본받은 것으로 중심부분의 건물 기단하부 서쪽으로는 부속모스크, 동쪽에는 영빈관이 각각 수심이 얕고 넓은 장방형의 반사지를 사이에 두고 서 있으며 적색 사암을 주로 사용하였으므로 중심부분의 주 건물과 매우 아름다운 대조를 이루고 있다.타지마할은 거대한 성채속의 묘지공원이고 세계 최고의 대리석 건축물이다. 붉은 사암으로 된 거대한 정문의 아치를 통과하면 넓은 마당에 수로를 둔 전형적인 무굴 양식의 정원과 분수가 펼쳐지며 그 앞의 타지마할과 완벽한 대칭미를 이룬다. 중앙의 능묘, 좌우의 모스크, 앞쪽의 격자형태의 정원 타지마할의 영상이 비치는 일자형 수로, 그 속의 분수대, 네 모퉁이의 minaret , 산책로 등이 완벽한 대칭을 보인다.타지마할의 건축재료인 붉은 사암은 현지 석산에서 백색의 대리석은 남쪽으로 16km 정도 떨어진 자이푸로남방 마크라나의 대리석 광산에서 조달되었다. 운반을 효율적으로 하기 위해 남부 석산에서 아그라의 현장까지 도로격의 축도가 건설되었고 코끼리와 소가 끄는 수레가 동원되었다. 그 외 궁전의 내부를 장식한 보석들은 중앙 아시아의 투르키스탄으로부터의 연옥, 티벳으로부터 수정, 터키옥은 미얀마 북부, 그리고 진주, 사파이어 다이아몬드 등이 아프간과 이집트로부터 조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