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과제주제 : 피아제의 인지발달이론과 비고츠키의 사회문화적 인지이론에 대한 기본 개념을 설명하고, 각 이론을 교육현장에서 어떻게 적용할 수 있는지 사례를 들어 논하시오Ⅰ. 서론인지발달 이론은 인간을 능동적인 존재로 보고 주변 환경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스스로 사고하고 정보를 처리하며 환경에 적응하면서 발달한다고 보는 이론으로, 피아제의 인지발달 이론과 비고츠키의 사회문화적 이론이 대표적이다. 피아제의 인지발달은 유아가 환경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보다 분화되고 포괄적인 인지구조를 구성해 가는 능동적인 주체자로 보았다. 그리고 인지구조의 질적 변화에 따라 인지발달을 감각운동기, 전조작기, 구체적 조작기, 형식적 조작기 네 단계로 구분하였다. 반면에 비고츠키의 사회문화적 이론은 주변 환경과의 상호작용이 중요하며 이를 통해 영향을 받아 발달이 이루어 진다고 강조하였다. 피아제와 비고츠키의 이론은 심리학 뿐만 아니라 교육학에도 많은 영향을 준 이론으로 보육현장에서 또한 다양한 이론들이 접목되어 활용되기에 꼭 알고 있어야 하며 현장에서 어떻게 적용할 수 있는지 사례를 들어 알아보겠다.Ⅱ. 본론1. 피아제의 인지발달 이론피아제는 프랑스 파리의 비네 연구소에서 아동용 지능검사 도구를 제작하는 과정에서 유아의 사고과정이 아동 또는 성인과는 질적으로 다름을 발견하면서 이를 토대로 지식은 능동적인 인지활동을 통해 형성된다는 인지발달 이론을 구축하게 됐다. 피아제는 인간은 기본적인 인지구조와 인지기능을 지닌 채 태어나며, 이를 통해 주변 환경을 이해하고 조작 및 탐색함으로써 스스로 지식을 구성하게 된다고 한다.(1) 기본개념피아제의 이론에는 익숙하지 않은 새로운 개념들이 많아서 개념을 이해하는 것이 이론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도식 ? 인지구조로서 주변 환경을 이해하기 위한 사고패턴이나 행동패턴으로 환경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반복되는 경험과 행동에서 형성된다. 연령이 증가하고 주변 환경과 지속적인 상호작용을 통해 분화되고 통합되면서 고차원의 상위도식으로 발달되고 인지구조들은 질적 변화를 하며 적응이라는 과정을 겪는다.*적응 ? 도식이 고차원의 상위도식으로 발달되고 인지구조들이 질적 변화를 하게 되는 과정. 인지기능으로서 동화와 조절에 의해 이루어 진다.*동화 ? 새로운 정보를 받아들일 때 기존의 도식에 통합하여 해결하는 과정으로 동화에서는 도식이 양적으로 발달하게 됨.*조절 ? 새로은 정보가 기존의 도식과 갈등을 일으킬 때 기존의 도식을 변형시키거나 새로운 도식을 생성하여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으로 이 경우, 도식이 질적으로 발달하게 됨.*평형화 ? 동화와 조절 간의 인지적 균형을 유지하도록 노력하는 과정.(2) 인지 발달단계피아제는 인지구조의 질적 변화에 따라 인지발달을 네 단계로 구분했다.① 감각운동기? 0~2세까지로 감각과 운동을 통해 세계를 이해하며, 초기에는 반사활동을 보이나 점차 목적을 가진 행동으로 발전하게 되고 대상영속성을 획득하게 된다.② 전조작기? 2~7세로 언어발달과 함께 상징적 사고가 가능해지며 언어, 그림, 가상놀이 등을 통해 대상을 표상하는 능력이 발달한다. 그러나 조작능력이 제대로 발달 되지 않아 전조작기라고 부른다. 이 시기 유아는 자기중심적 사고, 직관적 사고, 물활론적 사고, 비가역적 사고의 특성을 보인다.③ 구체적 조작기? 7~11세에 해당되며 추론이 보다 논리적이 된다. 그러나 구체적인 문제와 경험에 바탕을 둔 사고를 보여 구체적 조작기라 한다. 이 시기 아동의 특성으로는 탈중심화가 이루어지며 조망수용능력이 형성되고, 보존개념의 획득과 서열화 및 유목화가 가능하고 분류개념이 형성된다.④ 형식적 조작기? 11세 이후로 복잡하고 추상적인 이성 체계로 사고하게 된다. 이 시기에는 일반화가 가능하며, 연역적 추론과 추상적 사고가 가능하다.2. 비고츠키의 사회문화적 이론러시아의 심리학자인 비고츠키는 주변 환경 간의 상호작용을 통해 인지발달이 이뤄진다는 인지발달 이론을 확장시켜 인간은 역사적·문화적 존재이기 때문에 개인이 속한 사회문화적 환경이 발달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 요인이라는 사회문화적 이론을 제시했다.피아제가 개인적 차원의 환경과의 인지적 상호작용에 의한 발달이 이루어진다고 한 반면, 비고츠키는 환경과의 사회적 상호작용에 의해 발달이 이루어지며, 모든 유아는 동일한 인지발달 단계를 거치지 않고 자신보다 성숙한 사회 구성원과의 의사소통을 통해 사고발달이 이루어진다고 했다.비고츠키는 사회적 상호작용의 매개체인 언어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언어가 유아의 사고 및 행동 발달을 일으키고 새로운 기술을 습득하는 도구로서 언어에 의해 인지발달이 이루어지며 유아기의 혼잣말이 점차 내적 언어로 발달한다고 보았다.또 비고츠키는 근접발달지대와 비계설정 개념을 통해 유아의 발달과 학습의 관계를 설명하였다.① 근접발달지대- 유아가 독립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실제적 발달수준과 자신보다 성숙한 구성원(성인 및 유능한 또래)과의 협력 아래 문제를 해결하는 잠재적 발달수준간의 차이를 말하며 학습하고 배움이 일어나는 구간이다.② 비계설정- 유아가 독립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지원해 주는 사회적 상호작용 환경을 의미한다. 상호작용하는 유아의 발달수준에 맞추어 과제해결에 필요한 단서 제공, 암시, 설명, 질문, 격려 등의 도움을 단계적으로 조절함으로써 유아의 학습에 기여한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학습의 실질적인 주도권은 도움을 주는 사람이 아닌 유아에게 있다는 것이다.따라서 비고츠키에 의하면, 근접발달지대에서 유아에 학습 기회를 제공하고 비계설정을 통해 사회적 상호작용이 이루어질 때 유아는 효과적인 방법으로 사고하게 되며 지식의 내면화가 이루어진다.3. 교육적 시사점 및 교사의 역할①피아제의 인지발달 이론인지발달 이론은 유아를 환경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자발적으로 지식을 구성하는 능동적인 학습자로 바라보게 했다. 피아제는 유아의 인지적 발달 수준을 고려하여 활동을 제공하고 학습에 대한 자극을 주는 학습 경험의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고 주장 한다.그러므로 교사는 유아의 언어 및 사고가 성인과는 다름을 인식하여 유아를 면밀히 관찰해야한다. 또한, 교사는 효율적인 의사소통을 하기 위해 단순한 지식전달이 아닌 유아 스스로 능동적 탐구가 가능하도록 환경을 구성해줘야 한다. 마지막으로, 같은 나이의 학습자라도 같은 내용의 학습은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책을 통해 학습하는 것은 구체적 경험 뒤에 이루어져야 한다고 보았다. 결국 학습자의 인지발달 단계를 충분히 고려하여 학습자가 인지할 수 있는 수준의 적절한 정보를 제시해야 하고, 교육의 궁극적 목표는 전반적 발달을 통한 전인적 발달에 두어야 한다.
Ⅰ.서론4.19 혁명이 발발한지, 반세기에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1960년 4월 19일, 이승만 정권의 독재와 폭정에 견디다 못한 한국 학생들은 들풀처럼 일어났고, 민중들의 봉기는 어느새 확대?진화되어 혁명이 되었다. 그리고 결국엔 철옹성 같았던 이승만 정권을 무너뜨렸다. 우리 역사에서 최초로 부당한 최고 권력자를 민중의 힘으로 물리치는 쾌거를 이룩한 것이다.4.19 혁명은 해방 이후 전개된 학생을 중심으로 한 최초의 민주변혁운동으로, 오늘날 우리가 누리고 있는 민주주의의 토대를 확립하는데 큰 기여를 한 혁명이었다. 4.19는 한국전쟁 이후 금기시되어 왔던 평화통일에 관련된 논의를 활성화 시켰으며 한국 정치사회에서 사라졌던 진보세력을 약진시키기도 했다. 또한 5.16 쿠데타에 의해 물거품이 되고 말았지만, 그 정신만은 암흑 같은 군사독재 기간에도 계승되어 많은 이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전해주었다. 여기에서는 4.19 혁명이 발생하게 된 배경과 그 전개과정을 간단히 살펴보고, 4.19 혁명이 국내 정치변동에 미친 영향과 한계에 대해서 알아볼 것이다.Ⅱ. 본론1, 4.19 혁명의 배경1945년, 35년 동안의 일제의 억압과 질곡에서 벗어난 우리 민족은 광복의 기쁨을 누리기도 전에 강대국들에 의해 남북분단의 아픔을 겪었다.1948년 8월 15일, 남한만의 단독 선거로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으나, 2년도 채 되지 않은 1950년, 우리 민족최대의 동족상잔의 피비린내 나는 6.25전쟁을 겪어야 했으며, 3년에 걸친 전쟁으로 우리 국토는 완전히 폐허가 되고 말았다. 수많은 전쟁고아들이 생겨났으며, 우리 경제는 자생력을 잃고 외국의 원조에 의존함으로써 물가는 자꾸 오르기만 하였고, 사람들은 일자리를 찾지 못해 거리를 배회했다. 그러나 국가를 재건하고 국가경제를 일으켜야 할 이승만 자유당 정권은 자신들의 장기집권을 꾀하며 부산 정치파동, 사사오입 개헌, 반대세력에 대한 폭력 등 온갖 정치적 부정과 탄압을 일삼았다. 이승만 정부에 실망한 국민들이 1956년 민의원 선거에서 고려대생들이 청계천 4가를 지날 때 경찰과 모의한 반공 청년단이라는 정치 깡패들이 무차별 테러를 가해 한명이 죽고 수십 명이 부상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학생들의 평화시위마저 폭력으로 집압한 정권에 대해 국민들의 분노가 마침내 폭발했다. 이 날의 고대생 시위는 시위 구호를 ‘부정선거 타도’에서 ‘독재정치 타도’로 바꾸어 놓았고, 이튿날인 4월 19일을 기해 대학생들이 총궐기하는 계기가 되었다. “피의 화요일”이라 불리우는 1960년 4월 19일, 학생들은 이른 아침부터 선언문을 낭독하고 거리로 뛰쳐 나왔다. 국회의사당에 모인 학생 시위대열은 경무대 방향으로 치닫기 시작했다. 부정선거 규탄과 학원의 자유를 요구했던 시위가 경찰의 무자비한 탄압으로 혁명의 대열로 바뀌고 있었다. 젊은 학생들은 전우와 애국가를 부르며 앞으로 달려 나갔다. 시민들도 학생들의 대열에 합류했고, 서울시내는 온통 민주를 외치는 시위대열로 뒤 덮혔다. 이무렵 시위대의 숫자는 이미 10만명을 넘고 있었다. 경무대로 향하는 학생들과 이를 저지하려는 경찰과의 공방은 치열 했다. 최루탄과 공포 사격으로 저지하던 경찰의 1차 저지선은 민주신념에 불타는 학생과 시민들을 막을 수가 없었다. 시위대는 경찰의 최후 저지선인 경무대를 향해 달려갔다. 소방차를 앞세운 시위대와 경찰의 간격이 10여미터로 좁혀졌을 때, 경찰의 총구가 일제히 불을 뿜었다. 경무대 사격을 시작으로 서울 시내 곳곳에서 시위대를 향해 무차별 사격이 가해져 꽃다운 젊은 학생과 시민들이 수 없이 희생되었다. 분노한 시민들은 반공청년단 본부와 왜곡보도를 일삼았던 신문사를 불태웠으며,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출동한 소방차를 뺏고 경찰관서를 습격하는 등 항의 시위를 전개했다. 혁명의 불길이 걷잡을 수 없이 번져가자, 자유당 정권은 계엄령을 선포하며 사건 무마에 온 힘을 기울였지만, 만심은 보다 근본적인 개혁을 요구하고 있었다. 4월25일, 독재정권의 종말을 결정짓는 시위가 일어났다. 제자들의 희생에 가슴 아파하던 대학교수들이 시민과 학생들의 호위를 의도적으로 은폐하기도 하였다.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로 이어지는 군사정권은 민주적 정통성이 미약한 정권들이었다. 그렇기에 그들 정권은 한국 변혁의 원류라 할 수 있는 4?19에 대해 올바른 평가를 내릴 수가 없었다. 4.19가 민중들의 정치의식을 고취시켜 반정부운동을 촉발할 수도 있다는 우려에서 이를 터부시한 것이다.그러나 문민시대가 개막되고, 사회의 민주화가 진행되면서 4월 혁명은 우리의 역사 속에 부활하여 민주혁명으로 복원하게 되었다. 이는 이후 일어나는 모든 민주주의적 민중봉기의 효시라 할 수 있으며 다양한 사회변혁운동의 출발점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4.19 혁명은 ‘미완의 혁명’이기도 하다. 이승만 정권을 붕괴시킨 이후에 나타나는 각종 반혁명적 사건과 5.16 쿠데타의 발발이 4.19혁명에 ‘미완’이라는 수식어를 덧붙이게 만든다.1) 긍정적 측면(1) 정부수립 후 최초의 민주 ? 민생 ? 민족운동으로서의 의미우리는 4월 혁명에 단순히 반독재 민주화운동의 일환이라는 협의적인 의미를 부여해서는 안 된다. 4월 혁명이 표방했던 주장들은 민주회복의 차원에만 머무르지 않고 민생문제, 통일문제 그리고 민족 자주권의 문제까지 광범위한 차원을 아우르고 있다. 그리고 이와 같은 다차원적인 주장들이 민중들에게 엄청난 호소력을 발휘하여 민중들의 무서운 응집력을 이끌어냈고, 이러한 원동력을 바탕으로 불과 4월 혁명이 일어난 지 7일 만에 철옹성 같았던 이승만 정권을 무너뜨리게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4월 혁명은 정부 수립 이후 가장 광범위한 차원에서 전개되었던 민주화운동임과 동시에 민생운동이며 민족운동으로 이해되어야 한다.① 민주주의 운동해방 이후 4.19 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 우리나라의 민중들은 정치권력의 부당한 횡포에 확실한 저항의 모습을 나타내지 못했다. 4.3항쟁 등 부분적인 저항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으나, 그러한 시도는 부당한 정치권력의 폭압에 의해 좌절되었다. 그러나 4.19 혁명은 일제시대와 전쟁 그리고 이승만과 자유당 정권의 독재를 거치 전가 받으면서 대대적인 수탈과 살인적인 인플레이션, 높은 실업률이라는 삼중고로 인해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렸다. 그러나 이와 같은 사태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는 이승만 정권은 정부로서의 기능을 상실한 채 오로지 자신들의 기득권 보호에만 열을 올렸다. 각종 특혜와 부정부패로 빠른 성장을 거듭한 독점자본 역시 민중들의 피해는 아랑곳하지 않고 이승만 정권과 결탁하여 자신들만의 이윤을 추구하는데 여념이 없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발생한 4.19 혁명에 민중들은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주로 농촌경제의 파탄으로 농촌에서 유입된 사람들이 대다수를 이루는 도시빈민들은 4.19 전기 투쟁과정에 주요 세력으로 적극적인 투쟁을 전개했다. 혁명의 중기부터는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결성하는 등 노동운동을 통한 경제구조의 민주화를 추구하였으며, 적극적이지는 않았으나 농민층 역시 혁명 중기 이후부터 사회변혁운동의 대열에 합류한다. 이들 세력의 활동은 혁명 초기에는 자신들의 권익을 지키기 위한 활동을 위주로 이루어졌으나, 점차 정치개혁을 비롯한 사회 전반의 개혁과 통일운동 등으로 확산 및 발전되어갔다.③ student power를 중심으로 한 민족운동나아가 4월 혁명은 20세기 후반 전 세계적으로 일기 시작한 이른바 ‘student power’의 한국적 표현의 하나이자, 민족운동으로서의 성격을 함께 지닌다. 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혁명의 주체세력들이 자립경제와 자주적인 통일국가 형성을 주장한 것은 이러한 혁명의 성격규정을 뒷받침한다.해방과 50년대를 거치면서 한국의 정치?경제적 상황은 미국에 철저하게 종속되어 있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로 미국에 의해 좌지우지되고 있었다. 미국의 정치?경제정책은 우리 민족의 안정과 발전보다는 자국의 동아시아전략이라는 입장에서 입안 및 실행되었으며, 이에 따라 정치적으로는 이승만 독재정권을, 경제적으로는 원조경제의 파탄이라는 두 가지 고통을 한국의 민중들에게 부담시켰다.4.19 혁명에서는 이와 같은 대미종속 관계를 개선하려는 구체적인 움직임이 나타난다. 선배나 기성인들의 가르침이나 사주에 의하여 움직인 것이 아니라는 점은 4월 혁명이 지니는 가장 대표적인 특이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4월 혁명은 혁명적인 이데올로기를 가지고 있었던 것도 혁명적인 조직이 존재했던 것도 아니었다. 처음부터 혁명을 지휘하는 총사령탑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혁명을 위한 치밀한 작전계획 또한 없었다. 이는 혁명의 발전과정에서 결정적인 한계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4.19 혁명은 이승만과 자유당의 독재정권을 무너뜨린다. 이러한 성공은 어떻게 해서 가능했을까?4월 혁명은 위에서 언급한 부족한 부분을 민중들의 민주주의에 대한 순수한 열정으로 극복했다. 너무나도 비조직적이었지만 자연발생적으로 순식간에 전국적으로 확대되었기에 경찰, 깡패 등 물리적인 강제기구를 가지고 있었던 이승만 정권도 통제나 진압을 넘어설 수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민중의 폭발적인 역동성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된다. 민중의 힘은 위대하다. 4월 혁명은 그 누구라도 민중의 의사에 반하는 정치를 감행하는 정치세력은 역사의 준엄한 심판을 받는다는 것을 실증적으로 보여주었다. 더불어 4월 혁명을 계기로 민중은 무력하고 피동적인 존재가 아닌 스스로의 의지로 역사를 움직여 나가는 역사와 정치를 움직이는 주체임을 인식하게 되었다.(3) 한국 현대 정치사의 준거 틀로써의 의미4월 혁명이 한국 현대 정치사의 전개과정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형언하기 어렵다. 4월 혁명은 이승만의 12년 독재통치를 무너뜨린 그 자체만으로도 우선 큰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4월 혁명의 위대한 혁명성은 독재체제를 무너뜨린 것에만 근거를 두는 것이 아니라 근대를 거쳐 해방, 미군정기 그리고 정부수립이후 기득권을 향유하고 있던 특권계층의 상당수가 몰락하였다는 사실에 그 의미를 두고 있다고 하겠다. 만약 4월 혁명의 결과가 독재체제의 붕괴로만 그쳤다면 혁명으로서의 의미까지 부여받지는 못했을 것이다. 비록 4월 혁명에 의해 근본적인 사회적?경제적 변화가 뒤따르지 않았고 정치지배층의 성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