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프 조직개편과 방향전환 논쟁- 조중곤 , 윤기정 -1. 서론1927년 초반에 시작된 카프의 제1차 방향전환론은 자연생장기의 프로문학 이론을 반성하고, 새로운 단계로의 전환을 시도한 논의이다. ‘자연생장성에서 목적의식성으로, 경제투쟁에서 정치투쟁으로, 조합주의적 투쟁에서 전선적 투쟁으로’를 슬로건으로 하여 제기된 방향전환론에 대한 논의는 카프 자체만의 필요에 의해 산출된 논의라기보다는 조선 전체 무산계급운동의 방향전환, 더 나아가서는 전 사회운동의 방향전환과 맥락을 같이 하는 논의이다. 카프의 방향전환에 관해서는 각 논자들이 매우 상이한 견해를 지니고 있었다. 이는 필연적으로 논쟁을 유발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조중곤의 과 윤기정의 를 통해서 카프의 방향전환논쟁에 대한 고찰을 해보도록 하겠다.2. 본론1. 조명희의 「낙동강」에 관한 논쟁목적의식적 방향전환론에 대해 활발히 이론투쟁이 전개되고 있을 때 그로부터 벗어나 작품비평에 치중하고 있던 김기진은 조명희의 소설 )을 끌어들여 제 2기 작품론을 개진하였는데, 이것은 당시 주요한 쟁점이었던 목적의식 문제를 작품 내적인 문제로 끌어들인 것이다.포석 조명희의 소설 「낙동강」을 놓고 이루어진 팔봉과 조중곤의 전혀 상반된 평가 속에서 과연 진정한 제2기적 작품, 즉 방향전환 이후의 작품이란 어떠해야 하는가의 문제와 더불어 어떻게 그 작품 활동을 지도해 나갈 것인가의 문제가 대두되었다. 먼저 팔봉은 「시감이편」(『조선지광』,1927년 8월)에서 「낙동강」에 대해 “이만큼 감격으로 가득찬 소설이 - 문학이 있었던가 … 이것은 현재 조선 - 1920년 이후 조선 대중의 거짓없는 인생기록” 이라고 격찬하고는 그것이 “제 2기에 선편을 던진”작품이라고 평가했다. ) 또한 독자대중의 감정조직에 성공했으며, 각 인물에 상응한 성격과 풍모를 부여한 점에서 재래의 공상적 행방불명의 빈궁소설에서 벗어나 제 2기에 선편을 던진 작품이라 하였다.이 글은, 박영희와의 내용·형식 논쟁이후 카프 운영의 주도권을 넘기고 난 김기진이 방향전환론에 사실이며, 문예운동에서도 프롤레타리아 예술동맹의 방향전환이 있었고 규약과 강령의 개정이 이루어진 것이 주지의 사실임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아직 방향전환 이론은 일부 수립 되었을망정 완전한 확립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이고, 더구나 작품으로 보면 그 수립의 단계에 이른 작품조차 발현할 수 없는 것이 오늘의 문단의 현실이라는 것이다. )조중곤은 이렇게 작품이 나오지 않는 이유를 작가적 수완의 문제보다는 검열제도에 더 큰 원인이 있는 것으로 파악한다. 여기서 그는 제1기 작품과 제2기 작품을 나누는 기준이 감격이나 열망 등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근저에 흐르는 근본의식 여하에 표준이 서는 것’임을 주장한다.)그러면 제 2기란 무엇이며 제 2기 작품이란 무엇인가?그것은 김군이 말한 ‘감격으로 가득한 소설’도 아니며 ‘인상’적으로 표현된 ‘눈물겨운 소설’도 아니다. 또한 ‘조선대중의 거짓없는 인생기록’이라고 제 2기 작품이 될 수 있느냐하면 그렇지도 않으면 ‘절망의 인생이 아니고 열망에 빛나는 인생의 여명’을 그렸더라도 제 2기 작품은 될 수 없는 것이다. 감격으로 가득차고 인상적으로 표현된 눈물겨운 소설이라도 좋지만 그렇지 않아도 좋으면, 조선대중의 거짓없는 인생기록도 좋긴 하지만은 일개인의 인생기록이라고 제 2기 작품이 되지 말라는 법이 없으며 절망의 인생이 아니고 열망에 빛나는 인생생활의 여명을 그렸다고 그것이 반드시 제 2기 작품이냐 하면 그렇지도 않다. 요컨대 그 근저에 흐르는 근본의식 여하에 그 표준이 서는 것이다.- 중략 -그러면 제 2기적 근본의식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물론 방향전환에 입각한 ××××[맑스주의]적 목적의식을 말하는 것이며, 아울러 조선의 제 2기란 민족××[운동]으로서의 ×××××[맑스주의적]목적의식을 운위(云謂)하는 것이다. 문예운동의 제 2기도 이 투쟁이 규범하는 목적의식적 문예운동을 지적하는 말이다. 따라서 ‘행방물명의 소설문학에서 행방선명의 소설문학으로 비약을 하였다’하더라도 그 행방불명이라는 것이 ××××[정치투쟁]적 현 단계의 방향전환기의 작품이 취해야 할 여러 가지 요소들을 구체적으로 나열 제시하고 있다.) 그 요소들에 비추어보아「낙동강」은 진정한 의미에서 사회변혁을 꾀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제 2기 작품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하였던 것이다. 김기진과 조중곤 사이의 논쟁에서 조중곤이 제시한 이 창작의 치침은 카프 소설가들에게 커다란 짐이 되었고, 작품 창작의 경색화와 대중성 상실의 결과를 가져오는 한 원인으로 작용하게 된 것이다.그리고 그의 창작지침은 작품의 주제와 내용을 정치투쟁으로만 한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지나치게 편협화되었고, 따라서 작가의 재량을 축소시킬 위험성을 안고 있다. 아울러 이러한 내용의 구체적 한정적 제시와는 달리 형식의 경우는, 단지 제 2기 형식이 존재한다는 말만을 하고 그것이 무엇인지에 관해서는 전혀 제시하지 못함으로써 그의 문학관의 한계를 드러낸다.2. 무산문예가의 창작적 태도 - 윤기정윤기정의 글 「무산문예가의 창작적 태도」는 문예운동과 정치운동의 관계를 강조한 글이다. 그는 무산계급운동이 방향전환을 함에 있어서, 정치는 정치로서의 특수 체계가 있고 문예는 문예로서의 특수 체계가 있다고 하는 이론을 다원주의적 태도라고 공격한다. 그는, 문예운동도 무산계급 운동과 함께 방향전환을 한 것이니 그 둘은 이원적 관계에 놓일 수 없고 동시에 정치적 진출을 할 수 밖에 없는 것임을 주장한다.나는 먼저 현단계를 구명하지 않으면 아니될 곳에 이르렀다. 조선의 무산계급운동은 자연생장기를 벗어나서 완전히 목적의식기에 도달하였다. 목적의식기에 도달하였다는 말은 조합주의적 경제투쟁에서 전무산계급적 정치투쟁으로 방향전환을 하였다는 의미이다. 다시말하면 국부적 투쟁이 전선적(全線的)투장으로 진출한 것이다. 그러면 현단계란 말은 방향전환기를 지나선 순전한 대중적 정치투쟁을 목표로 하고 투쟁하여 나아가는 과정이다.그런데 이 글은, 이보다 조금 앞선 시기에 발표된 조중곤의 「낙동강과 제2기 작품」과 그 성격이 매우 유사한 글이다. 우선 이 글이 창작의 원리와 세부원칙을 제시함으로써 위해 먼저, 현 단계에 배치되지 않은 작품은 어떠한 작품이며 프롤레타리아 생활의지에 의한 작품은 어떠한 작품인가를 구명하는데 그 요지는 다음과 같다. )현단계에 배치되지 않는 작품이란 물론 정치적 사실을 내용으로 한 작품을 지적해 말하는 것이다. 정치적 폭로로써 무산문예운동이 전 무산계급운동의 일익적 행동을 감행하는데 있다. - 중략 - 방향전환 후에 목적의식적 작품이란 정치투쟁의 요소를 구비해야만 현단계에 어그러지지 아니한 작품으로 볼 수 있다.이런 이유로 당면한 작품행동은 맑스주의적 인식하에 강제적으로라도 통일하지 아니하면 안된다. 현계단에 처하여 맑스주의적 방법론에 의하여 인식한다는 말은 당면의 정치적 투쟁목표를 향하고 작품행동을 한다는 말이다. 그 이유는 거듭 말하는 것 같지마는 무산계급운동이 정치투쟁에 총역량을 집중하고 투쟁하여 나가기 때문에 문예운동도 정치투쟁을 목표로 하고 방향전환을 거리낌없이 하게 된 것이다.- 중략-양대 계급이 대립해 있는 이원적인 현존사회에 있어서 프롤레타리아 생활의지란 어느 때까지 프로레타리아적으로 생활을 계속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자기 계급을 하루라도 더 속히 해방하겠다는데 이다. 이와 같은 의식이 현단계에 이르러 일층 농후하여졌고 일층 격렬하여진 이유도 프로레타리아 생활의지에 의한 계급적 요구가 필연적으로 전개되는데 있다. 다시 말하면 자연생장기를 지나서 목적의식기를 과정하는 무산계급의 생활의지란 현존사회를 근본적으로 부정하는데 있다. 아니다. 부정하는데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한걸음 더 나아가 전세계를 개조하고자 하는 데에 프롤레타리아적 생활의지가 집중되어있다. 개조를 전제로 한 행동이 현존사회에 있어서 프로레타리아 생활의지의 진정한 발로다. 발로라느니 보다 행동으로 필연이다. 이와 같이 변혁적 행동으로 집중되는 이유는 무산계급이 자기 계급을 해방하기 위한 당연한 생활의지이다.윤기정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자연발생기의 창작태도를 반성하고 목적의식기의 창작태도에 대한 새로운 제안을 시도한다. 자연발생기의 창작태도는 무기로 들어선 무산문예가들은 변혁적 의지에 의하여 작품행동을 하지 않으면 안되고, 변혁적 의지를 파악하려면 진정한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면 안된다. 자연발생기에는 비마르크스주의자라도 그가 계급적 반항의 사실을 쓰거나 무산자의 생활을 그리기만 하여도 프로작품으로 보아 왔으나, 여기에 근본적인 오해가 있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이런 까닭에 목적 의식기에는 마르크스주의작가가 아니면 절대로 프로작품을 쓸 수 없다는 것이다.그러면 마르크스주의자인 무산문예가는 창작에 임하면서 어떠한 태도를 가져야 할 것인가? 이때는, 현실을 해석하려는데 목적을 두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변혁할까 하는 태도를 가져야만 하고, 또한 작품 하나라도 어떻게 쓸까 하고 고심하는 것보다는 무엇을 써야만 계급해방에 도움이 될까 하는 변혁적 행동에 노력하는 태도를 가져야만 한다는 것이 그의 견해이다.나는 이 위에서 목적의식기에 처한 무산문예가의 창작적 태도는 어떠해야 한다는 것을 표명하였다. 그러나 투쟁목표가 정치적 행동에 있는 현단계에서는 어떠한 태도를 파악해야만 할 것인가?목적의식기를 논의할 때와 조금도 다를 것이 없다. 거듭말한다. 작품을 위한 작품을 쓰러고 하지 않는 태도와 어떻게 쓸까? 를 중대시하지 않고 어떠한 것을 쓸까? 하는 데에 전력을 하는 태도를 가져야만 한다. 프로레타리아에게 감상시키기 위하여 작품을 쓰지 말고 정치적 각성, 정치적 투쟁을 요소로 한 작품이 만들어져야 한다. 또한 무엇을 어떻게 써야 할까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어떻게 써야할까? 하는 것도 무엇을 더 좀 효과있게 표현하기 위한 태도이다. 새로운 형식과 새로운 기교도 어떠한 것을 쓰기 위하여 거기에 규범되지 않으면 안된다.현단계에 당면하여 무엇을 쓸까? 어떠한 것을 쓸까? 하는 것은 모두가 정치투쟁 범위내에서 취할 것이다. 그러면 우리앞에는 어떠한 것이 가로 놓여 있는가? 현단계에 처하여는 오직 해방문제가 있을 뿐이다.계속해서 그는 ‘무엇을 쓸까’를 위해 고민할 것을 제안하고 ‘어떻게 쓸까’는 예술적 요소의 차원에서 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