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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궁궐]궁궐 건축의 역사
    ■ 궁궐 건축의 역사궁궐은 고대국가로부터 근세 군주국가에 이르기까지 국가통치의 최고 주권자인 임금이 집무 및 생활을 하던 곳과 이에 부속되는 건물을 총칭한다.궁실(宮室), 궁전(宮殿), 대궐(大闕), 어궐(御闕) 등으로 불리기도 하는 궁궐은 시대의 변화에 따라 그 뜻을 약간씩 달리했다. 궁(宮)이란 말은 처음에는 비천한 사람이 사는 곳을 말했으나 중국 진한시대 이후는 천자(天子)나 제왕(帝王), 왕족(王族)들이 사는 큰 규모의 건축군, 즉 궁전을 의미했으며, 궐(闕)이란 말은 궁성의 좌우에 우뚝 솟아 주위를 감시하는 망대를 가리켰던 말로 궁궐은 이 두 단어가 합성된 말이다.궁궐 건축의 형성은 고대 국가의 성립과 깊은 관계가 있다. 우리 나라에서는 국가가 형성, 발전되고 왕권이 강화됨과 동시에 왕의 거처는 대개 성을 둘러 외부 세계와는 구별하였고 건물도 매우 장엄하게 만들어져 그 권위를 나타내고자 하였다. 따라서 궁궐은 신전이나 종교 건축과 더불어 위엄과 권위를 상징하고 규범과 격식을 갖춘 그 시대 최상의 건축이라 할 수 있다.■ 궁궐의 변천? 고려시대의 궁궐고려시대의 궁궐건축은 개성 만월대(滿月臺)에 남아 있는 궁궐 터의 초석과 석축 유구자료를 기초로 하여《고려도경(高麗圖經)》등의 문헌과 비교해 대략의 형식을 파악할 수 있다. 만월대 궁궐의 특징은 평지가 아닌 구릉지대에 건물을 배치한 점이며 궁궐의 중심이 되는 외전(外殿), 내전(內殿), 침전(寢殿) 등의 건물군이 남북의 동일 중심축에 배치되지 않은 점이다. 즉 회경전(會慶殿)을 중심으로 한 외전 일곽과 장화전(長和殿)을 중심으로 한 내전 일곽 및 장화전 뒤편의 침전 일곽이 지형에 맞추어 축을 달리하였고 , 후원의 조경도 괴석을 모아 선산을 만들고 물을 끌어들여 샘과 연못을 만들었으며 명화기수(名花奇樹)를 심어 매우 아름다운 정원을 만들었다고 한다. 특히《고려사(高麗史)》에 보면 의종은 왕궁 동쪽에 이궁(離宮)을 만들고 태평정(太平亭), 양화정(養和亭) 등 누정을 지었으며 양이정에는 청자기와를 덮었다고 기록되어 있어 그 당시 궁궐의 화려함을 짐작할 수 있다.? 조선시대의 궁궐 건축?한양 천도와 궁궐 건립1392년 태조 이성계에 의해 건국된 조선은 1394년에 도읍을 한양으로 옮겨 경복궁을 지으면서 서울시대를 열게 된다. 조선의 궁궐은 일부 훼손되긴 하였지만 아직까지 많은 부분이 남아 있어 당시의 모습을 확실히 살펴볼 수 있다. 조선의 궁궐은 그 기능에 따라 크게 정궁(正宮), 별궁(別宮), 그리고 행궁(行宮)의 3개로 나뉜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궁궐은 정궁인 경복궁(景福宮)과 일종의 별궁이었으나 실제로는 조선의 정궁 역할을 한 창덕궁(昌德宮), 그리고 임진왜란 때 임시로 궁궐의 역할을 담당하면서 광해군 때 정식 궁궐이 된 덕수궁(德壽宮), 광해군 때 지어진 별궁으로서 서궁(西宮)으로 불리운 경희궁(慶熙宮) 등 5개의 궁이 남아 있어 이를 조선의 5대궁으로 부른다. 이들 궁궐 이외에도 많은 궁궐이 있었으나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조선시대 궁궐 배치의 특징조선의 궁궐은 지세에 따라 약간씩 다른 모습을 보이지만 전체의 구성을 대부분 비슷한 배치방식을 따르고 있다. 궁궐의 밖은 담장을 둘렀으며 담장의 주위에는 문을 두어 출입하였고, 내부는 3문 3조(三門三朝)라는 중국 배치방식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이는 외문(外門)-외조(外朝)-중문(中門)-치조(治朝)-노문(路門)-연조(燕朝)로 이어지는 3개의 영역으로 구분하는 배치방식으로서 외조는 궁궐 안에 있던 관청이 자리하는 공간이고, 치조는 신하들의 조하(朝賀)를 받고 집무를 하던 공간으로 궁궐의 중심인 정전(正殿)이 이 곳에 자리한다. 정전은 주위를 회랑으로 둘러 권위성을 강조하였다. 연조는 임금의 침식과 휴식을 위한 공간으로 개인 생활공간이 된다. 이 영역에는 임금의 거처와 왕비, 왕대비의 침전이 자리하고, 그 옆으로 궁궐 안에서 필요한 제반시설과 관계자들이 생활하는 시설이 들어선다. 왕세자의 거처는 주로 동쪽에 자리하여 동궁이라 부른다. 특히 연조의 뒤는 휴식과 교육을 위해 후원을 두는데 후원의 조경방법은 우리 나라의 독특한 배치기법이라 할 수 있다.궁궐 내의 각 건물들의 주위는 담장으로 둘렀으며 배치는 직선을 주로 하였으나 정전을 중심으로 한 회랑 일곽과는 달리 지세에 따라 약간의 변화를 가하고 있다. 특히 후원은 전체배치와는 달리 자연의 지세를 그대로 따른 모습을 보인다.■경 복 궁경복궁은 태조 4년(1395)에 창겅된 조선왕조의 정궁이다. 경복궁은 왕자끼리의 골육상쟁이 벌어지는 등 창건 초기부터 말썽이 많았다. 경복궁은 임진왜란 당시 불타 없어지는 비운을 겪어야만 했다. 그 후 흥선대원군이 왕권 회복의 일환으로 정궁인 경복궁을 중건하여 아들 고종이 머물게 하였지만 , 고종 32년(1895년) 국모 명성왕후 민씨가 일본인들에게 시해 당하고 고종이 궁을 버리고 도망감으로써 왕궁으로 서는 비극적인 결말을 맺게 되었다.?근정전 : 1394년 창건된 경복궁의 정전으로 나라의 중요한 의식을 거행하고 외국 사신을 접견하던 곳이다. 임진왜란 때 불탄것을 1867년 고종 때 재건하였다.?광화문 : 경복궁의 정문으로 1395년에 지어짐. 6.25때 모두 불타 축대만 남아 있다가 1968년에 건립되었다.?사정전 : 경복궁내 임금이 정사를 살피는 편전으로 복잡다단한 백성들의생활을 깊이 생각하고 살펴 정치를 해야한다는 뜻에서 정도전이 붙인 이름이다.?경회루 : 외국 사신의 영접과 조정군신의 연회장소로 사용하기 위해 경복궁 창건 당시 축조하여 1412년 완공한 목조 누각이다.?자경전 : 고종 때 조대비 신정왕후가 거처하던 건물. 이 건물은 1874년 불탄 것을 1888년에 다시 지었다.?영제교 : 원래 근정문 앞에 있던 다리. 옛날에는 북악산에서 발원한 물줄기가 영제교 밑을 지나 청계천으로 흘렀다고 한다.?강녕전 : 왕의 침전이었던 곳이며,1395년 태조때 지어졌으며 1553년 불타 이듬해 중건하였으나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대원군때 다시 지었다.?교태전 : 왕비의 침전이다. 1592년 불에 탄 것을 1888년 재건. 1920년 일제에 의해 철거되어 창덕궁 대조전을 짓는 데 사용. 현재 건물은 1995년 다시 지음.?향원정 : 연못 중앙의 작은 섬에 올려진 향원정은 고종 4년, 건청궁을 축조할 때 함께 조성한 6각형의 2층 건물로 난방시설까지 갖춘정교한 구조를 하고 있다.■ 창 덕 궁창덕궁은 1405년 태종이 개성에서 다시 한양으로 돌아올 때 지은 궁궐이다. 한때 정궁인 경복궁 동쪽에 있다 하여 창경궁과 함께 동궐로 불려졌다. 이 궁은 임진왜란 때 불탄 경복궁이 대원군에 의해 중건 되기 전까지 약 270년 동안 조선 후기의 정궁이 된 궁이다. 1920년에야 다시 지어졌고 일제는 경복궁의 교태전, 강녕전, 함원전, 흠경각 등을 철거해 창덕궁 건물을 중건하면서 우리 고궁의 모습을 철저히 바꾸어 놓았다. 전각 배치를 보면 창덕궁은 곡선적이고 여성적인 구조를 갖고 있다.? 희정당 : 임금님의 침전이다. 1917년 화재에 의해 소실되었던 것을 1920년에 경복궁 강녕전을 헐어내고 옮겨다 재건하였다.? 돈화문 : 창덕궁의 정문으로, 임진왜란 때 불탔으나 1607년 선조 대 복구되어 현존하고 있는 궁궐의 대문 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 인정전 : 창덕궁의 정전인 인정전은 신하들의 조례식을 거행하고 외국 사신을 접견했던 곳. 지금 건물은 1803년 순조 때 불에 탄 것을 중건한 건물이다.? 낙선재 : 1847년 헌종 때 건립된 것으로 국상을 당한 왕후나 후궁들이 거처하던 곳이다.? 대조전 : 왕비의 침전. 예로부터 왕비의 침전은 왕 외에는 접근하기 힘들었다. 궁궐 대문에서 5개 이상 문을 통과해야 왕비의 침전에 이른다.? 연경당의 대문인 장락문(長樂門) : 문 앞에는 조그만 개천이 흐르고 소박한 돌다리가 놓여져 있다.세도정치에 밀려나 사실상 왕권을 내주고 이곳에서 양반옷을 입고 지냈던 순조의 한이 서려 있는 곳이기도 하다.? 연경당사랑채(演慶堂) : 궁궐 안에 있는 99칸짜리 사대부집이다. 1828년 순조의 명으로 지어진 이 집은 당시 사대부집의 모습을 고스란히 보존하고 있어 건축사나 민속학 연구에서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창 경 궁창경궁은 1418년 세종이 상왕으로 물러난 태종을 모시기 위하여 고려시대 남경의 이궁이 있었던 자리에다 작은 별궁을 짓고 수강궁이라고 이름하였다.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이름이다. 그러다가 성종 14년(1483)홀로 된 세조의 비인 정희왕후, 덕종의 비인 소혜왕후, 예종의 계비인 안순왕후 등 왕실의 모후들을 모시기 위해 그 자리에다 궁을 크게 세우고 창경궁이라 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때 전소된 것을 1616년 광해군때 복구 하였으며 이괄의 난, 병자호란등을 통해 화재를 당하였다. 또한 숙종때의 인현왕후와 장희빈, 영조때 뒤주에 갇혀 숨을 거둔 사도세자의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는곳이다. 일제에 의해 1909년 동물원과 식물원을 설치, 1911년 박물관 설치로 일반인들에게 개방하고 이름을 '창경원'이라고 고치고 격을 떨어 뜨렸다.1984년 궁의 복원 작업을 시작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홍화문 : 창경궁의 정문으로 1484년 성종 때 만들어 졌으나 임진왜란 때 불에 탔고 1616년 광해군 때 다시 만들어진 것이다.?옥천교 : 풍수사상에 의해 궁궐 에 들어갈 때는 정전의 정문과 궁궐대문 사이에 흐르는 명당수를 건너 들어가게 하였다. 15세기.?숭문당 : 제21대 영조는 친히 학생들을 접견하고 시험하였으며 때로는 주연을 베풀어 학생들을 격려하던 곳이라 한다.
    예체능| 2005.11.23| 5페이지| 1,000원| 조회(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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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평]나혜석 서평
    나혜석이란 여자에 대해서 여태까지의 생각은 그저 막연히 우리나라 최초로 이혼한 여자라는 생각밖에 없었다. 아직도 봉건제도의 틀이 강하게 자리 잡히던 시절 당당하게 이혼을 하고 당당하게 인생을 살아갔으리라는 생각에서 였다. 그 시기의 전혜린도 그랬으니깐. 하지만 ‘이혼고백서’와 ‘신생활에 들면서’를 읽으면서 다분히 나의 생각은 틀린 것임을 알았다.나혜석은 이혼을 원하지도 않았으며 이혼으로 인해 개인적으로는 우울한 생활을 하다가 결국 말년에는 행려병자로 삶을 마감한다. 하지만 나혜석은 그시기에 이미 페미니스트로써의 면모를 보였으며, 다른 여자들과 달리 주체적인 삶을 살려고 노력한 인물이다.나혜석은 어린 시절 동경유학으로 인해서 그 시기의 다른 여자들과는 좀 더 개방적이고 진취적인 사고를 가지게 되었다. 남편과 결혼을 할 때도 자신의 약혼자였던 ‘최승구’의 무덤에 비석을 만들어 달라는 실로 뻔뻔한 요구를 한다. 또한 시어머니와 전실의 자식들과는 떨어져 살 것 등을 요구한 것을 보면, 아무래도 현모양처의 모습은 아닌 듯 싶다. 결혼 한 이후에도 외교관의 부인으로써 구미만유를 하였지만 결국 최린과의 염문으로 그는 이혼을 하고 만다. 이혼을 하면서도 처음에는 이혼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방황하다가 결국 이혼을 수용하게 된다. 이혼을 수용하게 되는 과정에서도 그는 자신이 잘못했으므로 조용히 이혼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래도 자신의 권리를 떳떳하게 주장한다. 비록 그 권리를 찾지는 못하였으나, 그런 주장을 하는 것으로 봐서 그녀가 얼마나 당당한 여성인지를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그녀는 당당한 여성 못지않게 여류화가로써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였고, 또한 작가로써도 이름을 날렸다. 하지만 그런 그녀의 사회적 지위는 그녀의 개인적 불행으로 말미암아 더욱더 그녀를 벼랑 끝으로 몰아갔다이혼 후 쓴 ‘신생활에 들면서’를 읽다 보면 그녀의 처지가 얼마나 비참해 졌는지를 알 수 있다. ‘생활은 각국 대신으로 더불어 연회하던 극상 계급으로부터 남의 집 건넌방 구석에 굴러다니게 되고, 그 경제는 기차, 기선에서 1등 연극 활동사진에 특등석이던 것이 전당국 출입을 하게 되고, 그 건강은 쾌활 씩씩하던 것이 거의 마비까지 이르렀고, 그 정신은 초명하고 천재라던 것이 천치 바보가 되고 말았다’그녀가 이혼 후 이렇게 비참한 생활에 까지 빠지게 된 것은 그 당시의 우리나라의 이혼한 여자를 바라보는 시각 때문인 것 같다. 지금도 이혼한 여자라고 하면 색안경을 끼고 사람을 바라보는 세상인데 하물며 그 당시 이혼이라는 것이 먼 나라의 일이라고만 여겨지던 사람들에게는 얼마나 큰 충격으로 다가왔을까. 그 이혼의 사유라는 것 또한 여자의 부정에 의한 것임에 사람들은 나혜석을 손가락질 하고 욕했을 것이다. 과연 나혜석은 그렇게 비난 받을 짓을 한 것일까?나혜석은 당시의 여성들이 가지고 있던 정조 개념과는 다른 정조개념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이혼고백서’에서 최린과의 대화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녀는 최린을 사랑하기 때문에 지금의 남편에게 충실하겠다는 말을 한다. 이런 말은 지금 시대의 바람피우는 남자들에게서나 나올 법한 말인데, 나혜석에게 그런 말이 나왔다는 것에 매우 놀랐다. 이혼 후의 그녀의 모습도 이혼을 슬퍼 하긴 했어도 홀로 자립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그녀는 남자에게는 종속되지 않은 채 한 인간으로써 당당한 삶을 살아가려고 노력한 것이다. 한남자의 부인으로써 네아이의 어머니로써 모든 것을 빼앗긴것에 대해 분노하고 울부짖기 보다는 다시금 한 인간으로써 역경을 딛고 일어나려는 모습을 보여준 것이다. 시대가 그녀를 조금 더 이해하였더라면 나혜석의 삶은 어떻게 바뀌었을까 아마도 나혜석의 삶이 그토록 비참해지도록 내버려 두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혜석의 앞선 생각은 그 당시의 사람들의 반감을 가지기 충분했고, 결국 한인간으로써 주체적인 삶을 살아가려는 그녀의 노력은 제대로 피어보지도 못하고 말년을 쓸쓸 하게 보내도록 만들었다.
    독후감/창작| 2005.11.23| 2페이지| 1,000원| 조회(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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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와]창경궁의 청기와
    창경궁을 돌아다니면서 가장 인상 깊게 남은 것은 저 청기와였다. 비록 청기와가 있는 건물이 관람금지 구역이라서 멀리서나마 청기와를 볼 수 있었다. 문득 궁궐의 건물들이 다 기왓장을 사용하여 지붕을 만든 것을 보고 기와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다.1. 기와의 기원중국의 고서 광운의 고사고에 [하시곤오씨작와]라는 기록에 기와의 기원을 찾을 수 있다.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기와는 3000여년전 중국 주시대의 기와로 추정되고 서주 초기 당시의 도읍지로 추측되는 종주의 풍호와 주원 지역에서 발견되고 있다.초기에는 용마루, 내림마루와 같은 지붕의 특정 부분에만 사용되었다고 한다.2. 기와가 사용된 이유인류가 정착 생활을 시작하면서 집을 짓기 시작하였는데 이때 지붕을 이을만한 새로운 재료가 필요했을 것이다. 풀을 이용한 지붕은 내구성이 좋지 못하였고 화재에도 무방비였으므로 대체 재료로써 기와가 탄생하게 되었을 것이다. 기와는 건물의 내구성을 증가시키고 건물 자체경관을 아름답게 한다.기와의 사용은 부와 권력의 상징으로 인식되는 경우가 많았다. 과거에는 기와의 사용에 규제가 따랐으므로, 고대의 기와는 주로 국가적인 차원에서 제작되어 정형적인 모양을 하고 있다.2.고구려지리적으로 중국과 가깝고 접촉이 많았던 고구려는 백제나 신라 보다 먼저 기와 제작기술을 받아 들여 고구려에서 암.수키와, 반원막새, 수막새, 치미, 착고, 귀면기와 등이 제작되었다고 한다.고구려의 기와는 옛도읍지였던 집안과 평양의 궁궐과 절터,산성,고분등에서 많이 발견되고 있다.고구려 초기의 막새에는 명문수막새가 주류를 이루었는데 암.수키와에 글씨가 세겨져 있다.불교가 전래된 4세기 이후에는 연꽃무늬의 수막새가 널리 제작되었다.고구려의 수막새에는 구름, 연꽃, 보상화, 인동, 연화귀면 등의 무늬가 새겨져 있었는데 그 중 연꽃무늬의 사용이 가장 빈번하였다.초기의 연꽃무늬 수막새는 막새면을 6개에서 8개의 호로 나누어 연꽃잎을 배치하고 지방에 원형의 돌기를 넣은 단판 양식이 주류를 이루었다.6세기가 지나면서 보상화, 인동,귀면 등의 새로운 시문 단위가 사용되었고 연꽃무늬도 중판이나 세판 등이 나타나기 시작하였으며 초기에 막새면을 6내지8로 구획하고 있던 선들이 사라지고 대신 꽃잎모양의 사잇잎이 쓰였다.3.백제○한성도읍기( AD 4C~5C)서울의 강남일대가 당시 지배층의 중심지로 이지역의 몽촌토성, 풍납토성 그리고 석촌동4호분에서 백제기와가 약간 발견되었다.수키와는 대부분 언강을 낮게 만든 유단식 기와이며 암키와에는 문살무늬와 평행선 무늬등을 새겨 제작했다.수막새에 들어가는 무늬는 몽촌토성에서 출토된 능형문, 연꽃무늬와 석촌동4호분에서 출토된 원무늬가 있다.백제의 수막새 역시 막새면을 분할하는 선을 사용하였다.○웅진도읍기(AD 5C~AD 6C초)서혈사터, 대동사터, 봉황동 절터, 공산성 등지에서 이 시기에 제작된 기와가 출토되고 있다. 특히 백제의 왕궁터인 공산성은 많은 기와가 출토되었다. 수막새는 연꽃잎의 바깥부분이 올라오는 반전 수법을 썼다○사비도읍기(AD 6C초~AD 7C중엽)백제문화의 절정을 맞이한 시기로 도성과 그 주변에 많은 사원과 산성이 건립되면서 기와의 제작도 본격화되었다.암·수키와를 비롯해서 수막새, 서꺼래기와, 마루기와 등이 함께 제작되었다.수키와는 유단식과 토시모양의 무단식이 함께 제작되었으며 가끔 암.수키와의 표면에 인명을 새겨넣은 기와가 발견되었다.수막새에는 거의 연꽃무늬가 새겨졌으며 연꽃잎의 반전 수법이나 자방의 형태를 변화시키는 등이 나타난다.연꽃무늬의 경우 꽃잎은 8장이며 꽃잎속에 자엽이 거의 장식되지 않는 단판양식이 태반이었다.7세기 이후 파무늬, 민무늬 등의 새로운 시문단위가 나타나고 연꽃잎 안에 꽃술과 인동이 장식된 유문단판형의 장식성이 높은 수막새가 제작되었고 단판양식과 함께 중판이나 복판이라는 새로운 양식도 나타났다. 백제의 수막새는 색상에 있어서 연화색을 띄고 연꽃잎이 반전되면서 전체적으로 단아함을 준다는 것이다.이런 백제의 막새는 고신라와 일본 아스카 문화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4.신라○기와의 전래신라에 기와가 전래된 시기는 [삼국사기]의 기록으로 보아 AD2,3세기경에 궁성건축을 위해 기와가 쓰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경주의 반월성과, 명활산성, 인왕동고분에서 5세기경의 기와가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 불교가 전래되기 이전에 벌써 기와가 사용되어 온 것으로 추정된다.불교가 공인된 후 6세기후반에 이르러 황룡사, 홍륜사 등의 대형 사원을 건축하면서 연꽃무늬 수막새가 사용되었고 백제와 고구려의 제작 기술을 도입, 이를 융합하였다.독자적인 기와제작의 시발점을 마련하였다.○신라기와의 발전신라기와는 통일이전의 신라와 통일신라로 구분되어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신라에는 기본기와와 마루기와가 제작되었고 수키와는 무단식과 유단식이 함께 제작되었으나 대부분이 유단식이었다.신라의 독자적인 막새형은 6세기 후반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다.7세기에 접어들면서부터 신라는 과거 백제계라는 계통성을 극복하고 자신들의 독특한 양식에 백제적인 요소를 가미하게 된다.신라의 독자적인 막새형은 6개에서 8개의 연꽃잎을 두고 꽃잎 안에 능선을 새기고 잎의 끝을 둥글게 처리하고 있다. 경주 황룡사터에서 출토된 6세기 후반의 수막새는 고구려와 백제의 기와 제작 기술을 수용한 다음에 제작된 것이다.수막새에는 연꽃이외에 원권과 귀면 인면 등이 장식되었으나 그 예는 적다.그밖에 신라시대에는 치미와 사래기와 소형막새가 소수 제작되었다.5.통일신라통일신라시대는 우리나라 기와역사상 최고의 시기로 삼국시대 거의 제작되지 않았던 암막새와 전돌 등이 새로 출현하였다.시문 단위도 전대(前代)에 유행된 연꽃무늬에 한정되지 않고 보상화무늬와 당초무늬, 금수무늬 등이 다양하게 사용되었다.통일신라의 기와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실시된 국가적인 조영사업으로 대량 생산되었다.통일신라의 기와는 그 도읍지인 경주를 비롯하여 9주 5소경이 위치한 각 지역에서 출토되고 있다.경주에서는 안압지, 남산성, 사천왕사, 망덕사 등의 여러 건물터에서 가장 많이 출토하고 있다,특히 안압지에서는 2만여점의 기와가 출토되어 통일신라의 기와 연구에 많은 진전을 보게 되었다.○통일신라의 막세형통일신라의 수막새는 과거에 성행했던 연꽃무늬가 중요한 시문 단위로 계승되고 있으나 문화적 융화를 가져와 신 막새형 (서기 680년을 경계로 단순 소박한 삼국기의 고식단판에서 꽃잎 안에 자엽이 장식되고 주연부에 주문이나 작은 꽃잎이 가미)으로 바뀌게 되었다.통일신라의 막새형으로 가장 대표되고 있는 것은 막새면에 연꽃잎을 이중으로 중첩시키고 있는 중판 양식이라고 할 수 있다.단판양식은 통일신라시대에는 연꽃잎 안에 인동이나 작은 꽃잎의 자엽이 새겨져 더욱 장식화하게 된다. 복판 양식은 연꽃잎의 중앙에 새겨진 능선이나 능각에 의하여 연꽃잎이 양분된 상태에서 각각 동일한 두 개의 자엽을 배치하고 있다.복판 양식은 자엽의 형태에 따라 꽃술자엽형, 꽃잎자엽형, 인동무늬자엽형으로 세분된다.세판 양식은 연꽃잎의 길이가 길고 그 폭이 매우 좁아 세장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데 연꽃잎의 개수가 10엽 이상으로 분화 된 것이다.중판 양식은 두 연꽃잎이 종방향으로 겹쳐져 얹혀지거나 서로 엇갈리면서 이중으로 중첩되고 있는 것으로 내측과 외측의 꽃잎 모양에 따라 단단엽형, 단복엽형,복단엽형, 복복엽형, 단중엽형 등으로 세분된다.이와 같은 중판 양식은 통일신라 중기에 이르러 가장 성행한 독자적인 양식으로 간주되고 있는데 단판 및 복판,세판 등의 여러 양식들이 모두 흡수되어 막새면의 내외측에 각각 시문되면서 다양하게 변화 하였다.○수막새의 문양수막새 문양으로 연꽃 이외 보상화, 당초, 초화 등이 있으며 서조, 기린, 사자, 귀면 등 길상과 벽사를 상징하는 금수무늬가 있다.보상화무늬는 쌍록보상화무늬 전돌의 출현에 자극되어 통일신라 직후부터 주요한 시문 단위로 사용되고있다.서조는 가릉빈가와 봉황새 등인데 단조형과 쌍조형으로 구분되고 있다.가릉빈가는 극락 정토에 살고 있다는 상상의 새로서 그 모습이 인변조신상으로 구현되고 있는데, 단조형으로 연꽃무늬나 구름무늬와 함께 장식된다.봉황새는 대부분 쌍조형으로 새겨지고 있는데 좌우 동형의 봉황이 꽃가지와 수목을 중심으로 부리를 맞댄 채 조식되고 있다.사자무늬는 입상과 좌상으로 구분되는데 입상의 경우는 날개를 부착하고 있다.○암막새의 생산암막새는 통일신라 직후부터 쌍록보상화무늬 전돌과 동시에 제작되어 사용되었다.안압지 주변에 조영된 동궁터와 사천왕사터에서 출토된 무악식의 당초무늬 암막새가 가장 먼저 제작된 것이다. 암막새는 그 턱면의 형태에 따라 무악식과 유악식으로 구분된다통일신라 직후에 제작된 암막새에는 덩굴과 같은 단순한 당초무늬가 새겨졌으나 점차 보상화, 인동, 포도 등과 조합되어 보상화당초무늬, 인동당초무늬, 포도당초무늬등으로 변화하여 장식적인 특성을 발휘하고 있다○다양한 기와 생산.통일신라시대에는 암,수키와와 막새 이외에 소형막새, 타원막새, 모서리기와 등의 이형 막새류와 서까래기와 그리고 다양한 마루기와 등이 제작되었다.타원막새는 회첨골에 사용되는 것으로 연꽃,기린, 보상화 등이 장식되고 있는데 당시의 수막새에 장식된 것과 거의 비슷하다.서까래기와는 연목기와와 부연기와 귀면이 장식된 사래기와가 약간씩 출토되고 있다.귀면무늬 사래기와는 마루용인 귀면기와와 생김새가 거의 닮았고 주연부와 측면에 새겨진 무늬도 비슷하다.6.고려○고려기와의 특징고려 초기에는 통일신라의 전통과 고구려적인 요소를 지닌 막새형을 계승하여 화려하고 세련된 기와를 생산하였으나 중기 이후부터는 취두나 용두와 같은 새로운 기와가 출현하게 되며 막새의 시문 단위도 연꽃무늬나 당초무늬에서 벗어나 귀목무늬의 일색으로 변화하게 된다, 그리고 후기에 이르러서는 범자가 막새에 새겨지게 되며 암막새의 드림새가 장방형에서 밑으로 늘어져 커지게 된다.고려의 기와는 도읍지인 개성을 비롯하여 서경, 동경 등의 삼경이 위치한 평양과 경주 그리고 전국 각지의 절터에서 많은 수량이 출토되고 있다.
    예체능| 2005.11.23| 6페이지| 1,500원| 조회(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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