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으로서의 행복, 그 안의 남성의 위치-영화의 첫 시작은 안토니아가 생에 마지막 아침을 맞이하는 장면에서부터 이다. 안토니아는 담담하게 마지막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며 지난 삶을 돌이킨다. 영화는 안토니아의 어머니가 죽는 장면을 시작으로 안토니아와 다니엘의 삶, 테레사의 탄생, 그녀들의 삶, 사라의 탄생, 그리고 디디와 미친입술, 피터 등 주변 인물들의 이야기를 그려나간다. 그들의 모습은 평범한 가정과는 다르다. 안토니아의 가정에는 남자가 존재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결혼’이라는 매개가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녀들은 아이를 낳고, 행복한 가정을 꾸리며 살아간다. 이 영화는 이러한 그녀들의 삶을 통해서 무엇을 말하고자 한 것일까? 안토니아의 어머니는 한 평생을 남편이라는 굴레에 갇혀 살아갔다. 그녀 자신은 남편과 가정에 최고의 가치를 부여했지만 그녀의 남편은 그렇지 못했다. 가정과 그녀를 등한시하고 창녀들과 어울리는 남편을 보며 그녀는 평생을 괴로워했다. 그 괴로움은 남편이 죽은 뒤까지 그녀를 괴롭혔고 말이다. 이러한 어머니를 보며 안토니아는 자신을 저렇게 살지 않겠다는 결심을 한다. 그리고 안토니아는 남편이 없이도 행복하게 사는 방법을 알아냈다. 자녀에게 있어서 아버지의 역할의 중요성만 제외한다면 안토니아와 다니엘, 테레사의 삶은 어쩌면 여자로써 가장 행복한 삶인지도 모른다. "어쩌면"이라는 가정이 붙기는 했지만, 남편이 없는 삶이 가장 행복한 삶일지도 모른다는 건 그동안 가정 내에서의 여성에 대한 차별과 억압이 어떠했는지에 대한 반증이라고 볼 수 있다. 영화 내에서 가장 단적으로 이러한 여성들의 상황을 보여주는 것이 디디와 그녀의 어머니의 모습이다. 디디의 집안은 아버지를 필두로 한 두 오빠, 즉 남성들이 집안의 절대자이다. 그 남성들 사이에서 디디와 그녀의 어머니는 항상 희생을 감내해야만 했다. 이런 여성에 대한 차별과 억압은 친오빠의 여동생 강간이라는 결과를 낳는다. 이는 친오빠가 여동생 즉, 피터가 디디를 하나의 인격체로 인식하지 않고 있다는 것아온 그녀는 자신의 의사표현에 적극적이지 못하다. 또한 그녀는 미친입술이라는 배우자를 만나 한 남자의 아내라는 위치에서 매우 행복하게 살아간다. 디디가 행복할 수 있었던 것은 미친입술이 디디를 정말 사랑했고 아껴주었으며 그녀에 대한 차별이나 억압을 가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렇듯 영화는 안토니아(를 비롯한 그녀의 딸과 손녀)와 디디라는 캐릭터를 대비시키며, 두 여자의 대비되는 삶 속의 행복을 보여주며 두 가지 삶 모두 행복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결혼이라는 매개를 통해서도 행복해 질 수도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하지만 과거의 여성과 현재의 여성은 다르다. 여성들은 억압과 차별에서 벗어나고자 부단히 노력했고 소기의 성과를 이루었다. 현재의 여성은 남성과 동등한 교육의 기회를 가지며, 평등한 존재로 살아간다. 안토니아의 어머니나 디디의 어머님처럼 남편에게 의지하지 않아도 스스로의 길을 개척할 수 있고, 스스로의 행복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 자신의 인생을 즐기고 싶어 하는 여성들에게 있어 남편으로서의 남성은 필요 없을 지도 모른다. 이런 여성들의 마음에 가장 부합하는 인물은 아마 사라의 아버지인 시몬일 것이다. 그는 테레사를 사랑한다. 하지만 그녀에게 결혼을 강요하지는 않는다. 사랑하는 그녀 곁에서 사랑하는 딸을 돌보며 살아간다. 어떨 때는 부부와 같은 모습을 보이지만 결코 서로에게 강요를 하거나 부담을 주지는 않는, 그런 담백한 관계를 가진다. 더 이상 여성이 자신의 행복을 위해 남편이라는 존재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남편 아니, 남성은 여성의 행복에 있어 절대적인 요소가 아니다. 삶의 행복을 구성하는 선택이 가능한 한 요소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결과를 만들어 낸 것은 여성이라기보다는 남성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그동안의 억압적이고 권위적인 그들이 모습이 여성으로 하여금 남성, 남편이 없이도 행복하게 살아가는 방법을 발견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한다.암흑에 묻혀있던 유럽, 경건해야 할 어는 수도원에서 수도사들이 매일 한 사람씩 처참하게 맞아 죽는다. ('네 번째 나팔에 해와 달과 별이 없어지고'), 범인으로 추정되던 말라키 마저 기도 시간에 앞으로 고꾸라지며 뜻 모를 말을 남긴다. " 그건 1000마리 전갈의 힘을..... " ('다섯번째 나팔소리에 메뚜기가 전갈의 독침으로 사람들을 괴롭힌다.) 이 사건의 조사를 맡은 윌리엄 수사는 (영화에서는 노년의 숀 코네리가 이 역을 멋지게 연기했다) 시체의 손과 혀에 나타난 검은 반점을 단서로, 결국 이 죽음이 어떤 고대의 필사본과 관련되어 있음을 알아낸다. 그 책엔 독이 발라져 있어 침 묻힌 책장을 넘길 때마다 독이 입으로 들어가게 되어 있었다. 수사들의 잇달은 죽음을 부른 이 금지된 책은 무엇이었을까? 윌리엄 수사는 뛰어난 추리로 마침내 그 책을 찾아낸다. 윌리엄은 마지막 날 밤 도서관 밀실에서 범인과 마주친다. 지금 그 책은 범인의 손에 들려있다. 바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제2부 〈희극론>이다. 광신적인 맹인 수사 호르케, 그는 왜 그런 짓을 했을까? 이 죽음의 사슬은 필사본에 삽화를 그리는 일을 하던 아델모 수사의 호기심에서 시작된다. 그의 삽화는 히에로니무스 보슈의 그림을 연상시키는 온갖 기괴하고 우스꽝스러운 형상으로 가득 차 있었다. 새의 다리가 달린 작은 사람 머리, 등에 사람의 손이 달린 짐승, 다리가 삐죽 나온 털많은 머리, 얼룩말 무늬의 용....윌리엄 수사와 호르케의 첫 대결은 아델모가 시편에 붙인 이 기괴한 삽화의 해석을 둘러싸고 벌어진다. 이 우스꽝스러운 왜곡은 진리인가 거짓인가? 윌리엄은 그 삽화를 옹호한다. 하느님은 가장 심하게 왜곡된 사물을 통해서 나타나신다. 그러나 호르케는 그것을 단죄한다. 창조된 형태를 왜곡하는 건 해로운 그림이다. 진리와 선은 비웃음의 대상이 아니다. 진리와 선을 추구하는 인간에게 웃음은 악마다. 그리스도는 결코 웃지 않았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기지와 말장난도 진실을 드러내는 수단이며, 웃음도 진리 전파의 수단이 될 수 있다고 가르친다. 아델모가 필사적으로 그 금지된 책을 읽으려 한건 이오 그때가 오면 .... '하지만 이게 한갓 신학 논쟁의 문제였을까? 어쩜 이건 암흑시대의 봉건적 질서를 유지하는 문제였는지도 모른다. 마지막날 밤의 도서관의 밀실, 호르케의 기분 나쁜 목소리가 들려온다. '웃음은 농노들을 악마에 대한 공포에서 풀어줍니다. 그런데 이 책은 악마에 대한 공포에서 해방되는 것이 곧 지혜라고 가르칩니다.' 그는 《시학》 의 페이지를 뜯어 하나씩 불에 태운다. 말리려는 윌리엄, 그러자 호르케는 등불을 내던져 방에 불을 지른다. 불꽃이 사방으로 튀고 바람을 타고 수도원 전체로 번진 불은 삼일 밤낮을 계속 타오른다. (' 여섯 번째 나팔은 사자 머리를 한 말들의 출현을 알리고, 말의 입에서는 연기와 불과 유황이 쏟아지며... ') 아리스토텔레스의 〈희극론〉은 이렇게 해서 영원히 역사속으로 사라졌다.물론 이 이야긴 움베르토 에코가 상상한 허구다. 하지만 어쨌든 희극론이 사라진 것만은 사실이다. 그런데 《시학》의 제1부〈비극론〉만 남고 제2부〈희극론〉만 고스란히 없어지다니, 좀 이상하지않은가? 어쩌면 제2부는 정말 고의로 불태워졌는지도 모른다. 웃음을 두려워하는 자의 손에 말이다. 또 만약 그랬다면 그건 에코의 상상대로 아마도 엄숙한 중세에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어디 중세뿐일까? 이런 일은 절대적 진리를 참칭하는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나 일어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윌리엄과 호르케의 대립은 두가지 상이한 미학의 대립이었던 셈이다. 윌리엄 수사는 대단한 관찰력과 추리력을 가진 사람이다. 그는 매우 경험주의적이며 개방적인 태도로 불필요한 사변들을 도려낼 것을 주장한다.한편 호르케 수사는 광신적인 믿음을 대표하는데, 토마스아퀴나스의 미의 조건-적절성-을 신봉한다. 즉 모든 사물은 제모양을 제대로 갖추고 있을때에만 아름답다는거다. 결국 창조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우스꽝스러운 모습들은 아름답지 못하다는 얘기다. 어쨌든 중세를 지배하는 미학은 호르케의 미학이었다. 중세에는 웃음이 없는 시대였다. 사회는 늘 엄숙한 분위기에 젖어있었으며 교회는 종말론기술'즉 '두려움을 감추는 기술' 로 정의 된다고 한다. 비극의 효과인 '공포와 연민'의 반대로 '웃음'을 통해 카타르시스를 얻는것이 희극의 효과이다." 인류를 사랑하는 사람의 사명은 사람들이 진리를 보고 웃도록, 진리가 웃도록 만드는데 있는거야. 유일한 진리는 진리에 대한 광적인 정열에서 우리가 해방되는 길을 배우는데 있기 때문이지. " - extract from " Aesthetics Odyssey "작위적인 술수들을 냉철히 꿰뚫어보고,숨겨진 진리를 향유할 수 있는 지식이란 얼마나 멋진일인가 싶다.관객들과 평단으로부터 지나친 확대 해석과 과대평가 혹은 부당한 평가 절하를 거치며 스크린 밖으로 자기 진화를 거듭하던 매트릭스 3부작. 온갖 인문서적, 과학이론 다 갖다 붙이며 상상의 나래를 펴는 것도 좋고, 대놓고 들이대는 상징체계들의 천박함이나 현학적인 트릭에 불쾌감과 허탈감을 표시하는 것도 좋다. 하지만 내 판단에 매트릭스를 감상하는 가장 현명한 전략은 최대한 선입견을 배제한 채 있는 그대로 사이버 공간 영웅담을 즐기면서 보는 것이다. 제시된 사실을 토대로 추론은 하되 억측은 피하면서 감상하는 것이 올바르다고 생각한다. 낮에는 소프트웨어 회사 프로그래머로, 밤에는 네오(Neo)라는 해커로 활동하는 토머스 앤더슨은 모피어스와 트리니티의 도움으로 매트릭스의 허상에서 벗어난다. 사람들이 진짜라고 믿고 살아가는 1999년의 세상은 사실 AI에 의해 기억과 체험이 조작되고 통제되는 매트릭스의 가상세계다. 인류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인공지능(AI)이 지배하는 22세기에 핵전쟁으로 검게 뒤덮여 빛이 차단된 세계에서 기계는 태양을 대체하는 에너지원으로 단백질과 생체 전류를 얻기 위해 인간들을 그물망처럼 촘촘하게 엮인 인큐베이터에 양육한다. 인간 생명이 지속되기 위해서는 단순한 양분 공급 뿐 아니라 활발한 두뇌신경 활동이 필요하다는 시행착오를 거쳐 AI가 개발한 것이 매트릭스 시스템이다. 매트릭스의 실체를 간파하고 인간세계 싸이온(Xion)으로 탈출한 후 현실과 매트릭스 사이
영화가 시작되면서 LA의 한 외곽 도로변에서 발견된 시체를 수습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 곳에 출동한 한 흑인형사 그레이엄은 “LA에서는 아무도 서로를 건드리지 않아. 모두 금속과 유리 안에 갇혀 있지. 서로에 대한 느낌이 너무 그리워서, 서로를 느끼기 위해서 그렇게 충돌하게 되는 거야.”이렇게 말한다. 영화 초반 함축적으로 이 영화에서 이야기 하고자 하는 주제를 한명의 주인공을 통해 이야기 한다. 그리고 이 대사는 영화 마지막에 또 한 번 반복된다. 충돌을 의미하는 영화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영화는 다인종이 함께 모여 사는 미국에서 빈번히 발생하는 인종차별, 다른 인종에 대한 오해와 편견으로 발생하는 충돌과 문제에 대해 이야기 한다. 여러 인종의 여덟 쌍에 대한 36시간을 조명하며, 그들이 서로 충돌하게 되는 이야기를 그린 영화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백인인 지방검사 릭(브랜든 프레이져)과 그의 아내 진(산드라 블록)은 저녁에서 흑인에게 차를 강탈당하게 된다. 인종차별반대 등으로 알려진 지방검사 릭은 인지도와 지지도에 영향을 미칠까 흑인에게 차를 도난당한 것을 비공개로 한 채, 차를 찾는다. 그의 아내 진은 차를 도난당하자 마주오던 흑인을 피하지 않았다고 남편 릭을 비난하며, 집에 돌아가 열쇠공을 불러 자물쇠를 다시 달게 된다. 하지만 그 열쇠공이 멕시칸이란 이유로 내일 다시 열쇠공을 불러 자물쇠를 바꾸자고 한다. 또한 백인이 아닌 가정부에게도 역시 차갑게, 무시하듯 대한다. 흑인이자 방송국 PD인 카메론(테렌스 하워드)과 아내 크리스틴(탠디 뉴튼)는 모임을 돌아오다 지방검사 릭의 도난당한 차와 동일하다는 이유로 백인 경찰들에게 검문검색을 받게 된다. 백인 경찰 라이언(맷 딜런)과 핸슨(라이언 필립)은 지방검사 릭의 도난당한 차를 찾기 위해 도로 순찰을 하다가 차에서 문란한 행위를 하는 흑인 운전자의 차를 세우게 한다. 핸슨은 말리지만, 라이언은 흑인이라는 이유로 카메론과 크리스틴에게 굴욕감을 주며 그들은 검문검색하고 사과까지 받고 돌려보낸다. 라이언은 흑인을 옹호하고 고용하였던 그의 아버지가 현재는 병으로 고통 받고 제대로 보상받지 못하는 모습을 보며, 오히려 흑인에 대한 반감을 키우게 된 백인 경찰이다. 이란인 파라드는 슈퍼를 운영하고 있으며 영어를 잘 하지 못하는 고지식한 사람으로 나온다. 9.11과 아랍계의 여러 테러 소식을 접할 때마다 백인들의 강도와 비난에 파라드는 총을 구매하게 된다. 또한 문이 낡아 제대로 닫히지 않자, 멕시칸 열쇠공 대니얼을 불러 수리하도록 요청한다. 하지만 열쇠공 대니얼은 문이 문제가 있다며 열쇠가 아니라 문을 수리해야 한다고 충고하지만 파라드는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비용을 더 받기 위함이라고 대니얼을 몰아세운다. 멕시칸 열쇠수리공 대니얼은 빈민촌에서 살다가 총 소리를 무서워하는 딸을 위해 백인들이 많이 사는 곳 근처로 이사를 온다. 또한 딸 아이를 위해 열심히 일을 하는 열쇠수리공으로 나온다.흑인형사 그레이엄은 어머니와 동생 피터와 따로 사는 형사로 나온다. 그는 집을 나간 동생 피터를 찾으라는 어머니 말을 무시한 채 흑인 형사로써 자신의 명예를 지키기에 바쁘다. 흑인청년 피터와 앤쏘니는 여느 흑인 청소년처럼 거리를 배회하며 지낸다. 그러다 지방검사 릭과 흑인PD 카메론의 차를 강탈하는 등의 불법을 저지르는 청소년들이다. 또한 너무나 잠깐 등장하기는 하지만 아시아인들의 불법이민을 일을 하는 한국인 부부가 나오며, 주로 돈을 벌기 위해 일만을 하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영화의 주 줄거리에서는 조금 벗어나 있는 등장인물이다. 이러한 등장인물들의 일상적인 하루를 보여주며, 점차 충돌이 발생하는 모습을 그려준다. 백인인 지방검사 릭은 일로 너무나 바쁘며, 그의 아내 진이 원할 때 곁에 있어주지 못한다. 그의 아내 진은 집에서 우연히 사고를 당해 여럿 지인에게 연락을 시도했지만 정작 그녀의 병실을 지켜준 것은 그녀가 냉담하게 대했던 유색인종 가정부였던 것이다. 그녀는 그로 인해 자신의 잘못을 느끼며 가정부를 자신의 가장 친한 친구로 인정한다. 흑인이자 방송국 PD인 카메론과 크리스틴은 백인 경찰들에게 당한 모욕과 굴욕으로 인하여 서로 갈등하게 된다. 또한 카메론은 TV시리즈를 제작하는 과정에서 흑인차별을 하는 등의 모습을 겪으면서 현재 미국의 인종차별에 힘들어 한다. 사과를 하러 온 크리스틴을 그냥 돌려보내는 카메론, 집으로 돌아가던 중 크리스틴은 교통사고를 당하여 차가 전복된다. 자신에게 굴욕감을 주었던 백인 경찰 라이언이 크리스틴을 구하려들자 거부하는 크리스틴, 하지만 절박한 상황과 흑인을 크리스틴을 정말로 구하려 하는 모습에 구조를 요청한다. 하지만 흐르는 기름으로 차가 폭발하려하자 라이언의 동료들은 그만을 차에서 꺼내자, 라이언은 폭발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다시금 차로 들어가 그녀를 구해낸다.이란인 파라드는 강도를 맞아 자신의 전 재산인 슈퍼를 몽땅 털리게 되고, 열쇠공의 문을 고치라는 조언을 듣지 않았다는 이유로 과실로 처리가 되어 보험도 적용받지 못하게 된다. 그런 그는 멕시칸 열쇠공 대니얼의 책임으로 돌려, 만일을 위해 준비했던 총을 가지고 대니얼을 찾아간다. 그리고 그를 죽이려 총을 쏘려는 순간 대니얼의 어린 딸이 달려든다. 다행히 파라드의 총알이 공포탄이여서 아무도 다치지는 않았으며, 파라드는 자신의 과실을 그 어린 딸이 구해주었다며, 자신의 천사라 믿는다. 흑인 청년 앤소니와 피터는 또 한 번 차를 훔치는데 이번엔 흑인PD 카메론의 차이다. 경찰이 뒤쫓고 하는 통에 피터는 도망을 가고 엉겹결에 앤소니는 그의 차에 올라타게 된다. 총으로 카메론을 위협하지만, 전혀 동요하지 않는다. 카메론은 앤소니와 같은 흑인청년들로 인해 전체의 흑인들이 차별을 받는다는 생각한다. 그리고 대치한 경찰에게 크리스틴과 함께 굴욕을 당했던 때와는 정 반대로 흥분하며 항의한다. 흑인이기에 백인에게 무조건 잘못을 빌어야 하며, 부당한 행위에 대한 처벌을 감수해야 하는 것에 대한 항의다. 백인 경찰 핸슨은 이러한 카메론을 알아보며, 어제의 전 파트너 라이언의 잘못에 대해 용서를 빌듯, 흥분하며 항의하는 카메론을 다른 백인 경찰들이 총을 쏘지 못하게 도움을 준다. 그리고 카메론 역시 자신의 차를 훔치려 했던 앤소니를 그냥 놓아준다. 차를 훔치다 실패한 피터는 오랜 방황을 끝내고 자신을 기다리는 엄마의 품으로 돌아가려고 LA의 외곽길을 걷는다. 차를 세워 타고 가려하지만, 흑인인 그를 아무도 태워주지 않는다. 백인 경찰 핸슨이 차를 세워 그를 태운다. 하지만 이야기 도중 오해가 생겨 말다툼을 하게 되고, 주머니에 손을 넣는 피터를 보자 백인 경찰 핸슨이 자신의 총을 꺼내 피터를 죽인다. 하지만 그의 주머니에선 자신의 차에 올려져 있는 것과 같은 수호신의 미니어처가 들어 있었다. 인종차별을 하지 않는다고 믿었고 그렇게 행동했던 핸슨도 자신도 모르게 이러한 상황에 처하자 다른 사람들의 시선과 의식과 동일하게 느꼈던 것이다. 놀란 핸슨은 차를 세워 그를 버려두고 황급히 도망간다.
전 세계 영화 팬들이 기다려온 영화로 널리 알려졌던 영화이자, 글루미 썬데이 제작진의 두번째 야심작으로 손꼽혔던 블루프린트는 전 세계 영화팬들을 매혹시켰던 주옥같은 영화 글루미 썬데이. 당시 세계적인 영화 사이트인 ‘IMDB’에서 관객 평점 역대 1위를 기록했던 글루미 썬데이는, 수백명의 사람들을 자살로 이끈 전설적인 노래 ‘글루미 썬데이’에 관한 실화를 바탕으로 해서 만들어진 격정의 로맨스였다. 한 여자와 세 남자가 벌이는 이 매혹적인 사랑 이야기는, 지난 2000년 국내 개봉 당시 우리 영화팬들 사이에서도 거의 ‘신드롬’에 가까운 인기를 누렸다. 글루미 썬데이의 롤프 슈벨 감독을 비롯해 촬영, 편집, 음악 등 당시 제작진이 다시 모여서 만든 블루프린트 역시 글루미 썬데이가 선사했던 파격, 도발, 격정의 품새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작품! 영원한 재능을 위해 또 다른 분신을 만들어 내고야 마는 자기애의 그릇된 욕망은 "당신을 잃느니 반쪽이라도 갖겠다"던 글루미 썬데이에 비견될 만큼 도발적이다. 올 봄, 블루프린트는 글루미 썬데이의 명성에 이어 또 다시 거부할 수 없는 유혹으로 우리 곁을 찾아왔다. 인간복제, 21세기 가장 뜨거운 화두, 화제와 논쟁의 베스트셀러 소설 영화화 블루프린트는 베스트셀러 작가이자, 유수의 문학상에서 수상한 바 있는 샤를로테 케르너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삼았다. 독일 청소년 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한 소설 ‘블루프린트’는 전 세계 12개 언어로 번역 출간될 만큼 일대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작품이다. 인간 복제가 가까운 미래에는 현실이 될 수도 있다는 가정 하에서 쓰여진 소설 ‘블루프린트’는 모녀인 동시에 일란성 쌍둥이 자매이기도 한 주인공들의 이야기를 설득력 있게 그려내 수많은 독자들을 감동시켰다. 소설은 자신을 복제해낸 여인의 죽음 후에야 진정한 인간성에 눈뜨는 복제인간 ‘시리’의 회고 형식으로 진행된다. 시리가 자신의 어머니이자 동시에 쌍둥이 언니인 이리스를 향해 애증이 뒤엉킨 감정을 느껴가며 마침내 독립된 자아로서 거듭나는 과정이 때로 격정적으로, 때로 섬세하게 그려졌다. 신의 영역에 대한 정면 도전, 혹은 인류를 위한 과학의 승리 등등… 다양한 평가와 더불어 아직까지도 뜨거운 찬반 논쟁을 불러 일으키고 있는 인간복제 문제. 이제, 이 시대 가장 뜨거운 화두가 소설책이 아닌 스크린에서 더욱 더 도발적이고 드라마틱하게 펼쳐진다. 프란카 포텐테 엄마와 딸, 1인 2역으로 생애 최고 연기력 과시을 과시했다. 블루프린트의 두 주인공인 이리스와 시리는 모녀인 동시에 외모도 똑같은 일란성 쌍둥이 자매다. 당연히 배우에게 남겨진 숙제는 1인 2역을 어떻게 완벽히 소화할 것 인가였다. 제작진에게 희망을 준 것은 다름 아닌, 독일 출신의 세계적인 배우 프란카 포텐테였다. 할리우드에까지 영역을 넓혀 왕성하게 활약중인 프란카 포텐테는, 현재 전세계적으로 가장 각광을 받고 있는 독일 출신의 여배우. 의 빨간머리 주인공의 강렬한 캐릭터를 거쳐 등으로 할리우드에 안착한 프란카 포텐테는, 에서 1인 2역을 완벽하게 연기하면서 그녀 생애 최고의 연기력을 과시했다. 존경과 사랑의 관계에서 점점 애증과 경쟁의 관계로 변해가는 이리스와 시리의 모습은 그것이 한 배우에게서 나왔다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을 정도!! 욕망과 죄의식 사이에 선 이리스와 분노와 혼돈에 휩싸인 시리. 이 두 캐릭터 모두가 보는 이의 공감을 얻게 되는 이유는 프란카 포텐테의 출중한 연기력 때문이라고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니다. 작품의 줄거리를 보면 이렇다. 전세계적인 명성을 떨치고 있는 피아니스트 ‘이리스’. 그녀는 다발성 경화증이라는 불치병 선고를 받고 서서히 죽어가고 있다. 찬란했던 삶이 덧없이 사라진다는 사실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이리스. 무엇보다 자신의 음악적 재능만은 꼭 살리고 싶다는 강한 욕망을 품기에 이른다. 그러다가 야망이 넘치는 ‘피셔’ 박사를 만나게 되고, 두 사람의 은밀한 공모 하에 인류 최초의 복제 인간인 ‘시리’를 만들어낸다. 모녀인 동시에 쌍둥이 자매이기도 한 이리스와 시리. 시리는 이리스의 엄격한 양육 속에 완벽한 피아니스트로 거듭난다. 하지만 다정하고 따스했던 두 사람의 관계는 피셔 박사의 야욕 때문에 파국을 맞는다. 피셔 박사가 시리의 존재를 언론에 폭로해 자신의 천재성을 과시하고, 그로 인해 시리가 자신의 탄생에 얽힌 비밀을 알게 된 것! 이제 시리는 이리스를 향한 증오 속에서 걷잡을 수 없는 방황의 길로 들어서고, 이리스 또한 젊고 재능있는 자신의 분신인 시리에게 묘한 경쟁심을 느끼게 되고 만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 톰 크루즈주연의 영화 마이너리티리포트, 예전에 텔레비전에서 여러 번 본 영화라 조금의 거부감도 없이 다가 갈 수 있었다. 영화는 이렇다. 2054년 워싱턴, 범죄가 일어나기 전 범죄를 예측해 범죄자를 단죄하는 최첨단 치안 시스템 프리크라임은 시민들의 안전을 지켜주는 든든한 존재이다. 프리크라임 시스템은 범죄가 일어날 시간과 장소, 범행을 저지를 사람까지 미리 예측해내고, 이를 바탕으로 프리크라임 특수경찰이 미래의 범죄자들을 체포한다. 프리크라임 팀장인 존 앤더튼은 천부적인 감각으로 미래의 범죄자를 추적해내는 능력을 인정받고 있다. 그가 프리크라임에 최대한의 열정을 기울이는 것은, 6년전 자신의 아들을 잃은 아픈 기억을 다른 사람에게만은 되풀이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한편, 앤더튼은 프리크라임 감사를 위해 연방정보국에서 파견된 대니 워트워와 사사건건 대치하는 가운데 프리크라임 시스템은 믿을 수 없는 살인을 예견한다. 그것은 바로 앤더튼 자신이 누군가를 살해하는 범행 장면. 이제 프리크라임의 모든 시스템이 앤더튼을 추격한다. 앤더튼은 음모를 파헤치기 위해, 미래를 바꾸기 위해 직접 미래의 피살자를 찾아 나선다. 자신이 저지를 범죄 현장에 한 발짝씩 다가갈수록 앤더튼 앞에는 믿을 수 없는 사실들이 드러나고, 앤더튼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예견된 희생자가 나오는데. 이제 그의 미래는 돌이킬 수 없는 것이 되고 마는가... 의 SF 작가 필립 K. 딕의 1956년도 단편 소설을 기본 원작으로 헐리우드 최고의 흥행 감독과 최고 흥행 배우인 스티븐 스필버그와 톰 크루즈가 만난 미래 사회의 경찰을 소재로 한 SF 액션 영화. 톰 크루즈는 범죄 예방 프로그램을 이용하여 범죄를 미리 막는 경관으로 출연하여, 의 도입부처럼 스턴트 없이 직접 액션 연기를 펼쳤다. ‘단독 리포트’라고 번역되는 원제의 의미는 이렇다. 영화 속 미래에선 3명의 예지자에 의해 범죄가 예견되면, 리포트라고 하여 범죄 대상과 범죄자의 이름이 새겨진 둥근 공이 경찰에 제출된다. 보통 3명로 제공하고 있다. 우선 비행체에서 경찰대원들이 낙하할 때, 낙하산이나 로프를 대신할 수 있는 로켓을 등에 짊어지고 뛰어내린다. 마치 와 흡사한 도구로 공중에서 정지하거나 수직, 수평 이동이 가능하다. 스턴트 코디네이터를 담당한 브라이언 소머즈가 참여한 이 장면은 200개의 케이블과 2.5킬로미터짜리 케이블을 이용하여 6명이 공중에 뜬 것처럼 보이게 하였다. 이 장면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주인공의 도주와 결투씬에서는 천장을 뚫거나 땅에 부딪히는 장면으로 발전시켰다. 미래의 경찰이 사용하는 총은 살상용이 아닌 제압용 충격파 총이다. 톰 크루즈가 이 총을 사용할 때 장전하는 동작이라든가 타겟에 맞았을 때의 장면이 마치 오우삼의 총격전 영화처럼 멋있게 처리되었다. 이 총 외에도 구토를 일으키는 제압봉도 등장한다. 또 차량 자동화 제조 공장에 빠진 주인공의 아찔한 장면도 압권인데, 촬영감독 카민스키에 따르면 컴퓨터 그래픽 측면에서 그 장면만큼 정교한 장면이 없을 것이다, 우리는 가짜가 아닌 실제 자동차를 생산하는 진짜 기계를 가진 조립 라인을 만들어 촬영했으며, 다른 많은 기계들은 컴퓨터그래픽으로 보충했다””며 이 장면을 소개하고 있다. 총 481개의 CG가 등장하는 이번 영화에서 ILM은 디지털 세트 확대기와 그들의 소프트웨어를 통해 21세기의 빌딩으로 가득 찬 도시를 표현했는데, 고공에서 워싱턴DC를 촬영한 후, 여기에 새롭게 진화된 모습을 반영하여 완성시켰다고 한다. 미래형 감옥 장면을 보면, 범죄자들이 튜브에 수감되는데, ILM은 스티븐 설리번이 개발한 3D포토모델링이라는 소프트웨어로 3D인간을 창조하여 위로 솟을 수 있는 감옥 안의 튜브들이 거대한 공간에 차곡차곡 쌓아진 모습으로 처리하였다. 이번 작품의 가장 큰 볼거리인 미래의 교통혼잡 없는 자기 부상 시스템에서는 자동차들이 외벽 도로를 따라 수직, 수평으로 질주한다. 일반 자동차의 질주와 엘리베이터의 방식이 합쳐진 것이다. 자동차의 모습은 , 등에 참여했던 자동차 디자이너 해롤드 벨커가 고안했다. 영화 수를 보냈다. 또, 워싱턴 포스트의 디슨 호우는 "고전적이면서 오싹한 준-히치콕 타입의 작품."이라고 호평을 보냈으며, 할리우드 리포터의 커크 허니컷은 "스필버그 감독의 최고작 중 하나."라고 칭하는 등 모든 평론가들은 이 거장 감독과 일중독 배우 콤비의 최신작에 경의를 표했다.카메론 크로우 감독이 버스 승객으로, 카메론 디아즈가 톰 크루즈가 쫓기는 장면 중, 자동차 안에 타고 있는 사람으로 깜짝 출연했다. 옥의 티. 우선 톰 크루즈가 수배자 처리된 이후에도 자신의 동공을 가져가 예언자가 있는 문을 통과하는 것은 발전된 미래의 통제 시스템에서는 다소 상식 밖이다. 또 후반부에서 톰 크루즈의 전 부인이 권총 한 자루로 감옥 안에 수감된 톰 크루즈를 빼내는 장면 역시 너무 쉽고 간단하게 처리되었다. (예지자에 의한 범죄 예방 시스템을 갖췄기 때문에, 어쩌면 교도관에 대한 ‘총의 위협’은 더이상 먹히지 않을 수도 있다.) 그밖에 과학적으로 동공의 홍채를 인식하는 시스템에서 빛의 양에 따라 동공 크기가 변해야 홍채인식기가 작동되므로 죽은 사람의 동공은 인식이 되지 않는다는 주장도 있다. 죽은 사람의 동공을 이용하는 장면은 에도 등장한다. 주인공은 아들의 사진을 보고 순간적인 충동으로 돈 받고 유괴범을 자칭하는 사람을 죽일 뻔 한다. 이때 예언자는 계획적 살인으로 판단하는데, 그렇다면 갈색공이 아니라 사건 직전에 빨간공이 나와야 바른 예언이다. 이에 대한 반론. 이유는 간단하다. 죽인 자는 존 앤더튼이기때문에 범인을 가리키는 공에 존 앤더튼이 찍히는 건 당연하다. 하지만 범행자체는 1. 국장이 이미 계획한 범죄이므로, 2. 존 앤더튼이 사건이 일어나기 며칠전 미리 사건이 일어나는 영상을 보고 그대로 따라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에 갈색공이 나왔다. 즉, 미리 계획된 범죄이거나 미리 살인을 할 것이라는 걸 안 상태에서 저지른 범죄이기 때문에 갈색공이 나온 것.자유의지의 할리우드적 패배로써, 첨단 세계를 무대로 펼쳐지는 고전적인 철학 논쟁의 테마를 그린 마이너리티 리포트.. 지금의 기술로도 어느 정도 시연이 가능할 것이다. 오직 한 사람의 귀에만 소리가 들리게 하는 시스템은 이미 개발되어 있다. 가택수색에 사용되는 스파이더 역시 조그만 곤충을 닮은 첩보로봇의 형태로 이미 개발이 진행되고 있다. 안구이식수술도 현실이 된 지 오래. 2054년쯤이면 그것은 이미 거리에서 돌팔이 의사들이 시술하는 싸구려 기술이 된다. 홍채인식 역시 여러 곳에서 신원을 확인하는 수단으로 이용되고 있다. 원래 이 기술은 홍채의 움직임으로 신원을 파악하게 되나, 영화에서는 그것으로 움직임이 없는 죽은 사람의 안구나 신체에서 분리된 안구까지 인식한다. 기술에 대한 몰이해나 허구에 허용되는 부정확성에서 나온 설정이겠지만, 미래에는 그 역시도 가능해지지 말라는 법이 없지 않은가. 닥터 히네만은 정원에서 유전자 조작 식물을 가꾼다. 움직이는 것으로 보아, 동물의 유전자가 섞인 ‘키메라’로 보인다. 우리는 이미 동물과 식물을 디자인해 쓰고 있다. 아예 유전자 조작을 예술 삼아 하는 사람들도 있다. 식물 키메라는 오래전부터 존재해왔고, 동물 키메라 역시 1985년 염소(goat)와 양(sheep)을 합쳐놓은 지프(geep)의 탄생으로 이미 현실이 되었다. 그렇다면 식물과 동물의 종간교배(cross breeding)로 언젠가 식물이 움직일 날도 오지 않을까? 하지만 가장 매력적인 것은 역시 미래주의적인 ‘인터페이스’ 디자인. 거기에는 모니터도 없고, 키보드도 없고, 마우스도 없다. 유저는 센서가 달린 검은 글러브만으로 영상을 열고, 닫고, 확대하고, 축소하고, 편집한다. 데이터의 입력과 출력은 철저하게 직관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유저가 좌석에 앉으면 바로 앞의 빈 공간에 가상의 작업대가 나타난다. 작업을 마치면 이 가상의 이미지는 곧바로 사라져버린다. 이른바 증강현실(augmented reality)을 이용한 인터페이스 디자인이다.‘홀로스피어’에 투사되는 예지자들의 비전. 앤더튼이 몸짓으로 편집해 허공에 띄우는 이미지. 홀로그램을 이용한 ‘디스플레이’는 하드웨어의 프오르간을 연주하는 영상으로 처리한 것이다. 이 얼마나 강렬한 시각적 은유인가. 영화에는 두개의 갈등이 존재한다. 플롯을 이끌어가는 것은 물론 앤더튼 반장과 버지스 국장 사이의 대립이다. 하지만 정작 철학적으로 흥미로운 갈등은 앤더튼과 법무성 수사관 위트워 사이에 일어난다. 두 사람의 대립은 ‘결정론’과 ‘자유의지론’ 사이의 해묵은 철학적 논쟁의 재연이라 할 수 있다. 가령 예언이 살인을 예방하면 예언은 어긋난다. 반면 예언이 적중하면 예방은 실패한다. 위트워는 이를 ‘근본적 패러독스’라 부른다. 이 역설은 당연히 사법적 모순으로 이어진다. “이 시스템에는 법적 오류가 있소. 법을 안 어긴 사람을 체포해서는 안 되죠.” 하지만 앤더튼과 그의 부하들은 예언의 결정론을 믿는다. “하지만 그들은 법을 어길 사람들이잖소. 예지자들의 예언은 한번도 틀린 적이 없소.” 이 결정론적 사고가 살인을 아직 저지르지 못한 이들을 구금하는 근거가 된다. 하지만 위트워가 보기에 이는 사법적 난센스다. 살인을 하다가 체포당한 그 사람들이 마지막 순간에 단념했을 수도 있지 않은가? 그러나 범죄예방시스템은 이 자유의지의 가능성을 배제한다. 이는 곧 앤더튼 자신의 운명이 된다. 그는 자신의 운명을 피하려 하나, 그럴수록 살인자가 될 운명에 더 가까이 다가설 뿐이다. 마침내 리오 크라우를 쏘려는 순간, 아가사가 외친다. “당신은 미래를 알잖아요. 당신은 선택할 수 있어요.” 앤더튼은 총구를 내리고 행위의 자유를 선택한다. 하지만 순간 리오 크라우가 총을 빼앗으려 달려들고, 당황한 앤더튼은 그에게 총을 발사하게 된다. 이로써 예언은 적중하고, 자유의지마저 결국은 운명의 수레바퀴를 구성하는 하나의 부속품으로 드러난다. 이는 사실 문명의 나이만큼이나 오래된 모티브다. 가령 오이디푸스를 생각해보라. 예언을 피해 국외로 나간 것이 외려 아버지를 살해하는 계기가 되지 않았던가. 이 신화적 모티브의 복귀는 아마 영상문화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영상은 문자문화의 선형적 의식을 파괴한다. 원인과 결과는 더 같다.
극단 노을 제 11회 정기공연눈(雪)의 여인군대를 전역하고 처음으로 대학로에서 참여하게 된 작품인 눈의여인.. 기대 반 걱정 반으로 공연이 시작하기 전 몇 일 전부터 연습에 함께 참여하게 되었었다. 군대에 있는 동안에도 휴가 나올 때 마다 극단 노을에 작품을 빠지지 않고 보았었기에 요번 작품인 눈의 여인은 어떤 공연이 나올까에 대한 기대감을 가지고 연습실로 발걸음을 향했다. 다행히 노을에 친한 선후배들이 있었기에 낯을 많이 가리는 나에게는 쉽게 하루하루를 적응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던 것 같다. 처음 배우들의 런스루를 보았을 때 나에게 든 느낌은 그 동안 노을에서 공연했던 작품과는 차별화 된 작품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차별화란 말은 작품성에 대한 깊이에 차이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대학로 관객들이 원하는 시각을 잘 반영한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예전 일이지만 유리가면이라는 공연에 참에 한 적이 있었다. 그때도 역시 장기공연을 바라보고 하는 작품이라 그런지 처음부터 많은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첫 공연이 올랐다. 하지만 관객이 쉽게 공감하고 느낄 수 있는 시각에서 다가가서 그런지, 공연의 성패를 관객의 반응을 가지고만 단정짓는 것은 옳지 못하지만, 성황리에 공연을 마칠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극단 노을의 눈의여인도 전체적인 것이 완벽하게 준비 된 상태에서 공연의 막이 올랐던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전반적인 스토리 자체가 관객에게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여지가 있고, 나에 짧은 소견이지만, 대학로 관객들이 정말 원하는 공연이 되었던 것 같기는 하다. 눈의 여인에 전반적인 스토리는 이렇게 진행이 된다. 산장에 배우들과 함께 초대된 관객들! 이 이야기는 세 명의 친구들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그들 중 한명인 작가는 나머지 두 친구를 산장으로 초대하고, 또 자신을 추종하는 다른 한명의 뜻밖의 방문을 받는다. 이들과 함께 관객들은 낯선 산장에 초대되어 그들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를 목격하고, 그들의 파탄을 경험한다. 그들의 머릿속에 떠다니는 이야기들이 극중극으로 펼쳐진다! 작가 안지운은 자신이 완성한 대본의 이야기를 친구들에게 들려주며 극중극이 펼쳐진다. 그 이야기들은 아름다운 동화처럼, 혹은 경쾌한 뮤지컬처럼, 또한 은유와 상징으로 가득한 판타지처럼 느껴진다. 이야기는 결국 산장과 환상의 세계를 오가며 전개되며, 또 극중극의 여주인공이 가수로 성장하며 벌이는 콘서트 역시 관객들에게 색다른 느낌으로 와닿았다. 그런데 이야기 도중 친구들 각자의 입장에서 이야기는 변질되게 된다. 이 작품의 목표는 산장에 모인 모든 인물들이 각자 자신의 입장에서 바라보고 행동한다는 것이다. 그들의 서로 다른 입장은 작가인 안지운의 작품을 점점 변질시켜나가게 되고, 마침내는 안지운에게 혼돈을 일으켜 극중 인물이 사라지고 이야기 자체가 없어지는 파멸을 경험하게 된다. 결국 그들의 관계는 파탄 나고 모두들 이 산장을 떠나야만 하게 된다.여기서 작품의 모티브는 안데르센의 동화를 현대적으로 해석했다는데 있다. 사실 안데르센의 눈의 여왕은 따뜻한 사랑에 관한 이야기다. 주인공 여자의 사랑이 결국 눈의 여왕을 물리치고, 변한 남자의 마음을 녹인다는 모티브를 동화로 펼친 것이다. 나는 한달이란 시간동안 매번 공연을 보면서 이 이야기가 현대적으로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 하는 궁금증을 갖게 되었다. 나의 결론은 눈의 여왕은 돈과 권력과 명예로 얼어붙은 이 거대한 도시의 마음을 의미하고, 변심한 남자의 마음은 이 도시의 세계에 매료된 속물성을 의미한다고 봤다. 그래서 여주인공이 이 남자를 찾아서 떠나고, 찾을 수 없다는 것을 안 여자는 자신을 알리기 위해 가수가 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연을 보면서 관객들은 느끼겠지만, 콘서트적인 부분과 굉장히 많은 극중극이 가미되어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실 첫 공연을 하기전 연습기간동안 이렇게 많은 장면변화와 극중극이 실제 공연 할 때에 가능 한 것인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역시 세상에 안되는 것은 없다라는 말이 있듯이 극중극의 숙제를 잘 풀어나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극중극의 내용을 보자면, 극중극의 여자주인공은 천상의 목소리로 자신의 사랑하는 단 한사람만을 위해 노래한다. 하지만 그가 떠나자 그녀는 그를 찾기 위해 가수가 되어 노래를 한다. 숭고했던 그 노래는 점점 이 여자의 마음처럼 변해가고, 록음악으로 발전한다. 여자보컬이 들려주는 록과 발라드와 소울의 다양한 장르를 관객들에게 선사한다. 음악은 이 작품의 흐름처럼 다양하게 변화되며 들려지고 있었다. 하지만 어떻게 보면 이렇게 콘서트 장면의 부여가 중요한 만큼 배우의 연기 못지않게 노래실력 또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는 것을 배울 수 있는 부분이었다.이렇듯 이 극은 네 명의 인물이 한적한 산장에 다시 만나면서 벌어지는 리얼리티 드라마이자, 여주인공이 극중극으로의 여행을 떠나면서 가수로서의 성장과 파멸을 다루는 판타지극이기도 하다. 특히나 신비로운 눈의 여인의 등장은 안데르센의 동화를 현대적으로 각색한 새로운 판타지를 선사하고 있었다. 또한 간간이 펼쳐지는 여주인공의 콘서트로 록, 발라드 등의 다채로운 노래가 관객에게 더욱 쉽게 다가갈 수 있는 부분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볼거리와 들을거리로만 눈의 여인이란 작품을 판단 할 수만도 없다는 것을 관객들은 알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작품에서 내면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은 인간들의 이기적 욕망과 속물성에 관한 이야기. 작가와 영화기획자 배우로 성장한 세 친구들은 오랜만에 산장에 모여 예전처럼 작가인 안지운의 신작을 가지고 이야기를 나누지만, 이미 각자의 위치에서 속물성을 키워온 이들은 각자 자신의 입장에서 작품을 이용하려 들고 있다. 그들의 욕망은 충돌하고, 각자의 입장에서 해석하고 난도질한다. 결국 작가는 자신의 작품을 불태우고, 이에 대한 소유욕을 키운 배우 정유란은 절규한다. 인간은 이기적인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음을 이 작품은 보여주고자 하고 있었던 것 이었다. 이런 것을 관객들은 생각할 여유를 갖을 수 있었을까? 알면서도 항상 맹신하고 있는 것이 공연을 한 번 보고 결론지어 버리는 것은 옳지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요번 눈의 여인에 참여하면서 배운 것들은 산연기, 극복의지, 극적행동...외에도 배우와 스텝사이에도 긴밀한 관계가 계속해서 유지되야 공연에 성패를 말 할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사실 오퍼란 부분에 대해서 한 번도 공연내내 배우와 호흡해야 된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공연 전체에 있어서 배우와 오퍼의 호흡조차도 그 어느 것보다도 중요한 부분이라는 것을 알았다. 사실 방학기간에 절반이상을 눈의 여인과 함께한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수많은 생각들이 내 머릿속에서 오고갔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어떤 결론이 나더라도 나를 더욱 성장하게 만드는 한 부분이라는 생각이 든다. 매번 공연을 하고 나면서 나도 모르게 내가 마음 한구석에 자리잡게 하는 것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